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그러니까 난 세탁기에 세탁물을 넣고 돌렸더랬다. 근데,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이 세탁기가 어느 순간 정지 상태로 공회전하는 것 같더니만, 결국 에러 메시지를 남긴 채 장렬히 서버렸고 난 이 급작스러운 사태에 허둥지둥 매뉴얼을 꺼내 들었다. 그러니까 이 메시지는 '급배수가 막힘' 이란 뜻이라니 물을 빼고 필터를 청소하고 다시 돌렸다. 아. 같은 시점에 다시 에러 메시지와 함께 장렬히 서고. 이렇게 매뉴얼에서 하라는 대로 하면 몇 번 시도하고 나니 두세 시간이 훌쩍 지나갔으나.. 세탁기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서둘러 AS 센터에 전화했으나 토요일은 1시까지만 접수를 받는다는 기계음이 들리고. 좌절.

 

결국 그 탓인지, 기진맥진하여 어제 하루는 소위 말해 공쳤고... 꿈자리도 사나왔다. 애시당초 꿈을 잘 꾸지 않는 나인데 어제는 길게 꿈을 꾸었다. 우리집에 사람들이 놀러와 마구 어지럽히며 노는데 나는 뭔가 자꾸 어지럽고 잠만 오고 무기력하여 허우적거렸다. 그러다 잠시 잠들었다가 깨보니 아침이었고 (꿈에서 ㅜㅜ) 그런데도 우리집에 사람들이 여전히 가득한 거다. 그러니까 다 여기서 잤다는! 놀래서 이 방 저 방 다 기웃거리는데 그들의 잔해가 어지러이 놓여 있고 사람들은 하나둘씩 몸만 빠져 나가고.. 나는 이걸 언제 다 치우지 라는 고뇌를 안은 채 속상해하다가... 깼다.. 머리가 너무 아팠고 심장은 벌렁거렸고... 그렇게 뜨거운 물에 들어간 깨구락지 마냥 (이런 표현... <육식의 성정치>를 읽고 나면 써서는 안되는 표현인데..쩝) 침대 위에 망연자실, 벌러덩 누워 있다가 10시 쯤 겨우 일어나 없는 입맛을 되살려 토스트를 굽고 사과를 깎고 커피를 내리고.. 겨우 아침을 해치웠다.

 

내일 AS 센터에 전화걸어 해결해달라고 하면 되지 뭐. 라고 생각하면서 어쨌든 평안을 되찾고 싶었으나.. 이 생각이 머리 한 구석에 껌처럼 달라붙어 떨어지질 않는 거다. 에휴. 그래서 일요일도 계속 찜찜한 상태로 계속 버티고(!) 있다. 생활인은 힘들어. 전자제품 고장나니 세상만사가 힘들어보이는 것은... 문명의 폐해인가.

 

 

 

 

 

 

 

 

 

 

 

 

 

 

 

 

게다가 이 책을 읽다보니, 갑자기 냉장고에 들어찬 고기가 싫어져서 지금 끼니를 때우는 것이 어려운 지경이 되어 버렸다. 내가 그동안 얼마나 고기에 의존해 살았는가를 여실히 느끼고 있다. 그냥 밥때가 되면 가장 쉬운 게 고기를 꺼내 살살 구워서 먹는 거였구나.. 이걸 못 먹겠다 싶으니 도대체 뭘 먹어야 하지 하다가 그래도 먹을까 하다가.. 아 근데 방금 읽은 부분이 걸려 뭐 이런 생존적 고뇌를 안고 요 며칠을 살고 있다. 냉장고도 고장났는데 먹는 것도 마음대로 먹을 수 없는 지경. 오호. 통재라.

 

이 책도 서문이 무지하게 길다. 길다기보다는 여러개다. 처음에 내고 10년 뒤에 또 내고 또 10년 뒤에 낼 때마다 서문을 썼으니. 처음 책을 낼 때 태어난 둘째가 20년 뒤엔 채식 레스토랑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육식의 성정치'란 무엇일까? 여성을 동물화하고, 동물을 성애화하고 여성화하는 태도이자 행동이다. (p17)

 

명확하다. 이 책은 아마도 이 정의를 구체화하고 자세히 설명하는 데 있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명확하다. 책제목을 보고 이건 뭐지? 라고 생각했던 또 하나의 고뇌가 이 한 구절로 그냥 없어져버렸다.

 

 

모든 동물 가공 식품을 먹지 않는 완전 채식주의Veganism란 무엇인가? 이 책에서 상상하는 채식주의는 우유와 달걀조차 먹지 않는 식사다. <육식의 성정치>는 동물 암컷이 재생산 과정에서 당하는 착취를 표현하는 특수 개념인 '여성화된 단백질feminized protein'을 사용한다(이를테면 우유와 달걀은 암컷의 몸에서만 생산된다). 대부분의 식용 동물은 다 자란 암컷이거나 어린 동물이다. 동물 암컷은 살아 있을 때와 죽은 때에 이중으로 착취당한다. 글자 그대로 고깃덩어리다. 동물 암컷은 자기의 여성성 때문에 억압당하고 대리 유모가 된다. (p40)

 

 

몰랐다고는 할 수 없지만, 이렇게 글자로 박혀 있으니 동물의 암컷과 사람의 여성이 다를 바가 없다는 전제가 생기고 그렇다면 나는 우유와 달걀도 먹으면 안되는 것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어 버렸다. 냉장고 안에 있는 15구짜리 달걀과 그제인가 주문한 우유가 생각난다. 난 이것들로 프렌치 토스트를 해먹고자 했다. 식빵에 달걀과 우유를 듬뿍 묻혀 구워낸 토스트 그것. 그러니까 내 뇌에서 음식이란 걸 생각하면 이 한계를 못 벗어나고 있는 것인데, 나는 이 <육식의 성정치>를 읽고 있는 것이다.

