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 제로 편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개정판)
채사장 지음 / 웨일북 / 2019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책의 이름에 완벽하게 부합하는 책이다. 명실상부라는 말은 이럴 때 쓰나 보다. 우주의 탄생부터 칸트의 관념론까지, 과학과 철학사 전반을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준다. 그림, 도표, 중간정리가 적재적소에 있어 족집게 강사의 강의처럼 유익했다. 특히, <길가메시 서사시><베다>는 쉽게 접하기 어려운 책들이라 새로운 정보에 신이 나서 읽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 책은 우주와 내가 하나라는 일원론을 말하고 있다. 그런데 이 진리를 깨닫게 되면 내 삶은 얼마나 달라지는 걸까? 사실 금방 와닿지 않는다. 괜한 노력은 아닌가 싶기도 하고. 시간이 필요한 일일 것이다. 주어진 의무를 성실히 행하면서, 다만 그 결과는 집착하지 않으며, 조용히 내면을 바라보고, 삶의 변화를 차분히 지켜봐야겠다.


* 우리는 이제 충분히 이해하게 되었다. 나의 세계 바깥은 내가 상상하는 세계가 아니다. 단단하고 안정적이며 총천연색으로 빛나는 이 아름다운 눈앞의 세계는 세계의 실체가 아니라 나의 의식 능력이 만들어낸 내 의식 안의 세계다. 그러므로 나의 세계는 내가 눈뜬 것과 동시에 생성되어 내가 눈 감는 동시에 소멸한다. 나와 세계는 분리되지 않는다. 나는 내 안을 보는 자다. 우파니샤드의 범아일여, 노자의 도와 덕, 불교의 일체유심조, 칸트의 관념론, 인류의 오랜 역사 속에서 탄생한 위대한 스승들은 궁극에서 같은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_ 470




말하자면, 우리 우주의 상수 값들은 그저 우연이라고 말하기에는 너무나 세밀하게 조율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를 미세 조정 문제라고 한다. 이 거대한 우주는 마치 인간이 탄생할 수 있도록 미세하게 조정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 P79

자연이 종의 진화 방향을 선택했다는 표현은 오해의 소지가 있다. 실제로 어떤 사람들은 자연의 손을 빌려 신이 진화에 손을 댄다거나, 혹은 자연이 뛰어난 존재의 탄생을 궁극적인 목표로 삼고 종을 발전시킨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인공선택과 자연선택의 가장 중요한 차이점은 목적의 유무다. 인간은 이익에 대한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생물의 번식에 개입하지만, 자연선택의 주체로서의 자연은 어떠한 목적도 갖지 않는다. 자연은 그 자체로 펼쳐진 환경일 뿐이다. 진화는 목적 없이 이루어진다. - P141

내가 사용하는 신이라는 단어의 개념은 나의 내면의 크기와 형태를 그대로 반영한다. 내가 기독교인이라면 내가 사용하는 신이라는 단어는 기독교의 신일 것이고, 내가 힌두교인이라면 내가 사용하는 신이라는 단어는 힌두교의 신일 것이다. 내가 뿌리 깊은 자유주의자라면 나의 신도 자유주의자일 것이며, 내가 사회주의자라면 나의 신도 사회주의자일 것이다. 내가 절대주의자라면 나의 신도 그러할 것이고, 내가 상대주의자라면 나의 신도 그러할 것이며, 내가 작은 사람이라면 나의 신도, 내가 큰 사람이라면 나의 신도 그러할 것이다. 사실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누군가 신을 말할 때, 그 신은 발화자의 내면을 반영한다. 신은 각자의 마음 안에 산다. - P191

"아르주나여. 그대는 두려움 없이 행동해야 한다. 그리고 그대는 그 행위에 대한 보상과 영광과 성공에 대한 그 어떤 바람 없이 행동해야 한다. 올바른 행동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어떠한 기대, 어떠한 성공을 위한 바람조차도 없는 것이다." 이것이 크리슈나가 말하는, 인간이 신으로 향하는 길이다. 겸허히 의무를 행하고, 결과를 기대하지 말라. - P229

우리는 너무나도 중요한 순간에 갑자기 의지를 상실하고 도망치고 싶을 때가 있다. 부모로서의 의무, 자녀로서의 의무, 학생으로서의 의무, 직장인으로서의 의무, 시민으로서의 의무 등. 우리가 그것을 걱정하고 두려워하며 이것이 도대체 무슨 소용이냐고 주저할 때, 크리슈나는 우리에게 지혜롭게 말해주는 것이다. 네가 준비해왔던 바로 그 주어진 의무를 성실히 행하라. 다만 그것의 결과에 집착하지 말라. 그럴 때 너의 마음은 평온해질 것이고, 자유로워질 것이며, 네 안의 신에게 다가가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가바드 기타>가 오늘날까지 많은 이의 사랑을 받아온 이유다. - P231

우리는 이제 충분히 이해하게 되었다. 나의 세계 바깥은 내가 상상하는 세계가 아니다. 단단하고 안정적이며 총천연색으로 빛나는 이 아름다운 눈앞의 세계는 세계의 실체가 아니라 나의 의식 능력이 만들어낸 내 의식 안의 세계다. 그러므로 나의 세계는 내가 눈뜬 것과 동시에 생성되어 내가 눈 감는 동시에 소멸한다. 나와 세계는 분리되지 않는다. 나는 내 안을 보는 자다. 우파니샤드의 범아일여, 노자의 도와 덕, 불교의 일체유심조, 칸트의 관념론, 인류의 오랜 역사 속에서 탄생한 위대한 스승들은 궁극에서 같은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 P470

