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교육
로맹 가리 지음, 한선예 옮김 / 책세상 / 2003년 4월
구판절판


"사람들은 서로 멋진 이야기들을 들려주고, 이어 그 이야기들을 위해 목숨을 내놓지. 그들은 그로써 신화가 현실이 될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자유, 존엄성, 형제애, 인간으로서의 명예. 우리 또한 이 숲에서 동화를 위해 목숨을 내놓고 있는 거야."-76쪽

전쟁을 겪은 후, 모든 것이 끝난 후 그 책을 펼 때 사람들이 아직 다치지 않고 남아 있는 자신들의 선의를 다시 발견하게 되기를 바라지. 저들이 우리를 짐승처럼 살게 했지만 우리를 절망하게 만들 수는 없었다는 것을 사람들이 알게 되기를 원해. 절망한 예술이란 없어. 절망스러운 것, 그건 오직 재능이 부족하다는 것뿐이지.-79쪽

"사소한 친절이 훌륭한 친구들을 만들어주는 법이지."-95쪽

'이번이 마지막이야.' 그러나 그녀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고통을 겪는 데 '마지막'은 없었다. 그리고 희망은, 새로운 고통을 견뎌내도록 인간을 격려하기 위한 신의 술책에 지나지 않았다.-194쪽

내가 원하는 것은 오직 사랑하고 먹고 따뜻하게 지내는 것뿐인데, 평화롭게 사랑하는 것, 굶어 죽지 않는 것, 얼어 죽지 않는 것이 왜 그토록 어려운 것일까? 지구는 둥글며 자전한다든가, 맞춤법이 어떻게 된다든가 하는 것 등 제 나이 또래의 여자 아이들이 학교에서 배우는 내용들을 다 깨우치는 것보다 그 문제에 대한 답을 알아내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그녀는 생각했다.-194쪽

그때 문득 야네크에게는 인간 세상이 어떤 거대한 자루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이 먼 채 꿈만 꾸는 감자들이, 자루 속에서 무정형의 덩어리를 이루며 발버둥치고 있었다. 그것이 바로 인간성이라는 것이었다.-269쪽

"너는 이제 나를 사랑하지 않는구나."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어? 어째서?"
"왜냐하면 너는 불행하니까. 네가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을 때는 그 무엇도 너를 불행하게 하지 못해. 알겠지, 나도 대단한 걸 배웠어."-274쪽

우스꽝스러운 잔가지 하나, 지푸라기 하나를 늘 더 멀리 끌고 가는 것밖에는 생각할 줄 모르는 세상. 이마에 땀을 흘리고 피눈물을 쏟으면서도 늘 더 멀리 숨을 돌리거나 왜냐고 질문하기 위해 한 번도 멈추는 법 없이-29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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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교육
로맹 가리 지음, 한선예 옮김 / 책세상 / 200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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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책날개의 로맹 가리의 사진이 참 인상적이다. 고집스럽게 꽉다문 입과 콧수염. 짙은 눈썹. 화룡점정! 그의 얼굴에 중절모가 어울려 특유의 카리스마를 더한다. 소설의 제목에서도 그의 카리스마와 재치가 풍긴다. '유럽의 교육'이라니! 그 전쟁통의 비참함에 대한 역설적인 제목은 초반부터 독자를 휘어잡는 무언가가 분명히 존재한다. 

  소설이 말하고자 하는 '유럽의 교육'은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아담 도브란스키의 것으로, 전쟁의 광기와 학살, 그 비참함 속에서도 결코 중요한 것은 사라지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는 절대적으로 사라지지 않는 '희망'이라는 것의 존재를 이 참극이 궁극적으로 드러내줄것임을 믿는다. 그에게 이 전쟁은 시련이며 교육과정이다. 그리고 이 광풍이 지나가면 희망과 평화가 도도하게 드러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또하나는 야네크의 것이다. 그는 인간의 역사에 있어서 전쟁과 증오는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 전쟁은 세계에 대해 순수와 희망을 품은 자들을 현실의 비참함과 회의에 대한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교육'으로 이해한다.  소설은 비참하고 우스꽝스러운 전쟁 속의 폴란드를 비추면서도 이 두사람의 시각을 교차하며 보여준다.

  사실, 이념과 사상은 인간에게 더 큰 이익과 행복을 주기 위해 발명(?)되었지만 그것들은 어떻게 이용되었는가. 인민의 무한 평등과 이익의 공평한 분배를 부르짖었던 공산주의는 이념에 반대하는 자들에 대한 학살을 자행했고, 최소 자본의 최대의 이익을 추구하는 자본주의는 빈자의 비참한 삶을 방관했다. 무슨 주의며 무슨 사상은 인간의 삶의 행복을 보장하는 수단이 되지 못하고 그 목적이 되어 무수한 광기와 허무를 방관해왔다. 오히려, 그 광기의 변명이 되고 그럴듯한 명분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야네크는 말한다.
 