 

 

동물권과 페미니즘은 모두 먼 미래의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는 붙박이 불침번을 필요로 한다. 만약 두 경우에서 모두 억압과 근원과 목적지가 지배라면, 견실한 행동주의자들은 모든 형태의 무정형 착취에 맞서 싸워야만 한다. 작가 카슨 매컬러스Carson McCulers의 말을 빌리면, 우리가 만진 모든 것은 다른 존재들이 겪은 고통의 결과다...(중략)... 캐럴 애덤스는 제도화된 폭력을 받아들이는 우리 삶의 핵심에 다다른다. 동물 학대를 지탱하는 시스템과 그 시스템을 먹여 살리는 논리적 근거 말이다. (p61)

 

 

자꾸만 공감이 가게 되고... 지금 1부 4장을 읽고 있는데.. 이 책 읽는 동안엔 적어도 고기 먹긴 글렀다 싶다. 일단 1부 다 읽고 다시 페이퍼 올리기로 하고.. 이제 다시 세탁기 고장과 육식 못먹는 상태의 점심에 대한 존재론적 고뇌로 되돌아가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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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붕툐툐 2021-01-10 15:1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세탁기 반쯤 고장난 1인으로서 공감이 많이 가는 페이퍼입니다. 저도 육식의 성정치를 읽으면 고기를 더욱 덜 먹게 될거 같은 느낌입니다. 지금 있는 책들을 다 읽으면 그 다음 순번에 있는 책인데.. 순번이 오긴 오겠죠?;;;
다 잘 됩니다~ 마음을 쓰나 안 쓰나 결과는 다 잘되니 마음 푹 놓고 남은 주말을 즐겨 보아요:)

비연 2021-01-10 15:17   좋아요 2 | URL
붕붕툐툐님.. 위안이 많이 되는 댓글을 남겨주셔서 감사..^^ 세탁기라는 문명의 이기가 절 이렇게 고뇌스럽게 할 줄 몰랐는데 참으로... 고쳐지겠죠. 그렇게 믿고 잘 지내보기로 ㅎㅎ <육식의 성정치>는 잘 쓴 책임은 틀림없는 것이, 읽고 있노라면 자연스럽게 육식에 대한 거부감이 깃들게 된다는... 그러나 읽어보실 것을 추천합니다. 어쨌든 모른 척 지나칠 수는 없는 내용인 듯. 육식을 멀리 하게 되는 결과를 낳게 될지라도ㅜ 좋은 일요일 보내세요, 붕붕툐툐님!

수이 2021-01-10 15:37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저는 막 다 읽었는데 책을 버리고 고기를 선택했어요. 훌륭한 책인데 읽는 내내 뇌는 다 알겠는데 강하게 거부 반응이 일어나더라구요. 그래서 읽고 고기 못 먹을 줄 알았는데 이 구절들이 제게 와닿지 않아서 죄책감 없이 고기를 먹어버렸다는. 동물과 고기 사이에서 인간이 어떤 태도를 취해야할지 마땅히 알면서도 이게 행동까지 나아가진 않더라구요. 아 내가 이것밖에 안 되는 인간인가 싶어서 좀 좌절하다가 일단 좀 더 공부하자 싶은 마음에 한쪽으로 치워두었어요.

비연 2021-01-10 16:10   좋아요 1 | URL
헉.. 이미 다 읽으신!!! 저도 어쨌든 먹기는 하는데 마음 한켠 이전엔 없던 죄책감이 생긴다고나 할까..ㅜㅜ 좀더 읽어봐야 할 듯요~ 워낙 고기를 좋아해서 확 취향을 바꾸긴 힘들 것 같고.. 좀 생각하며 먹게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하구요..

붕붕툐툐 2021-01-10 20:01   좋아요 1 | URL
잘하셨어용~~ 수연님이 그러셨다니 위로가 되네용~~ 저는 억지로 더 안 먹으려고 하면 오히려 요요 오더라구요~ 서서히 자연스럽게 마음에서 받아 들여지면 그 때하면 되죠~!! 이번 생애 안되면 다음 생으로..ㅋㅋㅋㅋㅋ

비연 2021-01-10 20:35   좋아요 1 | URL
븅븅토토님... 흠.. 다음 생에 해도 되겠....죠....?? ^^;;;;;;

붕붕툐툐 2021-01-10 20:39   좋아요 1 | URL
아.. 비연님, 당근입니다!! 나에게 너그러운게 최고예요~ 그 후에야 다른 존재들에게도 너그러울 수 있으니까요!!^^

고양이라디오 2021-01-14 10:42   좋아요 1 | URL
저도 채식주의를 지지하고 채식주의자를 존경합니다만... 저도 이번 생에 채식주의는 힘들 거 같다는...

비연 2021-01-15 01:57   좋아요 0 | URL
고양이라디오님... 저도 사실은.. 이 책만 벗어나면 다시 육식의 세계에 머무르게 될 듯한.. 넘 스스로를 강박하지는 않으려고 합니다... ㅠㅠ

scott 2021-01-10 15:4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런 강추위에 비연님 세탁기 까지 . 꿈 너무 신경쓰지 마세요부디 as 센터에서 고쳐주시길 바래요

비연 2021-01-10 16:09   좋아요 2 | URL
으흐흑. 고쳐주시겠죠? 그냥 믿고 편히 쉬려 해요 ㅠㅠ

유부만두 2021-01-10 16:4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희집 세탁기도 (아마 급수관과 배수관이) 얼었어요. 빨래는 쌓여가고 내 맘은 에헤라 ... 에요. 이럴땐 게으른 성격이라 견딜만합니다;;;

비연 2021-01-10 16:42   좋아요 1 | URL
아 요즘 세탁기가 말썽 부리는 시즌인거군요 ㅠㅠ 그러려니 하고 견뎌야하겠다는... 쩝쩝;;;;;

붕붕툐툐 2021-01-10 20:02   좋아요 0 | URL
게으른 성격 소유자 여기도 한 명 추가요!!ㅎㅎ

고양이라디오 2021-01-14 10:40   좋아요 1 | URL
저희 세탁기도 같은 증상이었는데 아마 얼어서 그런 거 같습니다ㅎ

비연 2021-01-15 01:58   좋아요 0 | URL
다행히 AS를 부르지 않고도 해결이 되었어요! 아주 살짝 얼었었나 봅니다 :)

레삭매냐 2021-01-10 19:1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곳곳에서 빨래 전쟁이 벌어졌는데
비연님네 댁에서는 아예 세탁기가
장렬하게 전사하는 시츄라니...

얼마나 스트레스에 시달리셨으면
꿈에까정!

모쪼록 책으로 심란한 마음을 달래
보시길 조심스레 권해 봅니다.

비연 2021-01-10 20:32   좋아요 1 | URL
책으로 심란한 마음을 달래려고 했는데 <육식의 성정치>를 읽으면서 더 심란해진 ㅋㅋㅋㅋㅋㅋ
아 다른 책을 읽어야겠어요 ㅎㅎ

공쟝쟝 2021-01-10 19:2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앍 달았던 댓글이 사라졌어영 ㅠㅠ
비연님의 와인과 스테이크 사랑을 알기에 저는 눈물이 납니다 ㅠㅠ

붕붕툐툐 2021-01-10 20:03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ㅋ와인과 스테이크의 조화가 갑자기 확 와닿습니다...

