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비린토스 1 - 세 권의 책, 두 명의 여자, 하나의 비밀
케이트 모스 지음, 이창식 옮김 / 해냄 / 2006년 7월
평점 :
절판



두 권을 다 읽고 난 느낌은, 그저 허탈이다. 요즘 읽는 것마다 감흥이 적은 것은 선정이 잘못된 탓일까 아니면 내 감성이 너무 메말라서일까 아니면 추리소설류를 쉴새없이 읽어댄 부작용인 것일까. 아뭏든 길고 길었던 이 책의 마지막장을 넘기며 아무 생각이 없었다는 것에 실망해서 나 혼자 잠깐 고민해본 사항이다.

800년의 시간을 뛰어넘은 역사를 배경으로 라비린토스 3부작의 책을 지키기 위한, 혹은 상대의 입장이라면 빼앗기 위한 긴 여정이 담겨진 책이다. 1200년대의 알라이스라는 여자는 2000년대의 앨리스라는 여자에게 영적으로 다가가 있고, 주변의 많은 사람들도 시간을 뛰어넘어 비슷한 관계와 굴레를 가지고 얽혀 있게 된다. 비밀의 책이 3권이나 되는 바람에, 그리고 그 3권을 다 가져야 비밀이 완수되는 바람에 남은 한 권을 차지하기 위한 사투는 결국 피를 부르고 시대의 단절을 초래한다.

사실, 이 책이 얘기하고자 했던 건 그런 '책'에 대한 건 아니었을 게다. 그 당시에 이루어졌던 십자군 전쟁, 그리고 그 속에서 희생된 수많은 사람들. 죄목은 있으나 그 죄로 인해서라기 보다는 정치적으로 혹은 제국주의적인 영토확장으로 인해, 또는 그냥 인간의 기저에 깔린 잔학성 때문에 뜻없이 죽어간 많은 사람들을 기억하며 과연 산다는 것, 그리고 성배라는 것이 우리에게 가지는 의미는 무엇인가를 고민해가며 지은 소설이란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에 가서 오드리크 배야가 말하던 이야기들은 그런 걸 뜻하는 게 아닐까.

이런 소설을 역사추리소설이라고들 분류한다. 아마도 최근에 가장 인기가 많았고 논란의 여지가 되었던 것도 (역시 성배를 다룬) 다빈치 코드라는 비슷한 부류의 책이었다. 역사추리소설의 시초는, 내가 생각하기엔 뭐니뭐니 해도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이라는 책이고 나는 그 이후에 숱한 동종의 책들을 읽었지만 이만한 책을 발견하기 힘들었다. 어쩌면 새로운 것을 접했던 예전의 기억이 너무나 강렬해서 역치 수준이 높아진 탓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책만한 깊이를 선사하는 작품은 별로 없었다.

이 책도 마찬가지다. 많은 역사적인 사실들과 있었거나 없었던 사람들을 등장시켜 근사한 얼개를 만들어두었기에 읽는 내내 뭔가를 알아간다는 기쁨은 있었다. 하지만 일단 과거와 현재를 교차시킨 것이 좀 산만했고 연계가 가끔 헐거워지기도 했다. 과거의 그(녀)와 현재의 그(녀)를 어떻게든 연결시키려다 보니 좀 억지스러운 부분도 눈에 띄였다. 무엇보다 사랑과 신의와 그 모든 것을 다루었음에도 내 마음에 남기는 흔적은 미미하다는 것이 문제였던 것 같다. 어쩌면 비슷한 얘기들을 많이 들어서였을까. 처음부터 얘기의 전개가 어떻게 될 지 너무 뻔하게 보여서 2권이라는 길이가 상당히 지루하게 느껴졌다.

