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주요 아이비리그 대학의 창작 수업이 대략 90여개 정도로 1학년 생들의 필수 과목인 기초 라이팅 수업을 들으면 2학년으로 올라 가서는 각종 연구 보고서 쓰는 법, 기업 지원 이력서 작성법, 신문, 잡지 기사 작성법, 각종 메뉴얼 쓰기 수업까지 세부적이면서 전문적인 글쓰기 훈련을 집중적으로 배울 수 있다.
각 대학 마다 분야 별 전문가 급 실무진 교수들과 초빙 강사들에게 수업 진행을 맡기는데 이들 대부분은 주요 문학상을 수상한 이력을 갖춘 작가들, 언론계 종사자들, 유명 저널리스트, 방송 진행자들로 일단 이들의 이름으로 개설된 수업은 단연 학생들에게 인기다.
특히 프린스턴 대학은 시러큐스 대학 재학 시절 부터 타고난 글쟁이로 이름을 날리며 세계적인 작가가 된 조이스 캐롤 오츠가 학부생을 대상으로 한 창작 수업을 시작 하면서 여러 명의 유명 작가들을 배출 했다.
그 중 한 명인 조너선 사프런 포어는 조이스 캐롤 오츠가 강력 추천해서 첫 장편 <모든 것이 밝혀졌다> 출간과 함께 그가 출간하는 작품들이 전 세계로 번역 출간 되었고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현재 조너선 샤프런 포어도 자신의 모교 프린스턴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고 퓰리처 상을 수상한 줌파 라히리는 코로나 발발 시기에 문예창작 학부(루이스 센터 아트스쿨) 학과장이 되었다.
현재 프린스턴 대학은 중국계 작가 이윤 리까지 영입해서 막강한 교수진을 구성했다.
미국 대학 역사에서 가장 먼저 창작 클래스를 설립해서 창작 워크샵을 시작한 아이오와 대학은 100년이 훌쩍 넘는 기간 동안 이곳 창작 교육 프로그램을 거쳐간 작가들 중 상당수가 세계적인 작가가 되었다.
중국계 이윤 리 작가도 이곳에서 글쓰기 수업을 받으면서 썼던 단편이 '뉴요커'에 실리면서 작가 생활을 시작했다.
미국 대학들이 글쓰기 수업에 막대한 투자를 하는 이유는 '쓰기'는 생각의 힘을 길러주는 최고의 도구이자 자신의 생각을 완성 할 수 있는 최고의 지침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주요 아이비리그 대학들은 문예창작을 석사(MFA in Creative Writing) 과정으로 개설해서 '글쓰기'를 전문적으로 집중 교육하고 있다.
글쓰기 수업에서 가장 강조하고 중점을 두는 건 어떻게 쓰는 법이 아닌 어떻게 읽고 분석해서 단어들을 문장의 어떤 매커니즘으로 연결 시켜 나가는지를 중점으로 세세하게 분석하는 글쓰기 훈련을 한다.
여러 인물들의 인과 관계를 엮어서 스토리의 구조를 짜려면 각각의 이야기에 맞는 배경지식을 알고 있어야 하기 때문에 창작 수업에서는 어떤 수업 보다도 집중적으로 '읽기'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다.
프린스턴 대학에서 철학을 선택한 조너선 사프란 포어가 그저 재미있을 것 같아 선택했던 창작 수업에서 조이스 캐롤 오츠는 학생들을 돌아가면서 지목한 후 각자의 이야기를 큰 소리로 이야기 해보는 방식으로 수업을 진행했다고 한다.
조이스 캐롤 오츠가 이런 방식으로 수업을 진행했던 이유는 단어들이 특정 단어들과 만났을 때 어떤 음조와 음률로 이어지는지 스스로 써 놓고 알지 못하기에 제 3자인 다른 이들이 듣고 어떤 이야기로 받아 들이는지, 스토리의 구조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파악해서 첨삭 조언을 하기 위해서 였다.
