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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테라
박민규 지음 / 문학동네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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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민규 | 카스테라

박민규의 소설은 굉장히 장난스럽다.
아니다, 이것은 잘못된 표현이다.
박민규의 태도는 굉장히 장난스럽다.
아니다, 말버릇이 장난스럽다고 해야하나.
암튼 무언가는 굉장히 장난스러운데, 웃을 수가 없다.
아니다, 웃을 수는 있는데 웃고 나면 죄책감이 느껴질 때가 있다.

박민규식으로 이야기를 시작해서,
카스테라.와
고마워, 과연 너구리야.와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와
몰라 몰라, 개복치라니.와
아, 하세요 펠리컨.과
야쿠르트 아줌마.와
코리언 스텐더즈.와
대왕오징어의 기습.과
헤드락.과
갑을고시원 체류기.로
박민규식 이야기를 매듭짓는 데에는
어쩌면 상당한 부담이 따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아니다, 그건 내 생각이고,
박민규에게는 그런 방식이 더 쉬울지도 모르겠다.

암튼 박민규의 이야기는 굉장한 희망을 주는 듯 하지만,
굉장히 서글프다.
우리는 이미, 그러한 상상력은 상상력일뿐이라고 믿고 사는
어른이 되었기 때문이다.

정말로 서글픈 것은,
말도 안돼는 이야기야.라는 말을 내뱉으면서도
서글프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고-
정말로 외로운 것은,
살가운 애인이 있는데도,
외롭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고-
정말로 슬픈 것은,
치. 웃기고 있네.라고 말하는 입꼬리가
아래로 처지는 것이다.

박민규의 소설이 단지
특출난 표현으로 가득찬 읽을거리.로 평가받는 것에도,
뭐 "대한민국 문학사를 통틀어 가장 신선하고 충격적인 사건" (이외수)으로 평가받는 것에도 동의하지는 않지만,
아무렇지 않은척 하면서, 마음 아파하는 인간들.
에 대한 관심과 탐구라는 점은
그에게 계속해서 관심을 가질 수 밖에 없게 만든다.
(그것이 어쩌면 스스로를 컴플렉스 덩어리라고 표현하는
박민규 자신에 대한 것일지도 모르지만)

이 소설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단편은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 였는데,
푸시맨인 아들의 손에 떠밀려,
터질것 같은 지하철을 타고 출근하는 아버지와
결국 기린으로 변해버린 아버지를 만나지만
끝끝내 그가 아버지라고 확신하지는 못하는 아들의 이야기를
어떤 사람이 쉬이 넘길 수 있을까.
순진하게,
실제로 누군가가 기린으로 변해,
어느 동물원, 혹은 숲 속,
그것도 아니면 지하철 역을 배회하고 있는 건 아닐까.
희망을 품게까지 만드는
박민규 붓 끝의 저력을 무시할 수 있을까.

1. 냉장고 속의 카스테라 한 조각을 맛보기 위해,
세계와 사람들과 갖가지 것들을 냉장고에 집어넣는 자취생-
2. 그리고, 직장에서 너구리 게임을 하다가
너구리로 변한 직장 상사, 그리고 그밖의 수많은 너구리들-
3. 아르바이트로 지하철 푸시맨을 하고 있는 아들의 손에 떠밀려
지하철에 몸을 실은 후, 기린으로 변해버린 아버지-
4. 호기심과 친구의 알선으로 어렵게 우주에 급파한 후
멀리서 바라보니, 개복치의 모양을 하고 있는 지구-
5. 손님없는 휴양지에서 일하다 만나는,
오리배를 타고 희망의 나라로 유랑하는 오리배 세계 시민 연합-
6. 오랫동안 똥을 못누고 있는 주인공에게
안색이 안좋다며 야쿠르트를 건네는 야쿠르트 아줌마-
7. 보이지 않는 손과 도도새가 혼존하는 스텐다즈를 가진 코리안-
8. 어렸을 소년 중앙이라는 잡지에 등장한 대왕오징어에게
기습을 받는 여러가지 직업의 소년-
9. 느닷없이 헐크에게 거센 헤드락을 당한 후
헤드락에 대한 강박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남자-
10. 방구도 마음대로 뀌지 못하는 좁은 고시원 방에 모로 누워
경직돼버린 고학생-

당신은, 상상이나 할 수 있는가.

