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사불명 야샤르
아지즈 네신 지음, 이난아 옮김 / 푸른숲 / 2006년 7월
평점 :
품절



이 책을 들고 일단 밖으로 나갔다. 잠깐 누굴 좀 만나고 머리가 부시시 해보여서 미용실에나 가야겠다 했다. 그리고 미용실에서 여타의 다른 잡지들을 권하기에 쓸만해 보이는 게 별로 눈에 안 띄어 (난 도대체 패션잡지는 머리에 잘 안 들어온다..쩝) 이 책을 보기 시작했다. 머리 하는 내내 눈을 못 떼고 정신없이 읽었다. 간간히 남들 시선 의식해서 입을 가리며 웃어대니까 헤어디자이너(요즘 미용사라고 하면 혼난다..) 언니가 그런다. "그렇게 재밌으세요? 굉장히 열심히 읽으시네요. 뭐에요?" 그런다. 자신있게 대답해주었다. "네! 이 책 꼭 읽어보세요!"

요즘 읽은 책 중에 가장 유쾌한 책이다. 아지즈 네신이라는 작가. 촌철살인의 글솜씨가 사람을 매혹시키고 터키라는 나라나 우리나라나 어쩌면 수없이 많은 나라들에서의 고장난 시스템을 통렬하게 묘사한 내용이 또한 읽는 이로 하여금 포복절도하게 만든다.

주인공 야샤르는 '살아 있으나 죽었다고 하는' 사람이다. 주민등록이 잘못 되어 주민등록증을 발급 못 받아 학교도 못 가고 일자리도 못 찾고 뭐 하나 제대로 풀리는 게 없는 인생이다. 그넘의 주민등록증 하나 받아서 사람 구실 해보겠다고 군대도 가고 국회의원 옮겨다 나르는 일도 하고 별의별 수모를 다 겪지만 결국은 감옥까지 가게 된다. 하지만, 그 갑갑하고 힘든 여정을 야샤르는 감옥 동료들에게 밤마다 너무나 재미있게 너무나 흥미진진하게 이야기를 풀어놓음으로써 인기를 끌게 된다. 야샤르라는 주인공이 우리에게 매력적으로 보이는 건, 아마 그런 이유일 거다. 힘든 일 어려운 일 당했지만, 그걸 해학으로 풀어내는 재주가 있어서라고.

"정부기관? 공공기관이라고? 그래, 그럼 공공기관이 하는 일이 뭐요? 학교에 입학하려고 했더니 '넌 죽었어' 라고 하고, 군대에 끌고 갈 때는 '넌 살아있어' 라고 하더니, 또 유산을 상속받으려고 할 때는 '넌 죽었어' 라고 하고, 세금을 거두어 갈 때는 다시 또 '넌 살아있어' 라고 하는, 도대체 씨도 안 먹히는 이야기들을 해대는 공공기관이라는 곳은 뭘 하는 곳이냐고!"

야샤르의 이 말에서 대부분이 공감을 느끼지 않았을까. 할아버지에게 없는 아이들이 버젓이 호적에 올라있어 이혼 지경까지 몰린다거나 일흔이 넘은 할머니에게 징집 기피자라는 누명을 씌워 이 기관 저 기관으로 옮겨 다니게 하는 일, 야샤르처럼 세금 낼 때는 절차가 간편하더니 유산 좀 받으려고 하니까 도대체가 너무 복잡해서 보통 사람은 지쳐 나가떨어질 정도인 것 등등 우리가 실제 이렇게 당하진 않아도 비슷한 억울함들이 안에서 솟구치는 게 느껴진다. 특히나 요즘처럼 부동산값이 하늘을 치닫고 있는 즈음엔 더더군다나 이런 말도 안되는 시스템이 남의 일처럼 느껴지지 않는 건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 소설은, 그저 그렇게 수다스러운 소설만으로 그치는 건 아닌 것 같다. 나를 웃게 하고 나를 즐겁게 하고 그래서 유쾌한 기분을 주지만, 다 읽고 나면 왠지 모를 씁쓸함이나 울컥함이 남는 그런 소설이다. 난 읽으면서 내내 노신의 '아큐정전'을 떠올렸다. 물론, 동일한 내용도 아니고 분위기도 많이 틀리지만, 시스템이나 시대 상황에 희생되는 개인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일맥상통하는 것 같아서 말이다.

