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벌레들 조선을 만들다
강명관 지음 / 푸른역사 / 2007년 10월
장바구니담기


책은 어떤 의미에서는 인간에게 족쇄를 씌우고, 어떤 의미에서는 인간을 해방시킨다. 그 의도를 알아차리는 것이 진정한 독서일 터다.-6쪽

주석은 말씀의 의미가 이런 것이라 주장한다. 하지만 경전의 의미가 주석가가 주장하는 의미란 등식은 필연적이지 않다. 그것은 단지 주석가의 주장일 뿐이다. 그렇다면 주석가의 주장이 진리가 되는 것은 어떤 조건에서인가. 주석가의 주장이 권력과 결합해 비판의 목소리를 뭉갤 수 있으면 진리가 된다. 진리를 만드는 것은 논리의 정합성이 아니라, 오리지 권력일 뿐이다.-165쪽

나는 홍석주에게서 진정한 인문학자, 진정한 독서가의 모습을 본다. 서로 보이지도 들리지도 아니하는 칸막이 속에 앉아 바늘끝 같은 분야를 공부하노라면서, 우리는 그것을 '전공'이란 거룩한 명사로 부른다. 슬프다. 인문학이 원래 추구했던 삶과 세계에 대한 총체적 인식은 어디에 갔는가. 홍석주의 <독서록>을 보고 인문학자들은 인문학의 쇠퇴를 한탄하기 전에, 정말이지 '인문학'을 공부해야 할 것이다.-347쪽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 유한준 (1732~1811)-348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책벌레들 조선을 만들다
강명관 지음 / 푸른역사 / 2007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한겨레신문'에 격주 토요일마다 <고금변증설>이라는 칼럼이 실린다. 요즘 대두되는 사건이나 흐름에 대해 조선시대의 기록을 들어 비평하곤 한다. 글에 등장하는 기록들도 쉽게 접하지 못한 것들이고 글쓴이의 견해나 글솜씨도 신명나서 꼭 챙겨보는 편이다. 이런 이유로 '강명관/부산대 한문학 교수'로 소개된 이 칼럼니스트의 이름 석자를 알고 있었는데, 그 만남이 이 책까지 이어질 줄은 몰랐다. 사실 이 책에 대해 익히 알고 있어서 읽게 된 것이 아니라, 저자의 이름만 보고 집어들었다는 말이 옳을 것이다.

  이 책의 제목은 '책벌레들, 조선을 만들다'이다. 물론 이 책은 조선시대가 배경이며, 책벌레들이 등장한다. 하지만 제목처럼 '조선을 만드'는 모습은 희미하다. 유명배우가 주연으로 출연한 줄 알고 영화를 보러갔는데 사실은 그 배우가 카메오로 잠깐 출연했을 때의 느낌이랄까. 책을 읽을 수록 제목과 내용의 불협화음이 느껴졌다. 이 책은 '책벌레'들이 정치, 사회, 문화적으로 조선을 세우고 다듬고 만드는 모습보다는 철저하게 '책벌레'들에 초점을 맞춘다. 그들이 어떤 책을 읽었는지, 어떻게 책을 구했는지, 그들은 책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했는지 등을 주로 보여준다. 차라리 <조선의 책벌레들>이라고 했다면 명확했을텐데, 한 때 출판계에 유행했던 <주어, ~하다>라는 제목작법에 의존한 듯해서 아쉬움이 남는다.

  하지만 사람 이름이 '김개똥'이라고 해서 그 인품까지 '개똥'은 아니지 않겠는가. 제목이 약간 부자연스럽지만 책의 내용만은 재미있고 유익하다. 어느 책이든 의도없이 쓰여진 책은 없다라는 저자의 생각처럼 이 책에서 저자는 자신의 관점을 숨기지 않고 드러낸다. 그의 '호학군주 정조'에 대한 평가도 냉혹하다. 한 쪽에서는 조선 후기의 개혁군주로 찬사를 바치지만 저자는 학문의 자유를 억압한 군주로 박하게 평가한다. 조광조 또한 소학을 통해 생활도덕으로 학문과 사상과 행동을 규율하려고 했던 '철없는(?)' 소장 개혁가로 그려진다. 세종도 한글을 통해 백성도 읽고 쓰고 가르치고 배울 수 있도록 만드는 생각은 하지 못했던 '군왕'으로서의 한계를 끄집어낸다. '도대체 당신에게 존경할만한 위인은 누가 있습니까?'라고 묻는 이도 있을테고, 시대적 한계를 무시하고 현대의 사고로만 과거를 평가하는 것아니냐는 비판도 있을 법도 하다. 하지만 저자는 아랑곳않고 그저 박하고, 거친 평가를 그대로 드러낼 뿐이다. 그런 서술을 통해서 학문과 사상의 자유에 대한 그의 철저한 신념이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처럼 도드라진다.

