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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괴 1
히라노 게이치로 지음, 이영미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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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두 권짜리 책을 읽을 때는 2권까지 마저 읽고 감상을 쓰곤 했습니다. 그런데 히라노 게이치로의 [결괴]는 1권까지만 읽은 지금 한 번쯤 정리를 해봐도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만큼 이 작품은 2권부터 전개될 내용이 1권과는 명확히 다를 거라고 예상됩니다. 1, 2권이 단순히 분량으로만 나뉘어진 것이 아니라 각각의 역할도 명확해 보입니다.


1권은 말 그대로 2권에서 본격적인 이야기를 전개하기 위한 서막의 역할에 충실합니다. 1권의 말미에 구체적인 사건이 언급되고 있지만 그것은 사건의 겉모습일 뿐 속사정은 아닙니다.

1권까지만 읽고 먼저 감상을 써보기로 한 데에는 히라노 게이치로라는 작가에 대한 약간의 실망의 영향도 있습니다. 초반에 인물들에 집중한 이야기는 히라노 게이치로 답다는 생각이 들어 좋았습니다. 그런데 소위 '사건'의 모습이 조금씩 드러날 때부터는 왠지 전형적인 일본의 범죄소설과 다르지 않다는 실망감이 저도 모르게 생겼습니다. 

현대의 범죄라는 것은 공통적으로 갖는 특징들이 있습니다. 다른 방식으로는 전혀 해소되지 못하고 과도하게 내재된 분노를 기반으로 한다든가, 그 분노가 단순히 분노의 직접적인 원인제공자에게만 표출되는 것이 아니라든가, 표출방식이 정말 무섭도록 잔인하고 끔찍하다든가 하는 특징들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다가 일본에서 화제가 되는 극악무도한 범죄들은 또 특유의 성질들을 더 갖고 있습니다. 막상 말로 하자니 어떤 식으로 써야할지 어렵게 느껴지지만, 일본에서 특별히 화제가 되는 범죄들은 외부에서 주어지는 폭력과 억압을 특정 개인이 수렴하는 방식이 더욱 나르시시스트적이고, 그래서 그 분노가 '미화'라는 방식으로 정당화되는 경향이 있다고 느껴집니다. 

다른 식으로 말하자면, 어울리지 않는 표현이지만 '지적(intellectual)'이라고 할까요. 그래서 더 소름끼칩니다. 순간적인 분노를 주체하지 못해 범죄를 저지르는 것은 투박해서 차라리 인간적이라면, 자신이 느끼는 분노를 차곡차곡 모아서 그것을 가장 끔찍하게 드러내는 방식을 체계적으로 연구해 실행하는 식으로 사람을 죽이는 것은 정말로 무섭습니다.

이것이 일본에서 생산된 많은 영화나 소설 등의 콘텐츠에 의해 생긴 편견인지, 그것도 아니면 제가 하필이면 본 콘텐츠들이 대부분 그런 경향을 갖고 있었던 탓인지는 저도 분명히 말하기는 힘듭니다. 어쨌든 저에게는 일본의 범죄에 대해서는 위에서 설명한 것과 같은  선입견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선입견들을 히라노 게이치로의 소설 속 범죄양상에서도 비슷하게 느꼈고 결국은 히라노 게이치로 역시 이렇게 자극적인 소재와 묘사 방식을 선택했구나 하는 약간의 실망감을 느낀 겁니다.

어렵게 생각할 것 없어. ㅡ버스에 타고 있다. 그런데 한 남자가 난데없이 칼을 빼들고 날뛴다. 승객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응? 어쨌거나 그 남자가 빨리 버스에서 내려주길 간절히 바라겠지. 밖에서는 누구를 죽이든 상관없어. 아니. 오히려 밖에서 누군가를 죽여주면 기뻐할 거야. 다행이다, 버스 안에 있었던 덕분에 살았다, 하면서. ㅡ아무 일 없는 대낮에도 살인이 은밀하게 기대되고 있단 뜻이야! 내 말 알겠나? 살인은 결코 근절되지 않아. 그렇다면 "여기가 아닌 어딘가"에서 일어나게 하는 수밖에 없지. p.317

'히라노게이치로마저 이토록 자극적인 소재와 묘사를 선택했다는 것'에 대한 저의 작은 실망은, 사실 너무 적나라한데 차마 절대 아니라고 부정할 수 없어서 나온 반작용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아직 2권을 남겨놓은 저는 기대가 더 큽니다. 1권에서 드러난 잔혹범죄의 양상은 여느 범죄소설의 끔찍함과 다를 바 없이 그저 자극적으로만 느껴지지만, 이 모든 게 다 2권에서 히라노 게이치로만의 시각으로 그 이면을 보여주고 사람을 보여주고 삶을 보여주기 위한 치밀한 계산 아닌가 하는 기대 말입니다.

앞에서 실망 어쩌고 한 것도 히라노 게이치로에 대한 기대치가 워낙 높아서 그렇지 사실 따지고 보면 본격 범죄가 일어나기까지 작가가 인물들에 들이는 공이 상당합니다. 

특히, 작품의 초반에 료스케가 자신의 심연을 들여다보고, 주변 공기를 느끼는 방식은 상당히 철학적이면서도 동시에 굉장히 의인화되어 있습니다. 의인화라는 방식은 유치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감정의 공기를 시각적으로, 와닿게 표현하는 데는 상당히 효과적입니다. 사변()의 영역을 체험과 일상의 영역으로 끌어옵니다.

