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럴 때가 있다. 책도 잘 안 읽혀지고, 페이퍼도 잘 안 써질 때. 컴퓨터 로그인은 수없이 하면서도 차마 페이퍼 쓰기로는 커서가 옮겨가지 않을 때. 내가 지금 그런 지경이다. 그러니까 이런 걸 일종의 슬럼프라고 하는가. 대단한 글을 쓰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내가 글을 올리지 않는다고 해도 누구 하나 섭섭해하지 않을 순 있지만 이상하게 내가 계속 찝찝하다. 알라딘에 책 이야기 쓰는 버릇이 거의 생활처럼 되어 버린 탓인가보다. 뭔가 해야 할 일을 안하는 것 같고 그래서 해야 하는데 왜 난 안 하는 거지 라는 생각을 수없이 하게 되는, 그러면서도 손가락은 움직이지 않는.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지금 이 '슬럼프'의 시기에 이 책을 만난 것에 애석함마저 느꼈었다. 좀더 활발하게 글 쓸 때였으면 장마다 글을 썼을텐데, 책 한장 한장 빼곡이 밑줄을 그어대면서도 페이퍼를 하나 제대로 쓰지 않는 내게 화도 났다. 근데 어쩌겠는가. 인간의 무력함이란, 어쩔 수 없는 거다. 그냥 지나가길 기다리는 수 밖에. 어쨌든, 이 책에 미안했다, 내내.

 

정말 좋은 책이다. 한 구절 한 문단 줄 치지 않고 넘어가기가 쉽지 않을 정도로, 다 마음에 와닿고 마음에 새겨두고 싶은 글들이었다. 이론가가 사상책 여러 권 읽고 써내는 책이 아니라 실천가가 현장에서 정말 여러 사람을 만나고 행동하고 그 와중에 좌절하면서도 신념을 지켜나갔을 그 경험이 오롯이 느껴지는 책이었다. 여성주의 책읽기를 하면서 이 책을 만난 것은, 행운이다.

 

매매춘을 애기하면 누군가는 얘기한다. 원래 있던 건데 어쩌겠어. 없앨 수 없어, 이건 남성의 욕망과 관련한 거야. 이런 직업을 택하는 여성들이, 여기에 생계를 의지하는 여성들이 얼마나 많은 줄 알아. 그럼 이거 없애면 그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 남자들은 어떻게 해. 없애지 못하면 유지하고 그들이 탄압받지 않고 잘 살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게 맞는 거 아니겠어.

 

너무 이상적이라고? 너무 비현실적이라고? (p374)

 

 

그래서 매매춘을 없애자, 여성에 대한 권력적 성 탄압을 없애자 라고 얘기하면 사람들은 말한다. 그건 이상이야. 현실에선 이루어질 수 없어. 이건 수천 년 전부터 이어왔던 일이야. 그래서 하지 말자고?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나중은 창대하리라. 이건 성경 말씀이다. 시작할 떄 될 거라고 생각하는 한도 내에서만 덤비면 이루어낼 수 있었던 일은 하나도 없다. 이 책에서도 얘기하지만, 노예제도가 그랬다. 지금 여건만으로 될 거라고 상상하기에는 너무나 척박한 현실이지만, 원칙을 세우고 시간을 들여 지속적으로 투쟁하면 어느 순간, 이루어진다. 그게 역사다, 라고 나는 생각한다.

 

사실 과학의 발전도 그렇다. 토마스 쿡이 말했었다.

 

 

과학의 발전은 선형이 아니다. 정상과학이라 믿고 있는 절대 논리 아래에서 계속 살고 있는 것 같지만, 그 속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의 끊임없는 탐구와 노력이 일어나고 있다. 항상 올바른 길로 가지 않을 수 있고 이런저런 논쟁이 붙을 수도 있다. 하지만 계속 문제제기를 하고 여기에 대해 이야기한다. 다만 밖으로 보이지 않거나 남들에게 무시될 뿐이다. 그게 말이 되냐? 무슨 뜬구름 잡는 소리냐? 그러나 그게 모이고 모여 어느 새 대단한 동력이 되어 갑자기(아니, 예측할 수 없었던 타이밍에) 과학의 수준이 한 단계 높아지는 그 상태. 그게 혁명이다.

 

우리는 여성주의에서도 그런 혁명을 꿈꾸는 거다. 조금씩 발전하면서 조금씩 나아지기를 기대하는 바도 있지만, 인식을 전환하고 대반전이 일어날 그 날을 위해 지금 많은 사람들이 애쓰는 거다. 나는 사실, 그 힘을 믿는다.

 

 

 

 

 

기꺼이 정상적인 생활을 이끌고자 원하는 매춘부들은 새로운 시작을 위해 국가로부터 일정한 돈을 받게 될 것이다. 어떤 기업이라도(민간이거나 공공 기업이거나) 매춘부들에게 고용을 제안하는 기업들은 모든 구체적 사례마다 그에 맞는 기금을 할당받을 것이다. 생산적인 노동을 할 수 있는 일자리를 창출하는 개혁 센터에는 신용 대부금을 줄 수 있다. (p375)

 

이미, 베트남에서는 그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경제적으로 타격이 올 지라도 매매춘을 소멸시키겠다는 전략이 수행되고 있고 거기에 대한 정책적 대안들이 제시되고 있다. 불가능한 일이 아닌 거다. 생각이 바뀌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매매춘이 없는 세상....

매매춘이 없는 세상을 상상하는 것은 1820년대에 노예제 없는 미국을 상상하는 일과 같다. 미국에서 노예제가 한창일 때, 소수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노예제가 사라질 수 있다고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런 생각을 품은 예외자 중에서 소수는 단호하고 열렬한 노예 폐지주의자였고, 대다수는 노예제가 불가피하는 일상에 만연한 이데올로기의 인정을 거부하는 페미니스트들이었다. 그들은 노예제가 역사 초기부터 있어 왔다는 주장에 포섭되거나 패배하기를 거부했다. 노예 폐지주의는 어떤 시기에는 전위적인 운동으로 여겨졌고, 또 다른 시기에는 사회의 다른 곳에서는 적용할 수 없는 괴상한 사람들과 노예제를 합리화하는 신성한 미국 헌법에 항의하는 기이한 사람들로 구성된 퇴행적인 운동으로 인식되었다. 단호한 폐지주의의 핵심 그룹은 그들의 주장이 대중적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주장을 밀고 나갔다. (p391-392)

 

 

어디서 많이 들어본 소리다. 노예제 대신에 여성주의(페미니즘)을 넣으면 딱 지금 현실이다. 놀랍지 않은가. 우리가 역사에서 배워야 할 것은, 이런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끝내 승리하던 '전지구적인 양식' 말이다.

