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라비안 나이트 살인 노블우드 클럽 5
존 딕슨 카 지음, 임경아 옮김 / 로크미디어 / 2009년 9월
평점 :
절판



존 딕슨 카의 작품들은 <황제의 코담뱃갑>, <세 개의 관>, <화형법정>, <모자광살인사건>, <구부러진 경첩> 정도를 읽어왔던 것 같다. "<벨벳의 악마>는 책장에 꽂혀있고. 어떤 작가이든 좋아하는 사람이 있고 그닥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만, 존 딕슨 카는 고전추리소설의 대가로서 사모해마지 않는 사람이 많은 것 같다. 내 경우엔, 뭐랄까 딱히 좋다 라는 느낌을 주지는 않는데 말이다, 쓰는 작품마다 고전의 명작이구나 라는 생각은 늘 가지게 되는 작가이다.

아라비안 나이트 살인. 기드온 펠 박사의 서재에 모인 네 남자. 펠 박사, 해들리 총경, 캐러더스 형사, 허버트 암스트롱 경. 그들의 앞에는 살인사건의 증거물들이 놓여 있다. 요리책과 두 개의 가짜 수염, 석탄 덩어리를 던진 자국이 있는 벽의 사진, 구부러진 단검,..그 기묘한 증거물들 앞에서 펠 박사를 제외한 세 명의 사건 설명이 이어진다. 담장 위의 정신나간 노신사, 춤추는 박물관 안내원, 가짜 경찰관, 그리고 박물관 마차에서 튀어나온 난데없는 시체들...

제프 웨이드의 박물관. 흡사 아라비아의 궁전을 연상시키는 그 박물관에서 어느날 저녁 몇 명의 남녀들이 모여 모종의 연극을 꾸민다. 제프 웨이드의 딸인 미리엄 웨이드의 약혼자인 매너링을 골탕 먹이기 위해 모인 사람들. 제프 웨이드의 아들인 제리 웨이드와 딸인 미리엄 웨이드. 미리엄의 친구인 해리엇 커크턴, 집사인 로널드 홈스, 박물관 안내원인 프루언, 그리고 리처드 버틀러와 샘 벡스터. 이들은 박물관이라는 공간을 이용하여 각자에게 역할을 부여하고 매너링에게 조금 겁을 주는 연극을 꾸미기로 한 후 일을 진행시키는데, 그 와중에 조금씩 일이 꼬이고, 급기야 한 배역을 연기하기로 했던 펜드렐의 시체가 발견되면서 상황은 급반전이 된다.

각기 다른 태생(잉글랜드-스코틀랜드-아일래드)의 세 명의 화자가 사건에 관여를 하게 된다. 관련자들의 엇갈리는 진술들 속에서 진실과 거짓을 구별하는 과정들이 이어지고 뜻하지 않은 반전들도 연속된다. 그러면서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하는 윤곽과, 아 다 해결되었구나 라는 정점에서 다시한번 펠 박사의 날카로운 지적으로 사건이 급마무리되고, 하룻밤의 아라비안나이트는 그렇게 끝이 난다.

존 딕슨 카만이 창조해낼 수 있는 소설이 아니었나 싶다. 밀실살인의 대가이고 지적이면서도 묘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그는 소설의 배경에 시대상도 교묘하게 결합하는 재주가 있다. 특히나 이 책은 고대의 분위기를 자아내는 박물관과, 하룻밤 계속 되는 이야기의 향연, 그리고 아라비아의 고대모습을 흉내낸 연극장면들이 모두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뭔가 신비하고 뭔가 기묘한 느낌을 가지게 하는 매력이 있다. 또한 세 명의 각기 다른 화자가 이야기를 엮어나가는 절묘한 구성이 꽤나 잘된, 그래서 후대의 탐정소설 작가들에게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게 하는 소설이기도 하다. 특히나 전혀 연관성 없어 보이는 증거들이 나중에 하나의 범죄 스토리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 지가 하나하나 밝혀지는 재미가 상당히 크다. 양파의 껍질을 한꺼풀 한꺼풀 벗겨내는 느낌. 혹은 지층의 한 층 한 층을 내려가면서 화석들을 캐내는 느낌.

