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가 자살시킨 자, 반 고흐 텍스투라
앙토냉 아르토 지음, 이진이 옮김 / 읻다 / 2023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제목부터 깜짝 놀라게 만드는 책이다. 자살'시키다'가 성립 가능한 표현인가? 서문은 더 놀랍다. '우리는 반 고흐의 정신적 건강함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다. 그는 평생 동안 제 손 한쪽을 지졌을 뿐이고, 그것 말고는 딱 한 번 자신의 왼쪽 귀를 잘랐을 따음이다.(37쪽)' 반 고흐는 천재일 뿐, 미친 것이 아니라고, 미친 건 그가 미쳤다고 이름붙인 이 세상이라고 단호하게 선언하는 앙토냉 아르토의 목소리는 끝까지 단호하다. 단호한 목소리는 칼날처럼 날카롭게 세상을 베어 낸다.

-42쪽, 그런데 진정한 광인이란 무엇일까요?

진정한 광인이란 인간의 영예라는 지고의 개념을 더럽힐 바에야 기꺼이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의미에서 미치광이가 되는 편을 택한 사람입니다.

그리하여 어떤 엄청난 더러움을 저지르는 데 사회와 공범이 되기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사회는 떼어내고 물리치고 싶었던 모든 이들을 정신병원 안에서 목 졸랐던 것입니다.

사회가 자살시킨 자, 반 고흐-앙토냉 아르토

광기의 재해석 과정을 통해 작가는 반 고흐의 그림을 새로운 시각으로 해석한다. 그가 그린 그림의 순수함, 그가 지키고자 했던 것, 밀짚모자에 초를 끼워 별이 빛나는 밤을 그려냈던 천재의 집중력...을 우리는 알고 있다. 알면서 그가 미쳤기에 그런 그림을 그렸다고 생각한다. 하물며 반 고흐 생전에 그의 그림이 세상에 어떻게 받아들여졌을지도 우리는 안다.

반 고흐의 그림은 붓으로 세상을 때리고, 그림을 보는 사람을 때린다. 격한 타격이 쉬지 않고 이어진다. '그런데, 반 고흐는 그의 결정적 타격으로, 그야말로 둔기의 타격으로 자연과 사물의 모든 형태를 쉼 없이 두드린다.(47쪽)'그런 그를 말하는 앙토냉 아르토의 글 역시 읽는 사람을 때린다. 짧은 책 속에서 터져나오는 감정들이 어찌나 강렬한지 책을 읽고 난 뒤 피곤을 느낄 정도였다.

-79쪽, 여기 이 세상을 위해서가 아닌 것이다,

결코 여기 이 지상을 위해서가 아닌 것이다, 우리 모두가 으레 일하고,

싸우고,

두려움에, 배고픔에, 비참함에, 미움에, 추문에, 역겨움에 울부짖었던 것은,

단지 여기 이 세상의 마력에 흘린 것임에도,

우리 모두가 그 독성에 잠식되어 버린 것은,

그리고 결국 우리가 자살당하게 된 것은,

그도 그럴 것이, 우리는 모두 바로 이 가엾은 반 고흐처럼, 사회에 의해 자살당한 자들이지 않은가!

그림을 그리면서 삶과 싸운 천재, 그림 그 자체만 가지고 싸운 진정한 화가, 삶에서 신화를 끌어낸 진정한 천재 화가, 그가 가진 파괴력이 두려워 사회가 침묵시킨 자 반 고흐.

그리고 그런 반 고흐를 이야기하는 파격적인 아르토의 글은 독자의 정신을 번쩍 들게 만든다. 칼날처럼 휘두르는 그의 글 앞에서 취할 수 있는 행동은 많지 않다. 칼로 다가가 내 피를 내어주거나, 칼을 피해 멀찍이 도망치거나. 다만 도망친 자에게 남은 선택지는 자살당하는 것, 우리 모두 살가죽 아래 숨어 있는 생의 끓어오름을 애써 무시하며 살아가다 죽임당할 것인가?

고흐의 그림을 보며 생이 폭발하는 것이 느껴진다면, 우리에게는 아직 삶의 기회가 남아 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서평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망각 일기 세라 망구소 에세이 2부작
세라 망구소 지음, 양미래 옮김 / 필로우 / 2022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7쪽, 아무것도 잃고 싶지 않았다. 그게 내가 가진 가장 큰 문제였다. 내게 일어난 모든 일을 기록하지 않고 하루를 마감하는 것을 견딜 수 없었다.

내가 쓸 문장이 이미 적힌 책을 읽으면, 

심지어 그 문장이 책을 펼치자마자 쏟아지면, 

나는 이 책에 단단히 붙들릴 수밖에 없다. 


초등학생이 되고 학교 숙제로 매일 일기를 쓴 뒤로, 30년 가까이 일기를 쓴다. 매일 쓴다. 

진통을 겪고 아이를 낳은 그 날에도 매 순간을 기억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휴대폰 메모장에 기록했다. 

