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주의 책 함께 읽기 2월의 책, <여자들의 무질서>. 무질서(disorder)라는 단어가 좋아, 으헝, 하면서 딱 펼쳐드니.. 역시나 다른 여성주의 책 함께 읽기 선정도서들과 마찬가지로 서론이 내 앞을 가로 막는다. 다행히 33페이지까지 밖에 되지 않아서, 그래, 서론인데 하면서 읽기 시작했는데.. 흠. 어렵네? 허허.  


책날개의 저자 소개를 보니, 역시. 캐롤 페이트먼은 정치학자였던 거다. 사회학자나, 법학자나, 여성학자나, 역사학자나.. 가 아니라, 이제껏 잘 접하지 못했던 정치학계의 거두였던 것이다. 그러니 시각은 정치학적인 시각. 같은 사안이라도 풀어내는 것이 새로울 것이라는 기대와 불안감(!)을 함께 느끼게 된다.



...복지국가의 경우에 아이러니는 여자들이 복지에 기여하라고 요구받는다는 것이다. 문제가 되는 복지는 여자들이 가정에서 아이, 노인, 병약자에게, 그리고 남편에게 제공하는 사적인 무급의 '복지'다. 더 일반적으로 말해, 국가가 여자들에게 한 요구들은 고유한 사적 책무를 갖는다고 간주되며 따라서 시민으로서의 지위가 애매하고 모순적인 자들에게 적합한 형식을 항상 취해왔다. 여자들의 '기여'는 그들 시민권의 일부로 혹은 시민권과 유관한 것으로 간주되지 않고, 그들의 성에 고유한 사적 책무의 필수적 부분으로 간주된다. (p 24) 


공적인 영역과 사적인 영역에서, 남성은 공적이며 여성은 사적이다. 따라서 시민은 남성이고, 여성은 남성의 피부양자의 자격만 있을 뿐이며, 그에게 요구하는 것은 성별 자체를 기반으로 한 사적인 책임 뿐이다. 오. 명료하게 정리되네. 이렇게 돌봄노동의 문제도 나오고, 성적 동의라든가 하는 문제도 나오고... 시민이 아니니 노동자의 범주에도 들어가기 힘들며, 그러니 어떤 권리를 얘기할 때 양성적인 측면을 고려하기 힘들게 된다. 그러니 여성의 급여는 작을 수 밖에 없고 직장에서의 위치는 애매하다. 시민의 범주에 못 들어가고 노동자의 범주에 못 들어가고, 그냥 남성에게 종속된 상태로 남게 된다... 아니, 이 책이 1989년에 나온 책인데도 왜 이렇게 절렬하게 느껴지는 거지. 왜 아직도 이런 걸 현실로 느끼게 되는 거지. 갑자기 분노스러워지는. (활활)


서론까지 읽고, 일단 덮고, 일요일의 마무리를 위해(흠?) 와인과 영화를 누릴 생각이지만... 역시나 서론밖에 읽지 않았음에도 여성주의 책 함께 읽기 선정도서는 '놀랍다' 싶다. 어려워도 흥미롭고 쉽지 않아도 읽고 싶어지는 책들 뿐이다. 부라보.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미미 2021-02-07 20:1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 역시 비연님~^^♡ 부라보!!

비연 2021-02-07 20:38   좋아요 2 | URL
^_________^
 
















주된 관심사가 'equity'에 있다보니 이런 책들을 좀 찾아보는 편이다. 제목을 우리나라 말로 바꾸면 저렇게 되지만 원제는 <Poor Economics>, 말하자면 빈곤의 경제학 정도가 되겠다. 제목이 현혹되어, 아, 가난한 사람이 더 합리적인 거야? 라고 생각하며 이 책을 집어들었다면 좀 실망할 수도 있다. 이 책은 가난한 사람이 더 합리적이라는 걸 말하려는 게 아니라, 가난한 사람이 그 상황에서 하는 선택이 우리가 봐선 아니겠지만, 그들에겐 '최선의' 선택이다. 그들에게도 그 나름의 합리적 상황 배경이나 이유가 있다 라는 걸 말하고 싶은 것이고, 따라서 그렇게 밖에 할 수 없는 상황들을 개선해주면 그들도 우리가 보기에도 reasonable한 선택이 가능하게 된다. 큰 변혁이 아니라도 작게 작게 시작하면 변화할 수 있다. 요약하면 뭐 그런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이 좋았던 이유는 결론 부분이 아니라 그 문제의식에 있었다. 그러니까 '가난'이 뭐지? '가난한 사람'은 뭐지? 우린 왜 그들을 '도와야' 하지? 그들을 돕는다고 하는 방법이 맞는 건지? 라는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게 흥미로왔다. 생각해보면 가난한 나라를 원조하는 많은 입장에서, 그들을 가난하다고 규정한 이유가 있을 테고 그들에게 돈이든 현물이든 사람이든 지원할 때는 이것이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하는 것일텐데, 어쩌면 지원하는 입장에서는 정말 딱, 지원하는 입장으로만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라는 의문심이 들어 버렸다, 이 책을 읽는 동안. 