  이 외에도 글쓴이의 다소 냉소적인(?) 문제제기도 눈에 띈다. '세계최초로 금속활자를 발명했다고 하는 우리나라가, 왜 겨우(!) 목판이나 토판을 이용한 인쇄를 했던 중국도 있었던 유리창과 같은 서점가가 형성되지 않았는가.' 또는, '구텐베르크가 인쇄술을 발명함으로써 서양에 불어닥쳤던 사회 전반에 걸친 변화가 왜 우리나라에는 일어나지 않았는가.'와 같은 질문이 그것이다. 지폐에도 등장하는 대학자 퇴계이황에 대해서도 문제를 제기한다. 퇴계의 <주자대전> 연구 이후 성리학이 사상과 학문을 독점한 가운데 심한 사회적 왜곡이 일어나지 않았냐는 것이다. 퇴계가 학문적 경계를 <주자대전>으로 국한해버렸기 때문에 이후 조선사회에 문제가 되었다는 지적이다. 저자 또한 이 책을 통해 '무슨 답을 내놓겠다는 것'도 아니고 단지 '의문의 제기'일 뿐이라고 말했고, 하나같이 선뜻 답을 내리기 어려운 문제들이다. 하지만 저자의 문제제기는 그 옳고 그름을 떠나서, 우리가 예사롭게 여기고 넘길 수 있는 것들을 다시 한 번 부담 없이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해준다.

  그동안 모르고 있던 인물들에 대해 알 수도 있다. 박세당이나 이옥, 서유구, 홍석주와 같은 인물들은 교과서나 수업을 통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는 인물들이다. 역사 속에서 뭍혀버릴 뻔한 사람들을 우리의 기억 속으로 불러온 것은 참으로 좋은 일이다. 물론, 이 책에서 그들에 대한 충분한 정보는 얻을 수 없었지만 그들을 역사 속에서 불러온 것만으로 일단 족하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이 책에서 숱하게 거론되는 책의 이름들 대부분이 무슨 책인지 알 수가 없다는 데 있다. 조선시대 책벌레들이 읽은 책들의 이름은 알 수 있어도 그 내용이 어떤 책인지 잘 알 수 없다는 게 안타깝다. 아무튼, 책이 귀하던 그 시절에 책에 미치고, 책을 좋아했던 조선시대의 책벌레들을 보면서 책이 너무나도 풍족한 이 시대에 사는 나는, 그리고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지 새삼 부끄러워진다. 지나치면 모자람만 못하다고 했던가? 우리도 책이 부족해져야 그들만큼 간구하게 될런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세종, 실록 밖으로 행차하다 - 조선의 정치가 9인이 본 세종
박현모 지음 / 푸른역사 / 2007년 5월
평점 :
품절


  정조를 넘어 이제는 세종이다. 그를 다룬 사극이 방영되고, 그가 다시 입길에 오르내린다. 사실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세종은 그야말로 '성군'으로 추앙받을 정도로 국방, 과학, 세제, 농업, 문화 각 방면에 걸쳐 세종의 손이 닿지 않은 곳이 없다. 그래서 '도대체 세종대왕이 못하는 게 뭐야?'와 같은 의문이 생긴다. 앞서 말한 모든 업적을 모두 세종 한 개인의 공으로 돌린다면, 세종은 성인이자 초인의 반열에 오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와 그의 시대를 인간적으로 들여다보고 배울 길은 영영 막혀버리고 만다.

