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MCA 이건희컬렉션 특별전 : 한국미술명작 MMCA 이건희컬렉션 특별전
국립현대미술관 옮김 / 국립현대미술관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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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환기 유영국 박수근 이중섭 이성자 남관 이응로 권옥연 김흥수 류경채 문신 박생광 천경자 김종영 작품 속에 담긴 파란만장한 인생, 고단한 세월들 한국 근대미술의 르네상스 작품들이 담긴 도록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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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랜드 캉티뉴쓰 호텔
리보칭 지음, 허유영 옮김 / 비채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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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월 1일 금요일 새벽 6시 28분 캉티뉴쓰 호텔 뒤 호숫가 산책로에서 총에 맞아 죽은 남자 시신이 발견 됐다는 신고가 긴급 신고 센터에 접수 되고 39분 뒤 인근 파출소 경찰들이 현장에 도착한다.


발견 된 시신의 등 왼쪽 심장 부위에 지름 0.5센티미터의 총알 구멍이 나 있고 손과 얼굴에도 경미한 찰과상이 있었다.

긴급하게 폴리스 라인을 치고 출입을 차단 한 후 오전 9시경 형사와 법 의학자들이 시신이 발견된 현장에서 기초적인 감식을 하고 결과를 발표한다.

 피살자는  캉티뉴쓰 호텔의 사장 바이 웨이둬, 연회색 기능성 소재 운동복 티셔츠와 검은 색 트레이닝 팬츠 차림에 스포츠 양말은 신었지만 신발은 보이지 않았다. 

잔돈 25위안 외에 다른 소지품은 없었고 온몸이 물에 젖고 머리카락과 옷은 진흙 투성이였다.


'캉티뉴쓰 호텔은 5성급 호텔이 갖춰야 할 모든 조건을 갖추고 있다. 안락한 객실, 훌륭한 서비스, 고급 스파, 좋은 술과 맛있는 안주, 하지만 이게 전부가 아니다. 이 호텔은 꿈의 결실이다. 타이완 중앙 산맥에 남은 마지막 미 개발지, 그 신비한 호수의 절경이 내려다보이는 60미터 절벽 꼭대기, 바로 그곳에 이 호텔이 자리 잡고 있다.'

2015년 여행 잡지 <크라우디드 선>에 소개 된 캉티뉴쓰 호텔, 호수와 절벽 사이에 절묘하게 서있는 천국 같은 그곳에서 2016년 새해 첫 날 호텔 사장이 피격 당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 사건 소식을 처음 접한 왕쥔잉 검사로 지방 검찰청에서 12직등급 정도의 서열 3위의 위치에 있지만 화려했던 지난날의 수사 이력과 달리 이제 세월에 맞춰 늙어가는 것만 남겨 두고 있다.

검사 왕쥔링은 2016년 새해 첫날 에 발생한 캉티뉴쓰 호텔 사장 피살 사건이 자신의 경쟁자인 타이중 시 중구 경찰계의 두목 '차이궈안'에게 넘어 갈 까봐 잔뜩 긴장하고 있다.

'차이궈안'은 경찰 고위 간부 부터 뒷 골목 조폭 똘마니들까지 탄탄하게 쌓아 둔 인맥으로 그의 직인이 찍힌 서류는 어디를 가도 무사 통과 될 정도로 대단한 인물이다.

검사 왕쥔링은 이 피살 사건을 진두 지휘 하며 경찰들을 병풍처럼 세워두고 수사 결과를 발표 해야 겠다고 결심하고 캉티뉴쓰 호텔로 향한다.

하지만 왕검사 보다 한발짝 앞서 사건 현장에 도착한 차이궈안은 거들먹거리며 차에서 내리려다가 휘청 거리는 왕검사를 부추겨 주며 서로 날카로운 기 싸움을 벌인다.

경찰 측에서 판단한 사인은 총상이였지만 법의학자들의 초기 부검 결과 새로운 사실이 발견됐다.

피살자의 호흡기에서 점액 분비물과 진흙이 대량으로 발견 되었는데 이는 숨이 끊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물에 빠졌다는 증거로 총탄이 피살자의 등으로 들어와 좌측 폐를 관통한 뒤 갈비뼈 사이데 꽂혔지만 심장과 동맥은 손상 시키지 않았다.

따라서 법의학자들은 부검 결과 피살자가 총에 맞아 즉사 하지 않고 호수에 빠져 허우적대다가 산책로까지 기어 올라온 후에 과다 출혈 상태로 사망했다는 결론을 내렸다.

사망한 캉티뉴쓰 호텔의 사장 바이웨이둬는 쉰살 의 나이의 타이중 출신 사업가로 결혼은 했지만 자녀는 없었다.

서른 세 살의 나이에 웨이둬 건설을 설립하며 호텔, 실업 개발등의 여러 기업체를 운영했던 촉망 받는 기업가로 2009년 캉티뉴쓰 호텔이 완공 되자마자 그는 자신의 모든 사물실을 호텔 2층으로 이전 하고 자신도 호텔 옆 직원 기숙사로 이사 했다.

아침 8시 부터 밤 9시까지 왕성하게 일했던 바이웨이둬는 누군가에게 원한을 샀던 인물은 아니였고 건축 관리법 위반이나 소소한 민사 분쟁 사기죄 고소 사건이 외에 어떤 전과기록도 없었다.

사건 수사가 오리무중으로 빠질 수록 경찰 쪽 간부 차이궈안과 검사 측 우두머리 왕쥔잉은 수사 주도권을 놓고 치열한 공방을 벌인다.

언론의 관심을 한 껏 받으며 직접 수사를 진두 지휘하고 싶은 왕 검사는 또라이 기질을 가졌지만 비상한 두뇌를 가진 젠돤 대학의 푸얼타이 부교수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범죄 연구가 인간을 이해 할 수 있는 지름길이라고 생각 하며 해결하기 힘든 각종 범죄수사를 돕고 있는 푸얼타이 부교수는 조류 연구 전문가로 그의 추리 실력은 거의 신기에 가까웠다.

캉티뉴쓰 호텔 건물의 'ㅅ'자 형태와 절벽이 만들어낸 삼각형 형태의 야외 테라스에 풀장과 노천 카페가 있는데 이곳의 절벽 가장자리를 따라 심어 놓은 키 작은 나무와 스테인리스 난간을 넘으면 20층 높이의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있다.

절벽 곳곳에 있는 바위와 나무들 사이 움푹 파인 곳의 새 둥지를 발견한 푸얼타이 부교수는 사람의 발자국과 나뭇잎에 묻은 화약의 흔적을 발견한다.

cctv영상에 찍힌 수상한 차림의 범인을 찾기 위해 호텔 전 직원들에게 탐문을 하자 '황아투'라는 이름의 인물을 지목한다.

호텔 정원 조경을 담당했던 인물 '황아투' 현재 행방이 묘연 한 상태로 그 사람 이름으로 등록된 엽총이 있었다.

경찰 기록에 의하면 '황아투'는 막 노동, 제철소, 식당, 농협, 호텔에서 일하면서 상해죄, 불법 감금죄, 기물 파손 죄로 처벌 받은 전과가 있었다.

10여년 전 이곳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와 바이웨이둬와 친분을 쌓아서 캉티뉴스 호텔을 건설하는데 주요 역할을 했던 인물이였다.

피살자 바이웨이둬는  자수성가한 기업가로 주변의 원한을 산 인물이 아니였다. 그의 아내 란니는 42살로 중부 지역 부동산 재벌의 무남독녀로 흙수저 출신인 바이웨이둬와 결혼으로 큰 화제가 되었다.

란 씨 가문 사람들이 뉴질랜드로 이민 간 후 이 집안의 사업체를 바이웨이둬가 넘겨 받아 사업 영역을 확장 할 수 있었다.

남편이 피살 당하기 하루 전 란니는 아침 8시에 남편과 함께 사무실로 출근하고 연회장에서 열리는 약혼 파티를 축하해주었고 각자 일을 본 후 새해 전날 밤을 함께 보낼 친구를 데릴러 차를 몰고 나갔다.

송년 파티에 참석한 부부는 새해 카운트다운이 끝난 뒤 귀가 했다.

다음 날 새벽 5시 조깅 복 차림으로 집을 나선 바이웨이둬를 아내 란니가 창가에서 마지막으로 본 모습이였다.

부부와 함께 송년 파티에 참석했던 여 비서 장커커는 사건 당일 아침 잠에서 일찍 깨서 호숫가 산책을 나갔다가 녹색 윈드 재킷을 입은 이상한 사람과 마주치고 산책로로 내려갔다가 시신을 발견 했다.

1999년 5월 10일 새벽 1시경에 발생 했던 코야오 연못 옆 가스 공장 가스 폭발 사고로 사망자 6명, 부상자 28명의 인명 피해와 함께 가옥 35채가 전소 되었던 '코야오서 가스 폭발 사고'를 찾아낸 경찰 측은 이 사건으로 캉티뉴쓰 호텔 개발 계획이 통과 되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우연한 가스 누출 사고 였는지 고의적인 폭발이였는지 확실한 물증이 없는 상황으로 사건은 덮어졌다.

차이궈안은 호텔 대연회장에서 수많은 취재 기자들 앞에서 기자 회견을 연다.


'......경찰의 끈질긴 수사 끝에 마침내 중요한 목격자를 찾아 냈습니다. 호텔의 한 경비원이 오늘 새벽 5시경 호텔 바깥쪽 경비 초소에서 황아투(차량번호 XY-3521)가 트럭을 몰고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고 증언 했습니다.

경찰이 호텔 단지 내 숲에서 그 차량을 발견 했으며, 조사 결과 황아투(본명 황셴)가 차를 그곳에 버려두고 걸어서 호텔 로비를 가로질러 야외 테라스로 나간 뒤 로프를 이용해 절벽면의 움푹 파인 곳으로 내려가 숨어 있다가 바이웨이둬가 산책로를 지나갈 때 총을 쏘아 살해 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검찰은 황아투에 대한 수배령을 즉각 내리고 용의자 행방을 찾는데 혈안이 된다.

사건의 중요한 핵심 단서가 될 수 있는 일급 보호종 펠리칸 새, 코야오서 가스 폭발 사고, 행방이 묘연 한 호텔 조경 담당자 황아투, 그리고 여비서 장커커....

타이완 중앙 산맥에 자리 잡은 신비한 호수의 절경이 내려다 보이는 60미터 절벽 꼭대기에 자리 잡은 '캉티뉴쓰 호텔'

호텔 사장 바이웨이둬를 살해한 범인은 누구일까? 처음부터 계획된 살인이였을까?

명탐정으로 알려진 조류학 교수 푸얼타이, 전직 경찰 뤄밍싱, 변호사 거레이, 신비의 괴도 인텔 선생 모두 살해 사건이 발생한 시기에 호텔에 투숙하고 있었던 것일까?


['1998년 화롄으로 출장을 가다가 산사태로 도로가 끊기는 바람에 산길을 돌아가던 중에 우연히 이 호수를 보았어요. 캉티호가 관광지로 개발되기 전이라 제대로 된 도로도 없었죠. 힘들게 코야오서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밤 늦은 시간이었어요. 지치고 배고픈 몸을 이끌고 찾아왔다가 구야오원 목사님 때문에 기절할 뻔 했습니다. 목사님이 내게 활을 겨눈 채 성니콜라스 십자가를 찾아온게 아니냐고 묻더군요. 길을 잃고 헤매고 있다고 했더니 나를 교회로 데리고 가 호수에서 잡은 물고기를 구워 죽통밥과 함께 내어주시더군요. 좁쌀술과 국화차도 함께요. 우린 밤새도록 애기를 나눴습니다. 코야오서의 역사에 대해 듣고 코야오봉에 올라가 일출도 봤죠.

그 일을 계기로 캉티뉴쓰 호텔 건설 프로젝트를 구상하게 됐어요. 호수에서 잡은 물고기도 맛있고 좁쌀술도 향기롭고 호수 경치는 넋을 잃을 만큼 아름다웠죠. 수많은 곳을 가봤지만 캉티호와 코야오서 만큼 타이완 고유의 더럽혀지지 않은 신성한 감동을 주는 곳은 없었어요.'