 

 

매매춘 없는 세상을 상상하는 것은 모든 여성에 대한 성 착취의 근절을 상상하는 것이다. 우리가 그 길로 나아가지 않는다면, 강간 위기 센터 활동과 학대받는 여성들에 대한 보호는 단지 내가 '에비앙 해결법'이라고 부르는, 즉 가뭄으로 고통받는 시골에 에비앙 물 한 상자를 보내는 일처럼 우리의 활동을 물 한 양동이에 물방울 하나를 더하는 것으로 축소시키는 것이다. (p392)

 

그래서, 저자는, 매매춘에 국한되지 않는 여성에게 가해지는 권력적 정치적 성 착취에 대한 체제를 없애야 한다고, 그래서 다른 새로운 세상을 열어야 한다고, 그러기 위해선 여성들이 연대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나는 이 '연대'라는 말을 좋아하는데, 하기 쉽지 않지만, 한번 하면 절대적인 파워를 드러내는 존재 양식이기 때문이다. 단지 매춘 여성에게, 그들의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세상에 성적으로 핍박받는 수많은 여성들의 상황 중 일부만을 개선하는 일이다. 그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라, 철학적으로 더 심층적인, 저변에 깔린 상황들, 결혼을 했든 안 했든 어리든 나이가 들든 가난하든 가난하지 않든(패트리샤 허스트의 예를 보라) 여성이라는 성별로 인해 겪어야 하는 착취의 근원적인 문제들을 인식하고 연대하고 투쟁하는 것이 필요하다... 라는 것을 재삼 확인할 수 있었던 책이었다.

 

이제까지 다양한 여성주의 책들을 읽었지만, 이 책은 특히 많은 사람들에게 권하고 싶다. 어렵지 않으면서도 완벽히 쉽지 않고 현실을 알려주면서도 이론적 배경을 생각하게 하고 또, 생각할 거리를 사정없이 던져주는, 좋은 책이다.

 

자, 이제 다음 책은 이거다. 만만치 않아 보인다... (흐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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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0-08-24 07:3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도 베트남의 사례 읽으면서 하려면 할 수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시도도 해보지 않고 그건 없앨 수 없어, 원래부터 있던거야, 라는 핑계로 사실은 개선할 의지 자체가 없었던 게 아닌가 싶어요.

좋은 독서는 읽으면서 계속 생각하게 하는 독서고 그래서 좀 더 알고 싶게 하는 독서라고 생각해요. 이번 책은 너무나 그런 책이었고, 그래서 좋았습니다. 게다가 모두가 좋다고 얘기하고 이렇게 글을 써주어서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9월도서도 정말 만만찮아 보이지만...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우리 열심히 읽고 씁시다. 이렇게 여성주의 책을 읽고 쓰는 사람이 많아지고 자주 노출되는 건 작게나마 영향을 줄 거라고 생각해요. 화이팅이에요, 비연님!

비연 2020-08-24 10:06   좋아요 1 | URL
이 책을 추천한 분의 통찰력에 감사하며(^^) 9월에도 만만치 않아 보이는 저 책을, 자알 읽어내기로~
저도.. 아무 것도 없는 곳에 길을 내듯이, 작게 작게라도 자꾸 반복해서 얘기하고 그 얘기를 또 많은 사람들이 함께 하면서 변화는 일어나는 것이라고 믿어요. 우리 함께 화이팅해요!

단발머리 2020-08-25 17: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글 쓰기 전에 비연님 글 한 번 더 읽기. 우리는 이렇게 서로를 의지하고 한 걸음 또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네요.
다락방님이 제가 페이퍼를 쓰면 그렇게 고맙다는 말을 하는데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오늘 비연님 글 읽으면서 딱 그 맘이 느껴져요.
비연님, 고마워요. 하트뿅뿅! 😍

비연 2020-08-26 11:45   좋아요 1 | URL
단발머리님, 감사요^^ 하트뿅뿅~
이 책을 읽으면서, 다같이 읽는 기쁨을, 그리고 공감하는 즐거움을 함께 누릴 수 있어서 다시한번 행복했어요. 누구는, 마음 맞는 사람들끼리 자기들끼리만 좋아라 한다고 하지만, 사실 살면서 마음이 잘 맞는 사람을 만난다는 자체가 행운이 아닌가 싶구요. 앞으로도 홧팅해요 우리!

공쟝쟝 2020-08-26 07:0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슬럼프라고 하기엔 넘넘 멋진 글! 저도 어려운데 홀릭되어 읽었답니다. 이걸로 양이 안차신다니... 다음 책에서는 슬럼프 없이 날아다니는 비연님의 페이퍼를 볼 수 있기를~ 플라이~~~>.<

비연 2020-08-26 11:47   좋아요 2 | URL
이제 슬럼프를 조금씩 벗어나나 싶은데.. 이게 같이 읽어야 하는 책이 있으니 어쨌든 계속 책을 잡아야 한다는 의무감 덕분인 듯 해요. 읽다보면 슬럼프를 벗어나게 되는? ㅎㅎ 다음 책은..흑흑. 슬럼프 아니라도 뭔가 많이 힘들 것 같지만, 우리 다 같이 플라이 플라이 해요~!^^
 

 

 

 

 

 

 

 

 

 

 

 

 

 

 

 

1.

 

대학에 들어갔더니 남자 동기들이 청량리 588을 얘기했었다. 나는 처음에 뭔지 몰랐고 왜 그렇게 그 얘길 하면서 낮게 키득거리는 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고 나중에야 왜 그러는 지를 알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그게 그렇게 와닿지 않았다. 왜 그걸 가지고 키득거리고 농짓거리를 하는 거지? ... 20대 때 첫 직장에 들어갔다. 몇 번 썼었는데.. 첫 직장의 남자들은 정말 저질인 사람이 많았다. 어쩌면 그게 그 시대 직장을 다녔던 중년 남자들의 민낯인 지도 모르겠다. 난 그들과 함께 있는 게 너무 싫었고 술자리에서 하는 성희롱의 언사들을 듣고 있으면 구역질이 났다. 책에서 접했던 상황들이, 그 당시 나는 남들보다 책을 훨씬 많이 읽어서 세상을 '좀더' 안다고 착각하던 때였는데도, 그들이 하는 말들이 내가 읽은 소설과는 다른 느낌이라는 것, 뭔가 구체적이고 살갗에 벌레가 앉아서 스물스물 기어가는 듯한 느낌을 아주 선명하게 준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니까 읽는 것과 당하는 것은 다른 것이다.

