펀치 - 2013 제37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이재찬 지음 / 민음사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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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펀치>는 여고생 방인영이 세상에 한 방 먹이는 내용입니다. 평범해 보일 여고생이 저지른 패륜이라는 것, 그리고도 전혀 반성의 기색 따위 없다는 것 때문에 펀치의 충격은 작지 않습니다.

 

당돌하고 냉소적인 10, 혹은 그보다도 더 어린 화자가 등장하는 소설은 그간 꽤 있었습니다. 언뜻 떠오르는 것이 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생], 은희경 [새의 선물], 심지어 여섯 살짜리 화자들이 주인공인 낸시 휴스턴의 [여섯 살] 등입니다.

 

어린 화자가 어린 화자답게 등장하는 다른 작품들도 많지만 앞에 언급한 작품들은 전반적으로 나이에 비해 성숙한, 조숙한 화자들이 이야기를 이끌어갑니다. 그들은 웬만한 어른보다 세상에 대해서 많이 안다고 생각하고, 실제로 진실을 더 잘 꿰뚫어보기도 하며, 그래서 다소 냉소적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습니다. 삶과 미래에 대해 헛된 희망이나 별다른 기대 따위는 품지 않고 세상과 주변 사람들을 자신의 잣대로 냉정하게 평가합니다.

 

<펀치>의 여고생 방인영은 비슷하면서도 다릅니다. 미래에 대한 비관과 주변 사람에 대한 냉소는 비관과 냉소를 넘어 분노와 혐오 수준입니다. 앞에 언급한 어린 화자들보다 나이가 좀 더 많기도 하지만 그들보다 더욱 과격합니다. 아무래도 시대가 또 조금은 달라졌고 방인영은 이제 곧 사회로 나갈 경계의 위치에 서 있는 인물이기 때문에 더욱 그런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큰 차이는 바로 주변인에 대한 애정과 반성입니다. 방인영은 주변인은 물론이고 가족에 대한 애정이 전혀 없습니다. 보통 미움의 감정은 애정을 기반으로 한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방인영이 부모에 대해 갖는 감정은 미움보다는 혐오나 증오입니다. 물론 그 엄마에 대해서는 연민의 감정도 갖고 있지만 이 애정을 기반으로 하지 않는 혐오가 결국은 비극을 낳고 맙니다. 그래서인지 그 후에는 반성도 전혀 하지 않습니다.

 

대부분 소설 속 주인공들이 기본으로 갖고 있는 애정과 반성(양심) 모두를 갖추지 않고 있어서 방인영은 낯설고 새로운 인물입니다. 반면, 많은 소설 속 캐릭터들이 여러 가지 변화를 겪고 변화를 보여주는 입체적 인물이라면, 방인영은 그런 점에서 오히려 평면적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된 모습을 보여주니까요. 물론 지금의 가치관’, ‘현재의 성격(혹은 인격)’을 형성하게 된 배경들을 작가가 틈틈이 보여주긴 합니다.

 

이재찬 작가가 만든 방인영이라는 인물은, 그래서 괴물입니다. 자신의 부모를 청부 살인하는 데까지는 겨우겨우 그럴 수도 있겠다 이해한다고 해도, 그 이후의 행동들을 보면 정말 괴물그 자체입니다. 그렇다면 이 괴물은 누가 낳은 걸까요. 자신의 딸에게 늘 방 변호사로밖에는 불리지 못하는 아버지가 낳은 걸까요, 얼굴은 예쁘지만 머리는 텅 빈 엄마가 낳은 걸까요. 이 두 사람이 힘을 합쳐 괴물 한 마리를 낳고 방인영이라고 이름 지은 걸까요, 평범한 아이를 낳아 방인영이라고 이름 붙이고 키워보니 괴물이 된 걸까요, 그들이 괴물로 키운 걸까요.

 

출판사가 제공하는 책 소개에 의해 정리하면 방인영을 괴물로 만든 것은 가족, 학교, 종교의 변태적 시스템입니다. 정서적 교감 없이 물질적 등가교환만 바라는 아빠, 삐뚤어지고 일방적인 모정을 보여주는 엄마, 목적도 기능도 모두 잃은 학교, 이 모든 변태적인 시스템과 가장 멀어야 하지만 오히려 가장 집약적으로 변태된 교회, 그리고 이 모든 시스템에 거부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적응하는 주변인들에 대해 방인영은 거침 없이 논평합니다

 

현정이는 어떻게 하고 싶은 일이 두 가지나 있는지 신기할 따름이다. 현정이는 사회가 원하고 사회를 위해 소비되는 노예가 되고 싶다는 거다. 사회가 개인에게 꿈을 주입하고 개인은 자신의 비용을 들여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한다. 노력의 열매는 사회가 가져간다. 개인은 소비 능력을 얻지만 그건 사회에 헌신한 것에 비하면 새 발의 피다. 중학교 때만 해도 현정이는 누구보다 피자를 좋아했다. 그땐 지금처럼 말라깽이가 아니었다. P.29

 

이 발랄한 논평이 특정 행위로 이어지기 전, 말로만 존재할 때까지는 독자로서 굉장히 속시원하고 즐겁습니다. 물론 뜨끔하기도 합니다.

