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미노 in 상하이 도미노
온다 리쿠 지음, 최고은 옮김 / 비채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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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도미노 패의 시작은 상하이 푸동 국제 공황에서 시작 되었다.


일본 간토 생명 야에스 지사 사무 직원인 호조 가즈미는 단것이라면 정신을 못 차리는 여직원 다가미 유코를 기다리고 있다.

검은 띠 유단자 인 다가미 유코는 선배 호조 가즈미를 공항에서 만나자 마자 파인애플 케이크,루크 초콜릿 같은 달콤한 디저트 이야기부터 꺼낸다.

그리고 이들 틈에 또 다른 회사 선배 에리코 가즈미 가 캐리어를 끌고 나타난다.

모두들 재충전 휴가 차 상하이를 방문한 회사 동료들로 숙소로 출발하는 동안 머물게 되는 호텔의 요리점 '청룡반점' 이야기를 꺼낸다.


두 번째 도미노 패는 상하이 도심 도로에서 몇 블록 떨어진 뒷 골목 모퉁이에 위치한 '스시 구이네이' 가게가 등장한다.


가게 안에서는 쉴 새 없이 전화벨이 울리고 종업원들은 주문을 받고 음식을 포장하며 분주히 움직이고 있다.

이 가게 주인은 일본 지바에서 건너온 스물 아홉의 청년 이치하시 겐지로 일본에서 경영하던 피자 배달 체인점을 정리하고 2년 전 상하이로 건너왔다.

일본에서 최신 냉동기술을 배운 겐지는 집에서 거의 요리하지 않는 상하이 사람들의 입맛에 맞춘  냉동 초밥을  배달하며 빠른 속도로 사업을 확장해 나가고 있다.

그는 상하이 와이탄 지구 도로를 질주 하며 직접 배달을 하고 직원들을 스카우트해서 엄격한 배달 시간과 위생적인 조리와 포장으로 상하이 대도시 입맛을 사로잡았지만 상하이의 어두운 곳에서 무언가 꿈틀거리고 있는 걸 알지 못하고 있다.

 아니, 자신이 그 세계에 자극을 주었다는 것조차 알아채지 못하고 있다.


세번째 도미노의 시작은 4성 급 호텔 최고층에 자리 잡은 화려한 연회장으로 일본 긴자에서 3대째 갤러리를 운영하고 있는 집안 출신의 갤러리 운영자 오치아이 미에

그녀는 최근 급부상 하고 있는 아시아 미술품 구입의 큰 손들이 많은 상하이에서 미에는 4성급 호텔 연회장에 소장품 전시를 열고 전시장에 모여든 큰손들이 어떤 화가의 그림 주변에 몰려있는지 먼 곳에서 바라 보고 있다.

신흥 화상이자 골드 드래곤 갤러리의 경영자이자 아트 페어 주최자인 중국계 미국인 맥스 창은 '웃는 남자' 시리즈로 100만 달러 아티스트 반열에 오른 차이창윈의 주변을 맴돌고 있다.

미에는 맥스 창이 작품 구입비로 200만 달러를 제시하는 동안 전시장에서 가장 좋은 자리에 어떤 그림도 걸려 있지 않았다는 걸 발견한다.


네 번째 도미노의 시작은 동물원으로 관람객들이 유리창 너머 판다 가족들이 대나무를 우걱 우걱 씹는 모습을 바라 보고 있다.


우리 속 벽에 기댄 채 홀로 묵묵히 대나무 잎을 먹고 있는  판다는 무리들 중에 최고 연장자인 '강강'이다.

'강강'은 카메라 불빛을 바라 보며 열심히 대나무를 씹어 먹고 이를 쑤시고 있다.

강강의 넘치는 식욕을 불안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는 베테랑 사육사 웨이잉더는 태어날 때부터 동물원에서 살았던 판다들과 달리 야생에서 살다 동물원으로 온 강강의 야성미를 예의 주시하고 있다.

강강은 산 속에 살아서 체력이 좋고 과거에 우리를 탈출 할 정도로 대담해서 사육사들은 탈출로를 막는데 필사적으로 매달리고 있다.

강강은 탈출을 시작 하기 전에 마치 폭풍 전야 처럼 어떤 낌새를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이미 두 달 전에 탈출했던 강강은 사육사들이 처 놓은 울타리 밖을 바라 보고 있다.


다섯 번째 도미노의 시작은 고층 건축물들의 그림자들이 신기루처럼 우뚝 서있는 곳으로 그곳엔 수 백 명의 카키색 군복 차림의 청년들이 일사 분란 하게 움직이고 있다.


'인민해방군 제 237사단을 대표해 애도를 표합니다.'


사건의 시작은 사흘 전 밤, 미중일 삼국 합작인 호러 액션 영화 <영환호성의 사투, 강시 대 좀비 >촬영 스태프가 머무는 숙소에 있는 청룡반점에서 시작되었다.

커다란 도마뱀 같이 생긴 동물이 청룡반점 주방에 나타났다. 그 동물은 영화 감독 필립 크레이븐이 애지 중지 키우고 있는 이구아나로 이름은 다리오

청룡반점 주방실은 매끈하고 윤기가 흐르는 이구아나 '다리오'가 새로 도착한 식재료로 알고 포획하고 이곳 청룡반점의 신진 기예 요리사 왕탕위안은 날카로운 네모난 칼을 번쩍 들어 올린다.

상하이 교외 드넓은 촬영장에 앉아 있는 영화 감독 필립 크레이브 주변에 그의 반려 동물 이구아나 다리오의 영혼이 맴돌고 있다.

미국 호러 영화의 거장 필립 클레이븐은 상하이 영화 촬영장에서 자신의 반려 동물 이구아나가 비운의 죽음을 맞이 하자 미국과 중국 일본 세 나라의 대형 합작영화<영화호성의 사투, 강시 대 좀비 >촬영이 무기한 중지된다.


감독의 어린 시절 친구이자 대학 동창, 인디 영화 시절 부터 함께 일했던 존은 다리오의 이름을 부르며 울부짓고 있는 감독의 슬픔을 달래주지 못한다.


한편, 상하이에서 온갖 고깃 덩어리만 취급하는 정육점 매장들로 빼곡히 들어찬 곳에 살아 있는 동물들이 우글거리는 우리 안에서 한 노인과 담배를 피고 있는 수상한 남자가 대화를 나누고 있다.


'물건은?'

'없어. 찾아 봐도 없잖아. 양 말로는 분명 상하이에 들어왔다고 했는데.'

'문제?'

'아무래도 저쪽 관계자가 찌른 것 같아. 종종 새 위장에 뭔가 멋진 물건을 넣어서 운반하는 것 같다고.'

'그래서?'

'물건을 넣을 때 문제가 생겨서 순간적으로 평소와 다른 위장에 넣었다는 군.'

'나중에 알아보기 쉽게. 우연히 근처 우리에 있던 희귀한 동물의 위장에 넣었다고.'

'맛있는 동물이면 좋겠군.'

'맛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커다란 도마뱀이었다는군.'

'물건은 벌써 나흘 전에 도착했대.'

'나흘 전 ?그렇게 됐다고? 지금 어디 있지?'

'청룡반점.'

'도마뱀을 호텔로?뭐에 쓰려고?"

5년 전 도쿄역 테러 소동에 휘말렸던 일본 간토 생명 여직원 유코와 가즈미는 에리코는 결혼 후 상하이로 이주한 회사 선배 에리코를 회사 휴가 일정에 맞춰 찾아 온다.

이들이 상하이로 입국한 바로 그 날, 세계 희귀종인 '박쥐'를 가공한 미술품이 이구아나 몸 속에 실려 상하이 호텔 '청룡반점'으로 밀반입된다.

이를 노리는 범죄 조직도 그 '박쥐'를 손에 넣으려고 상하이 곳곳을 헤집고 다니고 이들의 뒤를 쫓는 경찰들의 치열한 추격전이 펼쳐진다.



[창싱의 얼굴은 거의 좌우 대칭을 이루고 있었다. 창싱의 얼굴을 정면에서 찍은 뒤 중심 선을 따라 반으로 접으면 거의 정확하게 겹쳐질 것이다. 그것이 순간적으로 기묘한 느낌을 주는 것이다. 균형과 조화, 유서 깊은 풍수사 집안에 태어난 루창싱은 풍수의 원리를 체현하고 있는 인물이다.]

좌우대칭의 묘한 얼굴을 지닌 풍수사 루창싱, 재료를 가리지 않는 뛰어난 실력의 요리장 왕탕위안, 신속 냉동 초밥 배달집 사장 겐지, 동물원의 베테랑 사육사 웨이잉더 그리고 일본에서 건너온 유도 유단자이자 간토 생명사 직원들, 미소 지을 때 새 하얀 이를 드러내는 꽃 미남 경찰 가오칭제의 좌충 우돌 도미노 게임이 시작된다.


[6센티미터쯤 되는 도장이었다.

역시 아무리 봐도 이건 '옥'이다.

왕은 살며시 도장을 집어 구석구석 살펴보았다.

마블 무늬의 푸른색과 녹색의 그러데이션이 무척 아름다운 광물이었다. 싸구려 광물에서 흔히 보는 탁한 녹색이 아니다. 발색이 또렷해서 작지만 안쪽에서 빛을 발하는 것처럼 보였다. 게다가 세공이 탁월했다. 복을 불러오는 박쥐가 도장 전체에 에셔의 그림처럼 연속적으로 세밀하게 새겨져 있었는데, 장인의 솜씨가 엿보였다.

도장의 문자는 특수한 서체라 무슨 글자인지는 읽을 수 없었지만 상당히 오래된 것 같았다.]


이구아나를 조리 하다가 발견한 가죽 주머니, 그 속에 들어 있던 박쥐 세공 도장,

요리장 왕 탕위안 오래전 증조부가 자금성에서 일하던 당시 황제에게 하사 받았다는 옥을 사진으로 본적이 있다. 이구아나 위장과 장 속에 있었던 그 옥이였을까?

상하이에 몰려든 전 세계 큰 손들, 스타급 예술가들, 영화 감독까지 이구아나의 꼬리를 물고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고 이어진다.

누군가가 먼저 이구아나 뱃속에서 꺼낸 박지 세공 도장을 손에 넣을 수 있을까?

여전히 야성의 울부짓음을 내지를 수 있는 혈기 왕성한 판다 강강은 유리벽 너머 모든 걸 보고 있다.