조너선은 이 과정을 여러 차례 하는 동안 처음에는 말도 안되는 이야기를 지껄였다가 수업 마지막에는 제대로 된 이야기를 써 보겠다고 작정하고 종이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기말 시험으로 제출한 그의 이야기에 캐롤 오츠는 흥미롭다며 다음 이야기를 써보라고 격려했고 그 결과 그는 세계적인 작가가 되었다.
아마도 조너선은 수업 내내 이야기가 작동하는 방식을 학습해 나가면서 결국엔 스토리의 구조 속에 담긴 특정 사건과 인물의 시작과 끝 맺음을 어떻게 다듬어 나가는지 배웠을 것이다.
하지만 모든 이들에게 이렇게 단기간 안에 글쓰기를 학습하고 훈련해서 누구에게나 읽혀지는 완성된 이야기를 뚝딱 창작 하기 힘들고 어떤 수업을 들었어도 글쓰기에 진전이 없을지도 모른다.
여기, 또 다른 한 명의 창작 클래스를 이끌고 있는 작가가 있다.
<바르도의 링컨>으로 맨부커상을 수상한 작가 조지 손더스(George Saunders1958-)는 미 대학 문예 창작 학부에서 가장 유명한 학교 중에 하나인 시러큐스 대학에서 글쓰기 수업을 이끌고 있다.
그는 장편 <바르도의 링컨>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기 전 오 헨리 단편상을 수상하며 단편을 잘 쓰는 작가로 알려져 있었다.
시러큐스 대학의 창작 학부는 단 여섯 명의 신입생만 받기 때문에 이곳의 입학 관문을 뚫고 들어간 학생들은 이미 전문 작가의 궤도에 올랐을 정도로 미국 내 각종 글쓰기 대회에 이름을 수차례 올렸던 이들이다.(입학 평균 경쟁률이 7-800:1 정도라고 함)
이들은 입학과 함께 교수진들과 1;1 수업을 받으며 매 학기 마다 제출하는 과제물이 주요 문예지에 실리거나 문학상 수상 후보에 올라 갈 수 있을 정도로 강도 높은 글쓰기 훈련을 한다.
조지 손더스는 20여 년 동안 자신의 창작 수업에서 19세기 러시아 단편 소설을 중심으로 가르쳤는데 그 중심에는 <안톤 체홉>의 작품들로 기타 작가들 중에는 투르게네프, 톨스토이, 고골 뿐이다.
조지 손더스 뿐 만 아니라 미국의 거의 모든 대학의 창작 클래스에서 안톤 체홉의 주요 단편들은 항상 교재로 쓰이고 있다.
조지 손더스가 선택한 러시아 단편들의 공통점은 단순하면서 명료한 언어로 구성된 이야기로 가장 기본적인 글쓰기 형식이 이 단편들 속에 모두 들어 있다.
안톤 체홉의 대부분의 단편들은 대단한 사건이나 인물이 나오지 않고 역사적 소용돌이에 휘말리는 영웅의 대서사시도 없다.
별 볼일 없는 인물들, 우리 주변에서 한 번 쯤 스쳐 지나갔던 이들의 모습에서 선한 삶을 살거나 그렇지 못한 인간들의 모습 속에서 참된 인간애를 느끼게 만드는 이야기의 힘이 담겨져 있다.
조지 손더스는 여기, 이 책에서' 19세기 러시아 단편 소설을 읽는 것은 '마치 젊은 작곡가가 바흐를 공부 하는 것과 비슷하다.'라고 언급하며 책 전반에 걸쳐 읽는 방식, 즉 우리 자신의 읽기를 지켜 보고 어떤 이야기를 통해 세상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생각 해볼 기회를 갖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 한다.