-살아 생전 호텔 사장 바이웨이둬가 검사 왕쥔링과 나눴던 대화 중에서 p.328-329

이들 네 사람의 서로 다른 내밀 한 사정들이 하나 둘 씩 드러나면서 호수와 절벽 사이 자연이 내지른 소리에 빨려 들어가는 천상의 섬에서 발생한 살인 사건의 진실이 수면 위로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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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2-03-10 21:5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앗 그랜드부다페스트호텔인줄 알았어요 ㅎㅎ 표지는 예쁜데 내용은 추리소설이군요 ~ 스콧님 관심사는 정말 넓은 듯 ㅎㅎ 대만추리소설은 처음 접하는 듯, 궁금합니다. 스콧님 편한 밤 보내세요 ~

scott 2022-03-10 22:05   좋아요 2 | URL
표지가 그랜드! 떠올리게 만들죠.
설정 분위기도 좀 비슷 합니다
타이완 표 밀실 추리 소설!
찬호께이가 인정한 작품이라고 해서 냉큼!!

미니님 편안한 밤 ! 굿! 밤 ^^

미미 2022-03-10 23:3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쌩뚱맞지만 무라카미 배지가 욕심나네요ㅎㅎ 스콧님의 별5개 작품은 저도 찜! 😆

scott 2022-03-11 11:53   좋아요 1 | URL
미미님 박사곰에게 달아주고 싶은 거죠!ㅎㅎㅎ
.   /\__.ヘ/ヽ
   /   (_(⌒厂ヽ
  |      ̄\ノ
∩∩ ミ ⌒ o ● ミ
( ⊂) 乀_____ノ

희선 2022-03-11 00:0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여기 나온 사람 가운데 범인이 있겠지요 어떤 비밀이 있을지... 자연이 내지른 소리라는 말을 보니 그곳에 호텔을 지어서 자연이 안 좋아지고 누군가 피해를 입었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자연은 있는 그대로 두면 좋을 텐데, 사람은 좋은 곳이 있으면 거기에 꼭 뭔가를 짓는군요


희선

scott 2022-03-11 11:55   좋아요 2 | URL
아닙니다
이거 마지막 반전이 포인트이기 때문에
리뷰에서는 감춰 버렸습니다
사알짝 힌트만 ㅎㅎㅎㅎ

천혜의 자연 속에 자리한 호텔에서 발생한 살인 사건!
요런 설정 하나 만으로 작가가 작품 한권 뚝딱!

밀실 살인 트릭 추리는 흥미진진한데
실제 발생하면 안됌요 ㅎㅎㅎ

psyche 2022-03-11 08:16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오 이거 재미있겠는데요!

scott 2022-03-11 11:55   좋아요 2 | URL
잼!ㅎ 납니다 ㅎㅎ
이제 일본판 추리 안봐여 ㅎㅎ
타이완 추리 SF가 대세!^^

새파랑 2022-03-11 08:3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는 그랜드부다페스트랑 히가시노 게이고가 떠올랐어요 ㅋ 간만에 추리소설이 땡기네요 ^^

scott 2022-03-11 11:56   좋아요 2 | URL
게이고 옹 요즘 필력이 하향세 ㅎㅎㅎ
 
나의 20세기 저녁과 작은 전환점들 쏜살 문고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김남주 옮김 / 민음사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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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일어나지 않았지만 일어 날 수 있는 이야기를 실제 사람은 아니지만 존재 했거나 존재 할 수도 있을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말하거나 읽어 줌으로 써 우리는 상상의 문을 열고 들어 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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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2-03-08 00:0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시구로작가님 이런 책도 있군요 *^^*

scott 2022-03-08 00:06   좋아요 3 | URL
장바구니 가격 맞춰 쿠폰 쓸때 구입했습니돠 😄

새파랑 2022-03-08 07:4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100자평 이벤트에 등장한 가즈오 이시구로 군요 ^^ 제가 안읽은 이시구로의 책이여서 읽어봐야 겠습니다~!!

scott 2022-03-10 23:14   좋아요 1 | URL
오! 댓글 분명 썼는데 사라졌네요 ㅜ.ㅜ

이시구로 이 책은 인터뷰 입니다! ㅎㅎㅎ
 
미국인 이야기 3 : 건국의 진통 1780~1789 - 각자의 최선보다 모두의 차선 미국인 이야기 3
로버트 미들코프 지음, 이종인 옮김 / 사회평론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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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5년 렉싱턴과 콩코드 전투로 시작된 독립 전쟁은 이미 10년 전 부터 전운이 감돌았다.

거대한 아메리카 땅에 거주 하고 있던 사람들은 유럽의 바다를 장악하고 있던 대영제국의 지배 하에서 자신들의 피와 땀방울 스며든 토지와 재산에 대한 안전한 자치권 보호를 받기 원했을 뿐 전쟁을 벌일 생각은 없었다.

13개 주 식민지 땅에 넓게 퍼져 살던 대다수 미국인들은 자신들이 군주제 정부로 부터 관대한 통치를 받고 있다고 생각했을 뿐이였다.

반면 방대한 식민지 영토를 통치 하는데 막대한 군비 자금과 항해 운송비를 감당 하기 힘들었던 영국이 1763년 각종 통치 제도를 바꾸기 시작 하면서 통치국과 식민지국 간에 커다란 문제가 발생하게 되었다.

대서양을 사이에 두고 떨어져 있는 나라의 왕과 의회에 대한 회의와 불신감은 서서히 쌓여 갔고 영국 정부가 식민지의 통치권을 미국인들이 손에서 빼앗아 왕의 하명 아래서 영국 의회의 다수 표결로 결정되는 것에 강하게 반발하면서 혁명의 불씨는 싹트기 시작 했다.

미 대륙에서 벌어졌던 독립 전쟁을 이해 하기 위해서는 대륙군이 승리를 거둔 전투의 전개와 결과 보다 영국의 휘그와 토리 보수파 사이에서 발생했던 분열 상황 부터 살펴 봐야 한다.


영국 측은 미국의 반란이 단순히 "끊임 없이 이어지는 봉기'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대규모 농장을 운영하며 노예들의 노동을 통해 부를 축적한 남부 지주와 거부 그리고 정치인들만 포섭 하면 미 대륙의 13개 식민지 주는 단숨에 정복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워낙 방대한 지형과 드넓은 자연 환경의 미 남부 지역은 휘그와 토리 보수파 정치인들이 선발한 국왕파 민병대들의 아둔하면서 느슨한 행동과 전략으로 인해 전투 현장에서 영국군의 고통은 깊어져 만 갔다.

첩보 파발마를 내보내도 단 한번도 목적지에 도착 한 적도 없었고 영국 측 지휘관에게 직접 보고 된 적도 없었다.

오합지졸의 남부 대륙군 민병대들은 살기 위해서 군에서 이탈 해서 먹을 것을 찾아 곳곳을 누비다가 영국 측에서 보낸 첩자들을 습격하거나 포로로 잡아 버렸다.

소소한 전투에서 영국군이 승리를 해도 승전보가 국왕까지 도달 하기 전에 미대륙 민병대들의 차단으로 미 대륙에서 발생하고 있는 독립 전쟁 전선 소식을 영국 땅에서는 듣기 힘들었다.

영국 귀족들과 의원들은 미 대륙군을 만만치 않은 적이 아닌 그저 악의적인 반란자들이라고만 치부 했다.

전선이 넓게 퍼질 수록 전쟁은 지루 할 정도로 지연 되었고 지연 될 수록 미 대륙군은 오합 지졸에서 질서 정연하게 훈련받는 병사들로 거듭나게 된다.

남부 지주들과 정치인들은 영국 국왕에게 충성을 맹세를 했지만 막상 전쟁의 광풍에 휩싸이자 어떤 정보나 협조를 하지 않았다.

참담한 전투 양상에 빠진 영국에 맞선 미 대륙군은 강을 중심으로 주요 핵심 지역 으로 전선을 넓혀 나가면서 도망치는 전략을 선택했다.

미 대륙군은 맞서 싸우기 보다 치고 빠지는 방어전으로 영국군이 쫓다가 쫓기는 순간에 습격 해 버렸다.


1779년 미국의 본험 리처드호가 영국의 세라피스호에 맞서서 승리하던 순간에도 영국은 그저 기상 조건 때문에 미국이 운이 좋았던 것 뿐이라고 생각 했다.

영국은 단 세 척의 군함으로 미국을 전멸 시킬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미국은 공격을 당하기 전 역공으로 영국의 모든 공격을 용감하게 받아냈다.


1781년 1월 18일 카우펜스 전투에서 모건 장군이 지휘하는 아메리카 군은 영국 군의 퇴로를 막는 배수진을 치고 끈질기게 영국 군이 몰려 오기를 기다렸다.

기마병에게 유리 하지 않은 지형이였지만 이를 역으로 이용한 모건 장군은 총과 검으로 무장한 15명의 기병의 진군을 시작으로 진지에서 45미터 떨어져 있었던 영국 군의 공격을 무너뜨렸다.

공격 대열이 허물어지는 순간 뒤이은 병사들은 엄청난 공포를 느끼며 흩어지기 시작했다.

대륙군의 보병대들에 의해 전멸 당한 후 소규모 포대 병사들이 뒤이어 몰려오는 다른 진영의 영국군 부대를 향해 포를 날렸다.

17용기병 연대 파견된 영국군은 왕립 포병대와 국왕파 민병대 까지 합쳐서 총 1100명으로 이 전투에서 40여명만 살아 남았고 전멸 직전 영국 군은 목숨을 구걸했다.

미 대륙군은 소규모 부대로 미 대륙 13개주 주요 요충지로 넓게 퍼져서 수로와 해안을 차단 해서 전장의 주도권을 확보해 나갔다.

지리멸렬 하게 이어졌던 유토 스프링스 전투에서 대륙군에게 반격을 가했지만 메릴랜드 정규군 대대의 퇴로를 열어주는 실수를 하며 싸움터는 지켰지만 캐롤라이나와 조지아를 잃고 버지니아로 밀려 난다.


도망치는 영국군을 포위하기 위해 흩어졌던 대륙군 2200명은 버지니아 주요 진지에서 적들이 오기만 기다렸다.

대량의 사상자를 낸 영국군 만큼 미 대륙군들의 사상자들도 높았던 독립전쟁은 1779년에서 1780년으로 넘어가는 시기에 엄청난 사상자들이 발생했다.


자신들의 할아버지, 아버지, 아들들이 전장에서 목숨을 잃거나 부상을 당하고 영국군에 의해 모든 재산이 순식간에 잿더미가 되자 미국인들은 어떤 고통과 굶주림이 닥쳐 와도 반드시 영국에게 이 땅을 빼앗기지 않겠다는 애국심으로 똘똘 뭉쳤다.

이들은 서로의 의복을 만들어 주었고 음식을 나눠 먹으며 습격해 오는 영국군을 향해 총을 들었다.

4년 동안 이어졌던 독립 전쟁 동안 정규 대륙군과 민병대들은 이 전쟁이 추구하는 목적을 자신들의 일이자 우리 모두의 미래, 운명으로 받아 들였다.


총 사령관이였던 조지 워싱턴은 전장에서 현란한 연설이나 말 보다 편지를 통해 지휘관들과 병사들의 마음을 위로 하고 추스려 주었다.

'당신들의 영광스러운 대의 덕분에 독립 전쟁이 자유민 대 용병의 싸움이 되었다.'는 점을 줄곧 상기 시켰다.

이들은 자유를 위한 용기, 명예 그리고 용맹하게 싸워 승리를 쟁취 할 때 비로소 아메리카인들에게 평화가 찾아 오리라 믿었다.


아메리카인들의 평화 속에 끼지 못했던 흑인 노예들 중 대다수는 군복무를 통해 자유를 얻어 냈다.

다수의 백인들로 구성된 군부대에서는 노예 입대를 반대 했고 군측은 노예들의 주인에게 자유에 대한 비용을 치뤄야 했다.

하지만 남부 주는 북부 주 처럼 노예들이 군에 입대 하는 걸 허용하지 않았다.

