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이 묻는다 - 완전히 새로운 나라, 문재인이 답하다
문재인 지음, 문형렬 엮음 / 21세기북스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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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의 자질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시절이다. 대담집을 읽고 나니 문재인의 뜻이 높고, 고아함이 느껴진다. 정직하고 강인한 사람인 듯하다. 하지만 세상을 바꾸는 일은 의지만큼이나 전략이 필요하다. 과연 그가 잘 해낼 수 있을까 불안함도 든다. 부디 잘 헤쳐나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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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식주의자
한강 지음 / 창비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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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담하게 풀어내는 파괴력있는 이야기가 숨막힐 듯 흘러간다. 일상화된 폭력을 거부하는 영혜의 결벽에 가까운 순수성의 추구가 깊은 울림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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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식주의자
한강 지음 / 창비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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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 아버지가 몹시 미웠던 적이 있다. 나와 연결된 한 가족이라는 사실마저 거부하고 싶어서 앞으로 평생 아빠와 이야기하지 않겠다는 생각도 했었다. 물론 시간이 흐르면서 그런 생각을 하지 않게 됐지만, 아직도 직장에서 비슷한 생각들이 떠오를 때가 있다. 불의하다고 느껴지는 상사와 접촉을 끊을 수 없을지, 옳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일들과 나를 분리할 수 없을지와 같은. 영혜를 보고 나니 이런 경험들이 떠올랐다.


영혜는 어느 날 때문에 육식을 거부한다. 꿈은 어렸을 때의 기억에 연결되어 있다. 자신을 물었다는 이유로 심하게 학대 받은 뒤 고깃국이 된 개, 음식이 되어버린 강아지에 대한 애증과 충격, 그 고기를 아무렇지 않게 먹었던 자신에 대한 분노. 그 죄책감은 불현듯 육식에 대한 거부로 표현된다. 영혜에게 육식의 거부란 자신의 생존을 위해 다른 생명을 앗아야 하는 폭력성에 대한 배척이며, 이미 일상화된 폭력을 철저하게 밀어내는 행위이다. 결국 영혜의 결벽에 가까운 순수성의 추구는 아무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는 나무가 되기를 바라는 데까지 나아간다.


남편과 가족들은 아무도 그것이 어떤 인지 묻지 않는다. 영혜는 점점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해 야위어 가지만 남편은 그녀의 잠자리 거부에 불편을 느낄 뿐이다. 더 나아가 아버지는 영혜의 입을 억지로 벌려 고기를 먹이려고 까지 한다. 어쩌면 우리는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일상적인 폭력에 면죄부를 주고 있는 것이 아닐까. 서로를 이해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으면, 상대방의 아픔에 귀 기울이지 않으면 그 자체로 소리 없는 폭력이다. 이 일상적인 폭력속에서 영혜는 그저 미친 사람일 뿐이다.


가족을 벗어나도 세상은 너무나도 폭력적이고 잔인하다. 어제, 오늘 닭과 오리를 2,500만 마리나 살처분했다는 뉴스가 담담하게 보도된다. 2,500만이나 되는 생명에게 죽음처분했다는 기괴한 단어의 조합 속에서 어떠한 감정도 느낄 수 없다. 채널을 돌리면 고기를 몇 인분 씩 게걸스럽게 먹어대는 사람들이 나온다. 다시 채널을 돌려봐도 사적인 친분을 이용해 국정을 농단하고, 반대하는 사람을 모욕 주고 괴롭히는 사람들 이야기로 가득하다. 폭력에 대한 감각이 둔감해진 것은 아닐까. 작가는 폭력과 가장 거리가 멀 것 같은 예술조차도 욕망으로 가득차있음을 영혜의 형부를 통해 고발한다.


