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미 대중들이 널리 알고 있는 사건과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라, 굳이 등장인물의 이름을 바꿀 필요가 있었나 싶다. 박용각, 곽상천, 김규평 등 극중 인물의 이름이 귀에 착 감기지 않는다. 성이라도 실존인물과 일치시켰으면 좋았을 텐데, 마지막까지 ? 누구?’ 하면서 보았다. 등장인물의 이름이 혼란스러울 뿐, 스토리는 정돈되어 있고, 영상은 꽤 차분하게 흘러간다. 2시간 가까이 되는 러닝타임이 길게 느껴지지 않았다. 극장 안에 사람이 가득 차 있었지만, 너나없이 조용했다. 영화는 꽤 흡입력 있다.

 

   다만, 나이 든 어르신 중 몇 분은 정치적인 이해가 다른 때문인지, 지루해서인지 종종 휴대전화 화면을 껐다 켰다 했다. 같이 보았던 아내도 살짝 졸았다고 하니 생각보다 재미없다는 평가도 꽤 있는 듯하다. 하지만 나는 전혀 그렇게 느끼지 않았다. 왜냐하면, 배우들의 연기가 정말 대단하기 때문이다. 이성민은 '박통'에 완전히 녹아들어 있었고, 곽도원, 이희준도 제 몫을 다한다. 이병헌도 종종 구설에 많이 오르지만 왜 이병헌인지를 증명했다. 배우들의 표정과 행동, 대사만 지켜봐도 흥미로운 영화다.

 

   이 영화는 사실 정치적인 이상보다는 한 인간의 비애를 담고 있다. 정의감과 사명 의식에 움직이는 인간보다는, 믿음과 배신, 경쟁과 공포, 기대와 선망, 그 안에서 끊임없이 흔들리는 인간, 그 인간의 비애를 담고 있다. 권력은 비정하고, 승자도 정의도 없다. ‘임자 하고 싶은 대로 , 임자 옆엔 내가 있잖아.’라는 무한한 신뢰와 응원의 말이 실제는 책임회피이자 함정임이 밝혀질 때, 그 비참함과 환멸을 극복할 수 있을까.

 

   결국 승자는 누구인가. 혼란의 와중에 박통의 금괴를 들고 사라졌다가 화려하게 복귀하는 '전두혁'일까. 참 어려운 시대를 살았다. 세상은 점차 나아질까. 우리 조직의 생리가 조폭과 같다면, 우리는 여전히 남산의 부장들이 살았던 시대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사실 아직 주변 곳곳에서 그 잔상을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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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인욱의 고고학 여행 - 미지의 땅에서 들려오는 삶에 대한 울림
강인욱 지음 / 흐름출판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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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릴 적 인디아나 존스를 보며 잠 못 이루었던 세대라 그런걸까? 고고학은 항상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이 책은 고고학자의 시선에서 보는 세상, 발굴 일화, 출토유물과 관련된 이야기를 풍부하게 담고 있다. , 향기, 전쟁 등 다양한 소재로 풀어놓는 이야기들이 무척 흥미로웠다. 다만, 아쉬운 점은 일률적인 역군은 이샷다식의 결론이 너무 많다는 점이다. 예컨대, 고고학을 하다보니 이렇던데, 인생도 그렇더라는 식의 깨달음으로 결론짓는 꼭지가 많았다. 후속작에는 고고학계의 일화나 비화, 현장담들이 더 많았으면 싶다.

역사 기록에 따르면 발해의 음악은 당시 일본과 중국에도 널리 퍼졌다. 발해의 사신이 전한 음악은 일본 도다이지에서 공연할 정도이고, 지금도 전해지고 있다. 중국의 송나라에서는 발해의 음악이 너무 유행해 이를 강제로 금지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도대체 발해의 음악에는 어떤 매력이 있어서 이렇게 주변 나라의 사람들을 매혹시켰을까 궁금했다. 구금이 등장한 것을 보니 발해는 초원, 중국 그리고 고구려의 여러 음악을 조화시켰던 건 아니었을까. 비록 과거의 음악은 복원하여 듣기 어렵지만, 그들이 이루었던 문화의 힘은 지금도 느낄 수 있다. - P105