저축 행위는 사람들이 미래를 어떻게 예상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비록 가난하더라도 자신의 바람을 실현할 기회가 분명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경솔한' 소비를 줄이고 미래에 투자하려 한다. 반면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미래에 대한 기대가 없기 때문에 달리 계획이 없다. 이에 따라 가난한 사람과 부유한 사람 간의 저축 활동이 달라지고 똑같이 가난한 사람들 사이에서도 저축 형태가 다르게 나타난다. (p275~276)



가난의 굴레를 벗어나기 위해 돈을 주면 저축하지 않고 그 때 그 때 필요한 소비재를 산다. 자식을 교육시키려 하지 않는다. 현재 더 개선할 여지가 있어도 그냥 그 상태에 머무르려고 한다. 처음엔 잘 하는 것 같다가도 나중에 그대로다. 따라서 가난한 사람/국가에 뭔가를 하는 것은 밑빠진 독에 물붓기다. 그들은 그러니까 가난한 거다... 라는 생각에 반문을 하고 있다. 그들이 먼 미래를 바라보고 뭔가를 하기 위해선, 그 먼 미래에 내가 어떻게 변해 있을 수 있는지에 대한 긍정적인 이미지가 필요하다. 그런데 그들에겐 그게 없다. 따라서 '몰라서' 그러는 게 아니라 희망이 없기 때문에 그냥 그렇게 지내는 거다. 따라서 그들에게 미래에 대한 투자를 할 수 있는 여지를 불어넣어주면 그들에게 변화가 생길 수 있다.. 라고 저자들은 말하고 싶은 거다. 



자신이 원하는 모든 것이 멀리 떨어져 있는 상황에서 희망을 유지하기는 매우 어렵다. 골대를 조금 가깝게 밀어주는 것은 가난한 사람이 골대를 향해 달려가는 첫걸음을 내딛도록 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p278~279) 


이 점에 동의한다.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줄 때는 '넛지'가 필요하다. 그냥 돈을 주면 되지 현물을 주면 되지 봉사활동을 하면 되지 이렇게 단편적으로 생각한다면 그 길은 요원하다. 그들의 상황을 파악하고 거기에서 motivation 될 수 있는 trigger를 잡아주는 것이 제일 필요한 일인 것 같다. 그렇게 해서 한 걸음 내디디면 그 다음 걸음을 내딛기가 쉬워지니까. 


개인적으로 지금의 아프리카나 중남미나 동남아시아 권의 빈곤은 선진국이라고 일컫는 나라들에게서 수탈받은 경험으로 인해 상당히 왜곡된 형태라고 생각한다. 말하자면 빈곤이 그냥 경제적으로 못산다, 이게 아니라 그 안에 역사적으로 쌓여온 정치적 사회적 갈등이 내재되어 하나를 해결하려고 하면 다른 하나가 걸리기도 하고, 정치나 사회가 너무 부패하여 빈곤이란 것이 풀리지 않는 매듭이 되어버린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빈곤한 나라들에 원조라는 것을 할 때 '정치적' 개입은 매우 위험한 발상이라고 생각한다. 정치를 해결하지 않으면 빈곤이 해결되지 않는데? 라고 얘기한다 해도, 시간이 더 걸리더라도 정치적인 개입은 하지 않는 게 좋다고, 나는 생각한다. 더 큰 갈등이 생길 수 있다고. 그래서 소액금융제도 등과 같은 시도가 의미가 있다고 보다. 