물론 작품의 완성도나 작가의 능력에 대해 의심을 품는 것은 아니나 기대에 못 미쳤다는 것 뿐이다. 과거의 감흥에 상대적인 비교를 하는 내게도 잘못이 있는, 매우 주관적인 서운함이라는 걸 밝혀두고자 한다. 역사추리소설에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한번쯤 접한다고 해서 나쁠 건 없는 책이다. 다만 '여자 댄 브라운' 어쩌고 하는 선전 문구에 너무 혹하지 말고, 전체적인 내용을 추리라는 거에만 집착하지 않고 본다면 말이다.

가을 하늘 아래, 가끔씩 팔랑이는 낙엽들을 바라보며 인생의 '성배'는 무엇일까를 곱씹어보기에 좋은 책이지 대단한 역사적 진실이나 신비주의가 담겨있는 책은 아니라는 생각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단 한번의 시선 1 모중석 스릴러 클럽 2
할런 코벤 지음, 최필원 옮김 / 비채 / 2006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모르겠다. 다들 찬사가 쏟아지는 책이라 읽고 나서 그렇게 큰 충격이 없었음을, 그리고 그다지 감흥이 없었음을 고백한다는 게 쉽지 않은 일이긴 하지만, 아뭏든 난 평범하게 잘된 책이라는 생각 뿐이다. 너무 큰 기대를 했던 걸까. 망치로 때리는 듯한 반전을 기대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전반적인 스릴감이 예상보다 별로 큰 임팩트를 부여하지 않았기 때문일까.

작품 자체에 대해서는 불만이 없다. 그레이스 로슨이라는 우리 주위에서 흔히 볼만한 주부이자 화가가 우연히 사진 현상소에서 받아든 사진 한장으로 인해 일어나는 일파만파의 사건들이 흥미진진하다고 볼 수 있다. 15년 전의 과거와 현재의 얼개들이 정교하게 들어맞고 소소한 일상생활에 대한 섬세한 묘사와 거기에서 비롯될 수 있는 공포들이 마음에 와닿게 그려지고 있다. 사랑하는 가족을 지키기 위한, 그리고 행복한 삶을 영위하는 사람들의 감성들이 전해지면서 작품을 읽는 내내 감미로움과 두려움을 오고가게 만드는 재주가 있다, 이 작가에겐. 처음 읽는 작품이지만, 충분한 역량이 있는 작가라는 것을 느끼게 해주는 작품이다.

하지만, 생각보다 반전의 충격이 크진 않았다. 작품 내내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실마리들을 제공하고 있었고 사소한 일들로 인해 일이 크게 번지는 류의 작품들은 이전에도 많았기에 대충 그 반전이라는 것이 어떤 류라는 것을 중간부터는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조금은 시시한 마음으로 약간은 지루한 마음으로 대했던 것 같다. 다른 작품과는 다르게 마지막 페이지의 다소 충격적인 반전이 낭만적인 그것이라는 점은 끌리는 면이다. 보다 사악하고 보다 악랄한 이면을 드러내기 보다는 사랑을, 운명을 드러내고 있어 책의 말미 무렵에서는 가슴 한켠에 뭉클함을 느끼게 하는 무엇이 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이 있음에도 나는 아쉬움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다지 길지 않은 장편을 두 권으로 분권했다는 매우 소심스러운 반감도 있다. 또한, 우리의 일상이 언제 허물어질 지 모르는 위선과 기만 위에 기초한 아주 유약한 것임을 느끼게 해주기에는 매우 적절한 전개임에도 무언가 빠져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그게 뭐냐고 구체적으로 묻는다면 설명하기가 매우 곤란하지만 말이다.

이 책을 읽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말해주고 싶다. 요즘 하도 반전반전하니까 반전에만 집중하여 홍보하는 경향이 추리소설계에 짙게 깔려있는데 그런 거 기대하고 보지 말아달라고 말하련다. 이 작품은 반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쩌면 우리의 소소한 일상에 대한 가련한 반기를 드는 것에 더 집중한 작품일 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 신경써서 읽는다면 훨씬 더 큰 감흥을 불러일으켜 줄 거라 믿는다. 내가 그러지 못한 아쉬움이 커서 붙이는 사족일 수도 있으나.