우리에게 일본 제국주의의 문화재 침탈과 그 영향은 현재 진행형이다. 우리 주변의 유적과 문화재에는 그들이 남긴 흔적이 너무나 크게 남아 있기 때문이다. 학계에서 일본의 제국주의에 동조한 학자들을 비판하면 ‘그들의 연구 성과는 좋다’ 혹은 ‘인격적으로는 훌륭하다’는 식의 일본 측 의견을 대변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사실 우리가 비판해야 할 것은 개개인 학자의 성격이나 인격에 대한 평가가 아니다. 바로 국가 권력에 앞장서서 다른 사람을 억압할 때에 그에 암묵적인 동조를 하고 따라갔던 그 모습을 비판해야 한다. - P210

다른 사람의 행복을 침해하여 이득을 얻으면 그 욕심에 편승한 또 다른 개인이 등장한다. 그 개인들이 모이고 모여 집단이 되고, 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할 때 맹목적인 광기가 되는 것이다. 때문에 단순히 하나의 거대한 이념으로만 집단 이기주의를 판단한다면, 그것은 언제든 다시 출현할 수 있다. - P210

고고학자에게 명성은 마치 헤엄치는 고래와 같다. 고래는 오랜 기간 물속에 잠겨 있다가 때가 되면 수면으로 올라와 숨을 분출한다. 너무 오랫동안 수면 밑에 있어서도 안 되지만 수면 위에 계속 머물러서도 안 된다. 너무 오래 수면 위에 있다면 결국 사냥꾼들의 표적이 되기 때문이다. 가끔 수면 위에서 따뜻한 햇살을 바라보는 건 좋지만 고래가 살아야 할 곳은 물속이듯, 결국 고고학자의 가장 큰 즐거움은 혼자 외롭게 유물을 바라보는 중에서 피어나야 한다. - P265

"비판받기 싫다면 아무 짓 하지 말고, 아무 말도 마시오. 그저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되시길." (앨버트 허버드) - P2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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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잘하는 사람은 단순하게 합니다
박소연 지음 / 더퀘스트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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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은이는 유능하고 똑 부러지는 직장인 같다. 잘 쓰인 책이다. 일 잘하는 사람들은 단순하게, 쉽게 한다는 논지를 정하고 그 특징을 기획, 글쓰기, 말하기, 관계 맺기 네 분야에서 찾고 있다. 각 꼭지가 끝나면 1쪽 분량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를 요약해둬서, 읽고 난 후 정리하기도 쉽게 했다. 내용이 알기 쉽게 구성되어 있고, 일목요연하다. 각 장에서 예시로 든 직장 대화는 생동감과 현장감이 넘친다. 독자가 단순하게, 쉽게 볼 수 있도록 큰 노력을 했을 것이다. 공이 보통 들어간 책이 아니다.

 

  사실, 보는 사람이 편할수록, 하는 사람은 더 힘이 든다. 이 단순한 진리만 안다면, 이 책을 읽고 일을 쉽게 하면서 일도 잘하는 법을 배우려는 생각이 부질없다는 것을 알 텐데……. 나부터 그런 욕망에 이 책을 집어 들었지만 말이다. 이 책을 그런 욕심으로 읽게 되면 두 번 실망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첫째는 앞서 말한 대로 단순하게 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것을 신경 써야 한다는 진리를 발견해서일 테고, 둘째는 생각보다 특별한 내용이 없다는 이유에서이다. 사실, 직장생활을 하면서 이런저런 조언을 듣기 마련인데 이 책에는 어디서 들어봄 직한, 혹은 어디서 내가 했음 직한 말들이 많다. 쓸데없이 어렵고, 불필요한 보고서 쓰기 이론따위에 치우치지 않아 좋았지만, 구체적이지 않고 새롭지 않다는 면에서 조금 아쉬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책에서 언급한 내용을 배우고 익혀서 일도 잘하고, 회사에서 인정도 받고, 워라밸도 높이고 싶다. 하지만 걱정이다. 성과를 높일수록 더 많은 일이 떨어지는 화수분이 작동할까 싶어서……. 직장에 숨어있는 그 놈의 화수분을 없애는 것이 먼저인지, 성과를 높이는 것이 우선인지 모르겠다. 지은이의 생각은 어떨지?

