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모든 무수한 반동이 좋다 - 26가지 키워드로 다시 읽는 김수영
고봉준 외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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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은 김수영 작가가 탄생한 지 100년이 되는 해였다. 한겨레에서는 '거대한 100년, 김수영'이라는 타이틀로 6개월간 김수영 작가의 작품에 관한 평론 26편을 연재하였고, 김수영 작가의 작품 <거대한 뿌리>의 한 구절, '이 무수한 반동이 좋다'를 타이틀로 한 이 책은 그 연재분을 모은 책이다. 시를 잘 읽지 않고, 5-60년대 문학에 대해 잘 모르는 나에게 김수영이라는 시인은 그저 교과서에서 만났던 시 '풀'의 작가, 참여 시인, 이란 막연한 이미지로만 알고 있던 분이다.

책은 키워드별로 주요 시대를 파악하여 시간 순서대로 편집되어 있다. 탄생과 일제 강점기, 한국 전쟁기, 구수동 거주 시기, 4.19혁명 이후와 같이 말이다. 26개의 키워드 중 <기계>와 <자유>, 그리고 <죽음>편을 가장 재미있게 읽었다. (아니, 실은 제일 마지막의 '대담'이 가장 좋았을지도...) 가장 뜨악했던 부분은 노혜경 시인이 쓴 <여혐>편이었다. 김수영 작가에 대해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 바로 이 '여혐'문제라고 한다. 확실히 <죄와 벌>같은 시는 용납하기 어려운 내용을 담은 시였다. 김수영의 이러한 면을 노혜경 시인은 '60년대를 짊어지고 그가 감당해야 할 숙명'이라고 말한다. 또 뒤편의 대담에서 이경수 교수님께서는 "김수영 시의 여성 혐오 문제는 피하거나 그 자체에만 천착할 것이 아니라, 김수영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이 어떤 것인지를 돌아보고 들여다볼 수 있어야 한다. 여성을 대상화하는 김수영의 시들이 문제적인 이유는 그것이 지나간 과거, 그 시절엔 그랬지라고 웃어넘길 수도 있는 과거가 아니라 지금도 여전히 환기되는 혈실이기 때문에 그런 점에서 김수영의 어떤 유산을 어떻게 계승할 것인지 치열하게 논의해야 한다"라고도 말한다. 이제껏 김수영은 '너무 우상화'되며 자유롭게 읽히기를 금지당해왔지만 이제는 독자들이나 연구자들이 좀 더 자유로워져야 한다고, 새로운 독자들에 의해 새로운 김수영이 발견되어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이 책을 통해, 잘 알지 못했던 김수영 작가에 대해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고,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제, 새로운 김수영 작품의 독자가 되어 새로운 김수영을 발견하는데 함께 해야겠다.

박인환 작가와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하는 챕터 마지막에 "야아 수영아, 훌륭한 시 많이 써서 부지런히 성공해라!"라고 외친 박인환 작가의 말을 읽으며, 문득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의 마지막 장면이 떠올랐다. "좋은 소설을 쓰시오."라고 말해주던 구보의 벗의 말과 박인환 작가의 말이 겹쳐진다. 박태원이 살았던 일제 강점기, 그리고 김수영, 박인환 작가가 살았던 한국전쟁 이후의 시대. 모두 살아내는 것만으로도 벅찼을 그 공포의 시기에 '좋은 소설, 훌륭한 시'를 쓰기 위해 쓰자며 응원을 나누던 벗과 함께 글쓰기를 멈추지 않았던 문인들의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간 나의 한국 문학의 관심사는 3-40년대 경성의 문인들, 그리고 시간을 훌쩍 뛰어넘어 2000년대 이후 작가분들에 국한되어 있었다. (훌쩍 뛰어넘어버린 시간 속의 윤오영 수필가님, 황순원 작가님, 그리고 박경리 박완서 작가님 정도는 관심을 가지고 작품을 찾아 읽기는 했다.) 한국전쟁에서부터 민주화운동까지, 그 지난한 한국 현대사를 외면하고 싶었던 마음이 그 시대의 작품과 작가들을 덩달아 외면하게 만들었던 것 같다. 이 책을 읽으며 한국 문학의 흐름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라도 이젠 더 이상 외면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은 책을 읽고 쓴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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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하고 식물집사 - 늘 긴가민가한 식물 생활자들을 위한 친절한 가이드
대릴 쳉 지음, 강경이 옮김 / 휴(休)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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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 너무나도 귀엽게 생긴 화분 하나를 트위터에서 보았다. 이름도 귀여웠다. 필레아페페 로미오이데스. 보통 페페,라고 불리는 식물이었다. 선인장도 말려 죽이는 나였기에 화분을 내가....? 괜찮을까....? 걱정이 앞섰지만 그러기엔 페페의 자태가 너무나도 사랑스러웠다. 결국 인터넷 쇼핑을 통해 처음으로 화분을 구매했다. 10cm 정도의 작은 기둥 이쪽 저쪽으로 동그랗고 빳빳한 잎을 슉, 슉, 달고 있는 페페는 정말 사랑스러웠다. 그런데 몇 달 지나지 않아 우리 페페가 이상해요!를 외치는 나를 발견했다. 기둥이 쑥쑥 자라 25cm 정도가 되었지만 잎은 기둥의 위쪽 끝부분에만 10장 남짓 달려있는 모양으로 이. 상. 하. 게. 자라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자구는 어찌나 자꾸만 쑥쑥 땅에서 솟아오르던지... 솟아오른 자구를 파내 수경으로 뿌리를 내리려고 할 때마다 어찌나 픽픽 썩어 죽어버리던지... 우리 페페는 엄마 속도 모르는 말썽꾸러기였다.