그가 글을 쓰고 싶어서 이 책을 펼친 독자들을 위해 선택한 작품들은
-마차에서(안톤 체홉)
-기수들(이반 투르게네프)
-사랑스러운 사람(안톤 체홉)
-주인과 하인(레프 톨스토이)
-코(니콜라이 고골)
-구스베리(안톤 체홉)
-단지 알료샤(레프 톨스토이)
총 7개 단편들을 통해 각자 읽기 상태를 점검하고 저자가 던지는 질문에 대한 답을 에세이 형식으로 써보기를 제안한다.
우리가 어떤 이야기를 읽거나 들었을 때 그 이야기를 통해서 어떤 느낌, 즉, 무엇 때문에 끝까지 읽게 되었는지 어떤 내용에서 마음이 움직였는지 글로 써봐야 각각의 단편 전체 구조를 파악할 수 있게 된다.
작가 손더스는 문학적 언어가 아닌 가장 기본적인 방법으로 서술 하면서 특정 이야기에서 저항심이나 혼란을 느꼈거나 짜증을 불러 일으켰던 것 까지 모조리 써본 후 도대체 이 이야기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는지 차분하게 생각해 보는 법을 시도 해 볼 것을 조언한다.
그는 첫 번째 스토리 안톤 체홉의 <마차에서>를 한 장씩 보여 주면서 각각의 이야기 속에서 독자들이 무엇에 중점을 두고 한 문장에서 다음 문장으로 이어질 때 중심 인물의 감정의 선을 자르고 붙이며 시 공간을 뛰어넘는 작업을 한다.
맨 마지막 전체 스토리를 단 한 줄로 만드는 작업을 하는데 이 방식은 실제 시러큐스 대학 수업에서 훈련 하는 방식과 똑같다고 한다.
우선, 손더스는 독자들이 작품을 읽고, 어떤 부분에서 주인공이 무엇을 했는지, 이전 스토리에서 알아 차리지 못했던 그 무엇을 알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 다음에는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단계 별로 읽기 작업을 시도한 후 이런 질문을 던진다.
책장에서 눈을 들고 지금까지 알게 된 것을 요약하라. 한두 문장으로 해보라.
무엇에 호기심을 느끼는가?
이야기가 어디로 간다고 생각하는가?
그리고 맨 마지막 질문은 다음과 같다.
-당신이 작가라면 다음에 어떻게 하겠는가?
-한 사람의 독자로서 당신은 다른 무엇을 알고 싶은가?
우리는 쓰기가 아닌 읽기의 독자의 시선으로 각각의 이야기를 분석 할 때 테마-플롯-인물 발전-구조 같은 용어를 사용 하지 않는다.
쓰기를 할 때도 이런 용어에 집착 하지 않는다. 하지만 일단 글을 쓰게 되면 설득력 있는 이야기, 읽고 싶은 이야기를 쓰려면 서사 구조를 제대로 구축할 수 있어야 한다.
시러큐스 대학의 창작 워크샵 프로그램에서 소설 쓰기 방식은 일주일에 한 번 씩 학생 여섯 명이 서로 두 명씩 팀을 짜서 각자 쓴 작품을 읽고 토론 하는 방식으로 진행한다.
이런 수업 방식은 다른 대학에서도 똑같은 방식으로 진행 되는데 다른 사람이 쓴 글을 읽고 분석하고 토론하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교정을 한 후 , 담당 교수가 논평을 하는 걸로 마무리한다.
콜로라도 광업 대학에서 공학을 전공한 후 건설 현장에서 뛰어 다니다가 뒤늦게 글쓰기를 시작한 조지 손더스는 전형적인 글쓰기 수업 방식과는 다른 방법으로 학생들을 자극한다.
별것 아닌 사건이 발생하는 지점의 문단을 뽑아내서 거기서 추출해 낸 특정 단어로 하나의 이야기를 완성하는 동안 학생들, 또는 독자들이 위대한 작가의 불멸의 작품에서 버려도 되는 부분을 가져다 완전히 다른 이야기로 완성해서 자신만의 글쓰기 스타일로 발전 시켜 나가게 이끈다.