 

문학도 근본적이지 않아요?"
"
문학은 빈곤한 뒷담화야
."
"
미술은
?"
"
미술은 이미지고. 이미지는 허상이지
."
"
성형외과는 왜 의대에 있어요? 미대에 있어야 되는 거 아닌가
?"
과외가 침묵했다
.
"
역사는
?"
"
안중근이 어떤 마음으로 이토 히로부미를 쐈는지는 아무도 모르잖아
."
안중근은 알겠지
.
"
안중근이 민족을 위해서 쐈는지, 김구한테 잘 보이려고 쐈는지, 아니면 자기 안의 폭력성을 위해서 쐈는지 알 수 없어. 하지만 수학은 명백해. 재론의 여지가 없거든. 증명이 되면 그게 바로 정답인 거야. 너도 수학의 세계를 알면 좋을 텐데
."
"
별로 궁금하지 않아요
."
"
그게 너의 문제야.” P.33

 

변태적 사회에 대한 방인영의 극단적 조치와 그로 인한 결과는, 현실적으로 따지고 들어가면 걸리는 부분도 있습니다. 한낱 여고생이 저지른 범죄 행위가 아무리 나름대로 치밀하게 계산되었다고 해도 허점이 있습니다. 특히 사건이 일어난 후의 그녀의 행동은 누가 봐도 충분히 의심스럽습니다. 아무리 우리나라 경찰 수사가 허술해도, 아무리 여고생이 자신의 부모를 청부살해 했을 거라고 상상하기 어렵더라도, 범인을 밝혀내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의 완전범죄는 아니었다고 보입니다.

 

다만, 끝까지 범인이 밝혀지지 않고 범인은 끝까지 반성하지 않는 것에도 작가가 말하고 싶은 바는 있어 보입니다. 사회는 그렇게 부와 권력을 모두 가진 가정에서 자란 여고생이라면 혐오에 의한 살인을 할 리가 없다고 쉽게 생각합니다. 불만을 가질 이유가 없다고, 살인동기가 없다고, 섣불리 짐작하는 거죠. 또 대신 범인으로 몰려 거짓 자백까지 하고 마는 인물은 충분히 살인의 동기, 살인을 통해 얻고자 하는 바, 살인을 하기 이전에는 가질 수 없었던 것에 대해 그럴만하다는 사회의 인정을 받는 셈입니다. 개별적 존재가 각각 가진 개성, 삶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바, 부족한 것을 얻기 위해 감수하는 것과 포기하는 것에 대한 인정이 없는 겁니다.

 

방인영은 나름대로는 남부러울 것 없을 듯한 환경에 있다는 것이 사회가 바라보는 시선이지만 그녀는 개별적 존재로서 불행합니다. 가질 만큼 가졌는데도 또 어떤 부분에서는 1등급이 아니라서 좌절하고 분노한다는 점에서는 또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해볼 수 있겠지만, 모든 것이 1등급이 아니고 앞으로도 모든 것이 1등급인 사람과는 상대가 될 수 없다는 좌절감 자체가 한 개인을 삼켜버리지 않도록 하는 가정의 사랑이나 학교의 교육이나 교회의 위안 중 그 무엇도 누리지 못했다는 점에서는 분명 변호의 여지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방인영이 이 변태적인 사회 속에서 자신이 속한 현재를 꿰뚫어보고 독야청청 인간성을 유지하는 고고한 인물이거나 자신이 비판하는 시스템이나 인간의 전형과 반대에서 세상에 경고를 날리는 선구자적 인물인가 하면 둘 다 아닙니다. 그녀 역시 분명 그 변태적 시스템 속에 누구보다 자연스럽게 안착할 만한 기회와 그럴 마음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실패했고 앞으로도 성공할 가능성이 희박해 보이자 또 다른 형태의 변태가 되어버린 것에 불과합니다.

 

바로 이런 지점에 소설 [펀치]가 갖는 진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인물이 옳고 그르다는 논쟁이나 판단 이전에, 실제로 이토록 충격적이고 폭력적이며 인간성을 상실한 인물이 충분히 존재 가능하며 앞으로는 더 많이 등장할 가능성을 예고한다고 할까요. [펀치]가 정말 아픈 것은 이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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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괴 2
히라노 게이치로 지음, 이영미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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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몸부림치며 눈을 감고 기도하듯 등을 구부렸다. 피부가 벗겨져 세상과 직접 스치는 양 고통스러워서, 자신의 윤곽선보다 조금이라도 안쪽으로 물러나고 싶었다. 몸속 깊은 곳에 조그맣게 웅크려 몰래 숨어버리고 싶었다. p.9

 

2권의 아주 초반에 등장하는 구절입니다. 막내 아들은 죽고 맏아들은 그 살인범으로 의심받고 남편은 세상과의 끈을 자꾸 놓치는 상황에서 가즈코가 느끼는 고통을 묘사한 문장입니다. 이 짧은 세 개의 문장은 1권 후반에서 2권의 마지막까지 가즈코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등장인물을 관통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물리적인 몸피가 온 세상과 스치는 듯한 고통, 그 몸통이 차지하는 크지도 않은 공간조차도 부담스러워서 그 안으로, 조금이라도 더 안으로 웅크리고 숨고 싶은 마음.

 

누군가가 죽으면 죽는 것은 그 한 사람만이 아닙니다. 료이치 역시 살해된 이후 많은 것들이 함께 죽습니다. 료이치의 아내 요시에가 다카시에 대해 갖고 있던 지성과 인간성에 대한 신뢰는 그렇다쳐도, 료이치의 부모님이 서로에 대해 느끼던 소원함은 그렇다쳐도, 료이치와 다카시의 엄마인 가즈코의 자식에 대한 무조건적인 믿음마저 함께 살해당하고 맙니다.