일반적으로 원조는 정치에 영향을 미치려는 시도를 동반하고, 지도자들이 부패한 상황에서 원죠를 계속하면 정치를 더욱 악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스털리가 비관적인 입장에만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니다. 그는 각 국가가 저마다 성공 비결을 찾을 수 있으므로 그렇게 하도록 그냥 내버려둬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아가 '두루 적용할 수 있는 보편적인 해법'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면서 한 가지 전문가적인 충고를 내놓는다. 그것은 바로 자유다. 이것은 최대한의 정치적, 경제적 자유를 뜻한다. 여기서 말하는 경제적 자유란 '가장 과소평가되고 있는 인간의 발명품', 즉 자유시장이다. (p325) 



이 견해에 일견 동의하고.. 저자들이 말하고자 하는 건 이 상태로 그냥 방치하자가 아니라, 자꾸 Top-down방식으로 하려 하지 말고 'Bottom-up'방식으로, 그러니까 낮은 곳에서 바라보는 시각을 가지고 아래에서부터 변화를 유도해보자, 라고 제의한다. 그냥 인도주의적으로 감정에 호소해서 원조를 하려 할 것이 아니라, 실제로 가난한 사람/국가가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내서 그 부분을 해결하자는 것. 이런 논의제기로 이들은 2019년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했다. 이제 경제학이란 것이 주류경제학에만 머물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노벨상의 흐름에서 발견할 수 있다. 


















후속 작품으로 이 책도 나와 있길래, 일단 사두었다. 지금 당장 읽지는 않더라도 곧 보게 될 것 같다. 세상이 마냥 나빠지지만은 않는다는 희망을 갖게 하는 건, 이런 학자들이 계속 등장하면서 실천에 기반한 연구를 끊임없이 한다는 사실에 있다. 다 같이 잘 살자라는 취지 아래 이를 해결하기 위한 지속적인 노력. 그리고 더디더라도 그 노력을 조금씩 인정받아 가는 흐름들. 그런 의미에서도 이 책은 꽤 읽을 만 했다. 문제의식을 달리 했을 때 사안이, 그 해결방안이 얼마나 달리 보일 수 있는지 확실히 느낄 수 있었고. 




댓글(4) 먼댓글(0) 좋아요(3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라로 2021-02-06 19:1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책 저축 하신 것 같아요. “후속 작품으로 이 책도 나와 있길래, 일단 사두었다.”ㅎㅎㅎ 비상식량 마련, 그렇게. 책 산 것에 대해서 이렇게 우아하게 말하시다니!😅

비연 2021-02-06 22:29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 책저축. 정말 딱 맞는 표현요^^

붕붕툐툐 2021-02-06 22:0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비연님이 읽고 있어요 올릴 때부터 내용 궁금했는데, 드뎌 완독하시고 후기 남겨주셨군요!! 앞부분 딱 저예요~ 내가 합리적인 이유가 궁금했는데!ㅋㅋㅋ
저는 오늘 친구랑 대화하면서 가난이란 뭘까에 대해 생각해 보았거든요~ 여러모로 생각할 거리를 주는 책인 거 같네요!!

비연 2021-02-06 22:29   좋아요 2 | URL
가난이란 뭘까요. 정의라는게.. 참 중요한 거 같아요. 뭐든 거기서 시작하는~ 좋은 책입니다!^^
 

https://www.nature.com/articles/d41586-019-02658-6?fbclid=IwAR03yD-q4kQ_L9Uqoiv6rhCidayp6FTM8IF6d5m5TdRGmx1QJQUQ1r3izik



리베카 솔닛이 'mansplain'이란 말을 쓴 이후로, 이런 단어들이 종종 눈에 띄었는데 오늘은 기사를 읽다가 'manference''manel'이란 단어를 보고 마음에 확 와닿았다. 안 그래도 최근에 정부에서 주최하는 수많은 패널과 회의가 전부 남자로 채워진 것에 대해 비난이 많았기도 하고, 경험상으로도 그래왔기 때문에 계속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다. male-dominated conference or panel이 너무 많다. 너무 흔하다. 


컨퍼런스와 패널을 구성할 때 남녀 비율을 맞추라고, 말하자면, 공무원이나 기업체 임원 등에서 쿼터제를 적용하듯이라도 하라고 하면 사람들은 말한다. '분야가 과학이라 여자가 없다.', '아무리 찾아도 여자는 구하기가 어려워.'... 물론 어떤 분야는 그럴 수 있다. 아직도 여성들이 진출하기에 험난한 분야라면 그럴 수 있겠다..지만, 요즘 그런 성벽은 허물어지고 있고 어떤 분야는 심지어 여성들의 두각이 훨씬 드러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컨퍼런스나 패널을 조직하는 사람이 남자라 1) 그냥 머릿속에 남성만 떠오른다 2) 아는 사람이 남성밖에 없다 .. 라는 이유로 아예 남성으로만 구성되거나 여성은 끼워주기 식으로 한 명 정도 넣는다. 사실, 분하다. 