 

회사에서 일할 때도 비슷합니다. 여러 기획안을 제안하며 바쁘게 일해도 상대방의 머릿속에 우리의 존재감이 희미한 이유는 저자극의 업무만 계속 입력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눈은 봤지만 뇌는 보지 못한거죠. 1년이 지나 성과를 제출할 때 여러 업무를 잔뜩 적어보지만, 그래서 무엇을 했는지 모르겠다는 상사의 소리에 좌절합니다. - P55

우리가 만나는 많은 사람은 후천성 성인 주의력결핍증후군 환자입니다. 이 증상은 위로 올라갈수록 악화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야기할 때 조금만 틈을 주면 딴생각을 합니다. 일 잘하는 사람들은 상대방의 지친 뇌 상태를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단순하고, 명쾌하게 이야기합니다. 딴 생각할 틈을 주지 않는 것이지요. - P65

우리는 매일의 일상에서 숨쉬듯이 기획을 합니다. 기획의 시작부터 막막하거나 기획의 결과물이 평범하게 느껴진다면 ‘HOW(방법)’부터 찾으려고 애썼기 때문입니다. 먼저 그 과제의 진짜 이유, 숨겨진 열망을 찾으세요. 모든 기획은 ‘WHY(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 P79

덩어리로 묶으면 많은 문제가 단순해집니다. 덩어리를 묶을 때 미씨(MECE)를 꼭 기억하세요. 각 항목끼리는 독립적이어야 하고(Mutually exclusive), 항목을 합치면 전체가 되어야 합니다(Collectively Exhaustive). - P101

우리의 몸과 마음은 뉴턴의 운동 법칙을 충실히 따릅니다. 외부의 힘이 없는 한 그저 가만히 있고 싶어 합니다. 기획서를 통해 상대방을 설득해서 움직이려면 단순하고 게으른 뇌를 흔들 만큼 매력적인 힘이 존재해야 합니다. 머리에 꽂히는 강렬한 컨셉처럼 말이에요. - P110

좁쌀 서 말보다 호박 한 개가 낫습니다. 호박 한 개에 해당하는 자신의 브랜드 사업을 기획해야 합니다. 이력서에 저을 만한 굵직한 기획이어야 비로소 커리어가 됩니다. - P131

일관성이 지켜지지 않은 글은 보는 사람에게 스트레스입니다. 매너를 지켜주세요. 그리고, 1막에서 권총이 나왔으면 3막에서는 쏴야 합니다. 서론에서 문제로 거론했으면 본론에서 해결책을 내놔야 합니다. - P178

"내 말 무슨 말인지 알지?" "아니요. 모릅니다." 지시할 때 가능한 한 정확하게 설명해줍시다. 지시하는 사람이 5분 더 쓰면, 실행하는 사람은 하루 이상의 시간을 절약할 수 있습니다. 회사에서 직급이 높을수록 시간이 비싸진다고 하지요. 그렇다고 해서 사원의 시간을 흥청망청 써도 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 P213

기-승-전-결을 모두 갖춰 이야기하면 상대방은 ‘승’ 때부터 이미 딴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결론 전의 얘기는 모두 잊어버립니다.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두괄식입니다. 두괄식으로 시작해서 30초 안에 하고 싶은 얘기를 모두 끝내야 합니다. - P221

질문에 대한 정확한 답을 몰라 에둘러대며 비슷한 답변들만 늘어놓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면 질문한 사람은 몇 번이고 다시 물어봐야 합니다. 질문한 사람의 입장이 아닌 자기 위주로만 대답하는 습관은 혼선과 오해를 일으킵니다. - P228

숫자 1은 누구에게나 1입니다. 하지만 의미는 상황에 따라, 사람에 따라 바뀝니다. 빌 게이츠와 우리는 1억 원에 대해 다른 의미를 갖고 있는 것처럼요. 그래서 숫자에 해석을 함께 곁들이면 단순하고 강력한 메시지가 됩니다. - P241

그러니 우리 같은 타입을 싫어하는 2.5%와는 ‘큰소리로 언쟁을 하지 않는다’ 정도로만 목표를 잡고 가능한 한 엮이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굳이 오해를 풀려고 애쓰지 마시고(취향 문제니 풀 수도 없습니다), 친해지려고 고민하지 마세요. 그 사람들 때문에 자신의 삶을 심각하게 되돌아보지도 마시고 그냥 내버려 두세요. 인생이 훨씬 단순해집니다. - P261

