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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원숭이 - 전2권 세트
제프리 디버 지음, 유소영 옮김 / 노블하우스 / 2006년 6월
평점 :
절판
시리즈로 계속 나오는 추리소설을 본다는 것은 기실 멋진 일이다. 좋아하는 탐정이 책 속에서 시간에 따라 진화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고 작가의 책 한 권 한 권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맛도 삼삼하다. 추리소설 매니아라면, 좋아하는 탐정이 나오는 추리소설은 다 보아야 직성이 풀리는 게 정상일 게다.
처음 제프리 디버라는 작가가 창조해낸 링컨 라임과 아멜리아 색스의 환상 커플조를 알게 된 건 책이 아니라 영화였다. 우연히 '본 컬렉터'라는 영화를 보게 되었는데, 영화로는 그다지 큰 인상을 받지 못했었다. 어쩐지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덴젤 워싱턴과 안젤리나 졸리의 모습이 극의 완성도를 떨어뜨린 건 아닌가 나중에 의심했을 정도로. 하지만, 우연히 읽게 된 그의 라임 시리즈에 나는 빠져들게 되었다. 콜린 덱스터의 모스 경감이나 아가사 크리스티의 포와로, 레이먼드 챈들러의 필립 말로 등이 내가 집착하던 탐정들이라는 걸 고려할 때 링컨 라임이라는 법과학자에 대해 가지는 나의 애정은 이전과는 좀 다른 취향으로 선회한 셈이다.
유명한 법과학자였으나 폭발사고로 목 아래 신경이 완전히 마비된(손가락 두 개만 살아있는) 링컨 라임은 일종의 앉은뱅이 탐정인 셈이다. 물론 그가 정상인에 가깝게 사고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첨단 장비들과 전적으로 지원해주는 수많은 경찰 인력들이 포진해있어야 하지만, 어쨌거나 가져오는 증거물들을 통해 머리만을 이용하여 범행의 실체를 추적해나가는 과정은 거의 경이에 가깝다. 게다가 그의 수족을 대신하는 아멜리아 색스라는 미모의 붉은 머리 여경찰이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모든 것을 맡기고 현장을 검색하는 장면들을 묘사하는 대목에서는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물론 작품의 진가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몇 개월에 걸쳐 사전 조사를 하고 내용을 구성하는 것으로 유명한 작가는, 범인과 등장하는 모든 사람들을 역사적 배경까지 갖춘 생명체로 만들고야 만다. 이 작품에서처럼 범인 고스트는 문화대혁명 당시에 부모를 억울하게 잃고 역사적 격변기에 어렵사리 살아남은 사람이며 창이라는 사람은 반체제인사로서 망명하기 위해 밀입국선을 탔지만, 그로 인해 인생을 희생당하게 된 가족과의 갈등, 자신의 신념과 물질 환경과의 대치 등으로 인해 갈등을 하는 사람이다. 대부분, 마치 신문의 기사를 통해 현실 속에서 만날 법한 매우 구체적인 인물들로 묘사된다는 점이 이 작품의 매우 큰 매력이다.
그러나 시리즈물이 빠질 수 있는 위험한 오류는 똑같은 캐릭터의 탐정과 주변 인물들에 더하여 어쩔 수 없이 반복되는 상황들 속에서 도출되는 플롯의 유사성과 진부함이다. 대표적으로 파트리샤 콘웰의 작품들을 보다가 중도에 포기한 것도 그런 맥락이다. 내가 근래 들어 매우 흥미로와 하는 이 작가, 제프리 디버도 드디어 슬슬 그런 기미를 보이고 있음을 이 책에서 확인했다는 점이 좀 불안한 요소로 등장한다.
범인이 누구인가가 책 중간부터 보이기 시작했고 그것을 밝혀나가는 과정들이 이전 작품의 그것들과 유사하게 겹치고 있다. 링컨 라임의 머리와 아멜리아 색스의 손발 외에는 모두 바보들만 포진해 있어 실수 연발인데, 어느 순간 칠판 가득히 쓰여진 증거물 목록에서 링컨 라임은 불현듯 섬광같은 능력(!)으로 답을 찾아내고 심각한 위기에 빠질 뻔한 아멜리아를 구해낸다는 플롯. 링컨과 아멜리아의 사랑은 나날이 발전하고 있고 성숙해지고 있지만(이 작품에서 도약을 했다고 보여진다) 그들의 내적인 컴플렉스는 여전히 작품의 근간을 이루고 있어 약간 식상한 감도 없지 않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 작품에 별 네개를 과감히 준 것은, 이전에 보이지 않던 인간적인 냄새 때문이다. 특히, 링컨 라임과 소니 리와의 우정은 이 작품을 빛내는 가장 큰 요소 중의 하나라고 믿는다. 동양과 서양, 장애인과 비장애인, 과학과 중국 전통문화 등등, 둘 사이에 공통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지만, 그 모든 것이 경계선 없이 어우러지는 과정이 무리없이 잘 묘사되어 감동을 준다. 아울러, 밀입국이라는 예민한 소재에서 도드라지는 사람의 내적인 갈등, 성찰, 깨달음 그리고 그 속에 또 한 자리를 차지하는 가족에 대한 사랑은 이전 작품에서는 볼 수 없는 부분으로 보여진다.
물론, 제프리 디버가 무척이나 애썼다는 것이 드러남에도 동양에 대한 서양 사람의 편견이 드문드문 내비친다는 것은 아쉬운 일이다. 어쩌면 그건, 노력한다고 감추어지는 것은 아니리라. 그런 것에 대한 약간의 불쾌감이나 도식화되어가는 플롯에 대한 약간의 반감만 무시한다면, 매우 재미있게 그리고 매우 흥미진진하게 이 책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라임 시리즈가 이어서 또 나온다면, 아마도 난, 결국 구입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