사실 처음 읽을 때는 산만한 내용과 말도 안 되어 보이는 증거들에 조금 혼란스러운 상태에서 독서를 지탱하게 되지만, 점점 갈수록 빠져들게 되고 그 답답한 심정들이 조금씩 풀려나가는 느낌을 확실히 부여한다는 점에서, 존 딕슨 카는 대단히 멋진 범죄소설 작가라는 것이 입증되는 셈이다. 나처럼 존 딕슨 카를 많이 좋아하지 않는 독자조차도 아 이 정도면 고전추리소설의 명작이지! 라며 무릎을 치게 만드는 작품이라고나 할까.

특히 난 이 마지막 문장이 마음에 든다.

박사가 가스불을 끄자 날카로운 수증기 소리를 한 번 내고 주전자는 잠잠해졌다. 그러고 나서 모두가 마음이 편안해져 식욕을 느꼈고 다 같이 아침을 먹으러 나갔다.

추리소설의 마지막치고는 참 평온한 느낌을 주지 않는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실종 - 사라진 릴리를 찾아서,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3-24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3
마이클 코넬리 지음, 김승욱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5월
평점 :
품절



헨리 피어스는 34살의 전도유망한 화학자다. 에미디오 테크놀로지라는 회사의 대주주이면서 과학자이기도 한 그는, 최근 일중독으로 니콜이라는 애인과 헤어지게 되었고 그래서 원래 살던 집에서 나와 이사를 한 상태다. 이사를 한 첫날부터 이상한 전화에 시달리게 된다. "릴리는 어디 있지?" 한두번도 아니고 쉴새없이 날아드는 전화 속에서 피어스는 이 릴리라는 여자가 웹사이트의 에스코트라는 것을 알게 되고, 매우 매력적인 그 여자가 어쩌면 위험에 빠졌을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그 여자의 주변을 조사하기 시작한다. 그와 맞물려, 지금 진행하고 있는 '프로테우스'라는 프로젝트는 자금난으로 허덕이고 있으나, 곧 대단한 투자자에게 시연을 하여 투자금을 얻어내기 위한 노력들을 하고 있는 중이다. 릴리를 좇던 피어스는 폭력과 살인의 도가니에 저도 모르는 새에 빠지게 되고 놀라운 사실들을 하나하나 밝혀가면서 평온했던 일상에 무서운 격랑을 경험하게 된다....

사실, 마이클 코넬리의 번역된 소설을 네 권째 읽으면서 가장 덜한 작품이라는 생각은 들었다. 짜임새가 덜하고 매력적인 탐정의 캐릭터가 나오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읽으면서 조금은 아쉽기도 했다. 하지만, 역시나 나와 같은 일상성을 가진 주인공이 어떤 음모에 휘말리게 되고 그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사투를 벌인다는 내용에 흥미가 돋워지지 않을 수 없다. 특히나, 그 음모라는 것이 주인공의 과거의 상처와 맞물려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부터는 더더욱 그렇다.

사람의 행동은, 늘 새로운 것 같지만 늘 오래된 것이라는 조금은 진부한 결론에 도달할 지도 모르겠다. 지금 이순간 행하는 모든 말과 행동은 그 때 그 때 상황에 따라 만들어지는 것이지만, 그 이면에는 나의 과거가 반영되어 있다는 것이고 어쩌면 그것은 도저히 뿌리칠 수 없는 큰 힘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특히나 자신의 가족에게 저지른 실수들은, 그것이 남들이 보기엔 대수롭지 않은 것이라 해도, 평생의 트라우마로 남게 되고 비슷한 상황에서 그 상처를 회복하기 위해 애쓰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수도 있다. 이 소설은 바로 그런 점을 무섭게 파고드는 작품이다.

