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호라! 돈과 방이라.

버지니아 울프의 이 책 앞 몇 장을 읽고 바로 끌려 전집을 몽땅 사리라 마음 먹어버린 이 새벽.

(근데, 이 책을 왜 지금에서야 읽는 것이냐, 비연? 알 수가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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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0-11-23 13: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나는 알아요... 비연님은 하려면 하시는 분이라는 걸. 사려는 책은 사는 분이라는 걸.
어쩌죠... 이 시리즈 품절이에요ㅠㅠ 지금은 낱권으로 구입하셔야 할것입니다...

비연 2020-11-23 13:29   좋아요 0 | URL
단발머리님.. 그래서 낱권으로 푱푱 보관함에 담고 있나이다 ㅜ 품절이 왠말이냐고요.. 흠냐

수이 2020-11-23 21: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내년에 그럼 울프 읽는 건가요?! 얏호 신난다

비연 2020-11-23 21:27   좋아요 0 | URL
ㅋㅋ
 

 

 

 

 

 

 

 

 

 

 

 

 

 

 

 

 

"... 그러나 이 말 한마디만 마음에 새겨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참 단순한 말, 우리 아버지께서 사람의 허물을 크게 보지 말라면서 늘 하시던 말씀이지요. '모두가 세상을 똑같이 살지는 않습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을 보시거든 축복을 주시기를 바랍니다." (p161)

 

제목이 마음에 들어서 골랐다. 그리고 다 읽고 난 느낌은, 이 책이 좋다, 라는 것이다. 구구절절 대목을 따서 말하지 않아도 그냥 이 책이 마음에 든다, 제목만큼이나. 그런데 이 제목이 성경에 있는 구절이었던가? 잠시 갸우뚱. 모태신앙으로서 신약과 구약 주요 내용들은 통독한 전적(?)이 있는 나이지만, 이 문장은 낯설다. 하긴, 이제 종교란에 '기독교'라고 쓰기도 멋적을만치 교회와 거리를 두며 살고 있는 내가, 그저 옛 기억에 기대어 성경에 있었던가 하고 의문을 가지는 자체가 넌센스이긴 하다.

 

주인공인 폴의 평범하지 않은 인생 굴곡은 세상의 모든 우연과 필연에 합쳐져 참 어찌 할 수 없구나 라는 생각을 가지게 한다. 사실 그의 인생은 20세기와 21세기에 끼인 자의 혼란스러움 그 자체였고 그렇게 돌고 돌아 그가 당도한 곳은 그의 뿌리였다. 어쩌면 당연한 귀결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책을 읽는 내내 이 사람이 왜 교도소에 들어와 있는지가 너무 궁금해서 책을 놓을 수가 없었다. 뭔가 대단한 사건이 있었나. 교도소에 영혼을 다가오는 가족들이 해를 입었나... 그런 의문들이 하나씩 둘씩 해소되어 가는 과정에서, 묘하게도 사는 건 뭔지, 늙어가는 건 뭔지, 내가 사는 방법은 맞는지 이런 생각들이 슬며시 스며드는 매력이 있는 책이었다. 아마 그래서 내가 이 책이 좋다 라고 생각하는 지도 모르겠다.

 

 

인생을 망치는 방법은 무한하다. 나의 외조부는 DS19 시트로앵을 택했다. 내 아버지는 성직자의 길을 택했다. 그리고 나는 내가 살아갈 날들을 촘촘한 시간 배정으로 지배해버린 그 속세의 수도원에 들어가는 편을 택했다. 예상치 못한 고장과 긴급 상황이 아니면 나의 일과는 항상 동일했다. (p177-178)

 

무한한 인생 망치기를 선택하기 전에 알면 좋으련만, 사람들은 운명처럼 무언가를 선택한다. 그리고 그 속에서 버티던가 나가떨어지던가 둘 중의 하나로 남게 된다. 폴이 렉셀시오르라는 예순여덟집이 있는 아파트를 관리하는 직업을 택하게 되기까지 많은 일들이 있었다. 주위의 사람들은 어떤 식으로든 불행했고, 그 불행의 회오리를 지나치고 나니 그 일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정착한 폴은 열심히 일했고, 충직했고, 몸을 사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 때는 그 입주자들에게 다 환영받는 관리인이었다. 자부심이 있었고 또 아내 위노나가 있었고 또 사랑하는 개 누크도 있었다.