무조건 읽어볼 것을 권한다. 들기만 하면 반나절도 안 되어 단숨에 읽을만큼 재미있는 책이며, 너무나 적절한 표현과 유머에 즐거워질만한 책일 뿐 아니라, 덮고 나면 바로 공허함이 밀려오는 그런 류의 그저 웃기기만 한 책이 아니라 머릿 속이 꽉 채워질만큼 어떤 느낌까지 안겨주는 책이라는 점에서 적극 추천이다. 아지즈 네신의 다른 글들을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아주 강렬하게 든다, 지금 내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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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6-11-14 09: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무조건 무조건입니다^^

놀자 2006-11-14 2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꼭 읽어볼게요~~~

비연 2006-11-14 2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만두님) 그렇죠? 그렇죠? ^^
놀자님) 꼬옥 읽어보세요...꼬옥! 근데...바뀌신 모습이...^^;;;

비로그인 2006-12-09 0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의 리뷰 역시 쾌활하니 좋네요. 책 자체가 워낙 웃음꽃 피울만한 필체를 자랑하니 ^^

비연 2006-12-09 1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콸츠님) 이 책은 생각만 해도 웃음이 슬며시 나요^^ ㅋㅋㅋ
 
동물원에 가기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이레 / 2006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여행 가기 전에 어떤 책을 가져갈까 매우 잠깐 망설였다. 하지만 기실은 마음 속에 정해져있었는데 시늉만 한 거라고 생각된다. 난 알랭 드 보통의 이 책, '동물원에 가기'를 계속 읽지 않고 이번 여행에서 읽어야지 내심 결심하고 있었던 거다. 얇고 작고 더군다나 내가 좋아해 마지않는 작가의 에센스 같은 책. 낙점.

그리고 내가 이 책을 손에 든 건, 오는 비행기를 기다리는 공항에서였다. 가서는 일찍 일어나 하루 종일 다니고 저녁에는 혼자 낭만에 취해보겠다고 수첩과 펜을 손에 딱 쥔 때 시내의 어느 바에 가서 죽치고 있었기에 책을 펼 여력은 없었다. 드디어 그 곳을 떠나는 날. 공항에 조금 일찍 가서 수속을 마친 후 게이트 앞의 의자에 자리를 잡고, 난 이 책을 펼쳐들었다.

알랭 드 보통이란 사람. 사람의 본질적인 마음을 꿰뚫어보는, 흔치않은 작가 중의 하나다. 그저 표피적으로 남에게 들은 것을 내 것인 양 포장하거나 느끼긴 느꼈으되 마음의 겉을 돌아다니는 감정 한 가락 잡아서 낭설을 퍼부어대는 작가들과는 달리(물론 모든 작가가 그렇다는 것은 아니라는 점은 말해두는 바이다) 이 사람은 하나를 보아도 아주 깊숙히, 아주 섬세하게 느끼고 쓴다. 그래서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누군가에게 나의 마음을 스캔당한 듯한 느낌에 약간의 당혹스러움을 가지게 하는, 그런 '놀라운' 사람이다.

움직이는 비행기나 배나 기차보다 내적인 대화를 쉽게 이끌어내는 장소를 찾기 힘들다. 우리 눈앞에 보이는 것과 우리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생각 사이에는 기묘하다고 말해도 좋을 것 같은 상관관계가 있다. 때떄로 큰 생각은 큰 광경을 요구하고, 새로운 생각은 새로운 장소를 요구한다. 다른 경우라면 멈칫거리기 일쑤인 내적인 사유도 흘러가는 풍경의 도움을 얻어 술술 풀려나가곤 한다. 정신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이 생각 뿐일 때는 제대로 그 일을 하지 못하는 것 같다. 마치 남의 요구에 따라 농담을 하거나 다른 사람의 말투를 흉내 내야 할 때처럼 몸이 굳어버린다. 그러나 정신의 일부가 다른 일을 하고 있을 때는 외려 생각이 쉬워진다. <슬픔이 주는 기쁨, pp18~19>

비행기 창 너머로 뭉게뭉게 빠져들 것 같은 구름을 쳐다보고 있으면 나는 나와 대화를 하게 된다. 혼자 여행을 하든, 누구와 함께이든, 그 순간은 세상에 나 혼자인 듯 싶다. 왜냐하면 바깥에 펼쳐진 세상이 너무 크고 믿기지 않아서 주변의 '작은' 인간들이 보이지 않고 대신 내 속의 '큰' 이야기들이 드러나게 되기 때문이다. 호퍼의 그림처럼, 일상 속에서 스쳐가는 것들과 운송 수단은 사람을 사색하게 한다.