+ 이 소설을 선물해준, 이지은 양에게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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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수수밭 (구) 문지 스펙트럼 6
모옌 지음, 심혜영 옮김 / 문학과지성사 / 1997년 6월
평점 :
절판


모옌 | 붉은수수밭

아버지는 너무나 흡사한 두 차례의 부서짐 사이에 어떤 필연적인 관계가 내재되어 있다는 것을 어렴풋하게 직감하고 있었다. 이 일과 그 일이 한데 연결되면서 또 하나의 장면이 나타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영웅은 단명인지라
.......그 브라우닝 총을 깨끗이 손질하다가 총이 불발되는 바람에 자기 총에 맞아죽었다.

벌써 자동차가 붕붕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버지는 무거운 브라우닝 총을 든 채로 위사령관의 곁에 엎드려 있었다. 팔목이 얼얼했고 손바닥에는 땀이 흥건했다. 엄지와 검지 사이의 살이 갑자기 툭하고 한번 튀더니 이어 계속해서 툭툭툭거리며 튀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살구씨만한 살 덩어리가 규칙적으로 튀는 모양을 신기한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 살 속에는 마치 껍질을 뚫고 나오려는 작은 새가 숨어 있는 것 같았다. 아버지는 그 꼴을 보고 싶지 않아서 손에 힘을 주었지만 그렇게 하자 이번에는 오히려 팔 전체가 후들거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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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 독도 문제가 시끄러울 때쯤 이 책을 읽었다.
소설을 읽는 동안, 내용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를 제쳐놓고
내내 나쁜 노무 섀끼들.만 외쳐댔던 것 같다.
물론, 우리 나라 사람들이 전쟁원조가서 한 짓이
더 잔인했다고 하는 얘기도 있긴 하지만,
전쟁때는 누구나 그렇게 될 수 있다고는 하지만,
정말 나쁜 노무 섀끼들이다.

그래서 이 소설을 읽고 지금 머릿속에 남는 건,
일본놈들의 잔인한 살인방법과,
수수수수거리며 지금도 서로 부딪치고 있을 수수밭의 이미지.
그리고 저 위의 문장들에서 보이는 섬세한 표현들.

소설 속 시점이 약간은 혼란스러웠는데,
그건 작가의 의도라기보다는 실수인 것 같다.
그 일들을 실제로 겪지 않은 말하는 이가
단지 들은 이야기를 다시 들려주는 방식은
이미지를 풍부하게는 하지만,
크게 와닿는 부분은 아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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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아닌, 동시에 십만 명인 어떤 사람 (구) 문지 스펙트럼 13
루이지 피란델로 지음, 김효정 옮김 / 문학과지성사 / 1999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루이지 피란델로 | 아무도 아닌, 동시에 십만 명인 어떤 사람