 

이에 대한 힌트는 1권 초반에 등장합니다. 오랜만에 고향집을 찾은 료스케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가즈코는 다카시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자신의 아들이지만 다카시에게서 느껴지는 정체 모를 거리감, 혹은 섬뜩함을요. 그것은 대부분 감정이나 속내를 쉽게 드러내지 않는 다카시의 성격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느껴지지만, 사람에게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인상이나 분위기라는 게 있으니, 가즈코도 바로 그러한 점을 느낀 것이겠지요. 부모라고 해서 자신의 아이에게 그런 감정을 느끼지 말라는 법은 없습니다. 깊은 이야기는 좀 다르지만 영화 [케빈에 대하여]에서 케빈의 엄마인 에바도 역시 그랬습니다. 케빈이 엄마와 아빠 앞에서 하는 행동이 달랐다고는 해도 똑같은 자식을 두고 엄마와 아빠가 느끼는 감정은 전혀 달랐죠. 또 사이코패스를 다룬 많은 영화나 소설 등을 보면 어릴 때 주로 동물을 해하는 자녀의 행동에 불길한 섬뜩함을 느꼈다는 부모도 많이 있습니다. 그런 경우에는 오히려 자기 핏줄에게 느껴지는 그런 감정을 애써 부인하는 것이 더 위험한 일이 될 겁니다.

 

하지만 가즈코가 다카시에게서 느끼는 감정의 원인은 조금 다릅니다. 다카시는 어릴 때 눈에 띄는 공격적이고 폭력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어른보다 더 어른스럽고 차분했습니다. 가즈코는 아마 그것이 낯설고 두려웠을 겁니다. 엄마인 자신 앞에서조차 보통의 어린 아이들 같지 않았기 때문에 '내 아들'이라는 느낌보다는 하나의 독립적인 인간으로 느껴지고, 그렇게 느껴지는 대상이 다른 누구도 아닌 내 아들이기 때문에 더욱 거리감을 생생하게 경험했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항상 남을 배려하고 응석 부리지 않고 거기다 똑똑하기까지 해서 엄마인 나의 손을 필요로 하지 않는 아들, 입 댈 데 없이 완벽해서 차갑게만 느꼈던 맏아들. 그런 다카시가 그와는 완전히 달랐던 막내 아들의 살인 용의자로 지목을 받게 되니 가즈코는 더욱 괴로워집니다. 아들의 잘못 앞에 부모들이 가장 먼저 하는 말, "제 아이는 그런 아이가 절대로 아니에요!"라는 확신에 찬 말을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정작 무자비한 살인을 저지르고도 왜 사람을 죽이면 안 되는 거냐고 되묻는 도모야의 엄마와는 완전히 반대의 경우입니다. 도모야의 부모, 특히 엄마는 항상 치마폭에 감싸고 있지만 정작 자신의 아이가 누구인지, 어떤 사람으로 자라고 있는지를 완전히 놓쳐버리고 맙니다. 있는 그대로의 자기 아들을 보지 않고 자기의 의식 속 아들만을 보고 있었으니까요. 학교에서 사고를 일으켜도 그 일을 일으킨 도모야의 이야기는 제대로 듣지 않고 다른 엉뚱한 것을 원망하며 자신의 방식대로 무의미한 체벌을 한 후 그냥 덮어버립니다. 어쩌면 너무 두려워서 진실을 마주하고 싶지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그 때문에 '그럴 아이가 아니라는 식의' 도모야의 대한 무모한 믿음은 결국 큰 비극을 낳고 맙니다. 전적으로 부모 탓이라고는 못해도, 도모야의 부모가 제대로 된 엄마, 아빠의 역할을 못한 것은 분명합니다.

 

악마의 부재를 못 견디는 것은 다름아닌 인간 자신이야! 인간은 내면의 위험에 말을 부여해 밖으로 몰아내지 않으면, 어떻게 해도 그것을 자기 자신과 혼동해버리는 참으로 딱하고 비참한 동물이야. 살인범, 강간범, 방화범, 절도범, ••••••자신이 그런 인간이 아니라고 믿으려면 자신 외의 그런 존재가 절대적으로 필요해! 그게 바로 악마야! p.331

 

작가는 이런 식으로 악마가 되어버린 사람들의 선언을 여러 차례 적지 않은 분량에 걸쳐 씁니다. 작가의 말을 보면 이것이 나쁜 짓을 저지르는 사람들의 '망상'에 불과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럼에도 한편으로는 이런 악마들의 철학에는 그럴듯한 측면도 없지 않습니다. 이런 망상에 사로잡혀서 그렇게까지 나쁜 짓을 하는구나 싶다가도 계속 얘기를 듣고 있으면 맞는 말 같이 느껴집니다. 거짓말도 진짜라고 믿으면 진실로 바뀌고, 상대방이 강하게 말할수록 그말에 설득 당할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처럼요.

 

그래서 그 어떤 상황에서도 이러한 망상, 악한 철학에 사로잡히지 않기 위해서는 부단히 노력이 필요합니다. 세상과 나에 대한 균형 잡힌 시각과 의식, 나를 지탱하는 중심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머리를 털고 정신을 차린 후 다시 '자신이 그런 인간이 아니라고 믿'기 위해 '자신 외의 그런 존재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섬뜩한 '악마'의 이야기를 보면 이제는 안쓰럽게 느껴집니다. 자신이 악마가 아니라고 믿기 위해 다른 악마를 필요로 하기 전에, 자신이 악마는 아닐까 의심스러울 때, 그를 좀 더 인간적이고 선한 방향으로 이끌어줄 누군가가 부재했다는 뜻이니까요.

 

[결괴 2]는 이렇게 잔인한 살인을 둘러싼 많은 사람들의 속을 아주 깊숙이 들여다봅니다. 피해자인 료이치의 가족과 가해자인 도모야의 가족, 그리고 또다른 피해자와 가해자들. 그 중에서도 살인자 누명이 벗겨진 후에도 그 누명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지지 못한 다카시의 고통은 끝날 듯 결코 끝나지 않습니다.