첫째, 세상의 목소리를 의심해야 한다. 가족, 학교, 사회, 국가, 종교, 미디어가 모두 당신을 위한 것이라며 당신을 주저앉히려 할 때, 당당히 ‘아니요’라고 말하고 그것에 마음 빼앗기지 말아야 한다. 둘째, 시간을 만들어야 한다. 당신의 하루 중에서 버려지고 흩어져 있는 시간을 모아 남는 시간을 만들어야 한다. TV를 끄고, SNS를 닫고, 당신이 당신의 방을 청소하듯 당신의 모든 시간을 분주하게 만드는 떠들썩한 목소리를 가라앉히고 당신의 시간을 만들어야 한다. 셋째, 이제 남는 시간을 이용해 내면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 눈과 귀를 닫고, 호흡을 가다듬고, 평온히 내면에 머물며, 끝없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잡다한 생각이 잠잠해질 때까지 여유롭게 기다려야 한다. 넷째, 마음이 가라앉았다면, 깊은 정적 속에서 자기 자신과도 대화하지 않는 침묵의 순간을 경험해야 한다. 그 속에서 무언가를 얻으려고 하지 말고, 불안해하지도 말고, 편안하게 앉아 있기만 하면 된다. - P551

다섯째, 많은 날이 지나고 충분한 시간이 흘러 마음을 가라앉히는 데 익숙해졌다면, 그것이 당신의 즐거움이 되었다면, 이제는 현실로 나아가야 한다.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의 생각을 경청하고, 말을 줄이고, 그 안에서 배우고, 너그러워져야 한다. 여섯째, 계획을 세워야 한다. 몸도 마음도 평온한 어느 날에, 책상 앞에 앉아 자신의 삶이 다하게 될 날을 헤아려보고 남은 삶 전체의 거시적인 계획을 세워야 한다. 고대의 인도인처럼, 삶의 시간 중 언제 자아를 찾는 시간을 가질 것인지, 언제 내면을 향한 여행을 시작할 것인지, 팽개쳐 두었던 나의 삶을 다시 펼치고 먼지를 떨어내고 다림질해야 한다. 일곱째, 천천히 나아가야 한다. 당신이 계획한 깨달음을 향해 열린 길을 따라 항해해야 한다. 곁의 사랑하는 이들의 손을 잡고,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며 진중하게 나아가야 한다. 그렇게 마지막에 이르렀을 때, 비로소 알게 될 것이다. 세계가 나의 마음이라는 말의 실제 의미를. - P55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배움의 발견 - 나의 특별한 가족, 교육, 그리고 자유의 이야기
타라 웨스트오버 지음, 김희정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배움의 발견은 타라 웨스트오버의 자서전이다. 등장하는 사건들이저자의 비의도적인 왜곡이 어느 정도 있음을 고려하더라도모두 사실이라는 이야기다. 나는 이 책이 소설이었으면 했다. 정말 괴로웠다. 읽는 내내 아버지 진 웨스트오버에 대한 분노와 어머니 페이에 대한 실망, 오빠 숀에 대한 혐오가 일었다. 하지만 우리가 늘 실수하는 것 중 하나는 모든 사건을 개인에 대한 혐오로 치환하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세상에는 수없이 많은 ’, ‘페이’, ‘이 있다. 그 이름은 박 아무개일 수도 있고, ‘응우옌일 수도 있다. 지은이의 경험이 극적이긴 하나, 종교와 가족이라는 이름의 압제에서 벗어나려는 이들은 많았고, 앞으로도 계속 있을 것이다.

 

   타라의 아버지 은 모르몬교 신자인데, 괴팍한 원리주의자이다. 성경을 글자 그대로 해석하기를 즐기며, 종말이 가까이 왔다는 것을 믿고 있고, 학교나 병원 등 국가 제도를 불신한다. 그는 국가가 자신을 개종시키려 할지도 모른다는 피해망상에 빠져 아이다호주의 산골에 자신만의 성채를 만들었다. 그가 주력하는 일은 종말을 대비해 복숭아 통조림이나 석유 등 전략물자를 비축하는 일이다. 정말 의아한 일이다. 만약, 그날이 와서 휴거하게 된다면 하늘로 올라갈 텐데, 왜 그렇게 땅의 물건에 집착하는 것인지. 그의 광신은 자신과 가족을 사회로부터 격리하고, 구성원 모두의 몸과 마음을 지치게 할 뿐이다. 과연 종교는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 걸까.

 

   요새 코로나19’ 사태를 겪으며 종교의 해악을 새삼 느낀다. 온 나라가 사회적 거리 두기를 통해 이 난관을 헤쳐나가려 하는 시점에서도 일부 교회에서는 예배와 소규모 그룹 활동을 통해 지역사회 감염을 촉발하고 있다. 애초의 신천지 신도들의 비밀스러운 집회에서 폭발적으로 늘어난 확진자는 줄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37일 자정 기준으로 종교 관련된 확진자 수는 6,593명 중 4,026명으로 61%에 이른다. 확진자들이 감염경로를 밝히기를 꺼리거나, 아직 조사 중인 경우를 포함하면 이 비율은 더 커졌으면 커졌지 작아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은 전쟁과 환난 속에서도 예배를 게을리할 수 없다고 하겠지만, 과연 신이 있다면 자신의 신도들이 아프고 병들기를 원할 것인지 의문이다. 자식이 아프기를 바라거나 아픔을 통해서라도 성장하기를 원하는 부모가 없듯 말이다. 이 예배는 일부 종교인들의 헌금에 대한 욕심이거나, 권위를 지키기 위한 행동일 뿐이라고 말한다면, 신성모독인 걸까.