아무것도 잃고 싶지 않았다. 나는 시간을 가지고 동시에 잃는다. 현재는 과거가 되고 과거는 기억이 되며 기억은 망각의 바다에 가라앉는다. 내가 존재한다는 증거를 남기고 싶었다. 


- 19쪽, 내가 일기를 쓰는 이유는 일기장으로 내 존재를 빈틈없이 떠받치고 싶기 때문이다.

망각이 두려워 일기를 썼다. 

그리고 이 책의 제목은 '망각 일기'다. 

망각을 두려워하던 작가의 생각이 망각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보여 주는 계기가 아이의 탄생이다.


아이가 태어나고 일기를 쓸 시간은 사라졌다. 

나는 일기를 쓸 시간이 필요하지만, 아이는 나를 필요로 한다. 

하루하루가 망각 속으로 사라진다. 

그럼 내 존재 역시도 사라지는가? 

나는 있다. 


- 91쪽, 아이가 태어나기 전, 일기는 나로 하여금 존재를 유지할 수 있게 해주었다. 일기는 말 그대로 나라는 존재를 구성했다. 일기를 쓰지 않고 있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였다. 그러던 중 아이가 태어났고, 아이는 내가 쓰기를 필요로 하는 것보다 더 나를 필요로 했다. 내게는 아이에 관한 글을 쓰는 일이 필요했지만, 아이는 그보다도 더 나를 필요로 했다.

망각은 필연적이고, 우리는 계속해서 살아 간다. 

시간은 흐르고 아이는 자란다.

나 역시 필사적으로 일기에 집착하는 태도가 많이 유해졌다. 

하루에 한 줄, 혹은 아무것도 쓰지 않고 지나가는 날도 있다.

나는 기억한다. 아이는 기억한다. 우리는 새로운 시간을 받아들인다.

잃어야 가질 수 있다. 


편안한 마음으로, 새 일기를 쓴다. 가볍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666 - 볼라뇨 20주기 특별합본판
로베르토 볼라뇨 지음, 송병선 옮김 / 열린책들 / 2023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다섯권짜리로 먼저 읽었기에 보자마자 주문한 내 인생소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우리는 순수한 것을 생각했다
은유 지음 / 읻다 / 2023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당연히 시는 번역하기 어렵죠. 시는 어쨌든 언어를 극한으로 밀어붙이고, 특별히 이해받고 싶어 하지 않는 경험을 만드는 장르니까 더 어렵죠. 근데 우리가 소통을 할 때 오해를 감수하고 말하는 것처럼 시 번역도 그냥 사람이 할 수 있는 아름다운 일 중에 하나 아닌가 싶어요. 그걸로 누군가와 이어질 수 있다면, 그걸 통해서 더 많은 사람들과 만날 수 있다면...

은유, 우리는 순수한 것을 생각했다, 47쪽


시 번역가의 인터뷰집이라, 반짝거리는 책 표지와 빛나는 제목(순수한 것!)의 책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막연히 생각했다. 읽기 어렵지 않을까. 시를 번역하는 직업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래서 책을 읽자마자 쑤욱 빠져들었다.


시에 대하여, 번역에 대하여, 시를 번역한다는 어려운 일을 선택한 자기 자신에 대하여, 여러 언어를 구사하는 이의 정체성에 대하여, 희귀한 일과 귀한 나 자신, 이 책은 귀하고 순수한 나라는 존재의 이야기다.


내가 알던 번역가는 정보라의 [저주토끼]를 번역해 부커상 인터네셔널 후보에 지명된 안톤 허 정도였다. 그와 함께 유학이나 이민 후 한국 문학 작품과 만나 번역에 뛰어들게 된 번역가들의 다양한 사연을 흥미롭게 들었다. 인도계 미국인인데 한국 영화와 드라마에 빠져 한국 시 번역까지 하게 된 알차나 번역가의 이야기는 새로웠다. 번역이라는, 그것도 번역이 가장 어렵다는 시 번역을 택한 이들이 문학을 사랑하는 마음을 드러내는 귀한 목소리가 책 페이지마다 넘쳐난다.


성 소수자여서, 외국인이어서, 낯선 언어가 쓰이는 낯선 나라에 온 이방인이어서 외롭고 힘들 때, 내 삶을 지켜내는 방법으로 문학을 택한 이들의 이야기는 언제나 기쁘다. 호영 번역가의 표현대로,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일은 문학이다. 그리고 번역가들은 그 아름다움을 최대한 많은 이와 나누기 위해 분투한다. 세상에서 가장 순수한 싸움. 


작가로 살지 않더라도 이 세상에서 좋은 사람으로 살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계속 읽고 생각합니다. 나는 내 감수성을 유지하고 정신을 바짝 차리고 싶고, 그렇게 하는 게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은유, 같은 책, 227쪽


*본 서평은 읻다 출판사 서포터즈 1기 활동으로 책을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게으르게 읽는 제로베이스 철학
이인 지음 / 그린비 / 2023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추석 연휴가 시작되기 전날 책이 도착했다. 한글날 연휴가 끝나기까지 2주 간 느긋하게 하루 두 명에서 세 명의 철학자를 만났다. 사실 부지런히 읽은 셈이다. 이인 작가님의 [게으르게 읽는 제로베이스 철학]은 하루에 한 명의 철학자를 만날 수 있도록 총 31개로 구성된 , 한 달 동안 읽을 수 있는 책이다.

