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수전 팔루디의 그 유명한 <백래시>를 읽지 않은 자로서, 먼저 <다크룸>을 송구한 마음으로 펼친 지 며칠 되었다. 일단 <백래시>보다는 <다크룸>이 좀더 읽기 쉬울 것 같아서였고 (회고록이라지 않은가?) 성정체성을 바꾸어버린 아버지의 이야기라니, 흥미가 마구 돋아나는 것을 억제할 수 없어서였다. <백래시>를 읽지 않아서 잘 몰랐는데 수전 팔루디의 맛깔진 글솜씨를 처음 시작할 때부터 알게 되어 매우 재미있게 읽고 있다. 나의 관심사는 사실 이런 거였다. 성을 바꾸면 사람이 바뀌는가? 그 사람의 역사가 수십 년인 수전 팔루디의 아버지같은 사람이 생물학적 수술과 호르몬제 투입 등으로 사람 자체가 바뀔 수 있는가? 이런 것이었고... 아직 1/3 정도 읽은 상태라 해답을 얻은 것은 아니지만 애초의 내 생각처럼 그들의 성향도 성향이지만 '여성'이라는 성별에 대한 스테레오타입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닌가 라는 의문을 수전 팔루디도 제기하는 것 같다.

 

"여자들이 좋아했죠. 하지만 나는 언제나 소녀가 되고 싶었어요. 여섯 살 때부터 꿈꾸기 시작했으니까. 여자가 된다는 것에 대한 모든 게 다 좋았어요. 다뤄지는 방식, 애지중지 보살핌 받는 거, 주목을 끄는 거. 남자로서도 그런 관심을 받을 수 있었다면 나는 수술하지 않았을지도 몰라요." (p213)

 

여자란 보살핌을 받는 존재이고 대놓고 보살핌을 요구할 수 있는 존재라는 생각. 남자로서 사는 것이 여자로서 사는 것보다 이점이 많으나 힘들다는 전제 하에 이런 일을 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을까. 그렇다면 트랜스젠더라는 사람들의 정체성은 무엇일까. 어려운 문제다. 각각의 케이스들이 다를텐데 뭔가 공통점을 뽑아내는 시도를 하는 게 의미가 있을 지도 아직은 잘 모르겠다. 

 

"나는 이제 공격적인 마초 맨을 가장하는 게 진절머리가 난다. 나의 내면은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지." 아버지는 이메일에 이렇게 적었다. 거의 40년이나 흘렀고, 아홉 개의 표준 시간대를 지나왔지만, 내가 그녀의 새로운 인격에서 그 폭력적인 남자의 아버지를 지워 버리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이혼 판결이 아버지를 '위험에 빠진' 피해자로 만들어 줬던 것처럼 간단하게, 새로운 인격이 그 폭력적인 자를 지워 버릴 수 있었다고 믿어야 했을까? 새로운 정체성이 이전의 정체성을 구원해 줄 뿐만 아니라 그 정체성을 삭제해 버릴 수도 있을까? (p91)

 

헝가리계 유태인이었으나 미국에 건너와서 유태인이라는 정체성을 그다지 인정하지 않고 살아온 아버지였고 가족에게는 더없이 권위적이었으며 심지어 폭력도 휘둘렀던 아버지였는데, 여성으로 성전환을 한 이후 달라졌다고 말한다면 믿기겠는가. 이 책에 끝에는 가야 수전 팔루디가 어떤 생각으로 결론을 맺는 지 알 수 있을테니 여기서는 문제제기까지만 하고 지나가겠다. 이 책을 다 읽고 나면 페이퍼를 한번 더 쓸 기회가 있으리라.

 

 

 

 

 

 

 

 

 

 

 

 

 

 

 

 

 

 

이 책을 사둔 건 좀 된 거 같은데... 잊고 있었는데 말이다. 우연히 보게 된 SBS 드라마 <하이에나>에서 주지훈에게 작정하고 접근한 김혜수가 살랑거리는 펌머리를 모로 하며 주지훈이 좋아하는 책에 대해 얘기하다가 도나토 카리시의 데뷔작을 얘기하면서 둘이 동시에 찌찌뽕, <속삭이는 자>! 라고 외칠 때 아.. 기억났다. 나 이 책 읽으려고 했었어. 서재를 뒤지니 아니나 달라 나왔다. 뭐 이런 일이야 비일비재해서 놀랍지도 않고. 아마 못 찾았으면 (구석에 쳐박혀서 말이다) 다시 샀을 거다. 그리곤 나중에 발견하겠지. 어멋. 이게 있었나. 사면 바로바로 좀 읽어라 비연...=.=;;

 

암튼, 드라마를 보고 책을 집어든 순서는 좀 웃기지만, 이 책 꽤 재미있다. 김혜수는 원서로 읽고 있었지만 (흥) 나는 그냥 번역본으로 읽고 있고, 뭐 번역도 잘 되어 있다. 킁. 미국 소설처럼 뻔한 비꼬는 듯한 유머를 날리거나 총알을 무슨 물세례처럼 퍼부어대는 폭력성도 없고, 일본 소설처럼 세상 끝에서나 만나볼 듯한 기괴함과 잔인함이 있지도 않다. 그냥 좀 진지하고 고통스럽고.. 하지만 템포가 느리지 않아 좋다. 실화가 바탕이라니 좀 소름끼치기도 하고. 아이들을 납치하고 죽이고 .. 어쩌고 하는 이야기는 정말 읽고 싶지 않은데 이 세상의 연쇄살인범들의 살해 대상은 항상 무방비의 여성과 아이들인지라 (!*#(*&)($)($*) 어쩔 수 없다 싶다. 그러니까 이 소설에서는 여섯 개의 팔이 발견된 거다. 팔만 여섯 개. 그것도 열살 안팎의 여자아이들의 팔만. 아 미친...

 

 

"우리는 이런 범인들을 '괴물'이라고 부릅니다. 우리 같은 인간과는 거리가 먼 존재라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와는 다른 차원의 존재라고 믿고 싶어 합니다." 게블러 박사는 학회에 참석할 때마다 그렇게 설명했다. "그런데 정반대로, 그들은 우리와 완벽히 똑같은 인간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와 비슷한 주변 사람이 이런 끔찍한 짓거리를 벌였을 거라는 상상조차 하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아마 우리가 지닌 원죄에 대한 대가일 수도 있습니다. 인류학자들은 이런 현상을 '범죄자적 이인증(depersonalization)'이라고도 말하는데, 이는 연쇄살인범 식별에 난관으로 작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에겐 약점이라는 게 있고 꼬리는 잡힐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괴물은 그렇지 않기 때문입니다. (p33)

 

사실 나는 사이코패스입니다, 라고 이마에 쓰고 다니면 좋겠는데 너무나 평범한 사람이고 가장이기도 하고 아빠이기도 한 사람이 그런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이 더 무섭다. 뭔가 표시나는 사람이 아니라, 혼자가 되면 마음 속의 악이 삐져나와 스스로를 지배하고 죽이고 뜯는 일을 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인간이 있다는 것.

