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키 옹이 2019년 이탈리아 'Lattes Grinzane(이탈리아아 작가이자 화가Mario Lattes(1923-2001년)의 업적을 기념하기 위해 Bottari 재단에서 지정한 상)  '의 La Quercia 부분  수상자(10월 2일)로 선정되었다. 이상은 지난 10년동안 총 아홉명의 세계적인 작가들을 수상자로 선정했는데 이번 2019년은 '무라카미 하루키'가 수상하게 되었다.

이탈리아에서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은 출간되자 마자 베스트 셀러에 올라갈정도로 인기 작가다.(미국보다 스페인 유럽 지역에서 하루키 작품이 더 많이 팔렸다고 함) 

그동안 하루키는 무수히 많은 국제적인 문학상을 수상했는데 이번에  이탈리아 토리노에서 받은 이상이 하루킹옹에게 꽤 큰 의미가 있었던 것 같다.(수상 연설문이 상당히 길다)

발번역이지만 전문을 올려본다.


lattes grinzane haruki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동굴속의 작은 모닥불


                                                                       무라카미 하루키


이야기를 쓰는 것, 오늘은 이것에 대해 이야기 하고 싶습니다. 물론 지구 온난화 문제나 핵무기 문제에 대해 이야기 할 수도 있을테지만 오늘 만큼은 제가 가장 잘 알고 있는 주제인 글쓰기에 대한 이야기에 집중해 조금은 구체적으로 이야기 하고 싶습니다.

제가 처음 글을 써야겠다라는 생각을 한 건 29살때였습니다. 1978년의 일이었고 그로부터 벌써 41년이란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 나이까지 저는 한번도 소설을 써보려는 시도도 하지 않았습니다. 중학교에 들어가고부터 저만의 시간이 주어지면서 몇시간 동안 책 읽는 것을 좋아했습니다만 소설가가 되고 싶다라는 생각이나 꿈은 꾸지 않았습니다.

물론 나도 무언가를 쓰면 좋겠다라는 생각은 했지만 작가가 될 정도의 능력은 없다고 확신했습니다. 학창 시절 저는 발자크, 도스토예프스키, 디킨스, 프란츠 카프카와 같은 작가들을 사랑했습니다. 제가 이작가들처럼 글을 쓸 수 있다라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그건 완전히 명백한 일이었기 때문에 작가가 되어보려는 무의미한 시도는 하지 않았습니다.

 소설은 제가 창작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대단한 작가들의 작품을 읽는 저에게 큰 즐거움을 주는 것일 뿐이었습니다. 이것이 문학을 향한 저의 순수한 마음이었습니다. 책을 읽는 것 이외에 음악, 특히 재즈를 듣는 것을 정말 좋아했습니다.

24살 때 도쿄에 재즈바를 열었습니다. 그 당시 결혼을 한 상태여서 아내와 함께 재즈바를 운영했습니다. 초기에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은행과 부모님, 친구들로부터 돈을 빌려서 도쿄 교외에 작은 재즈바를 열었습니다. 이 재즈바에 작은 피아노를 놓고 주말에는 젊은 음악가들의 라이브 공연을 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기도 했습니다. 거의 10년 가까이 재즈바를 운영했는데  그자체로 매우 재미있는 경험이었습니다. 재즈바를 운영하는 일상적인 일들은 상당부분 육체적인 노력을 필요로 하기도 하고 부채를 갚아나가야 하는 일도 포함되었지만 당시 저는 젊고 활력이 넘쳤습니다 그래서 아침부터 밤까지 좋아하는 음악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저는 60년대 후반 일본의 강력한 혁명운동을 겪은 반문화 현상을 낳은 세대에 속합니다. 또한 이런 이유와 배경등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기업에 취업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물론 제 친구들중 일부는 반문화의 상징과도 같았던 장발과 수염의 얼터너티브 룩을 버리고 재킷과 넥타이를 메고 사업을 시작하기도 했습니다.

저는 이런 전공투 운동에 열성적으로 참여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일시적으로 전공투 운동이 다시 잠잠해지면서 언제 그랬냐는듯이 온순하게 변한 학교와 사회분위기에 저를 그냥 포함시키고 싶지 않았습니다.

마치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이 거대한 자본속에서 다시 세워진 사회는 더 공고해졌습니다. 가능한 저는 사회적 기대를 고려하지 않고 오로지 제 개인적인 기대에 부합되게 일관성 있는 개인으로서 살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이것은 지금도 제가 계속해서 해나가려고 하는 것 중에 하나입니다. 재즈바를 운영한 것도 사회 시스템 안에 들어가기 보다는 개인적인 삶을 살고 싶었던 이유에서 였습니다.

 재즈바는 경제적인 축면에서 봤을때  경영이 잘 되었기 때문에 안정적으로 재즈바를 계속 운영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29세가 되던 해 저는 갑자기 소설을 써야겠다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어떤 이유로 어떤 때에 저는 제가 어떤 하나의 소설을 쓸 수 있겠다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물론 발자크나 도스토예프스키 같은 엄청난 작품까지는 미치지 못하겠지만 어쩌면 저만의 방식으로 이야기를 써 내려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때까지 제가 겪은 삶의 경험이 어떤 이야기로서 가치가 있을 만한 것들을 축적했을지도 모를 일 일이었습니다. 정말 안타깝게도 역시나 전 소설을 쓰려고 시도한 적이 없어서 무엇을 어떻게 써야 할지 전혀 지 못했습니다.

처음에는 편지 같은 형식으로 겨우 시작 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약 6개월 뒤 저는 소설과 비슷한 이야기를 만들었고 그후 원고를 출판사에 투고 했습니다. 그 결과 놀랍게도 문예지에 신인작가들을 위해 주는 상을 수상하게 되었습니다.

난생 처음 쓴 소설로 상을 받다니 정말 운이 좋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제 첫소설이 발표 되었을때 많은 이야기들이 있었습니다. 6개월후 3만부가 팔렸는데 당시 데뷔 작가의 소설 판매량으로 볼 때 꽤 놀라운 기록이었습니다.

제목은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입니다. 그렇게 30살이 되면서 저는 더 좋거나 혹은 더 나쁘거나 어쨌든 작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2-3년간 재즈바 운영과 작가 생활을 병행했습니다. 동시에 두가지 일을 하는 것은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고 저는 글쓰기에 전념하기 위해 재즈바를 양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물론 제대로 잘 운영되고 있던 사업을 포기 하는 것 역시 힘든 결정이었습니다.

친구들은 모두 작가라는 직업은 너의 경제적인 부분에 있어서 안정적으로 보장해주지 않을 것이라고 얘기했지만 저는 아직 젊었고 이미 소설을 쓰고 싶다라는 욕망이 커져버린 상황이었습니다. 작가로 실패하면  거기서부터 무언가를 다시 시작하면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첫 소설이 발표되고 40년이 지났지만 그 이후 저의 소설을 쓰는 방식과 독자들에게 선보인 제 소설은 근본적으로 바꾸지 않았습니다. 여러가지 쓰는 방식의 변화를 거쳐 발전한 작품이라기 보다 소설을 쓰는 방법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똑같습니다.

다른 작가들이 어떤 방법을 택하는지는 자세히 모르겠습니다 저만 알고 있는 저의 글쓰는 스타일에는 몇가지 특징적인 부분이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새로운 이야기를 쓸 때 계획을 세우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저는 어떤 부분의 이야기를 써내려가는것으로 첫 문장을 시작합니다. 이단계에서는 이이야기의 줄거리가 무엇이지 알지 못한 상태로 아직 전체적인 이야기를 생각하지 못한 단계입니다. 그러나 그단계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야기가 잘 진행되는 동안 저는 계속해서 머릿속에 있는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써내려갑니다. 중요한 것은 이런 이야기들이 모두 자연스럽게 흘러나온다는 것입니다. 마치 땅속 깊은 곳에서 지하수가 터져나오듯이 제 안 깊은곳에서 부터 이야기와 나와 소설의 큰 줄기를 형성하게 됩니다.

예를 들면 이런 이야기를 쓰기 시작한 적이 있습니다.