제대로 된 추리소설은, 그래서 사람을 잡아당긴다고 생각한다. 그냥 죽이고 살리고 쫓고 쫓기고 때리고 맞고 하는 것은 B급 폭력물에 지나지 않고 말초적인 신경만을 가동하며 흥분할 수 있는 분야일 뿐이다. 스릴러 내지는 추리소설의 묘미는 인간의 잠재된 심리를 날카롭게 파악하여 벌어지는 사건과 연결시킴으로써, 읽는 사람들에게 범인을 혹은 피해자를 이해하게 하는 혹은 동감하게 하는 장치들이 들어가 있음으로써 생긴다. 이런 면이 부족한 추리/스릴러 소설은 적어도 나에겐 전혀 매력이 없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마이클 코넬리의 이 책도 마찬가지로, 주인공의 트라우마와 유사한 살인(?) 사건, 그리고 주위를 둘러싼 사람들과의 관계들, 그 속에서 드러나는 또 다른 인간의 심리들이 융합되어 매우 재미있는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있음을 인정한다. 내가 읽은 전작들처럼-시인, 블러드워크, 링컨차를 타는 변호사- 대단한 흡인력이 있다고 한다면 과장이겠지만, 읽으면서 느끼는 박진감과 서스펜스, 그리고 그 속에 담긴 '사람'에게 부여된 살아있는 캐릭터들은 인상적이다. 아마 이러한 점이 마이클 코넬리의 전작을 다 읽어보겠다는 마음을 일으키는 모양이다. 나를 포함해서 말이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ryck 2009-11-30 2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추리소설은 좀 쉰다고 안 했던가? ;;;
이건 무슨... 비연의 재능을 다시금 확인하는 날이군...

그 재능은.. 정치에서의 재능.

비연 2009-11-30 23:32   좋아요 0 | URL
흠..흠..그러니까 말이지..흠..흠..
그냥 한권. 딱 한권 읽은 거지...;;; (정말 정치에 재능이?ㅡㅜ)

머큐리 2009-11-30 2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호~ 저도 이책을 주말에 읽었어요...ㅎㅎ
정말 추리소설은 좀 쉬신다더니...ㅋㅋ

비연 2009-11-30 23:33   좋아요 0 | URL
흑흑. 정말 그게 손이 자꾸 가네요..마이클 코넬리 거 하나 남았는데,
자꾸 읽고 싶어서 어쩔까 모르겠어요, 머큐리님..;;;
 
고백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18
미나토 가나에 지음, 김선영 옮김 / 비채 / 2009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무섭다. 

추리/스릴러 등의 쟝르문학을 편식해대는 나에게 있어서는 책 속에서 읽는 '살인'에 대한 묘사들이 더이상 무서움의 대상은 아니다. 미국이나 일본의 소설들은 여차하면 연쇄살인이고 여차하면 사람의 신체를 기기묘묘하게 잘라대곤 해서, 이젠 거의 무감각한 상태이기도 하다. 사실 읽으면서 마음 한구석, 스물스물 뭔가가 올라오는 불쾌감은 늘 느끼지만, 그 감정이 '무섭다'는 아니다. 오히려 정말 무서운 것은 그 일을 자행해내는 사람들의 마음에 있는 그 무엇이다. 차라리 그들이 괴물이나 좀비같은 존재로 묘사된다면, 오히려 무섭지 않다. 왜냐하면, 그건 사람이라고 하기 어려우니까, 따라서 무시할 수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그들이 일상적인 사람이지만, 어린시절이나 혹은 그 이후에 받은 내재적인 상처로 인해 마음이 더할 수 없이 왜곡되어 있다고 상정되면, 조금씩 두려워지기 시작한다. 그것은 어쩌면 누구에게나 마음 속에 가질 수 있는 분노와 악의일 수도 있기 때문이리라. 정도의 차이는 있을 지언정, 사람은 누구나 주변으로부터 상처를 받고, 특히나 가족에게서 받는 상처는 뇌수의 깊숙한 곳까지 자리를 차지하기 마련인데, 그런 것이 어느 누군가에게서는 외부로 발현이 되고, 어느 누군가에게서는 그저 잠재되어 있을 따름이라는 생각은 나 스스로도 그 모든 상황에서 완전히 발을 빼지 못하게 하는 놀라움이 있다.

그런 이유로, 이 소설 '고백'은 무섭다.