  사실 이 책은 세종을 인간적으로 '생생하게' 들여다보기 위한 목적으로 쓰여진 책이다. 제목부터 '실록 밖으로' 걸어나온 세종을 강조하며 그의 다양한 면모를 다뤘음을 강조했다. 저자는 세종시대의 9명의 정치가의 입을 빌려 '세종'에 대해 말하게 하였지만, 이 1인극은 자주 저자의 의도를 벗어난다. 세종에 대해 말해보라고 술자리 앞에 불러놨더니 '에헴~'하고 거드름을 떨며 자기 이야기를 실컷하는 꼴을 보는 것같은 느낌이다. 비록, 세종에 대해 '생생하게' 말하지는 않지만 9명의 입담은 꽤 생생한 편이다. 하지만 신숙주나 정인지도 좋지만, 세종대 사건의 주연급인 최만리나 양녕대군, 장영실이 등장하는 것은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도 남는다.

  또한, 세종이 문종보다는 세조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것이 옳았다는 주장은 이론의 여지가 많다. 어차피 수양대군이 왕이 되었을텐데 세종이 수양대군에게 양위하는 결단을 내렸다면 국가적인 손실을 줄일 수 있지 않았겠냐는 주장이다. 하지만 이런 주장은 문종이 단명할 것을 알고 있고, 수양대군이 왕권을 뺐을 것을 알고 있는 후대 사람이나 '쉽게' 내릴 수 있는 결과론적인 해석이다. 세종이 수양대군에게 양위한 것을 정치적 실수로 보는 것은 지나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관점은 사람마다 다양하게 볼 수 있겠지만 말이다.

  여러 아쉬움에도 세종의 정치에 대한 조명은 유익하다. 세종의 업적으로만 치부하던 일들을 들여다보니 김종서와 최윤덕, 박연과 장영실, 허조와 황희, 집현전 학사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물론 당대의 업적들은 세종의 깊은 철학과 혜안 그리고 국가경영능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혼자서 그 모든 일을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혼자서 다하려고 했다면 제갈량이나 정조처럼 눈물을 뿌리며 실패를 맛볼 수밖에 없었으리라. 세종은 자신의 철학에 따라 반드시 해야 되는 일이라고 생각하면 이를 신하들과의 토론에 붙였다. 이를 통해 일의 방향과 절차를 수정하고 보완했다. 그리고 적임자를 골라 그에게 일의 추진을 전적으로 맡겼다. 그 결과 세종은 국정의 나침반과 '좋은 울타리'로 기능하면서 능력있는 관료들과 함께 조선의 태평성대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

  다양한 악기 소리가 우후죽순 터져나오면 소음이 되지만 훌륭한 지휘자의 지휘에 맞춰 연주하면 아름다운 화음을 만들어낸다. 강경원칙론자이자 보수주의자인 허조나, 집안비리에 휘말린 황희나 모두 하나씩의 결함을 가진 이들이었지만 세종의 지휘 아래서 자기 능력 이상을 발휘할 수 있었다. 세종이야 말로 조선이라는 오케스트라를 이끈 명지휘자였던 것이다. 이런 정치가로서의 세종의 탁월함을 들춰내면 들춰낼수록 안타까움이 드는 것은, 지금 그러한 정치인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 아닐까. 또한 그것이 세종을 21세기로 불러낸 이유일 것이다.

  끝으로, 저자는

 무엇보다 그는 '중국'을 상대화하고 '우리'의 다름을 존중함으로써 견고한 학문적 사대주의를 탈각시켰다. 지성의 빈곤이야말로 모든 위기의 뿌리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집현전 학사들을 중심으로 한 돌연한 정신적 활기와 명나라를 상대로 한 문명경쟁은 이러한 사상적 열등감을 극복한 저점에서 비롯되었다.' (286쪽)

 고 말한다. 세종은 사대주의자였지만, 유연한 사대주의자였다. 그의 '조선과 중국은 다르다'는 인식이 훈민정음을 낳았고, 음악과 과학, 농업 등 전 분야에 걸친 진보라는 결실을 가져왔다. 하지만 지금은 미국인의 '오린지'발음을 어떻게 해야 그대로 옮길 수 있을지 고민하는 수준의 혜안을 가진 지식인과 정치인이 넘쳐난다. 그들은 그것이 세계화이며 선진화라고 생각한다. 이 참을 수 없는 천박함을 목도하는 지금, 세종이 더욱 그립고 간절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어느 정치적 인간의 초상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 리브로 / 1998년 7월
평점 :
품절