댓글(4)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상복의랑데뷰 2006-07-31 1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비연님의 생각과 제다이님의 생각에 걸쳐 있습니다. ^^ 잘 짜여졌긴 한데 별로 감흥이 없습니다. 밀약보다 몰입도가 떨어지는 느낌입니다.

비연 2006-07-31 1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상복의 랑데뷰님) 밀약은 괜챦나요? 흠....좀 실망이라 어쩔까 고민 중입니다
마지막 기회니 밀약이니..읽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말이죠...

상복의랑데뷰 2006-07-31 12: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반적으로 마지막 기회가 평이 제일 좋은데 그건 저도 안 읽어봐서 모르겠고, 밀약은 책의 상태에 재미가 좌우되는 편이시라면 절대 권하고 싶지 않습니다. -_-; 하지만 결말이 더 깔금하고 좋았습니다.

비연 2006-07-31 15: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의 상태? 흠....마지막 기회를 한번 봐야겠군요...밀약도 고려 중~
좋은 책 소개 감솨합니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동서 미스터리 북스 3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김용성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3년 1월
평점 :
품절



요즘 서점에 직접 가게 되면, 이상스럽게 새로 나온 책들보다 고전에 끌린다. 추리소설의 예만 들어도, 대충 신간을 다 읽는 편이기 때문에 내가 잠시 관심을 두지 않은 사이 뭐 새로 나온 게 없나 하고 신간 쪽을 기웃거리는 게 나의 일반적인 행동양상이지만, 요 몇 달 사이 읽었거나 내용 다 알고 있어 쳐다도 보지 않던 작품들 쪽으로 발걸음이 옮겨지는 건 어인 일인지. 그래서 집어든 것이 아가사 크리스티의 '오리엔트 특급살인'과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라면 더욱 아연실색할 일이 아닌가.

아가사 크리스티의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는 사실 책으로 직접 읽은 적이 없었다(이걸 지금에야 깨달았다). 너무나 유명하고도 유명한 작품인데다 연극으로도 많이 했었고 이런 비슷한 플롯으로 풀어나가는 수많은 영화와 소설들을 통해서 나는, 이 책을 읽었다고 착각하고 있었던 게다. 어이없는 깨달음 속에(어떻게 이걸 지금 알았는지...) 이 책만큼은 사오자 말자 읽기 시작해야 했다.

고전이란, 역시 고전이다. 다 아는 내용에 어찌 보면 조금 오래 전 작품이라 요즘 읽으면 약간은 현실감없이 읽어내려갈 수도 있을텐데, 정말이지 고전을 읽다 보면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기본적인 프레임은 고전에서 다 끝난 거다. 그 이후의 사람들은 거기에 현학을 덧붙이거나 현실을 반영하거나 독특한 캐릭터를 창조하거나 심리극을 하드보일드로 하드보일드를 사회추리로 바꾸어나가는 것일 뿐 기본을 건드리기는 힘들다. 난 아가사 크리스티의 대표적 작품인 이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를 보면서 무릎을 치며 이거다를 연발할 수 밖에 없었다.

외딴 섬에 불려들어간 10명의 각기 다른 사람들. 그리고 도착하자마자 울려퍼지던 그들의 숨겨진 죄상들. 사회적으로는 무죄방면 혹은 용서받았으나 자신의 내면에서 늘 스스로를 강박하고 옥죄던 과거의 일들이 그렇게 낱낱이 알려지고 나서 하나씩 둘씩 죽어나간다. 그것도 10개의 인디언인형이라는 마더 구스의 노래와 똑같은 방법으로, 죽을 때마다 놓여있던 인디언 인형들도 하나씩 사라지면서 말이다.

이 책의 압권은 살인이 아니다. 밀폐된 공간 속에서 양심에 거리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죽음이라는 위기에 봉착하면서 표출되는 인간성과 심리묘사가 탁월하다는 게 제일의 매력이다. 그들은 어떤 면에서는 자신의 죄를 합리화하고 다른 사람의 죄는 확신하며, 죽지 않기 위해 서로를 의심하고 추적하고, 그럼에도 시시가각각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 아래 미치고 발광한다. 그 과정이 연극적인 대사와 설정 속에서 그지없이 탁월하게 나타난다.