어느 중학교의 여교사, 모리구치 유코는 학교에서 어린 딸을 잃게 된다. 수영장 익사사고라고 생각했던 그 사고는, 종업식날 사직의사를 밝히면서 남긴 모리구치 선생의 한마디, '마나미는 사고로 죽은 게 아니라 우리 반 학생에게 살해당했기 때문입니다' 로 전환점을 맞게 된다. AIDS에 걸린 남편의 혈액을 범인인 두 학생의 우유에 넣었다고 말하고 유유히 떠난 모리구치 선생의 고백 뒤로, 각각 당사자들의 목소리가 담긴 글들이 옴니버스 형식으로 펼쳐지고, 결국 마지막의 다소 충격적인 고백으로까지 이어지는 이 소설은, 참 많은 것을 시사한다.

아이를 잃은 어머니의 슬픔, 그리고 그것이 자신의 제자들에 의해 자행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의 끝없는 분노도 있고, 자신의 아이를 너무나 사랑하고 이렇게 키우는 것이 옳다고 믿었던 범인 어머니의 맹목적인 사랑, 그리고 그 범인 아이의 중학생스러운 심리적인 치기와 사소한 분노, 또다른 범인 아이가 자신의 어머니로부터 받은 정신적 트라우마와 그를 치유하지 못해 벌어지는 행동들은, 사람을 우리가 흔히 규정하는 '범죄자'로 만드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다시한번 생각하게 된다. 누군가의 잘잘못을 따지기에 앞서, 과연 우리에게 '죄'를 짓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어쩌면 그것은 끝없는 사랑일수도 있고 그 끝없는 사랑에 대한 갈구일 수도 있으며, 또 어쩌면 끝없는 사랑의 잘못된 방향설정일 수도 있겠다. 우리가 정말 일반적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의 마음에서 모락모락  피어나는 분노라는 화학적 반응은, 너무나 소소한 일에서 출발할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커질 수 있느냐는 것을 생각하게 한다.

잔인한 살인장면 따위는 한번도 안 나와도 사람들의 목뒤를 서늘하게 하고 머릿 속에서 무거운 종이 울리게 만드는 책들이 있다. 이 소설은 아마, 그런 느낌을 확실히 가지게 해줄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 어떠한 내용들보다도 일상적인 사람들의 분노와 살의와 잔인함을 이야기하는 이런 종류의 소설이 가장 무섭고 두렵다. 누구나 예외일 수 없기 때문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머큐리 2009-11-09 09: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동감이에요...인간에 내재된 악의야 말로 진정 무서운 것이죠...흠

비연 2009-11-09 09:56   좋아요 0 | URL
이 책이 확실히 그걸 알게 해주어서 더 무서웠답니다..;;;
 
크로스파이어 1
미야베 미유키 지음, 권일영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여행가면서 무슨 책을 가져갈까 심하게 망설였지만, 그래도 최종선택은 미미여사의 글이었다. 물론 다른 책들도 들고 갔는데, 그건 뭐 말도 안되는 경제학서적(가서 펴기만 하면 잤다..;;;) 이었기에 생략하기로 하고. 교훈은 역시 여행에는 머리를 식힐(!) 책이 필요하다는 거다. 머리를 달아오르게 하는, 말하자면 머리를 너무 써서 가열하게 하는 책은 삼가해야 한다. 괜히 짐만 무거워졌다는. 어쨌거나 이 '크로스파이어'라는 책은 여행 중에 다 읽어버렸다.

미미여사의 글이야 대부분 술술 넘어가기 마련이고 내용의 짜임새도 대단히 딴딴하기 때문에 읽는 만족도도 크기 마련이다. 이 책도 물론 그랬다. 미미여사의 초능력자 얘기는 '용은 잠들다' 이후로 두번째인데, 미미여사는 의외로 초능력자-말하자면 일반사람과 다른 능력을 지녔고 그로 인해 사회 정의를 다시한번 생각하게 되는 자-에 대한 관심이 높은게 아닐까 했다. 하긴 그 이야기의 범주가 에도시대부터 현대까지, 사무직부터 팜프파탈까지 넘나들지 않는 데가 없으니 초능력자 이야기가 하나 더 끼어들었다고 해서 새삼 이상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겠지만.
 