전쟁이 끝나고 복무를 마치면 자신들에게 총을 겨누는 것이 두려웠지만 결국 길어진 전쟁으로 인해 아프리카에서 대규모로 노예들을 수입하는 것을 폐지 하는데 동의 한다.

독립전쟁으로도 사라지지 않았던 노예 제도는 결국 연방 의회의 제헌 회의를 통해 차츰 노예제 금지 지역을 넓혀 나가지만 완전한 폐지 흑인 노예 해방은 1863년 1월 1일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이 선언 할 때까지 남부에 지속된다.

독립 전쟁 앞에서 분열보다 통합을 외쳤던 미 대륙 땅의 원래 주인 이였던 인디언들은 영국과 식민지 사이의 전쟁에 합류할 생각이 없었다.

대다수 인디언들은 영국을 지지 했지만 영국을 위해 싸워주지 않았다.

전쟁이 발발 하던 시기에 자신들이 살고 있는 서쪽 경계를 따라 배치된 영국군이 소수에 불과 했기 때문에 독립 혁명이나 전쟁에 수수 방관 했다.

오랜 세월 영국과 프랑스, 스페인과 거래를 통해 영역을 지켰던 인디언들은 때로는 강대국을 피하거나 때로는 부딪치고 있는 강 대국 중 어느 한쪽을 끌어들여 다른 나라로 부터 정치적 피난처를 받아내는 협상 전략을 취했다.

영악했던 영국은 인디언들의 이런 전략을 꿰뚫고 겉으로는 보호자 역할을 하는 척 했다.

1763년 영국은 백인 거주자들이 애팔래치아 산맥 서쪽을 넘지 못하게 해서 인디언들에게 안전을 보장 해 주었지만 실제로는 모피 무역 항로를 위한 것이였다.

13개 주에서 영국군을 몰아낸 미국은 체로키족의 땅을 잠식하며 서서히 압박했고 소규모 인디언 집단들의 분열과 반란을 부추 키는 방식으로 이들의 땅과 재산을 빼앗았다.

부족이 해체 되고 집과 땅 모두를 잃어 버린 인디언들은 무기를 들고 13개주 곳곳에 출몰해서 미국은 이들을 완전히 통제 하지 못했다.

1780년 5월 찰스턴에서 미 대륙군에 크게 패배한 영국군은 아메리카인을 도운 인디언들을 잔인하게 공격해서 사살 했다.

1782년 11월 30일 파리에서 미 합중국과 영국 간의 평화 조약이 체결 되는 순간에도 미 대륙의 인디언들이 소유한 땅의 소유권은 조약문에 명시 되지 않았다.


조약의 1항은 이런 문장으로 시작한다.


'영국 국왕은 상술 한 바와 같이 미합중국이.....주권을 가진 독립국임을 인정한다.'


뒤이은 조항에서 미합중국의 북쪽 국경은 오늘날의 미국의 국경에 가까운 경계로 정해졌고 남쪽 국경은 위도 31도 서쪽은 미시시피 강으로 정해진다.

미합중국(United nations)로 명칭 된 미 대륙은 뉴펀들랜드와 세인트 로렌스에서 기존 어업권은 물론 노바스코샤, 마들렌느 섬, 래브라도 등지에서 무인 항만, 항구 지류에서 물고기를 건조 하고 가공할 자유를 얻는다.

영국과 미 합중국의 채권자들은 영국 화폐 가치에 맞게 전쟁 이전에 계약 된 채권을 전액 회수하는데 아무런 법적 장애를 받지 않는 대신 대륙 회의에서 몰수한 영국인 재산을 돌려주라고 권고 한다.

평화 조약을 통해 미합중국과 영국은 어떤 사람의 재산을 몰수 하거나 고발 하는 일을 더이상 못하게 금지 했다.

영국은 이제 각자의 사정에 맞춰서 미국 땅에서 철수 해야 했고 이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로 미 합중국은 미시시피 강을 영국측도 자유롭게 지나 다닐 수 있게 허용한다.

1783년 미 합중국은 자신들의 땅을 노리고 있는 프랑스와 스페인들도 모든 군사 작전을 중단 하라는 강화 협정에 동의 하게 만든다.

스페인은 여전히 영국과 지브롤터에서 전쟁 중이였기에 미 합중국의 적극 협력과 무역 개방 만이 자신들이 살 길이라 여기고 협력한다.


1783년 9월 3일 최종 평화 조약 항목에 양쪽 국가의 수뇌부들이 동의 서명을 하는 순간 영국군은 미 대륙에 잔류 하고 있던 파견 부대원들을 철수 시켰고 미 13개 주 전역은 독립을 축하하는 축하연을 열며 승리의 깃발을 세운다.

13개 주 식민지인을 상대로 패배한 영국은 전쟁 이전에는 겪어보지 못한 문제에 직면한다.

4년동안 이어졌던 미 대륙 전쟁에서 아메리카인들이 하나로 단결해서 짧은 시간 안에 중앙정부와 군대를 조직해서 자신들에게 맞설 것이라고 생각한 이들은 영국인들은 별로 없었다.

영국은 기존의 식민지 전쟁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 생각 하며 제대로 된 작전 수행이나 군사적인 계획을 세우지 않은 채 싸움터로 향했다.

반면 전쟁이란 개념 조차 몰랐던 아메리카인들은 바다 건너 왕을 위한 전쟁이 아닌 자신들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는 전쟁, 진정한 자유를 위해 싸웠다.

국왕에 복속 되어 충성하는 영국 엘리트 장교들과 돈을 받고 파병한 원정군들과 달리 미 대륙군들은 정규 군을 포함해 자원한 민병대들도 돈을 받고 싸우지 않았다.



총 사령관 조지 워싱턴은 자신 부터 연공 서열이나 특권 의식을 내세우지 않고 삶에서 소중하고 가치 있는 모든 것을 지켜내는 것이 전쟁의 목표로 나라를 지키는 일에서는 어느 자리든 명예로운 것이라고 강조 했다.

그의 겸손과 위엄 그리고 모범적인 행동으로 아메리카인들은 국왕을 위해서가 아닌 자신들의 권리와 자유를 지키는 명예로운 전쟁,대의를 위한 싸움으로 임했다.

막강한 군사력을 앞 세운 영국에 대항해서 수비 위주로 지키는 전쟁을 목표로 한 총 사령관 조지 워싱턴은 민간인들과 병사들에게 희망을 지속 시킬 수 있는 구체적인 행동을 유도 했다.

뛰어난 판단력을 갖추고 무모할 정도로 용기를 발휘 해서 과감한 행동으로 전투에 맞설 수 있는 지휘관들을 발탁해서 매 진지 마다 훌륭한 기량으로 도망치는 전략을 택했다.

미 대륙군의 강철 같은 모습과 헌신에 감동 받은 아메리카 인들은 영국군에게 협력하지 않고 치열하게 저항했다.


'무엇이 우리를 하나의 국민으로 결합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은 1760년 전까지 미국 땅에 거주 하고 있는 이들에게 어떤 대답도 얻지 못했다.


대영제국의 언어와 혈연으로 이어진 미국 땅에 거주민들에게 서로 간에 주고 받는 이익은 상호적이지 않았고 영국인들의 가치나 국왕의 명은 어떤 식으로 든 공유 되거나 존경 받지 않았다.

이런 이들이 자신들의 자유를 침해 하고 재산을 파손하고 목숨을 빼앗아 간다는 것에 저항하면서 공화주의적 자유를 수호 하기 위해 하나로 뭉쳤다.

총 지휘관이였던 조지 워싱턴은 강철 같은 결연 한 의지에 제대로 부응하지 못한 채 여러 전투에서 패배 하기도 했지만 결코 전쟁에서 지지 않겠다는 결의로 무장했고 아메리카인들은 워싱턴을 비롯해 군부대를 지지 하고 응원했다.

미 대륙군이 치열한 전투에서 항복하고 평화를 구걸 했다면 미국은 무너졌을 것이다.

영국군은 철수 했고 전쟁은 끝났지만 군사권과 영토권,재정권을 두고 전후의 조정 작업은 지리멸렬하게 이어지고 있었다.

대륙회의는 대륙군의 직접 통제권을 갖고 통일된 군사권을 확보 했지만 13개 주에서 통화 가치를 유지 하고 안정된 재정 정책을 확립해 나가는데 어려움을 겪게 된다.

전쟁으로 인한 막대한 부채를 해결 하기 위해 대륙 회의는 통화 조정과 관세부과등의 조치를 시도 하지만 각주에서 반발을 하고 혁명을 주도 했던 주요 인사들이 새로운 합의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1783년 3월 15일 조지 워싱턴은 뉴버그 연설에서 군장교들에게 정부에 어떤 적대적인 군사 행동을 하지 말라고 호소한다.

전쟁중에 월급을 받지 못했던 장교들이 쿠테타를 모의 했고 이들과 함께 대륙 회의의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세력들을 알아차린 워싱턴은 장교들을 직접 만나 설득한다.

1783년 12월23일 대륙회의에 나간 총사령관 조지 워싱턴은 대륙군의 지휘권을 조건 없이 반납하며 사령관직을 사직 한다.

조지 워싱턴은 미 합중국에서 가장 큰 권력을 가진 기관은 민중의 의견을 대변하는 의회로 군대는 의회에 종속 되어야 미 합중국이라는 새로운 나라의 정체성이 안정적으로 확립 된다고 생각했다.

엄청난 참사와 격변 속에서 미 대륙회의를 존중 하면서 매 전투마다 지혜와 불굴의 정신으로 병사들을 다독이며 4년 동안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조지 워싱턴에 의해 쿠테타 모의는 흐지부지 되어 버렸지만 미합중국은 막대한 재정적 문제를 안고 있었다.

국가 부채와 부족한 세입으로 국고는 텅텅 비어 있었고 군대에 지급할 봉급과 공채 모집소 증권과 외국채의 원금과 이자까지 지불할 비용으로 가득 쌓여 있었다.

전쟁 후 변제 되지 않은 부채의 규모를 산출 하기 불가능한 수준에 올라섰고 영토 구역을 재 정립하는데도 어려움을 겪게 된다.

미 합중국의 대륙회의가 공공 재정을 확립하고 통제 하려면 각 주마다 관세를 부과 할 수 있어야 했다.

1786년까지 9개주가 이에 합의 했지만 나머지 주들은 혹독한 조건을 내세우며 사실상 관세를 거부 했다.


이렇게 혼돈의 재정 상태 시기에 혜성 같이 모습을 드러낸 '로버트 모리스'(1720-1788)으로 전쟁 중 3년 동안 훌륭하게 법안을 처리하고는 홀연히 대륙회의를 떠났다.

필라델피아에서 거대한 사업을 운영하며 뛰어난 행정 재무 기량을 발휘한 로버트 모리스를 대륙회의는 재무 장관으로 선택하고 재정관리 업무와 관련된 모든 일을 맡겨 버린다.

1781년 부터 1784년 11월까지 모리스 재무 장관은 미 합중국의 재정 상대를 크게 확대 시키기 위해 때로는 세심하게 때로는 무모하게 추친 해 나갔다.

모든 주가 관세를 승인하도록 주요 핵심 의원들과 육군 장교들을 조종해서 각주의 대표들을 제압하고 위합 할 수 있는 조직을 만들고 대륙회의로 하여금 부채 중 일부를 주 정부가 부담하게 만드는데 성공한다.

모리스 재무 장관은 올바른 재정 정책을 수립하는데 대부분 성공했지만 정치적 압박과 싸움에서는 일부 패배 했다.

그는 군대에 물자를 보급 하기 위해 입찰 계약 체계를 세우며 연방 재정을 합리적으로 운영 했지만 이를 뒷 받침 해줄 대륙회의는 무기력했다.

1784년 11월 사임 할 때 까지 모리스 재무장관은 강력한 중앙 정부를 만드는데 실패했고 1785년 3월 버지니아가 포토맥 강 특권을 얻는 대가로 메릴랜드가 체서피크 만에서 특권을 받아 들인것을 계기로 1786년 1월 주정 부 회의애서 '통상 규제에 관한 단일 체계의 통합성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고 각 주에 회합 초청 연락을 주고 받는다.