그러던 중 이사를 했다. 이사한 내 방에 새로운 식물 하나를 더 놓아두고 싶었다. 그래, 이번에는 몬스테라다! 하며 호기롭게 다시 인터넷 쇼핑을 했다. 우리 페페가 이상한 모양으로 자라지는 않았지만, 죽지는 않았다구요!라며 의기양양하게. 몬스테라는 페페보다도 훨씬 더 키우기 수월했다. 신경쓰지 못한 며칠 새 뿅! 하고 연한 연둣빛의 새 잎을 내고 또 며칠 지나면 커다랗게 활짝 피어나는 몬스테라 잎이 너무나도 사랑스러웠다. 그러나 역시나 몇 달 뒤 나는 우리 몬스몬스가 이상해요!!를 외쳐야만 했다. 줄기와 줄기 사이 이상한 곳에서 뿌리가 튀어나왔고 (징그러) 처음 받았을 때의 화분이 너무 작아진 것 같아 분갈이를 하기 위해 화분에서 뽑아낸 몬스몬스의 뿌리들은 마치 기십 마리의 뱀이 똬리를 틀고 있는 듯 꼬불꼬불 엉켜있었다. (뱀을 너무 징그러워하는 나는 하마터면 몬스몬스를 통째로 떨굴 뻔했다. 지금이 글을 쓰면서도 또 소름이 돋아서 온몸을 벅벅 긁고 있다.) 어찌어찌 분갈이를 해 주었는데 내가 이렇게 몬스몬스와 씨름하며 신경 쓰지 못한 사이 페페가, 말라죽었다. (...) 나는, 식물 집사라기엔 너무나도 모자란 사람이었다. 화분 한 개, 딱 한 개. 그게 나의 한계였다.

온갖 노력을 쏟아부어도 식물의 외모는 불완전하기 마련이고,

화원에서 데려온 식물도 일단 당신의 집에 적응하고 나면 겉모습이 달라진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되면 환경에 적응하는 식물들이 지략과 개성을 귀하게 여기게 된다.

P.12

서평단 책으로 받은 퇴근하고식물집사 를 읽다가 몇 페이지 지나지 않아 오... 하고 감탄하게 만든 문장이다. 그래, 그렇다. 내가 '우리 페페가 이상해요!'라고 외친 것은 페페의 외모가 내가 꿈꾸었던 외형대로 자라지 않아서였다. 하지만 그 모습이 내 공간에 '적응'하기 위한 최선의 모습이었을 것이다. 똬리를 튼 몬스테라의 뿌리들 역시 분갈이가 뭔지도 몰랐던 무지렁이 주인이 언젠가 분갈이해 줄 날을 기다리며 최선을 다해 공간을 나누어 쓰기 위해 그렇게 징그럽게 똘똘 말려 뭉쳐있었을 것이다. 식물의 지략이었다. 고양이도 강아지도, 인간의 마음대로 다룰 수 없다는 건 당연하다 생각했지만 식물은 마치 내 마음대로 원하는 대로 키울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책의 초반 부분에서부터 일단 반성부터 하고 들어가게 만드는 책이었다.