[지금 저는 상하이 도심 번화가에 있습니다. 오늘도 정력적으로 경제 활동이 이루어지는 활기찬 우리의 상하이, 현재는 세계 최대의 상업 도시가 된 상하이의 기세는 꺾인 줄을 모릅니다. 잠들지 않는 용이라 불리는 상하이는 늘 전 세계를 상대로 싸우고 있습니다. 도시는 날로 확장되며 계속해서 발전해나가고 있지요.]

모든 걸 빨아들이는 도시 상하이에서는 목표물을 향해 1분 1초라도 빨리 도착해야 뭐든지 손에 넣을 수 있다. 돈-물건-사람 이 모든 것이 시계 추처럼 움직인다.

정월 초 이렛날에 고향을 그리며

봄에 접어들어 겨우 7일

집 떠난 지 벌써 어언 2년

사람이 돌아가는 건 기러기 내려앉은 뒤려니

꽃 피기 전부터 고향 생각나네

판다 강강은 동물원 우리를 탈출해서 청룡반점이 있는 4성 호텔에 몸을 숨기고 저녁 만찬으로 제공되었던 이구아나 다리오의 영혼이 영화 촬영장 위를 둥둥 떠다니고 있다.


판다 강강의 운명도 청룡 반점에서 끝이 나게 될까?

박쥐 세공 도장은 누구의 손에 들어가게 될까?


이구아나 다리오의 영혼은 자신의 마지막 숨통이 끊어진 4성급 호텔로 흘러 들어가 대형 조각상들이 전시 된 전시장 허공 속을 둥둥 떠다니다 조각상 틈 속에 동물원을 탈출한 판다 강강에게 바짝 다가간다.

때마침 강강의 힘에 떠밀린 조각상들이 도미노 처럼 차례 차례 쓰러지면서 박쥐 세공 도장을 손에 넣기 위해 몰래 전시장에 잔입한 괴한 두 명이 칼을 빼 든다.

강강을 생포 하려고 마취 총을 꺼내든 사육사들, 간토 생명 직원들을 인질로 삼은 괴한들 이들을 추적한 경찰 그리고 아시아 최고의 미술 전시가 열리고 있는 상하이 이곳 전시장은 전국으로 생방송 되고 있다.

차곡 차곡 밀려 들어 온 도미노들이 불과 수 십 초 사이에 한꺼번에 쓰러지자 눈 앞에서 쾅 소리를 내며 벼락 같은 것이 떨어진다.

판다 강강에게 목덜미가 물린 남자는 기절하고 또 다른 남자는 칼을 쥔 채 허공 위를 휘둘고, 괴한들 손아귀에서 풀려난 유코는 반 쯤 기절한 채 칼을 쥔 남자의 급소를 차버린다.

이 모든 걸 지켜보고 있는 이구아나 다리오의 영혼ㅊ그리고 강강에게 마취 총을 쏜 사육사.

판다 강강은 다시 자연으로 돌아 갈 수 있을까?

도난 당한 미술품은 다시 자리로 돌아 갈 수 있을까?

인질로 잡힌 유코를 구해 내기 위해 판다 강강의 배를 힘껏 걷어찬 에리코, 강강의 위에서 튀어 나온 주머니 박쥐 세공 도장은 도미노 게임 속에 들어간 누구의 손에 들어 갔을까?

누군가 쓰러져야 시작 되는 도미노 게임, 이 책을 펼치는 독자들은 단 한 명도 놓치지 말고 뒤쫓아 가야 한다. 그래야만 이 게임의 승자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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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고 2023-03-24 21: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ㅠㅠ동물들 불쌍해요

2023-03-24 21: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희선 2023-03-25 02: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얼마전에 이 책 나왔다는 말을 봤는데 scott 님은 벌써 보셨군요 한권 더 있죠 그게 먼저인가 봅니다 《도미노》 온다 리쿠 책 많이 본 건 아니지만, 지금까지 본 것과 다른 느낌이 들기도 하네요 아니 이런 게 아주 없지 않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많은 사람이 나오는 이야기 있었던 것 같네요 그건 못 읽었지만... 이번 책에 패닉 코미디라는 말이 있군요 scott 님이 쓰신 글을 보니 그런 느낌 듭니다

scott 님 주말 편안하게 보내세요


희선

scott 2023-03-25 10:49   좋아요 1 | URL
한 때 온다 리쿠 팬이여서 신간이 나오는 즉시 읽었었는데 ㅎㅎㅎ
온다 리쿠가 여러 장르물을 넘다 들어서 이 작품 도미노는 이 책이 상하이편으로 일단 첫 장 부터 재밌습니다.

희선님 말씀 처럼 패닉 코메디 장르물!ㅎㅎ

주말 봄날 만끽 하세요 ^^

새파랑 2023-03-25 11:1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뭔가 표지처럼 이야기가 복잡해 보입니다 ㅋ 그런데 재미있을거 같아요~!! 역시 스콧님의 독서 범위는 👍

scott 2023-03-27 21:49   좋아요 1 | URL
별루 안 복잡합니다
중쿡이름만 익혀지면
이름들이 전부 단순 ㅋㅋㅋ
 
짝 없는 여자와 도시 비비언 고닉 선집 2
비비언 고닉 지음, 박경선 옮김 / 글항아리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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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11월 27일 뉴욕 '빌리지 보이스'에 기사 한 편이 게재 된다.

그 기사의 제목은 '역사의 다음 위대한 순간은 그들의 것이다'(The Next Moment in History Is Theirs)


'그들은 각자 만의 불을 품고 모였다. 나는 이들의 손에 들려진 불들이 다음 세대를 위한 것임을 믿는다. 신은 알 것이다. 나의 태어나지 않은 딸을 위해 이 자리에 서 있노라고.'

-1970,11.27 빌리지 보이스, 비비언 고닉


이 기사를 작성한 기자의 이름은 비비언 고닉으로 서른 세살의 기자가 쏘아 올린 불길은 뒤이어 '여성 해방 운동가들'인 티그레이스 앳킨슨, 케이트 밀렛, 슐라미스 파이어스톤, 필리스 체슬러, 엘런 윌리스, 앨릭스 케이츠 슐먼 운동가들의 생생한 목소리가 전 세계로 퍼져 나가기 시작한다.


1970년 미국 전역을 뜨겁게 달구었던 여성 해방 운동가들의 인터뷰들이 매회 연재 될 때마다 신문사 '빌리지 보이스'는 온갖 협박 전화와 지지자들의 응원 전화들이 쉴새없이 울렸다.

수 많은 미디어 매체들이 이 기사를 작성한 기자 비비언 고닉에게 달려가 진실의 여부를 판명 해 달라고 빗발치듯 항의를 했고, 의문의 백인 남성들은 그녀의 가족, 친지들의 이름을 알아내 협박을 가하기 시작한다.



기자 비비언 고닉은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비판과 비난을 뒤로 하고 지난 수 세기 동안 고통을 당한 여성들의 자유, 인권을 울부짖는 현장으로 달려갔다.


'대학에 갔지만 학위가 미드 타운의 직장을 구해주지는 못했다. 예술가와 결혼했지만 우리는 로어 이스트 사이드에 살았다. 글을 쓰기 시작했지만 14번가 윗 동네에서 내 글을 읽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일류 회사의 문 따위는 열리지 않았고, 휘황찬란한 세상도 내내 멀기만 했다.'


기자 비비언 고닉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세상을 온전히 이해 하기 위해 현장에서 시위를 벌이는  페미니스트들에게 달려가 '당신들은 혼자가 아니다.' 라는 메시지를 주며 열띤 취재로 현장의 생생한 목소리를 기사에 담았다.

취재를 나가기 전 비비언 고닉은 자신의 책상 앞에 안톤 체호프의 문장을 단단하게 고정 시켜 놓았다.

'남들은 나를 노예로 만들었지만 나는 내게서 그 노예 근성을 한 방울 또 한 방울 짜내야만 한다.'

지난 10년 동안 이 문장을 응시하며 현장을 누볐던 고닉은 영혼의 노예 상태가 될 때 마다 저 구절을 되새기며 사랑이라는 환상, 공동체라는 환상, 일이라는 환상이 불러 일으킨 상실과 허탈감을 견뎌내며 1970년 세상을 뒤흔들며 강렬하게 들끓어 올랐던 그녀들의 음성을 떠올렸다.


비비언 고닉에게 페미니스트들은 세상과 맞서는데 필요한 검이자 방패였고 삶의 위안과 위로를 주는 존재였지만 1980년대로 넘어가자 단단하게 보였던 페미니스트 연대가 해체 되기 시작했고 서로 연대 하고 있다는 공감대가 무너져버렸다.




시간은 반세기를 훌쩍 넘어 2006년 여성 사회 운동가 타라나 버크가 미국에서도 가장 약자인 소수 인종 여성과 아동들이 성폭력, 언어 폭력,감금, 폭행등의 피해 사실을 함께 공유하고 연대해서 세상을 향해 용기 있는 목소리를 내어 추가 발생 피해자들을 막기 위한 운동 '미투 운동(Me Too Movement)'을 시작한다.

그리고 지난 반 세기 페미니즘 물결의 선봉자들의 목소리를 적극 취재 했던 기자 '비비언 고닉'의 이름이 언론과 출판계에 오르내리기 시작한다.


2015년 비비언 고닉이 몸 담았던 신문 '빌리지 보이스'는 폐간 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졌고 4년 후 고닉은 애증의 관계였던 어머니에 관한 회고록<사나운 애착>으로 주요 문학상을 휩쓸며 뉴욕타임스가 뽑은 '지난 50년 간 최고의 회고록'으로 선정된다.


마흔다섯 살 딸과 일흔 일곱 살 어머니가 뉴욕의 거리를 걸으며 대화를 나눴던 그곳 ,뉴욕의 한 거리를 어느 새 팔십 세에 접어든 딸이 걷고 있다.

그리고 우연히 들린 약국에서 아흔 살 베라를 만난다.


'그녀는 엘리베이터 없는 인근 4층 짜리 건물에 살고 오래전부터 트로츠칼 의자로 늘 가두 연설이라도 하듯 절박하게 목소리를 드높이는 사람이다.'


조제 중인 처방 약을 기다리는 동안 팔십 세 고닉은 아흔 살 베라에게 그동안 듣지 못했던 소식, 남편의 사망 이후 찾아 온 새로운 사랑, 그리고 이제는 혼자 살고 있음에도 딱히 우울하지 않은 인생 이야기를 듣는다.


굶주림과 전쟁을 피해 미국 땅으로 이주한 우크라이나 이민자 부모에게서 태어난 고닉은 가난한 이민자들의 거주지였던 브롱크스의 다세대 주택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녀는 한 살 씩 나이를 먹어가면서 뉴욕 구석 구석을  탐험하듯 맨해튼 북부와 남부 서부와 동부를 가로질러 다니며 수 많은 이들을 관찰하고 목격했다.


