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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대통령의 모자
앙투안 로랭 지음, 양영란 옮김 / 열린책들 / 2016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예전 아주 고전 영화 중에 롤스로이스 라는 차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다. 제목도 기억나지 않는 그 흑백 영화는 지금도 그 가치가 어마어마한 롤스로이스를 가지게 된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겨져 있었다. 처음에 롤스로이스를 산 사람은, 그 차 안에서 아내가 다른 남자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차를 팔아 치우고.. 뭐 이런 내용이었나. 아뭏든 비싼 차를 가진 사람들이, 그 차를 두고도 그닥 행복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리고, 차의 주인이 여러 번 바뀌는 동안, 내 어린 심정엔 차가 가엾다, 무슨 운명으로 저런 주인들을 만났나 라는 느낌마저 가졌던 기억이 어렴풋하게 남아 있다. 물건이란 건, 생명은 없을 지라도, 그렇게 사람들의 운명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 지도 모르겠다는 라는 생각도 함께 들었었던 것 같고.
이 <프랑스 대통령의 모자> 라는 책을 읽으면서 그 영화 생각이 났었다. 다니엘 메르시에라는, 그냥저냥 회사 생활 하면서 그닥 인정도 받지 못하는 한 남자가 어느날 가족들이 다들 자기 일을 하러 간 저녁 혼자 들렀던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미테링' 대통령을 만나게 되는 사건이라면 사건으로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미테랑이라. 잘 모르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미테랑이라는 프랑스 대통령이 상징하는 바는, 지금 생각해봐도 상당히 큰 것이었다. 레지스탕스 출신의 프랑스 최초 좌파 대통령. 잘할 수 있을까를 수없이 의심받았지만, 프랑스의 자긍심을 높이고 문화 수준을 한 단계 높였다고 평가받는 대통령. 그가 다니엘과 같은 공간에서 식사를 하고 있는 것이다. 떨리는 마음으로 대통령이 식사를 다 마치고 나갈 때까지 천천히 식사시간을 가졌던 다니엘은, 문득 대통령이 그의 모자를 두고 나갔음을 알게 되고, 순간적인 충동으로 자기의 모자인 양 쓰고 나가게 된다.
그리고 그 모자는 마술을 부리게 된다. 소극적이고 근근했던 다니엘 메르시에는 회사에서 딱 부러지는 의견을 제시함으로써 윗사람의 눈에 들게 되고 더 높은 자리에 임명이 되는 행운을 누리게 된다. 그러니까, 그 모자가 주는 힘. 프랑스 대통령의 모자라는 권위가 그에게 모자랐던 2%를 채워준 셈이 된 것인가. 대통령의 머리 위에 얹어져 부여되었던 파워가, 그 모자를 쓴 사람에게도 작용한 것인지. 그러다가 그 모자를 우연히 기차칸에 놓아두고 내리게 되고 다시 그 모자는 파니 마르캉이라는 여자의 손으로 넘어가고... 그렇게 우연을 거듭하며 사람들의 손에서 손으로 이동하던 모자는, 그 모자를 만나는 사람마다에게 인생을 변화시킬 수 있는, 상상할 수 없는 자신감을 부여하게 된다. 아. 이게 무슨 조화인지. 알라딘의 요술램프란 말인가.
이 소설은, '대통령의 모자'라는 상징적인 존재가 사람들에게 다가가면서 변화하고자 애쓰던 보통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는 모습들, 그러니까 소심하고 일반적인 사람들의 인생 역전극을 보여주는 재미가 있다. 그것이 알라딘의 요술램프이든, 마녀의 유리구슬이든 간에, 사람들은 어쩌면 그런 순간을 기다리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이런 생활을 타파할 수 있는 단 하나의 그 무엇. 그것이 아마도 '대통령의 모자'라는 모습으로 나타난 것은 아닐 지. 무엇보다 미테랑 대통령이라는 실제 존재했던 인물, 프랑스 역사에서 가장 손꼽히는 대통령을 소재로 작가의 상상력에 의해 이야기가 만들어졌다는 점이 가장 흥미진진하다. 마지막까지 가면, 작가가 미테랑 대통령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지도 알 수 있을 것 같고.
그는 수수께끼와 같은 말을 남기고 떠나갔다. 프랑스 국민에게 보낸 마지막 신년 인사에서 그는 의례적인 대통령의 새해맞이 인사와는 어울리지 않는 매우 당돌한 한 마디를 했다. 때문에 사람들 사이에서 이러쿵저러쿵 논란이 많았지만 어느 누구도 만족할 만한 해석을 제시하지는 못했다. 그 자신은 물론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았다. 오늘날까지도 이 문장엔 무려 461만 개의 댓글이 달려 있음을 구글에서 확인할 수 있다. 1994년 12월 31일 신년 인사를 마치기 2~3초 전, 그는 두 눈으로 카메라를 똑바로 응시한 채 이렇게 말했다. <나는 정신의 힘을 믿으며, 여러분들을 떠나지 않을 겁니다.> - p266
소설 말미에 있는 이 문장. 실제로 미테랑 대통령은 1995년 퇴임 후 1996년에 전립선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아마도 자신의 죽음을 앞에 둔 사람의 굿바이인사였을까. 그는 아직도 프랑스 국민들을 떠나지 않고 지켜보고 있는 것일까.
문득, 부럽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소설처럼, 대통령의 모자가 나에게 이렇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으려면, 그 대통령을 싫어해서는 안 되겠지. 그리고 이렇게 소설에서 대통령을 '마음대로' 묘사하려면 그만한 자유가 보장된 나라여야 하겠지. 그리고 나의 첫 소설에서 얘기하고 싶은 사람이 대통령이라니, 그 사람에게 애정이든 뭐든 그런 게 있어야 가능한 것이겠지... 우린 어떨까. 내가 식당에서 대통령의 모자를 주우면, 내 머리 위에 쓰고 싶을까. 심지어 그걸 쓰면 의기양양하게 내 인생을 바꿀 수 있는 자신감을 가질 수 있을까... 노 코멘트.
이 작가의 글솜씨가 마음에 든다. 나온 책 중에 <빨간 수첩의 여자>도 마저 사서 읽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