 

... 나는 누구에게는 장을 봐주고 또다른 누구에게는 약국 심부름을 해주는 등, 내게 남은 마지막 과부들을 보살폈다. 그 할머니들은 매니큐어를 칠한 손톱 끝으로 간신히 생에 매달려 있었다. 언젠가 전부 무너져내릴 줄 알고 있었지만 나는 개수대에 물이 샌다, 가스레인지 후드 필터를 갈아야 한다, 하는 소리를 들으면 허겁지겁 올라가서 손을 봐줬고 내가 여기 있다는 말로 그들을 안심시켰다. 그 거대한 집에서 오랜 세월을 보내고 나서야 비로소 그들이 나에게 각별했다는 것을, 어떤 면에서 내 딴에는 그들을 사랑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p215)

 

세상이 바뀌고 그 곳에도 변화가 일었다. 가까왔던 사람들은 떠나고 죽었고 새로운 세입자와 새로운 입주자 대표를 맞았다. 정성과 신뢰로 일하는 분위기는 정확한 업무범위와 갑질에 가까운 지시와 동전 한닢까지 세어대는 간섭으로 인해 점점 경색되어져 가고 별로 좋아보이지 않는 시대의 변화에 어울리게끔 사람들도 그 기조를 따라간다. 어이없으리만치 일제히.

 

"... 요컨대, 복지사 노릇은 그만하고 관리소장이면 관리소장답게 적잖이 받아가는 월급값을 하라, 이겁니다..."  (p235)

 

폴을 둘러싼 (살아남은) 사람들, 교도소에서 같은 방을 쓰는 패트릭 호턴이나 공동주택에서 유일한 친구가 되어준 키어런 리드나.. 그들의 인생 또한 할 말 많은 인생이었고.. 사람은 누구나 사연있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고 그러다 죽는 것이겠지.. 그 속엔 좋을 때도 있고 싫을 때도 있고 기쁠 때도 있고 슬플 때도 있고 그렇게 한 세상 살아나가는 것이겠지.. 싶어 왠지 모든 이들의 인생에 짠한 마음이 들게 된다. 태어나서 죽음으로 가는 길목에는 참 무한한 사는 방법이 있는 것이구나. 이 작가에게 흥미와 애정이 생겨, 번역된 소설 하나가 더 있길래 보관함에 넣어본다.

 

 

 

 

 

 

 

 

 

 

 

 

 

 

 

 

 

내가 팔로우하는 Albert Camus(내가 가장 사랑하는 소설가 3명 안에 든다)의 페이지에 이런 글이 올라 왔었다. "Camus says knowin' we're all gonna die makes life a joke." 이 말이 인상적이라 지인들에게 전달도 했었고. 삶의 부조리에 대해 끊임없이 이야기하면서도 살아가는 게 끝끝내 절망은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자 했던 Camus처럼(그가 살아서 <최초의 인간>을 완성했다면 좀더 여실해 보여줬을 그의 철학인데..), 장 폴 뒤부아라는 이 소설가도 이 고통스럽지만 해학적인 소설을 통해 그런 말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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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이 괜찮다고 하는 분들이 계셔서 그냥 무작정 구매했는데, 사실 구매할 때부터 망설여지긴 했다. 표지가... 도대체 표지가 왜 이리 섬뜩하단 말이냐. 좀 예쁜, 아니면 좀 상징적인 그림으로 하면 안 될까 라는 마음이 생겨서, 이거 사서 침대맡에 두고 읽다가 잠결에 보면 뭔가 호러 찍는 느낌이겠다, 이러면서 망설이다가 결국 호기심을 못 이겨 구매했다. 그런데, 막상 받아보니, 애개? 싶은 거다. 책 판형도 작고 페이지수도 100페이지 조금 넘는 '작은' 책이었다. 시집같은? 근데 표지는 호러고?

 

그래서 그냥 놓아두고 안 읽다가 오늘 울산 출장을 가는 참에 짐은 많고 책 두꺼운 거 들고 갔다가는 허리 휘어질 것 같아서 이걸 불쑥 집어들어 갔다 이거다. <성의 역사>도 같이 가져가려 했으나, 어제 얼굴 밑에 두고 자다가 벌떡 일어나 씻고 나오는 바람에 침대에 고스란히 남겨둔 채로 집을 나섰다는 건... 안 비밀. (얼굴엔 책 자국이 반나절은 갔는데..)