직장에서 최고의 평판 관리는 ‘상사를 승진시키는 사람’이거든요. - P282

모든 인간관계는 넘으면 안 되는 암묵적인 ‘선’이 있습니다. 우리는 의식적으로, 무의식적으로 상대방에게 어디까지 해도 괜찮은지 ‘선’을 확인합니다. 상대방에게 자신의 ‘선’이 어딘지 알려주세요. 알려주지 않으면 선은 점점 더 참기 어려운 수준까지 가깝게 그어집니다. - P283

가슴 뛰는 일, 나에게 딱 맞는 완벽한 일이 어딘가 있고, 내가 아직 찾지 못했다고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모든 일은 ‘좋아하는 일’과 ‘싫어하는 일’이 복잡하게 섞여 있습니다. 가슴 뛰는 일로만 구성된 일은 없습니다. - P290

거의 모든 사람이 역경은 견뎌낼 수 있다.
그러나 한 인간의 인격을 시험해보려면
그에게 권력을 주어보아라.
- 에이브러햄 링컨(Abraham Lincoln) - P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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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 카레니나 2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20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연진희 옮김 / 민음사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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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권에 비해 이야기 전개는 현저하게 느려졌다. 농업이나 종교 등에 대한 레빈의 성찰과 고민이 꽤 길게 그려져, 눈이 책장에 머물지 못하고 방황하기도 했다. 당시 지식인 계급에 대한 비판도 곳곳에 보인다. 비슷한 정파끼리도 서로를 헐뜯고, 선진 유럽의 문물과 제도를 단순히 교조적으로 수입하며, 민중을 이상화하거나 반대로 교화의 대상으로 파악하기도 한다. 레빈은 이러한 허위를 파헤치며 민중 안에서, 러시아의 현실 안에서, , ‘지금, 여기에서 해결책을 찾고자 노력한다. 사실 진보를 말하면서도, 서로를 비웃고, 외국의 듣도 보도 못한 이념과 제도를 이식하는 데만 열을 올리거나, 민중을 피상적으로 파악하여 온정적, 시혜적으로 접근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사이비(似而非). 사람들은 가짜에는 속지 않는다. 비슷한 것에 속는다. 그래서 비슷한 것이 더 나쁘다. 톨스토이가 서술한 것은 19세기 러시아의 지식인들이지만, 우리 시대와 크게 다를 바 없었다.

 

   톨스토이는 인간 감정의 묘사와 생각의 해석에 탁월하다. 안나와 브론스키의 감정선에 대한 묘사나 레빈과 키티의 신혼생활에 관한 서술은 정말 2권의 백미다. 특히, 레빈이 키티에게 건네는 첫 글자 토크는 여느 종편 TV의 연애 프로그램보다 더 긴장되고 재미있다. 노작가가 어떻게 이런 알콩달콩, 콩당콩당한 연애 이야기를 썼을까. 정말 대단하다. 뿐만 아니라, 부부싸움 이후의 심리나 신혼생활에서 느끼는 사랑과 권태에 대한 묘사도 알차다. 신혼 초에 내가 느꼈던 원인 모를 감정들을 톨스토이를 통해 비로소 번역할 수 있었다.

 

  결말이야 귀동냥으로 익히 들어서 대충은 알고 있지만, 이제 애틋하기까지 한 이 인물들이 또 어떤 고민과 격정을 거치게 될지 기대와 걱정과 설렘과 두려움이 앞선다. 3권으로 나아간다.

 

콘스탄친 레빈이 시골을 좋아한 이유는 시골이 의심할 바 없이 유익한 노동의 무대이기 때문이었다. 한편 세르게이 이바노비치가 시골을 특별히 좋아한 이유는 이곳에서는 아무 일을 하지 않아도 되고 할 필요도 없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민중에 대한 세르게이 이바노비치의 태도도 콘스탄친의 눈에 약간 거슬렸다. 세르게이 이바노비치는 민중을 사랑하고 이해한다고 말하면서 농부들과 종종 이야기를 나누곤 했는데, 이럴 때 그는 위선을 떨거나 거드름을 피우는 일 없이 농부들과 나눈 모든 대화에서 민중에게 유익한 일반적인 자료와 자신이 민중을 잘 이해한다는 증거를 끌어냈다. - P12