재미있는 일은 바로 이것이었다: 그녀가 보기에 그녀의 젠제는 결점이 없는 존재가 결코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그 모든 것들을 관대하게 보았다! 그녀는 그에 대한 많은 점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의 모든 것이 그녀의 취향과 망상에 따라 그녀의 방식대로 만들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누구의 방식대로 만들어졌단 말인가?
내 방식은 아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나는 정말로 그녀가 그녀의 젠제에게 돌렸던 취향과 감정을 나의 사고를 통해 인식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녀가 그에게 그런 취향과 감정을 주었다는 건 확실하다. 왜냐하면 그녀의 견해에 따르자면, 젠제는 그런 취향을 가지고 있었고, 진정 그의 방식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의 방식대로, 다시 말해 명백히 나의 것이 아닌 그의 현실에 따라 생각하고 느꼈기 때문이다.
때때로, 나는 그가, 즉 젠제가 유발시킨 고통 때문에 울고 있는 아내를 보았다. 그래요, 선생님들! 그 사람 말입니다. 나는 그녀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왜 그래, 자기?"
그녀는 대답했다.
"아니, 나한테 그 이유를 묻는 거야? 당신이 조금 전 내게 한 말로 충분하지 않아?"
"내가?"
"그래, 당신이!"
나는 망연자실했다.
내가 내 말에 담았던 의미는 내게 어떤 의미가 되었음이 확실하다. 하지만, 그 말, 즉 젠제의 그 말이 그녀에게 주었던 의미는 전혀 별개의 것이었다. 나나 다른 사람이 한 말은 그녀에게 고통을 주지 않았을 터이지만, 젠제가 한 말은 그녀를 울게 만들었다. 왜냐하면 그 말이 젠제의 입에서 나오면, 그것이 다른 어떤 가치를 갖는지를 모르겠지만, 그녀를 울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랬습니다, 선생님들.
그러므로 나는 나를 위해 혼자 말하고 싶다. 그녀는 그녀의 젠제와 대화를 나눴다. 그는 내 입을 통해 내가 전혀 몰랐던 방식으로 그녀에게 대답했다. 내가 그녀에게 말하고 그녀가 내게 반복했던 그 모든 것들이 왜 무의미하게 거짓말이 되고 멍청한 것이 되는지 알 수 없다.
p.72~73


그녀는 정말 그를 사랑했던 것이다!
그리고 나는-마침내 모든 것이 명확해졌을 때-못 견딜 정도로 샘이 났다-내게 샘이 났던 것이 아니다. 믿어주시라. 당신들을 비웃고 싶군!-나 자신이 아니라, 내가 아닌 어떤 사람, 즉 나와 내 아내 사이에 숨어 있던 멍청이에게 질투가 났던 것이다. 그는 공허한 그림자 같은 존재가 아니었다-믿어주시라-왜냐하면 오히려 그는 그녀에게 사랑받기 위해 나의 육체를 이용하면서 나를 공허한 그림자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잘 생각해보시라. 아내가 나의 입술 위에서 내가 아닌 어떤 사람과 키스했던 것이 아니라고? 내 입술 위에서? 그렇지 않다. 말도 안돼! 그것이 내 것 이었기 때문에, 그녀가 키스했던 입술이 바로 내 것이라고? 하지만 그 육체가 실제로 내 것일 수 있었고 또 실제로 나에게 속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녀가 껴안고 사랑했던 그 사람이 내가 아니었다면?
잘 생각해보시라. 당신의 아내가 당신을 안고 당신의 육체를 통해 그녀가 가슴에 새기고 있던 다른 남자와의 사랑을 즐긴다는 걸 알게 된다면, 가장 고상한 거짓말로 당신의 아내가 당신을 속였다는 사실을 느끼지 못할까?
어쨌든 이 경우가 어떤 점에서 내 경우와 다른가? 내 경우가 더 심각하다! 그 경우, 당신의 아내는-죄송합니다-당신과 사랑을 나눌 때 타인과의 사랑만을 가장하기 대문이다. 그러나, 내 경우, 나의 아내는 내가 아닌 어떤 사람의 현실을 두 팔로 움켜쥐고 있었던 것이다!
이 사람은 진정 현실적인 존재였으므로, 마침내 화가 난 나는 그의 현실에 나의 현실, 즉 나의 아내를 강요하면서 그를 파괴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는 결코 내 아내였던 적이 없었다. 그의 아내였다. 그녀는 이방인의 품안에 있는 듯, 공포에 질려서 모르는 사람을 발견했다. 그녀는 더 이상 나를 사랑할 수 없고 잠시도 나와 살 수 없다며 떠나버렸다.
그렇습니다. 앞으로 보게 되겠지만 그녀는 떠나버렸습니다.
p. 76-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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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반부의 복잡하고 어렵고 약간은 지루할 수 있는 얘기를
그냥 참고 따라갈 수 있을만큼 도입부는 정말이지,
굉.장.히. 흥미롭다.