1786년 9월 11일 뉴욕, 뉴저지, 펜실베니아, 델라웨어, 버지니아 주 대표단은 만나 통상 규제에 대해 대략 합의로 보고 1787년 5월 5개 주 만 모인 주 정부 회의 에서 연방에 불어 닥친 긴급 사태에 맞는 연방 정부 구조를 만드는데 필요한 대책을 고안한다.

메사추세츠주에서 가혹한 재정 정책에 대한 봉기를 들고 일어 난 참전 용사들이 반란을 일으키며 주 의회가 시도 하려는 신용 제도와 조세 구조 개혁에 반대를 한다.

농부들은 이들 세력에 규합해서 지불 능력을 넘어서는 부채와 세금 때문에 재산을 압수 당하지 않기 위해 무장 봉기에 나선다.

여러 달에 걸쳐 반란을 진압 했지만 여론은 봉기를 일으킨 이들을 지지하면서 대륙 회의는 큰 혼란에 빠진다.


1787년 2월 21일에 열린 대륙 회의의 헌법 제정 회의 소집에서 변화를 요청하는 시대적 흐름에 맞춰 1787년 5월 필라델피아에서 헌법 비준이 논의 된다.

1760년대 미 대륙 땅의 엘리트 계층은 대영제국을 상대로 투쟁을 시작하자 아메리카 인들은 순순히 이에 따랐다.

20년 후 피를 흘려서 대영제국으로 부터 독립을 쟁취한 엘리트 계층은 평화 조약 체결에 이어서 헌법 제정을 앞두고 있는 시기에 어떤 방향으로 나라를 이끌고 가야 할지 우왕좌왕 하고 있었다.

독립 전쟁이 시작된 1765년과 제헌 회의가 처음 열렸던 1787년 사이에 미 대륙 땅의 모든 것이 변해 있었다.

1760년대에는 전세계에서 흘러 들어온 다양한 민족들이 미국 땅에 정착 하던 시기로 하나의 국민으로 묶여지지도 않았고 종교적 문화적으로 어떤 공통점도 없었다.

1780년대에는 대영제국을 상대로 싸우면서 서서히 하나의 공동체로 뭉치면서 각 주 마다 자체적으로 연방 정부를 구성해서 영국에 대항하는 힘을 키웠고 승리했다.

전쟁에서 승리한 아메리카 인들은 자신들은 신의 섭리에 맞춰 영광스러운 대의를 하도록 선택된 사람들이라고 믿으며 국가에 대한 자부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혁명과 전쟁이 모든 걸 지배했던 1770년대와 1780년대를 지나 독립을 성취하고 평화가 성립된 시대가 도래 하자 미 대륙땅의 아메리카인들은 전쟁으로 인해 야기된 모든 문제들을 직면해야 했다.

일반 시민들이 전쟁에 적극 참전하고 지휘 하면서 국가와 자신을 위해 살아남을 방법을 모색하게 되었다.

1774년에 구성된 대륙회의 위원들이 전쟁 기간 동안 각 주의 지도 조직 수내부가 군대를 창설하고 해외로 대사를 보내 프랑스와 동맹을 맺는 작업을 통해 국가의 기틀을 다져나갔다.

이런 과정 속에서 통화를 발행하고 자금을 빌려서 각주로 부터 각종 세금과 과세를 징수했지만 통상까지 규제 하지 못했다.

대륙회의는 더 많은 권력과 권한을 갖고 싶었고 주 내부 통치자들은 각주의 시민들이 이들의 권력 남용을 직접 제한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맞붙었다.

1776년 전쟁 당시 대륙 회의는 군대 병사를 모집하고 훈련하고 양성하기 위해 각 주마다 땅을 임대 보상으로 지급 하라는 지시를 내리자 자원과 부의 규모가 큰 메릴랜드 주 부터 자체 주 정부가 헌법을 제정 하면서 강하게 반발한다.

메릴랜드 주의 헌법은 주 정부의 틀을 세워서 권리 장전에 따라 시민을 보호 할 것임을 분명하게 밝혔고 나머지 주들도 자신들의 인권과 재산을 보호 하기 위해 자체 헌법을 제정하게 된다.

주 정부들의 이런 움직임에 놀란 대륙 회의는 벤저민 프랭클린과 사일러스 딘이 앞장서서 16개월 동안의 토론 끝에 1777년 7월 연합 규약을 채택하고 11월 17일 최종 승인한다.



연합 규약 제2조는 주들을 통제 하는 권력을 얻고자 하는 대륙회의의 희망을 무너뜨렸다.


'각 주는 고유의 주권, 자유, 독립, 모든 권력, 사법권을 유지 한다. 이 헌장으로 명확하게 언급하지 않은 권리는 대륙회의의 의원들로 구성된 미합중국에 위임한다.'

이 조항으로 대륙회의는 외교의 권한은 지키며 오로지 그 권한에 의해서 만 전쟁을 수행 할 수 있었고 대륙회의 보다 우월한 지위를 갖은 13개주는 연합 규약을 통과 시켜서 대륙회의를 각 주의 의견을 정취하고 조합하는 연합 회의로 재 탄생 시킨다.

전쟁이 종결 되자 연합 규약 조항에 치명적 결함이 드러나기 시작하지만 시간이 흐를 수록 개정작업은 전혀 진전을 보이지 않았다.

미대륙 13개주의 지역주의는 전쟁 중에 연합 규약을 약화 시켰고 평화조약이 체결된 이후에는 연합 규약 조항에 기반해 통치 하려는 연합회의의 노력을 마비 시켜 버렸다.

영국과 치열한 전쟁을 치른 아메리카인들은 무제한 적인 권력은 언제든지 국민의 자유를 침해 하고 파괴 해버린다는 것을 깨닫게 만들었다.

전쟁 후 모든 것이 변해 버린 미국 땅의 주인들은 강력한 군주제로 세계 패권을 쥐고 있는 국가들에게 두 번 다시 자유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쪼개진 미 합중국의 주권을 보호 하는 방안을 모색한다.


1787년 5월 25일 필라델피아에서 헌법 제정회의가 열린다.

이 회의는 이미 10년 전에 합의 됐던 연합 규약을 개정할 목적으로 마련 되었지만 많은 이들이 새로운 형태의 연방 정부가 필요하다는 데 동의 하면서 본격적으로 헌법 제정을 논의 하게 된다.

이미 국가의 커다란 청사진을 준비해온 버지니아 주 대표단의 주도로 헌법 제정 작업이 시작 되었지만 규모가 큰 주와 작은 주, 동부와 남부 주 사이의 이해관계가 엇갈리면서 난항을 겪으며 합의에 이르는 과정이 순탄하게 흘러가지 않았다.

1787년 9월 17일 이 회의에 참석한 55명의 대표자들은 치열한 토론을 거쳐서 미국의 뼈대를 이루는 헌법 조항을 만들고 39명이 헌법에 서명하자 이에 완전히 동의 하지 않은 이들도 서명을 하며 서로의 희망을 공유 했다.

9개월에 걸친 헌법 제정 조항에는 1776년 민주주의의 영향을 받은 독립 혁명의 대 원칙에 기반해 권력을 제한 함으로써 사회와 도덕의 부패를 막아 다수의 폭정 대항을 방지 하기 위함이였다.

헌법 비준을 두고서 연방정부의 강한 권한이 공화국에 필요하다고 본 연방주의자들과 그것이 주와 개인의 권리를 해친다고 본 반 연방주의자들이 서로 대립했지만 결국 각 주에서 연방주의자들이 승리 하면서 헌법이 비준됐다.



1789년 6월말 버지나아주가 가장 먼저 비준을 마치자 한 달 뒤 뉴욕도 비준을 승인한다. 노스캐롤라이나주는 11월 까지 연방 가입을 보류 하며 헌법 제정 비준 합의를 미루고 로드 아일랜드 주는 다음 해 까지 가입을 보류한다.


1789년 4월 30일 뉴욕 패더럴 홀에서 조지 워싱턴이 미 합중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한다.

혁명 이전에 수면 위로 드러 나지 않았던 것들이 혁명과 전쟁으로 인해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사건들이 출몰한다.

대영제국은 미 대륙 땅에서 독립 혁명이 발발 하리라 어느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고 1775년에서 시작된 렉싱턴 전쟁의 불꽃은 쉽게 꺼질 것이라 생각 했다.

하지만 미국인들은 독립을 선언하며 혁명의 불을 붙여 버렸고 독립을 향한 열망이 활활 타오르면서 10년동안 극렬 하게 저항하며 싸웠다.

영국은 미국인들과 싸우면서 언젠가 이들이 항복하고 대영제국 깃발을 높이 들어 올릴 것이라 생각했지만 미국은 침범 당한 자유를 되찾기 위해 기꺼이 피를 흘리며 독립을 쟁취 해 버렸다.

독립 전쟁에 참여한 사람들 대부분은 처음 부터 미 대륙의 땅이 앞으로 누구의 손에 들어 갈지 전혀 관심 조차 없었지만 전쟁이 지속 될 수록 자신들의 재산이 사라지고 가족들이 목숨을 잃게 되자 진정한 자유의 의미를 깨닫게 된다.

혁명은 미국인들에게 자신의 방식대로 살 수 있는 기회를 주었고 이들은 조국이 지켜야 할 원칙과 나아가야 할 방향을 찾아 나갔다.

혁명과 전쟁의 파고를 지나서 미국인들 스스로 법과 정치 질서와 사상을 수립해나갔고 헌법 제정과 미 합중국을 탄생 시키며 민주주의를 향한 대의의 불씨를 지폈다.

이제 국민이 합의해서 탄생한 미 합중국은 자신들이 제정한 헌법에 표기 된 '자유'가 미국 땅의 모든 인종에게 적용 되는지 살펴 봐야 했다.


'모든 인간은 이 땅에서 평등 하게 태어났다.' 는 조항 속에 흑인 노예들에 자유를 생각한 백인들은 없었다,

권력 계층들은 노예제도 하나 때문에 연방 합의와 비준이 깨져 버리는 게 더 큰 걸림돌이라고 생각하고 연방 수립과 합의의 가치를 우선으로 내세웠다.

대다수의 백인들에게 독립 혁명의 대의는 노예 해방보다 더 중요한 가치 였다.


1863년 1월 1일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의 노예 해방 선언을 공표 할 때까지 미국 땅의 흑인 노예들에게 '자유'는 찾아 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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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2-03-07 02:30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영국은 미국이 쉽게 손을 들리라 생각하다니... 사람은 자유롭게 살아야죠 거기에 흑인이 들어가지 않은 건 아쉽기도 합니다 그래도 전쟁에 나간 사람은 자유로워지기도 했군요 흑인이 전쟁에 나가지 못하게 하려는 사람이 많았을 것 같은 느낌도 듭니다 영국과 싸운 뒤 미국이라는 나라를 좋게 하려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군요 땅이 넓고 여러 나라에서 온 사람이어서 마음을 하나로 모으기는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링컨이 나타나기까지 시간이 더 걸려야 한다니...

scott 님 좋은 소식보다 안 좋은 소식이 많지만 새로운 주말 즐겁게 시작하세요


희선

scott 2022-03-07 23:26   좋아요 3 | URL
이 시기에 흑인은 미대륙땅에서 지주들의 재산 목록 중 하나일뿐이였습니다.
인권이라는 단어 속에 흑인과 인디언은 쉽사리 언급했다가 서로 이해관계가 다른 주들이 반대표를 던질지 몰라 100년 후에야 노예 해방을 선언 하게 되죠

희선님 말씀처럼 광활한 땅에 다양한 인종들 하나로 뭉치기 힘든!
링컨의 등장으로 그나마 노예는 해방 되어도

여전히 많은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우울한 일만 가득한 3월!