수학이나 과학에 여성이 재주가 없다. 이런 얘긴 정말 구석기 시대 이야기다. 수학이나 과학에 재주가 있는 여성이 많을 뿐 아니라 예술이나 언어'도' 잘 하는 여성이 많다. 예전엔 공대 하면 여학생들이 원서 쓰기도 뭣하고 들어가서 다니면 '공대여자'라는 딱지를 붙여 저 멀리 버려 두거나 남성처럼 살라고 강요하는 경우가 많았다지만, 요즘은 공대에도 여성 수가 굉장히 많다. 다 옛날 얘기고, 이런 사람들이 각 분야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예전처럼 중간에 그만두는 일도 적어졌다. 그런데도 여전히 신문이나 방송의 컬럼을 쓰는 사람들은 대부분 남자이고, 패널도 대부분 남자, 학회에 가보면 발표자도 대부분 남자다. 다시, 분해진다. 


공무원이나 기업체 임원 등에 쿼터제를 두는 것에 불만을 가지는 사람들이라도, 컨퍼런스나 패널에 이미 훌륭한 여성이 있음에도 보이지 않아서, 혹은 잘 몰라서, 혹은 그냥 머릿속에 패스해서 pick이 안 되는 경우는 말이 안된다고 생각할 것이다. 사실 그런 건 누군가의 pick으로 이루어지니까. 그 누군가의 안목이 매우 중요한 거고, 그 안목을 뒷받침하는 게 인식과 분위기라고 한다면, 이런 얘기들을 자주 공공연하게 해야 한다. 각 분야의 여성들이 두각을 나타낼 수 있도록 자주 노출시켜야 또 후속세대의 여성들이 그것을 보고 뒤따를 수 있는 거다. 


지금 읽고 있는 책 다 읽고 나면, 작년에 사두고 아직 읽지 않은 이 책을 읽기로 결심했다. 








댓글(6) 먼댓글(0) 좋아요(2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미미 2021-02-03 11:4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보이지않는 여자들> 너무 좋았어요! 국회 여성의원 비율만 봐도 참담해요.

비연 2021-02-03 11:49   좋아요 2 | URL
미미님, 읽으셨군요! 이 책 워낙 호평이라.. 이제까지 자꾸 밀렸는데, 이번참에 읽어야겠어요.
어디나 여성이 너무 숫자가 적어요. 양이 질을 담보하기도 하는데... 더 노력해야 할 듯~

오거서 2021-02-03 12:3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작년에 사두고 아직 읽지 않고 있어요.
도서관에서 빌린 책을 마저 끝내야 하는데…

비연 2021-02-03 13:16   좋아요 2 | URL
어서 끝내고 같이 읽어요, 오거서님!!!

han22598 2021-02-04 02: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manference, manel 유쾌하진 않지만 현상을 잘 표현해주는 말이네요.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한국이든 미국이든... man-professor 의 현상을 제대로 밝혀내고 싶은데 ㅎㅎ 아류로 교수 지원자중 합격률 비율차에 대해서 철저(ㅋ)하게 조사하고 싶은데 ㅋㅋ 시간이 없다는 ㅠㅠ

비연 2021-02-04 05:37   좋아요 0 | URL
심증이 매우 큰데 경험치로도 알고 있고.. 데이터로 보여줄 필요가 있다 싶은 생각이 들어요 정말... 사람이 없는 게 아니죠 이젠.
 


어제는 집에 왔는데, 정말 아무 것도 하기 싫었다. 이 주 정도 deadline이 정해져 있는 일을 하느라 달려왔더니 어제만큼은 쉬고 싶다, 하루 정도 그냥 아무 것도 하지 말자.. 라는 마음이 너무나 강력히 드는 거다. 그래서 오는 길에 녹두전과 맥주(!)를 사왔다. 요즘 건강 챙긴다고 술을 가급적 안 먹고 있는데 (지난 달에도 며칠 안 먹었지. 아예 안 먹진 않았고 ㅎㅎ) 그리고 추운 겨울날엔 찬 맥주를 선호하지 않아서 손이 가질 않는데... 어제는 맥주가 먹고 싶었다. 그래, 한번쯤은 마음 내키는 대로 해야지.