이 책은 1부는 식물을 키우기 위한 최소한의 지식을, 그리고 2부는 저자가 직접 식물들을 관리하며 적은 식물 일기로 구성되어 있다. 귀여운 일러스트도 곳곳에서 튀어나오는 사랑스러운 책이다. 저자가 식물과 교감하며 다정하게 살피고, 지켜보는 과정이 참 상냥해서 괜히 가슴이 뭉클해지기도 했다. 사실 우리 집엔 내 방의 몬스 몬스뿐 아니라 엄마가 관리하는 화분이 20여 개 정도 안방 쪽 베란다에 늘어서 있다. 엄마는 딱히 분갈이를 해 주는 것 같지도 않고 그저 일주일에 한 번 날 잡고 물만 뿌려주시는 것 같은데도 아이들은 쑥쑥 잘 자란다. 게다가 놀랍게도 이 책을 읽다가 엄마의 화분이 궁금해 내다본 안방 베란다에 죽은 줄 알았던 페페가!! 뾰로롱 하고 작은 잎들을 매달고 살아나있었다!!! 이 책의 저자처럼 상냥하고 완벽한 식물 집사가 되긴 그냥 태생부터 글러먹은 나이지만, 힘겹게 하루하루 자라나고 있는 몬스몬스와, 부활한 페페만큼은 앞으로 잘, 키워내고 싶어졌다. 그리고 만약 반려 식물을 하나 더 들이게 된다면, 그땐 이 책에서도 소개한 마리모를 입양해 보고 싶어졌다. '늘 긴가민가한 식물 생활자'들에게 최적의 답을 제시해 주는 이 책이 있다면, 나도 우리 아이들을 잘 키워낼 수 있을 것 같다는 믿음이 생겼다.



하지만 우리 몬스몬스가 이렇게나 크게 자라면 나는 좀 곤란할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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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길 멈출 때
벵하민 라바투트 지음, 노승영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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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좀 더 물리학, 수학을 잘 알았더라면 이 소설을 온전히 즐길 수 있었을까? 읽다가 이 책을 이해하길 멈출까 하고 고민하지 않았을까? 그래도 나름 문과생의 뇌보다는 이과생의 뇌에 가깝다고 생각해 온 나였는데 실은 이도 저도 아닌 뇌의 소유자였나 봐 하며 헤벌쭉 웃지 않을 수 있었을까? 어떤 책을 읽으며 나의 무식과 대면하게 될 때가 있다. 어떤 경우엔 스스로의 무식에 몸서리를 치며 자괴감에 빠지는데 또 어떤 경우엔 담담하게 무식을 인정하게 된다. 너무 거대한 지식 앞에선 으레 후자의 입장을 취했고,... 이 책 역시 후자의 입장이었다.

그럼에도 다섯 편의 팩션이 수록된 이 책을 마지막 장까지 손에서 놓지 못한 이유가 있다. 위대한 발견의 이면, 그리고 위대한 발견을 위해 극한까지 밀어붙이는 일의 이면에 대해 생각해 보게 만들어 결국 세상을 이해하는 것을 멈추지 말아야 함을 이야기하고야 마는 작가의 의지 때문이었다. 푸른 안료를 얻기 위한 실험의 부산물로 발견되어 후에 수많은 사람을 죽이는 데 사용된 시안화물, 그리고 공기 중에서 질소 채취에 성공하여 인공비료를 개발함으로써 인류의 식량 생산 문제를 해결한 한편 저 시안화물을 이용하여 1차 세계대전 당시 독가스의 개발과 살포에 앞장서 사람을 살리면서도 죽이는 데에 지식을 사용한 유대인 화학자의 이야기, <프러시안블루>로 첫 작품을 시작하여 어떠한 거대한 발견의 순간을 마주하기까지 어떤 수학자와 어떤 과학자들이 어떤 극한의 순간까지 자신을 몰아붙이는지에 대해 이야기하는 <슈바르츠실트 특이점>, <심장의 심장>,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길 멈출 때>로 이어진다.

