이글은 미스터리 하우스에 실린 글로 저자는 '노원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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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리소설은 이렇게 써라 - 추리소설의 십계
노 원 (한국추리작가협회 고문)
내가 추리소설을 시작(試作)하면서 당면했던 어려움 중에서 가장 어려웠던 점을 들라면 다음 세 가지를 들 수가 있을 것이다.
첫째가 트릭이 거의 발굴되어 이미 멸종 상태에 빠져 있다는 사실이었다. 내 딴엔 기발한 트릭을 생각해 내고는 무릎을 치는 경우가 간혹 있었는데 그 트릭은 이미 오래 전에 애거서 크리스티를 비롯한 유명 작가들에 의해 사용된 트릭이었다. 그때의 실망은 이 일에 손을 대 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것이다. 추리작가는 누구나 자신이 생각해 낸 트릭의 오리지널리티에 대한 불안을 지니게 마련인데 그것은 가히 공포에 가까운 것이기도 하다.
둘째는 추리소설의 독자가 강력한 라이벌이라는 것이다.
독자가 작가보다 훨씬 명민(明敏)한 존재라는 점이 추리소설의 어려운 점인데(R.L.스티븐슨), 그들은 모든 종류의 탐정의 뒤를 좇은 경험이 있으며, 그들은 인간을 죽일 수 있는 모든 종류의 방법에 통달해 있으며, 누구보다도 살인관계 법률을 잘 알고 있는 것이다(필립 스턴). 추리작가의 저명한 라이벌을 들라면 끝이 없을 것이다. 앙드레 지드에 버틀랜드 러셀에 그리고 윌슨 대통령… 추리작가는 일반 대중을 의식하기보다는 하이브라우한 미스터리 팬을 의식하기 마련이다.
셋째로 작가는 추리소설의 엄격한 룰에 따라 독자와 페어플레이를 해야 한다는 점이다.
추리소설을 쓰는 데 있어서는 극히 명확한 룰이 존재하는데 고결하다고 자타가 인정하는 작가들은 이 룰에 따라 왔으며(반 다인), 이를 위반한 작가는 단지 심미안이 결핍되어 있다는 비난을 받을 뿐만 아니라 반칙을 범했다는 이유로 심판관에게 퇴장 명령을 받게 되며(로널드 녹스), 노한 독자는 그의 비리를 내버려 두지 않는다(더글러스 톰슨).
추리소설의 룰에 대해서 수많은 사람이 수없이 역설해 왔는데(로널드 녹스의 추리소설 10계, 리처드 헐의 추리소설과 그 10칙, 반 다인의 추리소설 작법 20칙, 딕슨 카의 황금의 4대 공리(公理), 로렌스 트리트의 본격 미스터리의 네 개의 룰 등) 그들의 주장을 읽어 보면 얼마나 지키기 어려운 것인지 독자들도 동정을 금치 못할 것이다. 한 가지 다행스러운 것은 이 룰을 깨뜨려 온 작가군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룰을 아는 것은 깨뜨리는 시초’라는 격언도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명확하게 하고 싶은 것은 룰의 무지(無知)로 룰을 위반하는 행위와 룰의 숙지(熟知)로 이를 극복하는 행위와는 전혀 다른 이야기라는 점이다.
아무튼 그들이 주장하는 룰을 한 번 살펴보기로 하자. 그들의 주장을 내 나름대로 로널드 녹스의 예에 따라 10가지 계율로 정리해 보았다.
1.
범인은 범죄 드라마의 제1막에 등장하여야 하며, 그는 주역의 한 사람이어야 한다. 그리고 그는 전혀 예측할 수 없었던 의외의 인물이어야 한다(로널드 녹스, 더글러스 톰슨, 필립 스턴, 서덜랜드 스콧, 반 다인, 드 퀸시, 필립 굿하트, 딕슨 카, 로렌스 트리트).
1. 범인은 제1막을 전후해서 등장하여야 한다. 사건의 중반이나 종반에 이르러 갑자기 수상스러운 인물을 등장시키는 수법은, 더구나 그 인물의 수상스러운 점에 대해 사전에 아무 언급도 없이 이 사람이 바로 범인이다 하는 식의 설정은 불성실한 행위로 지목되며 일종의 기만행위로 지목되고 있다.
2. 탐정의 적수인 범인은 대단히 비중이 높은 인물이어야 하며, 결코 보잘것없는 비천하고 낮은 지위의 인색한 악당이어서는 안 된다.
탐정의 적수는 악마적인 현명함을 지니고 특출하게 뛰어난 지능을 가진 인물이어야 한다. 그것은 그 어느 스포츠 중에서도 가장 전율적인 스포츠라고 할 수 있는 인간 사냥은 그 표적이 추적할 가치가 있을 때만이 드라마틱한 색채를 띠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독자의 눈에 띄지 않는 단역과도 같은 뚜렷하지 않은 인물이 범인으로 등장하게 되면 독자는 일시에 즐거움을 상실하게 되어 분개할 권리를 갖게 된다. 범인이 정신이상자라는 것도 공정치 못한 처사이다.