맥주와 녹두전으로 한 상을 차리고, 옆에는 여분의 맛밤도 장착한 후 무슨 영화를 볼까 하다가 이 영화를 골랐다. <후라이드 그린 토마토(Fried Green Tomatoes At the Whistle Stop Cafe)>. 







1992년 작품이다. 그리고 소설이 원작이기도 하지. 소설을 작년에 다시 읽고 영화도 다시 봐야겠다 라는 마음으로 왓차 보관함에 넣어두었었는데 이제야 꺼내보게 된 거다. 50년 전의 두 여자와 주위 사람들, 그리고 지금의 두 여자와 주위 사람들 이야기가 잘 어우러져 훈훈한 마음을 불러 일으켰던 책이고 영화였다. 물론 영화는 늘 그렇듯 소설을 다 담아내지 못해서 아쉬운 점이 많았지만, 젊은 날의 캐시 베이츠와 이제는 고인이 된 제시카 탠디의 연기를 보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맥주를 마시며 간간히 녹두전을 먹고 거실 불을 다 끈 채 스탠드 조명만 밝히고는 영화를 보는데.. 아 행복했다. 간만에 느끼는 평화로운 행복이었다. 



















영화에 나오는 이지(Idgie)는 소설에서 느낀 이지의 반의 반도 소화를 못하고 있다.. 라고 생각했다. 자유분방하지만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고 주위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으면서 사람을 구별하지 않고 정의를 위해 많은 것을 감수할 줄 아는 여성. 그리고 그 옆에서 사랑으로 든든히 이지를 지지해주고 있는 다정하면서도 강인한 루스(Ruth). 아무래도 1992년 영화다보니 이 둘의 관계를 우정과 사랑의 중간 정도로 애매하게 묘사하고 있었지만, 사실 그들은 서로를 깊게 사랑하고 있었다. 세상의 편견 따위 그냥 무시하고. 그 주변의 사람들, 십시와 빅조지, 목사님, 잇지의 형제들, 루스의 아들 버디 주니어(책에선 스텀프).. 과 함께 가족처럼 살면서 카페를 운영하는 모습이 너무 아름다왔었다. 영화에 그게 다 안 담아진 게 아쉽기 그지 없지만, 책과 영화를 몇 번 보다보니 볼 때마다 약간씩 느낌이 달라지는데.. 어젠 사람들과 그렇게 어우러져 사는 다정한 모습이 내내 마음에 남았더랬다. 아마도 지금 코로나 때문에 사람들을 잘 못 만나고 살고 어찌보면 좀 삭막하다 싶을 정도로 혼자만의 생활에 적응(?)해 지내고 있어서 더 그런 게 아닌가.


세월이 지나, 루스도 죽고 카페도 문을 닫고... 황량하게 변한 철도 주변이 쓸쓸해졌을 땐 내 마음에도 바람이 불어들었다. 영화에는 안 나왔지만, 난 책에서 루스의 아들 스텀프가 자라서 일가를 이루고 딸과 손녀와 손녀의 남자친구 앞에서 옛이야기를 하던 장면을 좋아한다. 그 다정함이 잘 전해지고 있는 느낌이 들어서. 그리고 팔 하나 없이 살아야 했던 스텀프가 그렇게 잘 살고 있다는 것에 왠지 위안을 받아서. 


우리 어머니하고 이지 이모는 카페를 운영하셨지. 대단잖은 일일 지도 모르겠지만, 이것 한 가지만은 말해 주고 싶네. 우리들, 그리고 음식을 구하러 온 사람은 누구든 거기서 식사를 했다네... 흑인이건 백인이건. 나는 이지 이모가 오는 사람 막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네. 이모는 필요하다면 술도 내주는 사람으로 유명했지...

이모는 앞치마 속에 술병을 넣어 가지고 다니셨는데 어머니는 이렇게 말씀하시곤 했다네. '이지, 넌 사람들에게 나쁜 습관을 들이고 있어.' 하지만 당신부터가 술을 좋아하셨던 이지 이모는 이렇게 말씀하셨지. '루스, 사람은 빵만으로는 살 수 없어요.' (p428)



그리고, 영화에서는 에벌린이 니니를 집에 데려가는 것처럼 했지만, 책에서 니니는 자는 중 저 세상으로 갔다. 에벌린이 묘지에 가서 보니 거기엔 이지의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기차길에서 죽은 오빠 버디, 니니의 아들 앨버트의 묘가 있었고.. 그 아래쯤에 니니의 묘가 있었다. 