범인으로서 천재의 삶을 내 어찌 이해할 수 있으며, 이들의 극한의 극한의 극한으로 치닫는 삶이 사실 약간 진절머리 나서,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길 멈출 때>의 중반부부터 아, 이 책을 이해하길 멈출까 고민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결국 1927년 10월 24일 코펜하겐에서 막스 프랑크, 마리 퀴리,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하이젠베르크, 슈뢰딩거, 닐스 보어 등 스물아홉 명의 천재들이 한자리에 모여 "전통과 가차 없이 결별하고 물리학은 실재가 아니라 우리가 실재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에만 관여해야 한다고 주장(p.224)" 하여 "과학의 토대 자체를 뒤흔들(p.221)"고 하이젠베르크가 "우리 시대의 과학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객관적이고 초연한 관찰자로서가 아니라 인간과 자연 사이에서 벌어지는 게임의 행위자로서의 우리가 자연과 맺는 관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p.225)"이라고 이야기하는 결말, 그리고 뒤이은 짧은 마무리 소설 <밤의 정원사>를 읽고 나서야 이 책의 제목이 온전히 내 마음에 포개어졌다. 그리고 위대한 깨달음을 얻었으나 그 순간 '세상을 이해하기를 멈추기로' 한 그로텐디크와 한때 수학자였던 밤의 정원사의 마음을 깊게 생각해 본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이해하길 멈추지 말아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도. 책을 다 읽고, 다시 가장 첫 번째 소설로 되돌아가야 했던 이유 또한 거기에 있다. 작가의 말에 소개한 책들 중 몇 권을 찾아 읽어보아야겠다. 월터 무어의 <슈뢰딩거의 삶>과 제발트의 <토성의 고리>을 말이다. 물론, 두 책을 읽으면서 소름 끼치도록 무식한 나를 담담하게 인정하고 말 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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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밀 예찬 - 은둔과 거리를 사랑하는 어느 내향인의 소소한 기록
김지선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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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만나는 게 싫지는 않지만 누군가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일은 무척이나 에너지를 써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그러면서도 세상을 향한 안테나가 항상 최대치로 펼쳐진 사람. '세상에 관심이 많지만 세상의 관심은 받기 싫은'사람. 나는 그런 사람이었는데, 이 책 #내밀예찬 은 그런 나의 마음을 좀 더 깊게 들여다볼 수 있게 만들어준 책이었다. 자신의 감정을 깊이 들여다보며 각자의 내밀한 세계를 존중하는 진중한 태도를 가진 글들이 마음에 들었다. 나는 입버릇처럼 '모든 문제는 적당히 하지 않음에서 시작된다'라고 말하곤 하는데 이것은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나와 사회의 관계에서도 중요한 문제이다. 각자의 내밀함을 지켜줄 수 있는 적정거리, 각자의 내밀함이 유지될 수 있는 적정온도에 대해 이야기하는 이 책이 좋았던 결정적인 이유는, 저자가 결코 자기 안에 머무르기만 하려고 하지 않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적정거리와 온도를 유지하기 위해 애쓸 줄 아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책의 프롤로그와 에필로그에 수미쌍관으로 등장하는 '애쓰는 마음'에 대한 문장들이 참 좋았다.

자기 객관화와 자기 합리화는 다르다고 생각한다.

자기 자신을 정확히 아는 것 다음에 뒤따라야 할 성숙한 태도는

'그러니까 어쩔 수 없다'가 아니라 '그럼에도 어떻게든 해봐야겠다'일 것이다.

프롤로그 중에서

그것을 언어화하지 않을지언정, 누구나 익숙하게 몸에 걸치고 있는 태도가 있을 것이다.

나에게는 그것이 은둔이었고 망각이었으며 회피였다.

1인칭의 글쓰기는 내가 사랑하는 이 모든 것들과 정면으로 위배되는 작업이라, 자꾸만 왜 쓰고 있는지 생각해보게 된다.

그건 아마도 더 이상 도망칠 수 없는 시기가 찾아왔기 때문이 아닐까.

어제의 뻘짓이든 오들의 치기 어린 생각이든 무엇인가를 바라보고 드려내려면 최소한의 용기가 필요하다.

언제나 가지고 싶었지만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덕목이다.

1인칭의 글쓰기를 통해 아주 천천히 용기라는 근육을 기르고 나를 드러내는 법을 배운다.