 

   종교가 삶에 대한 폭압으로 작용할 때 우리는 경계해야 한다. 나의 행복과 사회의 성숙을 바라지 않고, 그저 묻지마식의 복종과 헌신을 원하는 신이 있다면 그 권좌에서 끌어내려야 한다. 그런 신의 자식이 되는 것을 단연코 거부해야 한다. 그 거부를 통해 저주를 받더라도, 그 신에게 헌납하는 내 일생이 어쩌면 더 잔혹한 저주일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 타라의 아버지를 보더라도 말이다.

 

   한편으로는, 가족이 다른 사람들보다 우리를 얼마나 괴롭힐 수 있는지 이 책은 보여준다. 가족이라는 이유로 우리는 더 심하게 말하고, 더 아무렇지도 않게 대한다. 그리고 그런 행동들은 인격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타라의 아버지는 위험한 일들에 아들과 딸을 밀어 넣고, 자식들이 절단이나 화상 등 심각한 상처를 입어도 병원에 보내지 않는다. 자식들을 사랑으로 대하지 않고, 도구로 여기는 듯하다. 학교나 병원에 보내지 않고, 어렵게 성장하려는 자식들을 기어코 다시 자신의 위압 아래 가두려는 것을 볼 때 너무 끔찍했다.

 

* <사랑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큰 영향력을 내게 미칠 수 있도록 허락하는지 생각해 보면 참 이상하다>라고 나는 일기에 썼다. 그러나 숀오빠는 내가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큰 영향력을 내게 가지고 있었다. 그는 내게 나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규정해 줬다. 그보다 더 큰 영향력은 존재할 수가 없었다. _ 315쪽

 

   사실 사람은 어렸을 때 가족의 안락함이 전부라고 생각하며 살아가지만, 사춘기를 거쳐 반항하고, 자신만의 세계를 갖추게 된다. 기존의 질서를 의심하고 반항하지 않으면 성장하지 못한다. 나는 올해 아빠가 된다. 내가 아이에게 어떤 아빠가 될지, 걱정과 불안이 앞선다. 이 책을 읽고 나니 더욱더 그렇다. 자식을 방임하지도 지나치게 억압하지도 않는 아버지가 되고 싶다. 언제든 뛰어넘을 수 있고, 돌아오면 안락한 낮은 울타리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는 나를 뛰어넘어야 할 것이다. 내 세계에 아이를 묶어두고 싶지 않다.

 

* 오빠(타일러)가 일어서며 말했다. “집 바깥의 세상은 넓어, 타라. 아버지가 자기 눈으로 보는 세상을 네 귀에 대고 속삭이는 것을 더 이상 듣지 않기 시작하면 세상이 완전히 달라 보일 거야.”_196쪽

   결국 종교와 가족의 압제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배움이다. 부모와 종교가 말하는 품 안의 질서가 전부가 아니라는 깨달음, 더 많은 것을 배우고 느끼는 순간 사람은 더 나은 사람이 된다. 사실 이것은 모든 종류의 성장과 관련된 이야기이다. 작은 질서만이 전부라고 생각하고 배우기를 포기하는 순간 우리는 멈춘다. 이것은 사람이나 사회나 마찬가지이다. 기존의 방식이 전부라고 생각할 때, 성장은 멈춘다. 우리 사회가 정체되어있다고 느끼고, 언론과 종교가 나서 혐오와 불안을 부채질해도, 우리는 더 나은 세상에는 무엇이 있는지 탐색하고 배워야 한다.

 

   타라의 선택은 그런 면에서 너무나 찬란했다. 우리도 배워야 한다. 우리의 삶의 성숙을 위해서, 사회의 발전을 위해서.

 

 

과거가 아름다운 것은 우리가 경험을 하는 순간에 생기는 감정은 잘 감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 감정은 시간이 지나면서 확장된다. 그런 이유에서 우리는 현재가 아니라 오직 과거에 대해서만 완성된 감정을 지니게 된다. (버지니아 울프) - P7

"어떻게 된 거냐?" 아버지가 내 옆에 무릎을 꿇고 앉으며 물었다. "떨어졌어요." 내가 숨 가쁜 목소리로 말했다. 숨을 쉴 수가 없었고, 등이 엄청나게 욱신거렸다. 몸이 두 동강 난 느낌이었다. "어쩌다 그런 거니?" 아버지가 말했다. 연민에 찬 목소리였지만 실망감이 묻어 있었다. 나는 바보가 된 느낌이었다. <거뜬히 해낼 수 있어야 했어.> 나는 생각했다. <간단한 일이었잖아.> - P112

그 순간 나는 나 스스로를 부서뜨릴 수 없는 돌과 같은 존재로 보게 됐다. 그런 다음에야 나는 나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고 그 경험이 내게 영향을 주지 못했다고, 오빠는 내게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고 말할 수 있었다. 아무것도 내게 영향을 줄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그 생각이 얼마나 소름끼치도록 맞았는지 그때만 해도 이해하지 못했다. 어떻게 나 자신을 내 안에서 비워 낼 수 있었는지를. 그 밤의 경험이 끼친 영향에 대해 집착적으로 생각하고 또 생각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가장 중요한 진실을 잘못 이해했던 것이다. 그 경험이 나에게 영향을 주지 못한다는 것, 그 자체가 그 경험의 영향이었다는 사실 말이다. - P182