버지니아 (니니) 스래드굿

1899-1986

집으로 돌아가다


순간, 노부인에 대한 달콤한 기억이 물밀 듯 밀려왔다. 에벌린은 자신이 그녀를 얼마나 그리워하는지 깨달았다. 꽃을 내려놓는데 눈물이 흘러내렸다. (p505)


그리고 거기 앉아 살아있는 사람한테 말하듯, 이얘기 저얘기 하기 시작한다. 다정함과 사랑은, 이렇게 50년이 지나 누군가에게 전해졌고 그렇게 또 누군가에게 전해지고 전해질 거다.. 라는 생각이 드니 마음에 따스한 기운이 스몄다. 어젠, 그래서인지 참 좋은 마음으로 잠을 청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좋은 책과 영화는 이렇게, 한 사람 한 사람에게 평안을 주는구나 라는 생각을 얼핏 하며. 




댓글(10) 먼댓글(0) 좋아요(3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transient-guest 2021-02-03 11:0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마지막으로 그렇게 차분하게 몰입해서 영화를 본 것이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 요즘입니다. 좋은 시간이 부럽네요 ㅎ

비연 2021-02-03 11:04   좋아요 2 | URL
저도 정말, 간만이라 더 좋았던 것 같아요 ^^

미미 2021-02-03 11:1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빵만으로 살 수 없죠!(안되욧) 저는 어제 밤에 영화보면서 굴전에 맥주마셨어요ㅋㅋ

비연 2021-02-03 11:13   좋아요 2 | URL
앗. 저랑 비슷한 조합을! ㅎㅎㅎㅎ 영화 뭐 보셨어요? 궁금궁금~

미미 2021-02-03 11:15   좋아요 2 | URL
올란도 봤어요ㅋㅋ^^* 버지니아울프 원작 그 올랜도요!틸다 스윈튼 넘 멋져요😆

비연 2021-02-03 11:27   좋아요 1 | URL
홋. 올란도 보셨군요. 전 책을 반 정도 읽은 상태인데.. 영화를 볼지 안볼지는 결정 못한.
틸다 스윈튼은 다른 영화에서도 멋지게 나오는데... 그 영화에서도 역시 ^^

scott 2021-02-03 11:28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전 영화만 봤는데 소설에 감동이 다르다는거 비연님 때문에 알게 되네요 ^.^

비연 2021-02-03 11:45   좋아요 1 | URL
사실, 소설을 추천드립니다^^ 영화와는 구성도 좀 다르고 훨씬 재미난 에피소드들이 많아요~

페넬로페 2021-02-03 11:3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아주 오래전에 이 영화봤는데 그때 받은 감동이 지금도 생생해요^^근데 문제는 네 여자중에 세 명의 역할은 기억나는데 영 제시카 탠디는 기억나지 않아요 ㅠㅠ
결론은 다시 한번 봐야할듯요 ㅎㅎ

비연 2021-02-03 11:47   좋아요 1 | URL
제시카 탠디가.. 매우 중요한 역할인데 기억이 안 나시다니...ㅎㅎ 꼭 다시 보셔야 할 듯.
 

 

 

 

 

 

 

 

 

 

 

 

 

 

 

일단 독서의 질병이 잠식해 들어가면 몸이 너무나 쇠약해져서, 잉크병에 숨어 있고 깃털 펜에서 곪아 가는 치명적 병균의 손쉬운 먹잇감이 되어 버린다. 가여운 인간이 글을 쓰는데 빠져드는 것이다. 이것은 가진 것이라고는 비가 새는 지붕 아래 놓인 의자와 탁자뿐이라서 결국 잃을 것이 많지 않은 가난한 사람에게도 나쁜 일이지만, 여러 채의 저택과 가축, 하녀, 당나귀와 리넨을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글을 쓰려는 부자의 고충은 가련하기 그지없다. 그 모든 재산을 향유하는 즐거움이 달아나 버린다. 그는 뜨거운 쇳덩이에 난타당하고 해충에 뜯긴다. 작은 책 한 권을 쓰고 유명해질 수 있다면, 가지고 있는 마지막 동전 한 푼까지도(그 세균의 악성은 이 정도로 지독하다) 내놓을 것이다. 하지만 페루의 금을 모두 내놓아도 보석처럼 우아한 시 한 줄도 얻지 못할 수 있다. 그래서 그는 폐결핵에 걸려 앓아눕거나 자기 머리통을 권총으로 쏴버리고 혹은 돌아누워 벽만 바라본다. 그가 어떤 자세로 목격되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는 죽음의 문턱을 넘었고, 지옥의 불꽃을 경험한 것이다. (p79)

