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염 살인 - 폭주하는 더위는 어떻게 우리 삶을 파괴하는가
제프 구델 지음, 왕수민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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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이 시작 되자마자  한 낮의 기온이 35도로 치솟더니 새벽에도 뜨거운 공기는 사라지지 않고 날이 갈 수록 공기는 뜨거워져서 36-37-38-39도를 기록하며 밖을 돌아 다니는 것이 생명에 위협이 될 수준까지 올라가고 있다.

  50도를 넘겨버린 인도와 파키스탄은 거리에서 사람들이 쓰러지고 있고  바로 옆 나라 스리랑카와 방글라데시는 10년 동안 내릴 비가 한꺼번에 쏟아지고 있고 좀처럼 비가 내리지 않았던 미국 텍사스에 쏟아진 폭우로 3백 명 가까운 인명 피해가 발생했다.

여름철 온도는 높아도 습하지 않은 지중해성 기후였던 유럽 지역에서는 이번 여름 습한 공기에 열대야까지 발생했고 연일 치솟은 폭염으로 산불까지 발생했다.

  열돔 처럼 공기층의 순환을 막아 태풍마저 힘을 잃게 만드는 현재 지구 상태는 기후 관측 역사상 2025년 여름 기간 온도가 가장 높았던 기록을 단숨에 깨버렸다.

 앞으로 이보다 더 한 뜨거움이 전 지구를 덮친다는 불길한 징후가 곳곳에서 관측 되고 있다.

바야흐로 기후 재난의 시대에서 재앙의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유럽에서 가장 큰 빙하 바트나요쿨이 빠르게 녹아 내려서  압력이 줄어들기 시작하면서 아이슬란드의 땅은 매년 2cm 이상 상승하고 있다. 더 큰 문제는 빙하가 녹아 염분이 거의 없는 담수가 유입되면서 바다의 흐름까지도 바뀌고 있다.

바닷물에는 크게 두 가지  흐름이 있다.

가장 먼저 바람에 의해서 이동하는 표층 순환은 바닷 물의 순환류 역할을 하고 있는 북대서양의 멕시코 만류(Gulf stream)로 따뜻한 멕시코만에서 시작해 미국 플로리다, 캐나다 뉴펀들랜드 섬을 거쳐 북상하는 북대서양에 이르는 따뜻한 해류가 두 개로 갈라져서 하나는 서유럽의 영국, 아일랜드, 스칸디나비아반도 그리고 북극의 그린란드 근처까지 이어지는 북대서양해류다.

한국의 수도 서울 보다 보다 북극에 더 가까운 북위 51도의 영국 런던이 겨울에 좀처럼 눈이 내리지 않고 영하 10도 이하로 떨어지지도 않고 얼음 조차  보기 힘든 이유가 바로 이 난류 때문이다.

멕시코 만류에서 갈라져 나온 나머지 해류는  카나리아 제도와 아프리카 해안을 따라 내려간다.

바닷 물 순환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북대서양해류는 북극의 차가운 바다와  그린란드 얼음산을 지나 갈 때면  물은 얼려지지만 소금은 얼려지지 않아서 밀도가 높은 차가운 물이 아래로 가라앉고 이렇게  얼음이 얼면서 소금기 머금은 밀도 높은 물은 바다 밑으로 내려가기를 반복하면서 발생하는  결빙이 이렇게 내려간 물을 적도 쪽으로 느릿느릿 밀어낸다.

마치 인간의 심장이  펌프질을 해서 혈관을 타고  혈액이 온몸으로 보냈다가 받아오는 것처럼, 북극 바다의 결빙 현상은  따뜻한 곳에서 온 물을 받아 얼리고 일부는 내려보내서 심층 순환을 통해 따뜻한 곳으로 되돌려 보내는 순환 원리로 작동하고 있다.

이렇게 물이 얼려졌다 녹아지기를 반복하며 남극과 태평양을 지나서 대서양과 북극을 돌아 자전주기에 맞춰 심층과 표층의 해류가 골고루 순환되어야 지구의 적정한 온도가 유지 된다.