22세의 봄, 스미레는 태어나서 처름으로 사랑에 빠졌다. 드넓은 평원을 곧장 달려가는 회오리 바람같은 격렬한 사랑이었다

그것은 지나는 길에 있는 모든 존재를 남김없이 쓰러뜨렸고, 하늘 높이 감아 올려 철저히 두들겨 부수었다

그리고 기세를 조금도 늦추지 않고 바다를 건너 앙코르와트를 무자비하게 붕괴시키고 한 떼의 불쌍한 호랑이들을 포함한 인도의 숲을 뜨거운 열로 태워 버렸으며, 페르시아 사막의 모래바람이 되어 이국적인 정취가 물씬 풍기는 성으로 이루어진 어떤 도시를 통째로 모래로 묻어 버렸다

멋지고 기념비적인 사랑이었다. 사랑에 빠진 상대는 스미레보다 17년 연상으로 이미 결혼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덧붙인다면 여성이었다. 그것이 모든 사건이 시작된 장소이고 모든 사건이 끝난 장소였다.’


저는 왜 언제 그리고 어떤 목적으로 이런 문장이 제 안에서 생겨났는지 알지 못합니다

단지 어느 새벽 책상에 앉아 이글을 쓴 것이고 가끔씩 이렇게 충동적이게 글쓰기에 몰입해버립니다

다시말해 저는 제 안에 있는 이미지를 문학적인 형태로 바꾸고 싶을 때가 종종 생겨서 그럴때마다 책상으로 가 그 이미지를 텍스트로 바꿉니다.

이렇게 쓰고 나면 어느정도 머릿속이 정돈되어 제가 쓴 글을 인쇄해서 서랍에 넣어둡니다.


제작업실에는 이렇게  소설로 쓰기 어려운아니 생생하게 살아있는 문장의 조각들을 담아두는 몇 개의 서랍이 있습니다. 그러다 어느날 갑자기 마치 시간이 지난후 발효라도 된 것처럼 혹은 포도가 와인이 되기 위해 익어가듯이 거의 소설로 쓰기 어려운종이 중 하나가 제작업실에서 숙성되기 시작합니다.

그럼, 저는 서랍에서 종이를 꺼내 이야기를 이어 쓰기 시작합니다. 방금 제가 읽은 문장은 제소설스푸트니크의 연인의 첫단락입니다 그시 점에서 그 문장은 더 이상 쓸모 없는 텍스트가 아니고 소설의 시작이 된 것입니다.

그렇게 제가 소설을 쓰기 시작하면서 이야기의 주인공은 스미레라는 젊은 여성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그녀에게는 그녀가 미치도록 사랑하는 연상의 여자가 있습니다. 라고 시작할 때 이정도로 쓰기 시작해서 그 뒤에 어떤 이야기나 사건이 도사리고 있을지 알지 못한 채 심지어 결말도 알지 못하고 글을 쓰기 시작합니다.

이야기는 거의 백지 상태에서 시작해서 작가적인 상상력과 직감 제 안에 깊이 쌓여 있던 것들이 표출되어 한장 한장 이야기는 빠르게 진행되어 나갑니다. 저는 이렇게 서랍 속에 있던 문장을 확장시켜야 할 이야기가 있다고 확신했고 이렇게 하나의 소설을 시작하기 위해서는 이런 서랍속의 문장들이 저에게 꼭 필요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또다른 장편소설 태엽감는새역시 태엽감는 새와 화요일의 여자들이라는 단편으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이 소설의 첫번째 문장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부엌에서 스파게티를 삶고 있을 때 전화가 걸려왔다. 나는 fm방송에서 흘러나오는 로시니의 도둑까치 서곡을 따라 휘파람을 불고 있었다. 스파게티를 삶기에 더없이 좋은 음악이었다.’


갑자기 영감을 받아 쓴 이 단락은 이렇게 써두고 역시 서랍 속으로 들어 갔습니다. 요컨대 비디오 카메라로 영상을 찍어두고 아카이브에 보관하기 전에 필요한 장면만을 편집해 보관하는 것처럼 잘 정리해서 보관했습니다.


사람들중에는 잠에서 깨기 전 꾸었던 꿈을 기억하고 기록해두는 습관을 가진 사람이 있는데 이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특별한 목적없이 나중에 그 단락은 잘 발효되어 단편소설태엽감는 새와 화요일의 여자들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저는 잡지에 이 단편을 기고 했고 단편모음짐에 포함되어 출간되었습니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난후 저는 이 단편을 매우 긴 장편소설태엽감는새 연대기로 발전시켰습니다


결론적으로 이렇게 짦은 단락은 이야기의 형태로 잡힌 뒤 오랜시간이 지나면 장편소설로 팽창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2단계 발효과정을 거쳤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런 종류의 일은 저에게 자주 발생합니다. 갑작스럽게 떠오른 생각은 짦은 문장으로 나타나 더 견고한 형태로 자리 잡힐 때까지 한 단계씩 자라나고 발전 해나가면서 화학반응을 일으킵니다. 저는 전체적인 과정을 주시하며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만들어내어 일련의 과정을 따라갑니다. 저에게 있어서 이야기는 자발적이어야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야기는 부자연스러워지게 되고 그렇게 되면 설득력이 떨어지게 됩니다. 그럼, 결국 독자의 마음을 움직 일수 없습니다.

위 이야기의 첫번째 문장과 관련해서 단편으로 출간했을 때 한 비평가로부터 꽤 거센 공격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는 첫 문장이 매우 비현실적인 상황이라며 일본 남자는 정오에 혼자 부엌에서 스파게티를 만들어 먹지 않아요.’ 이건 어디까지나 그의 의견입니다. 그런데 저는 종종 혼자서 스파게티를 요리 하는데 왜 그런지 정말 모르겠지만 스파게티 면이 거의 다 익어갈 때 쯤 전화가 울립니다. 진짜 입니다.

아무튼 전 이런 이야기를 좋아합니다. 전체 소설의 큰 그림을 염두 해두지 않고 자유롭게 이야기를 진행시킵니다. 이 소설이 어떻게 끝나게 될지 너무 궁금한 상태로 이야기를 써 나갑니다. 그리고 독자들도 그 결말을 찾기 위해 계속해서 한 페이지 한 페이지 읽어 나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작가가 처음부터 줄거리와 결말을 정했다면 소설을 쓰지 않아도 됩니다.

적어도 소설 쓰기란 저에게 이런 식으로 작동하고 있습니다. 글을 쓰면서 사다리 같은 어떤 논리 구조나 습관, 관습에 얽매여 소설을 완성해나가는 커다란 틀 속에 질서를 유지 해야하는 규칙에 제한 받지 않는 것이 전제가 되어야합니다.

왜 이렇게 작가에게 자유스러움이 필요할까요?

자유롭다라는 것은 작가 자신의 무의식의 영역에 접근하는 것이 더 쉬워서 처음부터 줄거리를 염두해두지 않고 제약없이 소설을 쓰는 방식이 대단히 큰 장점이 될 수 있습니다. 작가가 자신의 작품에 궁극적인 목표가 일반적으로 예술분야의 창작자들과 비슷해서 자신의 무의식 속으로 깊숙히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가장 안쪽 깊숙히 숨겨진 어두운 곳 무의식의 미로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마침내 당신은 당신 안에 있는 실제 이야기에 도달 할 수 있게 됩니다. 논리의 법칙에 따라 당신의 머릿속에 채워진 이야기가 아니라 마음속 깊은 곳에서 저절로 찾아낸 이야기 입니다.


솔직하게 말한다면 다른 사람과도 정신적으로 깊게 소통 할 수 있습니다. 이 놀랍고도 유일한 이야기가 바로 소설 속에 내재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완전히 혼자가 아닙니다. 바로 이점이 좋은 이야기 따뜻하면서도 차분한 자연스러운 공감대를 형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 저는 이모든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첫 소설을 쓰고 난 후 계속해서 작품을 하나 둘 써 나가면서 제 자신의 문학 스타일이 만들어졌습니다.