 

가는 기차에서 다 읽었다, 이 책. 근데 오. 재밌다. 내용은 어찌보면 평범하다. 아버지에게 학대를 받던 아이가 FBI 요원이 되었고 잘 하다가 어느날 중국 여자아이들 서른 명이 냉동 육탑차에서 죽어 있는 걸 본 이후 킬러로 전환하게 된다. 이름은 조. 청부를 소개하는 매클리어리에게 의뢰를 받아 성매매업소에 잡혀 있다는 제보를 받은 보토 의원의 딸 리사를 구하러 간다. 구했다. 구했는데 그 이후가 이상하게 돌아가는 얘기다. 사실 이런 내용은 다른 스릴러 소설에서도 많이 쓰이는 내용임에도 이 책이 뭔가 특별하다고 생각되는 건, 그 전개가 굉장히 담담하고 간결하다는 거다. 군더더기 기술이 없고, 조의 심리상태에 초점을 맞춰 쭉 진행되는 형식이다. 대사도 별로 없고 - 하긴, 이 짧은 책에 긴 대사 넣으면 끝나겠나 - 대단히 흥미진진한 스토리가 나오는 것도 아니지만 상당히 긴장하며 보게 하는 구석이 있다.

 

보통의 이런 류의 소설 같으면 이제 초반 들어갔구나 할 때 이 책은 끝난다. 이 작가가 아주 나를 조바심나게 하려고 작정한 것처럼. 실상이 드러나니 정말 구역질나고 피가 꺼꾸로 솟아서 얼른 영웅처럼 날아가 그 나쁜 저질 (육두문자 생략)들을 망치든 총이든으로 일망타진하길 바라는 나의 간절한 마음을 저 높이까지 올려놓고는, 불쑥 끝난다. 그러니까 어떻게 했다는 것이냐. 가서 원수를 갚았다는 것이냐. 무엇이냐. 가타부타 설명도 없다. 원본 책 간행연도가 2013년도인 것을 보면 이 작가는 이 뒤의 얘길 글로 알려줄 생각은 일도 없어 보인다... 흑.

 

 

 

 

 

 

 

 

 

 

 

 

 

 

 

영화로 나왔다고 해서 얼른 찾아보니, 있었다! 심지어 호아킨 피닉스가 나온다. 칸느 영화제에서 각본상을 탔다는 얘기만 들어도 이 영화의 분위기를 짐작할 만 하다. 그닥 대사 없이 난해하게 풀어나갈 것이 분명. 그런데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왓챠를 뒤지니, 오, 있다. 바로 '보고싶어요'를 누르고 어느날 와인 한잔에 이 1시간 40분짜리 영화를 보리라 마음 먹어본다.

 

이 책에서도 여전히 여성들은 피해자다. 가정폭력의 피해자인 조의 어머니. 말도 안되는 상황에 빠진 보토의원의 아내. 그리고 성매매업소에 납치되어 팔려간 열세살 소녀 리사. 모두... 대사도 별로 없이, 그냥 그렇게 희생되어 간다. 어쩌면 현실이 그런 지도 모른다. 소리쳐 얘기하는 사람은 빙산의 일각일 뿐, 어딘가 어두운 곳에서 더 많은, 더더 많은 여성들이 조용히 원치않게 죽어가고 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참 무섭구나. 요즘은 세상이 무섭다.

 

*

 

오늘 회의는 울산에서 있었다. 가이드라인 심의하는 회의였는데, 음식서비스업 종사자(홀서빙 업무를 말한다)에 대한 내용이었다. 그런데 그 중에 이런 문구가 있었다.

 

"대부분이 여성 근로자로, 직장과 가정을 양립하는 스트레스가 있다."

 

일단, 이런 얘길 이런 식으로 일반론으로 펼친 자체에 부아가 치밀었다. 아울러 음식서비스업 종사자의 대부분을 '여성'으로 몬 것도 그렇고, 직장과 가정을 양립하는 스트레스는 여성만 있다는 듯이 쓴 문구가 걸렸다. 이의 제기. 이 내용은 삭제해주시기 바랍니다. 약간의 반발이 있었으나 다시 얘기했다. 직장과 가정을 양립하는 건 남성들도 마찬가지고 음식서비스업 종사자의 성별을 여성으로만 국한시킨 것도 문제가 있어 보인다. 삭제가 맞다.. 다른 위원들의 지지를 받아 삭제 결정. 멋진 위원장님이 내 의견을 지지해주셨다.