 

.. 언론은 탐욕스럽게 사건을 파헤치고 삽시간에 버먼이 살아온 인생의 모든 측면을 남김없이 짓밟아버릴 것이다. 그의 자살은 자백과도 같은 효과를 발휘했다. 언론은 저 나름의 스토리를 양산해낼 태세였다. 한 남자에게 자기들 식으로 거침없이 괴물의 탈을 씌워놓고 나머지 문제는 다수결의 힘으로 밀어붙이는 식이었다. 언론은 그 남자를, 마치 피해아동들에게 행한 짓을 상상이라도 한 듯 조각낼 터였다. 자신들 역시 그 범인과 똑같은 짓을 하고 있다는 역설적인 상황을 인식하지도 못한 채 말이다. 언론은 이 사건을 통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피를 뿌려댈 것이다. 보다 자극적인 1면 기사로 구매욕을 부추기기 위해 아주 강한 향신료로 양념을 해댈 것이다. 배려도, 형평성도 없이. 그리고 누군가가 그런 사실을 지적하기라도 한다면 시사성이 강하고 편리하기 이를 데 없는 '알 권리'를 방패 삼아 자신들의 비인간적인 욕망을 감춰버린다. (p106)

 

어느 나라나 언론은 이런 건가, 싶어 씁쓸하다. 연쇄살인범의 스토리를 확대 재생산하면서 자신들도 그런 짓을 하고 있다는 걸 인지하지 못하는 언론이. 어디서 많이 보는, 우리도 언제나 보고 있는 양태가 아닌가. 그 주제가 연쇄살인이 아닐 뿐이지.

 

 

***

 

코로나 때문에 바깥 출입을 좀 자제하고 사니 모임도 없고.. 집에서 뭐 해먹고 얌전히 책 읽고 하는 시간이 나쁘진 않다. 강제적으로 여행을 못 가고 누굴 만날 수 없다는 게 좀 갑갑하긴 하지만, 매일의 생활 자체는 평온하다. 규칙적이고 깔끔하고, 술없고 과식없고 과한 말 없고. 그냥 내게로 침잠할 수 있는 기회로 삼고 있다.. 근데 여행은 좀 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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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0-03-08 21: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월요일에 회사 가면 다크룸..을 받을 수 있습니다. 저도 읽어보면 더 생각할게 생기겠지요.

속삭이는 자, 잔인하지만 참 재미있게 읽었어요. 비슷한 시기에 같은 책을 읽으면서 감상을 본다는 것은 정말이지 책읽는 사람들의 특별한 재미인 것 같습니다. 저는 방금 [성적 동의] 읽기를 마쳤고, 이제 다른 책을 들고 침대로 갈 예정입니다.

일요일 밤이라 너무 슬프지만 ㅠㅠ 그래도 남은 밤시간 잘 보냅시다, 비연님!

비연 2020-03-08 21:36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이 재미있게 읽었다고 해서 더 허겁지겁 읽게 된^^ 같은 책을 비슷한 시기에 읽는 기쁨이란, 정말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끼리 느낄 수 있는 특권 같은 거 같아요. 다락방님의 <다크룸>, 기대하고 있나이다.

일요일이 가고 있고... 아... 일요일... 잘 마무리하고 내일.. 힘차게는 싫고.. 일상적으로.
평화로운 밤 보내소서, 다락방님~
 

흐무~웃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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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0-03-05 11: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모리스 계속 고민했는데 사야겠어요ㅎㅎㅎㅎㅎ 대서당은 리버커판으로 사신거예요? 이전 판 가지고 있던 사람 갑자기 급슬픔 ㅠㅠ

비연 2020-03-05 12:01   좋아요 0 | URL
<대성당> 리커버판 맞아요! 전 원래 없었는데... 커버도 맘에 들고 해서 ㅋㅋㅋㅋㅋㅋ

다락방 2020-03-05 11: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니!! 저 속삭이는 자 주문하고 어제 받아서 읽기 시작했어요. 엄청 재미있어요!! 이런 우연이!
설마 비연님도 [하이에나] 보고 주문하신 겁니까? 으하하하하하하하하하핳하

4월 함께읽기 도서도 준비하셨군요. 멋진분! ♡

비연 2020-03-05 12:04   좋아요 0 | URL
앗. 다락방님! 벌써 <속삭이는 자> 주문해서 읽기까지!
원래 보관함에 있었는데 잊고 있었거든요...
[하이에나] 보다가 주지훈과 김혜수가 서로 찌찌뽕 하면서 좋아하는 걸 보다보니 갑자기 생각이!
그래서 바로 주문했어요. 엄청 재밌다니.. 저거부터 봐야겠다..룰루~

미리미리 준비하는 비연. 냐하하. 괜히 으쓱~ 아 근데 두꺼워요. 함께읽기 도서들은 일단 두꺼워요...
다 쌓으면 거의 벽돌 쌓은 것처럼 될 정도로... 그러나 그래서 읽고나면 더욱 뿌득.. 한 것이죠 ㅋㅋ

단발머리 2020-03-05 12:17   좋아요 1 | URL
이 놀라운 싱크로율!!
이것은 사랑인가! 우정인가! 🤣

다락방 2020-03-05 14:18   좋아요 1 | URL
저도 속삭이는 자 원래 보관함에 있었거든요. 그렇지만 자꾸 뒤로 밀리다가 잊어버렸더랬어요. 그러다 하이에나 보고, 어어 그거그거 청록색표지!! 하고 장바구니에 넣을랬더니 합본 개정판이 나왔더라고요? 으하하하. 그래서 예스에서 주문했지요. (매달 3천원 상품권 받아 주문)
트라우마 다 읽고 가부장제와 자본주의 읽을랬는데, 아니, 그 책이 배송이 안되잖아요? 그래서 에라이~ 하고 속삭이는자 시작했는데 헐.. 재미짐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니 이런 연쇄살인범 얘기를 그런데 재미있다고 해도 되나요 ㅠㅠ 엄청 이야기를 잘 썼어요!! 페이지가 훅훅 넘어갑니다.


함께읽기 도서들이 두꺼운 건, 함께 읽어야 비로소 그 책을 읽어낼 확률이 높기 때문입니다. 저만해도 [백래시] 시도만 몇차례 하다 못읽었는데, 함께읽기 하니까 어떻게든 읽더라고요. 이렇게 벽돌책들 함께읽고나서 책장에 나란히 꽂아두면 세상에 뽀대도 그런 뽀대가 없습니다.....

화이팅!!

비연 2020-03-05 21:03   좋아요 0 | URL
단발머리님... ㅋㅋㅋㅋ 냐하하~

다락방님... 정말 이런 우연 찌찌뽕이라니. 페이지가 훅훅 넘어간다고 하니 정말 아... 지금 읽는 책 (소설) 얼렁 다 읽어버려야겠어요. 으헝. 안 그래도 함께읽기 책들 한 켠에 나란히 나란히 꽂아 두었는데.. 뽀대 납니다. 네네 뽀대가 나요. <백래시>는 쳐다보면 한숨이 나오지만, 그러게 같이 읽었어야 헀는데... 하는 후회가 화악 밀어닥치지만, 꼭 읽어내리라.. 생각하는 책 중의 하나입니다. 힘!