오빠(타일러)가 일어서며 말했다. "집 바깥의 세상은 넓어, 타라. 아버지가 자기 눈으로 보는 세상을 네 귀에 대고 속삭이는 것을 더 이상 듣지 않기 시작하면 세상이 완전히 달라 보일 거야." - P196

엄마의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엄마의 시선에 실린 힘은 몇 년만에 느껴 보는 것이었다. 정신이 아뜩해졌다. "엄마가 낳은 모든 자식 중에서," 엄마가 말했다. "제일 먼저 집의 굴레를 벗어던지고 떠날 아이는 너라고 생각했었다. 타일러가 그럴 줄은 예상하지 못해서 깜짝 놀랐었지. 하지만 너는 아니야. 여기 있지마. 가거라. 아무것도 네가 떠나는 것을 방해하도록 두지 마라." 나는 아버지가 계단을 올라오는 발자국 소리를 들었다. 엄마가 한숨을 쉬었고, 시선이 흔들렸다. 마치 최면 상태에서 빠져나오는 듯했다. 아버지가 부엌 식탁에 앉았고, 엄마는 일어서서 아버지 아침을 차리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리버럴한 교수들에 대해 설교를 하기 시작했고, 엄마는 팬케이크 반죽을 만들면서 때때로 아버지의 의견에 동의한다는 의미로 중얼중얼 장단을 맞췄다. - P216

나는 항상 아버지가 믿는 신은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릴 적부터 나는 우리 가족이 읍내 다른 모든 사람들과 같은 교회에 가긴 하지만 종교는 같지 않다는 것을 의식했다. 다른 사람들은 겸양을 <믿었지만> 우리는 겸양을 실천했다. 다른 사람들은 주님의 치유 능력을 <믿었지만> 우리는 주님의 손에 치유를 맡겼다. 다른 사람들은 주님의 재림에 대비해야 한다는 것을 <믿었지만> 우리는 실제로 준비가 되어 있었다. 내가 기억할 수 있는 한 나는 우리 가족만이 진정한 모르몬교도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슨 이유에서인지 이 대학, 이 교회 안에서 처음으로 나는 그 간극의 거대함을 실감했다. 나는 그제야 이해가 됐다. 우리 가족과 함께하지 않으면 이방인들과 함께하는 것이었다. 이쪽 아니면 저쪽이었다. 그 사이에는 발을 걸칠 자리가 전혀 없었다. - P254

그렇게 아버지와 숀 오빠는 동지가 됐다. 두 사람이 의견일치를 본 것은 단 한가지였다. 대학 맛을 본 내가 주제넘은 아이가 됐고, 그런 나를 치료할 방법은 어떻게든 과거를 상기시켜 주는 것뿐이라는 사실 말이다. 그렇게 해서 이전의 내 모습에 다시 닻을 내리고 거기 고정시켜야 한다고 두 사람은 동의한 듯했다. - P280

나는 나 자신을 돌이켜 보기 시작했다. 내가 알아들을 수 있게 말을 하지 않은 건 아닐까? 어떤 말을 속삭이고 어떤 말을 외쳤던가? 결국 내가 다른 방법으로 의사 표현을 했다면, 더 차분히 말을 했다면 오빠(숀)가 멈췄을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나는 그것을 스스로 믿을 때까지 일기장에 그렇게 써내려갔다. 별로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나도 그 사실을 믿고 싶었기 때문이다. 내 잘못이라는 결론은 마음을 편하게 해줬다. 그렇게 믿으면 상황을 내가 통제할 수 있다는 의미였기 때문이다. - P309

<사랑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큰 영향력을 내게 미칠 수 있도록 허락하는지 생각해 보면 참 이상하다>라고 나는 일기에 썼다. 그러나 숀오빠는 내가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큰 영향력을 내게 가지고 있었다. 그는 내게 나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규정해 줬다. 그보다 더 큰 영향력은 존재할 수가 없었다. - P315

조울증이라는 용어를 처음 들은 것은 바로 그런 상황에서였다. 심리학 개론 수업 중에 교수가 영사기 스크린에 나열된 조울증 증상을 큰 소리로 하나하나 읽어 내려갔다. 우울증, 조증, 편집증, 희열, 과대망상, 피해망상, 나는 절박한 마음으로 교수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귀를 기울였다. <우리 아버지다.> 나는 공책에 그렇게 적었다. <아버지를 묘사하고 있다.> - P327

내가 원한 것은 도덕적인 조언이었다. 아내와 어머니로서의 내 소명을 다하라는 신의 부름과 내 마음속에서 나를 부르는 다른 목소리 사이에서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지에 대한 조언을 원했었다. 그러나 케리 박사는 그런 내 질문은 옆으로 밀어놓고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먼저 학생의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를 가늠해 본 후, 학생이 어떤 사람인지 결정하세요." - P361