누군가 콘스탄친 레빈에게 민중 일반을 사랑하느냐고 물었다면, 그는 뭐라고 대답할지 몰라 난감해했을 것이다. 인간 일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지만, 그는 민중을 사랑하기도 했고 사랑하지 않기도 했다. 물론 성품이 선한 그는 인간을 사랑하지 않을 때보다 사랑할 때가 더 많았고, 그것은 민중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민중을 어떤 특별한 존재로서 사랑하거나 사랑하지 않는 것은 그에게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 자신이 민중과 함께 살고 있고 그의 모든 이해관계가 민중과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그리고 스스로를 민중의 일부라고 생각하여 자신과 민중 안에서 어떤 특별한 성질이나 단점을 찾으려 하지 않았고 자신을 민중과 대립된 존재로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중략) 그는 모든 종류의 인간을 끊임없이 관찰하며 그들을 이해하려 했다. - P12

"내 생각에는……." 콘스탄친은 말했다. "개인의 이해에 토대를 두지 않는 활동은 결코 오래갈 수 없어. 이것은 보편적인 진리이고 철학적인 진리야." - P30

"보세요. 문제는 바로 모든 진보가 권력에 의해서만 일어난다는 점입니다." 그는 자신도 교양을 갖추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생각에 이렇게 말했다. "표트르 대제, 예카체리나 여제, 알렉산드르 2세의 개혁을 보십시오. 또 유럽의 개혁을 보십시오. 무엇보다 농업의 진보를 생각해보세요. 가령 감자만 하더라도 우리 나라에 강제로 도입되었잖습니까. 우리 시대만 해도 우리 지주들은 농노제 아래서 개량 농기구로 농사를 지었습니다. 건조기, 키, 거름 운반기 등 모든 농기구로 말입니다. 우리는 그 모든 것을 자신의 권력으로 도입했지요. 농부들은 처음에 저항을 하다가 나중에는 우리를 따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농노제가 폐지된 지금, 우리는 권력을 잃었고 최고의 수준으로 향상되었던 우리의 농업은 가장 야만스럽고 원시적인 상태로 추락하려 합니다. 난 그렇게 생각합니다." - P206

레빈은 지주와 계속 이야기를 나누며 모든 어려움이 발생하는 원인은 우리가 우리의 노동자들의 특성과 습성을 알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입증하려 애썼다. 그러나 지주는 독자적으로 고독하게 사고하는 사람들이 다들 그러하듯 남의 생각을 이해하는 데는 둔하고 자신의 생각에만 유달리 집착했다. 그는 이런 주장을 고집스럽게 내세웠다. 러시아 농부는 돼지이고 불결한 생활을 좋아한다, 그들을 돼지 같은 생활에서 끌어내기 위해서는 권력이 필요하며 권력이 없을 때에는 몽둥이가 필요하다. 그런데 우리는 천 년이나 내려온 몽둥이를 갑자기 변호사 나부랭이나 투옥(投獄) 같은 것으로 뒤바꿀 만큼 열렬한 자유주의자가 되어 버렸다, 그리고 감옥에 들어온 쓸모도 없고 악취나 풍기는 농부들에게 좋은 수프를 먹이고 그들에게 너무나 많은 제곱피트의 공기를 산정해준다……. - P211

레빈은 벌컥 짜증을 내며 말했다. "내가 보기에 이런 치료법은 학교로 민중을 치유하겠다는 것과 별반 다를 바 없습니다. 민중은 가난하고 무지하죠. 아낙이 우는 아이에게서 울음병을 본 것처럼, 우리도 그 사실을 분명히 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째서 횃대의 암탉들이 아이의 울음병을 고치는 데 효력이 있다는 것인지 납득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째서 학교가 이런 불행, 즉 가난과 무지를 벗어나는 데 쓸모가 있다는 것인지 납득할 수 없습니다. 구제해야 할 대상은 바로 민중들을 가난하게 하는 원인입니다." - P219