공쟝쟝 2020-03-05 20: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갑분 하이에나... 제 지인들도 하이에나 하이에나 하던데!!

비연 2020-03-05 21:03   좋아요 0 | URL
전 김혜수 걸크러시 땜에 봅니다 ㅎㅎㅎ 내용이 대단히 뛰어나다던가 뭐 그런 건 아직까진 잘 모르겠는데 김혜수가 통쾌하게 이겨내고 하는 게 넘 멋져요. 하이에나. 추천!
 

 

 

 

 

 

 

 

 

 

 

 

 

 

 

사람들이 몰려서 연구하는 학문이나 분야를 우리는 '주류'라고 표현한다. 살면서 이 주류에 끼고 싶지 않은 사람은 별로 없을 테지만, 그 주류의 잘못된 점을 간파하고 주류가 아닌 일을 가치있게 만드는 일에 열심인 사람들도 있게 마련이다. 이 책의 저자 낸시 폴브레가 그런 사람들 중의 하나이다. 돌봄경제학. 경제학은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공부하는 학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허다한데 이 사람은 그거 다 외면하고 돌봄노동을 하는 사람들의 경제학, 그들에 대한 관심, 그들의 가치를 얘기하고자 한다.

 

 

현재의 GDP 지수는 실제로는 해를 끼치는 것들에조차 긍정적인 경제 가치를 부여한다. 예를 들어 대량으로 유출된 기름을 청소하는 데 돈을 썼다면 GDP는 상승한다. 기름을 뒤집어쓰고 죽은 가마우지나 물개는 아무 '가치'가 없으므로 GDP를 감소시키는 걸로 간주하지 않지만, 기름으로 범적이 된 해안을 청소하기 위해 고용된 노동자들의 임금은 GDP에 산입된다. 홍수나 태풍이 집과 건물을 파괴할 때 돈으로 평가한 가치가 손실되었다고 한다. 자원의 감가상각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나 공해가 수질이나 공기의 질을 떨어뜨리거나 기후의 변화를 야기하면 가치의 손실이라고 계산하지 않는다. 일차적으로 자연 자원에는 가치를 부여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아주 오래된 삼나무가 캘리포니아 원시 우림에서 잘려 나갈 때는 생산된 통나무가 팔린 액수만큼 GDP가 증가한다. 나무 자체에 체화되어 있는 자연 자원이나 생태학적으로 나무들에 의존하고 있던 식물과 동물 종들의 가치의 손실은 전혀 감안하지 않는다. '생산되지 않은' 것들로 간주된다. 우리는 어머니 자연을 우리 자신의 어머니처럼 당연시한다. (p111)

 

 

만약 내가 아래의 책을 읽지 않았다면 이 저자의 궤변인가 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을 거다. 그러니까, 우리가 경제지표로 삼는 그 너무나 일반적인 GDP를 부정하고 있으니까. GDP의 산정 방식에 우리가 너무나 당연시하지만 꼭 필요한 가치의 손실은 들어가지 않고 있다고 얘기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이런 논의들은 이미 다른 나라에서도 제기되고 심지어 위원회까지 꾸려서 얘기되고 있었다. 어디? 대표적으로 프랑스.

 

 

이 책의 서문에는 심지어 당시 프랑스 대통령이었던 니콜라 사르코지의 글이 실려 있다. 제목도 <GDP는 상승하는데, 사람들의 생활은 왜 더 어려워지나> 이다. 그리고 이렇게 시작한다. "'우리가 경제 성과의 측정 방식을 바꾸지 않는 한 우리의 행동은 바뀌지 않는다'는 것이 내 확고한 믿음이다." 놀랍다. 대통령이 이런 글을 써서 서문에 넣는 나라.

 

그리고 이 목적을 위해 만든 위원회는 조지프 스티글리츠, 아마르티아 센, 장 폴 피투시라는 놀라운 경제학자들이 참여했다. 이들 중 앞의 두 사람은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들이다.

 

국민의 희망사항을 들어주고, 그들의 복지를 위해 노력하는 정치 지도자는 정반대의 길을 걸을 것이다. 그들이 경제 성과를 자기 뜻대로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경제와 관련해 국민의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있다. 국민은 환경을 비롯해 삶의 질에 관한 여러 요소들에 관심을 갖는다. 그런데 현재의 계량 방식은 환경을 개선하면 성장 지표는 악화될 수 없다는 식의, 마치 둘 사이에 상쇄 효과가 있는 것처럼 말한다. 만약 우리가 행복지수를 측정하는 포괄적인 방식을 가진다면, 이런 성장 지표가 잘못됐다는 사실을 쉽게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환경이 개선된다면 통상적인 방식으로 측정된 산출지수는 낮아져도, 인류의 행복지수는 높아질 수 있다. (p25)

 

이 위원회 보고서(이 책)는 2010년에 나왔다. <보이지 않는 가슴>은 2001년에 쓰여졌고.. 그렇게 세상은 좋은 방향으로 생각이 전환되고 있는 모양이다. 우리나라처럼 천박하게 무슨 말을 해도 먹고 사는 것만 얘기하는 곳에서 이런 토론이 될 리는 만무하다는 게 정말 슬프지만, 어쨌든 이런 논의들이 세상의 지성인들 사이에서는 이루어지고 있다.

 

다시 <보이지 않는 가슴>의 이야기로 돌아와서... 나는 항상 이상하게 생각하는 게, 왜 엄마는 은퇴가 없나 이다. 아빠만 일을 가졌든 엄마와 아빠가 일을 다 가졌든 아빠는 직장에서 은퇴하면 집에서 자기 일만 하지만 엄마는 직장에서 은퇴해도 밥하고 설겆이하고 청소하고 빨래하고.. 이런 가사노동을 계속 이어가야 한다. 지금의 세대는 이렇게 완전히 도맡아 하는 건 점점 적어진다고 해도, 여전히 이 몫은 엄마다. 그래서 엄마가 힘드니 도움을 청하자.. 고 도우미를 들이면 그 분도 여성이다. 여성의 편안함을 위해 여성의 노동을 빌려야 한다. 딸이나 아들이 아이라도 낳으면 엄마가 도와주게 된다. 친정엄마 혹은 시어머니 찬스. 힘들다고 하면 보모를 들인다. 역시 여성이다. 나이가 들어서 요양원에라도 가게 되면 거기서 노인들을 돌보는 사람도.. 대부분 여성이다. 그러니까 낸시 폴브레의 문제제기처럼 이 세상은 이러한 노동이 버티고 있기에 제대로 돌아갈 수 있음에도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그 당연함 때문에 정당한 보수를 허락하지 않는다.