악은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고, 폭력도 가까운 곳에 있다. 사랑의 반대는 증오가 아니라 무관심이라는 말이 있듯이 악은 평범하고 일상적이다.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벌이는 일들에 이 도사리고 있다. 영혜처럼 나무가 되기를 바라며 모두가 순수함을 극단으로 밀어붙일 수는 없는 일이지만, ‘제대로 살아본 적이 있는지 고민해볼 필요는 있지 않을까. 오늘도 우리의 무심 속에 지구는 멍들고, 생명은 병들며, 사회는 썩어간다. 그 노력은 가족과 끼니의 식탁에서부터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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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우와 유방 1
시바 료타로 지음, 양억관 옮김 / 달궁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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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바료타로의 역사소설은 익히 유명한터라 기회가 되면 꼭 읽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의 책 중에서 ‘항우와 유방’은 내가 읽은 유일한 시리즈인데, 아마도 고등학교 때 도서관에서 빌려 보았던 것 같다. 이번에 새삼 다시 읽게 된 데는 얼마 전 박웅현 씨가 ‘다시, 책은 도끼다’에서 추천한 영향이 컸다. 기억에는 이 책이 ‘소설 이상의 것을 보여준다’고 평했던 것 같다. 나는 그저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밖에 없는데 과연 어떻길래 그렇게 평가했는지 궁금해서 다시 읽게 되었다. 초한지 자체가 가지고 있는 힘이 있어 재미는 당연히 보장되었고, 나이가 들어 다시 읽어보니 정말 예전에는 몰랐던 것들을 느낄 수가 있었다.


  일단 저자는 중국사에 대한 높은 이해도를 바탕으로, 현지답사와 문헌 조사 등을 곁들여 방대한 지식을 뽐내고 있었다. 역사의 전체적인 흐름 속에서 이 시대가 가지는 의미를 나름대로 분석하면서 정말 ‘소설 이상의’ 것을 보여준다. 마치 하늘에서 내려다보듯이 조감도로 보는 것도 재미가 있지만 그로 인한 단점도 있다. 바로 각 인물들의 성격과 특성을 잘 묘사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중심인물인 유방과 항우에 대해서는 나름대로 성격분석을 통해 독창적인 캐릭터를 창조하고 있지만, 나머지 인물들은 너무 빈약하다. 이 시대 인물들은 계포일락의 계포, 비단장수 관영, 등공 하후영 등 재미있는 인물들이 너무도 많은데 단 몇 줄로 처리되어 너무도 아쉬웠다.


  전개도 산만한 편이라 시간 순서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때문에 사건의 전후관계를 알기 힘들고, 사건 간의 순서도 파악하기 어렵다. 한 인물을 이야기하다가 그 인물의 말로를 미리 말해버리기도 하고, 생각나는 대로 흘러가는 듯한 투박함이 있다. 또, 일본 역사소설을 보면 연극을 하는 듯 과장된 몸짓을 드러내는 캐릭터가 꼭 등장하는데 여기도 그렇다. 예컨대, 작가가 재창조한 ‘기신’ 같은 인물의 성격은 쉽게 납득하기 힘들다. 어떤 영웅을 만들어내고, 그에게 매료된 평범한 사람이 목숨을 바치고 그 것을 미화하는 일본식 ‘가미카제’의 전형을 ‘기신’을 통해 만들어내는 느낌이랄까. 어떤 사고의 틀에 맞춰 인물을 생산해내는 것 같다. 이것도 ‘개별화’에 실패하고 ‘총론’에서만 서술한 데서 오는 단점일까.


p.118(3권)

항우가 보기에, 유방은 음식물에 특히 집착이 심했다. 오창이라는 진 제국의 유산인 거대한 곡물창 때문에 황하 남쪽에 위치한 영양성과 성고성에 강한 집착을 보이고 있었다. ‘유방의 대가리는 나와 싸우는 것보다는 병사들 먹여살리는 걸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모양이야.’ 그건 무인이 아니라 도적의 우두머리나 하는 일이라고 항우는 생각했다. 유방도 한군도 그의 눈에는 파리처럼 보일 때가 있었다.


