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거슬러 간 나비 - 데뷔 30주년 기념 초기단편집
듀나 지음, 이지선 북디자이너 / 읻다 / 2024년 2월
평점 :
품절


책의 물성만으로도 기쁘기는 정말 오랜만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새벽과 음악 말들의 흐름 10
이제니 지음 / 시간의흐름 / 2024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가방에 이제니 시인의 시집과 산문집과 수첩과 만년필을 챙겨 집을 나섰다. 아이를 어린이집에 데려다 주고 버스를 탔다. 도망치듯 도달한 카페는 작고 포근하고 훌륭한 모서리 자리를 가졌다. 나를 위해 준비된 자리에 앉았다. 동그란 테이블과 의자 두 개, 어느 의자에 앉든 벽과 마주보아야 하는 모서리는 편안하게 고일 수 있는 완벽한 장소였다. 그곳에서 고여 있던 두 시간에 대해 뭔가 써 보려 노력한다. 뭔가 쓰려 애쓴 시간, 창밖의 풍경을 감상하듯 책을 펼쳐 읽은 순간, 칼바람에 베인 두 발의 감각이 돌아오고 흐릿하던 마음이 커피로 또렷해지고 어둠밖에 보이지 않던 눈 앞에 빛이 스치던 기억에 대하여. 지금 내가 쓰는 글은 그때의 시간을 정확하게 되살릴 수 없고 그렇게 우리는 조금씩 죽어가며 살아간다. 죽음에 대해 너무 많이 생각하느라 여유가 없던 새벽에 우연히 가닿은 음악과 같은 책에 대하여, 나는 설명하려 노력하고 실패한다. 이 글은 이 책에 대해 완벽하게 설명하는 데 실패했고 그래서 마음에 든다.



-23쪽, 어떤 음악은 눈물처럼 쏟아진다. 군더더기가 될 것이 뻔한 수사를 허락하지 않는다. 불과 몇 줄 읽어 내려가는 것만으로 압도당하는 기분을 느끼게 하는 책처럼. 그러나 문자가 전하는 것과는 또 다른 물성으로. 이 추상적인 물성에 대해, 언어화될 수 없는 아름다움에 대해 늘 명확한 언어로 쓰고 싶었다. 그러나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는 일은 매번 실패로 귀결된다. 당신의 마음속에서 흐르고 있는 음악은 무엇입니까. 나는 내 마음속에서 배음으로 흐르는 음과 색을 언어로 드러내 보여주는 것을 나의 소명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자음 하나 모음 하나를 조합해나가면서 이 티끌의 시간을 모아 음과 색에 언어를 덧입히는 것은 언제나 늘 뒤늦고 허망한 일처럼 여겨질 뿐이었다. 말해질 수 없는 자리에서부터 시작되는 무엇을, 그럼에도 끝끝내 써나가는 일이란 무엇일까.

새벽과 음악, 이제니, 시간의흐름


-54쪽, 어둠으로 기우는 마음을 전적으로 다 믿지 말고, 그 감정의 결을 보다 세심하고 다정하게 들여다보면서, 어두운 감정에 속지 않겠다고 말할 수 있다면. 그것들에 대해 좀 더 섬세하고도 고유한 방식으로 자신만의 언어로 이름 붙일 수 있다면.

새벽과 음악, 이제니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새벽과 음악 말들의 흐름 10
이제니 지음 / 시간의흐름 / 2024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글렌 굴드의 <골드베르크 변주곡>과 요한 요한슨의 <오르페>를 들으며 천천히 읽는 새벽의 독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요가
에마뉘엘 카레르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23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429쪽, 영화 혹은 예술이 그들의 상상과 덜 비슷할수록, 출발점과 도달점 사이의 길이 더 길고 변덕스러울수록, 결과가 그들을 더 놀라게 할수록, 더 만족한다. 중요한 것은 여행이지 목적지가 아니다. 초기암 트룽파의 표현을 빌리자면 '길이 곧 목적'인 것이다. 요가에 대한 기분 좋으면서도 세련된 책을 쓰겠다는 내 애초의 계획과 벨일의 호텔방에서 내가 타이핑 연습을 구실 삼아 짜 맞추기 시작한 것 사이에는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일들, 끔찍하기까지 한 일들이 많이 일어났다. 그리고 또 6개월이 지났고, 책은 완성되었다.


에마뉘엘 카레르, 요가, 열린책들


이것은 요가에 대한 책이다. 요가-명상에 대한 수십 가지의 정의가 등장한다. '나'는 요가를 한다. 몇십 년 동안 요가와 태극권과 각종 명상법을 섭렵하고 오랜 기간 수련해 온 숙련자다.


이것은 요가에 대한 책이 아닐 수도 있다. 프랑스 '샤를리 에브도' 테러 사건, 양극성 장애로 인한 정신병원 입원, 그리스 섬에서 만난 시리아 난민 아이들에게 글쓰기 가르치기, 여자들, 요가와 무슨 상관이 있는지 알 수 없는 사건들이 '나'를 고통스럽게 하고, 라울 뒤피의 그림으로 형상화된 지옥 밑바닥으로 '나'를 등떠민다.


'나'는 작가 에마뉘엘 카레르 본인이다.


에마뉘엘 카레르의 독특한 글쓰기 방식에 흥미를 느껴 몇 권의 책을 읽었다. 소설이고 소설이 아니기도 한 매력적인 책들. [나 아닌 다른 삶]과 [왕국], [리모노프]와 [러시아 소설]은 읽는 중이다. 모두 작가가 등장하여 내가 겪은 사건, 느낌, 감정, 생각을 관찰하고 탐구하여 솔직하게 밝힌다. 소설이 허구의 이야기라면 그의 책은 소설이 아니라고 볼 수 있다. 소설은 진실을 형상화하는 이야기라면 이건 소설이 맞다.


