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윈터 앤 나이트 ㅣ 블랙 캣(Black Cat) 3
S. J. 로잔 지음, 김명렬 옮김 / 영림카디널 / 2004년 7월
평점 :
절판
가끔 그런 책이 있다. 읽고 있는 건 글자이고 나는 책을 보고 있는데 읽는 내내 영화라도 보는 듯 눈앞에서 영상이 스쳐지나가는 그런 책. 그래서 책을 다 읽고 탁 덮는 순간 귓속에서 그 대사들이 들리는 듯한 책. 아마도 이 책이 내겐 그랬던 것 같다. 추리소설이라기에는 매우 문학적이고 문학작품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시나리오 같다. 구성이 탄탄하고 앞뒤의 이어짐이 자연스러워서, 500페이지에 달하는 두꺼운 책이지만 한번 열고 읽기 시작하면 좀처럼 손을 놓을 수 없는 마력이 있는 책이기도 했다.
요즘의 추리소설 혹은 문학작품들이 많이 다루고 있는 소재 중의 하나가, 어린 시절의 상처와 그로 인한 불운한 인생, 그 속에서 또 상처입는 주위 사람들, 그리고 악연처럼 다시금 돌아오는 비슷한 상황들인 듯 하다. 주인공인 빌 스미스는 하나밖에 없는 여동생과도 소원하게 지내고 하나 있던 딸마저 사고로 잃은 채 외롭게 사립탐정을 하는 사람이다. 어느날 불쑥 찾아든 여동생의 아들, 그러니까 조카인 개리로 인해 사건에 휘말리게 되고 그 궤적을 좇아가는 와중에 살인과 실종, 그리고 워런스타운이라는 도시의 많은 사람들이 묻어두고 싶었던 추악한 사건의 전모들을 알게 된다....집단 광기라는 것이 얼마나 가당치않은 결과를 낳게 하는 것이고 그토록 비합리적인 일들 앞에서도 버리지 못하는 그 무엇 때문에 벽에 부딪힌 듯 해결하기 난감한 일들이 있을 수 밖에 없음을, 마치 내 일인양 답답해 하며 보았다.
정의란 무엇일까. 어떤 개념이나 100% 절대적인 것은 없겠지만 적어도 정의라는 개념만큼은 누구에게나 마음 속에 비슷한 像으로 그려지리라 여긴다. 그러나, 사실 따지고 보면 역사를 찬찬히 뒤돌아보아도 정의가 제대로 절대적인 가치를 지닌 채 발휘된 적이 있었는가 싶기도 하다. 어떤 인간은 너무나 나약해서 큰 흐름 앞에서 희생이란 걸 당하면서도 일성 한번 지르지 못한 채 스러지는 반면에, 다른 한편에는 그것을 합리화시키기 위해서는 어떤 희생도 불사할 수 있는 잔인하고 악랄한 인간들이 있다.
그런 면에서 여기 등장하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불쌍한 존재들이다. 아무리 벗어나려 해도 벗어날 수 없는 굴레 속에서 끝없이 자기를 용서해온 사람들이 어떤 큰 사건 앞에서 속절없이 무너져내릴 수 밖에 없을 때 그들에게 품을 수 있는 감정은 단 하나, 가엾음이 아닐까. 이 소설은 그런 심정을 가지게 한다.
한 가지만 덧붙이자면 왜 서양의 요즘 영화나 책에서는 서양남자와 동양여자를 파트너로 하고, 서양남자의 정신적인 지주 역할을 하는 동양여자(주로 중국인)의 이미지를 매우 냉정하고 객관적이고 완벽에 가까운 그것으로 그려내는 게 유행인지 모르겠다. 이것도 일종의 오리엔탈리즘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