 

히라노 게이치로는 [결괴]를 통해 이토록 잔인한 고통을 끈기 있게, 어쩌면 가즈코가 다카시에게서 느꼈던 것처럼 그런 섬뜩한 냉정을 유지하면서 끈기 있게 들여다 봅니다.

 

왜 사람을 죽이면 안 되죠? / 네 가족이 살해됐다고 살해됐다고 생각해봐 / 저는 아무렇지 않은데요. 그러면 죽여도 되나요?

 

라는 식으로 이어지는 대화에서 우리는 당혹감을 느낍니다. 왜 사람을 죽여서 안 되냐고 물으면 많은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대답하겠죠. 목숨은 소중하고 누구도 그것을 함부로 앗아갈 수 없다거나, 다른 사람에게 고통을 안겨주기 때문이라거나. 일상에서는 이런 원론적인 답 너머로 깊이 들어가볼 기회가 많지 않고, 거기서 오랜 시간을 보내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목숨이 왜 소중하며 누군가가 죽는 것이 다른 누군가에게 왜 고통인지 모르는 사람이 있다고 가정해봅니다. 이런 악마는 대체 어디서 태어나 어떻게 자란 것일까요. 책을 덮고도 계속될 이 의문이 히라노 게이치로가 저에게 던진 가장 큰 화두입니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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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월의 미, 칠월의 솔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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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사람에겐 꼭 사랑한다고 말해야 해. 정말 오랜만의 단편집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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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80
하인리히 뵐 지음, 김연수 옮김 / 민음사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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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세상은 변하지 않는구나.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에 대한 한줄평은 이렇습니다. 세상은 어쩜 이다지도 변하지 않을까요. 사람은 어쩜 여기나 저기나 한결 같을까요.

 

'한국인들은', '일본인들은', '중국인들은', '영국인들은', '미국인들은', '서양인들은'이라는 말로 시작하는 특정 국민이나 특정 인종의 성향을 설명하는 말들은, 지나친 일반화의 오류라고 생각하지만 가끔은 대체로 봤을 때 맞는 듯해 보이는 경우도 많습니다.

 

기억나는 예로는, 일본 대지진 기간 동안 침착함을 잃지 않았던 일본인의 모습은 과연 '일본인들의 국민성'이라고 할만큼 한 집단으로서의 공통점을 잘 보여줬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일본인들은 과연 침착하고 그 어떤 상황에서도 예의를 지키는구나'라는 감탄도 가능했습니다. 물론, 모든 일본인들이 다 그렇지는 않을 것이라는 건 두 말 할 필요도 없겠지요. 다만, 온전히 개인으로서 존재하고 행동할 때와 한 집단의 일부로서일 때는 확실히 다를 것 같습니다. 개개인으로 보면 이런 사람도 있고 저런 사람도 있다는 것은 어느 문화권, 어느 사회에서나 같지만, 특정 장소에서 특정 사건을 겪을 때 함께 드러내는 성향에는 차이가 있는 거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1974년 2월 말경 독일에서의 약 5일 정도의 시간 동안의 사건을 그린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를, 2003년 10월 말경 한국에서 읽으면서는 그 시간이나 거리의 간극을 전혀 느낄 수가 없었습니다. 30년 전에는 이랬구나, 독일 사람들은 그렇구나 하는 차이를 전혀 느낄 수가 없습니다.

 

거리의 분위기나 사람들의 외모에 대한 묘사가 많이 등장했다면, 그래도 70년대 독일의 모습을 어렴풋이 그려볼 수 있었겠지만, 이 작품은 철저히 '사람'과 '사건'에 주목했고 사람과 사건만 보아서는 이것이 신문(언론)이 등장한 이후 그 어떤 시기, 그 어떤 장소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해도 전혀 이질감이 없을 겁니다.

 

책의 내용을 간단히 말하면, '평범하나 매력이 넘치는 젊은 여자가 우연히 위험한 남자와 잘못 얽히면 그 인생이 어떻게 망가질 수 있는가' 입니다. 더 간단하게 말하면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고요.

 

저라도, 포털에 이것과 비슷한 이야기가 오른다면, 기사를 보며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오만가지 추측을 해볼 것 같습니다. 매력적이나 도도한 젊은 여성이 은행강도 혹은 테러리스트로 지목받아 쫓기는 자와 하룻밤 만에 깊은 사랑에 빠져 남자를 도피시킨 후 그에 대해 말하기를 함구한다면, 누구나 처음에는 이런 저런 의심을 가져보겠지요. 원래 알고 있었던 사이이고 모든 것이 다 계획돼 있었던 것 아닐까, 그 매력적인 여자는 평범한 가정부를 가장한 스파이나 같은 범죄자, 혹은 테러리스트가 아닐까. 하고요.

 

그렇기 때문에 소설 속 '짜이퉁'과 같은 한 국가의 최대 독자를 가진 언론매체는 그 이야기를 다룰 때 조심해야 하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심문을 하는 경찰이나 검사는 철저히 가정이나 편견을 배제한 채 질문을 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 둘 중 하나도, 현실에서는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 모두는 잘 알고 있습니다.

 

처음 하나의 이야기는 기자에 의해서, 그리고 독자에 의해서 놀라운 속도로 번식하고, 번식된 이야기는 진실한 증언을 왜곡합니다. 그때부터는 당사자의 입도 떠나고, 기자의 펜도 떠나서, 완전히 다른 이야기로 독립하는 겁니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날까'라는 우리 속담은 그래서, 맞는 경우도 많지만 굉장히 위험합니다. '맞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 위험 요소입니다. '모두 옳다'가 아니라 '맞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닌 경우'보다는 높았던 확률 쪽에 자기도 모르게 기대게 되니까요.