또 소설의 전체적인 분위기 탓인지, 잔혹범죄가 아닌 인간관계에 대해서 쓴 것도 그 어떤 범죄에 대한 묘사보다 더 을씨년스러움이 묻어납니다. 오랫동안 같이 산 부부, 혹은 그보다는 적은 시간을 함께 보냈지만 의심이 개입된 부부, 오랫동안 열등감을 주고 받은 형제 관계가 냉정하게 바라볼 때 그 얼마나 싸늘해질 수 있는지를 제대로 보여줍니다. 어떤 범죄가 일어났을 때 가장 가까운 관계에서부터 용의자를 추려나가는 것도 어쩌면 그러한 관계의 본질에 있겠지요.

가즈코의 굳은 표정 위에는 목욕 후 바른 화장수의 흔적이 주눅든 기색도 없이 반들반들 빛나고 있었다. 그것은 더없이 안온하고 예사롭고 일상적인 윤기이며, 그녀가 남편과 무관하게 자기 자신을 유지하기 위해 베풀어온 "무언가"였다. 그에게는 그것이 자신과 아내 사이에 놓인 무한에 가까운 거리로 느껴졌다. p.354

한 번에 그 뜻이 확 와닿지 않는 '결괴(決潰)'라는 제목은 '방죽이나 둑 따위가 물에 밀려 터져 무너짐'이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1권은 '터져 무너짐'을 주로 보여줬습니다. 2권에서는 그것이 어찌하여 '물에 잔뜩 밀려' 터져 무너지지 않고는 안 되었나를 더 촘촘하게 보여줄 것 같습니다. 읽기 전에 벌써 조금은 두렵고 무섭습니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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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주받은 피 블랙 캣(Black Cat) 13
아날두르 인드리다손 지음, 전주현 옮김 / 영림카디널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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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슬란드 레이캬비크에서 非아이슬란드식 살인에 대한 소설들을 주로 쓰고 있는 작가, 아날두르 인드리다손의 에를렌두르 반장 시리즈 중 한 작품입니다. 국내에 번역된 세 작품 [저주받은 피], [무덤의 침묵], [목소리] 중에는 시기적으로 가장 앞선 소설입니다. 


저는 [무덤의 침묵]을 먼저 읽었는데, 물론 에를렌두르를 둘러싼 개인사나 또 함께 일하는 후배 형사 등의 캐릭터에 대한 파악을 위해서는 발간된 순서대로 읽는 게 가장 좋겠지만, 순서를 바꿔 읽어도 크게 상관은 없습니다. 어차피 에를렌두르 시리즈 전권이 국내 번역된 것도 아니고, 또 다른 작품을 보지 않고 이 중 하나만 보더라도 캐릭터나 그 캐릭터의 상황을 이해하는 데에는 지장이 없게 설명이 돼 있습니다. 

이 책은 약 40여 일 전, 아이슬란드로 출발하는 전날 밤에 읽었습니다. [무덤의 침묵]을 읽고 좋아서, 레이캬비크에 가면 아날두르 인드리다손 작가를 만날 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품고 말입니다. 전체 인구 30만의 나라에 간다고 제가 너무 쉽게 생각한 것이었지만 그 생각만으로도 설레긴 했습니다.

[저주받은 피]의 내용은 제목 그대로입니다. 한 노인이 그의 집에서 머리에 재떨이를 맞고 사망한 채 발견됩니다. 사체 옆에는 '내가 바로 그다'라는 메시지가 남겨져 있습니다. 살인자를 찾기 위해서는 피살자에 대해 조사하는 게 먼저입니다. 그가 왜 누군가에게 의해 강제로 삶을 종료당해야 했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그와 그의 삶의 궤적을 쫓아야만 합니다.

피살자에 대해 조사하던 에를렌두르는 그가 과거 강간으로 고소당한 전력이 있음을 발견합니다. 그와 그에게 강간을 당한 피해자들, 그와 함께 현장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실종된 친구, 당시 강간 사건을 조사한 형사, 피해자의 가족들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그가 왜 누구에 의해 죽었는지가 밝혀집니다.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마다 새로운 사실과 또다른 새로운 사람이 등장하면서 사건은 조금씩 모습을 드러냅니다. 아날두르 인드리다손의 소설은 이런 측면에서 추리소설로서의 묘미를 충분히 갖추고 있습니다. 새로운 등장인물의 등장과 함께 독자가 예상했던 방향과는 조금 다른 방향으로 비틀면서 새로운 국면을 제시하는 방식은 정통 추리소설의 방식에 굉장히 충실합니다.

그러나 아날두르 인드리다손의 작품의 미덕은 그 과정에서 드러내는 사람들의 고통과 그 비극에 대한 진지한 위로에 있습니다. 이 작품 역시 읽다보면 '저주받은 피'의 실체가 무엇인지, 그리고 단순히 다섯 글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피 속의 저주가 얼마나 비극인지를 뼈저리게 느낄 수 있습니다. 범인이 누구인지 맞히는 것은 중요하지 않아지고, 평범했던 말 그대로 범인(凡人)이 왜 끔찍한 살인을 저지르는 범인(犯人)이 될 수밖에 없었는지에 더 귀 기울이게 됩니다.