-215쪽, 나는 문학에 대해, 그러니까 내가 실행하는 문학에 대해 하나의 확신이, 오직 하나의 확신이 있으니, 이곳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 장소라는 것이다.


에마뉘엘 카레르, 요가


이 소설, 혹은 문학, 한 권의 책을 즐기는 방법은 과정을 따라가는 것이다. 세련된 요가에 대한 책을 쓰기 위해 시작된 야심 가득한 프로젝트가 어떤 풍랑을 만나 파도에 휩쓸려 온갖 고생스러운 모험 끝에 닿게 된 미지의 섬이 어떤 모습인지 여정 전체를 감상해 보기. 지옥의 밑바닥에서 어떤 깨달음을 얻어 죽지 않게 되는지 끝까지 함께하기. 결국 한 권의 책이 완성되는 과정을 지켜보기.


어쩌면 요가로 대표되는 명상 수행 역시 명상을 통해 어떤 인간으로 바뀔지 기대하기보다 요가의 과정 자체가 중요하다고, 우리의 삶이 살아가는 과정이 삶의 끝보다 훨씬 중요하듯이, 우리는 계속해서 죽지 않고, 죽지 않는 과정 자체가 삶이고, 삶이 나 자신이다.


이것은 요가에 관한 책이 맞다.


-447쪽, 우리는 계속해서 죽지 않는다. 그럴 수 있을 때까지는 말이다. 우리는 계속 죽지 않지만, 마음은 이미 여기에 없다. 우리는 더 이상 믿지 않는다. 자신의 신용 한도를 다 써버렸고 더 이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리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어느 날 무언가가 일어난다.


에마뉘엘 카레르, 요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재능 있는 리플리 리플리 5부작 1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지음, 김미정 옮김 / 을유문화사 / 2023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트랑으로 떠난 가족 여행에서 책을 많이 챙기지 않았다. 얇고 가벼운 전자책 리더가 하나를 챙겼다. 밀리의 서재 앱에 을유문화사에서 최근 재출간한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리플리 5부작'이 있어 미리 다운받아 두었다. 리플리 증후군으로 익숙한 리플리라는 캐릭터가 궁금했다. 시리즈 첫 권인 [재능 있는 리플리]를 읽기 시작했다.


호텔 침대에서, 수영장 썬배드에서, 책을 쉽게 내려놓기 어려웠다. 사기꾼이자 두 명이나 죽인 살인자 이야기가 이렇게 재미있어도 되는지 되물으며 끝까지 읽었다. 어느새 톰 리플리를 응원하는 나 자신이 웃겼다. 그만큼 리플리라는 전무후무한 캐릭터를 창조한 하이스미스의 필력이 어마어마하다는 뜻이지만.


허구의 세계를 진실이라 믿고 거짓된 말과 행동을 상습적으로 하는 리플리 증후군이 이 소설에서 유래했지만, 사실 과학적으로 인정받는 증상은 아니라 한다. 심지어 원작의 리플리는 허구의 세계를 진실이라 믿는 몽상가가 아니다. 그는 분명히 자기 자신을 확실하게 인지한다.


리플리는 리플리 증후군에 속하지 않는다. 물론 그는 뛰어난 연기자이자 타인의 필체나 목소리 흉내에 능하여 이를 통해 여러 사기 행각을 벌인다. 가장 큰 사건은 부유한 집안 아들인 디키를 살해한 뒤 디키 흉내를 내며 그의 돈을 갈취한 행위다. 디키를 연기하며 디키의 서명을 위조해 수표를 현금으로 받아 펑펑 쓰며 유럽 여행을 즐기는 리플리는 자신이 톰 리플리임을 한시도 잊지 않는다.


그는 물건을 소유하는 게 좋았다. 잔뜩 소유해서 좋은 게 아니라, 엄선해서 고른 몇 가지를 쭉 쓴다는 게 좋았다. 그런 물건들이 그의 자존심을 채워 주었다. 과시할 수 있어서가 아니라 엄선된 물건의 품질이, 그리고 그 품질을 고이 간직하려는 애정이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해 주었다. 덕분에 톰은 자기 존재를 즐기게 되었다. 이렇게 간단할 수가. 그렇다면 자기 존재를 즐긴다는 게 뭔가 가치 있는 일 아닐까? 톰이라는 존재는 존재했다. 돈이 아무리 많아도 자기 존재를 즐길 줄 아는 이는 세상에 그리 많지 않았다. 돈만 많다고 가능한 일이 아니라, 확실한 담보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자기 존재를 즐기는 길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재능 있는 리플리



톰 리플리가 그저 그런 사기꾼이자 파렴치한 살인자를 넘어 그 이상의 매력을 느끼게 하는 캐릭터인 이유가 '존재를 즐길 줄 아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가난한 미국 하류 인생을 전전하던 이가 우연과 살인과 사건을 겪고 돈을 얻게 되자 세련된 미적 감각을 돋보이며 지금 봐도 더 없이 알찬 유럽 여행을 누린다. 리플리는 리플리 본인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 말대로 그건 돈의 문제가 아니다.


물론 나는 리플리의 범죄 행각을 절대 옹호하지 않는다. 그가 법적으로든 사적으로든 처벌을 받았으면 좋겠다. 한편으론 소설을 읽으면서 그가 어떻게 위기를 벗어나는지 궁금하고 따라가게 된다. 그를 옹호하거나 응원하지는 않겠다. 리플리라는 캐릭터를 '즐길'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