 

카타리나 블룸이 결국 자신의 명예를 망치고, 가족을 망치고, 사랑을 망치고, 삶을 망치는 데 가장 큰 공헌을 세운 기자를 죽이고 마는 것(이것은 스포일러가 아닙니다. 처음부터 나오니까요)을 옳다고 두둔할 수는 없습니다. 옳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일차적인 원인이 피살자에게 없다고는 말을 못하겠네요. 카타리나 블룸이 그러지 않았으면 좋았겠지만 짜이퉁의 기자가 그러지 않았다면 더 좋았을 겁니다.

 

노벨상 수상자로 알려진 하인리히 뵐은 1972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습니다. 그리고 이 책은 1974년 출판됐습니다. 그의 다른 작품은 아직 읽어보지 못했습니다만,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는 지금 와서 보면 오히려 전혀 새로울 것도 없는 전형적인 이야기로 읽힐 수도 있지만 이 사건을 바라보고 서술하는 방식은 굉장히 흥미롭습니다. 전혀 흥분하거나 격노하지 않은 채 차분히, 그러나 냉담하게, 객관적인 시선에서 사건과 인물과 분위기와 대화를 논평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또 완전히 객관적이지는 않아서 독자라면 누구나 황색적인 언론을 비판하고 비아냥대는 작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초반 카타리나 블룸의 심문 과정에서 그녀가 검사들과 언어의 적확성에 대해 확인하고 요구하는 과정들은 굉장히 섬세합니다. 그녀가 지적하고 정정을 요구하고 다시 말하는 지점들에서 나타나는 차이들은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그 별 것 아닌 것 같은 차이가 실제로 사건을 읽는 데, 다른 사람들에게 사건을 전달하고, 그 심문 과정을 직접 보지 못한 사람들이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 아주 큰 영향을 미칠 수도 있습니다. 이런 부분들을 읽으면서 과연 하인리히 뵐만의 섬세함과 통찰력을 읽을 수 있고, 이것은 카타리나 블룸의 예민함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카타리나 블룸'이라는 한 자연인의 우수함으로도 읽을 수 있어 재미가 있습니다.

 

만약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가 줄거리가 다였다면 그저 그런 작품으로 묻히고 말았을 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그렇고 그런 일들은 예나 지금이나, 여기저기에서 허다하고, 남의 억울함이란 곧 잊고 마니까요. 그런데 이 작품에는 작가가 이야기를 전달하는 방식이나 각 인물에 대한 섬세한 묘사가 더해져있습니다. 그것이 사건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게 만들고, 작품 속에 등장하는 꽤 많은 등장인물도 각자가 모두 살아 있게 만듭니다. 대단한 작품입니다.

 

쓰고 보니, 카타리나 블룸의 운명은 최근 읽은 히라노 게이치로의 [결괴] 속 다카시와도 굉장히 일맥상통합니다. 그것 봐요. 1974년의 독일이나 2010년대의 일본이나, 다 비슷비슷하다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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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에서
김사과 지음 / 창비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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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주정이 심한 사람은 그 모습을 동영상으로 찍어 보여주면 고치거나 술을 끊게 하는 데 효과가 있다고 합니다. 술에 취했을 때 내가 어땠는지 스스로 어렴풋이 기억하거나 동석했던 다른 사람의 증언을 통해 듣는 것과 그것을 직접 보는 것은 아마 천지차이일 겁니다. 녹음된 내 목소리를 처음 들을 때의 놀라움과도 아마 비교가 불가능하겠지요.

 

내가 어떤 말을 하고 있다거나, 내가 어떤 행동을 하고 있다는 인지를 통해서 나 자신을 인식하는 방법은 그것을 아무리 성실하게 한다 해도 한계가 있습니다. 어떤 말을 하거나 어떤 행동을 하고 있는 나를 관찰하는 것 또한 나의 의식이 나를 벗어나서 나를 관찰한다는 생각, 그 관찰이 남들의 관점과 비슷할 거라는 착각일 뿐입니다. 거기에는 타인이 어떻게 생각할 거라는 부정확한 짐작까지 개입합니다. 또 자신이 말하거나 행동하는 것은 이미 스스로가 그간 해온 생각이나 행동, 자신에 대해 스스로 판단해온 것들이 어쩔 수 없이 전제돼 있기 때문에 그것이 옳고 그름을 떠나서 남들이 나에 대해 대체로 생각하는 바와는 일치할 가능성이 거의 없습니다.

 

거기다 술을 마셔서 의식을 흩트리고, 주정까지 부리는 자신에 대해 제대로 알기란 더욱 불가능합니다. 멀쩡한 정신일 때도 인간이란 누구나 혐오스러운 면을 갖고 있는 법인데 그것이 술을 마시고 부리는 주정이라면 아마 그 혐오감, 무엇보다 그것이 자기 자신에게서 표출되고 있다는 사실을 참아내기 힘들 것 같습니다.