도중에 만난 농부부터 시작하여 이날 받은 모든 인상은 레빈의 마음을 강하게 움직였다. 특히 농부에게서 받은 인상은 이날의 모든 인상과 사유의 근본적인 토대가 된 것 같았다. 공적인 사용을 위해서만 사상을 간직할 뿐 분명 레빈이 모르는 어떤 다른 삶의 원리를 가진 이 유쾌한 스비야슈스키, 그런데도 ‘다수’라는 이름의 군중과 더불어 자신과 무관한 사상으로 여론을 주도하는 스비야슈스키, 자신의 삶 속에서 고통스럽게 얻은 이론의 면에서는 전적으로 옳지만 러시아의 계급 전체와 최상 계급에 대한 적의의 면에서는 옳다고 할 수 없는 그 격분에 찬 지주, 자신의 활동에 대한 불만과 이것의 개선 방법을 찾을 수 있다는 막연한 희망, 이 모든 것이 내면의 불안과 해결책이 눈앞에 있다는 기대감으로 어우러졌다. - P220

‘그래, 난 그에게 이렇게 말해야 했어. 당신은 우리의 농업이 제대로 되지 않는 이유가 농부들이 개량을 증오하기 때문이라고 하며 권력으로 그들을 이끌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만일 농업이 이러한 개량 없이는 결코 제대로 될 수 없다고 한다면, 당신의 말은 옳을 것입니다. 하지만 내가 도중에 만난 노인의 집처럼 노동자가 자기들 습관에 따라 행동하는 곳에서는 농사가 잘되고 있더란 말입니다. 농업에 대한 당신과 우리의 공통된 불만은 당신이나 우리, 혹은 노동자들에게 잘못이 있음을 증명합니다. 우리는 이미 오래전부터 노동력의 특성에 대해서는 자문하지 않고 우리 자신의 방식으로, 즉 유럽식으로 밀어붙여 왔습니다. 노동력을 관념적인 노동력이 아닌 본능을 가진 러시아 농부로 받아들이고, 그에 따라 농업을 정비해 보십시오. - P221

그리고 난 그에게 이렇게 말해야만 했어. 당신이 그 노인처럼 농사를 짓는다고 상상해 보세요. 그리고 당신이 노동자 스스로 노동의 성공에 흥미를 느끼게 할 방법과 그들이 받아들일 만한 개량의 합의점을 찾아냈다고 상상해 보세요. 그럼 당신은 토지를 피폐하게 하는 일 없이 예전보다 두 배, 세 배의 수확을 올릴 겁니다. 그리고 그것을 반으로 나누어 반은 노동자들에게 주세요. 그럼 당신이 얻는 차액도 커지고, 노동자들도 더 많은 것을 얻을 겁니다. 이렇게 하려면, 농업의 수준을 낮추어 노동자들이 농업의 성공에 흥미를 갖게 만들어야 합니다. 어떻게 이것을 할 것인가, 이것은 세부적인 문제지만 이것이 가능하다는 점만은 의심의 여지가 없어요.’ - P221

"아니, 내 계획과 코뮤니즘 사이에는 전혀 공통점이 없어. 그들은 소유와 자본과 상속의 정당성을 거부하지만, 난 그 중요한 스티물러스(레빈은 그런 단어를 쓰는 자신이 혐오스러웠지만, 저술에 몰두한 후부터는 자기도 모르게 러시아어가 아닌 단어를 사용하는 일이 잦아졌다.)를 부인하지 않아. 난 그저 노동을 조절하고 싶을 뿐이야." - P244

스트레모프는 몇몇 다른 위원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인 후, 별안간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의 편에 서서 카레닌이 제안한 정책의 실행을 열렬히 옹호했을 뿐 아니라 같은 취지에 입각하여 다른 극단적인 방침까지 제시했다.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의 근본적인 사상에서 벗어나 한층 강화된 이 방침은 결국 채택되기에 이르렀다. 그러자 비로소 스트레모프의 술책에 드러났다. 극단으로 치달은 이 정책이 갑자기 너무나 어리석은 것으로 밝혀지는 바람에, 각료들, 여론, 총명한 부인들, 신문 등은 일제히 이 정책을 공격하며 정책 자체뿐 아니라 그 정책의 아버지로 공인된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에 대해 분노를 표출했다. 스트레모프는 자기는 다만 카레닌의 정책을 맹목적으로 따랐을 뿐이고 자신도 지금 그 결과에 깜짝 놀라 분노하고 있다는 태도를 보이며 발뺌을 했다. - P288