그렇지만, 이 책은 뭐랄까. 너무 길었다. 간단하게 끝낼 수 있는 이야기를 너무 많은 얘기를 하려다 보니 질질 끄는 기분이 없지 않았다. 그래서 읽으면서 놀랍게도 (미미여사의 책인데!) 지루했던 적도 있었음을 고백하고자 한다. 게다가 마지막은 너무나 처연했고, 이야기의 구도는 대충 짐작이 가버렸고. 내가 궁금한 건, 미미여사는 진실로 이런 사회정의의 구현에 대해 관심이 있는가 하는 거였다. 우리 모두가 불의의 일들에 닥치면 법이나 사회의 규범 따위를 무시하고 '내' 손으로 처단하고자 하는 욕구에 휩싸일 때가 있지 않을까. 그런데 내가 조정할 수 있는 초능력이 있다면?

아마도 미미여사도 이런 문제의식에서 이런 류의 글들을 쓰게 된 게 아닐까 싶다. 사실 어제 황산테러 범인이 예전의 고용주라는 기사를 보고 나는 내가 직접 가서 그 '놈'의 얼굴에 똑같이 황산을 부어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으니까. 어떻게 그런 잔인한 일을, 눈하나 깜짝하지 않고 저지를 수 있는 지. 그런 사람들도 사람이라고 법으로 보호해야 하는 건지. 의문이 드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미여사의 결론도 그렇지만, 늘 망설여지는 부분이 있는 게 사실이다. 옳은 게 무엇인가라는 가치의 문제에서부터 시작하여 누가 누구를 단죄한다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도덕적인 문제에까지 생각하다보면 머릿속이 실태라마냥 헝클어지기 마련이다. 결국 개인적인 단죄는 스스로도 증오하는 상대와 비슷한 심정에까지 이르게 한다는 것이고 어떤 목적의식이나 당위성이 있다고 해서 그 모든 것이 다 용서될 수 없다는 것이다. 아마도 미미여사가 결론을 그리 내린 건 (2권까지 봐야 알 수 있는 얘기지만), 이런 딜레마에서 나온 게 아닐까 싶다.

이 책에 대해서는 호불호가 조금씩 갈리는 것 같은데 나는 미미여사의 작품 치고는 아주 호감은 아니었다. 좀더 야무진 글이 더 좋다고나 할까. 이 책이 초기작품이기 때문에 아직 영글어지지 않은 상태의 미미여사를 보는 느낌이었다. 그래도 별 네개를 클릭하는 건, 그래도, 그래도, 미미여사이기 때문이다. 가해자와 피해자의 심리묘사는 역시나 월등했고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이 고스란히 잘 담겨진 책이었다. 그런 장점들이 미국에서나 일본에서 큰 인기를 끄는 요인이 된 것이 아닐까.

사족. 이게 몇 년만의 리뷰인가! 페이퍼를 쓰다가 문득 길어지길래 그냥 리뷰로 옮겨버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브루투스의 심장 - 완전범죄 살인릴레이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민경욱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인간이 모두 평등하다는 건 환상일 뿐이라는 게 그의 오랜 철학이었다. 이 세상은 불공평과 차별로 가득 차 있다. 누구나 태어난 그 순간부터 다양한 계층으로 나눠진다. 언젠가 반드시 최상층의 인간이 된다. 지배자가 된다...그것이 다쿠야의 최종 목표였다. (p23)  
   


여기 한 남자가 있다. 어릴 때 엄마는 돌아가시고 술에 절어 폭력을 일삼는 아버지를 미워하고 경멸하며 소년 시절을 보낸 스에나가 다쿠야. 성공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그는 로봇개발자로서 MM정공에 입사하고 그 회사의 실질적 오너의 딸과 결혼할 수 있는 기회를 눈 앞에 두고 있다. 그런데 내연 관계에 있던 야스코가 임신을 빌미로 책임질 것을 요구하는 바람에 고민하다가 (알고보니 야스코가 동시에 내연 관계를 맺고 있던) 같은 회사의 다른 두 남자와 공모하여 그녀를 살해할 계획을 세운다. 완전범죄를 위한 살인 릴레이. 그러나 결국 발견된 시체는 그녀가 아니었는데...