이것은 피해자가 죽어 마땅하다는 비난도 아니고, 살인자는 당연히 그랬어야 했다고 인정하는 면죄부도 아닙니다. 그저 다행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직접 겪지 않아도 됐던 비극에 대한 이해와 공감입니다. 아날두르 인드리다손은 끔찍한 범죄를 이야기하면서도 이렇게 인간에 대한 따뜻한 이해와 위로를 전할 줄 아는 작가입니다. 손이 찬 사람이 사실은 마음이 따뜻하다고 하는 말은, 손이 차가운 제가 좋아서 믿는 말이지만, 이 말을 아날두르 인드리다손에게도 적용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추운 나라에 사는 사람이 사실은 마음이 굉장히 뜨거운 모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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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누구 오늘의 일본문학 12
아사이 료 지음, 권남희 옮김 / 은행나무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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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소설입니까.

라고 할만큼 아주아주 리얼리티가 살아있는 소설입니다. 작가의 전작인 [내 친구 기리시마 동아리 그만둔대](영화제목 [키리시마가 동아리활동 그만둔대]와 미묘하게 달라 늘 헷갈리는 이 제목!) 역시 고등학생들의 일상을 굉장히 현실적으로 보여줬습니다만, [누구]는 정말이지 현실의 인물과 대화들을 그대로 옮겨온 것 같은 작품입니다.

아사이 료가 대학 졸업 후 곧바로 취직을 했다고 들었는데, 짐작해보건대 이 작품은 길지 않았을 그의 '취준생' 시절 동안 경험한 것들을 바탕으로 쓴 것 같습니다. 작가다운 관찰력으로 보고 들은 이야기로 여기 소설의 주인공처럼 몇 년씩 취업준비를 하지 않고도 이렇게 한 편의 소설을 완성한 것이지요.

저 또한 첫 직장을 관두고 문턱이 높은 곳을 목표로 짧지 않은 기간 동안 구직활동한 경험이 있고, 모르는 사람과 주로 이야기하는 트위터보다는 아는 사람들과 소통하는 페이스북을 주로 하긴 하지만 적극적인 SNS 사용자입니다. 그래서인지 여기에 나오는 이야기들은 낯설고 새롭다기보다는 굉장히 익숙했다고나 할까요.

이 책을 읽는 것은 구직활동을 하던 때의 고민들, 과연 나를 어떻게 보여줄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 자기소개라는 명목으로 한껏 나를 포장하면서 느끼는 자괴감, 때로는 사상 검증까지 받아야했던 면접 경험 등을 고스란히 되짚어보는 과정이었습니다.

그렇게 친숙하고 익숙한 이야기들인데도 저는 이상하게 이 책이 쭉쭉 읽히지가 않았습니다. 리얼리티가 살아있다기보다는 말그대로 현실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 같아서 소설을 읽고 있다는 생각보다는 누군가의 '취업준비 수기'를 읽는 기분이었달까요.

'리얼리티가 살아있는 참신한 청춘 소설'이라는 평을 받으며 전후 최연소 나이로 나오키상을 받았지만 저는 그러한 평가에 고개를 갸우뚱하게 됩니다. 물론, 문학에서의 '참신함'이란 이전에 쓰여지지 않았던 것을 쓰는 것에 큰 가치를 둡니다. 이전에 이토록 적나라하게 구직활동을 하는 이 시대의 청춘들에 대해서 쓴 작품이 없었다면 이 작품은 '참신하다'는 평을 충분히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처럼 가까운 과거에 구직활동을 해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받아들이는 것이 다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고보니 이상합니다. 열일곱살들의 이야기와 감성을 섬세하게 그렸다는 평을 받았다는 [내 친구 기리시마 동아리 그만둔대]를 읽었을 때는 너무 오래전 이야기라 공감이 잘 안 되고 그 섬세함도 크게 와닿지 않는 것 같다고 썼었는데 말입니다.

곰곰히 되짚어보면, [누구]의 참신함에 대해서는, 멀지 않은 과거에 너무 직접적으로 고스란히 체험해본 것을 너무 그대로 보게 돼서 크게 공감하지 못하고 있고, [내 친구 기리시마 동아리 그만둔대]의 섬세함에 대해서는, 그 시기를 지난지 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기 때문에 제대로 느끼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오랜 시간이 지나도 그 시절의 감정이나 감성이 떠오르게 하는 경우도 있는데, 아사이 료의 작품에 대해서는 이런 느낌을 갖게 되는 이유가, 아마 그 적나라함과 사실성에 있는 것 같습니다. 은유나 상징이 강하다면 독자가 스스로 읽어낼 수 있는 부분이 있어서 꼭 내가 겪어본 일인지 아닌지, 그 시절을 지나왔는지 아닌지와 상관 없이 공감도 하고 감동도 하고 또 다른 생각도 많이 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아사이 료의 작품은 굉장히 구체적이기 때문에 툭툭 읽다가 걸리는 부분이나 와닿지 않는 부분이 좀 더 많이 생기고 그것이 인상깊게 남는다고 할까요.