  예전에는 미처 발견하지 못한 특징이지만, 시바료타로의 역사인식은 좀 특별한 데가 있다. 나는 항우가 실패하고 유방이 성공한 것은 항우의 포악성과 협량함에 비해 유방은 포용력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은이는 전혀 다른 곳에서 그 원인을 찾는다. 바로 ‘먹을 것을 공급하는 것’, 즉 ‘인민을 먹여 살리는 능력’이 가장 결정적인 지점이었다는 것이다. 유방이 영양과 성고를 그렇게 지키려고 했던 것도 바로 곡창을 끼고 있는 이점, 병사를 먹여 살리는 것에 초점을 두었기 때문인데, 항우는 보급의 중요성을 너무 간과했다. 제대로 된 보급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주변 약탈에 치중했고, 그로 인해 민심을 크게 잃었다. 항우의 실패는 ‘밥’의 문제를 간과한 데서 시작되었다. 재미있는 분석이다. 역시 일상과 평범한 생활을 무시하면 성공할 수 없다. ‘밥’이 곧 ‘법’인데, ‘밥’을 해결하지 못하면서 ‘법’만을 앞세워 통치하려고 하면 결국 실패한다.


p.304(3권)

중국 정치의 1차적인 목적은 인민을 먹여 살리는 데에 있다. 왕조가 멸망할 때 유민이 대거 발생하고, 그 동란 속에서 유민을 먹여 살리는 수령이 나타나 옛 왕조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왕조를 만든다. 다시 말해, 먹여 살릴 능력을 잃어버린 왕조에 대해서는 천명을 바꾸어버린다(革命). 그리고 다른 능력자에게 천명을 내리는 것이다. 영웅이라면 실제로 먹여 살리지는 못하더라도 먹여 살리려는 자세를 갖추어야 한다. 그리고 그런 자세에서 중국사는 수많은 정치철학과 정책론을 만들어 왔다. (시바료타로)

  오늘날 지배층들도 귀담아들어야 한다. 우리는 애국심과 충성심으로 살아가는 존재들이 아니다. 일상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나라는 이미 나라가 아니고, 개인의 자유와 창의를 억압하는 회사는 이미 회사가 아니다. 유방은 따르는 이들을 배부르게 하고, 부하의 역량과 창의를 최대한 발휘하게 하여 성공하였다. 우리는 수많은 이름 모를 어르신들의 희생을 발판으로 이만큼 성장하였다. 그분들의 삶이야 구구절절하고 존경심이 들지만, 후인들에게 다시 그러한 삶을 요구해서는 안 된다. 이 암울한 시대에 초한의 영웅들의 이야기를 다시 한 번 살펴봐야 하는 이유가 있다면, 바로 이 지점일 것이다. ‘순수’하고 ‘진실’한 마음만으로 공동체를 이끌어갈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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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동주
안소영 지음 / 창비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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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구나 한 번쯤은 ‘어떻게 살아야할지’ 고민하게 된다. 물론 그 깊이와 농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그때 가장 큰 영향을 주는 것은 ‘만들어진’ 세계다. 한 개인이 할 수 있는 일들이 별로 없어 보인다. 이미 사회에는 거대한 부조리가 펼쳐져 있고, 나는 무력하다. 이때 사람들의 선택이 갈린다. 몇몇은 거대한 사회악과 맞서 싸우겠다고 혁명가가 되어 자신의 삶을 깨뜨릴 것이다. 다수는 아무 생각 없이 되는대로 삶을 살 것이고. 또 몇몇은 일단 ‘지금, 여기’의 삶을 가꾸면서 기회를 노릴 것이다. 내가 바꿀 수 있는 것은 오직 ‘나’뿐임을 유념하면서 말이다.


  윤동주는 그런 쪽이었다. 먼저 자기 자신을 맑게 유지하고자 했다. 그 엄혹한 야만의 시대에, 꿈을 꿀 수조차 없고 내 삶이 어떻게 떠내려가게 될지 알 수 없던 시대에 말이다. 비록 독립군이 되어 일제에 맞서지는 못하지만. 버티고 버티다 창씨개명도 하는 무력한 존재이지만, 맑은 정신 하나만큼은 넘겨주지 않겠다는 각오였다. 1941년에 지은 ‘눈감고 간다’라는 시를 보면 윤동주의 결심이 보인다. 눈을 감은 채 애써 세상의 부조리에 눈을 감고 가지만, 그래도 씨를 뿌리며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하며 살아가고자 한다. 그러다 돌부리에 걸리면, 예컨대 이러한 삶조차 허용되지 않는 시기가 오면 눈을 바짝 뜨고 결투하고자 했던 것 같다.