이런 과정 속에서 이야기를 쓰는 동안 19세기 러시아 농노 사회가 아닌 21세기 현대 사회의 노동자들의 삶으로 깊숙이 개입해서 나날이 축적 되고 있는 고통, 삶의 고단함, 과거 속의 그들의 삶을 역 추적해 볼 수 있다.
[그들은 아침 8시 반에 읍내에서 마차를 몰고 나왔다. 포장도로는 말랐고 찬란한 4월의 태양이 온기를 뿌렸지만 도랑과 숲에는 여전히 눈이 있었다. 겨울, 악하고 어둡고 긴 겨울은 바로 얼마 전에야 끝났고 갑자기 봄이 왔지만, 온기도, 봄의 숨에 따뜻해진 나른하고 투명한 숲도, 호수처럼 물이 괸 들판의 거대한 웅덩이들 위를 나는 검은 새 떼도, 다른 사람이라면 너무 좋아 뛰어들 것만 같은 이 경이롭고 가없이 깊은 하늘도, 마차에 앉은 마리야 바실리예브나에게는 전혀 새롭지도 흥미롭지도 않았다. 그녀는 학교에서 13년을 가르쳤고 그 세월 내내 급여를 받으러 수도 없이 읍내에 다녀왔다. 지금 같은 봄이건 비 오는 가을 저녁이건 겨울이건 그녀가 늘 변함없이 갈망하는 것은 가능한 한 빨리 목적지에 닿는 것 뿐이었다. 이 지역에서 오래, 아주 오랫동안, 100년 동안 살아온 것 같았고 읍내에서 학교까지 가는 길의 모드 돌멩이, 모든 나무를 아는 느낌이었다. 여기에 그녀의 과거와 그녀의 현재가 있었으며, 그녀는 학교, 읍내까지 왕복 하는 길, 다시 학교, 다시 길 외에 다른 미래를 상상 할 수 없었다.]
-안톤 체홉의 <마차> 첫 페이지
이야기의 첫 시작에서 몇 가지 핵심 적인 인물의 상황과 심리를 알 수 있지만 앞으로 어떤 이야기로 흘러 갈 지 아직 예측하지 못한다.
손더스는 이 작품 <마차>를 읽고, 쓰는 창작 수업에서 주요 인물의 성격을 완전히 바꾸어 버리면 어떤 결말로 완성 할 수 있는지 창작 해보거나 체홉이 시도 하지 않았던 극적인 사건을 추가 해서 완성한 작품을 함께 읽으면서 어떤 스토리로 재 탄생 시킬 수 있는지 시도 하는 동안 완전하지 않은 이야기, 핵심 요소를 빼버린 이야기, 부분 부분, 싹둑 싹둑, 삭제하고 잘라 버린 이야기를 어떻게 완성된 구조로 만들어가는지 해체하는 작업에 중점을 둔다.
단편의 마법사, 안톤 체홉은 '저기 기차가 온다.'라는 첫 문장을 시작으로 철도 건너 편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일상에서 특정 시간대에 발생 했던 사건을 중심으로 사소한 요소들을 배치 하고 기차가 달릴 때 창문 너머 보이는 십자가가 보이는 교회의 불빛으로 하나의 이야기로 완성한다.
여기엔 어떤 극적인 사건도 없고, 엄청난 슬픔도 없고 어떤 뚜렷한 행복도 보이지 않는다.
그저 꿈처럼 흐릿하고 모호하게 드러나는 유년 시절의 모습, 현재의 삶 속에서 한 때 행복 했던 가정, 사랑 받았던 순간이 언뜻 언뜻 스쳐 지나가다 결국엔 어떤 일도 일어 나지 않은 채 누군가가 기억하는 어떤 인물의 삶의 흔적만 남겨질 뿐이다.
여기서 손더스는 이런 논평을 한다.