10명의 사람이 다 죽고 나서 도착되는 편지 한통에서 드러나는 진실은, 알고 있었던 나에게도 충격이었다. 읽으면서 내가 알고 있는게 맞나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정교한 플롯이 돋보였다. 아가사 크리스티가 추리소설의 여왕일 수 있는 이유는, 그냥 그저그런 추리로 사람을 현혹시키지 않고 나름의 매우 잘 짜여진 스토리라인과 더불어 사람의 기본적 심리를 파악하여 범죄와 결부시켜 풀어나갔다는 데에 있을 것이다. 추리소설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성향이 가지가지이긴 하지만, 적어도 아가사 크리스티를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범죄라는 사회적 행동을 통해 드러나는 인간의 감추어진 본성. 그것은 동서양과 시대고금을 막론하고 변하지 않는 진리 중의 하나이고 그래서 고전은 영원불멸이며 아름다운 것이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이 책은 읽었더래도 또 다시 추천하고픈 작품이다. 초절정강추라고 표현해본다.

뱀꼬리) 근데, 책 두께를 불리려고 뒤에 수록한 중편은 에르큘 포와로가 나옴에도 너무나 범작이라는 데에 실망이다. 오히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의 번역에나 더 신경을 썼더라면 좋았을텐데 싶다. 사실, DMB 시리즈의 번역은 늘상 불만이지만, 이 책은 정말 심하다 싶은 번역이 많았다. 직역을 얼토당토않게 해서 영어로는 이거였겠군 예상이 될 정도다. (편지말미에 '친절한 유나 낸시 오웬'이라고 번역이 되어 있다면 원래 영어가 뭐였는 지 예상할 수 없겠는가?) 정말, 번역을 제대로 하는 것에 집중합시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ayonara 2006-07-30 0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럽습니다. 이 책을 21세기에 처음 읽어보시다니... 어언 20년 전에 읽어버린 저에게는 이미 닳고 닳은 감흥만이... ㅠㅠ

비연 2006-07-30 23: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러우시다니..^^;;; 다시 읽어도 좋으실 것 같다는....ㅎㅎ

상복의랑데뷰 2006-07-31 1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의 충격은 대단했죠. 여사님이 그저 부러울 뿐이라는...^^

비연 2006-07-31 1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사님? 그게 누군가요? 설마 저???? (ㅠㅠ;;)
암튼..이 책을 지금 읽을 수 있는 제 입장이 저도 괜히 뿌듯해지네요..ㅋㅋㅋ
 
돌원숭이 - 전2권 세트
제프리 디버 지음, 유소영 옮김 / 노블하우스 / 2006년 6월
평점 :
절판



시리즈로 계속 나오는 추리소설을 본다는 것은 기실 멋진 일이다. 좋아하는 탐정이 책 속에서 시간에 따라 진화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고 작가의 책 한 권 한 권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맛도 삼삼하다. 추리소설 매니아라면, 좋아하는 탐정이 나오는 추리소설은 다 보아야 직성이 풀리는 게 정상일 게다.

처음 제프리 디버라는 작가가 창조해낸 링컨 라임과 아멜리아 색스의 환상 커플조를 알게 된 건 책이 아니라 영화였다. 우연히 '본 컬렉터'라는 영화를 보게 되었는데, 영화로는 그다지 큰 인상을 받지 못했었다. 어쩐지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덴젤 워싱턴과 안젤리나 졸리의 모습이 극의 완성도를 떨어뜨린 건 아닌가 나중에 의심했을 정도로. 하지만, 우연히 읽게 된 그의 라임 시리즈에 나는 빠져들게 되었다. 콜린 덱스터의 모스 경감이나 아가사 크리스티의 포와로, 레이먼드 챈들러의 필립 말로 등이 내가 집착하던 탐정들이라는 걸 고려할 때 링컨 라임이라는 법과학자에 대해 가지는 나의 애정은 이전과는 좀 다른 취향으로 선회한 셈이다.