 

어쩄든, 어느날인가 남자 부장 한 명과 남자 대리 한 명과 내가 자동차를 몰아 출장을 가게 되었다. 운전면허증은 있었지만 차를 몰지 못했던 나는 대리가 모는 차 뒷칸에 앉아 앞에서 하는 이야기들을 애써 무시하며 앉아 있었다. 경기도 북부쪽으로 가는 거였고 그 날따라 차가 막혔다. 그랬더니 대리가 "어쩔 수 없네." 하고는 운전대를 꺾어 원래 가던 방향과 다른 방향으로 향했다. 나야, 운전대를 잡은 사람이 아니니 그냥 따라갈 밖에 없었고 그냥 멍하니 밖만 쳐다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 지름길이라고 택한 곳이 청량리였다. 청량리역 뒷편 좁은 길가. 그 길은 너무 좁아서 더 막혔고 나는 속으로 어째서 이런 길을 택한 거야 하고 짜증을 내고 있었다. 바깥에는 허름한 낮은 집들이 보였고.. 여자들이 보였다. 대낮이었는데, 그 앞에 주차한 자가용들이 여러 대여서 여기저기 길을 막고 있었다. 조수석에 타고 있던 부장이 얼굴이 벌개져서는 말했다. "oo 대리, 나보고 어쩌라는 거야. 막 흥분시키는 거야?".. 그러면서 둘이 얼굴을 마주 보며 키득거렸다. 키득. 키득.

 

밖에는 드문 드문 여자들이 서있었다. 대부분 다 늘어진 옷을 입고 혹은 딱 붙은 짧은 치마를 입고, 그냥 서 있었다. 지나가는 차를 보며, 퀭한 눈으로 보고 있었다. 문득 남자가 하나 지나가자, 한 여자가 그 남자를 잡았다. 남자가 뿌리치고 가자, 여자는 다시 서 있던 곳에 돌아와 담배를 물었다. 대낮인데.. 나는 마치 그런 일은 대낮에 일어나면 안 되는 것인 양, 대낮에만 일어나지 않으면 되는 양, 생각하며 그 길을 지나쳤다. 정말이지, 너무너무 긴 시간이었다. 그들을 쳐다보며, 그 눈을 보며, 그 분위기를 느끼며 있던 시간은... 아주 오랜 세월이 지났음에도 선명히 기억된다. 아마도 내가 처음 그 곳에 가 보아서였을 것이고, 그 시기의 앞과 뒤에 남자들이 했던 말들, 행동들이 중첩되어 이해라는 형태로, 그리고 그 뒤에 날아드는 분노라는 형태로 함께 기억되어서인게 아닌가 싶다.

 

"여성은 인간인가?" (p41)

 

 

2.

 

중학교 때 너무나 좋아하던 여자 친구가 있었다. 책을 많이 읽는 애들이 드문데, 그 아이는 수없는 책들을 읽으면서도 전혀 잘난 체를 하지 않는 아이였다. 나랑 절대 맞는 스타일이 아니었지만, 나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그 아이가 좋았고 그 아이가 하는 말을 다 믿었다. 고등학교를 지나고 대학교에 들어가서까지도 만나고 놀고 했었는데 여전히 나는 (아마도) 그 아이를 맹목적으로 좋아헀던 것 같다.

 

어느날인가, 페미니즘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그 때, 이화여대에는 여성학 석사과정이 있었고 (지금도 있나?) 어쩌다 그 얘기가 나왔는데 그 아이가 그랬다. "페미니즘은 아니야. 그건 휴머니즘이어야 한다고 봐. 그냥 페미니즘은 말도 안돼." 스쳐가듯 한 이야기가 내게 꽂힌 건, 그 이후에도 페미니즘은 휴머니즘이어야 한다고 한참 생각했던 건, 그 아이가 하는 말을 다 믿었기 때문이고.. .어쩌면 내가 여성에 대한 진지한 생각들을 하지 않고 그냥 그 단어 그대로, 그 단어가 멋져 보여서 그랬을 수도 있다. 어쨌든 한참을, 그렇게 생각했다. 페미니즘은 휴머니즘이야.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인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여성이, 사람이어야, 인간이어야, 인간취급을 받아야 휴머니즘을 얘기할 수 있는 거 아니야? 만약 그게 아니라면 어떻게 페미니즘이 휴머니즘이어야 할 수 있지?... 의문은 불신을 낳고 불신은.. 헤어짐을 낳는 것인지. 이제는 그 아이와 만나지 않게된 지 한참 되었다. 아주 부잣집에 시집가서 아주 잘 살고 있다고 들은 것까지가 전부다. 잘 살면 된 게지. 다만, 이제 그 아이를 다시 만날 생각은 들지 않는다. 한참 시간이 지나 반가운 목소리로 전화가 왔었는데 난 무덤덤히 반응하고 끊었다. 그냥 그렇다는 거다.

 

여성에게 성적 정체성은 사회적으로 부여된 반면, 남성은 행위하는 존재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획득한다. 성애화된 사회는 불평등을 성별화한다... (중략) ... 사회 정치적으로 구성되지 않고 생물학적으로만 주어지는 섹스는 없다. 이런 점에서 사회적 조건은 생물학적 조건보다 우선한다. 성적인 욕망은 욕구와 필요성의 상호 작용 속에서 구축된다. 남성이 여성의 몸을 통해 접근할 수 있는 섹스는 문화의 사회적 구성물이며 성별 위계 질서의 정치적인 산물이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인 남성 권력의 조건이다. (p41)

 

 

3.