[우리 자신이 아무것도 아닌 존재이고 늘 아무것도 아닌 존재 였다고 느낀다면 그것도 하나의 이야기다. 하지만 우리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느끼다가 어떤 기적적인 순간에 한때 우리도 무언가였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그것은 더 행복한 이야기 일까 아니면 더 슬픈 이야기 일까?]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 작가를 지망하는 이들 대부분 현재 내가 구상하고 쓰고 있는 글감이 과연 누군가에게 읽혀지는 이야기가 될까?라는 의문을 갖고 있다.
각자 자신의 삶을 이야기로 쓰고 싶은 이들도 과연 내 인생이 이야기로 쓸 수 있는 인생인지 , 이런 글감도 이야기가 될 수 있는지라는 생각과 고민을 하는 이들이 아주 많을 것이다.
읽혀지는 이야기, 많은 이들의 공감을 갖는 이야기의 가장 큰 특징은 우리가 그 이야기 속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에서 각자 자신들의 모습을 발견 하거나 대입 시켜 보며 현재의 삶 보다 더 나은 미래의 자신의 모습을 찾을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무언의 메시지를 상상 해 볼 공간이 있는 이야기로 독자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한다.
'예술은 직접적으로 인간의 모든 문제를 해결 할 필요가 없다. 단지 어떤 문제도 부정하거나 외면하지 않고 스스로 깨닫고 느끼게 하는 게 진정한 예술의 힘이다.'
조지 손더스는 실제로 여기 실려 있는 단편들 중 가장 분량이 짧은 것(대략 1200단어 정도)를 복사해서 약 200단어 분량으로 잘라서 각각의 장이 끝날 때마다 무엇을 알게 되었는지, 앞선 이야기에서 무엇이 궁금한지 묻고 이 이야기가 어떤 방식의 결말을 맺을지 토론 한 후 각자 학생들이 원하는 부분의 이야기를 잘라서 이야기로 완성하는 쓰기 작업을 통해 글쓰기 훈련을 지도 한다.
이 책을 단순히 작법서로 배우겠다고 집어 들었다면 책장을 덮어버리게 될 것이다.
하지만 첫 장 부터 차분하게 읽는 동안 작가 손더스가 던지는 질문에 답을 하기 위해 종이를 펼쳐 놓고 쓰기 시작한다면 그동안 쓰기 위해서 읽었던 무수히 많은 일련의 과정 속에서 어떤 치명적인 실수를 했는지, 무엇을 읽지 못하고 지나쳐 버렸는지 알게 된다.
따라서 이 책은 어떻게 읽고 공부해야 어떤 글로 발전 시킬 수 있는지 배울 수 있는 책이다.
이 책에서 어떤 글쓰기 법칙도 찾을 수 없다. 이야기의 진정성이 작동하는 방식, 어떤 이야기가 끝까지 읽게 만드는지 어떤 스토리가 시 공간을 너머 읽혀지는지 정확하게 읽는 훈련을 스스로 구축해서 현실에서 이야기를 찾는 법을 찾게 만든다.
무엇에 대해 쓸까?라는 구상을 하기 전에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무엇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 현재 살고 있는 세상을 어떤 관점으로 읽고 있는지 스스로 정의 해서 이야기 구조를 짜서 종이에 써 봐야 한다.
[이반 이바니치는 오두막에서 나와 빗속에서 첨벙 물로 뛰어들어 두 팔을 넓게 밀어내며 헤엄을 쳤다. 그가 일으키는 물결에 하얀 수련들이 흔들거렸다. 그는 강 한가운데까지 헤엄쳐 나가 물속으로 들어갔고 잠시 후 다른 곳에서 올라와 계속 헤엄 치다가도 연신 물속으로 다시 들어가 바닥에 손을 대려 했다. '어이쿠 하느님!' 그는 기뻐서 계속 소리쳤다. '어이쿠 하느님!' 그는 물방앗간까지 헤엄쳐 가 농민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돌아와 강 한가운데에 누워 얼굴을 비에 드러낸 채 둥둥 떠 있었다. 부르킨과 알료힌은 이미 옷을 입고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지만 그는 계속 헤엄을 치고 물속으로 들어갔다. '어이쿠 하느님!' 그는 계속 탄성을 질렀다.