..그러는 동안 내내 우리 머리를 떠나지 않는 생각이 있다. 우리 눈에 감추어져 있었다 뿐이지, 사실 우리 삶은 저렇게 작았다는 것.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우리가 살고는 있지만 실제로 볼 기회는 드문 세상이다. 그러나 매나 신에게는 우리가 늘 그렇게 보일 것이다. <공항에 가기, pp35~36>

그렇다. 창 밖에서 점점 멀어져가는 땅과 인간들이 세워둔 갖가지 장난감같은 모형들을 보면서 나는 가끔 신이 된 듯한 느낌을 가진다. 아니, 신의 눈을 느끼게 된다. 앙코르 와트의 3층에서 아래를 바라볼 때도 그러했다. 높은 곳에서 아래를 바라본다는 것. 그 속에서 느껴지는 것. 그것은 우리는 가끔 느끼지만, 위에 늘 상주하시는 신에겐 항상 보여지는 광경이고...참으로 우습기까지 한 인간사다.

많은 글쓰기가 그런 식이다. 맞춤법은 시간이 가면 정확해지지만, 우리의 의도를 제대로 반영하도록 단어들을 배열하는 데는 꽤 힘든 노력이 필요하다. 글로 쓴 이야기는 보통 사건의 거족만 훑고 간다. 석양을 본 뒤, 나중에 일기를 쓸 때는 뭔가 적당한 것을 더듬더듬 찾아보다가 그냥  '아름다웠다'고만 적는다. 그러나 우리는 사실 그 이상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 이상은 글로 고정해놓을 수가 없어 곧 잊고 만다. 우리는 오늘 일어났던 일들을 붙들어두고 싶어 한다. 그래서 어디에 갔고 무엇을 보았는지 목록을 작성한다. 그러나 다 적고 펜을 내려놓을 때면 우리가 묘사하지 못한 것, 덧없이 사라지고 만 것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리고 그 사라져버린 것이 하루의 진실의 열쇠를 쥐고 있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글쓰기(와 송어), pp123~124>

여행하는 내내 부끄러웠다. 내 펜끝에서 나오는 단어들의 미천함. '좋았다'. '굉장했다'. '멋지다'....초등학교 1학년 수준의 단어들로 내 느낌을 표현할 수밖에 없는 나의 능력을 비난했다. 그리고 마치 뭔가가 있는 듯 말도 안되는 얘기들을 주절주절 읊어놓음으로써 나의 부끄러움을 감추려고 했다. 그런데, 보통은 알고 있었다. 글쓰는 것을 충실하게 하지 못하는 이의 비애를, 그리고 그 행태를. 들켜버렸다.

이 책은 알랭 드 보통이 평소에 자신을 잘 보여줄 수 있는 대목들만 추려서 완결지은 에세이집이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이전에 읽은 알랭 드 보통의 책들과 가끔 겹치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을 지루함으로 느낀다면 보통을 과소평가하는 것이다. 보통이 정말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 무언가를 이 책 한권으로 느낄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매력적인 책이다. 읽는 내내, 동시대를 살아가는 보통이라는 사람이 우리가 보는 시선을 너무나 말끔히 정리해서 알려준다는 것에 찬탄하였고 아울러 뿌듯했다. 어려운 말들로 그의 글들을 설명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의 글은, 이전과는 다른 인류인 현대인들의 마음을 누구보다 솔직하게 누구보다 충실하게 말해주는 보기드문 작가라는 말 외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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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6-11-25 09: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당선 축하해요.