"바람을 받으며 서 있을 수 있는 것은 바람을 받으며 서 있는 것에 관해 생각하지 않아서예요." 내가 말했다. "바람은 그냥 바람일 뿐이에요. 지상에서 이 정도 바람을 맞고 쓰러지지 않는다면 공중에서도 이 정도 바람에 쓰러지지 않아요. 아무런 차이가 없어요. 유일한 차이는 머릿속에 있을 뿐이지요." - P371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습관을 버려야 해요." 케리 박사가 목소리를 높이며 말했다. "학생은 가짜 사금파리가 아니에요. 그런 가짜는 특별한 빛을 비출 때만 빛이 나지요. 학생이 어떤 사람이 되든, 자신을 어떤 사람으로 만들어 나가든, 그것은 학생의 본 모습이에요. 늘 자기 안에 존재했던 본질적인 모습. 케임브리지여서 그렇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학생 안에 가지고 있는 거예요. 학생은 순금이에요. 브리검 영으로 돌아가든, 산에 있는 집으로 돌아가든 그 본질은 변하지 않을 거예요. 다른 사람이 학생을 보는 눈은 변할지 모르고, 학생이 자신을 보는 눈도 변할지 모르지만. 어차피 순금도 빛에 따라서는 덜 빛나 보일 때도 있으니까. 하지만 빛이 덜 난다면 그게 허상인 거예요. 지금까지 항상 그랬어요." - P379

나는 의사의 모습과 그의 부패한 현대 의학을 떠올리고 몸서리를 쳤다. 그리고 그 순간 그 전까지는 깨닫지 못했던 사실을 이해했다. 내가 아버지의 세상을 거부하겠다고 결심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세상이 아닌 바깥세상에서 살 용기를 아직 찾지 못했다는 사실 말이다. - P401

그날 밤 나는 오빠(리처드)를 자세히 관찰했다. 내가 보기에 오빠는 두 세상 모두에 살면서 모든 주의와 신념에 충실하려고 애쓰는 듯했다. 아버지가 의사들이 사탄의 하수인들이라고 욕을 하자, 리처드 오빠는 카미 언니 쪽을 보면서 작게 웃었다. 마치 아버지가 농담이라도 하는 것처럼. 그러나 아버지의 눈썹이 추켜올라가자 오빠의 얼굴은 바로 진지한 사색과 동의의 표정으로 바뀌었다. 오빠는 아버지의 아들이어야 할지, 아내 카미의 남편이어야 할지 결론을 내리지 못한 채, 여러 차원을 왔다 갔다 하면서 끊임없이 변신하고 있었다. - P406

"부엌으로 너를 돌아오게 하기 위해 먼저 케임브리지로 보냈어야 했다는 걸 누가 짐작이라도 했겠냐? 부엌이야말로 네가 있을 곳인데 말이지." 아버지는 그렇게 말했다. - P407

<너는 내 딸인데, 내가 너를 보호했어야 했는데.> 그 말을 읽는 순간 나는 한평생을 다시 살았다. 그것은 실제 내가 살아 온 것과는 완전히 다른 삶이었다. 나는 다른 어린 시절을 기억하는 다른 사람이 됐다. 나는 마술 같은 그 말의 힘을 그때도 이해하지 못했고, 지금도 이해하지 못한다. 내가 아는 것은 이것뿐이다. 엄마가 자신이 되고 싶었던 엄마가 내게 되어 주지 못했다는 말을 한 순간, 엄마는 처음으로 자신이 되고 싶었던 엄마가 되었다. - P422

내가 대리석으로 지어진 콘세르바토리에서 공부하지 않았고, 아버지가 외교관이 아니어서 수치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아버지가 반쯤 정신이 나간 사람이고, 엄마가 그런 아버지에게 순종하는 사람이어서 수치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내 수치심은 철컥철컥 돌아가는 전단기의 칼날로부터 나를 밀어내는 대신, 오히려 그쪽으로 나를 밀어 넣는 아버지를 가졌다는 사실에서 나온 것이었다. 내 수치심은 내가 바닥에 엎드려서 목을 눌리고 있는데도 바로 옆방에서 엄마가 눈과 귀를 막고, 그순간 내 엄마가 내 엄마가 되는 것을 포기했다는 사실에서 나온 것이었다. - P424

과거는 영향을 끼칠 수 없는, 대단치 않은 유령에 불과했다. 무게를 지닌 것은 미래뿐이었다. - P425

부모님이 넘어갈 정도로 새로 태어나는 연기를 잘 해내면, 작년에 내가 한 모든 말과 행동을 내 것이 아닌 걸로 만들 수 있었다. 모든 말과 행동을 취소하고 악마의 탓으로 돌린 다음 새 출발을 하는 것이다. 새로 정화된 신자로서 얼마나 좋은 위상을 차지할 것인지 상상해 봤다. 얼마나 사랑을 받을 것인지도. 내 기억을 부모님의 기억으로 대체하기만 하면 나도 다시 가족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 P464

아버지와 나는 함께 사원을 바라봤다. 아버지는 신을 봤고, 나는 대리석을 봤다. 우리는 서로 바라봤다. 아버지는 저주받은 여자를 봤고, 나는 제정신이 아닌 노인, 글자 그대로 자신의 믿음 때문에 망가진 노인을 봤다. 그리고 그 노인은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득의양양했다. 나는 산초 판사의 말을 기억했다. <모험을 떠나는 기사는 패배를 한 후 자신이 황제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 P465

그러나 나는 같은 선택을 할 수 없다는 것을 그 순간 알고 있었다. 내가 그때까지 해온 모든 노력, 몇 년 동안 해온 모든 공부는 바로 이 특권을 사기 위한 것이었다. 아버지가 내게 준 것 이상의 진실을 보고 경험하고, 그 진실들을 사용해 내 정신을 구축할 수 있는 특권. 나는 수많은 생각과 수만은 역사와 수많은 시각들을 평가할 수 있는 능력이야말로 스스로 자신을 창조할 수 있는 능력의 핵심이라는 사실을 믿게 됐다. 지금 굴복한다는 것은 단순히 언쟁에 한번 지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녔다. 그것은 내 정신의 소유권을 잃는다는 의미였다. 이것이 내게 요구되는 대가였다. 이제 이해가 됐다. 아버지가 내게서 쫓고자 하는 것은 악마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었다. - P47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흔들리지 말고 마음 가는 대로 - Va' dove ti porta il cuore
수산나 타마로 지음, 최정화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8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좋았다는 평이 많은데, 나에게는 묘하게 몰입되지 않는 책이었다. 표현하기 어려운 거리감이 느껴졌다. 지금, 여기를 소중히 하고 차분히 마음 가는 대로 살아가라는 소중한 금언인데, 마음의 문을 열기 쉽지 않았다. 시간이 좀 더 흐른 뒤에, 다시 읽어본다면 다른 느낌일까?