저는 작가가 소설을 쓸 때 자유스러움을 느끼는 것을 토대로 어느 시점에서 독자들과 폭넓은 공감을 형성 해나가는것이 필요한지 차츰 선명하고 구체적이게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앞서 첫번째 언급한 장편 스푸트니크의 연인을 보면 저는 회오리에 관한 짧은 단락을 쓰고 그종이를 서랍에 넣어두었습니다. 바로 그 순간부터 발효가 시작되어 그 회오리의 이미지를 제 의식속에 더 깊이 담기 시작해서 어느정도 수준에 도달할때까지 무의식의 심연속에서 시간이 지나면서 몇가지 여건들이 합쳐져 비옥한 보다 완전한 이야기의 성격을 띄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의식의 수면위로 올라오는데 전 바로 그 시기를 놓치지 않고 표면으로 올라와 떠다니는 것을 모아 소설의 형태로 전환 시킨 것입니다.

물론, 제가 서랍 속에 넣은 문장 종이가 모두 성공적으로 발효 되는 것은 아닙니다. 실제로 대부분은 서랍 속에 보관되어 잊혀진 채 극히 적은 부분만 건져 올려집니다. 그러나 어떤 종이가 사용될지 미리 알 수 없습니다. 어떤 종이가 건져올려질지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 모른 채 그저 어떤 단락이 올라온 결과만 저에게 오게 됩니다.

저는 기다릴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때 가장 중요한 것은 가능한 시간이 오래 흐르게 두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자연적인 반응이 일어나기 위해서 많은 시간이 필요하기도 해서 작품을 완성하기 까지 굉장한 인내심이 필요합니다.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이세상의 중요한 많은 일들도 그것을 이루기 까지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은 없습니다.

실제로 자유로운 느낌의 중요성을 알게 해준 것은 문학보다 더 자유롭다고 여겨지는 음악이 그 역활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저의 글이 재즈의 전형적인 즉흥연주에서 강한 영감을 얻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정해진 테마에서 시작하지만,연주자의 영감에 따라 연주는 무한하게 변주 됩니다

저는 어린시절부터 이런 재즈 음악을 들어서 글을 쓸 때도 똑같은 즐거움을 느끼고 싶다라는 강한 욕구가 있습니다 이것이 제가 음악으로부터 배운 핵심 사항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또다른 조건은 리듬입니다. 이야기를 계속해서 유지 해나갈 수 있는 리듬입니다. 때로는 단순하게 때로는 복잡하면서도 마법처럼 흔들릴 수도 있습니다. 리듬은 음악에서 만큼이나 소설에서도 필수적입니다. 리듬이 살아 있으면 스타일이 아름답고 이야기가 매력적이게 됩니다. 활기차게 잘 선택된 리듬이 없으면 대부분의 독자들이 페이지를 넘기고 싶지 않을것입니다.

글을 쓸 때는 항상 리듬의 중요성을 명심 해야합니다. 쓰고 있는 글에 맞는 리듬을 찾았다고 여겨지면 멈출 수 없이 계속해서 써 내려가게 됩니다.

마지막은 멜로디 입니다. 결국 멜로디가 독자의 마음에 깊은 인상을 남기게 됩니다. 소설로 치면 독자가 자발적으로 인용하거나 기억해두고 싶은 특별한 문장이 될 것 입니다. 독자에게 강렬한 감정을 불러 일으킬 수 있는 아름다운 구절입니다.

런데 이때부터는 결국 타고난 재능이라는 문제에 직면하게 됩니다. 아마도 멜로디를 작곡 할 수 있는 능력은 우리가 태어날때부터 가지고 태어난 것 일수도 있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멋진 멜로디를 작곡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모차르트와 슈베르트가 만든 경이로운 멜로디 모두 노력과 헌신의 결과라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내면에 숨어 있는 멜로디에 귀를 기울여 조심스럽게 시도해보면 상당수준의 재능을 끌어 올릴 수 있습니다. 시간이 걸리겠지만 시도해볼 가치는 충분히 있습니다. 즉흥연주, 리듬의 중요성, 아름다운 멜로디를 구성하는 이 세가지 조건을 음악에서 배웠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매일 음악과 함께 일했던 재즈바 시절이 아마 제가 소설가가 되기 위한 훌륭한 훈련이 였던 것입니다.최소한 음악은 저의 문학적 스타일을 형성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앞서 얘기 했듯이 저는 제 소설이 다른 작가들의 그것과 어떤 면에서 공통적인 부분을 찾을 수 있는지 잘 모릅니다. 제가 말할 수 있는 것은 각각의 작가들 마다 개인의 독특한 스타일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소설을 쓰는 표준적인 방법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사람마다 삶이 다르듯 작가마다 스타일이 달라지게 됩니다. 그리고 모든 문학적인 스타일의 근본에 발생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방금 얘기한 제 스타일을 찾기 위해 수행한 방법은 다른 작가들에게는 적용될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소설가는 자신만의 창작스타일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글을 쓴다는 행위 그자체의 기저에 놓인 공통 요소는 찾을 수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심플한 단어를 선택하는 것이 기본적인 이야기의 자신감이라고 생각합니다. 소설은 수세기에 걸쳐서 온갖 시련을 통해 발전해 왔습니다. 소설은 인류에게 꼭 필요한 형태의 표현 방식이며 우리 모두가 반드시 알아야할 표현 도구 입니다. 소설에 대해 이정도 깊이의 경외심이 없다면 독자의 마음속 깊은 곳까지 닿을 수 있는 책을 쓸 수 없을 것입니다.

소설의 기원, 즉 스토리 텔링은 인류가 동굴에 살았던 선사시대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눈을 감고 그 당시 생활을 상상해보십시오 해가 지면 주위는 어두워집니다. 문자 그대로 완전한 어둠입니다. 날카로운 송곳니와 발톱을 지닌 맹수들이 돌아다니는 위험한 장소에 모여있습니다. 그 짐승들을 피하기 위해 동료들과 함께 동굴로 들어나 피난처로 삼고 불을 피워 기나긴 밤을 서로를 의지하며 보내게 됩니다. 동굴 안에는 모닥불을 피워 놓습니다. 몸을 따뜻하게 해서 야생동물들이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합니다. 음식은 늘 부족해 굶주림으로 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이때 어느 순간 한남자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일반적으로 말을 시작하는 사람은 항상 같습니다. 그는 누구보다 말을 잘하는 법을 스스로 알고 있기에 주변 사람들은 주의 깊게 들으려고 귀를 기울입니다. 당시에는 여가라는 것이 없던 시대입니다. 그가 하는 이야기는 잠시라도 두려움과 굶주림을 잊게 해줍니다. 나레이터는 아마도 즉흥적으로 이야기를 진행해 나갈 것입니다.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이 그 이야기에 관여 하고 싶어져서 이따금씩 질문을 하거나 의견을 내기도 합니다.

그리고 나레이터가 그들의 반응에 따리 이야기 흐름을 조금씩 바꿔나가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어느 시점에서 이야기가 끝납니다. ‘그뒤에는 어떻게 돼?’ 라고 모두 묻습니다. 나레이터는 마지막 이야기를 들려주고 이야기는 그렇게 끝이 납니다

그리고 모두 잠을 청하면서 방금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리다가 잠이 듭니다. 아마 전 세계의 동굴에서 같은 장면이 반복되었을 것입니다. 유럽, 일본 ,아프리카,중동등 모든 곳에 비슷한 동굴과 어둠이 있었을 것이고 아마도 같은 종류의 이야기가 같은 방식으로 들려 졌을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소설의 형태로 표현 방식이 바뀌어 나가는 것이 수세기에 거쳐 형성되었을 것입니다. 구도로만 전해지던 이야기는 활자라는 기호를 사용해서 인쇄를 할 수 있는 이야기가 되었고 인쇄가 시작된 후 책이라는 출판물이 등장했습니다.

현재는 많은 사람들이 전자책 형식으로 화면을 통해 소설을 읽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소설이 접히는 도구로 변해왔더라도 기본적으로 동굴에서와 같은 이야기의 흐름을 따르는 구조는 변하지 않습니다.