현대의 매력적인 범죄자로는 미술품 수집가, 음악가, 과학자(더글러스 톰슨)에 교회의 중진(重鎭)이나 자선가로 알려진 미혼 부인(반 다인)에, 사회주의 각료(마이클 길버트) 등이 예시되고 있다.
이든 필포츠는 [붉은 머리의 레드메인가]와 [어둠으로부터의 목소리]에서 가장 현란한 악인의 초상(肖像)을 창조했으며, 코난 도일은 [셜록 홈즈의 최후의 사건]에서 일말의 광기를 지닌 악마적 천재 범죄자 모리어티 교수를 창조했다.
그러나 범인에게 텔레파시, 마술에 의한 살인 따위의 초자연적인 신비스러운 초능력을 부여해서는 안 된다. 인간의 책략이나 음모에는 어떤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E.M.롱과 프리먼 크로프츠는 모리어티 교수적인 테마에 대해 비판적이다).
3. 범죄가 몇 번 행해지는 것과 관계없이 비극적 혼란의 배후에 있는 범인은 한 사람이어야 한다. 물론 범인의 원조자나 공범자가 존재하는 것은 상관없으나, 범행의 전 책임을 지는 사람은 한 사람이어야 한다. 즉, 독자의 의분을 모두 한 사람의 흉악범에 집중시켜야 한다. 또한 주역의 그림자를 희미하게 하는 처사는 바람직한 일이 되지 못한다.
4. 범인은 직업적 범죄인이거나 살인 허가 번호를 지닌 조직의 일원이어서는 안 된다. 강도나 절도범에 의한 범죄는 경찰서의 관할이지 추리작가의 관할은 아니다. 또한 직업적인 살인자라고 할 수 있는 마피아의 일원은 갱 소설의 관할이며, 살인 허가 번호를 지닌 공작원은 스파이 소설의 관할이다. 따라서 추리소설의 범인은 그 범죄에 처음으로 범죄 행위를 하는 인물이 등장하여야 한다(이것은 물론 추리소설을 가장 협의(狹義)로 해석하는 사람들의 견해이다).
5. 사회 통념상 법과 양심의 편에 서 있는 사람을 범인으로 제사 지내서는 안 된다. 알고 보니 법관, 검찰관, 경찰관 그리고 탐정이 범인이었다는 결말은 일종의 기만행위로 지목되고 있다. 왜냐 하면 그들은 법의 심판관이요 집행관으로 믿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많은 유명 작가에 의해 이들을 범인으로 제사 지낸 사례가 있었는데, 범인의 의외성이라는 점에서는 놀라운 착상이긴 하나 공정치 못한 방법으로 인정되고 있다.
지금까지 범인으로 제단에 바쳐지지 않은 유일한 인물은 성직자일 것이다.
6. 범인은 의외의 인물이어야 한다. 추리소설의 기본적인 조건의 하나가 범인의 의외성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에 범인은 가장 의외의 인물이어야 한다. 따라서 작가는 최후의 순간까지 범인을 비호하는 일에 전력을 다하지 않으면 안 된다. 추리소설의 성패는 오로지 범인의 의외성에 좌우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7. 독자의 공감이 법과 질서의 편에 서 있는 한 범인은 최종적으로 그 범죄의 대가로 형이 집행되는 것이 예견되어야 한다. 일반적으로 사형 집행 장면까지 묘사하는 소설은 극히 드물며 스스로 죽음의 형식을 선택시켜 훌륭한 신사답게 죽게끔 하고 있는데 수갑이 채워지는 소리가 나자 금세 청산의 냄새가 코를 찌르는 줄거리를 즐기는 편이다(악마적인 환상의 소유자로 알려진 까뜨리느 아를레 여사나, 공포의 시인으로 알려진 패트리셔 하이스미스 여사는 권선징악(勸善懲惡)적인 추리소설의 전형과 관습에 도전하고 있다).
8. 쌍둥이나 범인과 모습이 흡사한 인물을 범인으로 제사 지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이미 너무나 진부한 착상이기 때문이다.
9. 범인의 제물, 즉 피해자는 도덕적으로 흠을 잡을 데 없는 인물이어야 하며 따라서 악당이어서는 안 된다. 그래야 비로소 독자의 근본적인 정념(情念) - 복수의 분노의 원동력 - 을 자극하여 정의가 행하여질 것을 열망하도록 충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피해자를 이름난 악당으로 등장시키면 범인에게 훌륭한 구실을 줄 뿐이며, 그 범인을 밤새 침대 속에 파묻어 응징할 이유가 없어지게 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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