 

 

사람들이 항상 저지르는 실수가 뭔지 아니? 삶이 변하지 않을 거라고, 일단 어떤 트랙에 들어서면 그 라인을 끝까지 따라갈 거라고 믿는 거란다. 하지만 운명은 때로 우리 자신보다 상상력이 풍부하지. 더 이상 도망갈 데가 없다고 생각될 때, 가장 깊이 절망했다고 느낄 때, 모든 것이 돌풍처럼 빠르게 변해보리거든. 모든 것이 뒤집히고, 우리 앞엔 새로운 삶이 펼쳐진단다. - P186

아이작 싱어의 아버지가 했다는 말이 생각났어. 그는 현대인들의 가장 나쁜 습관은 매일 신문을 읽는 거라고 했지. 아침은 정신이 가장 또렷하고 활짝 열려 있는 시간인데 그 좋은 시간에 전날 일어난 나쁜 일들을 머릿속으로 모조리 쏟아붓는다는 거야. 물론 그가 살던 시대엔 신문만 무시하면 자신을 보호할 수 있었겠지만, 지금은 아니지. 라디오와 텔레비전을 단 일 초만 켜두어도 온갖 나쁜 소식들이 몸속으로 파고드니까. - P191

내면의 자아와 마주치고 싶지 않을 때, 가장 손쉬운 일은 도피처를 찾는 거란다. 내 실수를 다른 사람의 실수라고 우기는 건 쉬운 일이야. 자기 실수를 인정하기 위해서는 아주 큰 용기가 필요하지. 이것만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야. 인생이 여행길과 같다면, 언제나 내내 오르막인 셈이지. - P242

육신이 있기 때문에 그림자도 생기게 되는 겁니다. 우린 개구리 같은 양서류하고 비슷하죠. 한쪽은 물속에 있으면서 다른 한쪽은 늘 육지를 그리워해요. 산다는 건 그저 이 사실을 알아가는 거죠. 그러면서 어두운 그림자가 빛을 다 가려버리지 않도록 투쟁하는 게 바로 삶이에요. 완벽한 사람들, 스스로 답을 가지고 있다는 사람들을 믿지 마세요. 당신 마음이 말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믿지 마세요. - P250

떡갈나무 아래 앉아 있을 땐 떡갈나무가 되고, 풀 위에 앉아 있을 땐 풀이 되고, 인간들 사이에 있을 땐 그 인간들 중 하나가 되도록 하세요. - P253

네 앞에 수많은 길들이 열려 있을 때, 그리고 어떤 길을 택해야 할지 모를 때, 그냥 아무길이나 들어서진 마. 내가 세상에 나오던 날 그랬듯이, 자신 있는 깊은 숨을 내쉬어 봐. 어떤 것에도 현혹당하지 말고, 조금만 더 기다리고 기다려 보렴. 네 마음이 하는 말에 가만히 귀를 기울여 봐. 그러다 네 마음이 말을 할 때, 그때 일어나서 마음 가는 대로 가거라. - P27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eBook] 걷는 사람, 하정우
하정우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하정우라는 배우에 대해 관심이 별로 없었는데, 생각보다 깊은 사람 같다. 비싼 운동장비를 갖춘 레저 스포츠가 아니라 두 다리로 걷는 것을 취미로 하는 것도 멋있고, 무엇보다 인생철학이 무척 매력 있다. 확실한 루틴을 가지고 있어서 작은 슬럼프나 루머에 쉽사리 쓰러질 것 같지 않다. 동어반복이 있기는 하나, 밑줄 긋고 싶은 부분이 많았다. 작년 한 해는 연예계에 유난히 사건·사고가 잦았는데, 많은 후배에게 그의 건강함이 귀감이 되었으면 좋겠다. (다만, 요새 하정우 관련 기사가 많던데 부디 사실이 아니길 바란다. 이 책에서 보여준 건강함과는 거리가 멀다. 휴식을 주는 도구로 프로포폴이 걷기 대신 쓰였다면, 이런 글은 사기이고 기만이다. 사실이 아니라는 가정하에 이 책을 읽었다.)