…세계 구석구석에서 사람들이 유럽을 찾아와요. 공부하기 위해서요. 하지만 그 유명한 유럽의 교육이 가르치는 것은 결국, 자기한테 아무 짓도 하지 않은 사람을 죽이는 데 소용이 될 만한 그럴싸한 이유들과 용기를 찾아내는 법일 뿐이에요.… (본문 281쪽)


  사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거대하고 거창한 것이 아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오직 사랑하고 먹고 따뜻하게 지내는 것뿐인데, 평화롭게 사랑하는 것, 굶어 죽지 않는 것, 얼어 죽지 않는 것이 왜 그토록 어려운 것일까? 지구는 둥글며 자전한다든가, 맞춤법이 어떻게 된다든가 하는 것 등 제 나이 또래의 여자 아이들이 학교에서 배우는 내용들을 다 깨우치는 것보다 그 문제에 대한 답을 알아내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본문 194쪽)


  이 단순한 삶을 얻기가 왜 이렇게 힘이 드는가. 얼마나 더 파괴해야 그것을 얻을 수 있는가. 얼마나 더 '교육' 받아야 '중요한 것'만 고스란히 드러날 수 있는가. 소설 속에서 작가 스스로 이렇게 자문하고 있고, 나 또한 그렇게 묻게 된다. 작가는 이 질문에서 어떤 명확한 답을 주지는 않은 것 같다. 도브란스키의 희망과 야네크의 회의 속에서 야네크의 손을 들어주는 듯 싶지만 결코 도브란스키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도브란스키가 말하는 희망이 비참한 상황 속에서도 삶을 이끌어왔음을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회의의 끝은 죽음뿐이다. 결국 우리는 끝없는 회의와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가지고 무의미하게 보이는 걸음을 내딛을 수밖에 없는걸까.

  끝으로, 소설을 읽으면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야네크가 도브란스키를 달래는 장면이었다. 순수한 청년을 닳고 닳은 꼬마가 달래는 풍경. 무언가 잘못되도 대단히 잘못된 우스꽝스러운 장면이지만 웃을 수 없는 비극. 그 장면하나가 소설의 모든 것을 담고 있었다. 

야네크는 이제 불과 열다섯 살이고, 도브란스키보다 열 살이나 어렸다. 하지만 그 대학생을 향한 거의 아버지와도 같은 보호본능이 갑자기 뜨겁게 솟구쳤다. 그는 빈정거리는 것처럼 보이지 않으려고 조심했다. 우월하고 세상사에 통달한 듯이 보이지 않으려고 조심했다. 그는 웃지 않으려고 애썼다. 어깨를 으쓱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얼마나 많은 꾀꼬리가 필요한 거냐고 신랄하게 묻지 않으려고 애썼다. (본문 282쪽)

  이런 말을 덧붙이면 사족이 되겠지만 번역에 대한 아쉬움을 말하고 싶다. 책을 읽으면서 이해하기 어려웠던 것을 모두 번역의 책임으로 돌린다면 그것은 나의 억지일 것이다. 하지만 도브란스키의 소설 부분이나 몇몇 부분에서 느끼는 어려움은 나의 수준미달이 전적인 이유인것 같지는 않다. 외국인의 말을 들을 때 단어와 문장이 한데 섞여 '후루룩' 들려오는 느낌이랄까. 번역이 나에게는 부드럽지 않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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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어떤 영화 보셨어요?
무지개 여신 (2disc)
쿠마자와 나오토 감독, 아오이 유우 외 출연 / 엔터원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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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무나 보고 싶었던 영화였다. <러브레터>의 이와이 슌지 감독이 제작에 참여하고, 우에노 쥬리나 아오이 유우가 나왔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볼만한 이유가 됐다.군대에 있을 때 개봉했었는데 휴가 나가서 찾아보니 이미 막이 내렸더랬다. 결국은 이렇게 봤으니 그동안의 갈증은 풀어진 셈이다. 

  보고 나니 가슴이 후련해야 할텐데 오히려 묵직하다. 이와이 슌지 감독의 전작들처럼 영상은 수수하고 아름답다. 이야기도 순정만화 비슷하기도 하고 신파조가 흐르지만 헤어나올 수 없이 빠져든다. 안타까움과 아쉬움이 극대화되도록 이야기를 뒤틀어도 결말에서는 행복하게 끝을 내는 것이 보통 드라마의 공식일텐데, 이 영화는 초장부터 주인공을 죽이고 시작하니 끝까지 남는 것은 아쉬움과 안타까움이다.