한반도는 유라시아판 내에 위치해서  판 경계에 자리한 옆 나라 일본 보다 상대적으로 지진이 적고 안전한 곳으로 여겨졌지만 2000년대 들어서고 부터 규모 2.0을 넘어 4.5 지진이 자주 발생하고 있다.

 한반도 전체가 열탕처럼 펄펄 끓어 오르고 있고 장마가 시작된 제주도에는 역대급 물폭탄 비가 쏟아져 내리고 있다.

기후 재난의 주기가 점점 짧아지고 있고 그 위력은 재난 영화에서나 봤을 것 같이 상상하거나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무시 무시하다.

한때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자연재해와 재난이 현실이 되어서  예상했던 것보다 더 쉽고 빠르게 우리를 죽이고 있다

기후 과학자들과 환경 전문가들은 지구 열탕화의 원인이 ‘화석연료 사용’에 있다고 입을 모아 말하고 있다.

 석유 및 가스 생산과 소비는  매년 최고치를 찍고 있고 아스팔트와 콘크리트, 강철 그리고 실외기로 가득 찬 도시는 열을 가두기 딱 좋은 설계와 구조를 갖춘 찜통이다.

그동안 폭염으로 길에서 쓰러지고 물 폭탄을 맞아 도시 전체가 물 바다가 되어 배를 타고 피난을 떠나고 산불로 마을 전체가 전부 잿더미가 된 지구촌 반대편의 재난 상황은 그저 먼 나라에서 들려 오는 안타까운 소식이였다.

인간의 무한한 욕망은 결국 바다를 끓게 했고, 한계에 다다른 바다는 마침내 인간의 생명선을 향해 다가 오고 있다.

탄소 배출을 줄이고 쓰레기 용량을 줄이기 위해 오늘도 어김없이  에코백을 들고 종이 빨대를  챙기고 연일 뜨거운 폭염을 피해  얼음을 잔뜩 넣은 음료를 마시고 시원하고 쾌적한 바람을 내뿜는 에어컨이 도는 실내에서 하루의 반을 꼬박 버텨 내고 있지만 어떤 방법으로 환경의 재앙과 기후의 역습을 막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c)Steve McCurry , Kuwait (1991) 

“아이슬란드의 빙하는 200~300년 안에 사라질 것입니다. 

꼭대기에 조금 남은 몇몇 빙하를 제외하면 말이죠”

- 옷두르 시구르드손 빙하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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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7월 3일 무라카미 하루키의  새 장편 夏帆─The Tale of KAHO─ 출간 자정부터 도쿄 대형 서점에서 오픈런이 벌어지는 등 현지에서 폭발적인 반응을 일으키면서 초판 25만 부 발매된 이후 단 4일 만에 5만 부 추가 증쇄(2쇄)가 결정되었습니다. 

8월 5일 현재 일본 내 누적 발행 부수는 총 30만 부를 돌파하며 하루키의 오랜 팬 뿐만 아니라 그의 작품을 처음 읽는 독자들로 부터 큰 호평을 받고 있습니다.

하루키 장편 사상 최초로  26세 여성 그림책 작가 '가호'를 단독 주인공으로 내세워서 '모녀 관계의 갈등'이면에 비춰진 현실과 비현실의 세계관이 투영된 이번 하루키 신작 장편은 일본의 mz세대로 부터  자신의 이야기를 해주는 것 같다는 호평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반면 일본 문학계에서는 77세에 다다른 하루키 필력이 이전에 비해 느슨해 졌고 20대 여성 주인공을 내세워서 독자들의 호기심을 유도한 "모녀 살해"라는 장치가 전체 서사에 매끄럽게 녹아들지 못했고 이야기 속 판타지적 설정이나 흐름이 지나치게 현실과 괴리되어 있거나, 기존 작품들에 비해 억지스럽게 설정했다는  지적을 하고 있습니다.






일본 소설계에 거장 히가시노 게이고의 갑작스런 사망 소식에 놀란 그의 두터운 팬들과 게이고의  책을 읽어 본 적 없는 독자들이 앞다퉈 읽으면서 현재 일본 베스트셀러 소설 리스트에는  히가시노 게이고 vs 무라카미 하루키 책들이 빼곡하게 서열을 정비 하듯  서로 오르락 내리락 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현 시대에  무라카미 하루키가   인공지능과 협업 하지 않고 작가적 상상력과 필력으로 쓴 마지막 20세기 아날로그형 작가 세대 일 지 모릅니다.