'나는 어린 시절 살았던 공동 주택 이웃들의 우정, 그저 모든 게 상황에 좌우되던 그 관계들을 자주 떠올린다. 필요한 순간마다 말없이 알아주는 마음으로 가득했던 검고 동그란 눈의 여자들...'


서른 다섯이 되기 전 결혼을 두 번 했고, 이혼도 두 번 했던 그녀의 인생에서 사랑은 '궁극'의 순간으로 나타났다.


'우정에는 두 가자 범주가 있다. 하나는 서로에게 활기를 불어넣는 관계고, 다른 하나는 활기가 있어야만 같이 있을 수 있는 관계다.'


비비언 고닉은 20년 지기 친구 레너드를 만날 때면 반나절의 시간을 훌쩍 보낼 정도로 대화가 끊이지 않으면서도 뉴욕이라는 대 도시에서 맺게 되는 인간관계에서 쉽게 '우정'이 싹트지 않는다.

서로의 마음을 빼앗기도 하고 쉽게 내어주기도 하다가 돌연 미세한 감정 선을 건드려서 그 우정이 길바닥에서 우연히 만난 이들과 크게 다르지 않는 사이처럼 되어버린다.


'삶이 불능의 총합처럼 느껴지려 할 때면 나는 타임스 스퀘어까지 산책을 나선다. 세상에서 가장 요령 넘치는 하층민들의 본고장인 그곳에 가면 금세 통찰이 회복된다.'


그녀는 평생 동안 뉴욕에 살면서도 지난 시절의 그들이 어디서 잘 살고 있는지 안부 인사라도 건네고 싶은 마음으로 뉴욕 곳곳을 걷던 중 불쑥 브롱크스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던 이웃 친구들의 모습을 떠올리며 거리에서 구걸하는 사람들, 불쑥 말을 거는 사람들과 쉼 없이 대화를 나눈다.


영미 문학계에서 작가들의 작가로 불렸던 '제임스 설터'처럼 에세이와 회고록 분야에서 비비언 고닉은 영국의 버지니아 울프에 비견 되는 문학비평가이자 회고록의 새 장을 열었다고 평가될 만큼 자전적 글쓰기 분야에서 독보적인 위상을 차지하고 있었지만 그녀의 책들은 일찌감치 절판 되어 일반 서점에서 찾을 수 없었다.


2020년 영미권 에세이와 회고록 출간 리스트에 자전적 글쓰기의 고전으로 재 평가 받은 <사나운 애착>이 올라가자 이 책을 읽고 깊은 감동을 받은 록산 게이, 말랄라 유사프자이 등이 칭송 하면서 비비언 고닉은 이 시대 최고의 회고록 작가로 새롭게 이름을 알리게 된다.

그리고  지난 시절에 출간된 책들이 새 판형으로 출간 되며 여러 나라 언어로 번역되기 시작한다.


80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경제적 여유가 생긴 고닉은 여러 매체 인터뷰를 통해 '세상이 이제서야 나의 목소리를 듣기 시작했다'고 소감을 밝혔다.


2010년 비비언 고닉은 지난 시절을 회고하는 글과 창작 수업에 관한 글을 발표하는 동안 심장병 수술을 받고 유쾌한 목소리로 회복 될 것이라는 희망을 품었던 그녀의 어머니는 아흔 네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고, 불법 낙태를 한다며 십 달러를 빌려 달랬던 이웃집 아줌마가 낳은 딸 역시 세상을 떠났다.

동시대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페미니즘 물결에 올라 탔던 1933년생 수전 손택, 1934년 생 조앤 디디온의 목소리도 더 이상 들을 수 없다.

1970년 서른 세 살의 비비언 고닉이 걸었던 5번 애비뉴, 그곳에 몰려 들었던 군중들은 흰색이였다.

하지만 21세기를 지나 2023년의 5번 애비뉴는 검은색과 갈색 군중들로 뒤덮혀 있다.

비비언 고닉은 평생 동안 단 한번도 흰색의 군중, 화이트 컬러 부류가 아닌 항상 블루 컬러들 옆에 서 있었다.

그녀가 걸어 왔던 길에는 불법 체류자, 배우, 범죄자, 반 체제 인사, 게이들, 전문 시위꾼들, 정치 선동자들, 지식인들 그리고 관광객들로 이들 중 절반은  범죄와는 무관하게 살고 있는 사람, 그러니까 비비언 고닉, 자신과 비슷한 부류의 사람들로 오늘도 뉴욕이라는 도시를 걷는 이들이다.



나는 그녀의 글을 학부 시절, 창작 수업에서 처음 만났다.


자전적 글쓰기에 관한 지침서로 각 대학 창작교재로 쓰이고 있는 <상황과 이야기(The Situation and the Story)>에서 비비언 고닉은 이렇게 말한다.


[자서전의 주제는 항상 자기 인식이 우선이지만 실체가 없는 자기 인식이여서는 안된다.

기억력이 뛰어난 이들이 시인이나 작가가 되어 세상에 창작물을 내놓을 수 있는 것이라 가정한다면 일반인들은 이들과 차별 될 수 있게 이런 저런 유명 작가들의 조언이나 철학적 어법에서 벗어난 생생한 어휘로 채워진 자서전을 완성 해야 한다.

좋은 글에는 두 가지 성격이 포함 되어야 하는데 매 페이지 마다 살아 있는 어휘, 실제로 경험하고 목격한 것들로 채워져야 읽는 이들에게 공감을 자아내어 글쓴이의 삶의 여정을 따라 가고 싶다는 욕망을 불러 일으킨다.

시인이나 소설가 그리고 회고록을 쓰는 이들 주제를 명확하게 잡지 않으면 독자들의 시선을 붙들지 못한다.

글에는 자신의 경험과 체험, 생각을 솔직하게 담아서 가장 쉽고 명확한 어휘와 문장으로 누구나 읽고 싶게 써야 한다.

작가들마다 각기 다른 어조, 시점, 문체가 있다. 독자들은 첫 문장을 통해 앞으로 어떻게 전개 될 것인지, 어떤 상황이 발생할지, 어떤 삶이 펼쳐질지 판단하기에 첫 문장을 어떻게 써야 하는가? 라는 걸 고심하는 것 만큼, 자신의 색깔, 어떤 문장으로 써나갈지 부단한 연습과 노력을 해야 한다.

허구의 이야기에서 화자의 역할은 절대적으로 스토리의 중심을 이끌어가면서도 그 또는 그녀가 하고 있는 이야기, 경험등은 사실이 아니라는 것, 작가의 상상력의 산물이라는 것을 독자들은 알고 있다.

반면, 자서전과 회고록에서 화자는 절대적으로 진실을 이야기 해야 한다. 불명확하게 또는 모호하게 두리뭉실한 문장으로 독자들을 속여서는 안된다.

독자들은 단 몇 페이지만 읽고 알아챈다.

'이 인간이 말하는 게 진짜야.'

'나랑 같은 세대 인데 이런 생각을?' 이라며 문장과 문장, 매 페이지 마다 독자는 자서전 또는 회고록을 쓴 저자를 향해 질문을 던진다.

그러니, 여러분들이 앞으로 나와 함께 써나가는 각자의 회고록이 완성 되면 나는 이렇게 물을 것이다.

'여기 써 있는 것이 사실이였어?, 진짜 네가 경험한 거야?']

                                                                        -비비언 고닉의 '상황과 이야기' 중에서


아니 에르노는 자신이 경험하지 않은 걸 절대로 쓰지 않는다는 원칙을 세워 놓고 날카로운 메스로 체험한 것 경험한 것을 날 것의 언어로 도려내듯 썼다면, 비비언 고닉은 자신의 삶을 집요하게 관찰하고 분석해서 타인과 나, 시대와 경험, 감정과 기억을 향해 끊임없이 다가가 말을 걸고 질문 한다.

그러기에 그녀의 글, 자전적 이야기를 읽는 독자들은 한 시대를 살아온 이들의 모습과 세계를 명확하게 떠올릴 수 있다.

그녀가 이야기 하는  세계는 인간의 내밀 하고 모순적인 욕망들이 느껴지고 거대한 도시 속에서 고된 노동으로 지친 이들이 내지르는 소리 없는 아우성이 들리고 그리고 마음 속에 수많은 익명의 사람들의 삶의 모습들이 스쳐 지나간다.

비비언 고닉은 지난 반 세기 동안 타고난 논쟁자로 어떤 단체에 입장을 대변하는 일이 라면 용감하게 맞섰다.

그녀는 자신의 생각과 주장을 다양한 매체에 기사와 에세이를 써내며 세상이 공격하면 논리적으로 맞받아쳤고 어떤 권력이나 특정 단체 하고도 타협하거나 슬그머니 뒤로 빠지지 않았다.


세월은 흘러 모든 것이 바뀌었다.

2001년 뉴욕 한 복판에서 건물이 무너져 내렸고 그녀는 여러 대학에서 글쓰기 강의를 하며 사랑을 했고, 이별을 했고 그리고 혼자 걷고 있다.

고닉은 걸으면서 자신의 지난 삶을 되돌아 보며 고통을 흘려 보냈고 그럭저럭 거대한 도시 속에서 도망치지 않고 하루의 시간을 소중하게 보낸다.




뉴욕 컬럼버스 애비뉴에는 날씨가 좋은 날이면 매일 다양한 공연이 펼쳐 진다.

그곳에서 펼쳐지는 공연을 구경하는 이들 모두 세상의 한 부분처럼 각기 다른 피부색과 부의 크기로 나눠진 거대한 도시 뉴욕에 몰려든 이들로 공연이 열리는 순간 만큼은 한 곳을 바라 보고 있다.

우리 모두의 인생은 앞을 보며 똑바로 걷지 못한다.

때로는 제자리 걸음을 하거나 주저 하거나, 멈칫거리거나, 멀리 도망쳐 버리거나 그대로 그 자리에 털썩 주저 앉기도 한다.

거리는 밤 낮을 가리지 않고 쉴 새 없이 움직인다.

도시 속에서 숨을 쉬는 이들은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도시에서 적절한 균형을 맞추며 살아 가야 한다.


2021년 윈덤 캠벨 문학상 논픽션 부문 상을 수상한 후 뒤이어 발표한 에세이와 비평집, 회고록으로 전미 도서 비평가 협회 비평 부문 후보에 오른 비비언 고닉은 여전히 도시를 걷는다.

그리고 6번 애비뉴 버스에 올라타 아흔에 가까운 승객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7번 애비뉴 정류장에 내린다.