비연 2006-11-25 1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프님) 감사해요..님도 축하드리구요!^^

상복의랑데뷰 2006-11-25 16: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립니다. ^^

비연 2006-11-26 1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상복의 랑데뷰님) 감사해요...^^
 
나이 들수록 왜 시간은 빨리 흐르는가
다우어 드라이스마 지음, 김승욱 옮김 / 에코리브르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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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이래서 안된다. 준비해야 한다고 머릿 속에서 끊임없이 압박을 가해오는 생각들을 꽈악 누르고 보던 책은 다 보아야 한다는 괴상한 신념으로 이 책을 결국 오늘에야 다 읽고 말았다(지금 마음 속으로는 불안감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다..쩝). 제목이 매우 흥미로와 계속 눈여겨 보고 있었는데, 누군가가 추천하는 글을 읽고(아마 진중권씨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대뜸 사서 읽기 시작했던 책이다. 어쩌면 제목과는 틀리게 잡설에 불과할 지도 모른다는 약간의 우려가 없지 않았으나 읽으면서 그런 우려는 금새 불식되었다.

내가 좋아하는 류의 책 중에 한 부류는 이런 책이다. 저자가 혹은 독자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하나의 화두에 대해 이런 얘기 저런 얘기 약간 깊이있게 늘어놓는 책. 물론 여기서 그치면 안되고 저자의 탁월한 정신력으로 세상에 많이도 얘기되고 있는 이론들을 흐름있게 정리하는 건 기본이다. 이 책은 왜 나이가 들수록 시간은 빨리 흐르는 것처럼 느껴지는가, 기억하는 것과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왜 있는가, 태어나서 얼마동안의 기억들은 왜 간 곳없이 사라지는 걸까 등등의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여 기억에 대해서 회상에 대해서 망각에 대해서 여러가지 이야기들을 적고 있다.

나도 늘 궁금했다. 내 어린시절부터 지금까지의 인생에서 왜 기억이 또렷하게 나는 것이 있는 반면, 전혀 기억에 남지 않는 것들이 있다는 게 신기했고 낯선 곳에 가서 언젠가 한번쯤 왔었던 야릇한 느낌에 잠시 주춤했었던 경험도 있었고 갈수록 퇴화되어 가는 기억력(정말 슬픈 일이다)을 탓하면서도 뭔가 있다는 것은 알고 있는 나 자신이 이상하게 느껴지기도 했었다. 이 책이 그 의문들에 대해서 정확한 답을 제시하지는 않는다(사실, 답이 무엇인지 알 수가 있겠는가). 

뇌의 기능이 100% 밝혀지지 않은 만큼 기억이라는 것에 대한 의문은 불가사의한 것이 아닐 수 없다. 내가 보고 듣고 느끼고 경험하는 숱한 이미지와 소리들이 나의 뇌에 어떠한 생물학적 반응을 부여하여 기억이라고 불리는 형태로 남게 되는가는 머리를 열어본다고 해도 알아낼 도리가 없다. 따라서 저자인 다우베 드라이스마와 같은 심리학자들은 갖가지 상황 속에서의 사람들의 반응을 관찰하기도 하고 좀 특이한(말하자면 죽다 살아났다던가, 치매환자라던가, 사방 증후군을 가진 사람이라던가 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사례연구를 수행함으로써 이론을 일반화한다. 이 책에도 매우 흥미로운 얘기들이 많이 등장하는데, 어떤 이론이든 명확하게 그거구나 하는 건 없고 기억의 이런 측면 저런 측면들을 설명하고 있을 따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좋은 이유는, 내가 끊임없이 수행하고 있는 '기억'이라는 행태에 대해 이해를 도와줌과 동시에 아주 그럴 듯한 비유로 기억을 그냥 기억으로만 남기는 것이 아니라 삶에 대해 생각하게끔 한다는 데에 있는 것 같다. 책장을 덮을 때는 막연한 의문감이 머릿속에 남아 있어 찝찝함을 지울 길은 없으나, 아주 재미있고 유익한 책을 읽었다는 안도감과 더 많은 것들을 기억하기 위해 열심히 경험하며 살아야겠다는(긍정적인 경험) 결심이 유발되는 즐거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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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달리는가 - 동물들이 가르쳐준 달리기와 진화에 관한 이야기
베른트 하인리히 지음, 정병선 옮김 / 이끼북스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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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처음 이 책을 받았을 때의 느낌은 놀랍다였다. 사실 리뷰 쓰겠다고 신청은 했지만 내용이 뭔지를 자세히 가늠하긴 어려웠고 다만 제목에 혹해서 신청했다고 보면 된다. 우리는 왜 달리는가. 문학적이지 않은가. 그런데 막상 받아놓고 보니 예상이 많이 빗나가는 바람에 적이 당황스러웠다. 저자는 생물학 교수이고 자신의 달리기 기량을 높이기 위해서 연구 대상인 동물들에게서 생물학적인 관찰을 통해 지식을 얻고자 했다. 따라서 내용의 절반 이상이 낙타, 영양, 개구리 등등의 동물들이 진화학적으로 어떻게 달리는가에 대한 약간의 전문 용어를 포함한 설명들이었다. 하지만, 지루할 수도 있는 이 내용들이 놀라움으로 다가오게 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저자는 타고난 글솜씨로 자신의 오래 전 경험들을 아주 상세하게 그 느낌까지 마음에 와닿게 기술하면서도 사람과 생명에 대한 경외감을 놓치지 않는 유연성을 보여주고 있고 그 모든 것이 내게는 감동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저자인 베른트 하인리히는 생물학자인 동시에 많은 책을 저술한 사람이면서 또한 100km울트라마라톤 선수이기도 하다. 100km라니! 이러한 달리기는 기존의 마라톤과는 달리 더큰 지구력이 있어야 했고 그래서 별다른 지식이 없었던 저자는 다른 동물들이 왜, 어떻게 뛰는 지를 살펴보고 자신에게 하나씩 접목함으로써 방법을 찾아나가기로 결심한다. 이 책은 결심에서부터 시작하여 자신의 어린시절, 대학시절을 통해 달리기에 관심을 갖게 된 과정들, 연구하는 동물들의 특징들을 하나씩 둘씩 이야기하고 마지막에 울트라마라톤에 참가하여 기록을 내는 최종 순간까지를 담담하게 그려나가고 있다.