희선님 한 주 시작 건강하게 ^ㅅ^

미미 2022-03-07 08:17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스콧님 벌써 3권 읽으셨군요!
흑인들에게 총을 쥐어주는것이
그들을 핍박한 만큼이나 두려웠을것 같아요. 링컨이 해방을 시켰음에도 아직까지 완전히 사라지지않은 인종차별을 보면 뿌리깊은 혐오와 갈등이 참 무섭습니다. 끝없는 성찰과 교육이 필요한듯 합니다.
에너지 가득한 월요일 되시길 바래요!🙋‍♀️🍓

scott 2022-03-07 23:30   좋아요 2 | URL
3권! 넘 잼 ㅎ나서
밑 줄! 태그 붙였습니다!(원래 책 흔적을 남기지 않고 읽음, 이 책은 예외)

미 대륙의 뿌리 깊은 인종 차별이 수세기 전 부터 시작 되어서

트럼프 같은 괴물을 우두머리로 올려 놓은 거 같아 이것이 진짜 이들의 속마음인것 같다는 생각이,,,

3권 완독 하고 나니 링컨 등장이 넘 ㅎ 기다려집니다 ㅎㅎㅎ

미미님도 이 책 완독을 향해 🏃‍♂️🏃‍♀️🏃‍♂️🏃‍♀️🏃‍♂️🏃‍♀️

새파랑 2022-03-07 08:43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스콧님의 엄청난 리뷰를 보니 책을 안 읽어도 읽은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미국 역사는 언제나 대단한거 같아요. 저런 어려움속에서 독립도 하고 강대국으로 우뚝선~!! 링컨도 곧 등판하는군요~!!

scott 2022-03-07 23:31   좋아요 3 | URL
새파랑님 읽고 쓰실 리뷰가 200!ㅎㅎㅎ

링컨 등판 저도 기대 합니다

영화 전기 등으로 줄창 읽었지만
미들코프 교수가 링컨을 어떻게 평가 했는지 넘 ㅎ 궁금!ㅎㅎ

페넬로페 2022-03-07 09:20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미국 독립전쟁의 스토리가 정말 흥미진진하네요. 독립전쟁으로 결국 흑인 노예해방의 교두보가 마련된 것이고요. 미국이란 나라가 워낙 땅이 넓으니 영국이 통제하기도 어려웠을 것 같아요. 힘든 순간에 훌륭한 지도자의 역할이 그만큼 중요해 보입니다.
미국인 이야기 완독하신scott님, 역시 대단하십니다^^

scott 2022-03-07 23:35   좋아요 4 | URL
페넬로페님 말씀이 맞습니다
독립전쟁으로 인해 지주로 부터 몸값 지불하고 군대에 입대 하게 되었지만 남부 지역에서는 이마저도 쉽지 않았습니다
도망가는 노예들 신체부위 잘라 버리는것 링컨의 노예 해방이후로도 자행 됨 ㅠ.ㅠ

미국이라는 나라(건국 초기)에 현명한 지도자들이 몇명 있었습니다
물론 정치적 이익 계산과 공동체 이익을 앞세운 지극히 현실 주의 자들이였지만..
지리적 지정학적으로 최고의 행운을 가진 땅!ㅎㅎ

이 책 3권이지만 잼 ㅎ나서 완독 하는게 아쉬운 ^ㅅ^

mini74 2022-03-07 09:4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미국인들이 느꼈을 자부심, 총에 대한 사랑을 알 것 같아요 스콧님. ~ 진짜 이 두꺼운 책 완독이라니 ! ㅎㅎ 시험기간에 요약이랑 요점정리 잘 한 친구꺼 읽는 기분입니다 ~~ 매점에서 빵이라도 사드려야 되는데 ~ 스콧님 편안한 월요일 보내세요 👍❤️

scott 2022-03-07 23:37   좋아요 3 | URL
그쵸!

총없이는 못 살아갈 민족 같습니다.

이 책 두껍지만 활자가 읽기 편한 크기에 종이질도 쵝오!
도판 지도가 넘 훌륭해서
교과서 였다면
최우등생 될 자신이 ㅎㅎㅎ

미니님 건강 잘 챙기세요
주변 곳곳에 확진자들이 와르륵 ㅠ.ㅠ

그레이스 2022-03-07 09:4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짧은 역사에 대한 컴플렉스때문에 영웅주의가 더 부각되는 나라^^라고 생각해요
scott님 페이퍼 읽다가 오전 시간을 다 보내겠습니다.
👍👍👍

scott 2022-03-07 23:38   좋아요 3 | URL
슈퍼맨을 창조한 국가 ㅋㅋㅋ

그레이스님 건강 많이 나아지셨나요?

여러모로 힘든 상황이 가중 되는 3월인 것 같습니다.

서니데이 2022-03-07 21:32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페이퍼가 상당히 긴 편인데, 이 책이 페이지가 많은 책인가봐요.
잘읽었습니다. scott님, 좋은 하루 보내세요.^^

scott 2022-03-07 23:39   좋아요 3 | URL
3번째가 넘 ㅎ 재밌어서
쓰다보니 이정도 길이가 ㅎㅎㅎ

서니데이님 건강하게 한 주 보내세요 ^ㅅ^
 
폭격기의 달이 뜨면 - 1940 런던 공습, 전격하는 히틀러와 처칠의 도전
에릭 라슨 지음, 이경남 옮김 / 생각의힘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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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유럽의 주요 국가들은 독일이 비무장지대인 라인란트에 군대를 앞세우고 들어가 2년 만에 오스트리아의 주요 도시와 체코 수데텐란트를 차례 차례 점령해 나갈 때도 프랑스를 비롯해 영국 조차 '독일은 더 이상 다른 국가의 영토를 침범 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히틀러의 발언을 굳게 믿고 있었다.


1938년 9월 30일,영국, 프랑스, 나치 독일, 이탈리아 4개국은 뮌헨에서 체코슬로바키아의 영토 중 독일인의 인구가 많은 수데텐란트를 나치 독일에게 양도한다는 협정을 체결한다.


1939년 3월 히틀러는 체코 전역을 집어 삼켜 버리며 뮌헨 협정문을 휴지 조각으로 만들어 버렸다.

1939년 5월 10일 금요일, 히틀러는 유럽 저지대 국가들(벨기에,네덜란드,룩셈부르크)을 상대로 전격전에 돌입한다.

독일 나치 정부에게 약간의 양보로 평화를 얻었다고 자부했던 영국 총리 체임벌린은 영국 땅까지 나치 군이 진격 하지 않으리 라는 희망을 가졌다.


'​친애하는 여러분, 역사상 두 번째로 영국 총리가 독일에서 명예로운 평화를 들고 돌아왔습니다. 나는 이것이 우리 시대를 위한 평화라고 믿습니다. 진심으로 감사 드립니다. 집에 돌아가서셔 평안히 주무십시오.'

히틀러의 속셈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한 체임벌린을 향해 의원들 중 상당수가 타고난 달변가이자 웅변가인 정치계의 '포악한 코끼리' 처칠을 체임벌린 후임자로 뛰우기 시작한다.

긴급 소집된 의회에서 체임벌린 총리는 전쟁 준비에 대한 어떤 대책을 세우지 못한 채 치과에 가야 한다며 서둘러 의장실을 떠난다.

이제 남은 건 국왕의 새로운 총리 임명 결정 뿐이였다.

국왕은 체임벌린에게 기회를 한 번 더 주기에는 상황이 심상치 않다고 판단하고 안정적인 성품에 핼리팩스경을 추대 하려고 한다.

하지만 뜻밖에도 체임벌린 총리는 국가를 위기에서 구해낼 인물로 '윈스턴 처칠'을 강력하게 추천한다.

갑작스런 국왕의 호출을 받은 처칠은 국왕과 껄끄러운 사이였다.

1936년 처칠은 국왕의 형 에드워드 8세의 왕위를 지키기 위해 왕실과 커다란 마찰을 빚었었다.

국왕은 체임벌린 총리의 국가 정책 마다 온갖 비판을 쏟아내는 처칠의 행보를 크게 불신하고 있었다.

'당신은 별로 하는 일도 없이 여기 너무 오래 앉아 있었습니다. 어서 물러나세요! 이제 그만 끝내시라고요! 분명히 말하는데 사라지세요.'

젊은 의원들로 부터 '낡아 빠진 우산' 으로 불렸던 71세 총리 체임벌린은 직접 처칠을 찾아가 사임 하겠다는 의사를 밝힌다.


처칠은 국왕과 함께 한 자리에서 자신을 총리로 추천한 체임벌린의 사임을 만류 하며 태연하게 의리 있는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시간을 더 이상 지체 할 수 없었던 의원들이 왕실로 몰려 가고 5월 10일 아침 독일 히틀러가 유럽 저지대를 점령 하는 순간 ,총리로 임명된 처칠은 '몹시 두렵지만 최선을 다해 모든 걸 다 바치겠다'며 뜨거운 눈물을 흘린다.


'어떤 명령을 내려야 할지 안다고 생각하는 국가적 위기의 순간에 잡은 권력은 하나의 축복이다.'


처칠은 다우닝 10번지에 도착 하는 순간 부터 '영국은 반드시 승리 할 것이다.' 라는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독일 히틀러의 침공에 맞서려면 영국 국민들, 지휘관들, 각료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D 루스벨트의 협력 없이는 불가능 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미국이 참전 하지 않고서는 절대로 이 전쟁에서 승리 할 수 없다는 것, 독일에 맞서고 버틴다 해도 히틀러의 막강한 공군 루프트바페(luftwaffe)의 병력이 영국으로 몰려 오는 걸 완전히 막을 수 있는건 오로지 미국의 산업 역량과 군비력 뿐이라고 굳게 믿었다.

1940년 5월 14일 독일 공군 루프트 바페 폭격기는 로테르담 상공 600미터 높이에서 폭탄을 떨어뜨리는 것과 동시에 독일 기갑부대는 벨기에와 프랑스 연합군을 무력화 시키며 영국 원정군을 포위 해버린다.

이날 오후 프랑스 총리는 처칠에게 전화해 약속한 RAF전투기 4대와 10개 편대를 오늘 내로 보내 달라며 사정 한다.

독일군이 유럽 저지대 지역을 차례 차례 진격 하는 순간 베를린 주둔 미국 특파원은 이미 독일 승전 선언을 반복하는 뉴스를 발송한다.

프랑스 국경 근처 아르덴 숲에 주둔 하고 있던 프랑스 군은 독일의 탱크와 장갑차 부대들이 거세게 몰려 오는 순간 이미 패했다며 도망가버린다.

영국 보다 규모가 큰 군부대와 프랑스 전역 마다 촘촘하게 설계된 전략 요새를 갖고 있었던 프랑스가 한 순간에 독일 나치군에 무너지자 처칠은 즉각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비밀 전보를 친다.


'독일은 곧 영국을 공격 할 것입니다. 우리는 프랑스 없이 혼자서 라도 독일과 전쟁을 계속 할 것입니다. 우리는 두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대통령 각하, 미국의 목소리와 힘을 너무 오랫동안 눌러두고 있으면 모든 것이 무위로 돌아 갈지 모른다는 것을 각하도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그렇게 되면 놀라우리 만치 빠른 시간에 나치에게 완전히 예속된 유럽이 자리를 잡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 중압감은 우리가 견딜 수 있는 정도 이상일 것입니다.'


처칠은 미국에게 감정적인 호소를 보냈지만 그가 미국에게 실질적으로 원했던 건 물적 지원으로 미국에서 가장 노후화 된 구축함 50척과 최신형 항공기 수백대 그리고 대공무기와 탄약을 보내 달라고 간절하게 요청했다.

미국이 군사적 지원을 해준다면 영국은 새로운 함정과 항공기를 제조 할 수 있는 시간을 벌 수 있었다.

이틀 후 루스벨트 대통령은 처칠에게 의회의 특별 승인 없이는 어떤 구축함도 항공기도 보낼 수 없다는 답신을 보낸다.


3선 출마를 앞 둔 루스벨트 대통령은 의원들과 미 국민들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다급해진 처칠은 프랑스 주요 지도자와 지휘관을 직접 만나 전시 상황을 파악하고 영국 공군기지와 주요 해군기지를 차례 차례 점검한 후 BBC라디오 방송국 마이크 앞에서 서서 대국민 연설을 한다.