눈 감고 간다


태양을 사모하는 아이들아

별을 사랑하는 아이들아


밤이 어두웠는데

눈 감고 가거라.


가진 바 씨앗을

뿌리면서 가거라


발부리에 돌이 채이거든

감았던 눈을 와짝 떠라.


_1941. 5. 31.


  하지만 그 청아함의 끝은 비극이었다. 사실 그것은 예정된 결말이었다. 엄혹한 시대에 그런 낭만은 애초에 허용되지 않는 것이었다. 가정과 안락함을 다 버리고 혁명가의 길을 걷지 않는 이상, 삶의 조건들을 유지하면서 ‘고아한 정신’을 유지하기란 힘든 일이었다. 차라리 생각하지 않고 사는 것이 더 편했을 것이다. 그저 시대의 흐름에 몸을 맡긴 채 살아갔다면 괴로움이나 없었으련만. 한 개인이, 의식 있는 젊은이가 살아가기에는 너무나 힘든 시대였다. 다 내어주고 마음하나만 지키고 살려고 했건만. 그것마저 허용되지 않았다. 사실 윤동주는 가장 귀하고 어려운 것을 놓지 않고 버텼던 것이다.


  소설은 여운이 깊게 남는다. 윤동주의 삶 자체가 주는 힘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할지 다시 고민하게 만든다. 발레리의 말대로 ‘용기 내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대로 생각하게 된다.’ 시인 동주는 주어진 삶 안에서 양심을 지키며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고자 했다. 비록 독립투사의 범접할 수 없는 투지는 아니지만, 한 청년이 보여줄 수 있는 순박하고 고결한 투쟁이었다. 용기를 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 또 얼마나 그것을 지키는 것이 어려운가. 오늘 아침에 세운 결심하나 지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 이러니 오늘도 바람에 스치울 수밖에 없다.

p.75
식민지 조선은 말할 것도 없고 일본인들조차 전쟁 준비에 생활을 위협받고 있었다. 이러한 때 일개 젊은이가, 더구나 식민의 땅에서 태어나 노예와 다를 바 없는 처지로 앞날을 그려 보고 계획해 보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무사히 공부를 마치고 세상에 나아가, 가족을 거느리고 살아갈 꿈을 꾸어도 되는 걸까. 어느 순간 자신들의 삶이 거대한 삽으로 송두리째 떠져, 다른 곳으로 휙 던져지거나 파묻히는 것은 아닐까. 불현 듯 떠오르는 불길함에 다들 몸서리쳤다.

p.127
동주는 결심했다. 잘못된 전쟁을 지지하고 동포들의 고달픈 삶을 외면하는 것이 문학의 길이라면, 가지 않으리라. 감투와 명성을 탐하고 궤변으로 자신의 행동을 미화하는 자들이 문인이라면, 되지 않으리라. 하나의 시어를 찾기 위해 수없이 버리고 취하는 연마의 과정이 저렇게 쓰이는 것이라면, 더 이상 쓰지 않으리라.

p.139
"맹자께서 말씀하셨다. 사람을 사랑하였는데도 친해지지 않거든 그 인(仁)을 돌이켜 보고, 사람을 다스렸는데도 다스려지지 않거든 그 지혜를 돌이켜 보고, 사람에게 예를 표했는데도 답하지 않거든 그 공경을 돌이켜 보아라. 행하고도 얻지 못하는 게 있거든 모두 자기를 돌이켜 보며 찾아야 하리니. 그 몸이 바르면 천하는 그에 돌아올 것이다. 『시경』에 이르기를 ‘길이길이 천명을 지켜 스스로 많은 복을 구하리라.’하였느니라."(『맹자』「이루편」)

p.234
조선에서도 벗들이 가끔 동주에게 놀랄 때가 있었다. 먼저 나서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일이 잘못되어 가는 것을 끝까지 그대로 두고 보지는 않았다. 유순해 보이는 동주가 정색을 하고 나서면 상대는 아무 말도 못 했다. 그럴 때 동주에게는, 고집스럽기도 하면서 어딘가 서늘하고 고고한 기운이 어려 있었다. 이지마 대좌조차 당장은 입을 닫게 하는, 동주가 지닌 힘이었다.