 

뭐 이 문구 하나 가지고 그러냐.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하나씩 고쳐나가야 한다. 이 가이드라인을 만든 사람의 인식도 새롭게 해야 하고, 이 가이드라인을 읽는 사람들이 알게 모르게 이런 류의 생각에 젖어드는 것을 방지해야 한다. 글이 무서운 것은, 그냥 이게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힘이 있어서다... 다른 많은 제언들을 했지만, 난 오늘 이 작은 문구를 과감히 삭제하게 한 내게 (혼자서) 박수를 보냈다. 잘 했다, 비연.

 

*

 

이제 다시 <성의 역사>로 가자. 아직 1권이네? 우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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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22598 2020-11-17 00: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한권의 책을 만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벽을 넘어야 하는가....저도 비연님 리뷰 없었으면 저 책 절대 안 읽었을 것 같아요 ㅋㅋ

비연 2020-11-17 01:13   좋아요 0 | URL
ㅋㅋㅋ 그러게 말이에요~

블랙겟타 2020-11-17 08: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삭제를 요구하시고 관철시킨 비연님께 저도 박수 보내드립니다👏🏼👏🏼

비연 2020-11-17 09:17   좋아요 1 | URL
^______^
 

 

 

 

 

 

 

 

 

 

 

 

 

 

 

 

 

환자나 보호자, 노인이나 장애인이 '시민'이기 어려운 사회는 무언가 잘못된 사회다. 돌봄을 주고받는 관계가 '시민적 관계'에서 이렇게나 멀리 떨어져 있다면 우리 중 누구도 질병, 돌봄, 늙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다. 돌봄을 누락한 채 이루어지는 어떤 시민권/시민성citizenship 논의도, 나아가 시민을 전제로 하는 정치체제와 법제도도, 결국 거대한 부정의를 재생산하게 된다. (p33)  

 

 

누구나 젊을 때는 몰랐던 것이(예외적인 경우도 있지만), 내게도 질병이 오고 늙게 되고, 그래서 누군가에게 돌봄을 받는 상태가 오리라는 것, 또 내 주변의 아주 가까운 사람이 그럴 수 있다는 것일 게다. 이건 겪어보지 않고는 알 수 없는 거다 하리만치 어느 순간, 불쑥 내 인생에 쳐들어온다. 그래서 이 책을 골랐다. 나혼자 고민한다고 되겠는가.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나 한번 보자 하는 마음이었다. 그리고 이 책에 담긴 많은 문제의식들 속에서 나의 고민이 녹여짐을 느끼며 이것이 혼자서 풀어갈 문제가 아니라는 것, 그리고 나도 이 달라짐을 '직면'할 자세를 갖추어야 한다는 것을 절감했다.

 

 

많은 관계들이 '가족 같은' 관계로 불리는 사회는 정이 넘치는 사회가 아니라 상상력이 빈곤한 사회다. '가족'이라는 이름 안에 우리가 취약할 때 바라는 모든 것을 욱여넣기 보다, 가족 바깥에서도 그럭저럭 시름시름 잘 살아갈 수 있는 구조로의 전환이 필요하다. 타인을 든든해하고 필요할 때 기댈 곳이 있으리라 믿으며 늙어갈 수 있는 사회를 구상하고 현실로 만들어가기 위해서,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무언가 변화를 시작해야 한다. (p43)

 

 