아사이 료의 작품을 두 번째로 읽으면서 느꼈습니다. 대체로 어떤 작가의 작풍을 좋아하는 것이 독자라면 저마다 있듯이, 아마 아사이 료 작가의 작풍은 저의 취향과는 잘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이 작품이 평단의 극찬을 받으며 상을 받은 이유는 아마도, 대체로 청춘의 시기도, 취업준비생의 시기도 오래전에 지나왔을, 이제는 한 국가의 문단에서 권위를 인정받으며 나오키상이나 스바루상의 심사위원이 되어 있는 세대의 작가들에게 이런 이야기 자체가 낯설고 새롭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미 지나온 청춘은 대체로 아릅답게 느껴지고, 또 이미 훌쩍 지나와버렸기 때문에 10대나 20대 사이에서는 평범하고 일상적으로 공유하는 현실이나 감성은 대체로 참신하게 느껴지고, 그들의 감정표현이 섬세하고 디테일하게 느껴지는 건 아닐까요. 또 이렇게 노골적으로 대화나 상황 등을 옮겨오는 방식 역시 기성 세대에게는 참신하게 다가갈 것 같고요.

어쨌든 이 작품이 참신하다는 평을 받게 한 또 다른 포인트인 트위터를 통해 결국은 서로의 이중성이 드러나고 사실은 위태로웠던 관계들이 무너지는 과정은 흥미로웠습니다. 

저 역시 그 비판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는 SNS의 사용자이지만, 이메일 주소를 통해 SNS 계정을 찾아낸다거나 포털 검색창의 자동완성 기능으로 어떤 사람을 파악하고, 인간의 이중성이나 천박함을 드러내는 부분은 통쾌했습니다. 

그리고 굉장히 리얼했기 때문에 현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어떤 치졸함을 실제로 지켜보고 있는 듯해 민망하기도 하고, 소설을 읽고 있는 것이 아니라 친구의 경험담을 듣고 있는 것 같아 긴장감도 느꼈습니다. 

아사이 료가 각광받는 것은 바로 그러한 적나라한 리얼리티를 사소한 일상을 쓰며 극대화하는 점에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글쓰기 방식에 대한 저 개인의 호불호를 떠나서 아사이 료가 그러한 장기를 가진 것은 분명합니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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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7일]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제7일
위화 지음, 문현선 옮김 / 푸른숲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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펑펑 울었습니다. 예전에 신경숙 작가의 [엄마를 부탁해]를 읽고 울었던 것에 약간 못 미치게 운 것 같습니다. 그때는 만성이던 중이염이 다시 심해져 병원을 찾아야 했을 정도로 엉엉 울었거든요. 미미여사의 [화차]에는 이런 문구가 나옵니다. "히사에 아줌마가, 너무 많이 울면 중이염 걸리니까 참으라고 했어." 


엄마나 아빠는 항상 우리에게 커다란 슬픔이 담긴 우물 같은 존재인가 봅니다. 우리 엄마 아빠를 떠올려도 울게 되고, 남의 엄마 아빠 이야기를 들어도 어김없이 매번 울게 되니 말입니다. 아무리 그 슬픔을 퍼내고 퍼내도 왠지 서럽고 슬픈 것은, 아마도 관계 자체에 내재하는 커다란 무언가 때문입니다. 그들이 우리에게 주었고 우리는 도저히 그들에게 되돌려줄 수 없는, '커다란 무언가'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는, 너무너무 크고 많은 것들 말입니다. 그리고 사실 우리들은 우물 속의 그 슬픔을 퍼내기보다는 더해주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책 뒷날개에 이런 문구가 있습니다.

나는 죽는 게 두렵지 않아. 조금도 두렵지 않단다. 내가 두려운 건 다시는 너를 못 보는 거야 (p. 135)

둘째 날, 양페이와 그의 전부인 리칭이 만나는 순간까지만 해도 이 말은 둘 중 한 사람이 한 말일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셋째 날, 아버지와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아직 이 문구가 나오지 않아도 알 수 있었습니다. 이 말은 양페이 아버지가 양페이에게 한 말이라는 것을요. 

 

사후 7일 동안 양페이는 살아 있을 때 깊고 얕게 연을 맺었던 많은 사람들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하지만 이 책 전체를 관통하는 것은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전체 장에 걸쳐 골고루 아버지와의 이야기가 나오지만, 주로 아버지와의 기억을 담아놓은 셋째 날의 분량이 가장 길기도 합니다. 양페이와 아버지의 사랑은, 책을 다 읽은지 보름이 지난 지금도, 양페이와 그 아버지를 떠올리기만 해도, 그저 눈물이 날 것만 같은 아름답고 큰 사랑입니다.

가까이에 있는 것일수록 빨리 사라지고, 멀리 있는 것일수록 늦게 사라지는 게 이상해 아버지에게 물었다.
"왜 그런 거예요?"
아버지가 슬픈 목소리로 대답했다.
"모르겠구나."
p. 106

아버지가 불치병에 걸려 집을 나간 뒤 행방이 묘연하다고 하자 다섯 노인의 눈가가 붉어졌다. 손가락과 손바닥이 너무 거칠어서인지 다섯 명 모두 손등으로 눈물을 닦았다.
p.141

쓰며 보니 저에게 [제7일]은 '눈물'이네요.