"아프리카의 여느 아침이다. 영양이 잠에서 깨어난다. 영양은 자기가 가장 빠른 사자보다 더 빨리 달려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렇지 않으면 죽기 때문이다. 아프리카의 여느 아침이다. 사자가 잠에서 꺠어난다. 사자는 자기가 가장 빠른 영양보다 더 빨리 달려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렇지 않으면 굶어죽기 때문이다. 당신이 사자든 영양이든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아무튼 해가 떠오르면 당신은 이미 달리고 있을 것이다." (pp 22)

저자에게 있어서 달리기는 인간에게나 동물에게나 존재의 근원이다. 달리기 위해서 달리는 것이 아니라 그냥 살아있기 때문에 달리는 것이다. 어린 시절, 숲에 살 때부터 그는 달렸고 고등학교, 대학교 시절 크로스컨트리 선수를 하면서 그 달리기는 이어졌다. 달리기는 신체의 일부를 사용하는 여타의 다른 운동들보다 훨씬 정직한 행위이며 여기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는 다름아닌 마음이고 그것은 용기에서 비롯된다고 말한다.

예컨대 마술로는 어디에도 갈 수 없지만 한 번에 한 걸음씩 일련의 정확한 연속 과정으로 발걸음을 움직이면 목표한 곳에 다다를 수 있다. 첫번째 세 걸음을 내딛지 않는다면 1,600미터를 완주할 수 없다. 때가 묻지 않은 신성한 이 행위에는 진실과 아름다움, 조화가 자리잡고 있다. 모든 걸음이 중요하다. 각각의 발걸음은 아름다운 행동이다. 이 걸음(step)들이 모여 보폭(stride)을 만들고, 전체로서 속도(pace)가 된다. (pp 96)

학업과 달리기를 병행하면서 저자는 동물들에게서 놀라운 사실들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혈관이나 간, 뼈, 허파 같은 기관이 없는 곤충이 어떻게 운동을 하고 온도를 유지하는 지, 새들은 어떻게 쉬지않고 수천 킬로미터를 비행하여 이동할 수 있는 것인 지, 가지뿔영양은 어떻게 최고의 달리기 능력을 보유할 수 있는 것인 지, 낙타의 가공할 지구력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인 지 등에 대해서 하나하나 의문을 가지고 해결점을 찾아가면서 진화라는 것에 대해 관점을 가지게 되고 특히 신체구조는 틀리지만 인간과 공유하는 공통점들을 찾게 된다. 읽어보면 이런 점이 있구나 라고 무릎을 탁 치게 만드는 이론들이 종종 나온다.