이 문단의 첫 대목에서, 사실 웃었다. 아 정말 적나라한 지적이다. 가족 같은 회사 어쩌고 하는 광고 문구에 가슴에 멍자국이 들곤 했었는데, 역시나 이넘의 가족 같은, 이걸 붙여서 다 해결하려고 하는 사회라는 걸 이렇게 직접적으로 지적하다니. 나이들어 가장 두려운 건, 나 자신의 무너짐도 있지만 내가 누군가에게 의존해야 할 상황이 되었을 때 내가 가장 사랑하는 가족을 볼모로 잡게 될까봐이다. 나처럼 비혼으로 사는 사람들은 더하다. 물론 누가 날 돌봐준다고 선듯 나서리라 믿지도 않지만, 그래도 혹시나 그들에게 일말의 죄책감이라도 남기는 존재가 될까봐, 열심히 고민하게 된다. 가족에게 의존하지 않고 살 수 있는 방법, 경제적인 것, 육체적인 것, 정서적인 것 이런 것들을 미리 준비하고자 하는 마음이 크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다 해결하려고 하는 것은, 테러, 라고 나는 생각하니까. 사랑에 빗대어 그들의 인생에 짐이 될 수도 있으니까.

 

 

모든 사람이 건강하고 효율적으로 움직이리라고 전제하는 사회보다, 모든 사람이 취약함을 갖고 있다고 전제하는 사회가 더 '현실적'이다. 그런데도 의존이 이렇게 두렵고 위협적인 이유 중 하나는, 우리 사회에서 독립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 발달과 교육의 기본목표로 여겨져왔기 때문이다. 현재의 정치체제와 경제체제는 '몸에 대한 통제'에 기반하여 성립하고 지탱된다. (p55)

 

사실, 정상과 비정상을 나누는 경계는 모호하며 때로, 아니 자주 정치적이다. 아무 병도 없고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으며 혼자 두어도 잘 살아갈 수 있는 개체에 대한 환상은 '건강한 노동'을 중시하는 사회가 심어준 허상일 지도 모른다. 누구든 우리가 생각하는 좁디좁은 정상의 범주에서 벗어나있을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일 때 질병과 늙음에 대한 두려움이 좀 가셔지고 문제해결을 할 수 있는 걸음을 이제사 내딛게 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누군가를 하나의 인격, 혹은 사람을 만드는 것은 그 사람이 가진 인지능력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고 있는 그 사람에 대해, 그리고 그 사람과 내가 주고받는 제스처들에 대해 내가 기울이는 관심attention, 무의미해 보이는 그 사람의 몸짓들이 의미를 가지게 하는 관계와 돌봄의 제스처라는 것이다. 여기서 테일러는 돌봄에서 다른 사람의 필요와 욕구를 파악하고 이를 충족할 수 있도록 하는 활동이라는 측면보다, 그러한 과정의 근간이 되는 관심과 배려의 측면에 보다 초점을 맞춘다. (p221-222)

 

 

치매에 대한 얘기도 있다. 사실 누구나 너무나 두려워하는 상태. 나나 내 주변 사람이 겪지 않았으면 하는 상태가 이 상태 아닐까. 기억을 잃어가고, 내가 아닌 누군가로 사는 것 같은 상태. 그게 나일까 다른 사람일까 조차도 깨닫지 못하는 상태. 그래서 지금 내가 생각하는 돌봄이라든가 의존이라든가 하는 것에 대한 고민이나 판단조차 유보되는 상태. 두렵고 두렵지만, 이 책에서는 그것조차도 인정해야 하는 상태이며, 그러나 우리는 조금씩 준비는 해나가야 한다고 얘기한다. 어렵지만 진지하게 생각해봐야 할 대목이 아닌가 한다.

 

내가 이런 분야에 관심이 많았긴 한가보다. 이 책에서 인용된 많은 책들을 이미 읽은 걸 보면. 물론 이 저자들이 번역한 책들도 여러 권 있었다. (이전에는 몰랐었다)

 

 

 

돌봄을 제공하는 서비스도 그와 같은 시장의 힘에 의존할 수 없을까? 아마 어느 정도는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돌봄은 컴퓨터 기술과는 정반대에 서 있는 기술이라는 사실을 명심하자. 돌봄은 극도로 노동집약적이다. 일대일의 접촉과 개인별 맞춤 지식이 필요하다. 표준화되거나 객관화될 수도 없다. 훌륭한 돌봄 로봇을 만들어 내지 않는 한, 땀과 눈물을 실리콘으로 완벽하게 대체할 가능성은 별로 없어보인다. 돌봄 로봇이 있다 하더라도 그 용어 자체가 모순이다. (p87)

 

 

 

 

 

 

 

 

 

 

질병은 죽음처럼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몸이 병에 걸린 것은 우리를 배반한 것이 아니다. (p294)  