  설레임과 망설임의 벽을 넘어서지 못하는 사랑은 연애로 이어지지 못한다. 극중 토모야의 사랑은 언제나 스토커적이고, 다른 사람의 사랑에 끌려 다닐만큼 수동적이다. 사랑앞에서 늘 설레이지만 망설임의 벽은 넘지 못한다. 아오이도 마찬가지. 자신의 취미활동인 영화 속에서만 꿈을 이룰 뿐이다. 자기의 꿈을 찾아 일까지 내던지고 떠날만큼 결단력있는 그녀도 연애에서 만큼은 우유부단한 셈이다.

 대학 졸업을 앞둔 청년들의 취직과 꿈에 대한 이야기. 10년 후쯤 되면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하는 고민들. 망설임. 설레임. 그 감정과 이야기들이 왜 모두 스쳐지나가지 않는 여운으로 남는 건지. 어딘가 나와 맞닿아있다고 느끼고 있기 때문일까. 

  사람은 언제나 확신을 갖고 싶어한다. 설레임 속에서도 망설이고 주저하는 이유는 확신이 없어서이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할 뿐, 이것이 꿈은 아니라고 생각하며 취업을 준비하는 아오이. 아오이를 좋아하는 듯 느끼면서도 쉽사리 고백하지 못하는 토모야. 모두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확신이 없을 때는 누군가의 진실한 조언 한마디가 도움이 되기도 한다. 아오이가 자신의 꿈을 살려 취직할 수 있도록 한 것은 토모야의 조언 덕분이고, 아오이가 해외로 떠나기로 결심한 것은 히구치의 도움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확신을 갖지 못하고 흔들리고 누군가가 잡아주기를 바란다. 그 한 사람의 존재는 정말, 정말 중요하다. 

  하지만 결국에는 망설이고 주저하던 토모야를 보면서 이런 생각도 든다. 확신이 없어도 일단 부딪혀보는 건 어땠을까. (역시 남의 일은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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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어떤 영화 보셨어요?
호텔 르완다
테리 조지 감독, 닉 놀테 외 출연 / 아인스엠앤엠(구 태원)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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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이후로, 인종학살은 끝이 났다.'는 영화의 마지막 자막을 보면서 '정말 그것으로 모든 비극은 끝이 났을까?' 다시 묻게 됐다. 영화는 분명히 해피엔딩으로 끝났지만, 만화영화를 볼 때처럼 '그리고 왕자와 공주는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라는 자막에서 느꼈던 안도와 기쁨의 감정은 생기지 않았다. 오히려 영화의 한 장면이 복선처럼 떠올랐다. 그 장면은 후투족 대통령과 투치족 반군사이의 평화협정이 체결되면서 UN평화유지군 사령관이 이제 평화의 시작이라며 축배를 제의하는 장면이다. 하지만 그 장면에 이어서 후투족 대통령이 암살되고 끔찍한 학살이 벌어진다. 마치 복선과 같은 이 장면은, 해피엔딩처럼 보이는 결말도 폭풍이 몰아치기 전 잠시동안 찾아오는 고요가 아닐까하는 의심을 벗어버릴 수 없게 했다.   

  슬픈 대륙 아프리카. 이 이야기는 르완다 내전에 관한 영화지만 르완다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유럽의 제국주의 국가들이 제멋대로 정해버린 구획 안에서 지금도 수많은 민족 분쟁이 일어나고 있다. 후투족의 지도자가 전범재판소에 불려 나가고 투치반군이 정권을 장악하는 것으로 권선징악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문제는 그것이 아니지 않을까? 

  벨기에가 르완다를 점령하기 이전까지 후투족과 투치족은 특별한 갈등 없이 어울려 지내왔다. 영화에서도 두 부족은 겉모습으로 구별할 수 없을만큼 비슷하다고 토로한다. 하지만 벨기에 사람들은 코와 키와 같은 잣대를 만들어 후투족과 투치족을 억지로 구분하고 소수부족인 투치족을 지배계급으로 만들어서 두 부족간의 갈등을 조장하고 그것을 식민통치에 이용했다. 후투족의 상대적 박탈감은 벨기에가 식민통치를 끝내고 돌아가버리자 폭발하여 투치족과 후투족간의 내전으로 치닫게 된다.