우리 소설가는 동굴 속에 있던 이야기 꾼의 후손입니다. 길고 깊은 어둠, 작은 모닥불, 하나로 뭉쳐 있는 사람들, 짧은 시간 동안 두려움과 굶주림을 잊을 수 있는 이런 근본적인 환경은 지금까지도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물론 고대와 비교하면 지금 세상은 훨씬 더 밝은 곳이 되었습니다. 빛이 닿지 않는 곳이 거의 없어졌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도시의 밤은 빛으로 인해 밝아질 수 있지만 어둠은 항상 깊은 곳 에 존재 하고 있습니다. 스콧 피츠제럴드는 영혼의 진짜 어둠은 새벽3시에 온다.’라고 에세이에 썼습니다.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런 종류의 어둠입니다. 고대와 오늘날에는 이런 어둠을 밝힐수 있는 작은 모닥불이 항상 필요합니다

그건 아마도 소설만이 제공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모닥불을 염두해두고 40년 동안 중단 없이 계속해서 글을 썼습니다.

제가 쓴 이야기가 전세계 많은 곳에 있는 동굴 속 어두운 구석을 밝히는 것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다면 앞으로도 계속 그 역할을 할 수 있다면 더 이상 기쁜 일이 없을 것입니다.

이 자리에 오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lattes grinzane haruki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하루키 옹은 매년 노벨문학상 후보로 오르는 작가다. 그가 노벨상 까지 수상해버린다면 그야말로 전세계 중요 문학상은 싹쓸어담는 그야말로 작가로서  굉장히 성공(지금까지도 엄청나게 성공함)한 작가로 역사에 기록될것이다.(죽을때까지 그동안 벌어놓은 돈도 다못쓰고 죽을 만큼 ㅎ)

만약에 하루키가 조금더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아베놈을 비난하고 동일본 대지진으로 인해 사라져버린 생명들에 관한 글을 작품으로 남기거나 아니면 일본이 일으킨 전쟁에 대한 사죄를 담은 글을 인쇄로 길게 남긴다면( 우회적으로 빙 둘러서 몇몇 소설속에 일본군의 만행을 집어넣었지만) 내년 내후년, 하루키 옹  탄생 80주년에 받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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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리바바 2019-10-14 23: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읽다보니 좋은 얘기로 이루어진 수상소감이지만.....꼰대기질이 무지무지하게 느껴지는 이 무시무시한 길이......
문득 어릴때 운동장 땡볕에서 듣던 교장선생님의 훈화말씀이 떠오릅니다....좋고, 좋고, 좋은 말씀이나... 너무 좋고, 좋고, 또 좋고, 계속 좋아서 기억나는건 덥고, 다리아팠던 기억뿐....
애니웨이, 하루키옹께 축하를 전하고, 훌륭한 번역의 스콭님께 치하를!!! 짝짝짝짝짝~~~

scott 2019-10-15 09: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맞습니다 읽다보면 하루키옹은 글이 저절로 쓰여진것 같은 자부심 자찬이 확느껴져요 명예돈 다갖은 옹ㅎㅎ yaribaba 님 오늘도 해피해피^‘^
 

고양이를 버리다, 아버지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무라카미 하루키


물론이다. 나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많다. 태어나서 18살때 까지 집을 떠나기 전 그다지 크지 않은 집, 같은 지붕 아래서 살았으니까, 지금 떠올려봐도 그때의 기억이 생생하다. 대다수의 아이들과 부모들 사이처럼 내가 갖고 있는 아버지에 관한 추억은 좋은 것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것도 많이 있다. 하지만 이렇게 자연스러울 정도로 생생한 기억 중에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을 정도로 지극히 일상적인 기억이 있다.


가령, 그 중 떠오르는 기억 중 하나는 우리 가족이 니시노미야시의  슈쿠가와에 살았던 어느 날, 아버지와 함께 고양이를 버리러 해변가로 간 적이 있었다. 새끼 고양이가 아니라 나이가 든 암 고양이였는데 왜 그날 그 고양이를 버려야 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당시 우리 집에는 정원이 있는 단독 주택으로 고양이들이 지낼 수 있는 공간이 충분했다. 아마 고양이가 임신을 해서 부모님이 더 이상 데리고 있을 수 없다고 생각 했을 수도 있지만 지금 이 부분에 대해 정확하게 떠오르는 기억이 없다. 그때 당시 고양이를 길에 버리는 것은 흔한 일 이였고 주위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중성화 수술이 보편적으로 행해졌던 시기도 아니 였다. 그때 당시 나는 초등학교 저학년에 재학중으로 아마도 1955년 즈음이 이었을 것이다. 집 근처에는 미군의 폭격에 폐허가 된 은행건 물의 잔해가 남아있던 시절이었다. 아버지와 나는 여름날 오후 고양이를 버리기 위해 해변가로 갔다. 나는 고양이를 넣은 상자를 안고 자전거 뒤에 타고 아버지가 페달을 밞았다. 우리는 슈쿠가와 길을 따라 고로엔 해변가에 도착했다. 해변가의 나무들 사이에 상자를 두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으로 돌아왔다. 해변은 집에서 2킬로 정도 떨어져 있었다. 우리는 고양이에게 미안한 마음을 주고 받으며 집으로 돌아와 문을 여는 순간 방금 전 우리가 버렸던 고양이가 집에 돌아와 있었다.

고양이는 긴꼬리를 세우며 야옹하며 우리를 반겼다. 나는 순간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지, 당시 우리는 그 자리에 한동안 멍하게 서있었다. 잠시 후 아버지의 표정은 감탄으로 바뀌더니 이내 안도의 표정을 지으셨다. 그후 이 고양이는 다시 우리 가족으로 살게 되었다.

우리 집은 항상 고양이와 같이 살았고 우리가족 모두 고양이를 좋아했다. 형제 자매 없이 자라서 고양이와 책이 가장 좋은 친구였고 고양이와 함께 베란다에 앉아 햇볕을 쬐는 것을 좋아했다.

그때 당시 왜 우리가 고양이를 해변으로 데려가 버려야했는지 그순간 왜 나는 아버지에게 그 이유를 묻지 않았었는지에 대한 의문과 함께 버려졌던 고양이가 어떻게 다시 우리 집에 와 있었는지에 대한 확고한 답을 아직까지 알지 못한다


아버지와 또다른 기억 중 하나

아버지는 매일 아침 식사 전 집안에 있는 불단 앞에 앉아서 눈을 감고 불교 경전을 낭송 하셨다. 작은 원통형 유리 케이스 안에 아름다운 보살상이 조각된 불단 이었다. 왜 매일 아침 아버지는 규칙적으로 일반적인 불단이 아닌 유리 케이스 안에 있는 불단을 향해 경전을 낭송 하셨을까? 이의문에 대한 답을 아직까지 알지 못한다

어쨌든 이의식은 분명히 아버지에게 중요했던 의식이였고 하루의 시작을 의미했다.

내 기억에 아버지는 이런 의식을 단 하루도 거른 적이 없었다. 그 의식을 행하는데 방해하는 사람도 없었지만 이의식은 단순한 습관이라는 단어로 표현 할 수 없을 정도로 경전을 낭송 하는 순간 앞의 모든 행동 하나하나가 한곳으로 정신이 집중된 경건한 의식 같았다..

어렸을 때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누구를 위해 기도를 하고 있는지 물었던 적이 있었다. 아버지는 전쟁에서 죽은 사람들을 위해 기도 한다고 하셨다. 전장에서 죽은 동료 일본 군인과 당시 적국이였던 중국 군인을 의미했다. 아버지가 더 이상의 이야기를 해주지 않았고 나도 더 이상 그일에 대해 묻지 않았다. 그때 당시 내가 더 물어봤다면 아버지는 조금 더 얘기 해주었 을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묻지 않을 수밖에 없었던 그 순간의 분위기가 어떠했었는지 그때 느꼈던 감정은 기억하고 있다.