현재 투비컨티뉴드 <하루키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에 연재 하고 있습니다.

2023년부터 연재하기 시작한 <하루키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지금까지 51개의 노트를 발행 했습니다. 국내에 어디에도 개재된 적 없는 인터뷰와 해외 기사, 하루키가 진행하는 도쿄 라디오에서 독자들과 나눈 이야기, 하루키 모교 와세다 대학 국제 문학관(일명 하루키 도서관)에서 진행 되었던 각종 행사와 잼 콘서트 그리고 한국에 출간 된 적 없는 에세이와 기타 짧은 단편을 제가 직접 번역해서 연재 하고 있습니다.

하루키에 대한 모든 것 투비컨티뉴드 <하루키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https://tobe.aladin.co.kr/s/1072

1.무라카미 하루키 새 장편 夏帆─The Tale of KAHO─출간 미국 뉴요커지 인터뷰

https://tobe.aladin.co.kr/n/631932

2.<가호( 夏帆 - The Tale of KAHO)>출간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가 연대기

https://tobe.aladin.co.kr/n/636979

큰 병을 앓는 동안에도 단 하루도 글쓰기를 멈추지 않은 하루키는 한 달에 한 번 진행 하는 도쿄 FM 라디오 진행을 거른 적이 없습니다.

지난 달 라디오 시청자들에게 새 장편 반응이 좋다며 오랜만에 어디에도 크게 기사화 되거나 연재될 소재도 아닌 소소한 이야기를 들려 주었습니다.

그가 들려준 소소한 이야기 (여름 6편) 여기에 직접 번역해 올립니다.

https://tobe.aladin.co.kr/n/649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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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센트 반 고흐는 열 여섯 살이 되던 해  삼촌이 공동대표로 있는 헤이그의 화방에 견습사원으로 취직한다.

 Goupil&Cie라는 이름의 화방은  파리, 브뤼셀, 런던, 뉴욕에 지점을 가지고 있던  국제적 규모의 화방으로 고미술품이나 바다 건너 일본 화가들의 그림과 미술 작품을 취급하기도 했지만   사진기술의  발달로 유명한 화가의 작품을 똑같이 찍어 낸 복제품들을 소비자들의 요구에 맞춰   다량으로 팔아 수익성을 높이 올렸다.

 값비싼 실제 작품 보다 저렴한 복제품을 찾는 사람들이 부쩍 늘다 보니 청년 고흐가 근무 했던 헤이그 본사의 화방은  날마다 수많은 고객들이 찾아 왔다.

아버지의 강압에 의해 억지로 화방 견습생으로 일했던 고흐는 친절함과도 거리가 멀었고 무엇보다도찾아오는 손님들이 원하는 그림을 제대로 보여주지 않은 태도를  보였다.

삼촌은 조카 고흐에게 더 넓은 세상을 보여 주기 위해 런던과 파리 지점으로 보내지만 고흐는 그곳에서 오로지  화방에 입고 되는 작품에만 관심을 보였고 손님들에게 불친절한 태도를 보이다가 결국 해고 당한다.

청년 고흐가 화방에 찾아 오는 손님들에게 시종일관 거만하고 불친절한 태도를 보였던 이유는 가난한 이들을 벌레 처럼 보는 부유한 이들의 비위를 맞추고 싶지 않아서 였다.

종교적 자유를 누리며 열심히 일한 만큼 부를 누렸던 헤이그와 달리 영국 런던은 거리 어디를 가도 구걸하는 이들로 넘쳐 났고 가난 때문에 거리로 내몰린 아이들이 매춘을 하고 그 돈을 부모들이 갈취 하는 처참한 사회적 현실에 10대 청년  고흐는  큰 충격을 받았다.

화방에서 쫓겨난 고흐는 런던에서 낮에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보조 교사로 일을 했고  저녁 부터 밤 까지 교회에서 봉사 활동을 하며 가난한 이들의 삶을 더 가까이서 목격하게 된다.