 

 

 

 

 

 

 

 

 

 

 

 

질병의 궁극적인 가치는, 질병이 살아 있다는 것의 가치를 가르쳐준다는 점에 있다. 바로 이 이유 때문에 아픈 사람들은 동정받아야 할 대상이 아니라 가치 있게 여겨져야 하는 존재가 된다. "멀고 먼 별자리에선 우리가 어떻게 보일까 / 하늘 한구석의 죽음이겠지"라고 폴 사이먼은 노래했다. 멀고 먼 별에서, 우리는 한 번 깜빡이고는 사라지는 빛처럼 보일 것이다. 빛이 사라지는 순간에 우리는 빛이 계속 타오르게 하는 일 자체가 중요함을 깨닫는다. 죽음은 삶의 적敵이 아니다. 죽음이 있기에 우리는 삶의 가치를 다시 확인한다. 또 질병을 계기로, 삶을 당연시하며 상실했던 균형 감각을 되찾는다. 무엇이 가치 있는지, 균형 잡힌 삶이 어떤 것인지 배우기 위해 우리는 질병을 존중해야 하며, 궁극적으로는 죽음을 존중해야 한다. (p190-191)

 

 

 

 

 

 

 

사두고 아직 읽지 않고 있거나, 아직 사지 않은 책들을 담아 둔다. 이제 내겐 젊어질 길은 없고 나이들 길만 있으며 이제까지 정상이라고 생각했던 삶보다는 비정상이라고 생각했으나 오히려 현실적인 노쇠와 질병과 끝내는 가야하는 죽음으로까지의 길이 남아있을 뿐이고, 이를 현명하게 개인적으로 대처할 방법을 생각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 책의 저자들이 제기하는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고민하는 것도 필요하다는 생각 때문이다. 이런 책을 보면 참으로 반가운 것이, 이제 우리 사회에도 우리의 글로 우리의 생각을 우리의 문제제기를 오롯이 담아내는 사람들이 계속 늘어나고 있구나 싶어서다. 어쩌면 고령화사회에 급히 접어들지만, 아무 준비도 안되어 있고 가족주의적인 사상이 뿌리깊은 우리나라라는 사회 내에 존재하기 때문에 더 그런 지도 모르겠다. 사는 건 참 힘든 일이고 이런 모든 일들을 눈 똑바로 뜨고 '직면'하는 일은 더 어려운 일이지만, 살아있기에 해야 하는 일이니, 관심을 계속 기울여야 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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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버 2020-11-14 20: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나중에 나이가 들고 몸이 약해지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ㅠ 오래사는 것보다 건강하게 살다 편안하게 가고 싶은...그런 바람...

비연 2020-11-15 02:06   좋아요 1 | URL
정말 어려운 일 같아요.. 이 책을 보면.. 그럴 수 없는게 자연스러운거다 얘기해주더라구요. 그렇게 받아들이며 그럼에도 잘 살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야하지 않을까... 싶더라는.

정하 2020-11-23 11: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책이랑 친하지 않은사람인데 요양원 사회복지사라서 정독했네요 너무 공감합니다 ..!!

비연 2020-11-23 13:28   좋아요 0 | URL
사회복지사시라니 저보다 훨씬 마음으로 공감하실 것 같습니다.. 이 책들 한번 읽어보실 것을 (감히) 추천~
 

 

 

 

 

 

 

 

 

 

 

 

 

 

 

 

일하다가 문득 생각나서 페이퍼 하나 끄적. 사실 몇 군데 인용하고 싶은 글이 있었고, 그래서 포스트잍으로 단단히 붙여 두었으나 지금 내 손에 없다. 다 읽었다고 책장에 꽂고 다른 책을 가져 나왔네. 흠. 그럼 뭐 내 얘기나 잠깐 하고 휘릭 해야지.

 

책 이야기, 책이 있는 장소(예를 들어 서점) 이야기, 책방을 운영하는 사람 이야기, 책을 번역하는 사람 이야기 등등. 책이라는 대상을 두고 직업을 가진 사람들 얘길 좋아하는데, 이번엔 책을 편집하는 사람 이야기다. 글항아리의 이은혜 편집자.