비연 2021-01-10 20:32   좋아요 1 | URL
눈물...ㅜㅜ 와인 안주로 이제 뭘 먹어야 할까요. 치즈도 안되고..
견과류와 과일로만? 흐미...ㅜㅜ

다락방 2021-01-10 20:2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으앗 비연님은 열심히 읽는 중이시고 수연님은 다 읽으시고.. 저는 주말 내내 조카들하고 노느라 독서랑 세이 굿바이 였어요.
세탁기 빨리 고쳐지기를 바랍니다. 저는 조카들 돌아간 저녁, 와인과 김치찜(?) 먹고 있어요.. 육식의 성정치는 좀 더 있다가..

비연 2021-01-10 20:33   좋아요 1 | URL
와인과 김치찜... 뭔가 부조화스럽지만 또 조화로운.. 어쨌든 부러운.
<육식의 성정치>는 좀 이따 읽는 게 좋을 것 같은... 육식을 멀리 하게 되니 먹을 게 없어지는.

syo 2021-01-15 00:1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 책이 비연님 무의식에 영향을 크게 끼치긴 끼쳤나봐요.
고장 난 건 세탁긴데, 다시 돌아오지 않은 건 ‘냉장고‘야....

비연 2021-01-15 01:49   좋아요 1 | URL
헉. 전혀 모르고 있었는데 다시 보니 .. 이런. 요즘 <육식의 성정치> 때문에 냉장고 안의 고기를 자꾸 생각해서인가....ㅠ 내일 pc 들어가 고치리라. 아 나의 무의식..ㅠ
 

아침에 일어나보니 유효기간이 다 된 계란 4개가 생각났다. 아차. 한꺼번에 4개를 다 부쳐 먹을 수도 없고 어쩌지. 하다가 계란말이를 해먹자 했다. 계란 4개를 톡톡 깨어 노른자와 흰자를 설렁설렁 섞고 소금을 뿌리고 나서는 속으로 넣을 파를 쏭쏭 썰었다. 그리고 후라이팬을 달군 후 계란을 후욱 부어 살살 저어주며 익히고 말고 파를 뿌리고... 하하. 그렇게 해서 계란말이 일곱 덩이가 완성되었다. 아래에 3개밖에 없는 건... 4개가 내 뱃속으로 갔기 때문이죠 흠흠.

 

 

 

 

그깟 계란말이 하나 한 거 가지고 무슨 사진을 올리고 설명을 하고 난리란 말이냐. 비웃음을 당해도 싸지만, 오늘 아침 이걸 하면서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비연. 이제 살림이란 걸 하는구나. 뒤늦은 나이에 독립이란 걸 한 게 2018년 7월이었다. 한참 전에 마련한 집에 계속 전세를 두면서도 나가 살겠다는 마음은 없었는데 이 때 불현듯, 아 나가 살아야겠다 라는 마음이 솟구치는 바람에 그냥 불쑥 해버린 독립이었다. 처음에는 정말 닦고 쓸고.. 청소를 거의 3일에 한번씩 하고 장도 모자랄까봐 꾸역꾸역 사서 쟁이고 요리도 막 요리책을 보면서 뭔가 그럴싸한 걸 만들려고 애쓰고. 사실 이건 집이 아니라 거의 노동의 대상이었다. 생각해보면, 그게 집이 내 집 같은 느낌이 없어서였던 게 아닌가 싶다. 수십 년 간 부모님 집에서 소공녀처럼, 해주는 밥 먹고 깨끗이 치워진 방에 들어가고 설겆이며 빨래며 엄마한테 다 미루고 살다가 (핑계같지만.. 엄마는 내가 살림에 관여하는 걸 절대 못하게 하셨다. 결혼하면 다 하게 된다고. 미리 고생하지 말라고. 어머니. 결국 결혼도 안할 걸 그냥 할 걸 그랬죠.. 흠냐) 독립이란 걸 해서 모든 걸 내가 다 하는 공간에 와 있다 보니 전부 내게는 뭔가 관리해야 할 대상이었던 거다.

 

이젠, 청소도 대충 하고 가끔 하고 (혼자 사는데 먼지는 왜 날까) 밥도 있는 재료로 대충 해서 먹게 되었다. 뭔가 좀 흐트러져 있어도 그런가보다 하고. 그래, 이제 이 집이 내가 '사는' 공간이 된 모양이다. 어느날 문득 일어나서 남은 계란으로 뭘 할까 하다가 후르륵 계란말이를 하는 비연이, 그래서 참 정감있다 싶은 거다. 계란말이 하나에 엄청 오바하는 아침이기도 하네. 크.

 

한 해가 다 갔다. 어떤 사람들은 2020년은 없애버려. 라고 하지만, 그렇게 따지면 없애고 싶은 해가 한두 해인가. 내 인생에서 좀 뺴버리고 싶은 해는 숱하게 많다. 오히려 2020년은 나만이 아니라 모두가 힘들었던 한 해라서 기억해두어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 질병과 두려움과 제약 속에서 나를 넘어 남을 생각하고 배려를 하고자 했던 한 해로.

 

올해 나는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다른 곳으로 옮겼다. 어쩌면 그래서 더 기억에 남나 싶다. 일이 힘들기도 했지만 고객 갑질에 마음이 너무나 멍이 들어서, 그것도 뭔가 좀 수준이 되는 갑질이 아니라 저열한 갑질을 몇 년 당하다보니 이러다 내가 미치겠다 라는 마음에 그냥 미련없이 그만두었다. 남들은 그 좋은 직장을 왜 그만두냐 좀만 버텨라 했지만 난 옮긴 이 곳에 만족하며 지내고 있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은 돈은 별로 안 되고 신경은 많이 쓰이는 일이지만, 내 적성엔 맞기도 하고 내가 이제까지 경험한 수많은 것들을 하나씩 하나씩 나눠주는 재미로 지내고 있다. 무엇보다 스트레스가 제로에 수렴한다는 게, 문득문득 놀랍다. 올해 초까지만 해도 스트레스가 너무 쌓여서 온 몸이 아프고 피곤하고 쓰러질 것 같던 나였는데 말이다.

 

**

 

여유가 좀 생겼다고 책을 많이 읽은 건 아니다. 하지만 기억에 남는 책읽기는 되었던 것 같다. 물론 책을 많이 사대기는 했다. 읽혀지지 못한 채 저렇게 계속 나를 째리는 책(무더기)을 보며, 내년엔 책을 사지 말아야지 라는 생각을 하지 않고 책장을 더 사야지 라고 생각하는 나는, 정말 제정신인가 싶지만.