  결국 문제는 부족간의 갈등을 조장한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의 부도덕한 통치기술, 후투족 반군 정치 지도자들의 광기와 선동, 세계의 무관심과 방조이다. '세계는 하나'라고 외치며 '세계화'와 '지구촌'을 부르짖으면서도 왜 세계의 한켠에서 일어나는 일들에는 이렇게 무관심한지. 서구 국가들 뿐만 아니라 많은 나라들의 무관심함이 너무 화가났다. 그들이 주장하는 '세계화'는 결국 물건을 팔아먹을 때만 소용되는 것인가.

  돈 치들이 연기한 주인공 폴 루세사마키나는 솔직히 말해 영웅은 아니다. 그는 친한 이웃이 투치족이라는 이유만으로 끌려가는대도 '중요한 건 우리 가족'이라는 이유로 방관하기도 하고 고위층에 선을 대기 위해 뇌물을 바치는 소시민일 뿐이다. 하지만 인간으로서 차마 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자 뜻하지 않게 영웅이 되고 만다. 후투족이나 투치족이기 이전에 우리는 모두 인간이기에. 

  내가 이렇게 무심히 보내고 있는 시간에 지구 반대편에서는 얼마나 많은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생각하게 했다. 총과 폭탄이 날아다니고 피가 튀는 장면은 없었지만 집단적 광기에 젖은 후투족 민병대가 칼로 아스팔트 바닥을 긁는 장면이나 얼굴 한 번 나오지 않는 후투족 지도자의 라디오 방송만으로도 충분히 끔찍하고 두려웠다. 보여주지 않고도 공포를 이끌어낸 감독의 기교가 대단했다. 투치족의 시체더미를 보고 두려움에 넥타이조차 제대로 매지 못하여 오열하는 주인공을 연기한 돈 치들의 연기도 돋보였다. 

  이 영화는 정말 잘 만들어진 좋은 영화이다. 그리고 우리 모두 꼭 한 번은 봐야될 영화라는 생각도 든다. 분명히 누군가가 조장했을 경상도 사람들과 전라도 사람들의 갈등을 볼 때, 그리고 비무장지대에 흐르는 남한과 북한의 갈등과 긴장을 볼 때, 르완다는 어쩌면 우리 곁에 가까이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섬뜩해진다. 부디 누구의 선동과 광기에도 흔들리지 않는 우리들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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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무슨 책 읽고 계세요?
오늘 눈부신 하루를 위하여 - 구본형의 하루 경영 9가지 법칙, 개정판
구본형 지음 / 휴머니스트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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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책이 좋은 책이냐 아니냐를 따지는 기준은 거창한 것이 아니다. 인류 보편의 본질적인 고민과 심오한 진리에 대해 쓴 책도 좋은 책이지만, 결국에는 독자에게 얼마나 공감을 이끌어내는가가 중요한 기준이 된다. '나도 그래', '어머머, 너도 그러니?'라는 공감과 호응을 얻어내는 사람이 능력있는 화자이고 능력있는 작가이며, 그런 책이 좋은 책이다. 책의 안쪽 날개에서 저자의 이력을 보고 나는 저자와 나를 동일시하기 시작했다. 나와 같은 학교에서 같은 과목을 전공했기 때문이다. 이런 말이 안되는 이유로 생긴 동질감이 책을 읽으면서 더욱 끈끈해졌다. 어쩜 그렇게 나와 똑같은 고민을 하고 있을까하고 깜짝 놀랐다. 마치 나에 대한 몇 가지 사실을 맞춘 점괘에 감탄하며 '그래서 어떻게 해야 되나요?'라고 목을 쭉빼며 점쟁이를 채근하듯 나는 '그래서, 그 때 당신은 어떻게 했수?'라고 저자를 재촉하면서 책을 읽었다. 정말 매혹적이고 밖에 설명할 수 없는 시간들이었다.

  그동안 정말 피곤했다. 이 피곤은 성공을 위한 조건과 법칙을 떠들어대는 사람들 때문이었다. 그들은 나에게 일찍 일어나고, 시간을 쪼개어서 관리하고, 이건하고 저것은 하지 마라고 규제했다. 그럴듯한 이야기에 나를 내맡기면서도 그들의 스케쥴에 따라가지 못하고 쉽게 포기하는 내가 한심해졌다. 그렇게 '나는 성공할 수 없는 사람인가봐'라고 나를 비난하면서 더 깊은 좌절 속으로 빠져들었던 시간들! 힐러리가 말했다던가? '성공하는 법칙이라는 것은 없다. 그런 것이 있었다면 여기까지 오기가 훨씬 쉬웠을것'이라고. 이 책은 그런 법칙의 파괴다. 