아내인 디다에게 젠제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모스카르다는 어느 날 거울을 보고 자신의 코가 한쪽으로 휘었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는 혼란에 빠진다. 그는 그의 코가 휘었다는 것을 몰랐으므로, 코가 휘지 않은 모스카르다로 자신을 알고 있었는데, 사실 그는 코가 휜 모스카르다였던 것이다.

모든 문제는 여기에서 출발한다. 그 때부터 그는, 아무도 아니면서 동시에 십만 명인 어떤 사람을 추적하기에 온 몸을 던진다. 처음에는 자신만이 그랬던 게 아니라는 사실 정도로 위안을 받고 싶어 한다. 하지만, 가는 곧곧마다 거울이 있고, 코가 휜 모스카르다와 그밖의 모스카르다를 만날 수밖에 없다. 원수는 외다리에서 만나듯이-

그는 그와 "가까운 사람들 안에 살고 있던 다른 모스카르다를 모두 발견하여, 그들을 하나씩 없애버리기 위해" "미친 짓"을 하기 시작한다.

그는 그의 의지와 상관없이 가업으로 이어온 '고리대금업자인 모스카르다'와 또 그의 의지와 상관없이 '아내에게만 젠제인 모스카르다'를 제일 공들여서 분해한다. 결국은 고리대금업자로서 만들어온 관계에 변화를 가져오고, 아내와의 관계도 변하게 되니까 어떻게 보면, 그가 의도한 '미친 짓'은 성공한 거라고 볼 수 있겠다. 하지만, 그러면 뭘 하나. 그는 또 다시 다른 형식 속에 갇힌다. 어쨌든 사람이 살아있는 한, 육체가 썩지 않는 한, 사회 속에 있는 한, 형식은 없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형식은 그렇게 다채롭지도 않다. 하나를 취하면, 하나를 버려야하는 극단적인 존재방식이니까.

그래서 문제다. 왜냐면, 한 그릇 안에 들어갈 게 너무 많고, 어떻게 다 비집고 들어간다고 하더라도 그건 또 변하게 마련이니까.

그래, 이렇게 복잡한 문제다. 누군가가 아무도 아니면서, 동시에 십만명, 혹은 그 이상이라는 사실은.
그래서 루이지 피란델로도 이 책에서 다 쏟아붓는다. 그는 혼잣말도 했다가 객관적으로도 말했다가 윽박도 질러봤다가 무시도 했다가 왔다갔다한다. 때로는, 너무나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하지만, 때로는, 스스로가 미친 놈 정도로 여겨질까봐 겁내기도 하고.
 
초반에 휜 코를 발견하고 방황하는 장면이나, 고리대급업자와 젠제를 해체하는 구체적인 이야기를 빼면, 그렇게 혼란스러운 머릿속 생각을 계속해서 얘기하는 탓에, 이 책은 가끔은 철학서같기도 하고, 지겹기도 하다.

형식이 한 가지인데, 내용은 다양하고 유동적이라서 괴로운 것처럼,
할 말은 한 가지이지만, 말하는 방법은 수도 없이 많고, 변하니까 그렇게 계속해서 변태를 거듭한다. 한 권의 책 안에서, 피란델로의 고민이. 그리고, 그럴 수밖에는 없다는 점을 충분히 이해한다.

아무도 아닌, 동시에 십만 명인 어떤 사람이 쓰는 책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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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맹
손창섭 지음 / 실천문학사 / 2005년 6월
평점 :
품절


손창섭 ㅣ 유맹

고등학교 문학교과서에 이런 음침한 소설이 실리다니..
라는 생각이 들게 했던 '비오는 날',
도덕이라는 가치관 자체에 물음표를 마구 던지는 '생활적'..
암튼 손창섭의 이름 석자 앞에는, '문제 작가'라는 머릿말이 붙고,
손창섭의 문학을 평하는 사람들의 글에는 늘
불구, 비도덕성, 니힐리즘, 허무주의, 병, 무기력, 우울이라는
단어들이 가득, 가득하다.
그래서 이번에 읽은 장편소설 '유맹'은, 의외라는 느낌이었다.
 
