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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
마리아 푸르셰 지음, 김주경 옮김 / 비채 / 2023년 12월
평점 :
[너는 그의 손을 보고 조금 놀란다. 남자 몸에 실수로 연결된 소녀의 손 같아서. 가느다란 손가락과 매끄러운 손목, 부드럽고 동그란 손가락 관절, 너무 얇아서 속이 다 비칠듯한 피부,툭 불거진 혈관, 그의 오른손이 올리브와 빵 위에서 움직이는 동안 너는 꿈틀거리는 그의 근육을 바라본다. 그가 물병을 들어 올리자 어린아이처럼 연약한 근육이 미세하게 떨린다.모든 게 아주 허약해 보이고 작은 손짓에도 부러질 것만 같다. 그가 너의 목을 조르는 건 불가능하리라고 너는 생각한다.]
한 여자의 시선은 남자의 신체 구석 구석을 훑고 지나가다 입술에서 수직으로 새겨진 문신 같은 슬픔을 알아차린다.
그리고 천국으로 간 그여자의 엄마가 이렇게 속삭인다.
[대체 누가, 어떤 고통이, 어떤 충격이 그를 그렇게 짠한 마음이 들게 하는 몸으로 과거의 모습을 깨진 거울로 비추는 듯한 얼굴로 그렇게 비관론자적인 손으로 만들었는지 직접 물어보는 것, 그건 아주 민감한 문제다,
너는 그를 모른다. 너는 현대사 심포지엄의 발언자로 초청하기 위해 글로 만난 것이지. 하나의 풍경화를 마주하고 있는 게 아니다. 너는 그의 참여를 끌어내야 한다. 그의 서사가 아니라.]
사회과학과 교수 로르는 한 심포지엄에서 증권가에서 일하는 은행가 클레망을 보자마자 욕망의 불길에 타올라 그의 몸짓, 행동, 말투까지 독차지 하고 싶어진다.
로르가 클레망을 향한 사랑의 불길이 활활 타오르는 동안 세상을 떠난 클레망의 어머니의 흔적이 두 사람 사이를 파고들기 시작한다.
[너는 너의 아이와 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행동하는 사람, 항상 의존과 분노 사이의 중간 어디쯤 어정쩡하게 사는 네가 아니라.]
'안녕 하세요. 클레망, 파리 13구에서 만난 로르예요.'
불쑥 문자를 보내오는 여자, 남자는 어제 만났던 그 여자에 괜히 연락처를 알려 준 것이 아닌지 후회를 하며 곧바로 답신을 보내지 않고 머뭇거린다.
'내일이라. 나는 두렵다. 로르, 우린 너무 빠르고, 너무 늦었어요.'
클레망을 향한 사랑의 열망이 달아 오를 수록 로르의 마음은 조급해지고 크게 심호흡을 내뱉으면서도 그의 모습을 떠올릴 때마다 그녀의 심박수가 빨라지고 온 몸이 달아 오르기 시작한다.
겨우 두 번 만난 남자에게 문자를 보낸 로르는 그 남자를 원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에 웃음이 터져 나올 정도로 낯설면서도 사랑의 불길 속으로 들어가 자신의 온 몸을 활활 불태우고 싶은 희열에 사로잡혀 버린다.
두 번의 만남 이후로 몇 번 문자를 주고 받은 로르와 클레망은 서로 알고 지낸 지 단 열흘 만에 차 안에서 키스를 나누고 다음날 부터 사랑의 은어가 담긴 달콤한 언어가 담긴 문자를 주고 받는다.
매일 아침 눈을 뜨자마자 두 아이를 챙겼던 로르는 클레망에게 마음을 빼았기고 부터 자신의 눈 앞에 보이는 모든 것들을 서둘러 어디론가 밀어버리고 맡겨 버리고 서랍 안에 새로 산 속옷들을 채워 넣기 시작한다.
보름 만에 대낮 호텔에서 첫 관계를 시작하며 금기된 사랑을 시작 하게 된 로르와 클레망은 주변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조심한다.
서로 만남의 횟수가 늘어 날 수록 함께 사랑을 나누는 시간이 길어 질 수록 상대방에게 원하는 요구 사항이 하나 둘 씩 늘어나자 가정을 갖고 있는 로르는 매사 노심초사 하며 자신의 일에 집중을 하지 못하게 되고 클레망은 이전 보다 더 깊은 우울증에 빠져 버린다.