 

 

O 마음에 남는 글귀

 

예전에 페이퍼에도 썼었지만, 올해 읽은 책 중에서 <다크룸>은 두고두고 잊지 못할 책이었고, 특히 마지막 문구는 계속 기억에 남아 내 생각의 향방을 좌우하고 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밀크맨>의 마지막 글귀. 묘하게 마음에 남는다.

 

 

 

 

 

 

 

 

 

 

 

 

 

 

 

 

 

아버지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녀가 살아 있을 때 그렇게나 자주 그랬던 것처럼 얼굴을 돌리고 있었다. 살아 있는 동안, 그녀는 자신이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에 답을 하기 위해 노력했다. 유대교도인가 기독교도인가? 헝가리인인가 미국인인가? 여자인가 남자인가? 너무 많은 상반되는 것들이 함께 존재했다. 하지만 그녀의 누워 있는 몸을 보면서, 나는 생각했다. 이 우주에는 단 하나의 구분, 단 하나의 진정한 이분법이 있구나. 삶과 죽음, 다른 모든 것들은 그저 녹아 없어질 수 있는 것들이었다. (p623)

 

 

 

 

 

 

 

 

 

 

 

 

 

 

 

 

나는 초저녁의 빛을 들이마시며 빛이 부드러워지고 있다는 것, 사람들이 부드러워진다고 부를 만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저수지 공원 방향으로 가는 보도 위로 뛰어내리면서 나는 빛을 다시 내쉬었고 그 순간, 나는 거의 웃었다. (p492)

 

 

O 페미니즘 책

 

여성주의 책 함꼐 읽기를 겨우겨우 따라가면서도 올해는 읽은 책들에서 많은 영감과 생각을 얻었다. 혼자 읽는다면 절대 다 끝내지 못했을 책들을 어쨌든 끝내는 나를 보며, 함꼐 읽기라는 것의 소중함과 힘을 느꼈다.

 

 

 

 

 

 

 

 

 

 

O 우리나라 사람이 쓴 책

 

우리나라 사람이 쓴 책 중에서 소설은 읽은 게 손에 꼽을 정도다. 대신에 자기 이야기를 쓴 책, 하지만 허접한 일상생활 얘기로 내 머리를 어지럽히는 대신 자신의 분야에서 뭔가 확실히 해내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책들이 내게 훅 다가왔다. 읽는 내내, 이것이 모국어로 글을 쓰는 사람들의 책을 읽는 기쁨이구나 라고 느꼈었다.

 

 

 

 

 

 

 

 

 

 

O 새로운 발견들

 

원래 좋아했던 작가들, 샤론 볼턴, 리베카 솔닛, 마이클 코넬리, 미야베 미유키, 요 네스뵈 등의 책이야 나오는 대로 잡아서 읽고 있지만, 올해 새로 내 머리에 각인된 작가들이 몇 있다. 도나토 카리시, 할레드 호세이니,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마여 안젤루, 베르나르 미니에. 그리고 아마 지금 읽고 있는 콜슨 화이트헤드도 그 대열에 합류할 것 같다.

 

 

 

 

 

 

 

 

 

 

 

올해 처음 읽은 책은 <가재가 노래하는 곳>이었다. 그리고 이제 내일까지 읽을 책은 <니클의 소년들>. 역시나 소설로 시작하여 소설로 끝내는 비연. 둘다 가슴아픈 소설이라는 것도 공통적일까.

 

 

 

 

 

 

 

 

 

 

 

얘기가 길었다. 흠냐.

 

올해도 알라딘과 함께 해서 즐거웠던 한 해였다. 책을 읽는 사람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고는 하지만 알라딘 서재에 들어와보면 너도나도 열심히 책을 읽고 글을 올리는 분들이 많아서 마치 딴 세상에 와 있는 것마냥 취해 살 수 있었던 것 같다. 모두에게 감사하고, 여전히 이 곳의 일원인 내게 힘을 내라고 얘기해주고 싶다.

 

내년, 신축년. 여전히 책 많이 읽고 글 많이 올리고 모두가 건강한 알라디너들이길. 그 속에서 나도 열심히 읽고 쓰는 한 해가 될 수 있기를 바래 본다. 올해 잘 마무리하시고, 새해 복복복 왕창 받으시길. 꾸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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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20-12-30 11:1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언제 이렇게 책에 대한 글을 쓰게 될까요. 분발하겠습니다!😅

비연 2020-12-30 11:24   좋아요 0 | URL
라로님. 무슨 말씀을.. 라로님이 올리는 사는 이야기들, 책 이야기들이 얼마나 제게 큰 위안인데요^^
앞으로도 쭉 이렇게 마음 나누며 지내면 좋겠어요. 새해 복!

다락방 2020-12-30 11:1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 너무 좋은 페이퍼네요, 비연님. 계란말이 에세이 최고에요.
저도 퇴근후 제가 저녁을 먹거나 주말에 식사 후에 제가 설거지를 하려고 하는데 엄마가 제발 신경 좀 쓰지마! 하고 속상해하세요. 가사노동이 엄마의 몫인게 싫지만 엄마는 또 딸에게 가사노동의 짐을 지우진 않으시려 하는것 같아요. 어쨌거나 저도 독립할 예정입니다.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요.

알라딘에 오면 너무 즐겁지만 읽고 싶은 책이 늘어가서 돌아버릴 것 같아요. 오늘 비연님의 페이퍼로 제가 사두고 안읽은 다크룸과 밀크맨이 떠오르면서 으앗 지금 당장 집에 가서 꺼내읽고싶다! 하게 되지 뭡니까. 후훗.

여성주의 책 같이읽기에 함께해주셔서 감사해요. 고운, 고마운, 소중한 인연입니다, 비연님.
내년에도 우리 서로 격려하며 함께합시다.
해피 뉴 이어!

비연 2020-12-30 11:21   좋아요 1 | URL
엄마란 참... 뭐라 설명할 수 없는 큰 존재임을 다시한번 느껴요.
다락방님의 독립, 응원합니다! 부모님과 함께 하는 것도 좋지만, 독립하면 또 다른 장이 열리는 것 같아요.

다락방님, 함께 주셔서 감사해요. 말로 표현은 안하지만, 항상 소중하게 마음에 담아두고 있는 분입니다.
늘 지금처럼, 그렇게 서로 힘이 되어주면 좋겠어요. 새해 복!