 

여성은 오늘날 엄청난 어려움과 긴장을 겪으면서도 돈벌이와 돌봄을 병행하고 있다. 후기 산업 사회의 복지 사회는 그 어려움과 긴장을 제거할 수 있도록 제도를 뜯어고쳐 남성도 여성과 똑같이 돈벌이와 돌봄을 병행할 수 있도록 해야만 한다. 이것을 보편적인 양육자라고 부를 수 있겠다. - 낸시 프레이저, <훼방받는 정의: 사회주의 이후 상황에 대한 비판적 고찰 (p310)

 

너무나 지당하다. 남성이 그렇게 하면 경제가 안 돌아간다.. 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있다면 입닥치라고 말하고 싶다. 설사 그렇게 해서 정말 경제가 안 돌아간다 해도 (그럴 리 만무하지만) 같은 지구상에 사는 사람들에게 같은 부담을 주는 건 당연한 것이다. 모성이라는 환상에 사로잡혀서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여성이라고만 생각하는 자체가 불평등이다.

 

교육의 사례를 상당히 많이 들었지만, 우리나라에서도 지금 상당히 문제가 많이 되었던 부분이지만, 평등이라는 것은 늘 그렇듯 하향 평준화가 아니다. 돈을 한쪽에만 몰지 말고 다 같이 돈을 투자해서 교육시키자 라고 하면 부유한 사립학교에서는 수준이 저하될 것을 우려한다. 그러지 말고 예산을 잘 짜서 다 같이 상향평준화할 수 있는 수준의 돈을 투자하면 된다.

 

우리는 타인을 더 돌보는 것이 더 나은 세상이라는 데 동의한다. 그러나 어떻게 돌봄을 조직하는 것이 좋은 방법이고 공평한 것인가에 동의하지 못하면 모두 돌보지 않으려는 유혹에 쉽게 빠져들 것이다. 정부를 이용하여 그런 조율 문제를 해결할 필요가 있다. 문제 해결에는 돈이 들 것이고, 남성에게서 여성에게로, 부모가 아닌 사람에게서 부모에게로, 부자에게서 가난한 사람에게로 자원의 재분배가 대대적으로 필요할 것이다. 원한다면 그것을 보모 국가라고 불러도 좋다. 나에게는 그 말이 가족 국가처럼 들린다. (p150)

 

 

그렇게 재분배하기 위한 철학의 대전환이 필요한 시점이다. 언제까지 한 쪽 성별에 기대어 낮은 보수와 낮은 대우를 주면서도 그걸로 충분하지? 그건 너의 자연스러운 본성이니 라는 말로 사람을 몰아가며 버텨나갈 수 있겠는가. 세상의 버팀목이 되는,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그게 사라지면 세상의 체계 자체가 위협될 수 있는 그런 곳에 관심을 더 기울이고 거기에 자원을 투자하고 그래서 평등하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가기 위한 노력을 하는 것을 멈추면 안되는 것이구나.. 이 책을 읽으면서 다시 한번 스스로에게 확인할 수 있었다. 세상이 변하는 것은, 작은 노력들이 모여 느닷없는 변혁을 통한다고 알고 있고 (<과학혁명의 구조>에서 말하는 것과 같은 방식이겠다) 따라서 지금 이 책처럼, 프랑스의 위원회처럼 조금씩 조금씩 문제를 제기하고 변화를 위해 화두를 던지는 것부터가 변혁의 시작이요 토대일 수 있겠다. 이것이 진보라면 진보일 것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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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0-03-01 20: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비연님 페이퍼 너무나 좋으네요...
그리고 GDP에 대해 지적한 책이 있었군요! 비연님은 이미 읽으셨고요! 아 너무 멋져.. 너무 멋져요 비연님. 비연님은 어떻게 알면 알수록 더 멋진가요...멋진분.. 저는 낸시 폴브레가 지디피 지적하는 부분 읽으면서 너무 짜릿했어요! 다들 지디피 지수로만 세상을 논하는데 대체 누가 이렇게 지디피에 대해 지적할 수 있는가, 하면서 짜릿짜릿. 그런데 바야흐로 시간은 흘러 그것의 문제점에 대해 지적하는 사람들이 늘어가는군요. 좋다...

좋습니다, 비연님.

읽느라 고생하셨어요. 글도 잘 읽었습니다!

비연 2020-03-02 09:25   좋아요 0 | URL
부끄..;;; 가끔 경제학이나 사회학 책을 읽는데, 이런 진보적인 사상들에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할까 궁금하거던요. 근데 <보이지 않는 가슴>을 읽으면서 이 대목을 발견했을 때 아 진보라는 것이 일어나고 있구나. 많은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곳을 들여다보려 하고 있구나 라는 마음에 감동이... 참 좋았습니다.

공쟝쟝 2020-03-01 20: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돌봄이 자연화, 당연시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폭력들이 있었을까요. 아니 그 노동을 보이지 않는 노동으로 만들어버리고 세계를 논한 남성 경제학자들은 얼마나 한쪽눈만 뜨고 있었던 걸까요. 아무리 자기가 선자리에서만 보이는 법이라지만, 분명 보였을 어떤 부분을 보이지 않았다고 속편히 넘겨버리고 거기서 이론을 쌓고 논하는 자신감. 아아, 인류여. 그러니 안풀리지 경제여. 저도 2월의 도서 조금씩 읽고 있어요!! 일단은 1월도서 마무리 짓겟나이다 (찡긋!!)
다 읽고 나서 또 읽을게요 비연님 홧팅! ㅋㅋ

비연 2020-03-02 09:26   좋아요 1 | URL
요즘 읽는 책들이, 기존의 관념이나 만연해있는 상식을 빙자한 불합리들을 뽑아내고 반격하고 비판하고 대안을 제시하고.. 그래서 많이 배우고 사실 그 이전에 매우 통쾌합니다. ㅎㅎㅎ

쟝쟝님, 많이 바쁠텐데 1월 책도 다 읽어가고 2월 책도 읽고 있고.. 넘 멋지세요!

마태우스 2020-03-01 22: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정말 이 페이퍼 너무 좋습니다. 환경자원은 GDP로 산정이 안된다는 말, 충격입니다. 전혀 모르고 있었네요. 글구 가사노동에 대해서는 백번 동의합니다. 저도열심히 하겠습니다.

비연 2020-03-02 09:27   좋아요 0 | URL
마태우스님. 부끄부끄.. 입니다. 마지막 문장, ˝저도 열심히 하겠습니다.˝에서 빙그레~ 가 되네요.