p.245
시도 꾸준히 썼다. 동주의 사색과 감성, 마르지 않고 우러나오는 시상을 표현하는 데 우리말만 한 도구가 없었다. 마음속에 담아 놓은 생각과 입에서 맴돌기만 하는 표현이 하나의 시어를 만나 떠오를 때는, 가슴이 찌르르해지고 눈물이 핑 돌 만큼 좋았다. 전쟁과 죽음과 파괴로만 달려가는 이 삭막하고도 불안한 시대에, 무언가 움터 오는 게 있다는 사실이 벅차기도 했다. 돌담이나 아스팔트 바닥을 비집고 솟아 나온, 연둣빛 고운 생명 같은 시였다.

p.253
연전에 있을 때도 느낀 것이지만, 말과 글이 다르고 지내는 곳이 달라도, 사람들이 느끼고, 생각하고, 행동하며, 살아가는 모습은 비슷하다는 점이다. 자신이 놓인 시대와 사회의 제약 속에서도, 사람들은 삶이 던져 주는 질문을 붙들고 열심히 해답을 찾으며 살아간다. 어떻게 살 것인가, 행복이란 무엇인가, 더불어 행복한 삶을 어떻게 누릴 것인가……. 자신의 삶에서 다 풀지 못하면 다른 사람에게, 혹은 다음 세대에게 넘겨준다. 이 세상에 사유하는 인간이 스러지지 않고 남아있는 한, 그러한 질문에 대한 대답은 시대를 이어 가며, 좀 더 많은 사람들을 거쳐 가며, 더욱 깊어지고 풍부해질 것이다. 남의 것을 빼앗고, 남의 나라도 빼앗고, 사람이 사람을 차별하고 모욕하는, 심지어 다른 사람의 자유와 생명마저 빼앗아 버리는 야만의 시대라 해도…….

p.269
아예 이러한 처지가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지내야 했을까. 공부방 바깥의 세상을 모르는 이들처럼 고등 문관 시험 준비나 열심히 해야 했을까. 희욱의 모범생 선배들처럼 조선어를 못하는 것에 아무런 부끄러움 없이 웃는 얼굴로 일본 말을 주고받아야 했을까. 식민지 체제를 엄연한 ‘사실’로 인정하는 선배 지식인들처럼, 생각도 일본어로 하고 글도 일본어로 쓰며 살아야 했을까. 그들은 조선 청년들도 일본인과 똑같이 전쟁터에 나가, 진정한 내선일체를 이루어 내자며 독려하고 다닌다 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렇게 지내지는 못할 것 같았다. 앞장서 떨치고 나서지는 못하겠지만, 마음속으로라도 잘못된 것에 저항하며, 때로 마음 맞는 벗들과 생각을 나누며 지냈으리라. 그렇다면 지금의 시간은 자신의 삶에서 예정되어 있던 것인가.

p.297
만 이십칠 년 이 개월이 채 못되는 삶. 동주가 태어날 때부터 조국은 남의 나라 식민지였다. 아무런 근심 없이 한번 싱그럽게 웃어 보지도 못했고, 어떤 일을 마음껏 좋아해 본 적도 없었다. 누군가를 연모하는 것도 주저되었다. 길 가다 순사나 헌병을 만나면 괜히 가슴이 두근거렸다. 멀찌감치 돌아서서 책잡힐 게 없는지 머리에서 발끝까지 혼자 점검해 보곤 했다. 손들어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표현해 보지 못했고, 온전히 속 터놓고 의논할 사람도, 기대고 의지할 하늘도 없었다.

p.328
발레리, 폴 앙브루아즈
파리가 점령되었을 때는 나치스 독일에 저항하여 "용기를 내어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머지않아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고 한 자신의 말을 실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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