오블론스키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 사람들은 모스크바의 인텔리겐치아를 대표하는 양대 산맥이었다. 두 사람은 성품으로 보나 지성으로 보나 존경할 만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서로를 존중했지만, 도저히 어쩔 수 없을 정도로 거의 모든 점에서 서로 의견이 달랐다. 그것은 두 사람이 서로 대립되는 유파에 속해 있어서가 아니라, 같은 진영에 속해 있으면서도(반대파들은 그들을 하나로 혼동하곤 했다.) 한 진영 안에서 저마다 나름의 미묘한 차이를 지녔기 때문이었다. 반(半) 추상적인 문제에 대한 의견의 차이처럼 일치시키기 힘든 것도 없는 만큼, 그들은 한 번도 의견의 일치를 보인 적이 없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화내지 않고 그저 상대방의 바로잡을 수 없는 오해를 비웃어 주는 데 익숙해져 있었다. - P308

"여기." 그는 이렇게 말하며 머리글자를 썼다. 당, 그, 없, 내, 대, 그, 영, 그, 거, 뜻, 아, 그, 그, 뜻. 이 글자들은 이런 뜻이었다. ‘당신이 그럴 수 없다고 내게 대답했을 때, 그것은 영원히 그럴 거라는 뜻이었습니까, 아니면 그때만 그렇다는 뜻이었습니까?’ - P342

그는 그 후로 그처럼 강렬하게 그것을 느낀 적은 없지만, 그 첫 번째 싸움에서 오랫동안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자신을 정당화하고 그녀에게 그녀의 잘못을 입증해 보이고 싶은 것이 그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죄를 입증하는 것은 그녀를 더욱 자극하고 고통의 원인인 불화를 더욱 심솨시키는 것을 뜻했다. 다만 습관적인 감정이 그로 하여금 잘못을 자신에게서 그녀에게로 떠넘기도록 충동질했다. 보다 강력한 또 다른 감정은 불화가 커지기 전에 빨리, 가능한 한 빨리 그것을 진정시키도록 그를 이끌었다. 그런 부당한 비난을 받고도 가만히 있는 것은 괴로운 일이었다. 그러나 자신을 정당화하느라 그녀에게 상처를 주는 것은 더욱더 못할 짓이었다. 반쯤 잠든 상태에서 통증으로 괴로워하는 사람처럼 그는 자신에게서 아픈 부분을 도려내 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냉정을 되찾은 그는 아픈 부분이 그 자신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그저 상처가 아픔을 견디도록 애써 돕는 수밖에 없었다. - P517

그가 그녀에게 불만을 느낀 까닭은, 그녀가 필요한 경우에 스스로 그르 자유롭게 놓아주지 못한다는 점이었다.(얼마 전만 해도 그녀의 사랑을 받는 행복을 감히 믿지 못하던 그가 이제는 그녀가 자기를 지나치게 사랑한다는 이유로 스스로를 불행하다고 느끼다니, 얼마나 이상한 일인가!) 그리고 그 줏대 없는 자신도 불만스러웠다. - P530

그는 아홉 살의 어린아이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영혼을 잘 알고 있었고, 그것은 그에게 귀중한 것이었다. 그는 눈꺼풀이 눈동자를 보호하듯 그것을 지켰다. 그리고 사랑의 열쇠가 없는 사람은 그 누구도 자신의 영혼 속에 들여놓지 않았다. 그의 교육자들은 그가 배우고 싶어 하지 않는다고 불평했지만, 그의 영혼은 인식에 대한 열망으로 넘쳤다. 그래서 그는 교사가 아니라 카피토니치에게서, 보모에게서, 나젠카에게서, 바실리 루키치에게 배웠다. 아버지와 교사가 자신들의 물레방아 바퀴를 돌리기 위해 기대하던 물은 이미 오래전에 새어 나가 다른 곳에서 일하고 있었던 것이다. - P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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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린산책 2020-01-14 09: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2권이 좋았어요. 1권은 매력없는 브론스키에 빠지는 안나를 납득하느라 방황했구요 ㅎ 주변 머리빠진 동기 선배가 많아 브론스키도 이런 사랑을 했다 힘내라 하며 독려했습니다.

송도둘리 2020-01-14 10:14   좋아요 0 | URL
탈모를 넘어서는 엄청난 매력이 있었던게 아닐까...저도 어렵게 공감했습니다. ㅎㅎ 1권은 속도감과 몰입감에 2권은 인물들의 심리묘사에 재밌게 읽었네요. 3권이 기다려져요..!