유명한 법과학자였으나 폭발사고로 목 아래 신경이 완전히 마비된(손가락 두 개만 살아있는) 링컨 라임은 일종의 앉은뱅이 탐정인 셈이다. 물론 그가 정상인에 가깝게 사고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첨단 장비들과 전적으로 지원해주는 수많은 경찰 인력들이 포진해있어야 하지만, 어쨌거나 가져오는 증거물들을 통해 머리만을 이용하여 범행의 실체를 추적해나가는 과정은 거의 경이에 가깝다. 게다가 그의 수족을 대신하는 아멜리아 색스라는 미모의 붉은 머리 여경찰이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모든 것을 맡기고 현장을 검색하는 장면들을 묘사하는 대목에서는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물론 작품의 진가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몇 개월에 걸쳐 사전 조사를 하고 내용을 구성하는 것으로 유명한 작가는, 범인과 등장하는 모든 사람들을 역사적 배경까지 갖춘 생명체로 만들고야 만다. 이 작품에서처럼 범인 고스트는 문화대혁명 당시에 부모를 억울하게 잃고 역사적 격변기에 어렵사리 살아남은 사람이며 창이라는 사람은 반체제인사로서 망명하기 위해 밀입국선을 탔지만, 그로 인해 인생을 희생당하게 된 가족과의 갈등, 자신의 신념과 물질 환경과의 대치 등으로 인해 갈등을 하는 사람이다. 대부분, 마치 신문의 기사를 통해 현실 속에서 만날 법한 매우 구체적인 인물들로 묘사된다는 점이 이 작품의 매우 큰 매력이다.

그러나 시리즈물이 빠질 수 있는 위험한 오류는 똑같은 캐릭터의 탐정과 주변 인물들에 더하여 어쩔 수 없이 반복되는 상황들 속에서 도출되는 플롯의 유사성과 진부함이다. 대표적으로 파트리샤 콘웰의 작품들을 보다가 중도에 포기한 것도 그런 맥락이다. 내가 근래 들어 매우 흥미로와 하는 이 작가, 제프리 디버도 드디어 슬슬 그런 기미를 보이고 있음을 이 책에서 확인했다는 점이 좀 불안한 요소로 등장한다.

범인이 누구인가가 책 중간부터 보이기 시작했고 그것을 밝혀나가는 과정들이 이전 작품의 그것들과 유사하게 겹치고 있다. 링컨 라임의 머리와 아멜리아 색스의 손발 외에는 모두 바보들만 포진해 있어 실수 연발인데, 어느 순간 칠판 가득히 쓰여진 증거물 목록에서 링컨 라임은 불현듯 섬광같은 능력(!)으로 답을 찾아내고 심각한 위기에 빠질 뻔한 아멜리아를 구해낸다는 플롯. 링컨과 아멜리아의 사랑은 나날이 발전하고 있고 성숙해지고 있지만(이 작품에서 도약을 했다고 보여진다) 그들의 내적인 컴플렉스는 여전히 작품의 근간을 이루고 있어 약간 식상한 감도 없지 않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 작품에 별 네개를 과감히 준 것은, 이전에 보이지 않던 인간적인 냄새 때문이다. 특히, 링컨 라임과 소니 리와의 우정은 이 작품을 빛내는 가장 큰 요소 중의 하나라고 믿는다. 동양과 서양, 장애인과 비장애인, 과학과 중국 전통문화 등등, 둘 사이에 공통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지만, 그 모든 것이 경계선 없이 어우러지는 과정이 무리없이 잘 묘사되어 감동을 준다. 아울러, 밀입국이라는 예민한 소재에서 도드라지는 사람의 내적인 갈등, 성찰, 깨달음 그리고 그 속에 또 한 자리를 차지하는 가족에 대한 사랑은 이전 작품에서는 볼 수 없는 부분으로 보여진다.