  하루를 작은 조각들로 나누고 우선 순위를 배분하는 시간관리의 법칙에 대해 저자는,

 시간 관리는 '만일 내가 시간을 통제한다면, 나는 시간을 더 벌 수 있다'는 가정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그렇게 시간을 번 사람이 더 시간이 없다. 하루를 작은 조각들로 나누고 분배하는 사람은 적어도 그 일을 하느라 더 바쁘다. 그 사람은 하나의 약속에서 다른 약속들로 이동할 뿐이다. 여전히 그는 시간에 쫓긴다. 시간의 부족은 유감스럽게도 오히려 성공적인 시간 관리의 결과다. (82쪽 1-7줄)
 
  이라고 비판한다. 그리고 오히려 시간의 주인이 되기 위해서는 시간의 존재를 잊고 하는 일에 몰입해보라고 말한다. 그리고, 자기를 변화시키라는 성공을 위한 법칙론자들에 대해서도 

 자신을 바꾸어 다른 사람이 된다는 것은 가장 비효과적인 방법이다. 성공의 가능성이 별로 없다. 변화의 핵심은 자신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자신을 찾아가는 여정이라는 점을 놓쳐서는 안된다. (143-144쪽)

 라고 말한다. 이 책에서 일관되게 말하는 바는 기존의 성공을 위한 법칙에 대한 역설이며, 저자만의 새로운 자기경영론이다. 성공을 위한 법칙들의 높은 벽앞에서 초라해졌던 사람들에게 '내가 나를 인정하라'고 말하는 이 작가의 팬이 되기를 원치 않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을까. 

   예전에 공지영씨의 수도원 기행을 읽을 때 기억에 남았던 글귀가 생각난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대충 이렇다. '모든 창조설화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지만 유독 창세기의 하느님은 어둠과 혼돈과 공허라는 질료를 가지고 세상을 창조하신다'면서 '개인의 삶 속의 혼돈과 공허도 창조를 위한 질료가 될 수 있을까' 생각하며 희망에 젖는 내용이었다. 저자도 그런 관점에서 사람의 이중성과 자기와의 불화에 대해 비관하지 말라고 말한다. 이중성은 자연스러운 것이며 갈등과 불화는 우리가 살아가는 한 같이 가야할 동반자들이라는 것이다. 니체의 '춤추는 별 하나가 태어나려면 그 내면에 카오스를 간직할 수 있어야 한다'(158쪽 2-3줄)는 말도 인용하면서 그 혼돈과 갈등을 에너지와 힘으로 삼아 한 발 한 발 힘차게 나아가라고 당부한다.

  요새 부쩍 다급함을 느끼며 성공과 변화에 대한 책을 많이 뒤적거리던 차에 참 좋은 책을 접한 것 같다. 미래의 성공만이 다가 아니라 바로 내 앞에 닥친 하루하루를 새롭고 힘차게 살 수 있다면, 매일 매일이 새로울 수 있다면, 그 얼마나 아름답고 신나는 삶일까.

  이탈리아의 엔터테이너인 루치아노 데 크레센초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세계를 바꾸겠다는 의지로 인생은 시작된다. 그러나 고작 TV채널을 바꾸는 것으로 인생은 끝이난다."(33쪽 8-10줄)고. 인생은 TV채널을 바꾸는 것밖에 할 수 없는 비루한 것도, 세계를 바꾸는 것처럼 거창한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저자의 말처럼 죽음은 너무나도 확실한 것이다. 지금까지 그 누구도 죽음을 피해가지 못했다. 지금 죽을 수도, 내일 죽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하루하루는 정말 귀하고 소중한 시간들이 아닐지. 오늘을 사는 것은 통장의 잔고와 같은 기쁨이고, 내일을 사는 것은 예상치 못했던 '이자'가 들어온 것과 같은 행운이다. 어제와 오늘과 내일을 구분하지 못하는, 지루하고 변함없은 일관성의 늪에서 빠져나오는 것. 그 시각의 변화가 중요하다는 생각을 한다. 오늘은 어제와 다른 새로운 하루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 바로 인생의 전부이고, 중요한 방점일 것이다.

  저자와 나를 동일시하며 시작했던 대화는 이렇게 끝났다. 그 대화를 통해 느낀 결과물을 당장 오늘부터 실천에 옮겨야 될텐데‥그렇게 될까? 기쁨에 넘치는 날도 있겠지만 다시 흔들리는 날들도 있으리라. 그러면 그 때, 다시 저자를 만나겠다. 커피 한 잔 시켜놓고 저자와 다시 새로운 책으로 만나겠다. 그 때도 이렇듯 기분 좋은 만남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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