뒷북소녀 2020-01-14 11: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2권부터 정말 빠르게 읽었던 기억이 나요...
 
나는 매주 시체를 보러 간다 - 서울대학교 최고의 ‘죽음’ 강의 서가명강 시리즈 1
유성호 지음 / 21세기북스 / 2019년 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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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만 보면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도 미처 밝히지 못한 살인사건의 뒷이야기를 다루고 있을 것 같지만, 아니었다. 제목은 섹시했지만, 내용은 오히려 차분하다. ‘죽음과 관련된 다양한 주제를 담고 있는 입문서에 가깝다.

 

   법의학, 죽음의 정의, 자살, 안락사, 영생의 가능성, 죽음의 준비를 200여 쪽 되는 책에 얼마나 충실히 담을 수 있을까? 이 책에서는 이 모든 주제를 조금씩 다 다루고 있지만 말 그대로 조금씩이기 때문에 감질이 난달지,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단언컨대, 서울대학교라는 이름에 걸맞는 최고의 강의였다는 표지의 평가는 이 책에 대한 평가가 아니라 실제 강의에 대한 평가일 것 같다. 1학기 강의의 커리큘럼으로는 충분할 텐데, 범위가 너무 넓어서 강의의 깊이까지 담기에는 집중도가 떨어졌다.

 

  그래도 충분히 유익했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죽음을 기억하라)’라는 경구처럼 우리의 삶과 전혀 동떨어진 것 같아도, 오늘 아니면 내일이라도 갑자기 대면할 수 있는 것이 죽음이다. 이 책을 읽어서일까, 얼마 전 출근길에 갑자기 유언장을 미리 써볼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 같으면 청승맞다 생각하고 그냥 지나쳤을 텐데, 진지하게 고민하게 된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나 유언장을 작성하는 것이 삶의 끝에 어울리는 일 같지만, 오히려 삶을 새롭게 시작하고 싶은 새해에 해야 하는 일 중에 하나가 아닐까 하고.

 

국내 통계에 따르면 우리나라에서는 매년 28만 여명이 사망하는데, 실제로 타살은 500여 명 정도, 즉 10만 명당 1명이 안 된다. 2017년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10만 명당 0.8명이며, 흔히 10만 명당 2명 정도로 나오는 통계는 살인미수까지 포함된 경우다. 반면에 자살은 10만 명당 24명이 넘는다. 타살의 30배에 달하는 수치다. - P26

그렇게 문국진 교수는 우리나라에서 아무도 하지 않는 외로운 법의학의 길을 가게 된다. 그러던 중 너무 힘들어 다시 장기려 박사를 찾아가 "선생님 말씀이 맞습니다. 더 이상은 법의학을 못하겠습니다. 지금이라도 외과에 받아 주십시오"라고 하자, 장기려 박사는 문국진 교수를 뚫어져라 보더니 도리어 "못된 놈. 의학이란 건 쉬운 데가 없어. 네가 생각했던 대로 안 된다고 다른 걸 하면 또 똑같을 게다. 3년 넘게 쏟아부은 네 노력을, 네 정열을 버리지 마라. 돌아가서 한 우물을 파라"라고 질책했다고 한다. 이에 다시 문국진 교수는 스스로 배움의 길을 찾아 미국으로 가 법의학을 공부함으로써 우리나라 1세대 법의학자로 등극하게 된다. - P39

이는 우리나라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정신건강의학과 안용민 교수가 실제 자살 시도자를 진료하면서 들었다는 이야기와 이를 연구한 내용들과 놀랍게도 일치한다. 그들은 모두 말한다. 죽음에 대해서 오랫동안 생각해왔고, 자기가 죽으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이라 생각해서 실제로 실행했는데, 막상 죽으려는 순간에는 살고 싶었다고 말이다. 그 순간에는 모두 다 자기 판단을 잘못된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 P175

2010년 기준으로 자살자 중 80대는 인구 10만 명당 123.3명, 70대는 83.5명, 60대는 52.7명이다. 우리는 보통 자살 하면 치열한 입시를 견디지 못한 청소년 자살을 많이 생각하는데, 사실상 청소년 자살률은 입시 제도가 잘 갖춰진 핀란드보다 적다. - P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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