 

이 책을 처음 접할 때의 두려움은 이제 없다. 이 얘기를 이제 읽어야 할 때가 온 거다. 애써 외면했던 이유는 무얼까.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여성으로서 겪어야 했던 여러가지 치욕스럽고 당황스럽고 절망스러웠던 여러 상황들이 이제 와 겹치는 게 싫었고, 그런 내가 매매춘을 하는 여성과는 (그나마) 다른 층위에 있다고 열심히 생각해온 나 자신의 부조리를 들춰내는 게 두려웠고, 무엇보다 이런 내용을 더 알게 되는 게 힘들었기 때문인 것 같다. 여성을 이야기할 때, 모니크 위티그가 말했던, 하나만의 젠더로서의 여성을 이야기할 때, 섹스를 빼고는 이야기할 수 없음을, 이제쯤 되니 깨닫게 되고 그래서 이 책을 지금 읽게 된 것에 감사한 마음이다. 어쩌면 초기에 읽었다면, 내가 여성주의 책을 읽기 시작한 초기에 읽었다면, 난 나가 떨어졌을 것이다. 무서워서, 받아들이기 힘들어서, 그리고 너무나 비참해서. 그러나. 이제 읽을 수 있고, 정말 한줄 한줄 빼곡히 밑줄을 쳐가며 열심히 읽게 된다.

 

 

인간이 육체로 환원되고, 동의가 있건 없건 타인의 성적 서비스를 위한 도구로 화할 때, 거기에는 이미 인간에 대한 폭력이 자행된 것이다. (p43)

 

강간은 남성이 강취하는 것이다. 매춘에서 남성이 산 섹스는 그들이 강간으로 강취한 섹스와 같은 것이다. 이 섹스는 탈신체화(disembodiment)된 것이며, 남성을 위해, 인간으로서 존재하지 않는 여성의 몸 위에서 일어난 것이다. 돈을 지불하고 섹스를 할 것인지, 혹은 강제로 아니면 동의를 받고 할 것인지는 남성이 결정한다. (p59)

 

 

살인, 밑바닥까지 떨어지는 것, 강간, 그리고 매매춘 자체는 비인간화된 섹슈얼리티의 결과이고 억압의 조건이다. 인간의 의지에 대한 자유주의 법 구조가 언제 어디에서 폭력이 발생되었는지 여부를 결정한다고 할 때, 가부장적 억압을 통한 섹슈얼리티의 비인간화는 개인에게 발생한 폭력으로부터 분리된다. 원인과 결과가 분리된다. 지배는 계속된다. (p73)

 

 

좋은 책이다. 아무리 읽어도 주옥같다. 계속 읽어보자. 지금 80페이지 진행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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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0-08-10 12: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1. 좋은 책을 읽으셔서 그런걸까요, 비연님의 이 글도 너무 좋습니다. 항상 느끼는건데 비연님은 참 정리를 잘하세요. 제가 갖지 못한 면이라 매우 부럽습니다. 체계적인 글쓰기를 하시는 분..

2. 쪽수를 적어주셔 감사합니다. 21쪽인 제가 부끄럽다고 합니다.

3. 좋은 책을 함께 읽을 수 있어서 너무 다행이고 행복합니다. 그리고 이 책을 제가 골라서 더 행복합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으쓱)

비연 2020-08-10 12:14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 와락~ 이 책을 골라 주셔서 감사합니다! 으쓱으쓱 여러번 해도 됩니다~^^
저는 다락방님의 솔직하면서도 명쾌한 글이 좋은데... 서로서로 좋은 영향을 주고 있는 거겠죠, 우리?
덥고 습하고 비가 왕창 왕창 계속 쏟아지는 여름이지만, 이 책과 함께 해서 너무 행복합니다~

수이 2020-08-10 13:2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비연님이 밑줄 올리신 거 저도 지금 책 들춰보니 저도 모두 밑줄 쳤네요 ^^ 이번 책은 많은 것들을 들춰보게 만들 거 같아요, 걔들이랑 나랑은 달라, 이런 관점으로 냉소적으로 바라볼 때도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나는 순간 삐끗 하면 저들과 같은 집단이 될 수도 있다라는 불안감이 한동안 강하게 들었거든요. 어떻게 보면 그 길밖에 없으리라고 생각하게 만든 이들에게도 함께 읽어보지 않으련 하고 말하고 싶어지구요. 친구 중에 고급 콜걸 일을 알바로 하던 친구가 있었는데 결국 그 길로 한번 들어선 후에 빠져나오지 못하더라구요. 재력가의 정부가 되어서 안락하고 편안하게 살고 있지만 그 바탕에 자리잡고 있는 자괴감을 어떻게 해서든지 부수려고 엄청 노력하던데 그게 잘 안되더라구요. 성찰할 수 있는 좋은 책을 골라주신 락방님 으쓱으쓱 백만번 하셔도 될듯요.

비연 2020-08-10 13:48   좋아요 0 | URL
앗. 밑줄 친 게 같다니.. 우힝.. 넘 좋네요^^ 저도 이 책에서 저 자신과 제 주변에서 머리 안과 밖으로 벌어지는 부조리함이라든가 괴리라든가 뭐 이런 것들을 생각하게 되는 것 같아요. 건드려지기 싫은 부분들을 뚫어져라 쳐다 봐야 하는 느낌. 다시한번, 좋은 책임을 느껴요. 우리가 이런 생각들을 하게 하다니. 이 책이!

미미 2020-08-10 13: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좋은 리뷰예요! 저도 읽어볼래요 이책.

비연 2020-08-10 14:27   좋아요 1 | URL
책은 더 좋답니다~ 추천에요^^ 함께 읽어 보아요~

공쟝쟝 2020-08-18 07: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페미니즘 책읽기는 생각이 참 많아져서 진도가 참 안나가지는 것 같아요, 별하나에 사랑과 도 아니고 글 한 줄에 기억과, 또 한 줄에 상처와, 옛사랑과 엮이는. 좋은 리뷰 또 읽고 싶습니다!

비연 2020-08-23 23:33   좋아요 0 | URL
아. 이 댓글을 이제야 봤네요... 정말이지 페미니즘 책읽기는 읽으면 읽을수록 새롭고 생각이 많아지고... 밑줄 긋느라 정신없구요... 이렇게 같이 읽어나가니 공유할 얘기도 많고.. 정말 좋습니다^^
 

 

 

 

 

 

 

 

 

 

 

 

 

 

 

기차를 타면 뭘 읽을까. 머리를 써야 하는 책은 잠깐만 읽고 좀 나긋나긋 부들부들한 책으로 쉽게 가야지 하는 마음에 책장을 보다가 이 책을 골랐다. 사실, 집에서 읽는다면 이 책을 (사긴 샀지만) 읽겠다고 고르기가 쉽지 않을 것 같기도 했고, 무엇보다 제목이 끌렸다. <귀찮지만 행복해볼까>.