양페이가 죽어서 리칭과 재회해서 나누는 대화가 첫 고비였습니다. 출근길 지하철에서 읽다가 저도 모르게 눈물을 훔쳤는데 마침 대화가 무르익는 장면에서 내려야하지 않았다면, 저는 바보같이 그곳에서 울고 말았을 겁니다. 죽는 건 슬픈 거지만, 헤어지는 건 슬픈 거지만, 양페이는 묘하게 슬픈 사람이라서 그가 하는 이별과 그가 겪은 죽음은 이상하게 곱절로 더 슬픕니다. 

양페이나 양페이의 아버지, 그리고 하오아저씨 부부처럼 말그대로 선한 사람들을 실제로 만나기는 너무 어렵기 때문에,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마땅한 속세의 기쁨을 누리지 못할 것을 알기 때문에 그들을 떠올리기만 해도 이렇게 그들을 대신해서 서러운 감정이 복받치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설사 그들은 그대로 행복했고 아무것도 바라거나 원망하는 것이 없다해도, 이미 책을 읽고 있는 저는 그들의 그 자연스럽고 욕심 없는 삶을, 가난하고 어려운 삶으로밖에 생각하지 못하는 지경이 된 것 같습니다.
 
양페이의 아버지는 기차선로에서 발견한 양페이를 의심 없이 불만 없이 자신의 아들로 키웁니다. 그래서인지 양페이는 후에 재회하는 친부모보다는 양아버지인 양진뱌오를 더 많이 닮았습니다. 욕심 없이 소박하고 착하며 좋아하는 여자 앞에서는 다소 소심해지는 면까지도 비슷합니다. 자식은 부모를 닮는데 그 유전자만을 닮는 건 분명 아니지 싶습니다.

양진뱌오는 기본적으로 선한 사람입니다. 장가도 가지 않은 젊은 그의 인생에 그렇게 갑자기 끼어든 양페이를 한 순간도 원망하거나 미워하지 않았습니다. 놀라운 것은 저희 엄마들도 다들 그랬다는 겁니다. 

이제 막 아이들을 낳아 기르기 시작하는 친구들이 하도 육아의 어려움을 이야기하고 저도 짐작과 공감이 가는 바, 엄마에게 얼마 전 물어봤습니다. 엄마는 힘들지 않았는지, 예전에는 남편들이 육아나 가사일은 나몰라라 했는데 원망스럽지 않았는지 말입니다. 그런데 엄마는 단 한 순간도 저희들 때문에 몸이 힘들다거나 도망가고 싶다거나 잠시라도 혼자 쉬고 싶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고 했습니다. 제가 아무리 새벽에 울어도 깨서 함께 안아주거나 힘들겠다고 토닥여주지 않는 아빠를 원망해본 적도 없었다고 합니다. 일주일만 혼자 있고 싶다거나 너무 힘들다고 하소연하는 친구들을 흉보고자하는 것은 결코 아니고요, 단지 어떤 일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는 것, 그것이 사람의 마음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가를 알게 됐습니다.

양페이의 아버지는 그렇게 갑자기 양페이의 아버지가 되고서도 모든 것을 자연스럽게 당연하게 받아들였고, 심지어 양페이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다 포기해야 했을 때도 양페이를 원망하거나 미워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까요. 그저 그는 양페이 친모의 말대로 굉장히 좋은 사람입니다. 실제로 만나기 쉽진 않지만 절대로 없다고는 할 수 없는 그런 '굉장히 좋은 사람' 말입니다.

넷째날, 다섯째날, 여섯째날까지도 양페이는 계속해서 속세의 사람들을 만납니다. 실제로 이웃이었던 사람들도 있고, 얕게 연을 맺었던 사람들도 있고, 단순히 뉴스에서 소식을 접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대부분 가난하고 억울한 사람들입니다. 죽어서도 돈이 없어 매장되지 못한 사람들이죠. 그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도 양페이의 단 한 가지 관심은 아버지를 찾는 것입니다.

그렇다보니 제 눈물도 마를 날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울고 또 울고, 어느 순간은 너무 서러움이 뱃속부터 밀려올라와 엉엉 끄윽끄윽하고 울면서도 제 맘 한켠에는 또 이런 의심이 피어올랐습니다.

위화라는 이 사람, 나를 울리려고 작정을 했나. 

소위 '신파'가 아닌가 하는 의심을 하기 시작한 겁니다. 하나같이 구구절절한 사연들도 그렇거니와 어쩜 그렇게 마침 죽기 전에 관계 있었거나 소식을 들었던 그 사람들을 딱딱 만날까, 하는 지나친 우연의 남발 때문에 다소 작위적이라는 생각을 하기에 이른 겁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너무 특별한 사연을 갖고 있고, 모든 사건들이 다 너무 특별합니다. 그래서 재미와 감동이 있으나 그저 눈물을 빼려고 작정한 신파는 아닌가, 의심을 해보았습니다.

결론은 아직 유보입니다. 위화 작가의 작품은 [제7일]이 처음이기 때문입니다. 작가가 정말로 삶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인지, 아니면 사람들을 자극하고 싶어 사건과 상황들을 과장하고 있는 건 아닌지, 다시 한 번 판단해보고 싶은 마음입니다.