수이 2020-12-30 12: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계란말이 해줘요 비연님 이라고 떼쓰고 싶어지게끔 만드는 페이퍼, 노랑노랑 따끈따끈. 다크룸 저 퐁당 넣었어요 방금 장바구니 안으로 크크크크. 비연님 성우 같은 목소리로 언젠가 책 읽어주시면 좋겠다 하고 생각했습니다. 2020년 빠이빠이, 새해 더 자주 함께 할 수 있기를.

비연 2020-12-30 14:54   좋아요 0 | URL
언젠가 어느 곳에서 계란말이를 해서 드리는 걸로 ㅋㅋㅋ <다크룸> 넘 좋습니다. 추천.
제 목소리가... 이제부터 날계란 먹으며 목소리를 가다듬어야겠어요.
함께 해서 좋은 2020년이었어요. 함께 하여 더 좋을 2021년이길. 새해 복!

미미 2020-12-30 13: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올해 덕분에 여러권을 더 질렀습니다ㅋㅋㅋㅋ내년에도 열심히 따를께요! 좋은 리뷰 많이많이 주세욤^^*

비연 2020-12-30 14:54   좋아요 1 | URL
앗. 저의 책 뽐뿌질에 ㅎ 미미님 항상 감사드려요. 자주 찾아주시고.
미미님 글 올릴 때마다 정성스레 보고 있는 1인이 여기 있음을 기억해주세요~
새해 복복복! 입니다~

붕붕툐툐 2020-12-30 13:3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부치면 4개를 못 먹지만 말면 4개를 먹을 수 있다는 꿀팁이 담긴 페이퍼네요!!ㅎㅎ
비연님께는 많은 변화가 있었던 한 해군요~ 여러 책과도 함께 하셨고요. 무엇보다 이직으로 스트레스가 확 줄으셨다니 정말 축하드릴 일입니다. 내년에도 좋은 글 많이 기대할게요!! 해피 뉴 이어😊

비연 2020-12-30 14:56   좋아요 0 | URL
오홍. 제가 미처 깨닫지 못한 팁을 일깨워주시는.
사실 계란 4개를 부치면 혼자 먹기는. 말면 두고두고 먹으니 ㅋ
올해 변화도 있었고 무엇보다 스트레스 퐝퐝 한 해라 저로선 후회는 없는 한해이긴 합니다^^
붕붕툐툐님도 올해 감사드리구요. 내년에도 여기에서 우리 재미난 시간 보내보아요. 새해 복!

몰리 2020-12-30 14: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직! 형광펜 칠하면서 읽었습니다! ㅎㅎㅎㅎ
전 이제 기승전이직러.

비연 2020-12-30 14:56   좋아요 0 | URL
몰리님..ㅋㅋㅋ 전 이직 했으니 제 기운을 몰아 몰리님께 전달하겠나이다. 이직 에너지 퐝퐝!
내년엔 뜻하는 바 다 이루실 수 있기를. 올해 몰리님을 알게 되어 넘 좋았습니다. 새해 복!

2020-12-30 15: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12-30 16: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단발머리 2020-12-30 16: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다크룸은 읽은 책이라 조금도 부럽지 않으나 이 예쁘고 탱탱한 계란말이는 엄청나게 부럽네요.
계란말이 장인 비연님의 요리 사진은 언제봐도 근사합니다.
제가 아침에 살림 페이퍼 썼거든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침부터 썼는데 아직도 못 올렸다 말이지요. 비연님 페이퍼에 살림 이야기 읽다보니까 어머! 아침에 비연님이랑 나는 같은 ‘살림 우주‘에 있었어!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웰컴투 살림 우주!!!
새로운 생활에 만족하시는 것 같아 제가 해드린게 없는데 엄청 뿌듯합니다. 비연님이 행복하셔서 기뻐요. 내년에도 잘 부탁드려요!

비연 2020-12-30 16:51   좋아요 0 | URL
아침에 저와 함께 ‘살림 우주‘에 단발머리님이 계셨다니. 감동. ㅎㅎㅎ
역시나 먹고 사는 일을 생각하다보니 하루에 몇 번씩 그 우주에 들어가게 되네요^^;
올 한 해 정말 감사했어요. 단발머리님의 푸근함에 알게 모르게 많이 위안받았답니다.
내년에도 잘 부탁드릴게요. 꾸벅. 새해 복!

페넬로페 2020-12-31 00: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비연님!
폰으로 화살표를 눌러도 안되어
이곳으로 와서 댓글을 답니다^^
저도 비연님 뵙게 되어 너무 좋아요~~
반갑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비연 2020-12-31 01:40   좋아요 1 | URL
페넬로페님, 새해에도 자주 뵈요^^ 복 많이 받으시구요!

공쟝쟝 2020-12-31 07: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뽀오오얀 계란말이!! 그렇군요, 저도 앞으로 청소는 점점 게을러 지겠군요 ㅋㅋ 새삼 올해 모두들 애썼구나 싶으면서, 감동스러운 글~ 이직하신 비연님 잘하셨어요 ^.^ 내년에도 만나요! 새해복많이 받으세여~!!

비연 2020-12-31 11:12   좋아요 0 | URL
ㅋㅋ 청소를 하루 이틀 자꾸 미루는 스스로를 처음엔 못 견뎌하다가 나중엔 저절로 합리화하는 과정이 있나이다. ㅎㅎ 쟝쟝님 올해 너무 고마왔어요. 내년엔 쟝쟝님의 찬란한 한 해가 되길.. 새해 복복복!

scott 2020-12-31 22: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와 !계란말이
어떻게 모양이 흐트러지지 않게 잘구워졌어요 ㅋㅋ
이건만 먹어도 행복한 1人

비연님 서재방에 2021년 연하장 놓고 가여 ㅋㅋ

새해 행복 가득하시길 바랍니다.