 

이런 류의 책은 그냥 두세 시간이면 뚝딱 할 수 있는 책이지만, 간혹 아주 짧은 글들 속에서 괜한 공감을 가지게 되기도 한다. 일상적인 생각을 일상적으로 쓰는 에세이. 번역가로서의 생활과 딸과 함께 하는 생활이 교차되는 삶.

 

 

오, 시상이 떠오르듯 랩이 절로 나오네. 인맥이나 팔로맥(follow脈)이나 모두 소중한 인연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인맥의 수나 팔로어 수가 그 사람의 완성도는 아니니, 이 숫자의 많고 적음에 연연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내가 보기에 제일 구려 보이는 사람은 인맥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 인맥이 넓다고 떠들어 대는 사람이다. (p64~65)

 

뜨끔..

 

 

내가 싫어하는 사람은 오조오억 명이더라도 나는 누군가가 싫어하는 오조오억 명에 들어가기 싫은 게 사람의 마음. (p85)

 

끄덕..

 

 

서로 잘 지내라고 인사하고 전화를 끊었다. 추억 속의 사람들은 잠시 소환했다가 제자리에 돌려 놓는 게 좋다. 긴 공백은 무엇으로도 메우지 못한다. 안부는 바람을 통해 듣도록 하자. (p125)

 

 

맞아..

 

 

나무늘보를 보면 나를 보는 것 같다. 남들이 보기에는 집 밖으로 나가는 일 없이 종일 집 안에만 있는 내가 느리고 게을러터져 보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그 긴 세월 나름대로 쉬지 않고 번역만 하며 성실하게 가장 노릇을 하고 있다. 동물이나 인간이나 자기 가치관과 다르게 산다 하여 부정적인 평가를 하는 것은 교만이다. 그래서 나는 나무늘보의 마음을 대변해주고 싶다. 나무늘보는 지금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살아가는 중이라고. (p117~118)

 

 

누가 누굴 평가할 수 있겠는가. 자신의 삶에 최선을 다해 살 뿐. 남까지 평가하는 건 우습기도 하지만 심한 오지랖이다. 

 

이 책에 나온 책 중 <배를 엮다>라는 책이 궁금해져서 보관함에 넣는다. 예전에 보고싶다고 한번 체크했다가 연말에 지웠던 기억이 나는 책인데, 역자가 쓴 글을 보니 한번 꼭 봐야겠구나 싶어진다. 이렇게 책은 책을 연결하고...

 

 

 

 

 

 

 

 

 

 

 

 

 

 

 

 

 

이제 이 책을 덮고 8월의 함께 읽기 책으로 돌아간다. 삼인 출판사의 책 표지는 언제나 봐도 정감 있고 마음에 든다. 그리고 400페이지 남짓의 분량과 촘촘한 글 간격에 잠시 놀랬던 마음은 지나가고 서론부터가 마음에 쏙 들어 자꾸만 읽게 되는 책이다. 사람이 고민을 많이 하고 그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묘하게 그게 드러난다. 그냥 대충 생각나는 대로 얘기하고 바람에 휘익 날아간 것 처럼 다음엔 생각도 나지 않을 말들을 흩뿌리며 다니는 것과는 다르다. 이 책, <섹슈얼리티의 매춘화>의 저자는, 수많은 세월 동안 관련 주제에 대해 열심으로 고민했고 그렇게 스스로를 발전시켜나갔고 주변도 변화시켜 나갔다는 게, 이 책 말머리에서부터 느껴진다. 그 전해지는 느낌에 신기하기도 하고, 나를 돌아보게도 된다.

 

 

 

 

 

 

 

 

 

 

 

 

 

 

 

 

나는 계급 억압의 모든 차원들을 완전히 알지 못한다면 어느 누구도 억압적 상태에 대항하여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따라서 매매춘에 관한 나의 작업은 가장 가혹할 뿐 아니라 전지구적으로 제도화되어 있고 그 본질을 가장 명확하게 드러내는 형태로 존재하는 성적 권력을 연구하고 폭로하는 것이었다. (p27)

 

그러나 투쟁 속에서 이러한 핵심에 도달하려면 우리는 필히,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라는 급진적인 정치적 페미니즘의 근본 명제에 따라, '창녀'인 그들과 '여성'인 우리를 분리시키는 것이 전적으로 기만적이라는 사실, 가부장제의 거짓말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는 우리가 섹스에 대해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단지 포르노그라피 안의 섹슈얼리티와 '우리의 의지에 반하는 섹슈얼리티'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바로 현재의 '섹슈얼리티'에 대해 우리는 명백하게 말해야 한다. (p28)

 

 

여성의 입장에서, 포르토그라피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그리고 그것이 결코 '여성'과 분리할 수 없는 것이며 그래서 말해야 하는 것들이 있다는 것을 머리로는 이해하면서도 관련 책이나 이야기들, 이론들, 그리고 사회적 현상들을 받아들이는 것은, 개인적으로 매우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래서 어쩌면 자꾸만 피하려고 하는데, 결국 페미니즘이라는 것을 접하게 될 때 이 부분에 다다르지 않을 수 없음을 차츰 자각하게 된다. 이 책은, 그런 나의 자각 흐름 속에 아주 적당한 타이밍에 들어온 책이다. 아마 좋은 독서의 시간이 되리라는 생각이 들고... 나 스스로의 생각도 좀더 깊어지리라 기대하게 된다. 

 

8월이다. 덥다고 한다. 책 읽기 좋은 계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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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8-05 13: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8-05 14: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8-05 15: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8-05 17: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예전부터 러시아 작가 - 도스토예프스키, 톨스토이, 푸쉬킨, 체호프, 투르기네프, 고리키 등등 - 들을 좋아해서 그 작가들의 유명한 작품은 거의 다 읽었노라 생각했는데, 흠? 니콜라이 레스코프 라는 낯선 러시아 작가 이름이 눈에 띄었다. 그리고 그 책제목이 <레이디 멕베스>.  러시아 작가 가운데 가장 러시아적인 작가라고 했고 톨스토이도 인정했다고 했고. .그래서 두말없이 샀다.