 

편집자라는 직업은 어떤 걸까.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새로운 책을 기획해야 하고 새로운 작가를 발굴해야 하고 그 작가와의 인연을 이어나가야 하고 책의 판매도 생각해야 하고 다른 출판사에서 나온 책들도 기웃거려야 하고.. 등등. 심지어 어떤 책을 편집할 때 실수하지 않기 위해 관련 서적을 싹 사서 읽어서 기본적인 배경지식을 갖추기까지도 해야 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새로운 영역의 길도 알았다. 외서 기획자라는 사람도 있고 팩트 체커라는 사람도 있고. 헐.. 이게 책 한 권 나오는 데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애쓰는 구나. 그런데 한 권의 책은 가격이 넘 낮구나..

 

책을 좋아하는 것과 책에 대한 업을 가지는 것은 다른 일이야, 라는 건 잘 알고 있다 생각하면서도 여전히 그런 직업에 대한 로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무래도 내가 외부인이기 때문이겠지. 예전에 출판사 대표의 강의도 여러 차례 들어보면, 아이고야, 출판업이라는 게 참 녹록한 게 아니구나 했었던 기억도 있건만, 어느새 까먹고는 또 그 로망으로 이 책을 찾았고.. 역시 덮으면서 좋아하는 것과 일하는 것은 별개인 것이다 결론 짓고. 무한 루프.

 

내 친구가 인문학 서점을 해서, 요즘 알라딘에서 사야할 책들 중 인문학에 관련된 책은 이 아이를 통해 구입하고 있는데, 코로나 이후로 많이 힘들어보인다.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건, 그저 책 몇 권 정기적으로 사주는 것 뿐이고, 안스럽지만 잘 버텨나가길 응원하면서 또 생각한다. 역시, 업은, 살아간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야. 세상에 생각만큼 고상하고 즐겁기만 한 일이 어디 있겠어.

 

 

 

 

 

 

 

 

 

 

 

 

 

 

 

 

 

지금 들고 나온 책은 이것. 일한다고 읽지는 못하고 있는데, 어제 몇 장 읽어본 결과 내게 건네는 말들이 많은 것 같아 진지하게 읽으려고 하고 있다. 나이듦과 돌봄과 병듦에 대해 이제 좀더 사회적으로 논의할 시기가 온 모양이다. 그리고 이러한 집단적이면서 진지한 접근방법이 마음에 든다. 다 읽고 페이퍼 써야지 하면서 다시 일하러 휘릭. (오늘은 일요일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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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1-08 20: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11-08 23: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공쟝쟝 2020-11-09 08: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일 몸 축나지 않게 하시구용^.^ 새벽세시.. 는 독후감 기다리겠습니다!! (장바구니에 대기중 😶 드릉드릉~~)

비연 2020-11-09 08:31   좋아요 0 | URL
감사감사~ 새벽 세시 ... 좋네요. 페이퍼 쓸수 있도록 노력!

다락방 2020-11-09 08: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새벽 세시 저도 사두었어요. 아무래도 저도 나이들면서 몸이 달라지는 걸 느끼기 때문에 관심이 가더라고요. 비연님의 페이퍼 기다리겠습니다.

비연 2020-11-09 08:55   좋아요 0 | URL
좋은 문제제기가 있는 책 같아요. 페이퍼 쓸 수 있어야 할텐데.. 홧팅하갰나이다!^^

syo 2020-11-09 13: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바쁨은 비연님의 운명인가요?
비연의 ‘비‘가 busy의 그 ‘비‘라는 말이 있어...

비연 2020-11-09 13:34   좋아요 0 | URL
그것이... 바쁘다 바쁘다 좀 야단스러운 면도 있겠고 (반성중) 일을 취사선택해서 안받고 넙죽넙죽 받은 제 불찰도 있겠고 (시무룩).. 비연의 ‘비’는 비지의 비가 아니라 비상하다의 비인데. 날고 싶네요. 오늘은 특히.. ㅠ

han22598 2020-11-10 00: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좋아하는 일을 업으로 삼는 것처럼 좋아하는 장소를 거주지로 만들어버리는 실수따위는 피해야만 하는 것인가요? ㅋㅋㅋㅋ

비연 2020-11-10 01:39   좋아요 1 | URL
ㅋㅋㅋ 좋아하는 장소를 거주지로 만드는 건.. 상황에 따라선 괜찮을 때도 있지 않을까요?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