100km 울트라마라톤을 준비하고 경기에 참여하여 1등으로 골인하기까지의 과정에서 저자가 가졌던 느낌들은, 책에서도 말했지만 인생과 비슷함을 느낀다. 경주는 내 인생의 은유이다. 우리의 삶은 우리가 진화해온 과거, 경험, 그리고 마음의 영향을 받는다...나도 경주에 대비해 내가 하고 있던 일이 올바른 것인지를 알지 못했다. 이상적인 배우자, 학문, 또는 훈련 섭생법을 선택할 때처럼 우리는 위험을 산정한다. (pp 318) 무엇이든 몰두하는 사람에게는 그것 이외의 우주가 보이는 법이다. 저자는 달리기를 하면서 인생을 보았고 그것을 넘어선 인류의 진화와 그 노상에 있는 우리를 바라보게 된 것이다.

장거리 달리기라는 주제로 이렇게 훌륭한 책을 쓰기란 쉽지 않다. 그것은 저자가 생물학자이기 때문에 그저 달리는 것에만 그치지 않고 동물과 인간과의 관계, 진화의 문제 등을 깊이있게 사색한 결과물이기에 그럴 수있었을 게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이 책을 덮으면서 감동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하는 것은, 생물학적인 모체로서의 인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를 통해 가치와 꿈을 말하는 저자의 생각에 있다. 아마도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은, 진화의 끝자락에서 달리기에 그다지 적합하게 구성되어지지 않은 신체를 가지고(동물들에 비해서 말이다) 그래도 끊임없이 달리게 하는 원동력으로서의 마음과 꿈이 살아있다는 데에 있을 것이다.

나는 우리에게 공통으로 내재해 있는 사냥꾼의 마음이 실용성을 넘어서는 가치를 공유하는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꿈이다. 우리를 인간으로 만들어주는 커다란 부분이다. 현대의 주자들을 따뜻한 아프리카의 깊은 밤에 화톳볼 주위에 모아놓는다면 그들도 여느 부시맨들처럼 타다 남은 재를 들쑤시면서 결승선에 도달하기까지의 그 모든 과정과 그 이상까지도 반추할 것이다. 내가 이 책에서 쓰고자 했던 내용이 바로 그것이다. (pp 322)

저자의 이 마지막 말을 읽으면서 내가 인간으로서 가질 수 있는 많은 꿈들을 생각해보았다면 비약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달리는 행위 하나에서도 우리는 나름의 마음을 싣게 되고 그 마음들은 결국 나름의 꿈이라는 것에 잇닿아 있음을 알게 되니 내가 하는 모든 행위들에게서 그것을 찾는 것을 어쩌면 당연한 것일런지도 모른다. 이 책이 비단 달리기에 관심있는 사람들에게만 추천할 수 있는 책으로 그치지는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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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6-04-16 18: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성실함이 묻어난 리뷰... 추천하고 가요...;;;;

비연 2006-04-16 2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숍님) 감솨해요^^ 읽은 느낌만큼 잘 써진 것 같진 않은데...우히히~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송병선 옮김 / 민음사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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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뜻 보면 참 엽기적인 소설이 아닐 수 없다. 아흔살의 노인이 생일을 맞이하여 풋풋한 처녀와의 하룻밤을 자신에게 선물하겠다는 마음을 먹으면서 시작되다니. 게다가 소개받은 처자는 열네 살 밖엔 안된 미성년자임에도 불구하고 주인공 '나'는 그 소녀와 단둘이 밤을 지내기를 결정하다니. 마치 '선데이 서울' 같은 삼류 잡지에나 나올 법한 가십 기사 종류이며 보면서도 혀를 끌끌 차게 될 황당무계한 설정이 아닌가 말이다. 하지만, 위대한 작가란 이러한 일상적이고 저열한 소재 속에서도 인생에 대한 빛나는 성찰과 회고를 담아내게 마련이다. 그리고 이 작품이 그런 류로, 위대하다는 말을 붙이기에 전혀 아깝지 않은 작품이다.

