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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째 아이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7
도리스 레싱 지음, 정덕애 옮김 / 민음사 / 1999년 3월
평점 :
제목만으로 난 교육과 관련한 책인 줄 알았다. 막상 읽고 나니 좀 당황스럽기도 하다. 일종의 호러나 SF 영화를 본 듯한 기분도 들고 정치적인 뉘앙스가 있는(마치 귄터 그라스의 '양철북'처럼) 것도 같고 아니면 그저 평범한 일상에 대한 안일한 환상을 가지고 있는 가족 이데올로기에 대한 경고처럼도 느껴진다. 그다지 유쾌한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작가의 탁월한 문장력 덕분으로 책을 손에서 놓지 못하고 계속 읽을 수 밖에 없었다.
1960년대 영국. 가치관이 혼란스러워지고 사회에 불안과 살인과 실직이 만연하고 성(性)의 문란이 심각해지고 가족의 해체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있던 즈음, 해리엇과 데이비드라는 어찌 보면 매우 보수적인, 또 어찌 보면 매우 독특한 두 남녀가 한눈에 반하여 결혼을 하는 것으로 이 소설은 시작한다. 평범한 출발이다. 그들은 서른살과 스물다섯살의 젊은이들이었고 남자는 이혼한 부모 밑에서 자랐으며 여자는 비교적 안온한 가정에서 자랐다. 큰 집과 정원을 두고 여럿의 아이를 낳아 주위의 친지들이 언제라도 스스럼없이 찾아와 함께 즐길 수 있는 '그들만의 낙원'을 꿈꾸는 그 부부를, 주위 사람들은 반신반의하며 지켜본다. 첫 아들이 금방 생기고 둘째딸, 셋째딸, 그리고 넷째 아들이 차례로 태어나면서 사실 번잡한 일상사가 반복되기는 해도 그럭저럭 행복한 나날을 보내게 되는 그 부부는 그들이 꿈꾸었던 이상적인 가정으로 한걸음씩 다가서고 있음에 일종의 안도감을 느낀다. 물론 거기에는 경제적 지원을 하는 남자의 아버지와 육아와 살림을 도맡아주는 여자의 어머니가 있었긴 하지만, 가급적 크게 남들에게 기대지 않은 채 그들은 열심히 일하며 가정을 일구어나갔다. 그리고 불행은 다섯째 아이가 생기면서 시작되었다.
뱃속에 있을 때부터 광폭하고 엄마를 고통스럽게 하던 아이. 너무나 아프고 두려워 진정제를 입에 '쏟아 부을' 수 밖에 없게 하던 그 아이는 마치 외계인과 같은 모습으로 태어난다. 증오와 분노를 한가득 안고 주위의 애정을 거부하며 커가는 그 아이, 벤으로 인해 가정은 붕괴되고 서로 경원시하는 상태가 지속되며 주위에 몰려들던 많은 사람들도 하나둘씩 다른 데로 흩어져 간다. 한때 요양원(말이 요양원이지 거의 수용소인 곳)에 벤을 버려두려 했으나 차마 그러지 못한 엄마 해리엇으로 인해 잠시의 행복은 또 무너지고 그 짐을 엄마가 다 짊어지게 된다. 그리고 벤은 이 세상이 자기가 머물 곳이 아닌 양 이상스레 부유(浮流)하다가 자신의 비슷한 '종족' 들을 찾아 집단을 형성하고 그들만의 세계를 구축해나간다.
자신의 가정은 특별히 단란하고 특별히 이상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경고하는 걸까. 그녀는 데이비드에게 말하였다. "우린 벌받는 거야. 그뿐이야." "무엇 때문에?" 그녀의 목소리에 그가 증오하는 톤이 있었기 때문에 방어적으로 그가 물었다. "잘난 척했기 때문에. 우리가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우리가 행복해야겠다고 결정했기 때문에 행복해서." 책 속에 나온 이 구절은 아마도 그러한 메세지를 전달하는 지 모르겠다. 가정이라는 가장 작은 사회집단이자 일종의 보호막을 두른 존재는 가장 이기적인 집단일 수 있다. 문제가 되는 것들을 철저히 가리고 구성원들에게 가식적인 행복의 상태를 강요하기도 하는 그 불야성은 어느 한 순간 불거질 수 있는 작은 틈으로도 금새 붕괴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은 지도. 그리고 그 속에서 그 틈에 손가락을 끼우고 막아보려 하는 엄마 해리엇은 철저히 소외를 당하게 되고 결국 이렇게 소리친다. "이건 정말 희한해요. 이전에, 아무도 그 어떤 사람도 나에게 <네 명의 정상적이고 똑똑해 보이는 멋진 아이들을 갖다니 넌 정말 똑똑하구나! 그 애들은 모두 네 덕분이야. 훌륭한 일을 해냈어, 해리엇!>이라고 말한 사람은 없었어요. 아무도 이제까지 그런 말을 안했다는 것이 이상하지 않아요? 하지만 벤에 대해서는-전 그저 죄인이죠." 어떤 문제를 함께 풀어나가기 보다는 어떤 구성원에게 책임을 물거나 혹은 철저히 외면하는 사람들이 가족이라는 허울로 한 공간을 공유하는 존재들이라고 생각한다면 엄청난 비관론이 될까.
혹은 격세 유전자에 의해 생겨난 '에어리언'이 이 세상에 부적응한 채 살아가면서 우리에게 두려움과 불안감을 가중시킨다는 설정으로 하나의 호러물을 우리에게 선사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나의 일상을 침범하는 무서운 방해꾼이 동시대인이 아니라 저 먼 옛날부터 전해내려오는 다른 세계의 존재가 불현듯 끼어들어 공포를 자아내는 상황이나 인간 진화 과정에서 주류에 편입하지 못한 그 어떤 존재가 있었고 그들은 지하세계로 숨어들어가 자신들만의 세계를 형성함으로써 미래의 심각한 위협이 될 수도 있다는 설정 등이 예사롭지 않다. 이는 도리스 레싱이라는 작가의 다른 작품이나 일반적인 작품 세계에서 주로 엿볼 수 있는 내용이라 한다.
아뭏든 그것이 가족이데올로기의 문제이든 통제가 불가능한 유전자로 인한 괴물의 출현이든간에 작가는 우리의 평범한 일상이 그냥 그렇게 영위되는 것이 아니며 늘 위태하고 누군가로부터 위협받고 있는 매우 불안한 상태임을 규정한 채 그 속에서 인간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가에 대해 말하고 싶어하는 것만은 분명하다. 진화의 소산인 인간이나 가족의 형태로 하루하루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나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들은 어쩌면 신기루에 불과해서 훅 하고 불면 금새 흩트려질 허상이라고,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음산한 작품 분위기와 뭔가 해결되지 않은 것 같은 찝찝함이 책을 덮고 나서도 왠지 개운치 않은 맛을 남기기는 하지만 이 도리스 레싱이라는 작가의 다른 작품은 어떨까 라는 궁금증을 자아낼 정도로 이 책은 다른 소설류에 비해 많이 독특하고 재미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