하루에 한 명 한 달에 서른한 명이면 나 이제 철학 좀 안다고 뽐낼 수 있다. 온라인서점에서 포인트로 받을 수 있는 사은품인 스티커와 모의고사 학습지로 철학의 기초를 확실히 다질 수 있는 것도 중요한 부분.

철학자의 이름에 스티커를 붙이며 고민했다. 어떻게 해야 이 알차고 재미있는 철학 입문서를 많은 사람들이 읽을 수 있을까...철학에 관심 있는 사람은 누가 권하지 않아도 이미 읽고 있을 것이다. 관심이 없는 사람은 표지를 보고 '핑크색 애벌레(동네서점 판은 핑크색이다) 귀엽네...'하다 내려놓을 것이다. 내려놓는 손을 덥썩 잡고 이렇게라도 말을 걸어보고 싶다.

헥토파스칼을 아십니까?
누구세요?
이 짤 한 번이라도 보신 적 없어요?
아니, 이건 아는데 갑자기 왜...
헥토파스칼에서 파스칼은 철학자 이름으로 그는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으며....
(이미 도망감)

우리는 철학을 왜 알아야 할까?
먹고 살기 바쁜 이 세상에서 철학이 존재 가치가 있을까?

간결하게 요약하면 이렇다.
우리는 지혜로워지기 위해 철학을 공부해야 한다. 내가, 우리가 잘 살기 위해서.

세부적으로 주석을 달면 이렇게,

철학이고 뭐고, 나는 행복하게 살고 싶어!
96쪽, 그렇다면 우리는 행복을 원하면서도 어떻게 해야 행복한지 모르는 셈이다. 불행한 사람들에게 아리스토텔레스는 탁월성에 따른 영혼의 활동을 통해 행복을 얻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탁월성에 따르는 행위는 그 자체로 즐겁고 좋으며 고귀한 것이다. 탁월성을 획득한 상태가 진정한 행복이다. 예를 들어서 춤꾼이라면 최고의 춤을 출 때 행복하고, 작가라면 자신의 역량을 총동원해서 탁월한 작품을 완성할 때 행복하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활동이 곧 행복이다.

지긋지긋한 정치인들...이런 똥밭에 굳이 내가 투표를 해야 해?
322쪽, 랑시에르는 자신의 정치철학 이론을 통해 우리에게 새로운 의문을 던진다. 어쩌면 문제는 답답한 현실의 정치 자체가 아닐 수도 있다. 진짜 문제는 정치를 거론하면 곧장 인상을 찌푸리도록 습관화된 우리의 감성이 아닐까? 정치를 잘 알려고도 하지 않으면서 무조건 넌덜머리를 내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감성이 치안 질서에 사로잡혀 있다는 징후가 아닐까? 정치인들을 모두 나쁜 놈이라고 욕하면서도 나쁜 놈들을 내버려 두는 우리야말로 어쩌면 진정으로 나쁜 놈들인지도 모른다.

하...나는 누구이고 왜 살아야 하는가...
66쪽,하지만 우리는 자신을 찾아서 열어 밝힐 수 있다. 어둠 속에 은닉되어 있던 우리의 존재에는 밝게 빛나는 본래의 가능성이 있다. 나의 존재를 열어 밝히는 일은 자기 자신에 대해 걸고 있던 '위장'이라는 빗장이 풀리며 수행된다. 그리고 이것은 자기 자신에 대해 질문을 던짐으로써 이루어진다. 이런 질문을 하이데거는 '존재물음'이라고 지칭했다. 존재물음이란 묻고 있는 자를 그 존재에서 투명하게 만드는 작업이다. 모든 동물 가운데 오로지 인간만이 존재물음을 한다. 그동안 '나의 존재'는 쓸데없는 이야기에 뒤덮여 있었다. 그러다 그것이 스스로에 대한 질문으로 쓰이는 순간이 찾아온다. 나의 존재에 대한 의구심이 질문으로 폭발한다. 그제야 자신의 본질이 무엇인지 탐구하게 된다고 하이데거는 설명했다.

기타 등등, 질문은 많고 그 질문에 대한 철학의 답은 무수하다.

책을 읽은 뒤 특히 나와 '통했다!'고 생각되는 철학자를 골라 그가 직접 쓴 원전을 찾아 읽으면 그때부터 진짜 시작이다. '나, 철학 좋아하네'라고 말할 수 있는 때가. 내 경우엔 원래 좋아하는 철학자(니체, 쇼펜하우어, 하이데거)에서 이번에 새롭게 눈이 맞은 철학자들(칸트, 가다머, 찰스 테일러)이 추가되면서 서점 장바구니가 묵직해졌다.

게으르게 철학의 기초를 차곡차곡 쌓았으니, 이제 부지런하게 나만의 철학을 쌓을 차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