분명한 것은, 영리하고 감동적인 작품입니다. 주변의 착하지만 가난한 인간 군상들, 그리고 그 보통의 인간들이 겪어내야하는 사회의 부조리와 벗어날 수 없는 가난의 굴레들을 아주 적절히 엮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 사건들 중에는 도저히 실제로 일어난 일이라고 믿을 수 없는 일들도 있지만 우리나라에서도 흔히 보는 부조리의 변주들도 많습니다. 그리고 대부분 죽은 사람들을 통해 그 사건들을 이야기하기 때문인지 그것이 심각하게 이야기되기보다는 관조적인 유머로 승화됩니다.

다만 그런 사람과 사건의 연결고리들이 너무 매번, 많이 등장하는 바람에 조금은 작위적이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것은 아쉬웠습니다.

그렇게 온 인생으로 양페이를 키워내고도 막상 자신이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 사라져버린 양아버지 양진뱌오와 결국은 아버지를 찾아내고만 양페이는 소설 속 허구의 인물이지만 또 어딘가에는 분명 있을 마음들이라고 생각하면, [제7일]을 읽으며 그토록 서러웠던 울음들이 아깝지 않습니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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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덤의 침묵 블랙 캣(Black Cat) 11
아날두르 인드리다손 지음, 이미정 옮김 / 영림카디널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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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그렇습니다. 저는 이런 추리소설이 좋아요!


[무덤의 침묵]은 한 꼬마의 생일잔치에서 발견된 뼛조각에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그 뼈는 레이캬비크 외곽의 그라파르홀트 언덕배기에 있는 공사장에서 주워온 것입니다. 그곳에는 발견된 뼛조각의 나머지 뼈들이 묻혀 있습니다.

형사 에를렌두르는 뼈를 발굴할 수 있는 조사단을 부릅니다. 고고학자인 스카르페딘은, 빨리 그 유골이 누구의 것인지를 밝혀내고 싶은 에를렌두르의 마음과 달리 느긋하기만 합니다. 급하게 서두르다가는 유골과 그 주변환경이 훼손될 수 있다는 거죠.

만약 [무덤의 침묵] 1시간짜리 미드였다면, 그 즉시 각종 첨단과학장비로 뼈와 주변환경을 분석한 후 어렵지 않게 그 유골의 신원과 뒷이야기들을 밝혀냈을 겁니다. 하지만 이 소설은 고고학자 스카르페딘과 아주 성격이 비슷합니다. 

"인내는 미덕이죠. 그 점을 명심하세요."

스카르페딘이 에를렌두르에게 자주 하는 말은 인내하라는 겁니다. 이것은 곧 아날두르 인드리다손 작가가 독자에게 하는 말로 봐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스카르페딘은 답답할 정도로 신중하고, 마침 병리학자는 스페인으로 짧지 않은 휴가를 떠났습니다. 어차피 서둘러 유골을 파내어봤자 그것을 분석해줄 사람이 없으므로 에를렌두르는 부하들과 함께 자신들의 방식으로 꼼꼼히 사건을 조사합니다.

이야기는 크게 세 덩어리로 진행됩니다. 에를렌두르 반장, 엘린보르그, 올리가 사건을 조사해나가는 과정, 고집 세고 무뚝뚝한 에를렌두르의 불행한 가족사, 그리고 초반에는 누구의 언제적 이야기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는 한 처참한 가족의 이야기가 그 세 얼개입니다.

장르소설을 읽고 감상을 쓰면서 너무 줄거리를 자세히 언급하면 이것은 여러가지 측면에서 아직 읽지 않은 독자의 즐거움을 빼앗는 일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가능하면 줄거리에 대해서는 최대한 말을 아끼고 싶습니다. 하지만 아마 장르문학 팬이라면, 앞에 간략하게 소개한 내용만 봐도 대략의 줄거리와 흐름을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짐작이 크게 틀리지 않을 겁니다. 

[무덤의 침묵]의 미덕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유골 혹은 범인의 정체가 밝혀지는 바로 그 마지막 순간에 모든 재미와 초점이 몰려 있는 것이 아니라, 작품 전체가 균형적으로 의미를 가진다는 겁니다. 처음부터 그 유골이 누구의 것인지 알고 보더라도, 그 유골은 누구에 의해 어떻게 죽임을 당한 것인지 다 알고 이 책을 읽는다해도, 그들이 어떤 삶을 살았고 어떤 고통을 겪었고 또 이를 수사하는 에를렌두르 이하 조사팀이 어떻게 관심을 갖고 귀를 기울였는지를 보는 재미와 가치가 훨씬 큽니다. 뭔가 대단한 반전에 가장 큰 가치를 두고 장르소설을 즐기는 분들에게는 이야기를 풀어가는 과정이 다소 지루하게 느껴질 지도 모르겠지만, 저는 그 과정도 굉장히 흥미진진했습니다.

에를렌두르와 전 부인 할도라, 자신을 망가뜨린 채 아빠를 원망하는 딸 에바와 모든 것에 무관심한 아들 신드리의 이야기와 유골과 얽힌 과거의 이야기들, 그리고 수사 중에 만나는 사람들 간의 관계나 그들의 증언을 따라가다보면, 점점 더 궁금해집니다. 단순히 유골은 누구의 것일까 하는 것보다는 그 사이엔 어떤 일들이 있었을까 하는 것이 더 궁금한 거긴 하지만요. 그리고 동시에 그 유골이 특정인의 것만은 아니기를 하는 바람도 저절로 생겼습니다. 행복한 삶을 살았든, 불행한 삶을 살았든, 모두 결국 죽긴 하지만 적어도 그 언덕에 그렇게 누구의 것인지도 모르게 묻혀 수십년 후에 우연히 발견되는 형식의 죽음은 아니었기를 바라게 되는 거죠.