그녀 앞에 불쑥 얼굴을 들이민 한 흑인 남성 '천지가 적이네!'라고 내뱉자, 고닉은 '저야 모르죠' 라고 대꾸한다.

그녀는 걸으면서 머릿속을 비우며 거리의 사람들을 관찰하며 쉼없이 떠오르는  공상에 빠지기도 하고 지난 시절 엄마와 나눴던 대화, 대학 시절에 만났던 친구들, 우연히 알게 된 억만장자 상속인의 딸의 모습을 떠올린다.

쉼 없이 걷고, 생각하고, 상상하고 떠올리는 그녀의 기억 속에 사람들은 서로 사랑했고, 헐뜯었고, 비아냥 대면서도 각자만의 미래를 꿈꾸었다.

그렇게 걸으면서 맞이한 마흔, 오십, 예순, 일흔 그리고 정신을 차려 보니 여든 살,  비비언 고닉에게 앞으로 남아 있는 시간은 몇 년일까...


혼자 남겨진 친구들, 암 투병을 하고 있는 이웃들, 먼 곳으로 떠났던 이들 중에 영영 돌아오지 못한 곳으로 가버린 이들의 모습을 하나 둘 씩 떠올리는 그녀의 모습을 지켜본 20년 지기 친구 레너드는 '외로움이라는 습관은 질기기 때문에 쓸모 있는 고독으로 바꾸지 않은 이상 너는 영영 엄마 딸'이 라는 말을 한다.

서로의 일상을 공유하며 삶의 한 부분을 의지하고 지탱해 줄 사람이 없어도 비비언 고닉은 자신을 진정으로  알아봐 주며  말과 행동을 이해하면서도 지적해주는 친구, 그 모든 친구를 거대한 도시, 뉴욕에서 찾아냈고 만났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이 발발한 이후로 페미니스트들은 반세기를 주기로 '해방된' 여성,' 자유로운' 여성으로 불려졌지만 비비언 고닉은 이에 동의 하지 않는다.

1897년 남성 작가 조지 기싱이 발표한 소설 <짝 없는 여자들>의 나오는 서른 살의 로다 던은 사랑과 결혼을 노예제에 빗대며 경멸하며 남자와 여자는 그들 자신에게 그리고 서로에게 무엇이 되려 하는지 묻는다.


비비언 고닉은 <짝 없는 여자들>의 로다가 외치는 열정적인 화법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 내어 1970년 대 급진 페미니즘의 과격한 분노의 소용돌이 속에서 함께 외치며 현실과 이론의 간극에서  좌절하면서도 걷고 또 걸었다.

2023년 미국 전역에서 폭발 하고 있는 분노와 외침은 권력의 한 축에서는 듣지 않고 있고, 지구 반대편에서 여성을 상대로 벌어지고 있는 각종 범죄와 차별은 지난 반 세기 전 1970년대 현실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6월의 어느 날 저녁, 비비언 고닉은 워싱턴 광장에 서서 백 살을 훌쩍 넘긴 오래된 나무, 어린 시절 친구들과 이곳에 왔을 때도  서 있었던 나무를 바라본다.

그 시절 이곳 광장에 있던 사람들 모두 백인이였다. 그녀는 그 광장을 지나 자신의 삶을 이어주는 길, 도로를 따라 걷는다.

여든 여덟의 비비언 고닉은  계속 걷는다. 아니 누군가와 함께 걷는다.

앞으로 10년, 20년을 더 걸으면 워싱턴 광장을 지키고 있는 그 나무의 나이를 뛰어 넘을 것이다.


나란히, 묵묵히, 끊임없이 걷고 있는 비비언 고닉은 20세기 페미니즘 운동의 한 획을 그었던 이들 중 한 명으로 그리고 21세기 반세기 최고의 회고록을 쓴 작가로 기억될 것이다.


'내게 없어선 안 되는 게 있다면, 바로 그 목소리들이다. 전 세계 도시란 도시에는 골목 돌길이며 허물어진 교회며 유적이 된 건축물마다 민중이 심어있다. 하나같이 몇 백 년 동안 한 번도 파헤쳐진적 없이 그저 켜켜이 포개어 올려진 것들, 뉴욕에서 나고 자란 삶이라는 건 구조물이 아니라 이 목소리들- 그 어떤 목소리도 다른 목소리를 밀어내지 않고 층층이 쌓인 무수한 목소리-을 다루는 고고학과도 같다.'-2015년 비비언고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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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거서 2023-03-09 23:2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제가 <짝 없는 여자와 도시>를 읽게 된다면 비비언 고닉을 소개해주신 scott님 덕분입니다. 감사합니다! ^^

scott 2023-03-09 23:38   좋아요 2 | URL
앞선 출간 된 <사나운 애착>은 그냥 그랬지만(뉴요커 특유의 짜증스러운 목소리가 싫어서 ㅎㅎ) 이 책은 정말 좋았습니다
만약에 제가 오랜 세월 살았던(한 때) 도시를 걷는다면 이라는 상상을 할 정도로 시대의 목소리, 지성이 넘치는 문장으로 독자들의 머리통을 후려 치게 만든 책입니다 ^^

2023-03-09 23: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3-09 23: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3-10 12: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3-10 12: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희선 2023-03-11 02: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scott 님은 비비언 고닉 일찍 알았군요 길을 걸으면 지난 일이 떠오르기도 하지요 비비언 고닉은 걸으면서 여러 가지 생각을 하고 글로 썼네요 그때가 그립기도 하겠습니다 그런 기억이 있어서 살아가는 건지... 좋은 것만 있지는 않았겠네요

scott 님 주말 편안하게 보내세요


희선

2023-03-11 09: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책읽는나무 2023-03-11 11:1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비비언 고닉 에세이 한 권만 사다 놓았었는데, 다른 분들의 리뷰를 읽으니 읽고 싶다! 생각이 들었는데, 스콧님 글도 읽어야겠다!란 생각이 드네요^^