목사 아버지의 강요에도 신학 공부에 대한 관심은 눈꼽 만큼도 없었던 고흐는 진흙탕 같은 세상에서 살고 있는 가난한 이들의 삶을 목격하고 본격적으로 신학을 공부 하기 시작한다.

암스테르담에서 신학 공부를 시작한 고흐는 뜻밖에도 전도사 양성 학교 입학의 문턱을 넘지 못하고 크게 좌절 하고 네덜란드 북부에 위치한 드렌테로 훌쩍 떠난다.

1883년 가족으로 부터 금전적 지원을 전혀 받지 못하게 된 고흐는  팔 수 있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화방에서 일하던 시절에 고객들이 가장 선호 했던 그림은 수채 물감으로 채색된 작품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던 고흐는 연필과 잉크로 밑 그림을 스케치 하고 나서 수채 물감으로 덧칠 하는 방법으로 그림을 완성해 나갔다.

1874년부터 1886년까지 모네, 르누아르, 피사로 등 다른 인상파 화가들과  함께 <인상파전>에 참가하며 꾸준하게 작품을 출품해 왔던 에드가 드가는 일상생활, 말, 정물 등 온갖 소재를 유채, 크레용, 목탄, 수채, 파스텔, 판화, 조각등 다양한 기법을 이용한 작품으로 주목 받으며 국제적 명성을 얻게 된다.

명성이 높아 질 수록 그의 작품 가격도 함께 올라갔지만 태생적으로 약한 시력을 갖고 있던  드가는 <살롱>출품도 거절 하고  1889년 만국박람회 예술관의 전시도 거절한다.

국제적 명성이 드높은 화가의 은둔 생활에 조바심이 난 언론과 미술계는 드가가 두 세 작품을 그룹전에 내는 것 만으로도 신문에 대서 특필 되었을 정도 였다.

1881년 제6회 파리 인상주의 전시에서 드가의  《열네 살의 어린 무용수(La petite danseuse de quatorze ans)가 등장 했을 때 평론가들은 열네 살의 어린 무용수(La petite danseuse de quatorze ans)조각상을 향해 “원숭이가 있어야 할 곳은 (전시장이 아닌)동물원이지 않은가.” 라며 드가를 향해 신랄한 악평을 쏟아 부었다. 

 쏟아지는 악평과 비난에 드가는 작업실 구석에 둔 옷장 문을 열고, 조각상을   깊숙히 밀어 넣고 두번 다시 세상에 조각상을 공개 하지 않았다.

오페라단의 하급 발레 무용수로  무대 뒤 소품 같은 취급을 받으며 보잘것 없고  빈약하고, 하찮다는 의미로   ‘작은 쥐’(Petites Rats) 무리라고 불렸던 소녀 마리는 드가가 세상을 떠난 뒤 세상에 다시 빛을 보게 되어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무용수가 되었다.

주변의 인상파 화가들이 찰나의 빛과 색을 그리는 데 몰두 하는 동안 ,  인간의 내면에 스며든  감정과 시대의 공기까지 담으려고 했던  마네는 <폴리 베르제르의 바> 작품이 세상에 공개 된지 1년 후 1883년 1월,  프랑스 정부로부터 최고 권위의 훈장인 레종 도뇌르 훈장(Légion d'honneur)을 받으며 화가로서의 공로를 인정받았고 3개월 후 4월 30일 5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1900년 20세기 신 문물과 산업혁명의 세기를 뽐냈던 파리 만국 박람회에  공식 참가한 대한제국은 경복궁 근정전을 본뜬 한국관을 지어 전통 공예품과 농기구 등을 선보이며 조선의 고유한 문화를 세계에 알렸다.

 파리 만국박람회 한국관에 조선 장인들의 나전칠기가 출품되자  서구 엘리트들은 동양의 신비로운 칠흑과 오색 자개 빛에 매료되었고, 이때부터 한국 나전칠기는 '글로벌 컬렉터들의 표적'이 되기 시작한다.