*2021년 신축년
┏━━━┓
┃※☆※ ┃🐮★
┗━━━┛
새해복많이 받으세요

비연 2020-12-31 23:27   좋아요 1 | URL
scott님~ 감사해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2020-12-31 22: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12-31 23: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카스피 2020-12-31 23: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계랜말이 맛있어 보이네요.비연님 새해 복많이 받으세요^^

비연 2020-12-31 23:58   좋아요 0 | URL
어멋 카스피님! 오랜만입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새해엔 더 자주 뵈요^^

psyche 2021-01-07 09:1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비연님 어머니께서 결혼하면 다 한다고 미리 고생하지 말라고 하셨다고 하니 딸들이 오면 ‘야 이제 니네가 좀 해라. 집안 일 미리 할 줄 알아야 해‘하면서 누워버리는 제가 엄청 찔리네요. ㅠㅠ
비연님께서 올려주시는 추리소설 보면서 열심히 투 리드 리스트 늘리고 있답니다. 올해에도 좋은 책 많이 소개해 주세요~

비연 2021-01-07 10:23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 psyche님. 저희 어머니는 옛날 분이라..^^
추리소설 보면서 리스트 늘리고 계신다니 이렇게 반가울 수가 없어요.
추리소설 좋아하는 분들과의 만남은, 늘 즐겁습니다 ㅎㅎ
올해도 열심히 읽고 올릴게요! 자주 들러주세요^^
 

전혀 연관성 없는 두 개를 제목으로 달고, 비연 좋단다..ㅎㅎ (다시 봐도 아무 연관성이 없군..)

 

내가 열심히 하는 SNS는 페이스북이라서 여기에 올라온 글들에 영향을 많이 받곤 하는데, 누군가 최근에 오뚜기 크림진짬뽕이 맛나다며 꼭 먹어보라고 추천의 글을 올렸었다. 원래 면은 좋아해도 라면이나 짜파게티나 이런 것들은 일년에 몇 번 먹는지 두 손으로 셀 수 있을만치 (발은 안 써도 된다) 드물게 먹는 나이건만, 그걸 보고 흠? 이거 먹고 싶은데? 라는 생각이 들어버린 거다. 책만큼이나 손가락이 빨리 돌아가는 것은 먹는 것. 바로 주문. 그 다음날 도착.

 

그걸 오늘 먹어보았다. 그냥 짜파게티랑 똑같이 만들면 된다. 물을 끓이고 면을 삶고 물을 거의 덜어낸 후 같이 들어있는 소스들을 몽땅 부어 마구 비벼댄다. 끝. 심지어 짜파게티처럼 위에 오이를 송송 썰어 놓으면 더 좋습니다 이런 설명도 없었다. 맛은.. 오묘하다. 약간 매콤하기도 하고 약간 크림맛이 나기도 하고. 굳이 비교하자면 로제 파스타 비스무리한 맛이라고나 할까. 결론은, 괜찮으니 한번 드셔보세요. 이거. (요즘 먹는 걸로 열심히 뽐뿌질 중인 비연)

 

 

 

 

 

 

이걸 먹으면서 스마트폰을 열고 <여성주의책읽기> 2021년 1월-5월까지 목록을 본다. 올해 다 읽었는데 마지막 푸코에서 엎어져버린 아픈 기억을 안은 채. 그러니까 11개월을 성공하고 12개월째에 엎어졌..;;;; 그래도 <성의 역사 1>은 읽었다. 그리고 나머지 2-4권은 내년 상반기까지 무조건 읽고야 말 것이다. 불끈... 아뭏든, 내년 목록을 보면서, 경탄과 한숨이 함께 튀어나온.

 

 

 

 

 

 

 

 

 

 

 

 

 

 

 

 

 

 

 

 

 

 

 

 

 

 

 

 

 

 

 

 

 

멋진 목록이다. 여성주의책을 다시 읽을 생각을 하니 두근거리기는 하는데, 페이지수에는 움찔움찔. 3월은 832쪽. 새학기군요. 새학기되면 다들 바빠질텐데. 여성주의 책읽기도 바빠지는 것이군요. 수긍. 그러나 어지러움..ㅎㅎ 그래도 이 책들, 함께 읽지 않으면 사실 엄두를 내기 힘든 책들인지라 (특히 <사회주의 페미니즘>!) 즐거운 마음으로 다시 동참해야지 싶다. 3월부터 5월까지의 책은 또 구매를... 앗. 내년에. 올해 책구매는 지난 번에 끝났습니다. 終わりました。

 

***

 

어제부터 <니클의 소년들>을 읽기 시작했다. 초반부터 흥미진진이다. 역시 독서는.. 기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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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부만두 2021-01-01 22: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멋진 목록을 담은 멋진 글이네요. 참 알찬 책읽기를 하셨어요, 비연님.

비연 2021-01-01 22:30   좋아요 0 | URL
유부만두님, 감사합니다~ 저 목록의 책들을 사서 읽을 생각에 벌써부터 기대만발입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유부만두 2021-01-01 22:36   좋아요 1 | URL
계란말이 포스팅 부터 읽고 목록에 감탄하면서 라면 포스팅에 댓글을 달았네요. (제가 음식에 집중하는 편;;;)
니클의 소년들 금방 읽으셨네요. 안 어렵나요?

비연 2021-01-01 22:47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 그러셨군요~ 니클의 소년들.. 하나도 안 어려워요. 다만 마음이 너무 아픈 소설입니다..;; 꼭 한번 읽어보세요~^^

유부만두 2021-01-01 22:54   좋아요 1 | URL
네 읽어보겠습니다. ^^
 

 

사실, 내겐 연휴라는 게 큰 의미는 없지만, 그래도 연휴를 빙자하여 마음을 좀 놓고 쉬겠노라 생각했다. 일이 밀린다고 주말도 계속해서 일하는 날이 몇 달 계속되다보니 (그래도 회사 다닐 때에 비해서는 스트레스가 거의 없다고 생각되는) 몸이 많이 지쳤던 모양이다. 얼마 전부터 입 주위에 염증이 생기면서 간지러움을 동반, 알러지 비슷한 증상을 보이며 턱까지 벌겋게 내려오고 있고 발 뒤꿈치가 지속적으로 아픈 상태다. 발 뒤꿈치가 아픈 건 족저근막염 초기 증상일 수도 있다고 해서 걷는 것도 최소화하고 매일 스트레칭하면서 조심 중이다. 그래도 아직 상태는 별로다. 오래 가면 병원을 가봐야 하나 싶다.

 

아뭏든, 그래서 크리스마스 이브부터 이틀간 부모님 집에 가서 늘어지게 쉬고 웃고 떠들고... 그랬더니 많이 좋아진 기분이 들었다. 집에 돌아와 조금 푸근해진 마음으로 쉬엄쉬엄 일하는 중이다. 책을 거의 못 읽은 게 아쉬움이라면 아쉬움. 그냥 늘어져 있을 땐 영드나 미드를 보고 밥 해먹고 일하고 이런 날들의 연속이었다.