2023-03-11 11: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책읽는나무 2023-03-11 14:00   좋아요 1 | URL
~~~공연을 한다. 제목이에요.
리뷰는 안 써도 고닉의 도시 이야기랑 사악한 애착 이야기 두 권도 찾아서 읽어보고 싶네요.^^

2023-03-14 11: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3-14 15: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자목련 2023-03-14 10: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비비언 고닉에 대한 풍부한 글이네요. 책 전체의 흐름을 알려주는 스캇 님의 리뷰, 사진과 정보가 첨가된 멋진 리뷰를 통해 한 번도 가 본 적 없는 뉴욕이 펼쳐집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scott 2023-03-14 11:03   좋아요 0 | URL
고닉의 글을 읽다보면 그 시절 그곳의 사람들과 함께 걷고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문장이 살아 숨쉬죠

봄날 목련님도 고닉과 함께 걷고 읽고 쓰고 ^^

그레이스 2023-03-18 22: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약국에서 약을 기다리는 동안 그들의 대화는 우울한 내용은 너무 재밌게 그렸어요
결국 그들 대화를 듣던 그 옆에 남자가 함께 큰 소리로 웃는 모습은 그냥 한컷의 만화나 영화의 한장면으로 다가왔어요
보고 또 펼쳐 보게 되는 페이지!

2023-03-19 00: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육왕 - 트랙의 왕, 러닝슈즈의 왕
이케이도 준 지음, 송태욱 옮김 / 비채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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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쿠치는 올해 예순 다섯 살, 창업한 지 백이십 년이 넘은 히시야 다비의 4대 사장이었다. 초대 사장은 상공회의소 회장도 역임한 중진인데, 지난 오십 년간 눈에 띄게 쇠퇴하여 결국 폐업에 이르렀다.]

일본 전통 버선(다비)의 제조 기업 <고하제야>는 백년 전 독일에서 신발을 꿰매기 위해 수입한 재봉틀로 '다비'를 손으로 꿰매듯 섬세한 바느질처럼 제작하며 동종업계에서 매출 1위를 달렸던 중소 기업이였다.

1913년, 세계 1차 대전 이 발발하기 바로 한 해 전에 창업한 <고하제야>는 전국으로 유통되는 '다비'를 약 80퍼센트 생산 할 정도로 사업 규모가 컸지만 헤이세이(1989-2019)시대부터 생산 판매가 급격하게 줄어 버렸다.

더 이상 일본 전통 옷을 입지 않는 시대에도 옛날 방식을 고수하며 스물 일곱 명의 직원들과 힘겹게 사업을 이어 왔지만 결국 폐업 절차를 밟게 되었다.

이 회사에서 근무하고 있는 직원들의 평균 연령은 57세로 가장 오래 근속한 직원의 나이는 일흔 다섯 살이다.

직원들은 전국에서 들어 오는 반품을 폐기 처분 하는데 더 많은 시간을 할애 하고 있었고 회사는 은행에 빌린 돈을 갚지 못해 이자가 나날이 눈덩이 처럼 불어 나고 있다.

강습이나 지역 전통 행사에서 신는 '다비'를 제외하고 일본 사회에서 '다비'라는 존재는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지만 <고하제야>의 사장은 일본이 세상에서 사라지지 않는 한 누군가는 반드시 '다비'를 찾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

반면, 그의 아들 미야자와는 주요 백화점을 둘러 보는 동안 돈독한 관계를 유지 했던 백화점 단골 거래처 사람들 부터 쓴 소리를 듣고는 냉정한 시장의 현실을 파악한다.

어느 때 처럼 백화점을 돌아 보던 어느 날, 아들이 스니커즈 꼭 사 달라는 문자를 발견하고 스니커즈 매장에 들어 가 러닝 슈즈 선반에 시선을 멈추고는 기묘한 신발을 만져 본다.

그가 발견한 신발은 앞 코 부분이 둥그렇지 않은 대신 다섯 개의 발가락이 달려있고 발 뒤꿈치 부분 쿠션은 납작했다.

그 신발은 비브람 사의 '파이브 핑거스'로 다섯 발가락을 앞코 부분에 고스란히 넣고 지면 위를 딛고 걸을 때 마치 맨발로 편안하게 걷듯이 인간의 발과 밀착되게 디자인 된 제품이다.


'지금까지의 신발에는 없는 '맨발 감각'으로 달릴 수 있어서, 달려 보고 나니 다른 건 신지 못하겠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한번 신어 보시겠습니까?'


다비 제조 업체 <고하제야>는 전 직원이 맨 발로 뛰어도 눈덩이 처럼 불어난 은행 이자를 갚지 못할 정도로 이익은 커녕 판매량 보다 반품 되는 량이 압도적으로 많아서 직원 수를 줄여 버려야 재봉틀 기기를 돌릴 기름을 살 수 있을 정도로 이미 회생 불가능한 상태다.

오로지 전통적인 생산 방식만 고수 한 채 변해 버린 시대의 조류를 읽지 못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음 <고하제야>는 과연 소비자들의 취향과 눈부시게 발전 된 고도화된 시대의 흐름 속에서 어떻게 살아 남을 수 있을까?

걷고 달리는 사람들이 늘어난 시대에 마라톤을 취미 삼아 달리기에 몰두 하는 이들에게 신발은 제2의 심장이다. 그렇다면 가장 편안하고 인간의 주법에 맞춘 러닝 신발이 있다면, 아니 전통 양말 생산 업체가 마치 발에 밀착된 양말 같이 편안한 신발을 제조 하게 된다면 시장은 어떤 반응을 일으킬까?

은행은 더 이상 대출을 해주지 않고 어느덧 직원 수는 20명으로 줄어들었다.

마라톤 슈즈를 생산하기 위해 직원들은 각기 다른 신발을 신고 또 다른 몇 명은 다비 모양을 한 신발 '파이브 핑거스'를 신고 달리기 시작한다.

그렇게 달려서 탄생 시킨 신발은 <육왕陸王>으로 우연히 마라톤 경기를 보고 만들기 시작한 마라톤 전용 신발은 이제 회사의 존폐 여부를 결정하게 될 중요한 제품이 되었다.

회사는 좋은 소재를 구하고 그 러닝화를 신어줄 선수를 찾아 내서 경기 중에 안타깝게 부상 당한 유망주에 발에 <육왕>을 신게 한다.

[처음 뵙겠습니다. 교다 시에서 다비를 제작하는 고하제야라는 업체 입니다. 저희는 백 년 역사를 가진 다비 제작업체이지만, 이번에 러닝슈즈 '육왕'을 기획하고 개발했습니다. 지면을 붙잡는 독특한 감각과 기능성을 겸비 하여 기존 러닝슈즈 '육왕'을 기획하고 개발했습니다. 지면을 붙잡는 독특한 감각과 기능성을 겸비하여 기존 러닝슈즈에는 없는 착화감을 구현했습니다. 인간 본연의 주법인 미드풋 착지를 실현할 수 있습니다. 부상당하지 않는 주법이야말로 승리를 향한 최단거리입니다. 괜찮다면 한번 시험해주시겠습니까, 수정 사항이 있다면 모기 씨가 납득할 때까지 고쳐나가겠습니다. 아무쪼록 잘 부탁 드립니다. -고하제야, 미야자와 고이치]

반건양근건 부분 손상과 왼발 발목에 있는 힘줄 손상을 입은 마라톤 선수 '모기'는 기존에 고수 했던 주번이 아닌 <육왕> 신발에 맞는 주법을 연습하기 시작한다.

'부상당하지 않는 주법이야말로 승리를 향한 최단거리'

후원이 결정된 선수에게는 러닝슈즈가 무상 지급되고, 올림픽 출전을 앞 둔 정상급 선수에게는 족형을 떠서 발 모양이나 발등 높이, 디자인까지 맞춤 제작 신발을 제공한다.

세계적인 선수들이 뛰는 마라톤 대회에서 육상 선수들에게 신발을 후원하는 업체는 동종 업계에서 1위와 2위를 다툴 정도로 뛰어난 제품이여야 하고 후원한 선수가 상위권 순위에 들게 되면 그 회사는 세계에서 주문이 쏟아지게 될 것이다.

회사는 선수들과 함께 달리며 선수가 경기 중에 부상을 당해도 기록이 이전 보다 나오지 않아도 신발을 신을 수 있게 해야 한다.

고하제야는 마라톤 시장에 내놓을 신발 <육왕>을 만드는데 필요한 소재개발, 자금충당, 직원들의 피,땀, 눈물을 모아 마침내 선두주자이자 감히 넘볼 수 없었던 대기업 '아틀란티스'를 누르고 최고의 런닝화 '인간 본래의 주법'으로 달릴 수 있는 제품을 만들어 낸다.

마라톤의 출발 지점에 선 선수들의 마음은 똑같다.

-무사히 레이스를 완주 할 것

-자신의 기록을 뛰어 넘을 것

그리고 대회 우승자로 메달을 목에 거는 것이다.

인생의 좌절을 맛본 마라톤 유망주 '모기'가 <육왕>을 신고 달린다.


[모기는 하코네역전마라톤에서 달렸을 때, 흥분과 설렘으로 몸이 떨리던 그 감각을 절실히 떠올렸다. 대학 역전 마라톤의 화려한 무대 이후 삼 년, 좌절하고 꿈도 희망도 잃어본 자신에게 이제 무서운 것은 없다.]

자, 이제 역전 마라톤 대회 출발로 부터 남은 시간은 3시간 29분

드디어 <육왕>의 치열한 싸움이 시작되고 모기는 맨발로 달리듯 육왕을 신고 속도를 내기 시작한다.

역전 마라톤 지역의 최대의 고비 구간 '6구간' 고저차가 심하고 구불 구불한 도로를 속도감 있게 질주 하면 우승의 빛이 보일 것이다.

'육왕에 담긴 것은 러닝슈즈로서의 성능만이 아니다. 개발에 종사해온 사람들의 꿈, 모두의 꿈이 이 한 켤레에 응축 되어 있다.'

바람의 세기가 급격하게 바뀌더니 5킬로지점을 지난 모기의 등을 향해 몰아 붙였고 모기는 바로 앞 선수를 추월 하지 않고 속도를 일정하게 유지 하고 달린다.

언덕을 넘자 땅은 급강하듯 미끄러지더니 모기의 발에 바람의 세기에 맞춘 속도감이 붙기 시작하자 순식간에 선두 그룹을 앞 지른 모기는 드디어 수백명의 함성 소리가 들리는 그곳, 결승점을 통과 한다.

언제 망해도 어떤 은행도 구제해주지 않았던 고하제야가 생산한 신발 <육왕>

새해 역전 마라톤 대회에서 육왕을 신은 모기가 1등 메달을 목에 걸었다.

백년의 세월 동안 오로지 하나만 고집했던 고하제야가 새로운 시대의 조류에 성공적이게 올라타자 경쟁 업체의 반격이 시작된다.

동종업계 1위 자리를 지키기 위해 막강한 자금력을 가진 대기업의 서슬퍼런 반격에서 과연 영세업체인 고하제야가 살아 남을 수 있을까?

아무리 주문이 쏟아져 들어와도 자금력이 부족한 영세업체들은 대규모로 제품을 생산할 여력이 없다. 마음껏 늘릴 수 도 없고 적극적으로 협력 업체에게 손을 내밀지 못한다. 후원을 계속하려면 결국엔 설비에 투자를 해야 하고 그러면 또다시 빚을 지게 되어 매달 늘어나는 이자를 갚아 나가면서 생산 기계를 돌릴 수 없다.

게다가 마라톤 선수들에게 엄청난 후원을 퍼 붇는 대기업의 공세에서 영세 업체들은 낄 자리 조차 없다.

대기업은 첨단장비를 동원해 런닝화 개발에 나서고 육왕에 쓰인 신발 밑바닥 소재 특허인 '실크레이' 기술을 가로채서 런닝화 천을 대주던 중소기업에게 육왕을 생산하는 ' 고하제야'와 거래를 끊게 만든다.

고하제야는 세계적인 아웃도어 생산 업체에게 생산 설비 지원을 받는 대가로 자회사로 들어 갈지 아니면 대기업의 손아귀에 먹혀 버릴지 또 한 번 막다른 운명의 갈림길에 서게 된다.

전통을 고수 하는 순간 눈 깜짝할 사이에 고하제야는 시장에서 사라지게 될 것이다. 망하는 건 한 순간이지만 자고 나면 눈덩이처럼 불어난 빚은 사라지지 않는다.