1905년 야수파가 등장한 이후  야수주의와 입체파로 나눠져서 서로 유사한 그림을 전시장에 쏟아내며  치열하게 경쟁을 벌이고 있는 동안 어떤 유파에도 속하지 않고 독자적인 화풍을 밀고 나가는 젊은 화가들 집단인 파리파 무리들과 어울렸던 아메데오 모딜리아니는 아프리카 가면의  단순하면서 간결한 선과, 캄보디아의 크메르 부처 석상에서는 부드러운 면(面)의 미학을  합쳐 길쭉한 얼굴, 한 줄로 떨어지는 코, 평면 위에 펼쳐진 인물. 그 전에도 그 후에도 없던 모딜리아니만의 화풍을  완성시킨다.자신만의 화풍을 정립한 1914년 유렵 전역에 몰아닥친 전쟁의 소용돌이는 모든 것을 파괴 했다.

모딜리아니는 그림을 그릴 수록 영원에 대한 갈구가 깊어졌고 삶의 덧없음이 뼛속까지 파고들어갔다.

가난, 폐병,  마약과 술, 여자에 탐닉했던 모딜리아니는 세상을 떠나던 1920년까지  현재 우리가 아는 작품들을 모두 쏟아 냈다.조선 제일의 명문가 문인 가문에서 태어난 강세황은 정치적 파벌 싸움으로 인해 가문에 불어 닥친 불운으로 과거를 포기하고 야인으로 지냈다.

당시 조선 시대 양반 50대, 강세황은 회갑년을 넘긴 직후 61세라는 매우 늦은 나이에 영조의 배려로 처음 관직(영릉 참봉)을 받게 된다.

그의 관운은 70세 이후에 더욱 빛을 발해서 정2품 이상의 고위 관직을 지낸 70세 이상의 원로들만 들어갈 수 있는 최고 명예 기구인 기로소(耆老所)에 입소하는 영광을 얻게 된다.

1782년 임인년 70세가 되던 해에 강세황은 붓을 들고 스스로의 모습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림 속 강세황은 머리에 관원들이 조정에 나갈 때 쓰는 공식 모자인 오사모(烏紗帽)를 쓰고 있으나, 몸에는 벼슬이 없는 선비들이 집에서 입는 옥빛 야복(도포)을 걸치고 있다.

 조정의 관모와 재야의 평상복을 동시에 착용한 차림새는 조선 시대 초상화에서 전례를 찾기 힘든 매우 독특하고 파격적인 연출 뿐만 아니라 70세 노인의 얼굴에 피어난 검버섯, 깊게 패인 주름살, 희끗희끗한 수염, 세월을 견딘 눈매를 미화 없이 극사실적으로 묘사 했다.

강세황은   조정에 나아가 관직을 수행하는 공직자로서의 삶(출, 出)과 자연에 묻혀 사는 선비로서의 삶(처, 處)을 모두 겪은 자신의 복잡한 정체성과 자부심을 담아 70대 노년에 이른 스스로의 모습을 그렸다.

화면 상단에 강세황이 직접 한문으로 써넣은 찬문(자기 비평)이 있어, 자신의 기이한 옷차림에 대한 설명과 스스로의 내면 인식을 후대인들에게 명확하게 알리고 있다.

"저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수염과 눈썹은 하얗고 머리에는 오사모를 썼으면서 몸에는 야복을 걸쳤구나. 심신을 조정에 보냈으나 이름은 일찍이 산림에 숨겼도다. 가슴에는 수천 권의 책을 간직했고, 손에는 성인을 뒤흔드는 필력이 있구나. 어찌 사람들이 알겠는가, 나 혼자 즐기노라. 노인의 나이는 일흔이요, 호는 노죽(露竹)이라. 초상을 스스로 그리고 화찬도 손수 쓰네. 때는 임인년(1782)이다."

조선 시대 남성 평균 사망 나이는 백성들은 39세, 조선 제 1일의 의식주와 의료 혜택을 받았던 왕은 밤샘 국정 업무나 정적의 암살 위협에 시달려서인지 평균 수명 나이는 46세였다.

왕만큼 혜택을 누리지 못했던 양반 계층은 노비의 노동력을 바탕으로 경제적 자유를 누리며  유학자로서 절제된 삶과 학문 탐구를 하는 유유자적한 삶을 누려서 인지 조선 시대 평균 수명 나이를 훌쩍 넘기며 장수 하는 인구층이 가장 많았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예술가는 죽어서 작품을 남긴다.

반면 정치인들은 죽어서 무엇을 남길까?