 

 

 

 

 

 

 

 

 

 

 

 

 

 

 

 

 

 

 

요즘 읽고 있는 책이다. 제목이 근사해서 골랐는데 제목 만큼은 못하고.. 그냥 그럭저럭 읽을 만하다고나 할까. 거의 다 읽어가기는 해서 올해 마지막 책은 뭘로 할까 미리 고민 중이다.

 

선배 언니가 친구가 코로나 때문에 고기집을 닫게 생겼는데 미리 주문해둔 고기를 소진해야 한다며 원가로 살 수 있다 해서 부모님과 나 먹을 것을 다해 1kg 정도를 샀다. 보아하니 아주 두툼한 게 고기가 좋아보였다. 이런 좋은 고기를 공급하는 가게인데 장사가 안되어 문을 닫아야 한다니. 쩝. 요즘 가게 하는 분들 어려운 분들이 많다고 하던데 정말 그런 모양이다 라는 마음에 고기도 고기지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까 해서 선듯 사겠다고 했다.

 

오늘 늦은 점심에 한 덩이를 끄집어 내어 후라이팬에 파프리카와 마늘을 송송 썰어 넣고 올리브유에 달달 구워서 와인과 함께 섭취해주었다. 오. 고기가 매우 맛났다. 질기지도 않고 비리지도 않고. 한우 투뿔 등심이라고 하더니 정말 그런 모양이구나 하는 마음을 가지고 배부르게 자알 먹었다. 덕분에 와인도 두 잔 마셔버린. 낮술이라기엔 늦고 밤술이라기엔 빠른 와인. 접시에 담으면 맛난 기운이 사라질까봐 후라이팬에서 굽고 있는 장면을 사진으로 찍어 업로드. 맛나보이쥬, 여러분. 크크.

 

 

 

 

 

 

 

 

일요일이 가고 있고 연휴가 막을 내리고 있다. 정상적으로 회사에 다니는 사람들은 오늘 이 밤, 정말 싫겠다 싶고. 회사라는 곳에서 벗어나니 그런 스트레스는 하나도 없다는 게 신기할 정도로 반갑다. 내가 정말 싫었던 건, 매일 쳇바퀴처럼 출퇴근을 반복하는 그 생활이었다 라는 생각도 들고.

 

아. 영드는 <인데버(Endeavour)>를 보았는데.. 아 이 영드. 현재 왓차에 나와 있는 시즌 6까지 다 보았고 올해 한 시즌 7를 배급해주길 학수고대하고 있는 중이다. 영국의 고풍스러운 경치와 더불어 정말 재미있는 영드다. 깨알 영드 홍보 中. 모스 경감 시리즈는 (<인데버>는 콜린 덱스터의 <모스 경감> 시리즈의 인물을 기반으로 한 가상의 드라마다) 책으로 여러 권 나와 있지만 해문 출판사에서 이제 더이상 번역을 해주지 않을 것 같아서, 오늘은 영어로 읽어볼까 하고 원서를 보관함에 푱푱 집어 넣어본다. 물론 저 앞에 날 째리고 있는 원서들이.. 여러 권... 아니 수십 권.. 있지만.. 흥. 일단 사두면 언젠간 보지 않겠니?

 

 

 

 

 

 

 

 

 

 

 

 

세상에. 이런 전집이 있었네. ... 이걸 보다니, 큰일이다. 14권인데. 안 본 걸로 할까? 다시금 번민하는 연말이다. 결국 사고야 말 것 같은 불길한(?) 예감에 떨리는 연말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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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0-12-27 20: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비연님 현재 알레르기 접촉 피부염상태인거 같은데 내일이라도 당장 병원예약 진료 받으세요 턱까지 벌겋게 내려오고 있다는건 자칫 만성 질환이 될수 있으니 진료 받으시고 빨리 치료받으셔야 합니다.

비연 2020-12-27 22:45   좋아요 1 | URL
아... 그래야 할까요.. 병원 싫은데ㅜ

수이 2020-12-27 23:0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 정갈한 사진이라니!! 저 저녁 먹었는데 왜 또 배가 고프죠;;;; 비연님 아프면 안돼요. 상태 봐서 쉬이 낫지 않으면 병원 가보세요. 언제 와인 마시죠 같이 ㅠㅠ

비연 2020-12-28 16:38   좋아요 0 | URL
언넝 낫기로 ㅠㅠ 와인 함께 할 날이 오겠죠? ㅜㅜ

라로 2020-12-28 01: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작년에 간호대학 다니면서 영구 엔데버 다 봤잖아요!!! 또 보고 싶어요. 모스 역할의 배우 분위기가 넘 딱이죠!!

비연 2020-12-28 16:39   좋아요 0 | URL
정말 느무 좋아요, 모스 역 배우요 ㅎㅎ 라로님 보셨다니 느무느무 반가움!

han22598 2020-12-28 11:1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고기 비쥬얼...짱입니다!

비연 2020-12-28 16:39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 비쥬얼만큼 맛도 있었다고 깨알자랑을. 우힛.
 

 

인생사, 하고 싶은 일만 하며 살 수 없다는 건 알만큼 알 나이이지만, 어쩐지 나이를 먹을수록 이제 하기 싫은 일은 안 하고 살고 싶다는 불타는 열망에 사로잡히곤 한다. 그 예전엔 여러가지 상황을 참고 나를 죽이고 그렇게 어찌어찌 했던 일들도 많았는데 (떠오르는 그 기억들. 짜증 솟구친다) 이젠 누가 뭔가를 얘기했을 때 상황을 생각하기보다 나를 먼저 생각하고 있음을 언젠가부터 알아차렸다. 그러니까 나한테 묻고 있는 거다. 너 이거 하고 싶어? 하기 싫다고 답해도 어쩔 수 없이 하게 되는 일들도 많지만, 그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게 되면서부터는 내 감정에 충실하게 되는 횟수가 조금씩 늘어나는 것 같다. 그럴 경우 그 당시 상황에서는 좀 난처하고 민망할 수 있지만, 조금만 지나면 어느새 편해져 있는 나를 느낀다. 좋다.

 

최근에도 그런 일이 있었다. 한달 전쯤 대학원 지도교수가 학회장이 되었으니 학회 일을 맡아달라고 연락을 해 왔다. 나는 대학원 지도교수랑 겉으로 드러내놓고 으르렁거리는 사이는 아니지만, 그냥 잘 안 맞아 힘들었었다. 서로 그걸 잘 알기 때문에 졸업하고 나서도 가급적 부딪히지 않는 방향으로 지내왔었고 그래서 그냥저냥 별일없이 지내온 편이다. 사실 학회장이 되겠다고 했을 때부터 나한테 그런 전화가 오지 않을까 내심 걱정은 했으나, 설마 나한테 라는 생각 때문에 깊이있게 생각 안하고 있다가 그런 전화를 받는 바람에 엉겁결에 하겠다고 말을 해버린 거다.