작가가 이 작품에서 가장 중점을 두어 이야기하는 것은 바로 '가정'에 대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가정을 파국으로 몰고 가는 것이 가정폭력입니다. 우리는 흔히 '가정폭력'이라는 네글자로 그 모든 고통과 불행에 대해서 이야기하지만 그것을 직접 겪은 이에게는 이 단어가 결코 자신이 겪은 그 고통과 불행을 설명하거나 지칭하지 못합니다.

"이혼했나 보군요." 여자는 에를렌두르의 허름한 차림새를 보고 말했다. 
"공교롭게도 그렇습니다. 부인에게 물어보고 싶은게......, 가정폭력 사실에 대해서 묻고 싶은데요."에를렌두르가 말했다. 
"영혼을 살해하는 범죄를 일컫는 편리한 말이죠. 그게 진정 어떤 일인지 모르는 사람들이 쓰는 순진한 말 말예요. 평생 동안 영원한 두려움에 떨며 사는 인생이 어떤지 아세요?"


가정폭력의 가해자는 알고 보면 대부분 가정폭력의 피해자였고, 가정폭력의 피해자는 또다시 가해자가 되는 악의 순환에 대해 아주 집요하게 파고들어 찬찬히 하나하나 다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결혼'이라는 관습을 통해 맺어지는 '가정'이라는 것에 대해 작가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것 또한 꽤 흥미롭습니다. 이미 결혼한 두 가정, 그러니까 에를렌두르 반장과 악마 (토르)그리무르의 가정은 결과적으로 결혼을 통한 행복한 가정 이루기에 실패했습니다. 결혼에 대한 논의(?)는 진행되고 있지만 결국 결혼에 이르지는 못한(않은) 두 가정, 벤자민과 그의 약혼녀, 그리고 올리와 그의 애인 베르그토라 역시 결혼하는 데 실패합니다. 

먼저 결혼한 두 부부를 보면 공통점이 있습니다. 할도라와 결혼한 에를렌두르가 결혼할 당시 명확한 결혼관이나 의지나 확고한 사랑의 감정 없이 어쩌다보니 결혼하게 된 것처럼, 이미 한 아이의 엄마였던 그리무르의 아내(책 마지막 장까지 이름 없이 '엄마'로만 등장하는 이 여성) 역시 남편과 결혼할 당시 에를렌두르가 결혼하게 된 과정이나 동기와 비슷하게 어쩌다보니 결혼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올리는 반대로 사랑하는 것은 명확하지만 결혼에 대한 생각이 없어 애인과 갈등을 겪습니다. 베르그토라는 결혼과 아이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서로 원하는 바가 다르다보니 이것을 터놓고 이야기하지도 못합니다. 쉽게 터놓고 할 수 있는 성격의 논의가 아니기 때문이죠. 근데 막상 이야기를 나눠보면 둘이 서로 합의할 수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결혼을 통한 안심과 확인이냐, 지금 느끼는 감정에 대한 충실함이냐를 막상 이야기해보면 두 사람이 원하는 것이 결국은 같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겁니다.

과거의 연인인 벤자민과 약혼녀의 경우도 결국 결혼은 하지 못했지만 두 사람이 서로를 사랑한다는 것만큼은 누가 봐도 부정할 수 없을 만큼 명확했습니다. 그리고 이 커플의 경우 전혀 다른 외부의 요인이, 어떻게 보면 또 다른 가족으로 인해 불행한 결말을 맞고 맙니다. 너무 안타깝습니다.

직접적으로 가족을 때리는 것은 명백한 폭력이고, 마음에 상처를 주는 언어폭력은 단순한 구타보다 더 나쁘다는 이야기가 적지 않게 나옵니다. 이것은 누구에게 물어도 같은 생각일 겁니다. 그런데 여기에 보태서 작가는 '그저 해야 될 것 같아서 하는 결혼을 하는 것' 또한 다른 식구들에게는 일종의 폭력이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에를렌두르는 그 결혼으로 인해 본인은 물론 헤어진 아내, 딸, 아들 모두에게 상처를 주게 되고 결국은 그것 때문에 본인도 또다시 고통을 받게 됩니다. 영혼 없는 청혼을 받아들인 과거 이야기 속의 '엄마'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그런 식으로 결혼을 결정했다고 해서 그런 고통을 받아 마땅하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런 식으로 결혼하지 않았으면 좋았을텐데 하는 안타까움을 불러 일으킵니다. '원해서 하는 결혼'과 '필요해서 하는 결혼', 혹은 '해야 할 것 같아서 하는 결혼'은 분명 다른 겁니다. 작가는 그렇다면 과연 '결혼'은 무엇이고 왜 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집니다. 꼭 누구를 탓한다기보다는 여러 가족의 이야기를 여러 형태로 들려주면서 말입니다.