방랑하는 사람을 뜻하는 '유맹'이라는 소설을 읽기 위해서는,
우선 손창섭이라는 사람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선, 손창섭은 현재 일본에서 살고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국적이 한국인 작가다.
정식으로 일본인이 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한국인이라고 우길 수도 없는 노릇인데,
북한에 고향을 두고 있고, 전후에는 남한에서도 생활했고,
아내는 일본인이고, 일본에서 생활을 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70년대 중반에 손창섭은
가족들과 함께 일본에 가버렸는데,
지금은 그냥 '행방불명' 찾을 수가 없다.
이번에 '유맹'이라는 소설을 내면서 출판사에서는,
인세라도 줘야겠다는 생각에
'손창섭을 아시나요' 뭐 이렇게 손창섭을 찾고 있다고도 한다.
손창섭은, 무정부주의자라는 소문도 있다.
허무주의가 곧 무정부주의로 연결될 가능성이 커서인지,
실제로 그렇게 얘기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암튼 그런 손창섭이 한국을 버리고 간 곳이 왜 하필이면,
일본인지, 그냥 아내가 일본인이어서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이런 상황에서 '유맹'은,
손창섭이 일본에 가서 어떻게 살았나를 짐작하게 해준다.
자전적인 소설이라는 거다.
 
일본인 아내와, 일본인 아내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딸과
일본에서 살고 있는 '나'와
일제강점기에 돈벌이를 위해서 일본노역자로 와서
아예 정착해버렸지만, 한국에 대한 향수를 버리지 못하는
최원복 노인의 집안 이야기가 큰 줄기이다.
 
그리고, 최원복 노인의 집안과의 인연을 시작으로
참으로 다양한 재일한국인의 모습이 나온다.
 
재일한국인이지만 일본에 사는 것이 더 편해져버린 사람,
늘 한국에 돌아가기만을 꿈꾸는 사람,
일본에 사는 한국인으로서의 혼란을 느껴서
오히려 한국인을 멸시하고 조롱하는 사람,
어느 쪽에서 정 못 붙이는 사람,
단지 돈벌이를 위해서 완벽하게 일본인이 되고 싶은 사람,
한국에 대한 애정은 있지만,
당시 남한에 대한 잘못된 홍보로 부정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
정말, 다양한 군상들이 나온다.
 
그리고 결국 그 중의 몇몇은 그런 혼란을
뒤틀린 방식으로 표현하거나,
스스로를 죽이거나,
꿈을 이루거나,
꿈을 이루지 못한채로 끝이 나는데,
다른 단편에서처럼 굉장히 허무하거나,
그렇다고 굉장히 밝고 명쾌하거나 하지 않고,
오히려 조금은 냉정하고 담담한 시선이다.
 
손창섭의 분신이라고 짐작해볼 '나'는,
한국인에 대한 무조건적인 멸시에 흥분도 하고,
냉정하게 재일한국인들의 모습을 관찰하기도 하고,
일본인 아내와 일본에서 사는 것이 편하다고 느끼면서도,
한국을 무작정 그리워하기도 하는 인물이고.
또, 여성에 대한 편견을 은연중에 굉장히 많이 드러내기도 한다.
'여성답지 않게'라든지, '여성으로서는 의외로'라든지,
전후상황, 특히 재일한국인의 입장에서 처한 현실을
굉장히 냉정하게 꿰뚫는 것처럼 보이다가도,
또 굉장히 보수적이고 전근대적인 모습을 흘리기도 한다.
 