자본주의 시장에서 기술력을 가진 영세업체가 대기업을 상대로 시장에서 경쟁해서 살아 남는 경우가 거의 없다.

마라톤 경기에서 타인의 페이스로 달리는 것 자체가 엄청난 모험이지만 그렇다고 지난 번 실패를 했던 자신의 주법과 페이스를 지키기만 해도 승리의 고지는 보이지 않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육왕>을 신고 복귀전을 뛰는 모기 히로토 선수

그가 통과한 결승점은 <고하제야> 기업의 새로운 출발점이 되어 모기 히로토 선수가 피와 땀, 눈물을 흘리며 달렸던 승리의 레이스는 고하제야 기업을 이끄는 미야자와의 새로운 도전의 시작이 된다.


'어떤 어려움이 닥쳐오더라도 승리를 믿고 정진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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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3-03-02 02:5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거 몇해 전에 드라마로 봤어요 드라마 제목만 봤을 때는 <육왕>이 뭔가 했어요 며칠전에 책방에 갔더니 이 책이 보이더군요 그때는 언제 나왔는지 몰랐는데 나온 지 얼마 안 됐던 거였네요 전통을 지키는 것과 지금 시대를 반영하는 것, 두 가지를 섞기 어렵겠지요 이 책을 원작으로 만든 드라마에 기계가 아닌 사람이 했을 때 훨씬 잘 만들었다는 게 나왔던 것 같네요


희선

scott 2023-03-02 11:34   좋아요 2 | URL
육상의 왕 ㅋㅋ
그신발 신으면 달리기 속도가 좋아진다고 하네요
드라마는 비지니스계 선악대결
힘을 모으고 정직하게를 외치는 교훈 드라마😄
원작도 좋고 드라마도 재밌어서
한자와 나오키 팬으로 이분책은 즐겨 읽고 있습니다 일본도 더이상 대를 잇는 장인 정신 사라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곳도 여기도
인구 소멸 시대

어쩌다냥장판 2023-03-02 21:1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제목은 많이 봤던거 같은데 신발을 뜻하는 거였군요 순간 읽으면서 다친 모기가 신고 달린다고? 그랬다가 ㅎㅎ 사람이름이 모기인것도 재밌네 했네요
재밌을것 같아요 ~~ 드라마로도 나왔다면 인기가 많았겠는데요

scott 2023-03-02 23:33   좋아요 1 | URL
육상의 왕!
육지의 왕! ㅎㅎㅎ

일본인들에게 모기는 울 나라 모기가 아닝 ㅋㅋㅋ
 
오늘도 문구점에 갑니다 - 꼭 가야 하는 도쿄 문구점 80곳
하야테노 고지 지음, 김다미 옮김 / 비채 / 2023년 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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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나 문구류와 얽힌 추억은 하나씩 갖고 있을 것이고 어린 시절 부모님이 주신 용돈으로 스스로 '현금' 거래를 할 수 있는 곳이 바로 문구점으로 그곳에 발을 들여 놓는 순간 부터 시간의 마법 속으로 빨려 들어가 버린다.

문구류는 누군가에게 선물 받기 보다 내 눈으로 직접 보며 시간을 들여 고른 제품들이여야 언제 어디서든지 사용하게 될 정도로 사람에게 가장 밀착된 애착 아이템들이다.

아이패드, 노트북, 그리고 스마트 폰에 다양한 쓰기 와 그리기 기능은 정교함을 뛰어 넘어 자유자재로 이미지를 넣고 파일을 첨부 시키고 영상을 재생 하며 입체적인 필기 노트를 장착한 정교하면서 영리한 기기들로 인해 점점 손으로 쥐는 펜과 연필 그리고 종이 노트와 각종 메모지들과 멀어지게 된 시대에 오로지 한 도시에서 문구점만 순례 하는 문구 덕후가 있다.


여행 일기 작가이자 일러스트레이터인 하야테노 고지는 '문구 없이 삶도 없다'라는 모토로 살아가는 문구 덕후로 웹 매거진 <매일, 문방구>에 정기적으로 일러스트를 그리고 칼럼을 쓰고 있다.



자신의 일 때문에 문구점 주인들과 사적인 교류는 물론 개인 주문까지 할 정도로 일상의 모든 것을 문구점에서 찾는 문구 덕후 하야테노 고지가 알려주는 독특한 개성이 넘치는 도쿄 문구점을 따라가 보자.


가장 먼저 문구점에 들어 가면 보이는 상품 진열과 가게 분위기를 잘 살펴서 어떤 테마를 중심으로 문구류를 팔고 있는지 체크해야 한다.


문구점 가게 마다 각기 다른 콘셉트가 있어서 눈길이 가는 상품 뿐만 아니라 테스트용 샘플 제품, 신상품, 어디에서도 구하기 힘든 희귀 아이템을 찾아 볼 수 있는 곳인지 확인해야 한다.

일반적인 문구점은 필기구, 사무용품 코너와 카테고리별 코너 이렇게 세 가지로 구역을 정해 놓고 각각 자신들의 가게에서 판매 되고 있는 상품 중에 집중적으로 팔고 있는 제품들, 학기 시즌 별 제품, 한정 상품, 계절 아이템 그리고 세일 상품들이 판매 되고 있다.

일본에서 가장 고급스러운 브랜드의 로드숍과 백화점이 몰려 있는 긴자 지구에는 건물 전체가 문구류만 팔고 있는 대형 문구점이 많은 곳으로 어느 문구점에서 시간을 보낼지 정해야 할 정도로 빠른 시간 안에 구경하고 구입 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긴자 이토야 > 본점 같은 경우에는 1904년에 창업한 역사가 오래된 문구점으로 1층에는 드링크 바가 2층에는 편지 코너가 있는데 이곳에서는 고급 만년필을 대여 해주고 편지 엽서를 보낼 수 있는 우체통까지 설치 되어 있다.

3층에는 고급 필기구 4층에는 각양 각색의 수첩들로 가득차 있고 5층에는 각종 샘플집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을 수 있는 공간이 있다.

맨 꼭대기 층은 카페 레스토랑으로 여기서 직접 재배한 채소들로 만든 샐러드와 샌드위치, 쥬스를 판매 하고 있다. 그야말로 문구를 좋아해서 들어간 공간에서 하루 종일 먹고, 마시고, 사진 찍고 편지를 쓸 수 있는 곳이다.

긴자 구역 문구점은 직접 자신들이 제작한 자사 종이를 판매 하거나 기능과 디자인을 직접 도안한 제품들을 전문적으로 판매하는 곳이 많다.


1663년 교토에서 문구점을 개업한 <도쿄 규쿄도>는 에도시대 도쿄로 수도를 옮긴 후 이곳에 분점을 차리고 1982년 그 자리에 건물을 세워서 오로지 서예와 관련된 도구와 제품들 그리고 향도를 판매 하고 계절 별로 다양한 옛 편지지와 봉투 그리고 만년 붓, 족자를 제작해서 사람들의 발길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오테마치 지역에는 일찌감치 문호를 개방하고 해외 문물을 받아 들이면서 문을 열기 시작한 문구점들이 여전히 대를 이어서 영업하는 곳이 몇 군데 남아 있는 곳으로 유럽에서 생산된 제품은 물론 일본의 오래된 철도 역사를 담고 있는 독특한 문구점도 있다.


지하철 역마다 자리 잡은 문구점은 서적까지 판매해서 교통 수단을 이용하는 이들의 발길을 머물게 하고 오로지 여행과 관련된 문구류와 기타 물품만 파는 실용적인 가게도 있다.

신주쿠 지역으로 넘어가면 젊은 시절 문구점 회사 직원으로 일하다가 일찌감치 회사를 나와 자신이 직접 개발하고 제작 주문한 문구류를 판매 하는 곳이 있다.

신주쿠에는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문화 학원 대학' 일명 문화 복장 학원이 있어서 의상 디자인과 미술 디자인에 관련된 문구류와 기타 제품을 전문적으로 판매 하는 곳이 많다.

패션업이나 미술 갤러리 큐레이터 출신들이 차린 문구점은 다양한 잡화까지 판매 하면서 고객들이 직접 써보고 그리고 채색할 수 있는 체험 공간 까지 마련 되어 있다.


도쿄에서 가장 유명한 '책의 거리'가 있는 JR야마노테 선이 지나가는 구역은 와세다 대학으로 가는 방향과 메이지 대학이 있는 유명한 헌책 방 밀집 지역인 진보초를 지나 갈 수 있는 곳으로 최초로 서양 종이를 판매했던 문구점과 유럽과 처음 문호 개방을 했을 때 유럽인이 직접 문을 연 문구점까지 있는 곳이다.

문구 디자이너 장인들은 물론 과거의 공산국가 시절에서 판매 되었던 유럽산 제품 그리고 작가들이 가장 자주 찾는 문구점 까지 있고 카페와 다양한 식당들이 즐비 한 곳이여서 이 지역은 하루 일정으로 둘러 보기에 부족할 정도로 볼거리 먹을 거리가 많은 곳이다.


에도 시대 부터 전문 기술자들이 모여 살았던 구라마에와 아사쿠사 지역은 일명'제작의 거리'로 알려 질 정도로 이곳에 있는 문구점은 고객들이 직접 제작 할 수 있는 실용적인 아이템들을 팔고 있다. 자신만의 취향을 담은 노트를 만들 수 있고 그림책도 만들 수 있어서 아이의 손을 잡고 이곳을 찾는 부모들이 많다고 한다.


도쿄의 각 지역의 문구점 주인들은 제각기 다른 이유로 문구점을 열었는데 가업을 이어서 10대째 오로지 문구류만 팔고 있는 노포들 부터 예술직에 종사했다가 창업한 이들, 10대 시절 부터 해외여행을 다니면서 사 모은 문구류를 끌어 안고 살다가 결국엔 문구점을 열게 된 이들 그리고 더 이상 영업 하지 않은 폐가가 된 옛 문구점을 인수 해서 직접 제작한 문구류를 판매하는 곳까지 문구점 주인 마다 각양각색의 사연을 품고 있다.


조상 대대로 종이를 제작한 집안의 손녀는 오로지 장인이 제작하는 명품 종이만 판매해서 유럽에서도 주문이 들어 올 정도로 전 세계 종이 컬렉터들이 반드시 한 번은 들리는 문구점도 있다.


2010년에 들어선 문구점들은 카페와 휴식 공간, 편지 쓰는 공간, 사진 찍는 공간을 갖춰 놓고 다양한 아이템을 판매 하면서 고객의 발길을 최대한 오래 머물 수 있는 판매 전략을 내세우고 있지만 도쿄에는 여전히 문구점 주인들의 개성과 취향이 담긴 다양한 문구점들이 즐비 하다.


학생 시절 가방 속에 가장 중요한 것은 아마 필기 도구와 노트들로 어떤 필기류와 노트를 만나는지에 따라서 학습의 집중력이 달라질 정도로 문구류마다 각기 다른 기능과 독특한 매력이 있다.


나는 문구 덕후, 마니아는 아니지만 여전히 다양한 펜촉과 그립감을 갖춘 만년필만 보면 눈을 떼지 못하면서도 서랍에 쟁여 둔 잉크들 중 상당수는   열어 본 적이 없을 정도로  만년필이나 기타 펜으로로 무언가 끄적이는 경우가 극히 드물다.


그럼에도 문구점에 들어서는 순간 코 끝에서 느껴지는 나무 향기, 연필심의 흙 향기 그리고 고급스럽고 단정한 색으로 펼쳐진 그 공간에 오래도록 구경하는 걸 좋아 한다.

이 책을 읽기 전엔 도쿄에 이토록 개성이 넘치는 문구점이 있었는지 몰랐다.

진보초 거리를 걸을 때도 문구점보다 책방 그리고 다양한 먹거리를 파는 가게로 발 길을 돌렸었다.