 

 

이 부분을 읽으면서, 아마도 버지니아 울프가 글을 쓰면서 느꼈던 심정을 옮겨 담은 게 아닌가 싶었다. 독서를 하고 글을 쓰고 거기에 빠져들고. 참으로 유려한 표현이다. 문득, 예전에 본 영화가 기억났다. 제목도 가물가물했는데, <디 아워스(The Hours)>. (<디 아더스(The Others)> 아님다.. ㅎㅎ 여기에도 니콜 키드먼이 나와서 엄청 헷갈리는 비연).. 버지니아 울프에 대한 이야기를 담았었다. 심지어 2002년 작이네. 극장에서 보았던 것 같은데... 아마 아카데미상 탔다고 봤던 듯.

 

 

 

 

여기에 메릴 스트립과 줄리안 무어가 나왔던가. 그냥 기억나는 건, 버지니아 울프로 분했던 니콜 키드먼의 모습. 뭔가 건드리면 부서질 것 같은 예민함이 보였고 담배를 계속 피던 모습이 떠오르고. 그리고 호숫가로 걸어가던 모습이 떠오른다. 아마 내가 버지니아 울프를 우울함으로 기억하는 건, 이 영화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책에서의 울프의 모습은 적절한 유머가 있고 세상에 대한 냉소를 돌려치며 말하는 위트가 있고 무엇보다 표현이 섬세해서, 우울함은 떠오르지 않는다. 물론 그녀가 자살로 생을 마감했기 때문에 인생 자체를 비극으로 여기는 지도 모르겠다. 이 영화 다시 한번 봐야겠다 싶어서 찾아보니 왓차에 있는 것이다. 흐흐흐. 돈 낸 보람이 있구나, 왓차. 이번 설 연휴는 짧은데 할 일은 많고.. 그 중에 이 영화 보는 것도 하나 넣어둬야겠다.

 

일요일 아침에 괜한 일로 약간의 스트레스르 받았었는데 (세상 졸렬한 사람이 널렸다고는 하지만 이렇게 가까이(?)에서 발견할 줄은 몰랐다. 심지어 일요일 아침에) 이 책 잠시 들춰보니 마음에 슬며시 평안이 깃든다. 자. 이제 일요일의 일을 하자.

 

 

 

 

 

 


댓글(24) 먼댓글(0) 좋아요(4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미미 2021-01-31 10:5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비연님은 왓차를 보시는 군여. 저도 왓차에만 있는 <리틀 드러머걸>땜 원작 읽음 갈아타려구요.ㅋ<디아워스>안그래도 찾아봤는데 웨이브엔 없어서 발동동구르던차에요. 포스터에 니콜 키드먼 정말 버지니아울프 느낌이 물씬♡

비연 2021-01-31 11:21   좋아요 3 | URL
미미님. ㅎㅎ 저는 제가 뭐 보고 싶을 때 바로 볼 수 없는 상태를 별로 안 좋아해서 넷플릭스, 왓챠, 웨이브 전부 가입해있어요. 이젠 쿠팡플레이도 해야 하나 하고 있는. 쿨럭. 정말 저 포스터에서 니콜 키드먼은 버지니아 울프와 싱크로율이 좋은 듯^^ 당시에 니콜 키드먼처럼 화려하게 생긴 얼굴이 저렇게도 분장이 되는 것에 다들 놀라와했던 기억이 나요.

미미 2021-01-31 11:26   좋아요 2 | URL
비연님 꺄아악~♡이소리가 절로 나와요!! 문화적 하이클래스네요. 저도 늘려볼래요!(ㅋㅇㅋ)👍

비연 2021-01-31 11:30   좋아요 2 | URL
미미님... 문화적 하이클래스라기보다는... 문화적 호구라는 표현이 더 어울리지 않을까 싶은.. 쿨럭.
저도 그러고 싶지 않은데 성질머리가 그런 게 불편한 걸 못 참아해서..ㅜ

오거서 2021-01-31 12: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가여운 인간이 글쓰기에 빠져드는 질병이 있다는 걸 알게 되네요. 이런 표현력이 그냥 생기지 않을 텐데요, 비연 님은 병중이거나 병력이 상당한 것 같아요. 저는 아직 병을 모르는 건강한 상태인 것 같아요. ㅎㅎ ^^