로르는 클레망과 관계를 이어가는 동안 눈을 뜨자 마자 서둘러서 두 아이를 학교에 밀어 넣어 버리는 자신의 모습이 낯설어 하며 두 아이에게 큰 죄책감을 느끼면서도 클레망에게 연락을 받는 즉시 호텔로 향한다.
가족과 피렌체로 여름 휴가를 떠난 로르의 마음은 클레망에게 향해 있고 시에나로 출장 온 클레망을 만나러 가족들에게 거짓말을 하고 기차에 올라탄다.
'엄마는 엄마가 자유롭다고 생각해? 멍청한 남자의 눈요기를 위해 고깃덩어리를 장식하는 게? 그 멍청한 자의 이름은 대체 뭐야?'
대학 입시를 준비하고 있는 딸에게 클레망의 정체를 들켜버린 로르는 뇌종양 판정을 받은 반려견 개가 숨을 헐떡이며 투병하고 있는 모습에서 자신의 현재 정신 상태를 직감하며 뭔가 어긋나 버린 자신의 욕망의 불길을 꺼버리기 위해 대학 강의에 열중하지만 임신 판정을 받는다.
굴레를 벗어나지 말라.
겸손하게 눈을 내리깔라.
늦게까지 돌아다니지 말라
어린 시절 어머니로부터 들은 주 기도문 같은 문장을 되내이는 로르는 뱃속의 아이는 클레망이 아니라 현재 남편의 아이가 될 것이라고 속삭이며 마지막으로 클레망을 향한 자신의 사랑을 테스트 해보기 위해 동전을 던진다.
그리고 마침내 홀로 병원을 찾아간 로르는 자신의 아이들의 얼굴을 떠올리다 수치심에 사로 잡혀버리고 차라리 욕조 속에서 녹아 사라지기 위해 면도칼을 손에 쥔다.
불굴의 노력으로 자신의 분야에서 최고의 자리, 모두가 원하는 자리에 올라섰지만 사회와 관습이 요구하고 규정하는 틀 안에서 타오르는 욕망을 억누르며 살았던 로르
엄격한 종교 교리에 사로잡혀서 아들에게 남성다움을 끊임없이 주입 시켰던 어머니로 인해 클레망은 텅 빈 야망으로 조직 생활에서 숨 막히는 나날을 이어가는 동안 자살 충동에 사로 잡혀 있을 때 만난 욕망의 화신 로르에게 빠졌던 그는 그 불길을 잔인한 방법으로 꺼버린다.
결국 로르가 질러버린 '불'은 마지막 클레망의 모든 걸 연소 시켜 버린다.
불길 밖의 사랑과 불길 속의 사랑을 '너'라는 시점으로 맞물려 전개 시키는 독특한 작품 <불>은 단순히 남녀 간의 사랑 이야기가 아닌 국가들 사이에서 발발하는 전쟁 부터 사회에서 발생하는 분쟁과 논쟁, 가정에서 발생하는 미움과 질투, 사랑의 충돌이 빚어내는 불화까지 활활 타오르다 소멸하고, 잿더미 속에서 꺼지지 않는 불씨처럼 작품 전체를 관통한다.
현대 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 모두의 삶은 불길의 연속이다.
계층의 사다리가 사라져 버린 시대에 부모 세대 보다 더 많이 공부해서 더 좋은 학교를 졸업해서 사회에 나오자마자 빚 폭탄을 끌어 안게 된다.
이념의 갈등, 세대 간의 충돌, 정치 사회적 불안이 요동치는 시대에 최첨단 기술로 무장한 AI가 인간이 할 수 있는 영역까지 척척 해내는 동안 미래를 향한 문은 어느 누구에게나 열리지 않는 세상 앞에서 몸과 마음은 지칠대로 지쳐서 활활 타오르는 불길에 휩싸여 잿가루로 변해가고 있다.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다.
우리 모두 무언가에 몰두 해서 온 몸을 불살라 버릴 정도로 갈망하고 욕망한다.
그 대상이 신을 향해서 든, 사랑하는 이를 향해서 든 ,부와 명예를 위해서 든 결국엔 인간은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 불길 속으로 뛰어들어 갈 수 밖에 없는 운명이다.
우리의 아이들에게
태어남과 동시에 두려움에 차 비명을 지르는 그들에게
사랑을 부르짖는 그들에게
피 묻은 그 손으로 북을 두드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