(밑줄긋기의 쪽수는 종이책이나 e-book의 사용자 동작 환경에 따라 다를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길 끝에 이르면 뭔가 대단한 것이 있을 거라 기대한다. 나 역시 그랬다. 그러나 농담처럼 시작된 국토대장정은 걷기에 대한 나의 생각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우리가 길 끝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은 그리 대단한 것들이 아니었다. 내 몸의 땀냄새, 가까이 있는 사람들의 꿉꿉한 체취, 왁자한 소리들, 먼지와 피로, 상처와 통증……오히려 조금은 피곤하고 지루하고 아픈 것들일지 모른다. 그러나 이 별것 아닌 순간과 기억들이 결국 우리를 만든다. - P29

고민이 내 머릿속에서 슬금슬금 기어나와서 어깨 위에 올라타고 나를 짓누르기 시작하면 나는 ‘아, 모르겠다, 일단 걷고 돌아와서 마저 고민하자’ 생각하면서 밖으로 나간다. - P35

나는 나의 기분에 지지 않는다. 나의 기분을 컨트롤 할 수 있다는 믿음, 나의 기분으로 인해 누군가를 힘들지 않게 하겠다는 다짐. 걷기는 내가 나 자신과 타인하게 하는 약속이다. - P37

걷기는 몸의 균형을 잡아준다. 하루 만 보씩 걸으며 식사량을 아주 조금만 조절해도 한 달만 지나면 살이 꽤 빠진다. 그뒤 식사 조절을 계속하면서 두 달째부터는 만 보에서 만오천 보로 슬쩍 늘려서 걸어본다. 그렇게까지 힘들게 식이요법을 한 것도 아니고 하루종일 운동에만 매달린 것도 아닌데, 체중감량에 가속도가 붙어 다이어트의 재미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 P50

지치고 피로한 자신을 그냥 내버려두는 것이 곧 휴식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방기’는 결과적으로 휴식을 취하는 것이 아니라 누적된 피로를 잠시 방에 풀어두었다가 그대로 짊어지고 나가는 꼴이 되는 경우가 많다. - P66

뭐든 꾸준히 하려면 그것이 ‘특별활동’이 아니라 습관이 되어야 한다. - P69

이것은 꼭 걷기에 관한 얘기만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살면서 유난히 힘든 날이 오면 우리는 갑자기 거창한 의미를 찾아내려 애쓰고, 그것을 발견하지 못하면 ‘의미 없다’, ‘사실 처음부터 다 잘못됐던 것이다’라고 반명한다. 이런 머나먼 여정에서 길을 잃었을 때는 최초의 선택과 결심을 등대 삼아 일단 계속 가보아야 하는데, 대뜸 멈춰버리는 것이다. - P86

일정한 곳에 출근하지 않는다는 건 그만큼 언제 일이 들어오고 불쑥 스케줄이 잡힐지 모르니 늘 몸을 만들어놓아야 한다는 뜻이다. 느슨하고 여유롭게 사는 보헤미안보다는 중요한 경기를 앞둔 스포츠 선수나 회사의 명운이 걸린 PT를 준비하는 직장인들과 더 닮아 있다. - P131

일탈도, 치기도 없는 약간은 재미없는 삶이라고 누군가는 말할지 몰라도, 나의 이런 하루가 나는 마음에 든다. 지금 여기서 동이 터올 때까지 매일 축배를 들기엔 아직 나는 갈 길이 한참 먼 사람이기 때문이다. - P132

몸에 익은 습관은 불필요한 생각의 단계를 줄여준다. 우리는 때로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들에 갇혀서 시간만 허비한 채 정작 어떤 일도 실행하지 못한다. 힘들 때 자신을 가둬놓는 것, 꼼짝하지 않고 자신이 만든 감옥의 수인이 되는 것, 이런 것도 다 습관이다. 스스로 키워놓은 절망과 함께 서서히 퇴화해가는 것이다. 하지만 걷기가 습관이 되면 굳이 고민하지 않고 결심하지 않아도 몸이 절로 움직인다. - P173

늪에 빠져들려 할 때는 변덕스러운 감정에 나를 맡겨둘 게 아니라 규칙적인 루틴을 정해놓고 내 몸과 일정을 거기에 맞추는 편이 좋다. 나에겐 일상의 루틴이 닻의 기능을 한다. 위기상황에서도 매일 꾸준히 지켜온 루틴을 반복하면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이 희미하게나마 보인다. - P180

루틴의 힘은 복잡한 생각이 머리를 잠식하거나 의지력이 약해질 때, 우선 행동하게 하는 데 있다. 내 삶에 결정적인 문제가 닥친 때일수록 생각의 덩치를 키우지 말고 멈출 줄 알아야 한다. 살다보면 그냥 놔둬야 풀리는 문제들이 있다. - P181

말에는 힘이 있다. 이는 혼잣말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듣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 같지만 결국 내 귀로 다시 들어온다. 세상에 아무도 듣지 않는 말은 없다. 내뱉어져 공중에 퍼지는 순간 그 말은 영향력을 발휘한다. - P204

독서와 걷기에는 묘한 공통점이 있다. 인생에 꼭 필요한 것이지만 ‘저는 그럴 시간 없는데요’라는 핑계를 대기 쉬운 분야라는 점이다. 하지만 잘 살펴보면 하루에 20쪽 정도 책 읽을 시간, 삼십 분 가량 걸을 시간은 누구에게나 있다. - P226

나는 내가 완전히 통제할 수 없는 위치나 상황에 대한 공포가 있는 것 같다. - P258

배우의 삶에 슬럼프는 꽤 자주 찾아온다. 슬럼프에 익숙해져야 한다. 여러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넘어지고 좌절하는 날들에 무너지지 말아야 한다. 한 살이라도 어릴 때 이러한 슬럼프를 많이 겪어보는 것은, 실패가 아니라 경험일지도 모른다. 나이를 먹을수록 이러한 슬럼프들은 나를 더 휘청거리게 하고, 다시 일어서는 데 더 오랜 시간을 소모하게 한다. 내가 아직 견디고 배울 힘이 남아 있을 때 찾아온 슬럼프는 실패가 아니라 나를 숙련시켜주는 선생님이다. - P303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위기와 절망 속에 있을 때 많은 이들이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나는 때로 내가 생각하는 최선의 노력이 최선이 아닐 수도 있다고 의심한다. 어쩌면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도 모른 채 힘든 시간을 그저 견디고만 있는 것을 노력이라 착각하진 않는지 가늠해본다. - P313