블랙겟타 2020-03-16 23: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비연님, 저도 이런 방향으로 이 책에 대해서 쓰려고 했는데 생각이 안나서 반영을 못했었는데요.. 비연님이 이런 페이퍼를 써주셔서 다시 생각이 났어요. 제가 읽었던 ‘GDP의 정치학‘이라는 책에서도 비슷하게 말한 부분이 있었어요. GDP는 커다란 거짓말 위에 세워진다고요. 그렇게 치면 GDP를 한방에 올리는 법이 있죠. 바로 전쟁이지요. 그것도 다른 나라에서 하는 전쟁입니다. 현대에 벌어지는 전쟁시기야 말로 국가가 총 동원해서 군수물자들을 폭발적으로 생산하는 때이지요. GDP수치에 엄청나게 반영될 것입니다. 이것이 모두가 행복하게 되는 것일까요? GDP가 현실적이지 않다고 다들 알고 있으면서도 이 수치로 표현해내는 것이 아주 쉽고 강력하기 때문에 아직까지 사용되고 있다고 생각해요... ㅠㅠ 비연님 페이퍼를 읽다가 갑자기 생각이 났었네요. 좋아요는 누른지 꽤 지났지만 이제서야 (응?) 댓글 쓸 내용이 생각이 나서 이렇게 남김니다. *^.^*

비연 2020-03-17 09:14   좋아요 0 | URL
GDP라는 게 너무나 일반적인 수치로 각인되어 있어서 여기에 대해 사실 의문을 가져본 적이 별로 없는 것 같아요. 근데 이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행복이란 무엇인가 잘 사는 것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철학적 고민들을 하는 분위기가 참, 세상은 뭐라뭐라 해도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게 아닌가 라는 생각에 감동까지 들었어요. 겟타님, 관련 책들 읽으면 페이퍼 써주세요~ 전공자의 관점도 듣고 싶습니다!

근데 갑자기, <가부장제와 자본주의> 언제 다 읽지? 라는 생각이 드네요.. 흐미.
 

 

 

 

 

 

 

 

 

 

 

 

 

 

 

 

자자와 캄빌리의 아버지 유진은, 주변에는 후한 인심과 깊은 신심으로 명망이 높은 인사이지만, 집안에서는 폭군이다. 폭력적이고 실제 폭력도 휘두르며, 자식과 아내의 일거수일투족을 통제하려 할 뿐 아니라 자신의 광신을 강요하고 일과표를 통해 의무를 강요하는 사람이었다. 십수 년간 그렇게 살아왔기에 그들은 두렵고 공포에 떨었지만 이렇게 사는 것만이 인생이라는 생각 속에서 아버지의 비위를 맞추고 아버지의 칭찬에 마음 푸근함을 느끼며 살아간다.

 

"1등은 누가 했니?" 마침내 아버지가 물었다.

"친웨 지데제요."

"지데제? 지난 학기에 2등 했던 애 말이냐?"

(중략)

"거울을 봐."

나는 아버지를 빤히 쳐다봤다.

"거울을 보라니까."

거울을 받아서 들여다봤다.

"네 머리가 몇 개냐, 그보?" 아버지가 처음으로 이보어를 섞어서 물었다.

"하나요."

"저 애도 머리가 하나지 두 개가 아니잖니. 그런데 왜 쟤가 1등을 하도록 놔뒀지?"

"다시는 그런 일 없을 거에요, 아버지." (p55, 63)

 

아버지가 정한 일과표에 따라 살아가는 아이들. 대화는 없고 복종만 있으며 웃음은 없고 기도만 있는 집안. TV를 볼 수도 없고 이교도라 칭하는 나이리지아 전통 음악이나 풍습을 가까이 할 수 없는 상황. 이걸 어길 경우 날아드는 폭력. 아버지 유진은 성당에 다니지 않는 자신의 친아버지 파파은누쿠도 이교도라 하며 모른 체 하고 그 옆에 아이들이 머무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아버지는 그 집안에서 신이었다. 천주교의 하나님이 신이 아니라 자기가 신이었다.

 

"아니퀜와가 내 집에서 뭘 하는 거야? 우상 숭배자가 내 집에서 뭘 하고 있는 거냐고! 당장 나가!"

"내가 자네 부친과 동년배인 건 아나, 그보?" 노인이 물었다. 그가 허공에서 흔드는 손가락은 아버지의 얼굴을 가리킬 의도였지만 가슴께에서만 맴돌다 그쳤다. "자네 아버지가 엄마 젖을 먹을 때 나도 엉마 젖을 먹었다는 걸 아는가?"

"내 집에서 나가!" 아버지가 대문을 가리켰다. (p92~93)

 

자신이 믿는 종교 이외에는 다 부정하고, 특히 나이지리아 전통신앙을 믿는 자들을 악마라 여기는 아버지에게는 노인도 없고 아버지도 없고... 그냥 부숴버려야 할 대상일 뿐이었다.

 

... "악마가 내 집에 텐트를 쳤나?" 아버지가 어머니를 돌아봤다. "당신은 가만 앉아서 애가 공복재 어기는 걸 보고만 있었어, 마카 은니디?"

아버지는 천천히 벨트 버클을 풀었다. 몇 겹의 갈색 가죽으로 만든 무거운 벨트에 차분한 색 가죽을 씌운 버클이 달린 것이었다. 그것은 먼저 오빠에게, 어깨를 가로질러 내려앉았다. 그다음에는 두 손을 들어 막는 어머니의 위팔, 성달 갈 때 입는 블라우스의 스팽글 달린 부푼 소매로 싸인 위팔에 내려앉았다. 그리고 내가 그릇을 내려놓는 순간 내 등에 내려앉았다... (중략)

아버지가 오빠와 나를 홱 끌어안았다. "많이 아팠니? 살갗이 터졌니?" 아버지가 우리 얼굴을 살피며 물었다. 나는 등이 욱신거렸지만 아니라고, 아프지 않다고 말했다. 죄악을 좋아하는 것에 대해 얘기하며 고개를 흔드는 아버지는 마치 뭔가에, 떨쳐 낼 수 없는 뭔가에 짓눌린 듯한 모습이었다. (p131, 132)

 

악마는 너다... 폭력적인 인간의 전형이다. 자기가 정한 규율을 지키지 않았을 때 때리고 심지어 벨트를 사정없이 휘두르고 나서 마치 나는 너희를 사랑해서 그랬다는 양, 내가 그러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라는 양, 아프냐고 물어보고 울고 살피는 짓. 이런 것에 넘어가 많은 폭력 아버지에게서 엄마와 아이들은 몸과 맘이 썩어간다. 폭력은 그 무엇도 정당화할 수 없다. 사랑해서 떄린다? 그런 건 없다. 그렇다면 뭐가 잘못 되었는 지 얘기하고 때린 이유를 설명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런 매에서는 절대 벨트가 등장하지 않는다. 이건 어디까지나 자기를 주체못하고 상대를 자기보다 아래로 보는, 거만하고 강압적이며 폭력적인 인간상의 전형적인 행태일 뿐이다.

 

"병원에 입원했었다고요? 무슨 일이 있었는데요?" 이페오마 고모가 조용히 물었따.