"기특하게도 벤자민은 언니에게 잘해 줬어요. 연애편지 같은 것도 썼고. 그 당시에 레이캬비크 사람들은 약혼을 하면 긴 산책을 나가곤 했어요. 평범한 구혼과정이었죠." p. 170

이 얼마나 아름답고 로맨틱한가요. 약혼을 하면 긴 산책을 나간다니. 그것이 평범한 구혼과정이라니. 그러니까 약혼과 본질은 바로 이런 데에 있다고 역설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요. 그래서 아직 결혼하지 않고, 죽지도 않은 올리 커플을 통해 어느 정도는 작가가 생각하는 바람직한 사랑과 결합의 모습을 보여줬다고 생각합니다. 그것도 역시 수많은 경우와 형태 중 하나에 지나지 않겠지만요.

이 소설의 또다른 장점은 아이슬란드라는 나라의 매력 또한 느끼게 해준다는 겁니다.

"아이슬란드에서 사람들이 실종되는 전형적인 시나리오야. 우리는 이 나라에 살고 있기 때문에 그런 사건을 설명하고 이해할 수 있지. 날씨가 얼마나 갑작스럽게 나빠지는지, 또 그 사람의 경우와 비슷한 일이 끊임없이 발생한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누구도 그런 일을 의심하지 않아. 그런 곳이 바로 아이슬란드니까." p.124

에들렌두르는 그라파르홀트로 가는 길에 눈보라 속에서 길을 잃고 실종된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욘 아우스트만에 관한 이야기를 떠올렸다. 욘 아우스트만은 1780년에 블론두길에서 얼어죽었다. 그의 말은 목이 잘린 채 발견되었지만 욘의 유해는 손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
그 손은 파란색 니트 벙어리장갑 안에 들어 있었다. p. 127

그러면서 동시에 장르소설에서 전형적으로 사용하는 수법, 그러니까 맥거핀-헷갈리게 하기- 등을 활용함으로써 독자들의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듭니다. 워낙 오래된 사건이고, 아이슬란드에는 인구자체가 많지 않으며, 날씨도 변덕스럽다는 점을 통해 아이슬란드라는 나라도 보여주고, 추리 그 자체에도 독자를 개입시키는 거죠. 

이제 저는 며칠 후면 아이슬란드로 갑니다. 비록 짧은 열흘 동안의 일정이지만, 아이슬란드를 가기 전에 단순히 여행책보다는 그 나라의 문화나 사람들을 이해하고 싶어서 아이슬란드 작가가 아이슬란드를 배경으로 쓴 소설을 찾아보다가 우연히 이 작가를 알게 됐습니다. 그리고 연대기상으로는 이 [무덤의 침묵]보다는 [저주 받은 피]를 먼저 읽고 [무덤의 침묵], [목소리] 순서로 책을 봤어야 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점은 다소 아쉽지만 이 책을 읽기를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대부분의 이야기가 레이캬비크 중심부보다는 외곽 위주로 진행되고, 배경도 주로 1940년대이긴 하지만 뭔가 관광지로서의 아이슬란드보다는 생활터전으로서의 아이슬란드에 대해서 조금이나마 느끼게 되었다고 할까요.

제가 무지해서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 연합군이 아이슬란드에까지 파병을 했는지는 몰랐는데, 처음에는 영국군이, 영국군이 떠난 후에는 미국군대가 레이캬비크에 주둔했다는 사실 또한 새롭게 알게 됐습니다. 

이 모든 이야기를 한꺼번에 버무려서 조급해하는 독자를 진정시켜가며 천천히, 하지만 꼼꼼히 삶과 사람들의 본질을 짚어가며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방식이 멋있습니다. 글 잘 쓰는 작가, 재미있게 쓰는 작가는 많지만, '멋있게 쓴다'는 느낌을 주는 작가는 흔치 않은데, 아날두르 인드리다손이 제게 그랬습니다. 이제 사흘 앞둔 아이슬란드 여행이 더욱 설레는 이유입니다. 인드리다손 작가는 레이캬비크에 살고 있나요?

+ 잡설을 한 가지 더 풀자면, 저는 이런 우연에 과하게 의미를 부여하는 편인데, 이 책 말미에 '파과병'을 앓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두산백과에서는 '파과병[hebephrenia, 破瓜病]'을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감정과 의지의 둔화가 눈에 띄고 치매화(痴呆化)한 것 같은 병세를 나타내는 일이 많고 예후가 불량하다. 매우 서서히 시작하고 어린이처럼 명랑해지고 허튼웃음을 웃거나 혼잣말 등을 볼 수 있으며, 무위하게 지내는 일이 많아지고 드디어는 고도의 정신황폐에 빠진다. 20세 전후의 파과기(破瓜期)에 발병하는 일이 많아서 성별에 관계없이 이름을 붙인 것이다. 영어명은 청춘(청년의 마음)이라는 뜻의 그리스어에서 유래한다.' 

왠지 최근에 읽은 구병모 작가의 [파과]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는데요. 구병모 작가가 이렇게 물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당신의 결론은 破果입니까, 破瓜입니까. 이 질문에 대해 쉽게 대답할 수 없듯이 제가 억지 의미부여를 하고 있는 이 '파과'를 둘러싼 우연에 대한 해석도 쉽사리 만들지는 못하고 있지만 그래서 인생은 더 재미있고, 좋은 문학작품을 접하는 것이 더 즐겁다는 것만큼은 분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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