그 상태에 오래 머물면 어떤 사건이 혹은 어떤 사람이 나를 망가뜨리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 자신을 망가뜨리는 지경에 빠진다. 결국 그 늪에서 얼만큼 빨리 탈출하느냐, 언제 괜찮아지느냐, 과연 회복할 수 있느냐가 인생의 과제일 것이다. 나는 내가 어떤 상황에서든 지속하는 걷기, 직접 요리해서 밥 먹기 같은 일상의 소소한 행위가 나를 이 늪에서 건져내준다고 믿는다. - P32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eBook] 사기 인문학 : 3천 년 역사에서 찾은 사마천의 인간학 수업 - 3천 년 역사에서 찾은 사마천의 인간학 수업
한정주 지음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18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기는 마치 화수분 같아서 지혜를 뽑아내고 들춰내도 끝내 마르지 않는다. 또는, 그 사람이 보고자 하는 것만 비추는 선택적 거울과도 같아서 처세술을 보려고 하면 처세술을, 역사적 지식을 얻고자 하면 지식을, 인문학적 지혜를 보고자 하면 그것을 보여준다. 이 책은 그 모든 것을 적당히, 준수하게 엮었다. 사마천이 혹리열전이나 화식열전을 쓴 의미를 되짚어보거나, 항우와 여태후를 본기에 집어넣고 진섭을 세가에 올린 뜻을 유추한 것도 좋았다. 사기를 단편적으로 취하다 보면 놓치기 힘든 부분이기 때문이다. 비록 남의 나라 역사이긴 하나 사기는 언제고 곁에 두고 반복하여 읽고 싶은 책 중에 하나다. 이 책이 누군가에게 출발점이나 경유지가 될 수는 있어도 종착지가 될 수 없는 이유다.


(밑줄긋기의 쪽수는 종이책이나 e-book의 사용자 동작 환경에 따라 다를 수 있습니다.)

 

성공을 거둔 후에도 자기 통제력을 잃어버리지 않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지만, 그 영광을 오래 지키고 싶다면 성공하기 전보다 더 경계하고 신중해야만 합니다. - P97

아무리 뛰어난 사람도 다른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하면 천하를 움직일 수 없고, 세상을 변화시킬 수도 없으며, 조직 역시 성공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 P189

힘이 없는데 덕만 앞세우면 사람들은 겉으로는 존경하면서도 속으로는 나약하고 무능하다며 업신여기게 마련입니다. 반면 힘이 있으면서 덕이 없으면 겉으로는 두려워하면서도 속으로는 난폭하고 잔혹하다며 증오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목공처럼 힘이 있으면서도 덕까지 갖췄다면 어떻게 생각할까요? 겉으로는 두려워하지만 속마음으로는 존경하게 됩니다. 사마천은 바로 이러한 리더십이야말로 사람의 마음을 온전히 사로잡는 진정한 리더의 덕목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 P198

명성을 얻고 성과를 내고 싶은 리더들은 대개 이런저런 일을 벌이는 것만 좋아합니다. 하지만 이미 지쳐 있는 이들에게 무언가 새로운 일을 계속 시키면, 성과가 나기는커녕 구성원들이 고통만 겪게 됩니다. 따라서 훌륭한 리더는 상황 변화에 따라 자신이 다스리는 구성원들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명확한 판단을 통해 적절한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어야 합니다. - P214

가장 성공했을 때에도 늘 환경의 변화와 그에 따른 위기를 예측하고 능동적이고 유연하게 대처했습니다. 그래서 월나라 왕 구천이 패자가 되자 미련 없이 그를 떠났고, 남아 있던 문종처럼 토사구팽당하는 일을 면했습니다. 제나라의 제상이 됐을 때에도 주변에 적이 생기기 전에 그곳을 떠났고, 재물을 여러 번 모았을 때에도 번번이 주변과 나눠 원망을 사는 일을 피했습니다. 그 덕분에 법려는 큰 실패 없이 손대는 일마다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 P221

일찍이 제나라의 관중은 "창고가 가득 차야 예절을 알고 의식이 풍족해야 영화와 치욕을 안다"라고 말했습니다. 입으로만 인의와 도덕을 앞세우며 백성들이 하루하루 살아가는 비참한 현실을 외면하고 냉소하는 정치가들의 위선과 기만을, 사마천은 <화식열전>을 통해 비판했던 것입니다. - P232

"재산이 자신보다 열 배 많으면 상대방에게 몸을 낮추고, 자신보다 백 배 많으면 두려워하며 삼가고, 천 배 많으면 상대방의 일을 힘써 하고, 만 배 많으면 그의 하인이 된다"라고 했습니다. 심지어 사마천은 이것이 사물의 이치요, 세상이 돌아가는 원리라고 말합니다. - P233

한비자는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고 그를 설득할 때는 상대방의 겉모양과 속마음을 모두 파악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런 다음 "상대방이 자랑스러워하는 것은 은근하게 칭찬을 하고, 부끄럽게 여기는 것은 덮어주어야 한다"라고 말합니다. - P247

그가 유방이 겉으로 보여주는 총애를 무조건 믿지 않은 것은 제왕의 총애가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의심과 미움으로 뒤바뀔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의심이 있었기에 소하는 자신을 떠보려는 유방보다 앞서, 오히려 유방을 속일 수 있었습니다. - P26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