에필로그 중에서

나는 고작 개인 블로그에 글을 쓸 때조차 자기 검열에 스트레스를 받는 사람이다. 행여나 어쩌나 오늘의 토픽에라도 내 글이 오르면 내가 뭘 잘못 쓴 건 없을까 전전긍긍하기도 한다. 은둔과 망각과 회피의 아이콘인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글을 자주 쓴다. 아니, 지나치게 많이 쓴다. 블로그에도 쓰고 인스타그램에도 쓴다. 가끔 나는 왜 쓸까? 하고 스스로 궁금해할 때가 있었는데 <내밀예찬>을 읽고 약간의 답을 얻었다. 그것은 용기였다. 나를 드러내는 용기. 나다움을 쌓으려는 용기. 나를 지키려는 용기. 앞으로도 나는 용기 내어 글을 쓸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가 내밀한 일상을 용기 내어 나누어주는 글에도 적정 거리와 온도를 유지하며 따뜻한 관심을 나누어 줄 것이다. 서로의 내밀함을 예찬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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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랜드
천선란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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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선란 작가님의 작품은 이전에 읽어본 적이 없다. 그것이 어찌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모른다. 이 작가님이 쓴 다른 소설을 또 읽을 수 있다니, 이런 행운이 다 있나! 싶어서 말이다. 이 책을 무척 재미있게 읽었다는 말이다. 총 10개의 단편이 실린 이 소설집, #노랜드 는 하니포터 3기로 활동 중에 받은 책이다. 작가님의 다른 소설을 읽어본 적 없었으니, 당연히 어떤 스타일의 작품을 쓰는 줄 완전히 모른 채였고, 그래서 SF 소설인 것을 알게 되어 무척 놀랍고 신선했다. 외계인의 침공, 혹은 아둔한 인류의 잘못으로 폐허가 되어버린 지구를 배경으로 하는 <흰 밤과 푸른 달>, <바키타>, <푸른 점> 그리고 복제인간, 다중인격, 좀비 등 인간의 다양한 모습을 주제로 한 <옥수수밭과 형>, <제, 재>, <이름 없는 몸>, 영혼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에게>, <우주를 날아가는 새>, <두 세계>, <뿌리가 하늘로 자라는 나무>. 열 편의 작품들이 모두 흥미로웠고, 독특했으며, 그러면서도 보편적 인간의 문제에 대해 진지하고 날카롭게 바라보고,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어떤 헤어짐은, 한 시절이 끝나고 그다음으로 넘어가기 위한 필수불가결한 일임을 이야기하는듯했던 세 작품, <흰 밤과 푸른 달>, 그리고 <바키타>, <푸른 점>의 결말들을 읽으며 가슴 한켠이 뻐근해졌다. 결국 떠나보내야 하는, 결국 떠나야 하는, 남겨진 자들의 안녕을, 떠나는 자의 성취를 서로 바라는 애틋한 마음들이 코끝을 찡하게 만들었다. <옥수수밭과 형>을 읽으면서는 중학생 때부터 아주 좋아했던 만화책, 이츠키 나츠미의 <OZ>가 떠오르기도 했다. 그 만화책에 끝도 없이 복제되는 복제 인간이 나왔고, 마지막 장면의 너른 보리밭이 이 소설의 옥수수밭의 풍경으로 겹쳐졌다. 이 소설은 SF 소설이 아닌가 보다, 싶었으나 중반부부터 갑자기 분위기가 급반전되는 <이름 없는 몸>은 그 구성이 무척 재미있었다.

열 개의 작품 중 가장 마음을 뻐근하게 만들었던, 그래서 가장 좋았던 작품은 <-에게>였다. 고작 다섯 페이지짜리 짧은 소설이지만 다른 어떤 작품보다도 큰 울림을 주는 작품이었다. 떠나간 누군가의 '성불'을 바라는 마음. 미처 누리지 못한 남은 삶의 행복과 영광이 다음 생에 누릴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 그 '추모의 마음'에 대해 생각하게 만드는 작품이었다. "죽은 자를 잊지 않고 추모하는 사람들 덕에 귀신이 이름을 되찾는 경우가 종종 있지. 그러니 이미 이승을 떠난 너는 이 강을 건너 환생의 문을 넘기 전까지 네 인생의 억울함에 목매지 말고 행복했던 순간만을 떠올려라. 그게 저들이 너에게 바라는 가장 간절한 바람일 테니. 네 몫의 서글픔은 저들이 다 해줄 것이니. 다음 생에는 네 이름을 절대 잊지 말거라." 이 말을 읽으며 슬쩍 눈물을 훔쳤다. 저승사자가 이름을 부르는 것조차 알아듣지 못하고 황망하게 숨을 거두어야 했을 수많은 죽음들을 우리는 많이 알고 있다. 나는 이 소설을 읽고 그렇게 떠난 이들의 이름을 불러주고 싶었다. 그럼으로써 그들이 '성불'할 수 있다면, 더 많이, 더 크게. 불러주고 싶어졌다.

천선란 작가님의 '서로를 애틋하게 생각하는 마음'이 가득 담겨있는 열 편의 작품들 끝에, '누군가를 떠나보내고, 떠나보낼 예정인 상태를 너무 오랫동안 지속한 나머지 그 불안을 느끼지 않고 살던 시절은 도저히 기억나지 않는다(p.417)'는 말이 눈에 밟힌다. 작가님의 작품을 읽고 위로받는 사람이 있음에, 작가님의 마음 역시 위로받으실 수 있기를 바라본다.


*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은 책을 읽고 쓴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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