아버지의 아버지인 나의 조부 무라카미 벤시키는 아이치현의 농가에서 태어났다. 조부의 아들들과 마찬가지로 조부도 승려로 교육을 받기 위해 지역의 사찰로 보내졌고 조부는 꽤 신망 높은 승려가 되어 사찰의 견습을 마치고 난후 쿄토의 안요지 주지로 임명되었다. 이 사찰에는 대력 4-500명정도의 신도가 있었기에 꽤나 큰 규모의 사찰 주지 였을 것이다. 우리가족은 주로 오사카-고베 지역에서 살았기 때문에 조부가 주지로 있었던 교토 사찰에 방문할 기회가 거의 없었고 조부에 대한 기억도 거의 없다. 내가 기억하는 조부는 술을 매우 좋아했고 사찰 주지 였지만 상당히 자유로운 사고를 가졌던 분 이였다는 정도만 기억날뿐이다. 조부는  꽉 막혔던 사람이 아니 였는지 신도들로부터 유능하고 촉망 받는 승려로 인기가 많았다. 조부가 큰 목소리를 가진 카리스마가 넘쳤던 모습도 떠오른다.

조부에게 6명의 아들이 있었다. 하지만 슬프게도 1958825일 아침 70세의 나이에도 혈기 왕성했었지만 철길을 건너다가 열차에 치여 세상을 떠나셨다. 교토와 오프를 연결하는 케이신선, 히기시야마구 야마다초에 있는 무인 역사에 이날 아침 큰태풍이 이 지역을 통과하고 있었다. 비가 많이 내려 조부는 우산을 들은 채 철길을 향해 걸었 갔을 것이다.

그래서 굽이 굽이 곡선을 그리며 들어오는 열차가 시야에서 보이지 않았을 뿐더러 귀도 약간 어두웠터라 미처 피하지 못하셨다. 조부의 사망소식을 들은 날 서둘러서 교토로 가기 위해 준비를 하고 계신 아버지를 향해 어머니는 울부 짓는 목소리로 무슨 일이 있어도 당신이 사찰을 물려받는 것을 원치 않아요!’ 라고 애원하셨다. 당시 나는 9살이였지만 그때 당시 아버지와 어머니의 모습은 마치 흑백 영화 속에서 기억에 남았던 장면처럼 내 머릿속에 새겨져 있다. 아버지는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셨다. 아버지가 그때 굳은 결심을 하셨다는 것을 느꼈었던 것을 기억한다.

아버지는 1917121일 교토 사쿄쿠 아와타구치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소년이었을 때, 평화로왔던 다이쇼 시대가 저물고 우울한 대공황 시대와 함께 중일 전쟁, 2차 세계 대전의 비극으로 이어졌던 시대였다.  그후 아버지 세대가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쳤던 전후 초기의 혼돈과 가난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6명의 아들 중 3명은 중일전쟁에 징집되어 전투에 나섰고 기적적으로 심각한 부상없이 살아 돌아왔다. 6명의 아들 모두 조부의 직위를 물려 받을 자격을 갖추고 있었다, 모두 승려 교육을 받고 자랐는데 아버지는 사찰내에서  군대의 소위 정도의 지위에 해당하는 직책을 부여받았었다. 여름 오봉절 때마다 6명의 형제가  돌아가며 교토 사찰을 돌보고 난 후 밤이되면 모여서 술을 마셨다. 조부가 돌아가신 후 누가 사찰의 주지 역할을 물려 받을지 긴급한 회의가 있었다. 형제들 대부분 결혼을 했고 직업을 갖고 있었다.  어느 누구도 조부가 그렇게 일찍 돌아가시리라고는 생각하지 모했다. 장남인 무라카미 시메이 삼촌은 수위사가 되길 원했지만 전쟁이 끝난후 오사카의 세무서에서 계장으로 근무중 이였고 차남 이였던 아버지는 오사카 지역의 고요카쿠인 중학교에서 일본어를 가르치며 인근 불교 대학에서 공부를 계속 하고 있었다. 다른 형재들도 교사 였거나 불교 계통의 대학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다.형제 중 두명은 다른 가정으로 입양되어서 성이 다르다. 당시는 이런 경우가 흔했었다.

아무튼 한자리에 모두 모인 6형제는 조부의 사찰 지주 자리를 누가 이어받을지 논의 했지만 어느 누구도 지원하지 않았다. 교토내에서도 규모가 큰 사찰의 주지로 제사장직 까지 수행하는 주지의 자리를 이어간다는 것은 결코 쉽게 결정할 사안이 아니 였고 각자의 가족들에게도 큰 부담이 되는 자리였다. 게다가 조부의 아내인 할머니는 매우 엄격하셨던 분이어서 형제들의 아내 중 어느 누구도 시어머니와 함께 지내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6형제 모두 이점을 인지하고 있었다. 내 어머니는 오사카 센바에 있는 상인 집안의 장녀로 교토 사찰의 주지 아내가 되는 것에 대해 아버지에게 강력하게 항의 하며 눈물을 흘려 보일실 정도로 당시로서는 보기 드물게 자기 주장을 했던  당찬 여성이였다.

아들의 입장에서 볼 때 아버지는 가족에게 솔직할정도로 책임감을 갖고 계셨던 분 이였다. 아버지는 조부의 열정이 넘치는 카리스마를 물려 받지 못했지만(섬세할정도로 세심한) 상대방의 입장을 해아려서 타인의 마음에 상처를 주지 않았던 분이셨다. 아버지는 독실한 종교적 믿음을 갖고 계셔서 어쩌면 주지 자리를 훌륭하게 해내셨을 지도 모른다. 만약에 독신이셨다면 주지 자리를 물려 받는 것을 거부 하지 않았으리라 생각되지만 가족이 있었기에 차마 이어받겠다는 말을 하지 못하셨을 것이다.

결국 사찰의 주지 자리는 오사카 세무서에서 일했던 장남 무라카미 시메이 삼촌이었다.  그 삼촌의 아들 준이치도 주지 자리에 동의 했다. 삼촌은 장남으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갖고 주지 자리에 올라가셨다. 어쩌면 선택의 여지조차 없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당시로는 드물게 교토 내에 가장 큰 규모의 신도들을 이끌며 지역 내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사는 삶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실제로 큰삼촌의 아들들, 내사촌들은 후에 이 지역에 엄청난 권력을 행사하는 유지들이 되었다.)

어린 시절 아버지는 나라에 위치한 사찰에 보내져 승려 교육생으로 살았었다. 당시 나라 지역의 사찰 주지 가족으로 입양되기 전 단계의 교육이 였는데 아버지는 어떤 이유에서 인지 견습 생활만 마치고 다시 교토 집으로 돌아왔다. 가족들에 의하면 추위를 엄청 타서 건강에 문제가 생겨서라고 했지만 어쩌면 아버지는 사찰 생활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했을지 모른다. 집으로 돌아온 아버지는 주지였던 조부의 아들로 살게 되었지만 어린시절에 사찰에 보내졌던 경험이 정서적으로 깊은 상처로 남아버렸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언제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확신 할 수 없지만 아들로써 아버지로부터 느꼈던 그 슬픔의 감정은 느낄 수 있었다.


아버지와 내가 버렸던 고양이가 다시 집으로 돌아와 있었을 때의 아버지의 표정이 놀라움에서 뭉클한 감정으로 바뀌고 다시 안도하는 표정을 지으셨던 모습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이런 아버지의 표정은 그동안 살면서 단 한번도 본적이 없었다. 나는 평범한 가족의 외동아들로 온전한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 그렇기 때문에 누가 어떤 이유로 불가피한 사정 때문에 부모로부터 버림 받았을 때 어떤 상처를 받게 되는지 구체적으로 알지 못했고 이해하지 못했다.


어쩌면 이런 경우 일까? 프랑스의 영화 감독 트뤼포는 어린시절 부모로부터 버림을 받는 아픔을 가지고 성장해서 만드는 영화마다 버림을 당하는 상처에 관한 일관된 주제를 관통 시키고 있다. 이런 경험을 하지 못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절대로 이해하기 힘든 말로 표현하기 힘든 슬픈 경험이였을지 모른다.