물론, 제프리 디버가 무척이나 애썼다는 것이 드러남에도 동양에 대한 서양 사람의 편견이 드문드문 내비친다는 것은 아쉬운 일이다. 어쩌면 그건, 노력한다고 감추어지는 것은 아니리라. 그런 것에 대한 약간의 불쾌감이나 도식화되어가는 플롯에 대한 약간의 반감만 무시한다면, 매우 재미있게 그리고 매우 흥미진진하게 이 책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라임 시리즈가 이어서 또 나온다면, 아마도 난, 결국 구입할 것 같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비로그인 2006-07-01 15: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링컨 라임 시리즈 만세-.-/
추천하고 가요^^

비연 2006-07-03 09: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숍님) 저도 만세, 만만세! ^^/
 
망량의 상자 - 상 백귀야행(교고쿠도) 시리즈
쿄고쿠 나츠히코 지음 / 손안의책 / 2005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솔직히 표지가 섬뜩하다. 들고 다니기 편해서 지하철이나 버스에서도 읽곤 했는데, 도대체 다른 사람들이 이 표지를 보고 내가 어떤 책을 읽는다고 생각할까 마음이 조금 쓰였다. 밤에 이 책을 침대에 놓아두면 불쑥 겁이 나곤 했다.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더 그랬다. 내용을 잘 반영한 표지라는 건 인정하지만(솔직히 상자 하나 그려두고 끝내는 표지는 너무 밋밋하지 않겠는가) 자기 전엔 꼭 반대쪽으로 돌려놓고 자야 안심이 되었다.

리뷰 쓴다고 들어와서는 왜 표지 타령이냐. 그래도 표지가 가장 덜 엽기적이기 때문이다. 난 이 책을 읽는 내내 솔직히 힘들었다. 재미없고 지루해서가 아니라-사실 교고쿠도의 장광설에는 가끔씩 지치긴 했었다-내용이 함축하고 있는 무게에 그 잔인함에 시달려서라고 하는 게 더 옳은 표현이겠다. '우부메의 여름'을 읽었을 때는 그런 느낌보다는 '충격적'이라는 느낌이 더 강했었다. 처음 만나는 박학다식하다 못해 너무 수다스럽기까지 한 교고쿠도라는 사람에게 그랬고 너무나 일본적인 색채가 진한 소설의 내용이 그랬다. 그런데 이 '망량의 상자'는 그지없이 무거웠다. 결말 부분에 가서는 그 무거움이 더없어 커져서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어느 정도 예측은 하고 있었던 결말이지만 교고쿠도의 외침("말하지 마십시오, 요코씨. 그것만은...")은 내게 향하는 것 같이 아리게 다가왔다. 정말 이 작가는 잔인하다. 사람을 쉴 틈도 주지않고 몰아세우는 기술이 있다.

'망량' 이라는 말이 수도 없이 등장하는 책이지만, 결코 그 '망량'에 대한 정확한 정의는 내려주지 않고 있는 것이 또한, 신비감을 자극한다. 귀신이라 하기에도 악마라 하기에도 적합치 않은, 무어라 지칭하는 것이 어려운 그 '망량'은, 기실 사람의 마음 기저에 있는 실체가 없는, 그 무엇이 아닌가 싶다. 내 속에서 나를 지배하고, 나를 집착하게 하고, 혹은 벗어나고 싶게 하는, 형체는 없으나 나를 늘 구속하는 것. 그것은 혹은 욕망으로 혹은 미움으로 혹은 광기로 표출되기도 하면서 내가 떠날 수 없게 옭아매곤 한다.

그리고 '상자'는 그 '망량'이 머무르는 곳이다. 그것은 주로 내 마음에 있겠으나 겉으로 빼내오면 그 어떤 공간도 또한 가능한 것이다. 어쩌면 나의 육신의 일부가 담겨져 있어도 가능할 지 모르겠다. 잊고 살 수 없는, 늘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는 참담한 내용이 내 팔, 내 손가락 등으로 바뀌어져 그 속에 갇혀 있는 것이겠기에. 따라서 '상자'에 그리도 집착했던 효에, 구보 슌코, 미마사카 등은 '상자'라는 대상에 자신의 모든 '망량'들을 걸고 매달렸었던 것이리라.