'이번 전투로 프랑스의 기세가 꺾이고 나면 우리 섬을 노리는 전투가 코앞의 일로 닥칠 것입니다. 영국의 모든 것, 영국이 가진 모든 의미를 노리고 말입니다. 가장 우려했던 비상사태가 닥치는 순간 우리는 주저하지 않고 모든 조치를 취할 것입니다. 어떤 극단적인 조치도 사양하지 않고 우리는 우리 국민으로 부터 그들이 할 수 있는 마지막 한 방울, 마지막 한 치의 노력까지 끌어 낼 것입니다.'

1934년 하원 연설에서 처칠은 영국은 독일 나치 세력에게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몸집이 크고 살찐 표적으로 먹잇감을 노리는 짐승을 유인하기 위해 묶어 놓은 아주 값진 소'라고 말했다.

유럽 전역을 날아 다녔던 독일의 1만 4000대의 항공기는 히틀러의 명령만 기다리고 있었다.

1940년 5월 24일 금요일, 히틀러는 신임 하는 어떤 장군의 조언에 따라 영국 원정 군의 뒤를 쫓는 기갑 사단에게 진격을 중지 하라고 명령한다.

히틀러와 주요 군 수뇌부들은 이미 서부 전선에서 2만 칠천 명이 넘는 병사가 사망하고 11만 천 명 이상의 부상자가 발생했고 1만 팔 천 명의 군인들이 실종된 전력으로 지금 영국을 침공 하는 순간 독일은 치명적인 패배를 할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5월 26일 처칠은 프랑스 해안에서 영국 원정군을 철수 시키라는 작전 개시(다이나모 작전)를 명령하지 히틀러는 즉각 기갑부대에게 영국 원정군을 향해 진격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항구도시 덩케르크 해안에 집결한 영국 원정군은 독일군의 기세가 예상보다 더뎌졌고 해상의 악천후 까지 겹쳐 지면서 덩케르크 탈출 작전에 동원 된 선박 887척에 프랑스군 12만 5천명을 포함해 33만 8,226명이 무사히 탈출한다.(30만 명이 넘는 병사들이 목숨을 걸고 상공과 지상의 독일 협공을 뚫고 해협을 건넘)


6월 4일 철수 마지막 날 처칠은 하원 연설에서' 우리는 끝까지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프랑스에서 싸울 것이며, 바다와 대양에서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싸울수록 자신감을 갖게 될 것이며 공중에서 더욱 힘을 키울 것이며,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우리의 섬을 지킬 것입니다. 우린 결코 항복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외친다.


6월5일 수요일 독일은 항공기와 폭격기 몇 대와 수많은 전투기를 몰고 영국 본토 목표 지점을 밤새도록 공습 하며 영국 전역을 지독한 연기로 가득 채워버린다.


6월 12일 영국은 독일 항공기 접근을 사전에 정확하게 알려주는 레이더(체인 홈) 개발에 성공한다.

'체인 홈' 기지를 설치한 영국은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몸집이 크고 살찐 표적으로 먹잇감을 노리는 짐승을 유인하기 위해 묶어 놓은 아주 값진 소' 처럼 독일 루프트 바페가 몰려 오기를 기다렸다.

처칠은 미국을 끌어들일 사건, 참전 명분이 터지기를 고대 했다.

6월 17일 월요일 독일 나치군에 프랑스가 완전히 함락되지만 처칠은 그다지 놀라지 않고 오히려 반가워했다.

6월 18일 영국 항공기 생산부는 매주 245대 항공기를 출고 하며 엔진 생산량을 4배 6배로 급증시켜 나갔다.

6월 22일 토요일 오후 프랑스는 히틀러와 휴전 협정을 맺었다.

이제 영국 홀로 독일과 싸워야 했다.

6월 23일 조국 승리의 선봉장에 선 요제프 괴벨스는 프랑스 항복 선언을 공식화 하며 섬 하나 정복을 위해 신중하고 체계적이면서 민첩한 전력을 짜기 시작한다.



'처칠은 절대로 버티지 못할 것이다. 우리의 전쟁은 얼마 남지 않았다.'

7월 2일 화요일 베를린에서 히틀러는 육해공군 지휘관들에게 영국에 대한 전면 공격의 타당성를 검토하라는 지시를 내린다.


히틀러는 서부 전선의 마지막 장애물인 영국이 조만간 이 전쟁에서 발을 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오랫동안 꿈꿔 왔던 러시아 땅, 소련 침공에 전념 해야 했다.

노쇠한 영국은 협상 테이블에 나올 것이니 전쟁 승리를 자신 하며 영국으로 향했던 전력 중 국방군 40개 사단을 해산 시켜버린다.

이 사실을 절대로 놓칠리가 없었던 처칠은 스웨덴 왕실과 바티칸 교황청에게 넌지시 독일과 협상 할 것 처럼 행동하며 포스 H함대를 프랑스 지중해 바다 오랑으로 진격 시켰다.


영국은 프랑스 함대들이 독일 나치군의 지휘를 받아 영국 해협을 향해 달려 오는 걸 막기 위해 프랑스 함대를 향해 포격을 날린다.

영국 함대 포격 10분 만에 프랑스 함대들은 바닷속으로 가라 앉았다.

영국은 동맹국 프랑스의 함대에게만 발포 한 것이 아니라 독일을 향해 경고 한것으로 앞으로 어떤 협정도 맺지 않을 것이고 절대로 영국은 항복하지 않을 것임을 보여주었다.

이는 미국을 향한 영국의 승전에 대한 확고한 의지 였고 독일에게는 확실한 전쟁 통고였다.

소련에 막대한 전력을 보내 버린 히틀러는 진정으로 영국이 협상 테이블에 나와주기를 원했지만 노쇠하고 포악한 처칠이 그런 의사가 전혀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7월 14일 영국은 독일 폭격기가 몰려 오고 있다는 사실을 감지 했다.

이미 수주 전부터 구체적인 침공 위협에 대한 대비와 방위 대책을 세웠지만 이번 폭격은 1915년 1월 19일 밤에 기습적인 폭격을 맞았던 그 순간과 위력이 다를 것이라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방공호로 대피하는 연습을 하던 런던 시민들은 요란하게 울리는 사이렌 소리와 함께 라디오 방송에서 흘러 나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지구상 어디에도 거리에서 폭격을 막을 수는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누가 뭐라 해도 폭격기는 언제나 제 할 일을 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대피하는 명령을 절대로 흘려 듣지 마십시오 공격이 시작되면 그때는 너무 늦습니다. 굳건하게 살아 남아 버텨내야 합니다.'


런던 시민들은 공습 경보 소리에 맞춰 달의 위상을 유심히 관찰 하기 시작했다.

달빛에 의지해 목표물을 찾는 폭격기는 분명 밤에 공습 할 것이다.



런던 시민들은 7월 대낮 처럼 밝게 빛나는 달을 향해 '폭격기의 달(bomber's moon)'이라고 불렀다.

자신들의 함대를 무참하게 포격한 영국을 향해 독일과 연합해서 침공할지 프랑스가 갈팡질팡하고 있는 사이에 히틀러는 이 전쟁의 승리를 확신했다.

괴벨스가 매일 매일 처칠과 영국 국민을 향해 조롱과 위협을 뒤섞은 연설을 했고 영국은 침착하게 침공에 대비 했다.

런던 곳곳은 모래 주머니를 잔뜩 쌓아서 기관총을 설치 했고 지하철의 모든 역마다 방공호가 설치 되었다.

침공을 대비해서 시민들은 매일 어떤 위험과 경고에 대비 할지 훈련했다.

독일 폭격기들이 수많은 전투기를 이끌고 영국 항공을 날아 다녔다.


영국 시민들은 매일 전쟁의 순간을 목격 했지만 대규모 공습 경보 사이렌이 울리지 않는 날에는 일상적으로 출근했고 상점에 갔고 거리를 걸어 다녔다.

젊은이들은 밤마다 댄스 파티가 열리는 곳을 찾아 다녔고 농부들은 밭을 일구며 수확물을 거둬들였다.

온 국민이 똘똘 뭉쳐 비정상적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한 히틀러는 8월 바다 사자 작전 계획 준비를 지시한다.

독일 군 수뇌부는 히틀러에게 몇개의 낡은 함대만 보유하고 있는 영국은 별다른 저항 없이 무너질 것이라고 보고한다.

스페인 내전에서 눈부신 활약을 펼쳤던 루프트바페는 노후화 된 폭격기를 상대하기 위해 전투기를 호위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최신형 전투기를 보유했던 독일 전투기 부대는 영국 RAF조종사들이 몰고 있는 최신 허리케인과 스핏 파이어의 위력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중무장과 기동성이 뛰어난 영국의 허리케인과 스핏파이어와 달리 독일의 메서 슈미트 Me109는 높은 고도에서 뛰어난 성능을 발휘하며 방어용 장갑이 튼튼했지만 8정의 기관총을 장착한 영국의 스핏파이어와 달리 포탄을 발사하는 기관표가 2문 뿐이였다.

특히 독일의 메서 슈미트는 시속 500킬로미터까지만 속도를 낼 수 있는 단발엔진 항공기종이여서 런던까지 간신히 90분 정도만 떠있을 수 밖에 없는 치명적인 약점을 갖고 있었다.

영국의 항공기 종 역시 단발성 연료 탱크로 오로지 조종 능력이 뛰어난 조종사의 역량에 달려 있었다.

독일 전투기 조종사들의 평균 연령은 26세였고 영국 조종사들의 평균 연령은 20살이였다. 전투 경험이 많은 독일 전투기 부대는 영국 전투기를 종이장 처럼 찢을 수 있다고 생각하며 프랑스 해협 비행장에 모든 전투기를 집결 시켰다.

런던 중심부까지 150킬로를 남겨둔 독일군은 샴페인 한 병을 챙기며 승리를 자신했다.

영국 땅의 처칠은 50배 가까이 늘어난 전투기와 두 척의 신형 전함 비스마르크호와 티르피츠호에 큰 불안감을 느끼며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간절한 심경과 상황을 담은 비밀 전보를 보낸다.

처칠은 미국에게는 별것 아닌 것들이지만 지금 영국에게 가장 시급한 것들을 조목 조목 나열한다.

그는 전쟁의 운명과 세계의 운명을 바꿀 중요한 순간을 바꾸려면 서부 진입로로 들어오는 독일의 U보트 공격을 막야 한다며 구축함 60척을 요구 했다.

미국은 영국령의 뉴펀들랜드와 버뮤다 지역의 여러섬에 퍼져 있는 영국 해군기지를 미군이 사용한다는 조건을 달았다.

8월 11일 독일은 영국의 RAF에 대한 총력전의 시작을 알리는 독수리 날로 공표하고

8월13일 야간 작전 수행에 들어 갈 루프트바페는 새로운 시스템인 빔 항법 기술을 장착했지만 단 한번도 실전에 적용해보지 않아서 성공 여부를 짐작 할 수 없었다.

조종사들은 여전히 달빛이 지상을 환하게 비춰 주는 순간에 공격한다는 태세를 갖췄다.

8월 13일 화요일 200대의 폭격기가 프랑스 셰르부르 북쪽 채널에서 날라 올라 영국을 향했다.

독일군 측 괴링은 영국RAF공격이 시작되면 폭격기 949대 급강하 폭격기 336대 전투기 1002대까지 총 2300대의 공군력을 영국 땅으로 보낸다는 계획을 세워두었다.


이런 엄청난 전투력을 준비 하는데에 만 30여분을 소요 한 독일을 기다렸던 영국 조종사들은 꿀에 파리를 끌어들이듯 자신들에게 유리한 지역으로 독일 전투기들을 유인하며 느리게 천천히 활보 하다가 빠른 속도로 공중 속으로 튀어 올라가 벌침을 쏘듯 단 번에 독일 전투기들을 격추 시켜버렸다.

최신형 레이더를 능숙하게 작동 시키며 전투기를 조종했던 영국 조종사들은 독일 전투기를 격추시킬 때마다 단 한 명의 영국 국민의 생명을 살린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전투에 임하며 500대 전투기들이 이 천대가 넘는 독일 전투기들과 맞붙었다.

때마침 미군 해군은 노후화 되어 폐기 처분 하기 일보 직전의 50척 전함을 영국으로 보내며 99년 동안 임대 해 준다는 조건을 단다.