 

대부분의 러시아 작가 소설들은 진지하고 무거운 편이다. 체호프 정도가 좀 농밀한 유머와 뒤틀림의 중단편들을 써내지, 다른 작가들의 작품은 진지하다 못해, 어떤 것은 머리에 끈을 두르고 읽어야 할 정도로 심오하고.. 길다... 그래서 두 번 읽고 싶어, 라고 덮은 책도 두 번 읽으려고 마음 먹기가 쉽지 않다는 것. 그런데 이 레스코프라는 작가는 시종일관 아주 해학적이다. 이걸 노어노문학 하는 사람이 원문으로 읽었다면 더 마음에 와닿는 러시아적인 소설이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투리도 들어갔을 것이고 단어들도 한국어로는 표현이 안되는 유머가 녹아 있지 않을까... 어쨌든, 이 책에 수록된 <레이디 멕베스>와 <쌈닭>은 가볍고 재미있지만 각 작품의 주인공인 여성들의 삶은 매우.. 슬프다.

 

*

 

<레이디 멕베스>의 주인공인 카테리나 리보브나는 가난한 집에 태어나 나이가 두배는 차이나는 잘 사는 상인집에 시집을 왔다. 90이 다 되어가는 시아버지와 50대의 남편은 일하느라 정신이 없고 게다가 아이도 생기지 않아 카테리나는 매일을 무료하게 여기저기 왔다갔다 하며 지낸다. 그러다가 문득, 산책하던 중 하인들과 어울리게 되고 거기서 세르게이라는 잘생긴 청년을 알게 된다. "키며, 얼굴이며, 어떤 여자든지 원하기만 하면 금방 꾀어내어 결국 일을 치르고 마는 도둑놈이자 비열한 변덕쟁이"인 세르게이의 유혹에 홀랑 넘어가버린 카테리나는 남편이 멀리 나가 있는 사이 세르게이와의 환락에 푹 빠져 지내게 된다. 그렇게 지내던 중, 시아버지에게 들켜버렸고 그래서 노환처럼 시아버지를 독살해버린 후 소식을 듣고 달려온 남편도 함께 묻어버리고... 이제 다 해결되었나 싶었더니 유산 공동상속인이라고 먼 친적 아이가 나타나 이들을 방해하니..

 

"잘 들어, 세료자! 다른 여자들이 어땠는지 나는 알 바 없고, 알고 싶지도 않아. 단지 우리가 지금 이렇게 사랑에 빠지게 된 것은, 물론 내가 너를 원하기도 했지만, 네가 나를 유혹했기 때문이고, 또 네 술수 때문이란 사실은 너도 알고 있겠지. 그래서 하는 말이지만 만약에, 세료자 네가 나를 배신하거나, 내 대신 다른 여자를 택한다면, 나는, 결코 살아서는 너와 헤어지지 않을 거야." (p41)

 

사실 이 남자가 죽일넘인데.. 주변 여자들만 놀아남을 당하고 버림을 받고 죽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고... 이런 구도가 좀 못마땅한 면이 있다. 이 남자를 죽이면 다 끝나는 건데 말이다. 어쨌든 카테리나의 마지막 선택은, 찝찝한 구석이 있다. (더이상은 스포일이라 말하지 않겠다는..ㅜ)

 

*

 

<쌈닭>은 더하다. 돔나 플라토노브나라는 한 여성이 등장하고 이 여성은 원래 직업은 레이스 파는 사람이지만, 페테르스부르크 온 동네를 헤집고 다니며 오지랖 넓게 살아가는 사람이다. 중매쟁이가 되기도 하고 물건을 알선하기도 하고 돈을 구해주기도 하고 이런저런 인력들도 구해주고, 심지어는 능력 안되는 여성들을 돈많은 늙은이들에게 알선하는 역할까지도 자청하고 나선다. 뭔가 매우 사악한 기운으로 그러는 게 아니라, 자기 딴에는 이게 최선이라고 생각해서 정말 최선을 다한다고나 할까. 그런 작업들을 자신의 작품인 양 사랑하고 시간과 돈을 투자하는 모양새다.

 

돔나 플라토노브나가 이 작품의 '나'라는 남자에게 썰을 푸는 내용들은 읽어보면 꽤 재미있다. 황당한 일들도 있지만, 말하는 내용이 재미있어서 그냥 쭈욱 읽어나가게 된다. 한없이 오지랖이 넓어서 돈도 많이 못 모으고 그렇지만 별로 개의치 않게 살고 그러나 자기가 뿌린 일들에 늘 배신당한다고 생각하는 여자. 늘 당당하고 수다스러운 여자. 자신의 일에 자부심이 있는 여자. 그게 돔나 플라토노브나였다. 그리고 누구도 사랑하지 않는 여자였다.

 

 

"돔나 플라토노브나! 오래전부터 묻고 싶던 것이 있는데 말이에요. 당신은 젊어서 남편을 잃고 혼자가 되었는데, 정말로 한번도 다른 사람에게 마음을 준 적이 없었나요?" 내가 말했다.

"마음을 주다니, 무슨 말이야?"

"그러니까, 누군가를 사랑한 적이 없었느냐고요?"

"정말 어리석은 소리를 하는군!"

"왜 어리석은 말이에요?" 내가 말했다.

"그게 왜 어리석은 말이냐 하면, 그런 사랑 이야기 같은 것은 도와주는 사람이나 살펴 주는 사람이 있는 사람한테나 걸맞은 것이기 때문이야. 혼자인 나는, 언제나 나 스스로를 부양하고, 언제나 절약을 밥 먹듯이 하며 살지. 그런 것은 전혀, 정말이지 생각조차 할 겨를이 없다니까."

"정말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고요?"

"눈곱만큼도 없었지! 그리고 또 자네니까 하는 말인데, 사랑이란 모두 쓸데없는 짓이야. 사랑에 빠졌다는 사람들은 이런 정신나간 말들을 하곤 했지.

'아, 죽을 것 같아! 그 남자 없이는 혹은 그 여자 없이는 살 수 없어!'

그것뿐이야. 내 생각에 사랑이란 남자가 여자를 잘 도와주는 것, 그게 바로 사랑이라고. 그리고 여자는 모름지기 언제나 자기 몸 잘 건사하고 정숙해야 되고." 돔나 플라토노브나가 손톱을 비비면서 덧붙였다. (p267-268)

 

 

 

이랬던 돔나 플라토노브나의 말로를 보면, 뭔가를 너무 부정하며 산 사람에게 그 무언가가 갑자기 들이닥칠 때 와르르 무너지기도 하는 게 아닌가 싶다. 닫혔던 마음이 급격하게 부서지는.