 

김사과의 [천국에서]를 읽고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되는 것은 책을 읽으면서 비슷한 경험을 했기 때문입니다. 주인공 케이와 그녀를 둘러싼 인물들의 대화나 묘사를 보면서 그 속에서 나 자신의 어떤 모습, 그 중에서도 혐오스러운 여러 면을 한꺼번에 많이 마주하게 됐습니다. 우스꽝스러운 인물들을 마구 손가락질하며 비웃을 수 없으니 불편했습니다. 그들과 다른 나만의 어떤 면을 필사적으로 찾아보기도 했습니다만 피곤할 뿐이었습니다. 구체적인 배경과 상황을 제외하면 나는 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김사과 작가의 이번 소설은 홍상수 감독의 영화들과 굉장히 비슷합니다. 마약을 하거나 술을 잔뜩 마신 상태에서 나누는 전혀 문학적이지 않은 대화들이 많이 등장하는데, 우리가 평소에 하는 대화들과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 걸 또박또박 적힌 글자로 보자니 그것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지 모를 수가 없는데, 나 역시도 그렇겠구나 생각하면 씁쓸해집니다.

 

홍상수 영화 속의 그런 장면들을 극장에서 보면 저는 ‘하하하’ 하고 굉장히 많이 웃습니다. 웃는 지점이 남들과 어긋날 때가 많아 대체로 관객이 많지 않은 조용한 극장에서 제 웃음소리만 민망하게 울릴 때가 적지 않습니다.

 

그런데 김사과 소설 속 인물들의 대화를 읽으면서는 피식 웃긴 했어도 ‘하하하’ 하고 웃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똑같이 우스꽝스러운데, 왜지? 생각해봤더니 극장에서의 저의 웃는 행위 역시 나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다고 착각하는 와중에 극장 안에 있는 다른 관객들을 의식한 것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나 하는 의심이 드는 겁니다(이봐요, 여기에서조차 저는 분명하게 인정하지 않고 ‘아니었나 하는 의심이 드는 겁니다’라는 어중간한 문장을 쓰고 있습니다). 그런 장면에서 확실히 웃어줌으로써 나는 너무 평범하고 솔직해서 천박한 그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내비치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적어도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나’는 술은 취하지 않았으니 자신 있게 웃었겠지만, 실제로 제 안에는 그런 허영이 있습니다.

 

대화를 보여줄 뿐 생각은 들려줄 수 없는 영화와 달리 소설은 그 대화를 보여주기 전후의 상황 설명이 덧붙여져 있기 때문에 대화의 어떤 부분이 우습다 해도 실제로 소리 내어 웃기는 힘들다는 장르적인 차이도 물론 있습니다.

 

[천국에서]는 케이가 뉴욕에서 써머와 댄과 함께 지내는 1부, 한국에 돌아와서 주로 홍대 인근에서 재현과 연애하는 2부, 인천 사는 지원과 연애하고 이별하는 3부, 이 모든 것을 정리하는 짧은 4부로 나뉘어 있습니다.

 

김사과의 작품은 [2011 제2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에 실린 단편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이상한 일이 벌어지는 오늘은 참으로 신기한 날이다>밖에 읽어보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김사과의 작풍에 대해서는 짐작하는 바가 있습니다. 워낙 ‘문제적 작가’라는 평가와 함께 그녀의 작품 경향을 논하는 글을 많이 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비록 단편 한 편을 읽어본 저도 [천국에서]는 그간의 김사과 작품과 많이 다르(겠)다고 봤습니다.

 

달라진 김사과의 이번 소설에는 다음과 같은 작가의 논평이 많이 등장합니다.

 

여행자가 된 도시에서는 사람들도 여행자가 되어야 했다. 그런데 여행자가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무엇보다도 세상을 일련의 풍경으로 인지하는 것이다. 풍경이 된 세상은 아름답다. 거리에 가득 찬 쓰레기에서 고급 호텔에서 내려다보이는 스카이라인까지, 여행자의 시선 속에서 세상은 공평하게 아름답다. p.92

 

감수성은 하나의 거대한 시장이 되었고, p.94

 

갈수록 세련되어지는 도시의 풍경은 그들의 것이 아니었다. 그건 시한폭탄이 장착된 극장에서 상연되는, 세상에서 가장 길고 화려한 영화와 같았다. 끔찍한 결말이 다가오고 있지만, 관객들은 여전히 화려한 이야기에 매혹되어 있었다. p.126

 

세계화되고 자본주의에 완전히 잠식당한 세계와 그 안에서 별다른 반성이나 상황에 대한 독자적인 인식 없이 길들여진 개인에 대한 비판적인 인식을 직접적으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러한 시각 자체는 별로 새로울 것이 없지만 신랄해서 아픕니다. 저 역시 그런 여행자 중 한 명이고, 거대한 시장이 돼버린 ‘감수성’의 충실한 소비자이며, 세련되어지고 있는 도시의 풍경이 내 것이 아님을 알면서도 가끔은 내 것이라거나 내 것이 될 거라고 착각하며 살아가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만약 이러한 이야기들을 하면서, 세상이 그렇고 그 속을 사는 사람들도 다 그렇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그래도 나는 아냐’라는 식의 태도를 취했다면 아마 이 책을 끝까지 읽지 못했을 겁니다.

 

그런 뻔뻔함, 무조건 크고 새로운 것을 칭송하는 태도는 케이 윗세대 한국인들의 전형적인 특징이었다. 케이는 그런 특징이 자신의 세대에서는 제발 멸종하기를 바랐다. 물론 그것은 심오한 통찰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었고 그저 눈앞에 펼쳐진 촌스러운 광경이 참을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윗세대도 정확히 그녀와 같은 이유에서 이 도시를 깨부수고 있다는 것이었다. 단지 그들은 크고 눈에 띄는 변화를 선호하고 케이는 소박하지만 섬세한 변화를 선호한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었다. p.103

 

작가가 내세운 주인공 케이 역시 작가가 비판하는 보통 사람들과 다르지 않습니다. 허영과 자기기만으로 가득 찬,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보통 사람들과 자신을 구분 짓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는 이십대 초반의 여대생입니다.