히가시노 게이고의 1989년도 작품이다. 1985년에 데뷔했다고 하니 비교적 초창기 작품이고 20년만에 우리나라말로 번역되어 나왔다는 게 너무 신기해서 연도를 몇 번이나 확인해야 했다. 게다가 추리소설적인 장치나 아이디어의 반짝임, 사회와 개인의 이면에 대한 정교한 묘사 등이 지금의 작품들과 별반 다를 바 없이 짜임새 있고 재미있어서 다시한번 놀랐다.

스에나가 다쿠야의 주위에는 그와 마찬가지로 과거의 상처가 현재까지 이어져 독으로 품어지고 그래서 사람에 대한 신뢰나 인생에 대한 일상적인 재미는 잃은 채 그저 '상승'에 대한 욕망만으로 가득찬 숱한 사람들이 있다.  결국 그런 자신을 세차게 내몰다가 나락에 빠지는 것은 그들이고 살아남는 것은 그들이 동경해마지않는 사람들뿐이라는 현실. 그들 중 아무도 행복해지지 못했다.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고 했던가.

   
  충복처럼 미동도 하지 않는 로봇을 올려다보며 다쿠야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지난번에 들은 무네가타의 말을 떠올렸다. 그런 일은 예외 중에서도 극히 예외적인 경우다. 로봇은 늘 인간에게 충실한 존재다. (p356)  
   


히가시노 게이고는 늘 어린 시절의 상처에 지배당하거나 펼쳐보지도 못한 꿈에 질식되어 있는 가련한 사람들에게 집중해왔다. <백야행>, <환야>가 그랬고 <용의자 X의 헌신>이 그랬다. 또 한편으로는 팜므 파탈적인 이미지의 여성을 등장시킴으로써 그 비극을 더욱 냉정하고 비극적으로 고조시키곤 한다. 이 책에서의 야스코가 그렇고 <백야행>, <환야>에 등장하는 주인공들도 그랬다. 또한 사회적인 문제들, 비단 일본만이 가지고 있지 않은 문제들에 대해서 매우 세부적으로 묘사를 하고 그 틈바구니에서 살아남으려고 바둥거리는 인간들의 비참한 현실에 대해서 지극히 제 3자적인 입장에서 동정심을 개입하지 않고 묘사해왔다. <호숫가살인사건>이 그런 류에 속할 것이다. 그리고 이 작품 '브루투스의 심장'에는 이 모든 것이 다 들어있다. 그래서 히가시노 게이고가 줄곧 관심을 가져왔던 화두가 어디에서 시작했는가를 확인하는 즐거움이 있다.

이만큼 짜임새있는 추리소설을 만나기도 쉬운 일은 아니다. 그저 일상적인 내용을 반복적으로 기술함으로써 재미는 줄 지 모르지만 읽고나면 뭔가 빠진 듯 허전한 추리소설이 있는가 하면, 이렇게 많이 공부하고 많이 생각하여 얼개가 딱 들어맞게 쓰여진 덕분에 내용의 비정함에 씁쓸함은 느낄 지언정 책을 덮을 때 구성적인 시원함을 선사하는 책도 있는 게다.



댓글(7)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비연 2007-08-29 19: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번 날렸다가 다시 썼더니 감흥이 안난다..ㅜㅜ 왜 날아간거야..쩝.

물만두 2007-08-29 19: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을수록 좋은 작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비연 2007-08-29 20:04   좋아요 0 | URL
저도 첨엔 그냥 그랬는데 요즘 나오는 책들 계속 읽다보니
점점 괜챦아지는 것 같아요...^^

비로그인 2007-08-29 19: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굉장히 깔끔하고 흥미롭게 만드는 글인데요.^^

비연 2007-08-29 20:05   좋아요 0 | URL
칭찬이신거죠? 감솨!^^ 일단 책 자체가 매우 흥미롭답니다~^^

프레이야 2007-08-30 19: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날렸다가 다시 쓰신거에요? 그럼 노고에 추천 두번 드릴 순 없나요? ^^
잘 읽었습니다, 비연님.^^

비연 2007-08-30 20:56   좋아요 0 | URL
우헤헤. 혜경님..말씀만으로도 감솨~
그냥 키 하나 잘못 눌렀는데, 싸악 사라져버리더라는..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