 

*

 

나한테 아주 맞는 스타일의 책이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 뒤의 작가 해설을 보니 흥미가 좀 돋는 책들도 있어서 번역된 것들을 보관함에 담아둔다. 내 느낌엔, 이 사람은 마치 .. 우리나라로 말하면 김동인의 느낌이랄까. 그리고 요즘 들어 고전을 읽다보면 늘상 드는 생각인데, 참 어투나 문체나 고풍스럽고 템포도 많이 느리구나 싶다. 요즘 태어난 아이들이 이런 고전을 읽어내려면 많이 힘들겠다 싶기도 하고. 세상이 너무 많이 바뀌었고, 물론 인간의 본질은 바뀌지 않는 법이니 고전은 영원하겠지만, 어쩌면 아이들한테는 새로운 요즘 세대의 고전이 필요한 지도 모르겠다 라는 뜬금없는 생각도 해본다.

 

졸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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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0-07-28 18: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에 두 이야기가 들어 있는 거군요. 전 처음 듣는 작가에요. 러시아 소설 많이 읽지도 못했지만요.
소설 이야기도 재미있었지만, ˝머리에 끈을 두르고 읽어야 할 정도로 심오하고.. 길다.˝ 전 이 문장이 제일 웃겼어요.
러시아 소설은 머리에 끈을 두르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비연 2020-07-29 14:25   좋아요 0 | URL
저도 하나인 줄 알았는데, 두 개더라구요. 둘다 재미있게 읽기는 했습니다~
러시아 소설은 정말 머리에 끈 두르고 공부하듯이 읽어야 할 때가 많아서 ㅎㅎ;;;;
그래도 러시아 소설, 사랑합니다~

라로 2020-07-29 00: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래서 두말없이 샀다....결단력과 행동력이 퐉 느껴지는 더 문장! 멋져요, 비연님! 근데 저도 그래요,,,ㅎㅎㅎㅎㅎㅎㅎㅎ우리 둘이 넘 멋진가요??ㅎㅎㅎㅎㅎㅎㅎㅎㅎ
러시아 문학은 톨스토이하고 체호프만 제대로 읽었네여,,,도스토예프스키 먼저 시작해야 할 것 같아요,,전 갈 길이 멀죠~.

비연 2020-07-29 14:26   좋아요 0 | URL
캬캬. 책 살 때는 정말, 넘 결단스러운 비연과 라로..ㅎㅎ
도스토에프스키의 책들은 정말 하나같이 좋습니다. 특히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과 <악령> 추천드려요^^

Falstaff 2020-07-29 11:5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돔나 플라토노브나가 어느 여성분이 우는 모습을 보며 하는 말씀이,
˝왜 아침부터 소금물에 세수를 하는 거예요?˝
겁나 웃겼던 기억입니다. ㅋㅋㅋㅋㅋㅋ

비연 2020-07-29 14:26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 정말 주옥같은 재미있는 문장들이 꽤 되었더랬죠~

Falstaff 2020-07-29 14: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다들 아실 것 같아 댓글 달기가 좀 거시기한데요, <레이디 맥베스>는 쇼스타코비치가 역사상 처음으로 침대 위에서의 정사 씬을 넣은 파격적인 오페라 <므첸스크의 레이디 맥베스>로 만들었습니다. 음악 자체가 기발하고 쇼킹합니다. 대본 역시 레스코프의 원작하고 상당히 유사하고요. 그러니 어떻겠어요. 재미있지요. 당연히 모스크바 사람들에게 인기 폭발이어서 평소 쇼스타코비치를 어여쁘게 보고 있던 스탈린 각하 역시 어느 날 객석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근데 오페라 시작하고나서 불과 얼마 가지 않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옆에 있던 비밀경찰, KGB의 전신이지요, 대빵한테 지시합니다. 지금 당장 쇼스타코비치한테 가서 A4용지로 반성문 30장 써오라고 해!
물론 쇼스타코비치는 반성문을 썼고, 당시에 경찰에 끌려가는 경우엔 거의 대부분 새벽에 잠옷을 입은 채로 끌려갔기 때문에 쇼스타코비치는 그때부터 정장에 넥타이까지 하고 침대에 올라 잠을 자기 시작합니다.
이건 줄리언 반스가 쓴 <시대의 소음>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혹시 잘난 척 한 거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ㅠㅠ

비연 2020-07-29 14:49   좋아요 1 | URL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저도 <시대의 소음> 읽었는데 이게 <레이디 멕베스>를 가지고 만들었다는 건 몰랐네요. (아님 내용에 있었는데 잊은 건가..) 책은 이어지고 이어지고 또 이어지고.. 이런 묘미가 있는 것 같아요.
레스코프 - <레이디 멕베스> - 줄리언 반스 - <시대의 소음> - 쇼스타코비치 - <므첸스크의 레이디 멕베스>.. 넘 즐겁습니다 ㅎㅎㅎ
 

 

 

 

 

 

 

 

 

 

 

 

 

 

현직 내과의사인 저자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쓴 소설이라는 선전문구보다는 제목에 이끌려 책을 구입했다. <사일런트 브레스: 당신은 어떤 죽음을 준비하고 있습니까?>. 저자는 소설에 들어가기 앞서 사일런트 브레스를, 조용한 일상 속에서 평온한 종말기를 맞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지금은 아프면 병원에 가고 거기서 의사가 권하는 치료란 치료는 다 받고 나중엔 콧줄 끼고 연명치료까지 하다가 병원 침대 위에서 죽어가는 것이 대부분이지만, 이 책은 집에 머물며 방문의사와 사회복자사의 보살핌을 받고 그렇게 자신의 삶을 끝까지 영위하다가 죽어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주인공인 미토 린코는 대학병원의 종합진료과에 10년 동안 근무하다가 갑자기 도쿄 변두리의 작은 방문 클리닉으로 가라는 좌천 비슷한 명령을 받는다. 처음엔 자존심도 상하고 대학병원에 비해 턱없이 열악한 환경에 실망했지만, 환자가 머무는 집으로 가서 그들의 일상을 함께 하며 그들이 죽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과정을 도와주는 역할을 지속하면서 의사가 하는 일이 병을 억지로라도 치료하는 것도 있지만, 환자 본인의 판단을, 그들의 인생을 지켜주는 것에도 있다는 것을 꺠닫게 된다.