여기에 등장하는 등장인물들은 결말 부분에 가면 다 밝혀지지만, 저마다 큰 마음의 상처들을 안고 살아간다. 생채기 정도가 아니라 칼로 그어져 속의 것들이 튀어져 나올 정도로 깊고 깊은 상처가 세월의 흐름 속에서 닳아지는 것이 아니라 더 커지고 넓어져 도저히 감추어둘 수 없을 정도로 벌어진 끝에 이 많은 사건들이 일어난다. 그들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망량'들을 '망량'으로 인지하지 못하고 정당성을 부여한 채, 어쩌면 그 '망량'을 부여잡기 위해 그 어떤 것도 감수한 채 자신도 속이고 남들도 속이느라 필요없는 희생들을 끌어내었는 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나는 왠지 몹시...남자가 부러워지고 말았다." 라는 끝대목이 이 책의 많은 부분들을 설명한다. 스포일러가 될 까봐 더이상의 설명이 어렵지만,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인 양 마음에 담아두고 착각을 행복으로 받아들이며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부러워지는 건, 우리가 그나마도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 너무 많이 알고 너무 많이 드러내고 '망량'을 너무나 냉정한 시선으로 가슴아프게만 담아두는 우리네 많은 사람들의 생보다는 어찌 보면 거짓이라 할 지라도 자신이 받아들이기 편한 상태를 고수하는 개인은 행복할 수 있겠다 싶다.

이 책은, 엽기적이기도 하고 기기묘묘하기도 하고 때로는 던져버리고 싶을 정도로 찝찝한 느낌을 안겨 주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한 소설이다. 그냥 현상적인 얘기들만 본다면 요괴소설이니 하는 분류에 쳐박아 두어도 무색하지 않을 만한 내용이지만,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잘 짚어 생각해보면 그냥 그런 수준에 머무르기에는 아까운 책이라는 걸 알 수 있게 된다. 물론 나도 이러한 개운치 못한 뒤끝 때문에 별 다섯개에서 하나를 과감히 빼버리긴 했어도.

아마 이 책을 읽어야 교고쿠 나츠히코의 진면목을 확인할 수 있을 거라는 데에는 공감하지 않을까 한다. '우부메의 여름'보다 더욱 강렬하고 더욱 잔인하고 더욱 인상적인 책이라고 감히 말해본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oldhand 2006-06-06 15: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에게는 "압도적"이라는 느낌을 강하게 주는 작품이었습니다. 물론 소설을 읽고 난 후의 부작용은 만만치 않지요. 그래도 전 비위가 센 편이라서. ^^

상복의랑데뷰 2006-06-06 16: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작품을 본 뒤에 택배아저씨를 보면 호오~하게 된다지요 ^^

비연 2006-06-07 09: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oldhand님) '압도적'..이란 표현이 정말 적절하네요. 사실, 이 책을 읽고 나서 네모난 상자만 보면 갑자기 기분이 나빠지고 하얀 장갑도 마찬가지..이게 부작용이라면 부작용이겠죠? 암튼 쇼킹했습니다.

상복의 랑데뷰님) ㅋㅋㅋ 택배 아저씨 볼 때마다 시선을 피하게 될 듯 합니다, 전. 솔직히 님이 추천해주셔서(제 리뷰 댓글에 읽어보라고 권해주셨던 게 기억나서요) 그 기분 나쁜(!) 표지에도 불구하고 읽었더랬습니다^^;;;

비연 2006-06-07 18: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뱀꼬리하나..붙이면...이 내용을 우리 회사 사람들한테 얘기해주었더니만...먹던 케익을 다 접시에 내려놓더군요...(추리소설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비위가 좋은 걸까요? 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