아버지는 1936년 히사이야마 중학교(현재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8살 때 세이잔 단기 대학에 입학하셨다. 당시 대학에 재학중인 학생들은 일반적으로 병역의무를 4년동안 면제 받고 학업에 열중 할 수 있었지만 아버지는 누군가 행정서류상의 실수로 193820세가 되던 해 처음 징집되었다. 서류상의 오류였지만 군대 징집은 되돌릴 수 없었다. 군대의 명령은 무조건 따라야 했었던 것이다 .아버지는 16사단의 제20보병연대에 소속되었다. 여기까지가 지금까지 내가 아버지에 대해 알고 있는 것들 이였다. 그후 아버지의 과거에 대해 알면 알수록 그동안 내가 잘못 알고 있었던 부분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버지가 속해 있던 16사단 제20보병연대는 난징시가 함락된 후 최초로 난징에 도착해 대학살을 자행했던 부대다. 교토의 보병 연대는 비교적 온화하고 점잖은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특정 연대의 경우 놀라울 정도로 잔혹한 피의 부대라고 알려져 있었다. 오래전부터 나는 아버지가 교토의 보병연대에서 행해졌던 잔혹한 짓과 공격에 참여 했을 까봐 두려웠다. 그래서 세세한 상황에 대해 알아 내는 것을 스스로 외면해왔다. 아버지는 2008890세의 나이로 돌아가실때까지 보병연대에서 어떤 짓을 했었는지 절대 이야기 하시지 않으셨다. 아버지는 19388월에 처음 징집 되어 대대적인 학살이 발생했던 193712월이 지나 1년뒤에 군대에 징집 되었다. 나는 이 사실을 확인하고 난 후에 그동안 품고 있었던 마음속의 커다란 무게의 돌이 들려져 버린 것처럼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아버지가 소속되었던 수송 연대는 1938103일 우지나항에서 병력 수송선을 타고 106일 상하이에 도착한다. 그곳에서 20보병연대와 합류한다.


아버지는 군대에 징집되기 2년전 세이잔 단기 대학교에 입학하면서 하이쿠시의 매력을 발견하고 동아리에 가입한다. 아버지는 현대 관용구에 하이쿠를 적절하게 섞는 문장에 관심을 가지고 집중적으로 파고 들었다. 아버지가 군대에 있었던 시절에 쓴 몇몇의 하이쿠시들은 세이잔 단기 대학교의 하이쿠 잡지에 실리기도 했었다. 아마 아버지는 전장에서 학교로 하이쿠시를 적어 보냈을것이다. 나는 하이쿠 전문가가 아니라서 아버지가 쓴 하이쿠를 평가 할 수 없지만 전쟁터에서 떠올랐던 시구 속에 자신의 감정을 녹여 써 내려가며 현재 자신이 처했던 상황속에서 마음의 평정심을 잃지 않으시려고 노력하셨을지 모른다.

당시 하이쿠 저널에 실렸던 아버지의 하이쿠는


~울부짓는 새들이 모여서 어디론가 날아가고 있다.

분명 고향으로 향하겠지

여전히 승려가 되지 못한 군인은 두손으로 머리를 조아리며

달을 향해 기도한다.


아버지는 불교의 승려가 되기 위해 스스로의 양심을 걸고 홀로 수행하고 계셨었다. 하지만 사소한 행정상의 오류로 인해 군인이 되었고 혹독한 훈련을 거쳐 38소총을 지급 받고 병력 수송선에 몸을 싣고 잔혹한 피의 전투장으로 보내졌다. 아버지가 소속되었던 부대는 강렬하게 저항하는 중국의 게릴라 군대와 맞붙었지만 기세에 밀려 후방으로 계속 이동 해야 했다. 교토의 한적한 산속 커다란 사찰에서 살았던 삶에서 전혀 상상 할 수 없었던 것이였다. 아버지는 엄청난 정신적 충격과 혼란을 겪었을 것이다. 전쟁 속에서 하이쿠를 쓰면서 스스로를 위로 했을지 모른다. 전쟁에서 겪었던 모든 것을 지우려고 아니 살벌한 검열을 피하기 위해 하이쿠로 마음의 평정심을 유지 했을지 모른다.


아버지는 딱 한번 아버지가 소속된 부대에서 체포한 중국 군인을 어떻게 처형했는지 말씀하셨던 적이 있다. 언제 왜 그런 이야기를 했는지 모른다. 그때 당시 나는 초등학생으로 아주 오래전의 일이라 부분 부분 기억이 날 뿐이다.  중국인 포로는 자신이 처형 될 것을 알고 있었는지 어떤 저항도 하지 않고 두려움조차 내비치지 않은 채 조용히 눈을 감고 있었다고 한다. 처형을 당한 그 중국 군인에게 아버지는 어떤 존경의 감정을 품고 계셨던 것 같다. 아버지가 포로들을 처형할 때 직접 참여 했었는지 지켜보기만 했었는지 모른다 어쩌면 내 기억이 흐려졌거나 당시 아버지가 모호하게 말끝을 흘려버렸던 것 같다. 하지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이때 포로의 죽음이 아버지의 영혼 속에 오랫동안 고통의 감정을 남겼다.

아버지는 특별한 포로를 처형할 때 도검이 사용되었다고 말씀하셨다. 일본군이 도검으로 포로를 잔혹한 방법으로 난도질 했다는 것은 어린 나의 마음에도 깊은 충격을 받았다. 아버지가 겪었던 그 상처는 아들인 나에게까지 전해졌는데 아버지는 처형의 순간은 아들에게 이야기 하지 않으셨다. 자신의 살과 피를 물려받은 아들에게 어떤 말로도 충격과 상처를 주기 싫으셨을지 모른다.

하지만 분명히 이때의 이야기로 인해 아버지와 나는 오랫동안 고통의 상처를 남겼다.


1939820일 아버지가 소속되었던 부대가 일본으로 귀환하자 군인으로 1년을 복무한 아버지는 다시 세이잔 대학교에 복학했다. 당시 징집은 2년이였는데 아버지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1년만 복무했다. 아마도 첫 징집될 때 학생 신분이 였다는 사실을 군이 뒤늦게 적용 했을것이다. 다시 학교로 돌아온 아버지는 계속해서 하이쿠를 썼다.

1940년에 쓴 이 하이쿠는 아마도 히틀러 유겐트 조직이 일본을 방문했던 시기 인 것 같다

그들은 노래를 부른다

사슴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히틀러 유겐트

나는 개인적으로 이 하이쿠를 아주 좋아한다. 이 하이쿠는 역사에서 일어났던 순간을 흐릿하게 묘사하면서 미묘 할 정도로 특이한 방식으로 포착한다. 유럽의 잔혹했던 2차세계대전의 전선과 사슴 사이에 뚜렷한 의미가 있다. 일본을 잠시 방문했던 히틀러 유겐트는 곧 유럽 동부 전선에서 끔찍 할 정도로 쓰라린 패배의 아픔을 눈앞에 두고 있었으니까.

아버지가 쓴 이 하이쿠도 마음에 들었다.

기념일

이사(ISHA)의 죽음에 나는 이곳에 앉아

그의 슬픈 시를 쓰고 있다.


아버지는 문학을 사랑했다. 전쟁에서 돌아온 세상은 겉은 평온 했지만 사회 곳곳은 혼돈으로 술렁거렸다. 선생님이 된 이후 아버지는 실제로 많은 양의 책을 읽으셨다. 그래서 우리 집에는 책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내가 10대시절에 독서에 열정을 키웠던 것도 이런 집안의 분위기와도 맞물려 있을지 모른다. 아버지는 세이잔 단기 대학교에서 명예학위를 받고 졸업한 후 19413월 교토 제국대학 문학부에 입학했다. 승려가 되기 위해 불교 전문 교육을 받고 교토 제국 대학교 입학시험을 통과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 였을 것이다. 어머니는 이따금씩너의 아버지는 명석했어라고 말씀하셨지만 솔직히 나는 이런 것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자신 있는 분야에서 명석한 지능보다 날카로운 직관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아버지는 항상 학교에서 우수한 성적을 받으셨다. 아버지와 비교하면 나는  학교에서 하는 공부에 관심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항상 아버지 기대에 미치지 못했던 아들 이였다. 내가 관심있는 분야에만 몰입 했었고 그 어떤것에도 방해 받지 않을 정도의 집중력이 있었지만 학교 공부에서는 발휘하지 못했다. 이점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아들의 이런 모습이 아버지를 실망시켰다. 아버지는 항상 나를 볼 때 지난날 자신의 나이대와 비교 하셨다.