 

전화를 끊자말자 후회가 물밀듯이 몰려왔고 고민에 휩싸였다. 고민하다가 에잇 그냥 하지 뭐 그랬다가 아 그래도 아닌데 그랬다가.. 근데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대학원 지도교수랑 사이 틀어져봐야 좋을 게 없기 때문에 (진실로 그런 일이 벌어지면 골치아프다) 그냥 해야겠다 마음을 대충 굳히고 있었는데.. 올해를 마무리하고 내년을 생각하니 정말 마음이 힘들어지는 거다. 그래서, 그래서... 어제 메일을 썼다. 여차저차하여 못할 것 같다. 이거, 굉장히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그 이유라는 것이 좀 어설플 수밖에 없어서 대충 하기 싫다는 눈치를 보일 수 밖에 없기 때문이었고 대학원 지도교수는 그렇게 마음이 넓은 편이 아니라서였다.

 

어쨌든 어제 던지고 그냥 나는 편하게 잠을 잤는데 (후련했다!).. 아침에 답장이 왔다 좀 비비꼬는 말이긴 했지만 알았다고 왔다. 흠. 내가 할 일은 끝났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잘 했다는 생각이 든다. 내년 내내 힘들어서 속앓이할 나는 이제 없는 거다.

 

 

 

 

 

 

 

 

 

 

 

 

 

 

 

 

 

제주도 독립서점 책방무사에서 사온 이 책을 집어들어 읽다보니 작가인 장강명도 그런 류의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기 싫은 일은 하지 않고 내키지 않는 일에 시간을 쏟지 않으며 그냥 생긴 대로 사는 사람. 그러니 기자하면서 남들은 대학원 다니는데 본인은 글을 썼고 그러다 심지어 기자를 때려치고 전업작가의 길로 들어섰으니 말이다.

 

'인류를 사랑하는 건 쉽지만 인간을 사랑하는 건 어렵다' 는 명언이 있다. 내 기억에는 버트런드 러셀이 한 말 아니면 <피너츠>에 나온 스누피의 대사다. 어쨌든 이 말에 썩 동의하지 않는다. 인류와 인간을 동시에 사랑하는 건 얿다. 그러나 어느 한쪽만 사랑하는 것은 가능하다. 인류를 사랑하고 인간을 미워하는 것보다, 인간을 더 사랑하고 인류를 미워하는 편이 더 낫다. 아주 더, 굉장히 더, 쓰는 장강명과 말하는 장강명 모두 그렇게 생각한다. (p28-29)

 

장강명이 내 인생의 책이라고 꼽은 것 중에서 <악령>은 정말 반가왔다. 도스토예프스키 책 중에서 <악령>을 제대로 읽은 사람도 드물고 이게 제일 좋다고 하는 사람도 드물어서 말이다. 나도 개인적으로 이 책을 읽고 정말 충격을 받았었다. 제임스 엘로이의 <블랙 달리아>는 별로 일치하지 않는다. 읽었지만 큰 감명이 없었다는. 케인의 <포스트맨은 벨을 두 번 울린다>는 영화로 본 것 같다. 영화로 보고 나서 책을 읽지 않는 경우에 속하는데, 장강명의 글을 보니 책으로 한번 봐야겠다 싶은 생각이 든다. 조지 오웰의 <나는 왜 쓰는가>, 이것은 일치한다. 조지 오웰은 행동하는 지식인으로서도 좋지만, 저널리즘적인 글쓰기도 좋아한다. 얼굴에서 풍겨나오는 아우라 자체가 나는 정직합니다, 나는 굽히지 않습니다.. 이렇게 계속 유지하는 건 한 인간의 전체 인생을 볼 때 쉬운 일이 아닌데 조지 오웰은 그렇다. (안 그런 인간상, 그러니까 나이가 들수록 이전과 완전히 달라지는 사람이 어디 한둘인가) 미하엘 옌데의 <끝없는 이야기>도 예전에 재있있게 읽었던 기억이 있다. 이 책을 인생의 책으로 꼽은 건 조금 갸우뚱이었지만, 그 때 그 시절에 느꼈던 그 감흥이 아직까지도 내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한다면 가능한 이야기같다.

 

 

 

 

 

 

 

 

 

 

 

 

 

 

 

 

 

 

 

 

 

 

 

 

 

 

 

 

 

 

 

 

 

 

이 책 한권을 읽고 장강명을 좋아하게 될 지는 잘 모르겠다. 아직까진 그냥 조금 삐딱하지만 글은 잘 쓰는구나 정도의 생각. 다 읽고나면 느낌이 정해지려나.. 자 이제 일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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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0-12-17 14:2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비연님,‘지금은 괴로워 나중에 스스로를 행복하게 만드는 일‘ 하셨어요.

악령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구절
[삶은 고통입니다, 삶은 공포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행복하지 않습니다. 지금은 모든 것이 고통과 공포입니다. 지금 인간은 삶을 사랑합니다. 왜냐하면 고통과 공포를 사랑하기 때문이지요. 그런 식으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삶은 현재 고통과 공포를 대가로 주어진 것이며, 이것이 바로 기만이라는 겁니다. 현재의 인간은 아직 진정한 인간이 아닙니다. 행복하고 당당한 새로운 인간이 나타날 것입니다. 살아 있건, 살아 있지 않건 상관없는 인간, 그들이 새로운 인간이 될 것입니다. 고통과 공포를 이겨 내는 인간, 그가 스스로 신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때 신은 존재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도끼 선생은 시대와 세대를 뛰어넘는 천재 광인 (✯◡✯)

비연 2020-12-17 17:51   좋아요 2 | URL
ㅋ 저도 동감합니다.
<악령>은 참 놀라운 소설이죠. 여러모로. 흠.. 재독하고픈 열망이 몽실몽실..

유부만두 2020-12-17 15:2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블랙 달리아‘를 내가 왜 샀나 했더니 이걸 읽고 샀었군요.

비연 2020-12-17 17:51   좋아요 2 | URL
가끔 저도 그래요. ㅎㅎ 왜 샀지 하는 책이 있는데 이유는 있는.
전 <블랙 달리아> 읽고 곧 중고서점에 내놓았던 기억이..;;;;

2020-12-17 15: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12-17 17:52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