  정권이 바뀌어도 같은 자리에 계속 앉아 있는 정치인들이 있다. 정견은 애매모호하고, 과거전력이 문제가 되면 '젊은 날의 실수'쯤으로 두루뭉술하게 넘어간다. 우리는 오래 사는 사람을 '생존능력 최강의 인간'이라고 부르며 인정해주지는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왜 이런 정치적 '수명'이 긴 인물들을 '정치적 인간'이라고 부르며 나름의 인정을 해주는 것일까. 왜 겉으로는 그의 변절을 흉보면서도 '정치적'이라는 수사를 붙여 미화해주는 것일까. 진정 정치를 잘하는 '정치가'들이 억울해서 가슴을 칠 일이다.

  이런 역설적 '정치적 인간'의 전형이 바로 조제프 푸셰다. 그는 역사가 한 순간에 들어올려져서 요동쳤던 프랑스 혁명기의 사람이다. 혁명과 반동, 공화정과 왕정이 맹렬히 싸우던 그 시대에 사실 제 한 목숨 건사하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것이었다. 당통, 마라, 데물랭, 로베스피에르, 나폴레옹 등등. 수많은 영웅적 인물들이 순식간에 들어올려졌다가 무참하게 내팽개쳐졌다. 하지만 혁명의 처음부터 루이 18세의 집권으로 왕정으로 돌아간 시기까지 내내 자리를 지켰던 인물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푸셰다. 

  그는 완벽한 이기주의자였다. 남보다 자기 자신을 아끼는 것에 그치지 않고, 철저히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고 자신만을 사랑했다. 정치인의 본분인 '사회의 희소한 자원을 배분하는 일'이나 '국리민복' 따위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오직 권력을 잡기 위해,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동분서주하였다. 때문에 어떤 정견에도 묶이지 않았고, 누구에게도 복종하지 않았다. 그가 충성했던 단 하나의 대상은 '권력'이었다.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늘 모호함을 유지했고, 역사가 칼날을 들이대고 선택을 강요하면 늘

 '다른 사람이 대신 피를 흘림으로써 결말이 났다.(본문 120쪽)'

 실로 대단한 정치적 생존력을 가졌지만 그의 말년은 우울했고, 그의 죽음은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았다. 

  이렇게 '찰나'만을 생각하는 정치인 푸셰는 죽었지만 우리는 지금도 푸셰의 아들 손자들이 당당히 여의도를 활보하는 것을 보게 된다. 탁월한 저자 슈테판 츠바이크는 푸셰가

 '한번도 이상에 봉사한 일 없이, 인류의 도덕적인 정열에 헌신한 일도 없이 언제나 찰나와 인간 사이의 사라져버리기 쉬운 덧없는 총애에만 봉사한 죄값(본문 335쪽)'

 을 치러야만 했다고 지적한다. 저자는 역사의 힘을 긍정하며 푸셰를 조롱하지만 사실 나는 푸셰와 같은 인물에 대한 '역사의 처벌'에는 관심이 없다. 이 '정치적 인간'들이 누릴 것은 다 누리고 말년에 약간의 외로움을 겪는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이 무엇인가 말이다. 역사의 복수치고는 너무 가볍지 않은가. 나는 오히려 이 득시글한 푸셰의 소굴에서 정말 제대로 된 '정치적 인간'을 보고 싶다. 애매모호한 중립이 아닌 중용의 덕을 갖춘 진정한 정치가를 보고 싶다. 왜 푸셰와 같은 인물들이 '정치적'이라는 수사를 독점해야 하는가. 그들로 부터 그 부당한 이름을 뺏어서 그들에게 달아주는 것.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역사의 힘이다.