늙어간다는 것. 수많은 세월들을 뒤로 한 채 노쇠해진 몸과 마음을 지니며 살아간다는 것. 무엇보다 나를 그렇게 바라보는 타인의 시선이 나를 어느 새 규정한다는 것. 이 모든 것이 인생의 황혼녘에 누구나 감내해야 하는 쓰디쓴 경험인 지도 모르겠다. 아흔살. 거의 한 세기를 살아온 주인공 '나'는 기자이자 칼럼니스트이다. 그는 사창가에서 노니느라 결혼의 시기를 놓쳤고 돈을 주지 않고는 여자와 관계를 한 적도 없는 사람이다. 따라서 진정한 사랑에 대해 생각할 틈도, 진지한 인생이나 다른 사람에게 헌신하는 생활도 느껴보지 못했을 것이라 보여진다. 그에겐, 거래만이 있을 뿐 감정의 소통이나 시간의 더께 아래 묻혀진 속깊은 마음의 교감도 없었을 것이다. 과거는 그에게 회한을 안기고 늘 그런 상태일 듯했던 많은 것들이 사라지거나 혹은 잊혀졌다. 신문사 사장실에 걸려진 사진 속의 인물들 머리위에 수없이 새겨진 십자가들만이 남아있을 뿐.

그런 '나'가 그 어린 소녀를 만나면서 달라지게 된다. 약에 취해 쓰러져 자고 있는 벌거벗은 소녀를 보며 "욕망에 쫓기거나 부끄러움에 방해받지 않고 잠든 여자의 몸을 응시하는 것이 그 무엇과도 비할 바 없는 쾌락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스스로 델가디나라 마음대로 이름 붙이고는 소녀를 위해 하나씩 주변을 채워주고 마음을 위로해준다. 생전 처음으로 그는 강렬함과 행복감을 느끼며 소녀에 대한 사랑을 키워나간다.

사랑은 또한 그가 자신을 올바로 바라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준다. "그녀 덕택에 나는 구십 평생 처음으로 나의 타고난 성격을 알게 되었다. (...) 매일 규칙적으로 생활하는 것도 미덕이 아니라 게으름에 대한 반작용이었다. 야박한 심성을 숨기기 위해 인자한 척하고, 그릇된 판단을 숨기기 위해 신중한 척하고, 쌓인 분노가 폭발할까 봐 화해을 청하며, 타인의 시간에는 무관심하다는 걸 들키지 않으려고 시간을 엄수한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  낭만주의 문학에 빠져뜰고 음악 취향도 바뀌고 무엇보다 묵은 과거 세상을 넘나들던 칼럼은 사랑의 달콤한 연서로 바뀌게 된다.  이 모든 것이 바로, 사랑의 힘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것은 현실이었다.

나이가 조금만 들어도 사람들이 가장 먼저 포기하는 게 있다면 바로 '불타오르는 사랑'이라는 감정이 아닐까. 경험이 많다는 혹은 많이 들어서 안다는 교만을 무기로 내 마음에 무언가 다른 변화가 생기는 것에 지레 겁을 먹고 움츠려들어서는 방어벽을 겹겹이 싼 채 살아가는, 나를 비롯한 많은 이들을 떠올려본다.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그것에 정면으로 도전하며 아흔살이 되어도 새롭게 무언가를 찾을 수 있는 인간상을 제시한다. 열정과 도취와 사랑의 낭만은 언제나 가능한 것이며 나이에 상관없이 사람을 변화하게 한다고 그는 말하고 싶었는 지도 모른다. 감정 저변에 깔린 내 자신에게 충실하고 싶은 마음을 드러내라고 얘기하는 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과정을 결론을, 전혀 무리없이 천박하지 않게 그려내고 있다. 감히 대단한 작가라고 말해본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잊고 사는 무언가가 있는 듯한 허전함에 시달릴 때 이 책을 펼쳐들면 위안이 될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비단 '사랑'이 아니라도, 마음에 불타 오르기를 기다리고 있는 작은 불씨마저 사그러뜨리는 일 없이, 그렇게 언제라도 나를 생생하게 변화시킬 수 있는 대상 혹은 존재를 만날 수 있도록 나를 숨기거나 포기하는 일이 없어야 겠다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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