3선을 앞 둔 루스벨트는 까다로운 의회의 승인 없이 우방국 영국에게 선심 쓰듯 50척을 준다는 것에 잔뜩 화가 난 처칠은 '미국이 전함 50척을 영국으로 넘긴 것은 결정적으로 중립조치를 위반한 행위'라며 이는 독일 정부가 미국에게 전쟁을 선포할 정당한 사유가 된다고 경고 한다.

영국 전투기에 격추 당하고 80대만 살아 돌아온 독일 전투기는 이제 도버 해협을 노리며 연료가 떨어질 때까지 싸울 태세였다.

독일은 휘황찬란한 달, 보름에 뜨는 폭격기 달빛이 비춰준다면 영국 땅을 차지 할 수 있을 것이다.

괴벨스는 영국 시민들의 공포감을 조성하는 외국어 서비스 방송을 시작하고 히틀러는 여전히 런던 중심 폭격을 허락하지 않는다.

8월 24일 토요일 밤 영국 항공에서 길을 잃은 독일 폭격기 한 대가 런던 중심가에 폭탄을 떨어뜨린다.

피해는 경미 했고 인명피해도 거의 없었지만 도시 전체는 공포에 휩싸였다.

절대로 런던은 건드리지 말라고 명령했던 히틀러는 조종사의 실수로 폭탄이 떨어졌다는 사실을 몰랐고 괴링도 폭격기와 어떻게 런던까지 날아 갈 수 있었는지 어떤 보고조차 받지 못했다.

런던 공습에 격분한 처칠은 다음날 밤 폭격기 한 대를 독일 베를린으로 보낸다.

공습 피해는 경미 했고 단 한 명의 사상자도 발생 하지 않았다.

처칠은 독일군이 때로 몰려 오기를 기다리며 히틀러의 보복 공격에 대비 했다.

8월 31일 토요일 집단 패닉 상태에 빠져버린 나치군은 불같이 화내는 히틀러에게 목숨이 날아 가지 않으려면 처칠을 항복 시켜야 한다며 독일의 모든 전투기를 영국땅으로 몰고 가는 복수의 시나리오를 기획한다.

9월 2일 영국 해군 기지가 있는 뉴편들랜드와 버뮤다 기지에 도착한 미국 함대는 인디언들에게 24달러어치 물품과 술 한 병을 주고 맨해튼 섬을 받아 낸 것 처럼 낡은 구축함과 맞바꾼다.

영국 해군은 처참하게 낡고 해진 미국 구축함을 보고 망연자실 했지만 처칠은 이로 인해 미국은 영국과 독일 전쟁에 끌어 들이는데 성공했다고 확신한다.

공습의 선두에서 대형 화재를 일으키는 소이탄과 고폭탄을 혼합한 폭탄을 장착한 루프트 바페는 KGr100특수 기능을 장착하고 런던을 향했다.


9월 8일 루프트바페는 티타임에 왔다.

폭탄은 밤새도록 상공에서 비 처럼 쏟아져 내렸다.

이글거리는 불의 고리가 도시 곳곳으로 퍼져 붙어 활활 타올랐다.


이 날 밤 공습으로 400여명의 런던 시민들이 사망했고 16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중상을 입었다.

잿더미에서 살아 남은 시민들은 잔해들을 치우고 부상자들을 실어 날랐고 처칠은 불에 타버린 런던을 둘러 보며 눈물을 흘렸다.



나흘 안에 영국을 굴복 시킬 수 있다고 장담 했던 괴링은 추운 겨울이 오기 전에 전투를 끝내고 싶었다.

4주 동안 밤마다 영국 땅을 공격했지만 영국 국민들은 전혀 동요 하지 않았고 처칠은 꿈쩍 하지 않았다.

선전 장관 괴벨스는 영국의 이런 모습에 당혹하며 아무리 두둘겨 때리고 퍼부어도 영국이 왜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지 전혀 예상치 못했던 영국의 투쟁 의지에 길어지는 전쟁에 골머리를 앓았다.

독일은 영국의 침공에 대한 어떤 대비 태세도 갖추지 못했다. 베를린 시 방공호에는 다른 나라에서 밀수 한 식량으로 가득 차 있어서 시민들이 대피할 곳이 없었다.

처칠을 굴복 시키지 못한 히틀러는 기약 없이 U보트 작전을 내세운 바다 사자 작전을 봄으로 연기 했다.

히틀러는 영국이 버티게 되면 결국 미국이 전쟁에 개입 할 것이고 처칠은 소련과 손을 잡고 독일을 공격 할 것이다. 영국과 소련 미국이 연합하는 순간 독일은 날아가 버릴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양면 전쟁을 치러야 하는 위험성에 히틀러는 해협을 건너야 하는 영국 침공보다 광활한 대지의 소련 땅을 침략하는게 훨씬 쉬워 보였다.

독일 나치가 딱 6주 공격을 계획한 레닌그라드 함락 작전은 처칠이 일기장에 '할렐루야! 만세'라는 문장을 적게 만든다.

독일이 거세게 런던 공격을 때리자 런던은 독일 전투기가 목표물을 식별하지 못하도록 도시 전체를 어둠으로 만드는 등화 관제를 실시한다.


안전한 지역에 살지 않은 시민들은 방공호로 모였고 그곳에서 방독면 마스크를 비롯해 정부의 지침을 라디오에 의지하며 어제와 다름없이 일터로 출근 했다.

상점들은 정상적으로 영업을 이어갔고 어두워지면 굉음의 독일 전투기가 어둠의 공포를 증폭 시켰다.

음악가들은 내셔널 갤러리에서 콘서트를 열어 죽음의 공포를 시민들과 함께 견뎌 냈다.

폭격으로 파괴된 런던 시 곳곳은 어디 하나 무너지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로 빠른 속도로 처참한 상황으로 바뀌어 갔다.

집안 침대에 누워 있다가 옆집에 폭탄이 떨어진 광경을 보는 게 런던 시민들의 일상이였다,


폭탄 세례는 더욱 거세졌지만 런던 시민들의 두려움은 점점 줄어 들어 공습 중에도 강아지와 함께 공원 산책을 나갔다. 낯선 이들과 만나면 서로 살아 있다는 사실에 위로 했고 부족한 물품을 교환 했다.

대피소에 모인 사람들을 위해 온갖 종류의 잡지와 차들이 시민들의 도움과 협조로 서로 함께 읽고 마셨다.

야간 공습이 가장 활발하던 시기에 런던 영유아 출산율이 급증했고 클럽의 음악은 단 한번도 멈춘 적이 없었다.

밤마다 런던을 두들겨 때려도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 처칠 때문에 괴벨스는 무척 당황했다.

영국이 투쟁 의지를 포기 하지 않았고 곧 혹독한 겨울이 다가 오면 소련으로 진출한 군대가 어떤 상황에 부딪칠지 모른다.

동시다발 전을 피하고 싶었던 히틀러에게 괴링은 영국의 강력한 저항을 부셔 버릴 작전인 '월광 소나타'를 계획한다.

작은 도시를 집중 파괴해서 아예 도시 자체를 없애는 목적인 '월광소나타'

처칠은 독일의 침공에 강력하게 저항하라며 프랑스 인들을 향해 용기와 투쟁의 의지를 호소하고 연합 작전으로 독일 도시를 폭격한다.

11월 4일 목요일 오후 5시 18분에 달이 뜨자 런던 도시 전체가 등화 관제에 들어간다.

독일군이 코번트리에 공격을 개시한다는 것을 영국 무선 대응팀이 비밀 암호를 해독한다.

이날 늦은 저녁에 떠오른 달빛은 신문을 읽을 정도로 휘황찬란했다.

런던 시민들은 11월에 이토록 밝게 빛나는 달을 본 적이 없었다.

오후 7시 5분 지역 민방위 통제실에 런던 시민에게 '황색 공습 메시지' 사이렌을 울리고 뒤이어 '적색 공습 메시지'를 울린다.

전에도 여러 번 공격을 당한 적이 있었던 코번트리 시민들은 공습 대비 훈련이 잘 되어 있었다.

7시 20분 달빛처럼 하늘에서 환한 불꽃들이 낙하산에 매달린 채 땅 위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폭우가 내는 소리를 내고는 폭발하면서 발화 물질을 사방에 뿌렸다.

사탄 5발이 뿌린 포탄은 비처럼 쏟아져서 코번트리의 모든 수도관을 파괴했고 대피소 까지 강타 했다.

도시 전체는 불에 탄 시신으로 넘쳐 났고 발화 된 불은 병원과 성당, 교회 소방소 경찰서를 차례 차례 잿더미로 만들었다.

11시간 동안 비처럼 내린 폭탄은 다음날 새벽 6시 까지 쏟아졌다.

121회나 출격한 영국 RAF는 독일 전투기를 단 한 대도 추락 시키지 못했고 코벤트리를 구하지 못했다.

괴링은 509대의 폭격기로 코번트리를 초토화 시켰다.

11월 8일 처칠은 눈물로 얼룩진 전보를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보낸다.

루스벨트는 3선 재임 성공으로 미 해군 순양함을 타고 카리브해에서 일광욕과 영화 관람을 하며 꿀맛 같은 휴식을 즐기고 있었다.

처칠은 미국에게 막대한 양의 선박과 항공기 ,총탄, 기계 부품, 식량 원조가 필요 하다고 호소했다.

하지만 영국은 막대한 원조를 보상할 재정은 빠르게 고갈 되어 가고 있어서 설사 미국이 원조대금을 후에 청구 한다 해도 갚을 돈이 없었다.

12월 16일 카리브해에서 충분한 휴식을 취하고 워싱턴으로 돌아온 루스벨트는 '요근래 특별한 뉴스 거리가 없다.'는 말로 기자들과 간담회를 나누며 불이 난 이웃집에 정원용 호스를 빌려주듯 불이 난 집에 15달러짜리 호수를 빌려주고 불을 다 끄고 난 후 빌려준 호스만 제자리에 갖다 주면 된다는 이야기를 꺼낸다.

루스벨트는 ' 미국의 방위 및 기타 목적을 증진하기 위한 추가 법안'을 상정해서 영국이든 어떤 동맹국이든 대금을 지불할 능력이 있고 없고 여부 없이 필요할 경우 모든 지원을 제공하는 것이 미국의 국익에도 도움이 된다는 일명 '무기대여법'이라는 법안을 제안한다.

하지만 루스벨트는 미국 청년들을 땅에 묻어 버려야 하냐는 의원들의 거센 저항에 부딪쳤고 처칠은 크리스마스 때까지 미국으로 부터 아무런 연락을 받지 못한다.

12월 29일 일요일 밤 루스벨트는 '노변 담화(fireside chat)에서 영국 지원의 당위성을 강조하며 미국 국민에게 처음으로 '나치'라는 단어를 언급했다.


그는 미국을 '민주주의 병기창'이라고 지칭하며 '잔인한 상대에겐 어떤 유화 정책도 소용 없습니다. 만약 영국이 패배한다면 우리는 독일과 이탈리아, 일본의 사악한 동맹의 총부리 끝에서 살게 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수 백만 명의 미국인들이 이날 방송을 들었고 동시에 영국인들도 새벽 시간에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 목소리를 라디오를 통해 들었다.

1940년 12월 31일 자정을 기준으로 괴링은 단 한번의 화재 공습으로 런던을 날려 버리겠다고 전투력을 보강한다.

1941년 2월 6일 목요일 히틀러는 러시아 침공계획인 바르바로사 작전이 착착 진행될수록 영국의 끈질긴 저항에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공군과 해군에 새로운 작전 지시를 발령해서 영국에 보다 더 높은 강도의 공격을 개시하라고 명령한다.

2월 8일 토요일 미국 하원에서 무기 대여법이 통과 되었다.


'히틀러는 프랑스가 항복 했으니 당연히 우리도 항복할 줄 알았겠지만 우리는 항복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모두 가스 공격, 낙하산 공격, 글라이더 공격에 항상 대비하고 미리 생각 하고 기량을 닦아 놓아야 합니다. 히틀러가 이 전쟁에서 이기려면 대영제국을 무너뜨려야 할 것입니다. 계속 항해하라, 오, 조국의 배여.'


영국 국민이 처칠의 연설을 듣고 있을 때 괴벨스도 듣고 있었다.