아마도 아버지는 평화로운 시대에 태어나셨다면 어떤 방해를 받지 않고 공부에만 집중 하셨을 것이다. 그래서 아들이 어째서 더 노력을 하지 않을까 라는 의구심을 가지셨을 것이고 자신이 전쟁에 참전해서 하지 못했었던 일을 아들인 내가 하길 바라셨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 할 수 없었고 그가 원하는 방식으로 공부에 집중 할 수 없었다 .학교 수업은 대부분 지루했고 시스템은 지나칠정도로 억압적 이였다. 나의 이런 학교생활에 아버지는 무의식적으로 불만을 가지셨다가 끝내 분노로 돌변하셨는데 나에게 큰 고통으로 이어졌었다.


30세가 되던 해 소설가로 데뷔하자 아버지는 정말로 기뻐하셨다. 그전까지만 해도 아버지와 나의 관계는 멀기만 했다. 아직까지도 나는 아버지를 실망시킨 아들이 였다는 감정이 남아 있다.

10대 시절에 아버지와의 불화로 인해 항상 집에서 불편한 마음으로 살았다. 하지만 이젠 그 마음이 죄책감으로 남겨져 버렸다. 자는 동안 거의 꿈을 꾸지 않지만 학교에서 시험을 볼 때 유독 한문제에 대한 답을 쓰지 못하는 악몽을 꾼 적이 있다. 제한된 시간 안에 답을 쓰지못하면 시험에 실패해서 낙제할지 모른다는 압박감에 식은 땀을 흘리며 깨어났다. 하지만 당시에 숙제를 하거나 시험에 나오는 문제를 풀어 좋은 성적을 얻는 것은 내가 좋아하는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듣거나 친구들과 운동을 하거나 마작을 하며 여자 친구들과 데이트를 하는 것보다 즐겁거나 매력적이지 않았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살고 있는 시대의 공기를 호흡하며 각자의 특별한 시간의 짐을 지고 한정된 범위 안에서 생활하는 것 내가 원했던 학교생활은 이러했다.


 아버지는 1941년 봄에 세이잔 대학을 졸업하고 그해 9월말에 특별 징집대상이 되었다. 103일 후쿠시마의 20보병연대 53사단의 일부인 53 수송연대에서 복무했다 .194016사단은 만주에 상주 하고 있었고 그와 중에 교토에서 새롭게 53사단이 창설되었다. 갑작스럽게 개편된 부대에 아버지는 징집되어서 무척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194453사단은 버마로 보내져 임팔에서 전투를 치뤘고 그해 12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와디강 전투에서 영국군에 전멸 당한 사단이다.

하지만 누구도 예상치 못하게 아버지는 19411130일 병역에서 풀려나 민간인 생활로 돌아 왔다. 아버지의 병역 해제 날이 1130일은 진주만 공격 시작 8일전이였다. 진주만 공격 후 일본 군대가 병력을 쉽게 소집하고 해제 했는지에 대해 의문이다. 아버지는 한 장교에 의해 소집해제가 되었는데 그때 당시 아버지 계급은 일병이 였다. 당시에 교토 제국 대학에서 공부 하고 있었던 아버지가 군인 생활보다 연구를 계속하는 것이 국가를 위해 더 봉사 할 수 있는 일인 것 같다는 어떤 고위관리에 명령에 아버지는 다시 민간인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인문학을 전공하고 있는 학생이 대학으로 돌아와 하이쿠 연구로 후에 국가에 무엇을 크게 봉사 할 수 있었을까? 아무튼 아버지는 군대에서 나와 다시 자유의 몸이 되셨다.

여기 까지가 내가 어린 시절에 들었던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이자 상세하게 기억하고 있는 부분이다. 그런데 후에 알게 된 사실과 일치 하지 않았다. 교토 제국 대학의 기록에 의하면 아버지는 194410월 문학부에 등록했다. 어쩌면 내 기억이 잘못되었거나 어머니의 이야기에서 어떤 한 단계가 생략 되었을지 모른다. 이제는 무엇이 사실이고 진실이 였는지 검증할 방법이 없다. 기록에 따르면 아버지는 194410월 교토 제국 대학의 문학부에 입학 해서 19479월에 졸업했다. 그러나 아버지가 23살에서 26살 사이 군대에서 나와 교토 제국 대학에 입학하기 까지 3년간 어디서 무엇을 했었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아버지가 두번째 군대 소집에서 풀려난 직후 미국의 참전으로 태평양에서 2차세계대전이 발발했다. 전쟁이 진행되는 동안 16사단과 53사단은 전멸했다. 아버지가 계속 군복무를 했었다면 전장에서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물론 나라는 존재도 이 세상에 없었을 것이다. 군동기 들이 죽어가는 동안 자신은 목숨을 부지 했다는 것에 대한 고통과 고뇌로 아버지가 매일 아침 불단 앞에서 경전을 낭송 했을 것이다.

1945612일 아버지는 세번째 징집 명령을 받는다. 이번에는 추부에 위치한 145군단의 일병으로 배치 받았다. 군단이 구체적으로 어디에 주둔 했는 모르지만 일본 내에서 근무 하셨다. 2달뒤인 815일 전쟁이 끝나고 1028일 아버지는 복무를 마치고 대학으로 돌아왔다.

 그의 나이 27세 였다. 19479월 아버지는 대학 시험을 통과 해서 교토 제국대학 문학 학사 학위를 받았다.

나는 19491월에 태어났다. 아버지는 결혼과 함께 아이가 생겼기 때문에 생계를 위해 대학원에 진학하는 것을 포기 하고 니시노미야 고요카쿠인에서 일본어 교사로 근무하셨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어떻게 만나 결혼하게 되었는지 자세히 모른다. 두분은 교토와 오사카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살았었는데 두 분을 알고 지냈던 지인들의 소개로 만났던 것 같다. 어머니는 음악 교사였던 남자와 결혼하려고 했지만 전쟁 중에 사망했다. 당시 외할아버지는 오사카 센바에 상점을 경영하고 계셨는데 미군의 폭격으로 전부 타버렸다. 어머니가 살고 있던 동네는 항상 그루먼 항공 모함의 전투기들이 점령하고 있어서 오사카 시내까지 나가려면 항상 목숨을 걸고 가야 하셨다.

전쟁은 어머니와 가족들 전체의 삶까지 큰 영향을 미쳤다.

올해 96세가 되신 어머니도 일본어 교사로 근무하셨다. 오사카에 있는 쇼인 여자대학의 문학부를 졸업한 어머니는 부속 카톨릭 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셨지만 결혼과 동시에 직장을 그만두셨다. 어머니 말에 의하면 아버지의 어린시절과 청춘시절동안 꽤 고단하고 거친 삶을 사셨다.

생애 처음 겪었던 전쟁의 체험으로 아버지는 자신의 삶이 때때로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아서 좌절을 많이 하셨다고 한다. 아버지는 가끔 술기운이 들어가면 학생들을 때리기도 했고 이따금씩 우울감에 사로 잡힐 때면 술독에 빠질 정도로 술을 퍼부어 마셨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이런 모습에 불평하셨지만 아버지로 인해 가족 모두가 불쾌한 일을 당했다는 기억은 없다.


객관적으로 말하면 아버지는 훌륭한 교사 였다. 아버지의 장례식장에 그의 제자들이 많이 찾아 온것을 보고 놀랐다. 제자들은 아버지에 대한 애정과 존경심을 품고 있었고 이들 중 상당수의 제자들 중에 의사가 된 분들은 암과 당뇨로 고생하셨던 아버지를 잘 돌봐 주기도 했다.

확실한 건 어머니도 뛰어난 교사이셨던 것 같다. 뱃속에 나를 갖고 전업주부가 된 이후에도 많은 학생들이 집에 찾아왔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부모님들이 교사 였다는 이유로  교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단 한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성장하면서 내 성격과 의지가 아버지의 뜻과 불일치 하고 있었다.