어머니는 거실을 한 바퀴 둘러보더니 초침이 부러진 벽시계를 한동안 쳐다보다가 나를 돌아봤다. "우리 가족 성경책 놓는 작은 탁자 알지, 은네? 아버지가 그거로 내 배를 내리쳤단다." ..(중략) "아버지가 나를 성 아녜스 병원에 데려가기 전에 이미 바닥에 피를 다 쏟은 상황이라 의사도 구할 도리가 없었다더라." 어머니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가느다란 눈물 한 줄기가 겨우 눈을 비집고 나온 것처럼 뺨을 흘러내렸다. (p300~301)

 

어머니는 아버지의 폭력으로 계속 유산을 한다. 나이지리아에서는 잘 사는 남자가 애를 여럿 낳지 않으면 다른 여자를 보라고 하는데 그 와중에도 자기를 버리지 않았다며 어머니는 계속 위안을 삼는다. 그리고 그 와중에도 아버지는 아마도 폭력적으로 섹스를 시도했으리라 예상되고 그렇게 아이가 들어차면 다시 때리고 던지고 해서 아이를 그대로 유산시키곤 한다. 어머니는 이 폭력 속에서도 아버지를 감싸고 집에 돌아가곤 한다. 아. 너무 전형적이다. 너무 전형적이란 말이다. 폭력 가해자와 피해자와의 이 말도 안되는 연계. 가하는 자는 해놓고 매번 용서를 빌고 당하는 자는 그 용서를 또 연민으로 받아들인다. 그래도 그이는.. 요즘 그이가 얼마나 힘든 지... 뭐 이런 말을 하면서 말이다. 으아아아악.

 

어찌 보면, 경제적인 자립이 안되는 여성이 남편에게서 떨어져나와 아이들을 키워야 한다는 자체가 여성에게는 너무나 큰 부담이겠기에, 참아야 하는 것이었을 게다. 참지 않으면 가난해져야 하고, 가난하면 할 수 있는 일이 없으니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거나 먹고 입힐 수가 없게 되고. 그러니 폭력적인 남편이라도 먹고 살게 해주는 그늘막으로, 그래서 폭력은 그냥 감내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경제적 자립성이란 정말 중요한 부분이다. 뛰쳐나올 원동력이고, 폭력을 거부할 수 있는 자양분이다. 사회적인 능력이 없는 여성일 경우, 이렇게 고스란히 당할 수 밖에 없다고.. 시몬 드 보부아르도 얘기했었고 레이첼 모랜도 얘기했었다. 그들의 이야기들이 머릿 속에 벙벙 뛰어다니며 나를 괴롭힌다.

 

.... 그러나 아버지의 여동생인 이페오마 고모는 달랐다. 나이지리아 국립대학교 교수인 고모는 자유분방하고 대화가 가능하며 무슨 이야기도 들어주는 사람이었다. 고모부가 차사고 죽고 없는 집에, 남자없이 어떻게 사냐며 주변에서 남자 구하라고 성화를 쳐도 꿋꿋이 혼자 아이 셋을 기르며 가난하게 사는 고모는, 자자와 캄빌리를 그 집에서 해방시켜주고자 자신의 집에 일주일 머물게 할 것을 제안한다. 말이 없고 어른에게 대꾸도 못하고 놀줄도 모르고 음식도 못하고 주고받는 대화에 낄 줄도 모르게 성장한 두 남매에 비해, 고모의 세 아이들, 아마카, 오비오라, 치마는 활발하고 자기 주장이 있으며 의견을 말할 줄 알고 집안일에 적극적인 아이들이었다. 고모는 그런 자신의 아이들을 유심히 살피고 적절한 말로 대응하면서 아이들의 성장을 지켜봐주는 사람이었고. 이 속에서 자자와 캄빌리 두 아이도 변해간다. 그들이 살고 있는 세상이 다가 아님을 알게 되고, 그래서 아버지에게 맞서게 되고... 결국은 벗어나, 미래를 말할 수 있게 성장해 간다.

 

보라색 히비스커스는 여기에서, 희망과 미래를 뜻하는 것 같다. 흔하지 않은 보라색 히비스커스는 은수카에 있는 고모의 집에 있던 것이었고 다시 아버지 그늘로 돌아오던 날, 자자가 가져와 옮겨 심어 키우게 된다. 그것이 무럭무럭 자람과 동시에 이 두 남매의 세상도 다른 색깔로 바뀌어 나가는 것을 뜻하는 게 아닌가 싶다. 소설은, 나중에 옮긴이의 글을 읽으면 마구 뒤죽박죽 섞이긴 했지만, 나이지리아의 비극적인 역사들도 함께 다루어서, 시대의 비극은 결국 가정의 비극과도 연결됨을 인지하게 한다. 군부독재가 들어서고 사람들을 가난하게 만들고 저항하는 사람들을 탄압하는 그 시절. 그 이야기는 우리나라 근대사도 생각나게 하는 부분이 있었다. 어디나, 유럽이나 미국이 아닌 아프리카나 아시아의 많은 나라들 어디나, 이런 역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불행을 잉태하는 씨앗이로구나 하는 생각에 씁쓸함이 목까지 차올랐었다.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는 최근에 감명깊게 읽은 이 소설 <연을 쫓는 아이>에서도 있었다. 아프가니스탄, 우리에게 기억되기로는 허구헌날 전쟁통이라 사람이 살만한 곳이 아니라 여겨지는 이 곳이, 그렇게 되기 전 그곳에 살던 사람들의 이야기로 시작되는 이 소설에서도 역시 주인공의 아버지 바바의 사랑을 갈구하는 아들의 모습이 등장한다.

 

바바는, 아프가니스탄 카불의 최고 부유층으로, 주변 사람들에게 넉넉하고 늘 나누는 사람이지만, 아들인 아미르를 늘 못마땅해한다. 강한 남자이길 바라는 아버지의 눈에, 문학을 좋아하고 싸움이나 운동에 능하지 않는 남자아이는, 자신의 자식인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미덥지 않은 존재다. 바바와 함께 성장한 하자라인 하인인 알리에게도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하산. 배운 거 없는 아이이지만, 바바는 오히려 이 아이를 더 좋아하고 아끼는 눈치다. 하산과 아미르는 형제처럼 자라나지만, 아미르의 마음 속에는 늘, 바바의 애정을 받지 못한다는 열패감과 하산에 대한 시기심과 질투심이 자리하고 있다. 아버지의 시선은, 이 두 아이의 인생을 크게 바꿔놓게 된다.

 

나는 그가 잔에 술을 따르는 모습을 바라보며 우리가 방금 그랬던 것처럼 다시 얘기할 때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릴지 궁금했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늘 바바가 나를 미워한다고 생각했다. 조금은 말이다. 왜 그러지 않겠는가? 결국 그의 사랑하는 아내이자 아름다운 공주를 '죽인' 것은 내가 아니었던가? 내가 할 수 있는 최소한 것은 조금이라도 그를 닮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바바와 같지 않았다. 전혀 그렇지 않았다. (p31~31)

 

그리고, 바바는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인 라임 칸에게 이런 말을 한다. "의사가 아내의 몸에서 그 아이를 꺼내는 걸 이 눈으로 직접 보지 않았다면, 나는 그 아이가 내 아들이라는 걸 믿지 못했을 거네." 그러면서 하산에게 호의를 표하는 것을 아미르는 들어버렸다. 평생,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을 말을. 바바는, <보라색 히비스커스>에 나오는 아버지와 비교할 바는 안되지만, 알게 모르게 아들을 강압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버지와 닮지 않은 자식. 아버지를 실망시키는 자식.. 이라는 굴레에서 아미르는 평생 힘들어한다. 나중에 이 소설이 진행되면서 바바가 왜 그랬는 지 이해하게 되기도 하지만, ... 아버지 혹은 부모가 자식에게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 시선 하나 하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어떻게 인생을 지배하는 지 느끼게 되었었다. 물론 폭력을 안겼다면 그건 더할 나위 없는 상처를 남기는 것이고. 쉽게 지워지지 않는...