'주여, 저에게 자비를.'
'그만하면 됐잖아!' 부르킨이 그에게 소리쳤다.]
-안톤 체홉 <구스베리> 중에서
이 책의 원제목은 < A swim in a pond in the rain>으로 체홉의 '구스베리'에서 주인공 이반이 비가 내리는데 웅덩이 속으로 첨벙 뛰어 들어가 헤엄을 치는 장면에서 따왔다.
1895년 8월 8알 안톤 체홉은 평소 자신이 존경했던 대 작가 톨스토이에게 초대를 받아 그의 영지 야스나야 폴라냐로 갔다.
당시 톨스토이는 흰색 작업복을 입은 채 방금 전에 농사일을 마치기라도 한 듯 어깨에 커다란 수건을 걸친 상태로 땀으로 젖은 몸을 씻기 위해 강으로 향하고 있었다.
톨스토이는 처음 만난 체홉에게 대뜸 강으로 가자고 말했고 잔뜩 긴장했던 체홉은 톨스토이를 따라서 강으로 갔다.
강에 도착하자 마자 톨스토이는 입고 있던 옷을 벗고 강물 속으로 뛰어들었고 체홉도 뒤따라서 옷을 모두 벗고 뛰어 들었다.
톨스토이는 물 속에서 첨벙 첨벙 수영을 하면서 체홉에게 이런 저런 이야기를 했고 체홉도 함께 첨벙 첨벙하며 서로 대화를 나누며 재밌는 시간을 보냈다.
후에 체홉은 자신의 일기에 '강물 속에서 함께 수영 하는 동안 그가 대 작가라는 사실을 잊어 버렸다.'라고 썼다.
체홉은 톨스토이와 함께 수영 한 후 정확히 3년 뒤 1898년에 <구스베리> 단편을 완성한다.
안톤 체홉은 톨스토이를 만나기 전 그가 행하고 실천하는 삶에 진정성이 결여된 것으로 <바보 이반>이 현실에서는 작위를 가진 귀족이 드넓은 영지를 갖고 기득권을 위한 축제를 벌이고 있다고 생각했다.
체홉은 누구나 경외 하고 존경하는 영적 지도자 처럼 구는 톨스토이가 민중들에게 더 나은 삶을 위한 과학적 진보를 부정하고 오로지 흙으로 돌아가라는 그의 삶 자체가 모순덩어리라며 톨스토이의 초청을 수차례 거절했었다.
하지만 함께 수영을 하고 돌아온 후에 가까운 지인들에게 '만일 톨스토이가 죽게 된다면 내 삶에 텅 빈 자리가 생길까 봐 그의 죽음이 두렵다.'라는 말을 했다.
1904년 체홉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은 톨스토이는 '그가 나를 그렇게 사랑하는지 전혀 몰랐다.'라고 말했다.
체홉은 한 순간의 소중한 경험과 추억을 이렇게 한 편의 멋진 단편 <구스베리>로 완성했다.
후대의 독자들은 이 작품을 읽고 부분 부분 잘라서 자신들의 삶의 경험, 상상의 스토리 구조로 다시 재 편집해서 새로운 이야기로 탄생 시켜 나가고 있다.
한 편의 글을 쓰면 첫 번째 원고는 두 번째 읽을 때 전체를 뜯어 고칠 정도로 지우고 고치기를 반복하며 어떤 문단은 전체 삭제하고 다시 쓰게 된다.