 우리는 둘다 서로에게 양보하지 않았고 허심탄회하게 서로의 생각을 터놓고 이야기 한적이 없었다. 상황은 점점 악화되어 결혼 후 재즈바를 경영하면서 아버지와 더욱 멀어졌다. 내가 전업 작가가 되었을 때 우리 부자 관계는 너무 복잡하게 꼬여서 모든 관계를 끊어 버렸다. 20년동안 서로 보지 않은 채 꼭 필요할 때만 이야기를 했다. 아버지와 나는 다른 시대에 태어나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은 수마일나 떨어져 있을정도로 달랐다. 어떤 시점에서 이런 불화를 극복하려고 노력해야 했지만 나는 작가라는 직업에 모든 노력을 쏟아 붓고 집중하며 살아 왔다.

나는 아버지가 세상을 뜨기전에서야 얼굴을 마주보고 얘기를 나누게 되었다. 내 나이는 거의 60세에 가까웠고 아버지는 정확히 90세가 되었을때다.

 교토의 니시진에 있는 병원에 입원하고 계셨던 아버지는 끔직할 정도로 심각한 당뇨에 시달리셨고 온몸에 암이 전이 되어 사람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황폐해진 육신이 되어 누워 계셨다. 언제나 아버지는 강한 남자 였던 것을 기억한다. 하지만 병상에 누운 90세의 야윈 모습을 한 환가가  나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 였다. 그곳 병실에서 아버지와 나는 남은 생애 며칠 동안 서로 어색한 대화를 나누며 화해의 길에 다다랐었다.


서로의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늙고 병들어 쇠약해진 아버지를 보면서 어떤 유대감을 느꼈다.

 나는 아직도 우리가 자전거를 타고 고로엔 해변으로 가서 줄무늬 고양이를 버리고 온 뒤, 다시 우리 집에 와있는 고양이와 마주했던 경험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때 당시 해변가에서 들오던 파도소리 와 소나무 사이로 불어오는 휘파람 같은 바람소리 솔향기를 기억하고 있다.

지금의 나라는 사람을 만든 이처럼 사소하지만 대수롭지 않았던 기억과 추억의 축적이 였을 지 모른다.


어린 시절 고양이와 관련된 기억이 하나 더 있다. 이 기억은 내 소설 중에 하나 썼었지만 실제로 일어났던 이 일을 이번 글에서 다시 꺼내 놓고 싶다.


우리 가족에게는 작은 흰 고양이가 있었다. 그당시 우리집에는 항상 고양이들이 들락거렸기 때문에 어떻게 오게 되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이 새끼 고양이의 털이 얼마나 이쁘고 사랑스러웠는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어느날 저녁 현관에 앉아 있었는데 갑자기 새끼고양이가 집 앞 정원의 큰소나무를 향해 달려가고있었다.

얼마나 용감하고 민첩하게 나무에 올라 갔는지 어떻게 새끼고양이가 날렵하게 트렁크를 넘어 소나무 위쪽까지 올라 갔는지 그 광경을 믿기 힘들었다. 잠시 후, 새끼고양이는 나무 위에서 도움을 구하듯이 애처롭게 울기 시작했다. 그 높이까지 쉽게 올라갔지만 다시 내려오는게 무서웠던 새끼 고양이였다.

나는 나무쪽으로 가서 새끼고양이가 있는 곳을 찾아보았지만 희미한 울음소리만 들렸다. 아버지한테 가서 고양이가 나무에 있다는 사실을 말했다. 당연히 아버지가 고양이를 찾을 방법을 알고 계실 줄 알았다. 그러나 아버지가 사다리를 놓고 올라가기에 새끼고양이는 사람의 손이 닿을 수 없는 아주 높은 곳 까지 올라가 있었다. 나도 아버지도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해가 질때까지 고양이 울음소리는 계속 들렸다. 마침내 날은 어두어졌다. 그 새끼고양이에게 무슨일이 일어났었는지 모른다. 다음날 아침 소나무로 갔을 때 더 이상 울음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나무 밑에서 고양이의 이름을 불러보았지만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어쩌면 고양이는 밤사이 어떻게 든 나무 아래로 내려와 어디론가 가버렸을지 모른다 아니면 도저히 내려올수 없어 나무 위에 체력을 전부 소진하다 지쳐 죽어가고 있을지 모른다. 나는 현관에 앉아 귀엽고 작은 발톱으로 자신의 삶을 살고 있던 하얀 고양이가 쪼그라들어 죽어가는 모습을 상상했다.


이때의 경험은 올라가는 것보다 내려가는 것이 훨씬 어렵다는 생생한 교훈을 가르쳐 주었다.

어떤 경우에도 고양이는 죽게 된다. 사람 일 경우에도 그렇게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명백하게 알게 되었다.


나는 평범한 사람의 평범한 아들이다.

 이렇게 평범한 기억을 세상 밖으로 꺼내 보이면서 아버지의 인생에서 일어났던 일 그리고 내 인생에서 일어났던 모든 것이 우연이 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이런 방식으로 삶을 살아간다. 사고와 사건을 통해 우연하게 일어난 일들을 현실에서 바라보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빗방울이 넒은 대지 위에 떨어지는 것을 상상해보자. 우리는 각자 무수한 빗방울중에서도 이름없는 빗방울 중 하나다. 확실한 개성을 가진 빗방울이지만 이런 한방울의 빗방울은 세상에서 어떤 것으로 대체 할 수 있는 존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하나의 빗방울속에는 그 자체로 내재된 감정과 기억하고 있는 것들, 개개인의 역사를 품고 있다. 그래서 개개인의 차별화된 모습을 계승하고 수행해야할 의무가 있다. 다른 빗방울 속에 흡수되어 개성을 잃어가고 어떤 자연 속에 흡수 되어버린다 해도 개개인의 개성과 자유를 잃어버리면 안된다. 더큰 자연 바다로 나갈 수 있기에 더더욱 개인의 가치와 존재를 잃어버려서는 안된다.


나는 가끔씩 내가 살았던 슈쿠가와 집 정원에 있던 소나무로 돌아간다. 그때 작은 새끼고양이가 여전히 소나무 가지 위에 백골이 되어 나뭇가지에 들러붙어 버렸 을지 모른다는 상상을 한다.

그리고 나는 죽음에 대해 생각한다.

그러니 높은 곳에서 다시 아래로 내려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2019 10 new yorker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작년 2018년 7월 문학계 잡지에 새로운 단편 세개가 실렸었다.(9월호에는 롱인터뷰가 실림)에 실렸었다 

 '고양이를 버리다, 아버지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2019년 6월호 문예 춘추에 실렸던 에세이다.

이번 10월호 첫째주 미국 뉴요커 잡지에 가브리엘 번역으로 하루키의 이 에세이가 실렸다. (일본어와 영어판을 비교하며 번역했지만 생략되었거나 의미가 이상하거나 잘려져나간 부분이 있을지 모른다. 발번역 ㅜ.ㅜ)


1949년생인 하루키는 이제 슬슬 자신의 삶을 정리하고 있는 것 같다. 그동안 수집했던 레코드 판들과 원고들 소장 했던 책들을 자신이 다녔던 모교에 기증하고 있고 조금씩 발표하고 있는 단편들의 작품 배경은 태엽을 감는새-해변의 카프카의 변주곡 소품같은 작품을 쓰고 있다. 

장편 2편 단편 10여편 에세이 2-3편 정도 쓰고 나면 하루키는 자신의 삶을 꽉 차게 살다 갈 것 같다.

그동안 꾸준하게 성실하게 번역했던 피츠 젤럴드-트루먼 카포티-샐린저-레이몬드 카버-챈들러 전작품을 번역했고(현제 존치버 단편작품을 번역하고 있음) 앞으로 어떤 책을 더 번역할지 모르지만 남은 생애 동안 이렇게 자신의 기억 속에 저장되었던 사람들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쓰며 내려올 곳 작가로써의 삶,인간으로서의 삶의 마무리 작업에 들어간것 같다.


무라카미 하루키
작가(러너)
1949~20**
적어도 끝까지 걷지 않았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하루키의 글을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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