 

나이지리아와 아프가니스탄. 이 두 국가 출신의 작가들이 쓴 책은 요즈음의 나를 정말 즐겁게 혹은 슬프게 했다. 여타의 우리가 흔히 접하는 나라들이 아닌지라 그들의 풍습들이 신선하게 다가왔고 아픈 역사가 남의 일이 아닌 양 가슴아프게 다가왔다. 그 속에서 살아나가는 사람들의 이야기 또한 감동을 주기도 하고 슬픔을 주기도 하고. 하지만 두 소설 다, 마무리 즈음에... 희망을 보여줘서 왠지 고맙다는 생각을 한다.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겐 이겨낼 힘이 있다고, 믿을 수 있는 구석이 있다고 말해 주는 것 같아서, 요즘 몸도 안 좋고 심경도 안 좋은 내게 괜한 위안이 된다면... 오바일까. 두 작가의 책은 몇 권 더 찾아읽어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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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2-17 07: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2-17 07: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페크pek0501 2020-02-17 13: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연을 쫓는 아이>를 장바구니에 담습니다. 잘 읽고 갑니다.

비연 2020-02-17 13:55   좋아요 1 | URL
페크님! <연을 쫓는 아이> 좋은 책입니다. 이 작가의 책이 재미있어서 <천 개의 찬란한 태양>도 오늘 주문해버린 비연입니다 ㅎㅎㅎ 즐독하시길!

페크pek0501 2020-02-17 14:18   좋아요 1 | URL
아, 그렇군요. 분량이 많아도 꼭 구입해 읽어야겠군요.ㅋ

han22598 2020-02-20 04: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비연님, 저도 지금 연을 쫓는 아이 읽고 있어요..우연일지 모르지만 계속 비슷한 책을 읽고 있네요..ㅎㅎ 그래서 왠지...비연님이 그동안 읽으셨던 책들이 궁금해서 조금씩 뒤돌아가면서 리뷰 보고 있는데..많이 겹치네요.오호라......반가워요 :)

비연 2020-02-20 07:55   좋아요 1 | URL
어머어머~ 우리의 독서취향이 비슷한가봐요! 완전 반갑^^
재미난 책 있으면 서로 추천해주어요 ㅎㅎㅎ

마태우스 2020-02-21 23:4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오 저 연을 쫓는 아이 샀어요! 오늘 배송됨. 제가 요 몇달 책을 하나도 못샀어요. 장바구니에 쌓여있던 거 어제 확 주문했는데 오늘 집에 오니 와있네요. 뭐부터 읽을까, 갑자기 부자가된 느낌.... 암튼 폭력은 나빠요

비연 2020-02-23 19:30   좋아요 0 | URL
오옷. <연을 쫓는 아이> 샀어요? 와우와우. 읽고 어땠는 지 꼭 알려주세요. 궁금~
책이 집에 한보따리 온다는 건, 참으로 큰 행복인 것 같아요. 행복, 큰 행복~

단발머리 2020-02-22 18: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인용해주신 구절만 읽어도 화가 나네요. 그 세상을 전부로 알고 살아가는 여성들이 너무 불쌍하구요.
전 <보라색 히비스커스> 읽어보고 싶어요.

비연 2020-02-23 19:24   좋아요 0 | URL
<보라색 히비스커스> 추천요! 그 작가의책 다른 것들도 주문해서 보려고 보관함에 두었어요~
 

 

 

 

 

 

 

 

 

 

 

 

 

 

 

 

 

이 책을 읽지 않고 버텼던 것은, 정말 넘 힘들까봐 였다. 결국 첫 장을 펼쳤고,  오늘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 가지게 된 느낌은 두려움이 아니었다. 그리고 이 책도, 어렵고 힘들고 비참한 여성이 쓴 게 아니라, 더없이 용감한 한 여성이 쓴 글이었다. 나는 레이첼 모랜, 자기 실명을 들고 이 고통스러웠을 책을 쓴 이 여성에게 존경과 찬사를 보낸다. 읽는 내내, 이게 현실일까 싶은 내용 속에서도 그녀의 성찰은 빛났고 그래서 나는 용기를 가질 수 있었다, 이 책을 읽을 용기를.

 

불타는 건물을 비유로 들 수 있는데, 불 타는 건물을 빠져 나올 만큼 운이 좋았다면 그 집에 불이 났다고 다른 이들에게 알려야 옳다. 그래야 그 안에 여전히 갇혀 있는 사람들에게 어느 정도 희망이 생긴다 (p424)

 

이 책을 쓴 이유가 이것이라고 밝힌 이 대목에서, 난 눈물이 났다. 불 타는 건물 속에서도 너무나 괴로왔을 것이고 나와서도 여전히 그 고통이 남아 있을 한 여성이 갇혀 있을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 이 어려운 글을 썼다. 정신병이 있었던 부모를 두고 열네살에 집을 나와, 가난을 벗어나고자 아니 다른 선택지를 생각해볼 수도 없는 처지에서 7년간을 성매매된 여성으로 지내야 했던 저자의 이야기는, 나로 하여금 어쩌면 나도 가지고 있었을 지 모르는 성매매된 여성에 대한 편견 혹은 다른 세상 사람이라고 치부했었을 생각 등을 무너지게 한다.

 

성매매에 유입되어 있던 10대에는 세상과의 단절감이 너무도 크게 작용한 나머지 머리를 자르러 미용실에 가더라도 내가 가위를 들고 있는 그 여성이 될 수 있다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바에 가서 술을 주문할 수는 있어도 내가 바에서 서빙을 할 수 있을 거라는 상상도 절대 할 수 없었다. 그렇게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자리들에는 생득적으로 적절함과 정상성, 품위가 있었고 슬프게도 나는 저 깊은 곳에서부터 그런 품성이 주어지지 않았다고 느꼈다. (p30)

 

이제 겨우 십대 초반인 아이가 세상에서 분리된 듯한 느낌을 가지는 것은, 상상만 해도 가슴이 아프다. 소외되고 상처받았던 어린 시절은 내가 사회에 편입해 살 수 있으리라는 생각 자체를 봉쇄하고 성매매에 유입되고 나서는 더더욱 그렇게 되었다는 고백들은, 이 사회의 어느 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수많은 잔인한 일들, 직접 때리고 직접 내치지 않아도 잔인해질 수 있는 수많은 일들이 너무나 태연히 일어나고 있구나 라는 생각에 분노가 치밀었다.