비연 2021-01-31 12:39   좋아요 1 | URL
아.. 아마도 버지니아 울프가 상당한 ‘독서 질병’이 있었던 게 아닌가.. ^^;; 전 뭐 근처에도 못갑니다만 ㅋ

붕붕툐툐 2021-01-31 13: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첫번째 줄까지 비연님 얘긴 줄 알고 귀 쫑긋했는데, 잉크병에서 아닌걸 눈치 챘죵~😉 그래도 비연님과 어울리는 병이라는 건 인정!!^^

비연 2021-01-31 14:17   좋아요 1 | URL
앗.. 이런..ㅎㅎㅎ;;;

2021-01-31 15: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1-31 18: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라로 2021-01-31 17:4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는 메릴 스트립이 나와서 봤는데요.ㅋㅋ 이때가 아마 니콜 키(크)드만이 톰 크르즈와 이혼한 시기일 거에요. 그녀의 연기 인생은 그와의 이혼으로부터 다시 시작했다고 생각해요. 잘했어 니콜!!!^^;;;

비연 2021-01-31 18:58   좋아요 1 | URL
아.. 메릴 스트립이 나와서 보신. 전 왜 생각이 안 나는지..ㅜㅜ
니콜 키드먼은 정말 톰 크루즈와 이혼 후 훨씬 잘 되었죠. 연기적으로나 여러 면으로~
이 영화, 정말 다시 봐야겠어요^^

공쟝쟝 2021-01-31 18:3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영화봤고 전 심지어 (읽지 않은) 디아워스 소설 책도 있다...??ㅋㅋㅋ

비연 2021-01-31 18:58   좋아요 2 | URL
헉. 책도 있어요?????

공쟝쟝 2021-02-01 08:03   좋아요 2 | URL
네네 있습니다 있어요~ 저도 자기만의 방 읽고나서 영화보니 너무 좋아서 ㅋㅋㅋ 니콜키드먼 울프도 좋고 줄리안무아도 좋고 ㅋㅋㅋ 문제는 댈러웨이부인을 읽은 다음에 읽자 싶어 미뤄 놓음 ㅋㅋ

비연 2021-02-01 10:36   좋아요 0 | URL
이 영화가 <댈러웨이 부인>하고 연관이 깊어서.. 저도 이 책 보고 영화 다시 볼까나?
사실 저 라인업. 환상이죠. 니콜 키드먼도 그렇지만 메릴 스트립과 줄리안 무어라니.

syo 2021-02-01 02:4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와... 나 니콜 키드만 못 알아봤어요. 완전 그냥 울프인데??

비연 2021-02-01 04:18   좋아요 2 | URL
진짜 분장 승리죠? 예전에 분장하는 모습 영상으로 본 적 있는데 엄청 힘들겠더라구요..

유부만두 2021-02-01 08:4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제가 ‘디 아워스‘ 영화 먼저 보고, 책 읽고 그 다음에 울프 소설로 넘어간 ‘역주행‘ 독자입니다.

비연 2021-02-01 10:37   좋아요 1 | URL
오홍! 영화가 trigger가 된 거군요~

vita 2021-02-01 09:0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디 아워스 저도 극장에서 보았는데 전 결혼 같은 거 하지 말아야지 결심했던 기억 나요 하지만 현실은 움움움 -_-

비연 2021-02-01 10:38   좋아요 0 | URL
그것이.. 원래 저런 영화 보고 결혼 하지 말아야지 결심하는 사람은 결혼하는 거고
결혼하고 말고에 아무 관심 없이 밍밍하게 나온 저같은 사람은 안하는 거고..ㅎㅎㅎㅎ

감은빛 2021-02-01 09:1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디 아워스]는 못 봤고, [디 아더스]는 봤는데 본문에 이 영화 언급이 있어서 반갑네요. ㅎㅎ

비연 2021-02-01 10:39   좋아요 0 | URL
영화 제목이 뭐 이리 비슷한지. 전 매번 <디 아워스> 찾겠다고 <디 아더스>를 치고 찾는다는.
그리고는 대문에 니콜 키드먼이 나오면 아, 하다가 흠? 하면서 아니네? 를 반복..ㅜㅜ
심지어 나온 연대도 1년 차이라 더 헷갈려요. 저는 두 영화 다 봤는데, 니콜 키드먼의 변신은 놀랍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