 

‘허세 작렬’하는 사람은 과거에나 현재에나 어디에나 있습니다. 허세들은 대체로 자신이 타인 앞에 내세워져 있을 때 유독 작렬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보통 다른 사람들의 작렬하는 허세에도 쉽게 넘어 갑니다. 그것이 허세인지 아닌지 쉽사리 구별하지 못할뿐더러, 그것을 알아챈다 해도 적지 않은 타인들이 그러한 허세의 근거들에 쉽게 매혹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적당히 그 허세에 묻어갈 수 있다면 적당히 모른척하고 그것을 긍정합니다.

 

J는 케이보다 한 살이 많았는데 홍대를 졸업하고 한예종에서 미디어 아트를 전공하고 있었다. 그는 어려서 영국에서 살았던 적이 있는데, 그래서인지 어딘가 영국풍으로 세련되고 우수에 차 보이는 것이 근사하다고 일 년 전 처음 그를 봤을 때 케이는 생각했다. p.104

 

하지만 혼자 있을 때 굳이 ‘허세 작렬’할 필요는 없습니다. 나 자신에게는 굳이 나를 포장할 필요가 없으니까요. 하지만 케이는 그러합니다. 자기 자신에게조차 자신을 포장합니다.

 

그저 한 가지, 인천에서 지냈던 시간만은 들키고 싶지 않았다. 아니, 가능하면 없던 시기로 만들고 싶었다. 어차피 나쁜 꿈에 불과했지 않은가? 케이는 그 시간이 자신에게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했다고 믿었고,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온갖 멋져 보이는 것들에 집착하기 시작했다. 펑크, 아나키즘, 아방가르드, 공산주의, 혁명, 마약, 히피, 섹스...... 물론 철저히 개념적인 차원에서였다. 서구의 청소년들과 달리 그 개념들을 실제로 현실에 적용해볼 자유는 한국의 청소년들에게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한국에서 개인에게 허용된 유일한 표현 방식인 패션을 통해 케이는 그것들을 실천하기로 결심했다. p.142

 

[천국에서]는 이렇게 실제 천국은 등장하지 않고, ‘얼핏 천국으로 보이는 것’과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장소로서의 천국’만 등장합니다. 진짜로 좋은 것은 하나도 나오지 않고 ‘겉으론 좋아 보이지만 실제로는 나쁜 것’만 잔뜩 나옵니다. 그래서 작가가 만약 이렇게 모든 것을 다 비관적인 관점 속에 집어넣고, 주인공만은 다르다는 식으로 자기만 혼자 쏙 빠져나왔다면 독자로서의 저는 ‘뭐야? 혼자 잘났어?’ 하며 작가에게 반감을 품는 것으로 책을 덮었겠지만, 주인공 케이가 작가가 비판하고자 하는 모든 상황과 사고방식의 정수이기 때문에 저도 모르게 계속해서 자기반성을 하게 됩니다.

 

영국풍이니, 홍대풍이니, 중산층이니, 잠실 친구들이니 하는 구체적인 용어들은 이렇게 텍스트로 읽으면 반감이 생기지만, 이 중 어떤 것은 실제로 제가 동경했고 아직도 동경하고 있는 것들을 지칭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한때 제가 편입되고 싶었던 세상이었고, 지금도 만약 그럴 기회가 생긴다면 거부하지 않고 들어갈 그런 세계.

 

만약, 그런 세계로 편입된다면 저는 앞으로 이런 텍스트들을 외면하게 될까요, 아니면 여전히 읽으면서 그래도 나는 아직 예민하게 자기반성을 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허세를 부릴까요.

 

그는 그렇게 한바탕 자신과 광주에 대한 자랑을 늘어놓은 뒤 공연장을 구경시켜주었다. 생각 외로 인테리어도 세련되었으며 싸운드 시스템도 훌륭했다. 하지만 뭐가 불안한지 그는 거듭 괜찮지요? 나쁘지 않지요? 서울에 비해서도 뒤지지 않지요? 하고 물어댔고 그러면 케이의 일행은 반복해서 같은 칭찬을 늘어놓았다. 박씨는 이 생각 없는 젊은이들이 단지 서울에서 왔다는 이유로, 마치 서울에서 보낸 사절단이라도 되는 양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하지만 그러다가도 사실 진짜 멋을 아는 것은 광주 시민이고 서울은 잡탕 같은 도시라면서 폄하하기를 반복했다. p.164

 

또 김사과의 확언대로 그 세계는 원래부터 그 세계 속에서 태어난 사람이 아니면 절대 갈 수 없는 곳이라면, 저는 공연장 주인처럼 내가 속한 현재를 과도하게 긍정하면서도 여전히 그 도달할 수 없는 그 세계를 동경하게 될까요.

 

그럴 때마다 케이는 커다란 수족관을 떠올렸다. 수족관 속에서 열심히 헤엄치고 있는 물고기 한 마리. 투명한 유리 너머로 내다보이는 것들에 대해서 물고기는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을까. 글쎄, 아무 생각도 없겠지. 하지만 생각을 한다면? 이해가 안 되겠지. 어, 나랑 같겠지.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결코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고 해서 한번 생각을 시작한 물고기가 그걸 멈출 수가 있을까? p.331

 

[천국에서]를 읽으면 계속해서 책 읽기를 멈추고 ‘나’는 어떠한가를 돌아보게 됩니다. 그것은 대체로 확언보다는 질문의 형태로 발현됩니다. 괴롭습니다. 그런데 김사과는 또 한 번 좌절을 안겨줍니다. ‘한번 생각을 시작한 물고기가 그걸 멈출 수가 있을까?’라고 말하면서요.