아프리카 전선에 이어서 그리스와 발칸 반도에서 영국군은 독일군 세력에 밀렸고 바다와 하늘에서는 U보트와 루프트바페의 위력에 영국 곳곳이 흔적 없이 부서지고 있었다.

괴벨스는 우리가 원했던 적의 모습을 이제서야 볼 수 있다며 활기 넘치게 선전술을 펼쳐나갔다.

4월 28일 월요일 미의회는 전쟁 개입 여부를 놓고 여전히 격론 중이였다. 독일은 몇 주만 집중 공격 하면 영국은 무너질 것이라고 확신하며 소련으로 전력을 집결 시킨다.

하지만 승기를 잡은 독일은 머뭇거리며 영국과의 평화 협정을 위해 서부 전선에서 군대 진격을 멈춰 놓고 전력의 25%에 해당하는 국방군 40개 사단도 해산하자 군 내부는 치열한 권력 투쟁으로 분열되기 시작한다.

1941년 크리스마스를 몇 주 앞 둔 12월 어느 일요일 저녁, 얼어붙은 소련 땅에 발이 묶여 버린 독일 기갑부대가 멈춰버린 순간 일본 항공기가 하와이 섬에 있는 미군 해군 기지인 진주만을 급습한다.


다음날 루스벨트는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고 뒤이어 12월 11일 히틀러가 미국에 전쟁을 선포 한다.

처칠은 이날 이렇게 말했다. '앞으로 거센 폭풍을 만날 수도 있지만 뒤집히거나 가라앉지 않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독일군은 500여 대의 폭격기와 620대의 전투기를 동원해 최대 규모의 폭격에 나섰다. 영국 공군은 단 한 대의 예비 기체도 남기지 않고 모든 전투기를 출격 시켜 맞섰다. 체공 시간이 짧은 독일 전투기들은 고전했다.

밤낮으로 계속된 전투에서 영국군은 29대의 전투기를 잃었고, 독일군은 80대가 넘는 폭격기와 전투기를 잃었다. 귀환 도중 연료가 바닥난 수십 대의 독일 전투기들이 도버 해협에 떨어지고 독일군의 기세는 꺾였다.

이제 독일이 공군력으로 영국을 굴복 시킬 수 없다는 사실이 명백해졌다. 제공권을 장악하지 않은 상태에서 상륙작전은 불가능했다. 피해가 누적되자 독일군은 야간 폭격으로 전환했다. 이듬해 초까지 독일군의 폭격이 이어졌으나 효과는 점차 떨어졌다.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자 독일 공군은 동부 전선으로 이동했다.


영국은 끝내 살아남았다.

영국이 본토 항공 전에서 승리하자 독일에 점령 된 국가들은 승리의 희망을 얻었다.

미국 정부도 영국에 지원을 늘리기 시작했다. 폭격에 시달리던 영국 항구들은 훗날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발진 기지가 됐다.


폭격이 계속되는 동안에도 새로운 생명이 태어났고, 방독면에 익숙해진 아이들은 방독면에 미키 마우스를 그렸다. 부서진 건물 잔해를 치우며 사람들은 쾌활하게 농담을 내뱉었다.

처칠 총리는 한밤중에 거리로 나가 시민들을 독려했다.


부서진 도서관에서 시민들은 서가에 꽂힌 책을 읽었다. 날마다 누군가 죽어가는 생활 속에서도 사람들은 연애하고, 산책하며 활기를 이어갔고 지하 대피소 에서는 즉흥적인 공연이 벌어졌다.


영국 국민들은 휘황찬란한 보름달‘폭격기의 달(bomber’s moon)’이 뜰 때마다 “오늘 밤에 (전투기가) 더 많이 몰려오겠지”라며 두려움에 떨면서도 살아 남았고 이겨냈다.

자신을 간신히 비껴 간 폭탄을 보며 매 순간 ‘살아 있음’을 느끼고, 극한의 상황을 버텨낸 이들은 ' 침착하라. 하던 일을 계속하라(Keep calm and carry on)’' 라는 구호를 외치며 끊이지 않는 공습 사이렌 소리와 포성 속에서 견뎠고 살아 남았다.


'그날 밤은 구름 한 점 없고 별이 총총 했으며 달은 웨스트민스터 상공에 떠 있었다. 이보다 더 아름다운 정경도 없을 것이다. 지평선의 어딘가에서 엇갈리는 서치라이트 불빛, 포탄이 터지는 하늘에는 별 같은 섬광, 먼 곳에서 타오르는 불길의 광채 등, 여러가지가 그 정경에 더해졌다. 웅장하면서도 끔찍했다. 머리 위로는 적기의 웅웅 거리는 소리가 끊어질 듯 이어졌고, 포성이 멀리 때로는 가까이 들렸다. 평화로운 때 전동열차가 신호하는 조명처럼 대포가 발사될 때마다 빛이 번쩍였다. 하늘에서는 수 많은 별들이 반짝였다. 진짜 별도 있고 인위적인 별도 있었다. 자연의 찬란함과 인간의 사악함이 이렇게 두드러진 대조를 보인 적은 없었다.'- 처칠 개인비서 '존 콜빌' 일지 중에서

처칠은 영국과 프랑스군 약 34만명을 프랑스 덩케르크에서 철수 시키는 데 성공한 후 항공기 생산부를 신설하고, 전투기 생산과 승무원 훈련에 모든 에너지를 쏟으며 임박한 본토 공격에 대비하며 미국이 참전 하기 전까지 버텼다.

암울한 세계 권력 구도 속에 영국이 처한 냉혹한 상황을 영국의 어떤 지도자들 보다 잘 알고 있었던 현실주의자 처칠은 국민 앞에서 자신만만하게 승리를 다짐하며 독일에게 굴복 하지 않았다.


1940년 9월 7일 런던 중심부에 대규모 첫 공습 이후 1941년 5월 11일 영국 대 공습이 끝날 때까지 영국 전역에선 4만 4652명의 민간인이 사망했고 5만2370명이 부상 당했다.


나치 독일의 프랑스 점령 이후 소련 침공 전까지 집중적으로 이어진 영국 대 공습은 영국 전 국토와 국민의 심신에 깊은 상흔을 남겼다.

1945년 5월 8일 전쟁 속에서 살아 남은 영국 국민들은 두 달 후 치루어진 선거에서 처칠을 총리로 선택하지 않는다.


'적의 도발에 평화를 애걸하면 비극을 초래한다.'



이 책의 원 제목은 '찬란한 이들과 사악한 자들(The Splendid and the Vile)’로 처칠이 총리로 취임한 1940년 5월 부터 1941년 5월까지 1년 동안 영국과 독일, 그리고 미국 지도자의 관점과 전략에 따라 전세가 어떻게 바뀌어 가는지 처칠 주변의 인물들과 일반 시민들의 모습을 추적하며 생과 사의 순간을 세밀하고 생동감 넘치게 펼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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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유 2022-03-01 11:52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스캇님 글 읽으니 이 책 읽고 싶어지네요. 장바구니에 쏙~ ㅎㅎ

scott 2022-03-01 11:59   좋아요 5 | URL
이 책 몰입감 👍👍👍

전 지유님이 읽으신 <히틀러 시대의 여행자들> 장바구니 속으로~@@@

휴일 평안하게 ^ㅅ^

새파랑 2022-03-01 12:07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제가 방금 <서부 전선 이상없다> 책을 읽었는데 또 스콧님의 이런 전쟁 관련 리뷰를 보니 전쟁은 정말 비극인거 같아요 ㅜㅜ 특히 그 피해는 정치지도자가 아닌 군인들과 시민들만 받고..누구를 위한 전쟁인지 ㅜㅜ

scott 2022-03-01 12:11   좋아요 6 | URL
레마르크
사랑할때 죽을 때,,,
강추 합니다 ^^

전쟁에 가장 큰 피해자는 무고한 시민들
그리고 어린이들 ㅠ.ㅠ

대장정 2022-03-01 12:34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으로 전쟁관련 책들이 많이 올라오네요. 히틀러의 선동적인 저 얼굴보다 무표정한 푸틴의 얼굴이 더 무섭.

scott 2022-03-01 12:55   좋아요 5 | URL
칠순 푸틴
사라졌으면 좋겠습니다

미미 2022-03-01 13:05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넷플릭스에서 2차세계대전 다큐로(몇 부작짜리)본 내용들인데 하나의 페이지로 정리하신 스콧님 존경합니다!! 페이지 찜해두고 몇 번 더 읽어야겠어요👍 이당시 물밑에서 암호전쟁도 이루어지고 있었던 점을 생각하면 더 치열하게 느껴집니다.

scott 2022-03-01 13:32   좋아요 4 | URL
정리한것이 아닌
이 책 넘 ㅎ
좋아서 몇 달동안
베개 옆에 🙈
암호 전쟁 해독한 영화
강추 합니다

미미 2022-03-01 13:41   좋아요 4 | URL
혹시 <이미테이션 게임>인가요? 이 영화는 봤는데 다른거면 제목을 알려주세요😁

scott 2022-03-01 13:44   좋아요 4 | URL
네^^
베니가 남주🤗

페넬로페 2022-03-01 13:57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페이퍼의 글을 읽으며 마치 다큐멘터리를 보는 느낌이었어요.
그 당시의 긴박했던 스토리가 한 눈에 들어오네요. 아무튼 히틀러, 참 ㅠㅠ
결국 살아남아야 하는데 그러려면 지도자도 중요하고 힘도 있어야한다는 것이네요^^

scott 2022-03-01 15:25   좋아요 3 | URL
맞습니다
푸틴 히틀러 스탈린
이들의 광기로 인해
목숨을 잃은 이들 ㅠ.ㅠ

우크라이나 피투성이 된 아이들 ㅠ.ㅠ

이번 기회에 푸틴 완전히 사라졌으면,,,

coolcat329 2022-03-01 16:1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헉 저 어제 이 책 살까말까 고민했는데 이렇게 만나니 사라는 계시같습니다.

scott 2022-03-01 16:34   좋아요 2 | URL
이 책 매력 여기에 전부 담지 못했습니다😆
쿨켓님 휴일 평안하게 ☺

거리의화가 2022-03-01 17: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멋진 책 소개 감사합니다. 작년 말에 눈여겨보았던 책인데 이렇게 만나게 되네요. 사진까지 함께 올려주셔서 흥미진진하게 읽었습니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영국 땅을 보니 지금의 우크라이나와 오버랩이 됩니다.

scott 2022-03-01 17:55   좋아요 3 | URL
소개한것이 아닌
저의 땀과 눈물로 쓴,,,,

우크라이나 국민 극심한 공포 죽음 앞에 놓여 있어서
마음이 아픕니다 ㅠ.ㅠ

화가님 3월에도 알찬 독서!^^

mini74 2022-03-01 20:2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체임벌린 동네 이장이나 할 인물이라고 악평이 엄청나더군요. ㅠㅠ팃포텟전략이 필요할 때도 있는거 같아요. 스콧님이 소개하시면 무조건 사고싶어집니다. 정성어린 리뷰에 참 고맙습니다 스콧님 ~~

scott 2022-03-01 22:07   좋아요 2 | URL
동네 이장!ㅎㅎㅎ
이장이 훠얼씬 냉정한 현실주의자!로 동네 주민의 생명과 안전에 만반의 준비를 취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체임벌린,,,,
영화 처칠에서 제레미 아이언스가 연기 했는데
진인짜 저 사진 속 인물과 똑같이!
연기를 ㅎㅎ

이 책 강추! 합니다
소설도 이보다 더 재밌을 수가 없능!

팃포텐 전략!
전 미니님 소총 리뷰 읽으러
슈우!웅~@@@

그레이스 2022-03-01 22:5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으으
이 길이 뭡니까!
저는 우크라이나 정리하다가 현대사로 오면서 지쳐서 줄였는데...
참 감탄하게 됩니다. ^^

scott 2022-03-01 23:17   좋아요 2 | URL
지도, 사진, 년도 필수 체크!ㅎㅎㅎ
현대사로 넘어가면
더더욱 길이 조절이 힘드러집니다

담주엔
조금 더 기일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