문구류 주문도 앱으로 하는 시대지만 가끔씩 문구점에 들려서 자신이 좋아하는 문구들을 발견 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일본 도쿄에 간다면 오로지 문구점만 순례 해도 재밌는 추억을 쌓을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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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3-02-15 23:5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도쿄에만 꼭 가야하는 문구점이 80곳이라면 그것만 다 돌아봐도 엄청난 시간이 들겠네요. 거의 오타쿠급의 매니아가 아니라면 그정도는 힘들듯요. 그래서 어딘가를 지나다가 예쁘고 독특한 문구점이 있으면 꼭 들러보고 싶은 마음은 누구나 다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해요. 저도 그렇고요. ^^

scott 2023-02-16 00:18   좋아요 3 | URL
다들 어쩌다 들려서 기념으로 사는데
실제로 도쿄 문구점에는 한국에서 수입하지 않는 것들이 많아서
건축가나 예술가들은 한달에 꼭 한 번은 간다고 합니다.

희선 2023-02-16 01:0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일본은 문구점도 오래된 곳 많군요 대를 이어서 하다니... 문구점에서 여러 가지를 할 수 있게 했다니 그런 곳은 한번 가면 쉽게 나오기 어렵겠습니다 도쿄에 있는 문구점 여든 곳을 소개하는군요 문구점 좋아하는 사람은 일본에 갈 때 이 책 가지고 가면 좋겠네요


희선

scott 2023-02-16 10:39   좋아요 1 | URL
백년 가업을 이어가는 것도 대단하지만 일본인들은 여전히 앱주문하지 않고 직접 찾아가서 구매 하는 이들이 아주 많다고 합니다

문구 덕후가 아닌데 막상 일본 가면 사고 싶은 문구가 많아서 갈 때 마다 주섬 주섬 ^^

책먼지 2023-02-16 09:3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스콧님 이 생산성 뭐예요!! 어려운 책만 올리면 힘들어할까봐 난이도 조절까지 해주심!!! 저도 쓰지도 않으면서 만년필, 잉크, 연필 모으는 타입이라 써주신 글 무척 즐겁게 읽었습니다!! 여행 가고 싶네요.. 문구 테마 아니라도.. 도쿄 아니라도.. 어디든! 당장!! ㅠㅠ (책장 공개 전에 차근차근 문구 공개부터 하시는 건가요?!!)

2023-02-16 10: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2-16 13: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2-16 15: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coolcat329 2023-02-16 09: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와 일본 가고 싶어지네요. 문구점 순례 여행이라니 생각만해도 기분좋아집니다.

scott 2023-02-16 10:42   좋아요 0 | URL
그쵸! 문구 덕후 아니더라도 도쿄 문구점에 가면 포스트 잇 한팩이라도 살것 같습니다 ^ㅎ^

새파랑 2023-02-16 13: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요새 동네 문방구는 많이 없어지고 오피스 디포만 많던데 ㅋ 일본은 이런 아기자기한게 좋더라구요~!! 알라딘 우주점에도 문구류 많던데 ㅋ

연필시리즈 예쁘네요 ^^

scott 2023-02-16 16:02   좋아요 1 | URL
알라딘 우주점 문구류가 이제 커피 마시는 곳 까지 점령해 버렸습니다
저는 언제나 그곳은 패쑤^^

거리의화가 2023-02-16 15: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문구 덕후인데 처음이자 마지막인 도쿄 여행은 너무 짧은 일정이라 문구 순례는 하지를 못했어서 아쉬워요ㅠㅠ 가면 문구보며 눈이 저절로 돌아갈 듯합니다. 이 책 그림체도 귀엽고 너무 좋네요!ㅎㅎㅎ 저도 만년필 몇 자루 갖고 있어요. 라미도 한 2~3자루 갖고 있는 것 같고 만년필도 욕심 가지기 시작하면 한도 끝도 없더군요ㅠㅠ

2023-02-16 16: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즐라탄이즐라탄탄 2023-02-19 16: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도쿄에 가본적은 없지만 스콧님의 글을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새로운 경험을 하게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scott 2023-02-19 18:47   좋아요 1 | URL
일본인들이 이토록 문구류를 애정하는지 몰랐습니다
아마도 한국보다 앱마켓이나 스마트폰(여전히 2쥐폰 쓰는 이들도 많은) 보급율이 낮아서인지도 ㅎㅎㅎ

이 책으로 저도 도쿄 문구점을 눈구경 했습니다 ^^
 
작별들 순간들 배수아 컬렉션
배수아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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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 된다.

'삼십 년이 지난 뒤, 연인을 만났다. 한동안 베를린 집에서 홀로 지내게 된 나는 어느 날 순전한 호기심과 충동으로 소파에 가려서 보이지 않는 책장의 가장 아래 칸을 살펴보았다. 커다란 소파를 치우자 먼지가 덮인 책들이 나타났다.'


독일 베를린과 한국을 오고 가며 번역과 창작 활동을 병행하고 있는 작가가 삼십 년 만에 만난 연인은 바로 프랑스의 소설가 마그리트 뒤라스의 <연인>으로 장 자크 아노의 영화 속 한 장면이 새겨진 표지 였다.


작가는 오래 전 대학 시절에 읽고 한 동안 기억 속에서 사라졌던 <연인>의 첫 페이지를 읽자마자 눈을 떼지 못한 채 예전에는 알아차리지 못했던 사실, 주인공이 살던 당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 페스트가 돌고 있었다는 것을 새삼 알게 된다.

코로나 팬데믹이 빠른 속도로 유럽 전역으로 퍼져 나갔을 무렵 작가는 베를린 서가에서 <연인>을 만났고 그 <연인>이 구사하는 문학적 언어에 흠뻑 빠졌다.


[내가 <연인>을 읽고 있는 이 집은 오직 서가이다. 사방의 벽 뿐 아니라 그 이상의 공간이 책과 필름, 음반으로 이루어진 장소이다. 나는 화집과 필름 관련 책들이 꽂힌 책장 앞 간신히 마련한 빈자리에 매트리스를 놓고 잠든다. 내 머리 맡에는 파솔리니와 데릭 저먼 관련 책이 가득이다. 처음 이 집에 왔을 때 나는 독일 작가나 문학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거의 없었고, 이 집의 서가는 내게 거대한 카오스 자체로 보였다. 나는 손이 닿는 대로 아무렇게나 한 권의 책을 꺼내서 살펴보고,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 채, 그것을 다시 다른 자리에 꽂아 놓곤 했다. 몇 년의 시간이 흐르면서 나는 이 서가에 내가 모르는 모종의 질서가 있음을 어렴풋이 깨달았다.]


나는 책장의 앞 뒤를 오고 가며 작가의 베를린 서가 주인의 특징을 찾기 위해 문장을 하나 씩 읽어 나갈 때마다 서가 주인의 모습을 내 상상 속에 그려 본다.


[베를린 서가의 주인은 헌책방이 아닌 대형 서점은 거의 출입하지 않는데, 일단 책값이 비싸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지만근본적으로는 신간, 베스트셀러, 이런저런 화제성이 큰 책들이 주로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곳에서는 시간대의 지층이 없이 오직 리얼타임의 사물들만이 가치를 갖는다.]


작가는 자신의 베를린 집 서가 주인과 서로 대화를 나누다가 그 상대를 통해 독자들을 향해 말을 건네기도 하고 때로는 들어 주기도 한다.

서가 주인은 일 평생 단 하나의 헌책방도 그냥 지나치지 못한 사람이며 방은 물론 욕실과 주방까지 책과 원고들, 편지와 쪽지, 스케치와 콜라주로 그득 채운 사람이다. 여름에는 글을 쓰다가 호수에 뛰어들어 수영을 하고 밤에는 작은 발코니 의자에 앉아 별을 올려다보는 사람이며, 작가의 말을 듣고 글을 읽으면서 그리고 계속 무언가 쓰고 있다.

작가는 가끔씩 서가 주인에게 공간이 부족하며  너무 많은 양의 책들이 거주 공간을 차지 하고 있다며 서가를 옮기자는 불평섞인 제안을 한다.

추운 겨울이 지나 따스한 햇살이 쏟아지는 계절이면 작가와 서가 주인은 베를린을 벗어나서 난방 시설이 없는 펌프로 지하수를 끌어 올리는 자연의 공간, 오두막으로 간다.

작가는 오두막에서 글 쓰는 사람으로 살아가며 전염병이 지속 되는 기간에도 빛과 어둠 속에서 글을 쓴다.

그리고 겨울이 찾아 오면 베를린으로 돌아가 <연인>을 읽는다.


[눈부신 여름날, 한 여자와 한 남자, 기나긴 대화, 자기 자신을 향한 침묵과 관찰로 이루어진, 대화이자 독백, 센강 하구가 내려다 보이는 해변의 카페, 마치 무대와 같은 고정된 공간, 하나의 장소에서 일어나는 이야기, 이인극이며 대화극, 그러나 동시에 모놀로그인, 죽음과 공포가 언어로 표현된다.]


진물러 버릴 정도로 짓밟히고 부서지고 무너져 내리는 고통적인 사랑의 언어로 표현한 마그리트 뒤라스

작가는 모든 문장에 밑줄을 그으면서 읽어버린 문장에서 다른 문장, 다른 시 공간으로 확장 되어 뻗어 나간다.

그리고 책을 덮는 순간 잊어 버린다.

작가는 베를린 서가에서 읽고 잊어 버리기를 반복하며 언어의 리듬과 흐름, 각 장소마다 배열된 위치를 맞추고 해체하고 분해 해버린다.


'그것은 내 가장 깊은 곳을 건드리고 깨어나게 했어. 하지만 구체적인 내용이나 문장을 묻는 거라면, 나는 전혀 기억나지 않아.'


그리고 나는 작가의 이런 행위를 읽으면서 이렇게 중얼 거린다.


'한 권의 책을 끝까지 읽는 다는 건 무의미 한 일인지 모른다. 단 한 문장이라도 마음 속에 파고 들었다면 문장과 문장 사이를 오고 가며 되풀이해서 읽어버리면 그만이다.'


그리고 나는 다시 작가의 책 첫 페이지로 돌아간다.


[어린 시절, 세 살 네 살 다섯 살이 된 사람은 태어날 때 이 생을 위한 지참금처럼 지니고 온 이미지와 생각을 먹고 살게 된다. 그리하여 예순 세 살, 예순 네 살, 예순다섯 살이 된 어느 토요일 강가를 산책하던 한 사람은, 이 강이 북아메리카의 강이라고 단정 짓고 흔들리는 수면의 영롱한 색채를 인디언의 색채인 양 받아들인다. 그러자 그의 환각 속에서 강물을 흘러가는 카누 한 대가 보인다. 카누에는 머리에 오색의 깃털 장식을 두세 개 꽂은 최후의 모히칸족이 타고 있다. 그 광경을 마주한 사람은 시민적 의무를 충실히 수행하며 보낸 지난 수십 년의 세월을 회상한다.]

작가는 베를린 인근 한 시골 마을의 정원 딸린 오두막을 15년 동안 오고 가는 동안 책을 읽었고, 글을 썼고 그리고 마침내 그곳은 작가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장소가 된다.

잠시 한국에 머무는 시기에는 번역에 매달리지만 독일 베를린으로 돌아가 숲 속에 자리한 허름한 오두막으로 돌아가면 작가는 황홀할 정도로 눈 앞에서 일렁 거리는 자연의 빛 에 흠뻑 빠져 회상의 시계를 돌린다.