 

그런 점에서 결말 부분은 의외였습니다. 케이가 수족관은 없다고 결론 내리며 그 까페에서 갑자기 일어나 가는 그곳이 어디인지 명확하지는 않지만, 짐작 가는 대로라면 그건 또 좀 너무 갑작스럽달까요.

 

소설 속에서 원래 ‘인물’은 변하게 되어 있지만, 그러한 변화가 충분히 설득력 있게 와 닿지는 않았습니다. 차라리 분노로 들끓는 주인공이 주변인이나 전혀 관계없는 타인을 무차별적으로 잔인하게 죽이는 전작들이 오히려 더 그럴만해 보입니다. 그런 폭력적인 결말이 좋다는 게 아니라, 인물의 드라마틱한 행동이나 변화는 그만큼 충분한 계산을 가지고 그려내야 독자들도 무리 없이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요. 물론, 소설 전반에서 케이가 끊임없이 고뇌하고 있긴 하지만 그 고뇌의 내용 중에 이런 드라마틱한 변화를 짐작케 하는 실마리는 충분하지 않았다고 느껴집니다.

 

작가는 소설 전체에서 케이나 써머, 댄, 케이의 부모님, 써머의 부모님, 댄의 부모님, 재현, 지원과 지은과 그들의 아버지 등 인물들이 등장할 때마다 간략하게 그들의 성장배경이나 살아온 환경 등을 꼭 서술하고 넘어갔습니다. 마치 브리핑처럼 간략하게. 그렇다보니 IMF라든지, 미국발 금융위기 같은 세계사적인 사건이나 뉴욕, 브룩클린, 잠실, 홍대, 상수동, 인천 남동공단, 광주와 같은, 각각만 가지고도 최소한 한 권의 책 분량으로 이야기될 수 있을 거대한 이슈들이 몇 줄의 문장만으로 간단히 처리됩니다. 인물들도 굉장히 단순화되죠. 어떤 특정한 세대나 상황을 표상하는 인물로 각인됩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렇게 ‘그런 사람’으로 ‘그런 환경’ 속에 남겨놓고 케이만 막판에 싹 빠져나오는 듯한 결말은, 그래서 더 쉽게 납득이 가지 않고 배신감마저 느끼게 합니다.

 

더불어 [천국에서]를 읽으면서, 김사과가 젊은 작가이기 때문에 이토록 복잡한 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그토록 확고한 문장으로 쓸 수 있기도 하지만, 또 그렇기 때문에 직접 경험하지 않았거나 피상적으로 알고 있는 것들을 다 경험했고 다 아는 것처럼 확언하고 있다는 인상도 받았습니다.

 

소위 ‘논술’이라는 것이 시험과목에 있는 직종에 취업하기 위해 준비하면서 반은 억지로 신문을 읽고 관련 책을 찾아 읽은 시기가 있습니다. 마침 그때가 미국발 금융위기가 닥친 무렵이라 시험 문제로 많이 등장했죠. 물론 제가 아는 선에서 쓰기를 요구한 문제이긴 하지만 저만의 시각이 들어있어야만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있다고 알고 있었기 때문에, 대개는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도 못한 채 논평까지 써야 했습니다. 그 논평이 우스꽝스럽지 않게 하기 위해 최대한 사실과 진실을 알고자 이것저것 읽고 공부했지만, 그 모든 것은 쉽게 손에 잡히지 않았습니다. 하는 수 없이 큰 그림을 익히고 큰 줄기를 파악하는 데 주력했는데, 김사과의 소설 속 논평 중에도 어떤 것들은 이런 방식을 통해 파악하지 않았을까 싶은 부분들이 있었습니다. 물론 다 안다고 해서 소설 안에 구구절절 다 쓸 수 없었겠지만, 확실히 본인의 관점을 갖고 설명한 부분과 두루뭉술한 문장으로 넘어간 부분의 차이는 느껴졌습니다.

 

어쩌면 이것은, 앞에서 이미 인용한 문장에서 케이가 그런 것처럼 ‘물론 그것은 심오한 통찰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었’다고 쿨하게 인정하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작가 역시 케이와 멀지 않은 세대이며 케이가 속한 어떤 집단과는 분명한 교집합을 갖고 있을 테니까요.

 

김사과가 2013년에 쓴, '모든 게 망가졌는 데 아무것도 무너져내리지 않는 세계'는 결국 이성복 시인이 1978~9년께 쓴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는 그 세계와 다르지 않아보입니다. 그렇다면 이 세계는 결국 모두 병들고 모든 게 망가져도 어떻게든 유지되는 곳인가요. 우리가 사는 이 세계는 자체로 거대한 보균자이지만 결국 발병은 하지 않는, 발병은 해도 결코 죽지는 않는 거대한 질병덩어리인가요. 그렇다면 도대체 왜죠.

 

작가로서의 김사과가 독자로서의 저에게 끊임없이 던지는 그 질문들은 애초에 던진 사람조차 영원히 정답을 발견할 수 없는 난제들입니다. 하지만 죽기 전까지 계속해서 질문을 잊지 않고 정답은 아니라도 자신만의 해답을 정리해나가느냐, 그냥 모른척하고 사느냐는 사람마다 다르겠지요. 적어도 소설가는 살다 보니 다른 데 정신이 팔려 자꾸 질문을 잊는 사람들에게 반복적으로 그리고 자기만의 이야기 방식으로 질문을 던지는 사람입니다. 그런 점에서 앞에서 말한 이번 작품에 대한 개인적인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김사과의 다음 질문을 기다립니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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