마치 전후의 모든 정신적, 신체적 불구자들,
그리고 '불구' 자체에 대한 이야기와 이야기방식에 매력을 느껴서
유맹을 집어들게 된 나로서는,
정말, 의외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긴 했지만-
암튼 '유맹'은 기록의 의미,
그리고 공중으로 사라진 손창섭이라는
중요한 소설가를 이해하는 자료로서의 의미만으로도
충분한 소설이다. 그저,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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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신과 머저리」, 그리고 이름에 '청'자가 들어간다는 이유만으로 나도 모르게 젊은 이청준만을 생각하고 있다가 한번씩 깜짝깜짝 놀란다. 「병신과 머저리」, 그리고 「눈길」의 10년 터울이 늘 새삼스럽게 나를 놀래킨다. 10년 사이 그는 정말 그렇게 늙어버렸던 것일까. 근원을 알 수 없는 상처에 시달리던 그가 어느새 노인에게 진 빚을 끊임없이 상기하게 될 만큼. 문학 속 주인공을 저자와 동일시하는 것은 참 나쁜 버릇이지만, 이 두 작품만을 놓고 봤을 때, 이청준의 '청'자가 조금은 늙어버린 것이 사실이다.

"더운 때 추운 때를 가려 살 여유"도 없던 그는 끊임없이 "나는 노인에 대해서 빚이란 게 없었다"고, "노인이 그걸 잊었을 리가 없다"고 지붕 개량 사업 얘기를 핑계삼아 웬 빚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다. "노인의 눈길이 차라리 무표정에 가까운 것"일수록, 아무도 그를 채근하지 않아도 그는 자꾸만 빚을 생각하는 것이다. 없는 게 분명하다는 것을 노인이나 자신이나 분명하게 알면서도 분명하게 있는 빚. "노인에 대해선 빚이 없음을 골백번 속으로 다짐"할수록 형체를 드러내는 빚. 사채업자에게서 급하게 돈을 끌어다 쓰고 원금보다 불어난 이자 빚을 지게 된 사람처럼 그는 원칙적으로는 없는 것이 분명한 그 빚 때문에 마음이 불편하여 또 다른 핑계로 노인 곁을 떠나려고 한다.

그런 그를 위해 중개인으로 나서는 것은 그의 아내. 그를 원망하는 눈길을 보내어도 보고, "당신은 참 엉뚱한 데서 독해요" 다그쳐도 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놓은 수가 노인의 입을 통해 그 알 수 없는 '빚' 이야기를 꺼내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듣고 보면, 부모 자식간을 서로 빚쟁이 마냥 소원하게 만든 그 이야기는 미리 기대했던 것에 비하면 별 것 아닌 이야기이다. "액면가 없는 빚문서"처럼 그 시대를 살던 부모 자식이라면 누구라도 가질 법한, 흔하고 흔한, 그렇고 그런, 그냥 빚 이야기이다. 그 시대를 사는 부모 자식이 아니라도, 지금을 살고 있는 부모 자식이라도, 그 누구라도 지고 있을 그런 빚 이야기가 '눈길' 위에서 만들어졌던 것이다.

「눈길」의 '나'만큼이나 우리는 참 많은 것을 모른 척, 못 본 척하며 살고 있다. 너무 잘 알고 있어서 똑바로 마주 보기가 오히려 힘든 수많은 진실 속에서 살고 있다. 하지만 인정하기 싫은 진실, 쳐다보기 무서운 진실일수록 누구 하나 밟지 않은 눈길 위의 발자국처럼 너무나 선명하고 너무나 또렷하다. 보이기 시작하면 고통스러우니까 우리는 고집스럽게 눈을 가리고 아옹하며 사는 것이다. 누가 봐도 청산되지 않은 분명한 빚을 처절할 정도로 바락바락 아니라고 우기는 '나'처럼 우리도 그렇게 산다.

그런데, 부모는 다르다. 노인은 좀 다르다. 그네는 아무 것도 보지 못한다. '자식'이라는 몹쓸 이름만 걸리면, 그네들의 눈에는 빚 문서도, 다 허물어져 가는 지붕도, 눈길 위에 찍혀 있는 발자국도 모두 또 다른 빚처럼 짊어지고 살아야 할 무언가로밖에는 안 보인다.

서로 전생에 진 빚을 갚기 위해 엮인 관계라는, 촌수도 없다는 부모 자식 관계는 그 자체로 '나'의 실체 없는 빚 문서이고 고쳐두어야 할 지붕인 것이다. 아무리 갚고 또 갚아도, 아니 오히려 갚으면 갚을수록 이자가 무섭게 불어나는 무허가 사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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