무슨 일을 하고 있냐는 질문을 받으면 작가와 서가 주인은 '서로 읽고 쓰는 사람'이라고 대답하지만 실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작가는 오두막 주변 숲 속을 산책하며 봄이 오고 여름이 찾아오고 가을이 가고 그리고 베를린으로 돌아가야 할 '겨울'이 왔다는 걸 알아차릴 뿐 자연의 시간 속에서 살아간다.


[우리는 서로 읽거나 쓰는 척하고 있지만, 사실은 거의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정원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데 가장 적절한 장소이다. 잠시 동안 빛이 넘실 대는 정원을 내다보고 있었을 뿐인데, 어느새 우리는 밤의 정원에 있다. 밤새도록 나이팅게일이 운다. 잠 속에서도 꿈속에서도 나는 그 소리를 듣는다. 잠시 동안 나이팅게일의 소리를 듣고 있었을 뿐인데, 어느새 우리는 수많은 세월을 늙어버린 다음일 것이다. 그것이 환희라면. ]


작가는 서가의 주인과 함께 천천히 두 시간 동안 너도밤나무 숲을 지나 이웃 마을에서 열리는 바흐 연주회에 참석하고 오두막 정원에서 낭독회를 열기도 한다.

그리고 이따금씩 도시로 나가 작가가 번역한 작가들을 만나기도 하고 특급 열차를 타고 유럽 다른 도시로 넘어가도 언제나 돌아 오는 곳은 베를린 그리고 비밀스러운 기쁨의 순간들로 충만한 오두막으로 돌아온다.

여기, 작가가 독자들에게 던지는 질문이 있다.

행복한가?

잘 모르겠다.

그러면, 작가는 다음 질문을 던진다.

지금 이 순간에 계속 머물기를 원하는가?


나는 이 질문에 대답을 하지 못하고 다시 책장을 넘긴다.

책장 구석 구석마다 낯선 지명들, 영화들 그리고 사람들이 등장 한다.

어떤 장소는 오래전 작가가 살았던 곳,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이제는 더 이상 만날 수 없는 세상으로 간 이들이다.

베를린 서가 곳곳에는 서늘한 농담과 그리움이 숨어 있다.

작가는 자신이 태어난 그곳에 두고 온 사람들, 장소들 시간들을 흐릿하게 떠올린다.

처음 베를린에 도착 했을 때 불안한 마음을 안고 올라 탔던 순간, 기나긴 여행, 수 많은 편지들이 오고 갔고, 그리고 또 다시 베를린으로 향했던 그날 들은 책장 마다 작가가 회상하는 연두색 풍경 속에 푸른 빛깔의 수초들이 둥둥 떠다닌다.

작가는 자신의 언어로 글을 쓰고 그 언어 속에 살아가고 있다.

작가가 거주 하는 곳은 베를린이지만 그 베를린은 작가의 글쓰기 속에 들어 있다.


[ 어린 시절 이후 나는 어디에서 살아왔던가? 항상 나는 내 최초의 집을 생각한다. 내게 최초로 말과 글을 가르쳐준 이는 누구였을까? 글을 쓸 때, 나는 종종 눈앞에서 허물어지는 화가의 아틀리에를 상상한다.]


베를린의 겨울을 지나 봄과 여름의 시간이 흐른 후 베를린 서가의 주인은 작가에게 어떤 글을 쓰고 있는지 묻자 작가는 읽기에 대하여 쓰고 있다고 답한다.

작가가 새겨 놓은 이 책 <순간들, 작별들> 속의 문장들은 마치 작가의 개인적인 기억의 파편들이 흩어졌다 다시 연결 되어 이어지고 반복되며 여러 시간에 걸쳐 하나의 파편, 즉 한 문장으로 완성된다.


나는 다시 이 책의 첫 장으로 돌아가 작가의 베를린 서재의 흔적을 되짚어 본다.


[베를린 서가의 주인은 일 평생 단 하나의 헌책방도 절대로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그래서 지금 각각 다른 장소에 있는 그의 서재 세 곳은 책으로 가득하며, 그때 그때의 운명과 우연에 따라, 여행과 체류 계획에 따라 각 서재의 책들을 재 배치하는 일이 그의 커다란 열정이다. 그는 자동차 트렁크에 커다란 여행 가방을 싣고 한 서재에서 다른 서재로 떠난다. 어디로 떠나더라도 여행 가방에는 다른 물건은 거의 없이 오직 책이 가득하다. 그의 여행 가방은 그 자체로 작은 도서관이다.]


작은 도서관 같은 '여행 가방'을 짊어진 작가는 느리게 움직이며, 느리게 읽고 그리고 매일 글을 쓰고 있지만 사실은 아무것도 쓰지 않는다.


'모든 인간은 살아가는 동안 언어로 자신의 집을 지어야 한다. 누구나 일생 동안 그 일에 매달려야 하며, 자신이 얻은 외국을 거주 가능하게 만들어야만 한다.'


한국 땅을 떠난 작가는 새로운 언어를 배워서 자신의 언어로 만든 집에 살고 있다.

그렇게 모국어가 존재 하지 않는 그곳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함께 먹고, 일하며 그리고 읽고 쓴다.

그곳엔 항상 태양이 빛나지 않는다. 비가 내리고, 눈이 날리고, 얼음이 얼어서 장작 불을 태운다.

작가가 살고 있는 오두막의 지붕은 계절이 바뀔 때마다 주저 않거나 더러운 흙더미와 풀더미로 뒤덮인다.

벽마다 구멍이 숭숭 뚫려 있고 그 구멍 사이로 빛이 새어 들어 온다.

작가는 바란다. 이 공간이 무너져 버리기를 , 유리창이 날아가 버리기를, 모든 사물들이 빛과 섬광에 노출되어 분해 되고 사라지기를 ....

한국을 떠난 기나긴 시간 속에 작가와 만나고, 교류했고, 함께 살았던 이들이 하나 둘씩 세상을 떠났다.

문득 작가는 자신이 살고 있는 이 공간 속에 생명들도 서서히 생명을 다해 사라져 버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리고 작가는 독자들에게 이런 말을 내뱉는다.


'세상의 다른 많은 일들과 마찬가지로 사랑은 시작도 끝도 없다는 것이 내 생각입니다. 아마 한 권의 책도 그렇지 않을까요?'


나는 다시 이 책의 첫 장으로 되돌아가 작가의 기억의 파편이 새겨진 베를린 서가의 한 문단을 읽는다.

[베를린은 내 인생의 어떤 결정적인 사건이 시작된 도시이다. 내가 그것과 비로소 만난 도시이다. 베를린은 그것을 내게 주었다.

하지만 나는 베를린을 좋아하지 않으며, 언젠가 베를린을 떠날 수 있기를 남몰래 소망 한다. 그래서 죽을 때까지 두 번 다시 베를린에 올 일이 없게 되고 마침내 베를린을 영영 잊어도 좋다고 생각한다.]

작가의 언어는 시간의 순서대로 흘러 가지 않는다. 어느 날 갑자기 책장에서 손에 잡히는 책 한 권을 뽑아 읽거나, 어떤 시간 속에서 영화를 보거나 그리고 멀리 여행을 떠난다.

작가가 기억하는 언어는 또 다른 작품의 언어가 되어 이야기 한다.

그렇게 이어지는 언어의 파동은 결국 하나의 이야기로 귀결되어 맨 첫 장의 시작인 베를린, 작가와 서가 주인의 여행 가방 속 책장으로 들어간다.


베를린에 두고 온 가방이 있더라도

Ich hab' noch einen Koffer in

베를린에 죽은 자를 두고 왔더라도

Ich hab noch einen Toten in Berlin

그리고 베를린에서 연인과 재회했다 할지라도

마치 우리의 인생이 어제의 시간에서 멈추지 않고 흘러가듯 어쩌면 나는 작가의 이 책을 오직 단 하나의 문장만 기억 하게 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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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요정 2023-02-11 00: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사진이 마치 뒤라스의 <연인> 같습니다. 참 힘들게 읽은 책이었는데, 아닌 걸 알면서도 서로 사랑하면 안될까... 이런 생각도 했었죠. 그게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쓴 글이었다는 것도 충격이었어요. 뭔가 마음이 아련한 것이 쓸쓸해집니다. 그나저나 스콧님 글을 읽는데 한 편의 잔잔한 영화를 보는 줄 알았어요^^

2023-02-11 00: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꼬마요정 2023-02-11 12:35   좋아요 1 | URL
앗, 서로 사랑하면 안 될까 취소할게요!!! 그건 망상이었어요!!! 이것도 미화시킨 거였다니... 가슴이 아픕니다. 이번 주말은 쉬겠습니다. 찜닭 먹을거예요^^

scott 2023-02-12 21:05   좋아요 1 | URL
찜 닭! ㅠ.ㅠ

안동 스톼일로 드셨쥬 ㅎㅎㅎ

꼬마요정 2023-02-12 23:44   좋아요 1 | URL
너무 매워서 동생에게 다 먹였습니다ㅜㅜ 찜닭 대실패ㅜㅜ

2023-02-28 22: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새파랑 2023-02-12 16: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배수아 작가님의 작품은 안읽어보고 번역작품은 몇개 읽어본거 같은데 감성적인 에세이일거 같아요. 결정적이었지만 떠나길 희망하는 곳 베를린은 어떤곳이었던걸까요?

역시 뒤라스는 <연인> 이 젤 좋은거 같아요 ^^

scott 2023-02-12 21:06   좋아요 1 | URL
역쉬! 새파랑님 취향은 세계 문학급! ㅎㅎㅎ

뒤라스 전 출간 작품 새파랑님 이미 정복 하셨을 것 같습니다^^

베를린,,,
그다지,,,(겨울 일조량 넘 부족 하공 여기 밤엔 무척 위험/ 일부 번화가를 제외하고)

희선 2023-02-13 01: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배수아 작가 독일에 사는군요 어디선가 그런 말 본 것 같기도 하네요 만난 사람이 세상을 떠났다는 말을 보니 허수경 시인이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두 사람은 거기에서 만났을지... 순간은 빨리 지나가고 늘 헤어지는군요 그래도 순간은 영원하기도...


희선

2023-02-13 11: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스파피필름 2023-02-13 05: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틀 전 읽기 시작했습니당 ^^

scott 2023-02-13 11:04   좋아요 1 | URL

두번
세번
그리고 여전히 읽고 있습니다 ^^

책먼지 2023-02-13 13: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스콧님 조만간 제 땡스투 갈거예요 감상을 이렇게 적으시면 땡스투밖에 못 받으십니다!!!

scott 2023-02-13 18:04   좋아요 1 | URL
먼지님도 이 책 읽고 좋으시면 리뷰 올려 주세요
저도 역 땡투를 ^ㅎ^

책먼지 2023-02-13 18:37   좋아요 1 | URL
역땡투란 것도 있나요? 아직도 모르는 게 너무 많습니다!! 이렇게 동기부여해주시니 더 힘내서 읽어봐야겠어요!! (책이 좋지 않아서가 아니라 제가 게을러서 리뷰 못 올릴 가능성이 높습니다ㅠㅠ)

2023-02-28 22: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3-01 00:39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