  고명섭씨의 『광기와 천재』라는 책의 푸셰에 대한 꼭지를 읽고 그에 대해서 더 알고 싶어서 선택한 책이다. 물론, 슈테판 츠바이크라는 저자에 대한 믿음도 큰 몫을 했다. 하지만 책을 다 일고 난 지금은 약간의 아쉬움이 남는다. 슈테판 츠바이크의 문장은 술술 읽히지 않지만 몇 번이고 다시 읽게 만드는 맛이 있다고 기억한다. 지금까지 읽은 그의 책들은 그랬다. 하지만 이 책은 번역의 문제일까 아니면 원래 그런 것일까 왠지 뭔가가 부족하게 느껴진다. 투박한 책의 편집도 그렇고, 에너지나 활력이라는 단어를 쓰면 될 것을 굳이 '에네르기'라고 한 부분도 그렇고, 저자와 책의 이름을 깎아 먹는 부분이 많이 느껴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광기와 천재 - 루소에서 히틀러까지 문제적 열정의 내면 풍경
고명섭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7년 7월
평점 :
품절


  나는 나에 대한 평가를 듣는 것을 좋아한다. 익명의 롤링 페이퍼도 좋고 취중진담도 좋다. 마주보고 앉아서 하는 평가가 사실일리 없지만 그것마저도 좋다. 나에 대한 평가만큼 남에 대한 평가도 관심있다. 앞담화도 좋지만 뒷담화는 더욱 사랑스럽다. 이런 취향때문인지 인물에 대한 탐구를 본위로 하는 책들이 좋다. 이 책도 나의 관심사와 맞닿아 있지만 다소 부담스러웠던 것은 비트겐슈타인이나 하이데거와 같은 접하기 두려운(!) 인물을 다루고 있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히틀러와 루소와 같은 흥미로운 '문제적 인간'도 다루고 있기에 읽게 됐다.

  책을 보면서 처음 느낀 생각은 '참 정성을 들인 책이구나' 하는 것이었다. 책의 생김새도 잘 생겼거니와 각 인물에 배정된 분량이 부담스럽지 않았고 곳곳에 사진 자료가 배치되어 보기도 좋았다. 오자나 탈자도 찾아보기 어려웠다. '성실함'의 화룡점정은 색인과 참고문헌이었다. 책의 편집 뿐만아니라 저자의 글도 정성이 느껴졌다. 한 번 책을 손에 잡으면 속도감 있게 읽을 수 있도록 씌여졌지만 문장이나 단어의 선택에 공을 들인 인상을 받았다. 빨리 읽을 수 있지만 그냥 지나칠 수 없게하는 좋은 글이었다. 

  '얼굴'이 예쁜 것도 감사한데 '성격'도 좋았다. 매우 재미있었는데 그 이유는 첫째로, 인물들의 모순과 불안이 가득찬 삶을 그대로 보여준 데에 있는 것 같다. 그렇게 함으로써 뭔가 특별해보이는 그들의 삶이 오히려 모순과 불안으로 가득차 있음을 알게 되고, 안도와 환희(?)와 재미를 느낄 수 있게 되는 것은 아닐까? 또한 '광기'와 '천재'라는 단어로 교묘하게 연결된 아홉 인물 자체가 재미의 근원이기도 하다. 이 책에서 다룬 아홉명의 인물모두 어렸을 때 겪은 상처와 불안이 존재 내부에 깊게 자리잡아있다. 하지만 그 정신적 불안정에 굴복하여 자기파괴에 이르지 않고 그러한 성취를 이룬 것이 '광기'라고 할만도 하고, 그러니까 '천재'라고 할만도 하다. 아돌프 히틀러와 같이 그 삶 자체가 '광기'인 인물은 그 근저에서 '불행한 의식'을 발견할 수 있다. '철학적 풍경'이라는 제목이 붙은 3장은 사상사와 인물사가 중첩되어 어려운 느낌을 주지만 근대 철학의 흐름을 잡을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끝으로, 가장 흥미로웠던 인물은 '조제프 푸셰'였다. 혁명이라는 역사의 격동기에서 그가 보여준 모순의 삶은 그 자체가 코미디이자 드라마이다. 하지만 푸셰가 가장 가깝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모두가 시시포스처럼 끊임없이 바위를 굴리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존재라고 한다면, 푸셰는 말년병장처럼 그 일과를 돌아가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 그래서 그가 얄미울 수는 있어도 증오할 수는 없다. 그리고 그러한 인물은 앞으로도 또 있을 것이다. 성실한 참고문헌 덕분에 슈테판 츠바이크의 '어느 정치적 인간의 초상'이라는 푸셰평전을 알게 되어 다음 독서의 여정은 그쪽이 될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