 

유방암 말기 진단을 받고 집에서 죽겠다며 자포자기한 모습으로 돌아온 저널리스트, 근디스트로피를 앓고 있어 혼자서는 아무 것도 못하지만 늘 밝고 긍정적인 청년, 연명치료를 거부하다가 아들의 막무가내에 결국 연명치료를 받게 된 80대 여성, 다카오 산기슭에서 버려진 채 발견되어 언어능력을 상실한 채 지내는 소녀, 그리고 적극적으로 암을 치료해야 한다고 평생을 주장하며 바쳐왔으나 자신이 췌장암 말기 선언을 받자 모든 치료를 거부하는 의사, 그리고 미토 린코의 아버지. 

 

사람이 죽음을 맞이하는 다양한 경우를 보며, 함께 울고 웃으며, 미토 린코는 죽음을 통해 삶을 보게 된다. 의사에게 있어 죽음이 패배가 아니라 어쩌면 목표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점점 수긍하게 된다고나 할까.

 

 

"잘 생각해 봐. 사람은 반드시 죽어. 지금 우리에게는 패배를 패배로 생각하지 않는 의사가 필요한 거야."

정신이 버쩍 드는 말이었다.

"죽는 환자도 사랑해 주라고."

팔짱을 낀 오코치 교수가 찡끗 웃으며 린코를 보았다.

"알았지? 죽는 사람을 사랑해 주자고, 고칠 생각밖에 없는 의사는 고칠 수 없다는 걸 아는 순간 그 환자에 대한 관심을 잃어버려. 그렇다고 환자를 방치할 수도 없으니 어영부영 치료를 질질 끌다가 결국 병원 침상에서 고통만 안겨 주는 상황이 되지. 이건 환자에게나 가족에게나 정말 불행한 일이야." (p288)}

 

 

우리 외할머니 모습이 떠오른다. 크게 문제가 없으셨는데 갑자기 몸이 불편해지셔서 병원에 모시고 갔을 때만 해도 돌아가실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병원 침대에 앉아 계시던 외할머니 모습이 생각난다. 할머니, 얼른 퇴원하세요. 별일 아닐 거에요, 했다. 그런데 갑자기 안 좋아지셨다. 신장 기능이 망가지기 시작했고, 병원에서는 투석을 해야 한다고 했다. 나는 그 전까지는 투석이 그렇게 힘든 건 줄 몰랐는데... 병원에 가서 보니 거의 반나절을 기계에 사람을 묶어 놓고 혈액을 교체하는 작업을 하는 것이었고 그걸 하고 나면 늘 외할머니는 녹초가 되셨더랬다. 그리고 계속 그러셨다. "집에 가고 싶어.." 엄마는 그런 외할머니를 쓰다듬으며 말씀하셨었다. "엄마, 좀만 참아. 곧 가게 될 거야." 그러다가 의식만 있는 상태가 되더니... 돌아가셨다. 우리랑 얘기도 제대로 못 나누셨는데...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시고 그대로 병원 침대 위에서 돌아가셨다. 가서 보니 그 휑한 병실 침상 위에 돌아가신 외할머니가 누워 계셨더랬다. 사람이 나고 살고 죽는 게 이런 것인가 싶어서 눈물이 비오듯 쏟아졌었고. 지금도, 외할머니가 집에 가고 싶다고 하셨을 때 그냥 집에 모시고 갔더라면 좀더 편하게 계셨을까. 투석 같은 거 받으며 고통스러워 하지 않고 살던 자리에서 그렇게 조용히 하늘나라로 가실 수 있었을까.. 라는 후회가 스미곤 한다.

 

주인공인 미토 린코도, 이 일련의 과정 속에서 뇌경색으로 쓰러져 10년 가까이 병상에 누워만 계시는 아버지를 달리 바라 보게 된다. 그래도 희망이 있지 않을까 매달리는 엄마를 보며 아버지를 어떻게 떠나보내야 하는가 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된다. 억지로 관을 통해 유동식을 넣다보니 자꾸 폐렴이 생기고 그 과정에서 고통스러워하는 아버지를 보며, 이것이 과연 아버지가 원했던 죽음일까를 생각한다. 사실, 자식의 입장에서 병원을 나와 집에서 편안히 보내드리고 싶다고 말하는 것이, 잘못하면 두고두고 죄책감으로 남을 수도 있는 일이라 정말 쉽지 않은 결단일 거라 생각하면서도, 적어도 나는.. 연명치료 없이 그냥 명이 다하면 그대로 두어 사나흘 내에 조용하고 깨끗하게 세상을 떠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일본 사람이 쓴 소설이 대체로 (다는 아니지만) 그렇듯이 술술 읽어나가게 써서 하룻 밤 새에 후딱 읽을 수 있는 책이었지만, 내용 자체는 그렇게 가볍지 않았다. 돌봄노동에 대해서, 삶과 죽음에 대해서, 의료라는 것에 대해서 진진하게 생각하도록 한다. 무엇보다, 나는 어떻게 죽을 것인가, 에 대해 다시금 고민하게 하는 책이었다. 인생에서 죽음이란 무엇인지, 죽음도 인생의 일부라면 준비를 해야 하는 게 아닌지, 그리고 그 준비는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거듭거듭 생각하게 했다.

 

 

'그런데 여러분은 happiness와 happening의 어원이 같다는 거 알아? 둘다 '기회'를 뜻하는 고대 스칸디나비아어 hap에서 유래한다는 거야. 그래서 나는 무슨 일이 일어나도 해피하게 있기로 결심했어. 앞으로 인생에서 다양한 해프닝이 있을지 모르지만 우리 함께 파이팅하자고! 그런 의미에서, 조금 이른 듯 하지만 Merry Christmas and a Very Happy New Year with a lot of HAPPENINGs!' (p154-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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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0-07-24 11: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희 외할머니 연세가 아흔이 넘으셨어요. 그래서인지 이 책은 제가 꼭 봐야하는 책 같네요. 비연님의 글 자체도 무척 좋고요. 저도 읽어보겠습니다.

비연 2020-07-24 11:47   좋아요 0 | URL
연세가 있으신 조부모님이나 부모님이 계시다면.. 남의 일이 아닌 지라 좀더 감정이입해서 보게 되는 것 같아요. 마지막에 미토 린코와 아버지와의 이별은... 눈물이 날 정도로 마음이 아팠구요. 한번 읽어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