그렇게 쓰면서 쉼표를 찍고, 각각의 문장 마다 어색하게 자리 잡은 단어들을 빼고, 모호한 문장을 삭제하고 앞 선 스토리에서 불분명하게 묘사된 부분을 고쳐서 전에 썼던 분량에서 반으로 줄이고 공간과 시간을 재배치 하면서 전체 스토리를 다듬어 나간다.
이런 과정을 무라카미 하루키는 수시로 톱질 하고 망치질 하는 걸로 마무리 한다고 표현했고 우크라이나 출신의 작가 이자크 바벨은 '어떤 강철 못도 적당한 자리에 찍힌 마침표 만큼 차갑게 인간 심장을 꿰뚫을 수 없을' 정도로 촘촘하고 꼼꼼하게 하나의 세계를 완성해야 비로소 읽혀지는 이야기가 된다고 말했다.
작가 손더스는 이 책에서 영화나 기타 영상 스토리의 시퀀스와 감독의 시선으로 편집하는 장면으로 이야기를 완성한 후에 어떤 방법으로 고쳐 쓰고 재 구성 해서 지지부진하게 늘어진 이야기를 어떻게 다듬어야 완결된 스토리로 만들 수 있는지 그 과정을 설명했다.
그 과정을 간략한 문장으로 써보면,
단 한 장의 텍스트를 읽고 자르고-확장하고- 다듬어서- 하나의 문장으로 응축 시켜나가는 훈련을 하는 것이다.
그가 강조하는 건 작가 지망생들은 쓰기에 앞서서 철저하게 읽고 분석하는 과정에서 자신만의 관점, 세상을 읽고 글로 풀어 쓰는 능력을 키워 나가면서 궁극적으로 자신만의 목소리를 찾아 내야 비로소 한 걸음 더 발전할 수 있다고 말한다.
결국 그는 자신이 진행하는 수업에서 가장 훌륭한 텍스트인 읽기 교재를 독자들에게 던져 놓고 글을 쓰고 싶다면 이야기 속으로 첨벙 뛰어 들어가서 스스로 밖으로 나오는 법을 터득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의 수업은 다른 교수들의 창작 수업과 달리 수업 이름이 길다.
<읽기, 쓰기, 그리고 삶에 관한 러시아 작가의 마스터 클래스>
이것은 마치 프로 음악가가 학생들을 위해 연 마스터 클래스에서 함께 악보를 읽고 연습하며 각자의 삶의 모습을 실어 연주하는 모습이 떠오른다.
그의 창작 수업은 단순히 작가가 되기 위해 쓰는 연습을 하고 훈련을 하는 수업이 아닌 '삶'을 알아가는 수업으로 세상을 어떻게 읽고 해석하는지 스스로 터득해나가게 만드는 수업이다.
이 책을 읽다 보면 일단 각각의 이야기가 크게 재밌지도 않고 대단히 극적인 사건이 발생하지도 않고 결말도 흐지부지 마무리 되는 스토리들이다.
21세기에 자극적인 영상과 스토리에 익숙해진 독자들에게 이 책에 들어간 이야기들은 지루하게 느껴질 것이다.
하지만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작가 손더스가 던지는 질문을 생각하며 한 번 더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면 왜 이런 질문이 나왔는지 인물의 심리를 추적하며 작가의 입장에서 다시 한번 이야기를 재 구성하게 된다.
매 단편이 끝날 때마다 그는 작품 설명과 글쓰기 작법 구성이 끝나면 개인적인 이야기, 자신의 인생 이야기 어떻게 쓸 수 있을지 머릿속으로 재구성 하며 '나는 무슨 이야기를 어떻게 쓸 것인가?'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게 된다.
어떤 목적을 갖고 , 어떤 의지로든 일단, 이 책을 펼쳐 드는 순간 마지막 장을 덮을 때면 '읽기와 쓰기'는 서로 분리 된 것이 아니라 하나라는 사실을 깨닫고 현재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을 어떻게 읽고 해석할 수 있을지 현실을 읽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