유리 지갑을 가진 백성들은 죽어서 무엇을 남길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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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잡한 파리를 벗어나 기차로 한 시간 쯤 달리면 도착하는 곳   오베르 쉬르 우아즈(Auvers-sur-Oise)

초록빛 들판과 언덕 그리고 우아즈 강이 흐르는 풍경이 펼쳐지는 이곳은 19세기 혁명적인 이동 수단인 기차 길이 뚫리면서 먼 곳에서 외지인들이 찾아오는 마을이 되었다.

1890년 5월,  남프랑스 생레미드 프로방스의 요양원을 떠나 오베르 쉬르 우아즈(Auvers-sur-Oise)에서 에서 단 70여일을 머물렀지만, 그는 하루에 한 점을 그려낼 정도로 빠른 붓질을 하며 마지막 생애 예술의 혼을 불태웠다.


고흐가 세상을 떠나기 한 달 전 프랑스 오베르쉬르우아즈에서 그린 평온한 분위기의 말년의 명작 고흐의  '오베르의 우아즈 강가' 작품을 직접 미술관에서 촬영해서 영상으로 제작했다.

갑갑한 요양원을 벗어나 새로운 환경에서 자유롭게 자신의 예술을 발전 시킬 수 있을 거라는 기대로 부풀었던  빈센트 반 고흐

전 세계 수십억 인구의 시선을 확 끌어 당기는 대담한 색채와 역동성 그리고 심오함까지 품고 있는 고흐의 작품은 그가 남긴 예술 작품 뿐 만 아니라 그의 개인적인 이야기에도 많은 사람들이 매료되고 감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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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마른 장마가 물러 나고 시작된  푹푹 찌는 여름은 8월에 닥쳐올 엄청난 폭염의 예고편에 불과 했다.

8월에 들어서자  이른 아침부터 태양의 열기는 뜨겁게  달아 올라 한 낮의 온도가 37도를 넘겼고 새벽녘에도 27도를 경신하며 연일 무시 무시한 폭염이 지속 되고 있다.

냉방기가 작동하는 실내를 벗어나 밖을 나가기 두려울 정도로  무덥고 습한 열기에 눈 앞이 어질 어질 할 정도로  뜨겁다.

 뜨거운 화마에 집어 삼켜버릴 것 같은 열기에, 가로수들의 무성하게 뻗어 나온 잎사귀들 아래 드리워진 그늘 조차 뜨거운 열기를 식혀 주지 못한다.

지금으로 부터 130여년 전 1824년 여름, 다산 정약용은 ‘소서팔사(消暑八事)’라는 시를 통해 후손들에게  무더위를 이기는 방법을 알려 주었다. 


-‘솔 밭에서 활 쏘기’(松壇弧矢)

-‘느티나무 아래에서 그네 타기’(槐陰●遷)

- ‘넓은 정각에서 투호 하기’(虛閣投壺)

- ‘대 자리 깔고 바둑 두기’(淸●奕棋)

- ‘연못의 연꽃 구경’(西池賞荷)

-‘숲 속에서 매미 소리 듣기’(東林聽蟬)

- ‘비 오는 날에는 한시 짓기’(雨日射韻)

-‘달밤에 탁족 하기’(月夜濯足)




기후 위기로 수백년 전 조선 시대와 비교 할 수 없을 정도로 뜨거워진 여름을 살아가는 후손들에게 자연의 위대함과 소중함을 명화로 남긴 불멸의 조선 화가 겸재 정선이 그린 금강산

영상에서 보는 것 만으로도 더위를 잠시 잊게 만든다.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들은 자연의 순환 주기에 맞춰 모든 것이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수많은 모습으로 나타나 끊임없이 변한다.

싹이 트고 줄기에 잎사귀가 달리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듯이 자연은 인간과 달리 순환 주기에 절대로 어긋나지 않게 살아가 가고 있다.

‘구름은 하늘과 멀리 걸려 있고 나뭇가지에 바람 한 점 없는 날

누가 이 찜통 더위를 벗어날 수 있을까

더위를 식힐 음식도, 피서 도구도 없으니

조용히 앉아서 책 읽는 게 제일이구나.’

조선 숙종 시대의 학자 윤증의 ‘더위(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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