 

세상에는 두 가지 종류의 구별된 삶이 있다. 사회적으로 용납이 가능한 삶과 그렇지 않은 삶으로 나뉘는데 후자의 삶을 살아보지 않고는 그 두 삶 사이의 간극을 충분히 이해할 수 없다. 같은 공간을 차지하는 이 두 가지 세계는 엄청나게 다르다. (p108)

 

살아보지 않은 삶을 어떻게 이해하겠는가. 특히나 용납되지 않는 (혹은 그렇다고 여겨지는) 삶을 살아나가는 사람들을. 이해한다고 어설프게 나서는 것 자체가 모순이다. 하지만, 레이첼 모랜의 이 책을 읽으면서, 감히 이해한다고 말하지는 못해도 적어도 성매매된 여성의 삶이 이 세상의 여성의 삶에서 떨어져 나간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그것은 여성에 대한 확장된 폭력이고 법적으로든 윤리적으로든 두어서는 안되는 범죄이다. 왜냐하면, 가해자가 있고 피해자가 있기 때문이고, 피해자는 '절대' 이걸 원해서 들어가게 된 게 아니기 때문이다. 사회적으로든 환경적으로든 그 세상에 들어갈 구멍을 한껏 열어놓고 그 선택지밖에 없도록 몰아놓고서, 즐긴다느니 있어야 하는 필요악이라느니 이 따위 말을 일삼는 것은, 그것 자체도 범죄다.

 

레이첼 모랜은 자기 경험에 비추어, 그리고 함꼐 있었던 여성들의 경험에 비추어 성매매된 여성들에 대한 잘못된 신화를 하나하나 조목조목 따진다. 왜 그게 아닌지, 왜 그렇게 해석해서는 안되는 지를 아주 구체적으로 얘기한다.

 

남성이 가하는 성적, 신체적, 정신적, 심리적 학대를 페미니스트의 권리로서의 '자유'로 추구하며 실천하는 여성들은 여성 평등과 성적 자기 결정권을 주창하는 페미니즘의 기본 전제를 이해하지 않는(혹은 이해하지 않을) 사람들이다. 성적 자기결정권은 섹슈얼리티에 관한 결정에 있어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상황을 넘어선 환경으로 인한 영향을 받지 않는 사람에게만 가능하다. 진정한 성적 자기결정권을 누리기 위한 필수 조건들이 성매매 경험 내에 존재하지 않음은 너무도 명백하다. 그 필수 조건들은 성매매를 무심히 보는 시각에도, 살아낸 경험 안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p306)

 

 

하지만 레이첼 모랜이라는 여성이 대단하다고 생각한 것은, 이 모든 경험과 이 모든 고통 속에서도 희망과 연대의 끈을 놓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탈성매매를 성공적으로 했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지만, 자신이 운이 좋았음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탈성매매의 과정에서 괴로왔음을, 그 동안의 시간들을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게 되었음을 고백하면서 성매매된 여성들을 위해 연대하여 할 수 있는 일들이 있음을, 그 대상이 남성이든 여성이든간에 함꼐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엿보고 수많은 세월이 흘러도 그런 세상을 만들어내기 위해 노력해야 함을 얘기한다. 이 모든 이야기들이, 글쓰기로 표면화되기 까지 마음 속에서, 머리 속에서 억겁과 같은 시간들을 보냈겠지만, 그 결과로 나온 글은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줄 수 있었다.

 

치유되는 만큼이나 계몽적이었다. 중요한 사실을 상기시켰다. 여성들, 나와 같은 과거를 지닌 여성들을 포함한 모든 여성들은 남자들을 결코 적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 상기됐다. 우리는 이 지구상에 사는 모두 같은 인간이며,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을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협력할 필요가 있다. (p426)

 

 

몇 년 전에 읽었던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목소리 소설인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에서 읽은 구절이 문득 떠올랐다.

 

"길은 오로지 하나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 그리고 사랑으로 사람을 이해하는 것. (p268)"

 

이 책에서 읽었던 수많은 인터뷰 내용들을 읽으면서 몸서리쳤던 기억이 되살아난다. 전쟁 속에서 여성이 당해야 했고 목격해야 했던 일들을 읽으면서 너무나 괴로왔었다. 하지만 알렉시예비치 또한 그 속에서 희망을 보았다. 아마도 우리는 더 나아지기 위해 이런 글들을 쓰고 읽는 것인지 모르겠다. 절망하고 포기하려면 글을 쓰는 것도 읽는 것도 할 필요 없는 일 아니겠는가.

 

레이첼 모랜의 책에 나온 스웨덴의 예처럼, 그리고 이를 따라하고 있는 노르웨이 등의 나라들 처럼 우리나라에서도 성매매되는 여성들에 대한 인식의 변화와 노력들이 있기를 희망한다. 아니 달라져야 한다고 주장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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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쟝쟝 2020-02-16 18: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코로나만큼 전염성이 강하다는!! 페이드포 앓이.. 저도 읽고싶어용 ㅎㅎ

비연 2020-02-16 18:33   좋아요 0 | URL
읽기 시작하면 놓지 못하는 책입니다, 쟝쟝님^^
우리가 몰랐고 마치 남의 일인 양 했던 세상이 사실은 내가 사는 세상에서 멀지 않음을 알게 하는...

다락방 2020-02-17 07: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고생하셨습니다, 비연님. 정말 잘 읽고 잘 써주셨네요. 비연님의 글을 읽다보니 저도 이 책을 다시 한 번 읽고 싶어졌어요. 이 책을 읽는 건 정말 놀라운 경험이었습니다.

비연 2020-02-17 08:04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 이 책, 제겐 2020년 시작과 동시에 올해의 책이 되었어요. 보기 드문, 가슴아픈, 하지만 놀라운 책이에요. 단발머리님이나 다락방님 아니었으면 이 소중한 책을 그냥 놓칠 뻔 했지 뭐에요 ㅜㅜㅜㅜ

단발머리 2020-02-22 18: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비연님 글 읽다가 인용해주신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말이 정말 해답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마침 제가 아직 이 책을 읽지 않았다는 사실도 떠오르고요. 전 <체르노빌의 목소리>만 읽었는데, 그 때도 너무 힘들었거든요. 리뷰를 남길 수도 없더라구요. 충격을 받아서요ㅠㅠ
더는 미루지 말고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읽어봐야겠어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비연님!

비연 2020-02-23 19:31   좋아요 0 | URL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를 처음 선택할 때는, 이게 도대체 문학이 될 수 있을까, 글이 될 수 있을까 반신반의했었는데 그것만으로도, 그녀들의 목소리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걸 읽는 내내 느꼈었어요. 힘들었지만... 의미있는 독서 경험이었다고나 할까. 이런 일들을 하는 작가는 또 얼마나 힘들까. 그들의 경험을 듣고, 그들의 말을 옮기고, 그렇게 그 속에서 맥락을 찾고... 존경스러운 분들이 너무 많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