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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나 바우쉬 - 끝나지 않을 몸짓 ㅣ 현대 예술의 거장
마리온 마이어 지음, 이준서 옮김 / 을유문화사 / 2023년 4월
평점 :
20세기 현대 무용에 노래와 연기, 대사를 집어 넣으며 무대 예술의 혁명을 일으킨 피나 바우쉬는 2009년 6월 30일, 암 진단을 받은 지 단 5일 만에 세상을 떠났다.

어느 누구도 그녀의 죽음을 예상하지 못했다.
그녀는 암 진단을 받기 5일전 2009년 6월 25일, 부퍼탈 오페라 하우스에서 공연 될 새로운 작품인 앙상블 무대를 준비 하고 있었다.
그날 무대 위에서 관객들을 향해 부드러운 미소로 건넸던 피나 바우쉬는 어느 누구에게도 작별 조차 하지 못한 채 눈을 감았다.
예순 여덟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천재적인 무용가 피나 바우쉬를 위해 부퍼탈 시민들은 오페라 하우스 앞에 꽃을 놓고 촛불을 켰다.
그녀의 무용단 탄츠테아터는 묵묵히 예정된 폴란드 초청 공연을 떠났다.
피나 바우쉬가 서른 여섯 해 동안 탄츠테아터를 이끄는 동안 그녀가 창작한 춤의 언어는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
매년 새로운 작품을 선 보였던 피나 바우쉬는 사생활도 없이 오로지 연습, 안무 구상, 공연, 투어로 이어지는 삶을 살다 갔다.

1913년 5월 29일, 파리의 샹젤리제 극장에서 처음 초연 되었던 이고르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 은 음악의 시작과 함께 무대 위에 무용수들이 등장 하자마자 관객들은 큰 충격에 빠졌다.
62년의 세월이 흐른 후 1975년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이 부퍼탈 탄츠테아터의 공연으로 새롭게 탄생한다.

무대 바닥에 토탄이 두텁게 뿌려져 있는 땅 위에서 붉은 옷을 입은 무용수들은 무자비 할 정도로 난폭한 감정을 드러내며 서로를 탐닉한다.
각자가 선택한 여성과 남성은 죽일 태세로 서로를 쫓아 다니며 땀과 눈물로 범벅이 된 채 광폭의 움직임으로 무대 전체를 뒤흔들어버린다.
탄츠테아터가 평단과 관중에 인정 받게 된지 4년 만에 피나 바우쉬는 앞선 작품들의 고정된 고전적인 몸짓을 전부 털어 내버리고 확고한 스토리도 음악도 무대 디자인도 없는 모호한 무용수들의 몸짓을 통해 시적인 이미지, 현대인들의 자화상을 무대에서 펼쳐 보인다.
'바우쉬는 자기 자신, 무용수, 관객을 용서하지 않는다. 그녀는 자신의 예술로 마법을 걸 줄 안다. 이것은 이미 오래전 부터 더 이상 독일 무대에 없었다. 피나 바우쉬는 연극의 모든 부문으로 돌격해서 이를 밀쳐 넘어뜨린다.'
아잇적에 우리는 숨박꼭질 놀이를 했지.
너 우리 놀이 아직 기억하니
모두 숨고, 한 아이는 기다려야만 하지
나무나 벽에 얼굴을 대고
손은 눈 위에, 마지막 아이가
자리를 발견할 때까지, 그리고 눈에 띄는 아이는
술래랑 경주를 해야만 하지
걔가 먼저 나무에 가 서면, 걔는 자유고
그렇지 않으면 걔는 그 자리에 서 있어야만 하지
마치 나무나 벽을 손바닥으로 치는 게
그 아이를 묘석처럼 땅에 못 박기라도 한 듯이.
그 아이는 마지막 아이가 발견되기 전까지는
움직이면 안 돼, 그리고 이따금 마지막 아이가
너무 잘 숨은 통에 발견되지 않기도 하지.
그러면 돌처럼 굳어 거기 서 있는 아이들 모두,
각자 자기 자신의 기념비가 되어, 마지막 아이를 기다리지.
그리고 이따금 한 아이가 죽는 일이 생기기도 해
그리고 개가 숨은 곳은 발견되지 않고, 그 어떤
배고픔도 열외로 그 아이를 발견한
죽음에서 그 아이를 끌어내지 못하지
망자들은 더 이상 배고픔이 없으니,
그러면 부활은 취소되고, 술래는
모든 돌을 네 번 씩 들춰 보았지.
-하이네 밀러의 극작품 <시멘트> 중에서

나는 피나 바우쉬가 안무한 글루크의 오페라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를 본 이후로 <봄의 제전>, <반도네온>,<왈츠>, <카네이션>,<창문 닦이>, <콘탁트호프-14세 이상 신사숙녀>,<물>. <천지>,<러프 컷>,<보름달>,<대나무 블루스>, <....돌에 낀 이끼처럼, 아, 그렇게, 그렇게, 그렇게....>작품을 차례 차례 보는 동안 그녀가 무대에서 보여 주는 춤의 언어의 공통된 스타일을 알게 되었다.

피나 바우쉬가 안무 한 무대 위의 무용수들은 연극적인 요소를 도입해서 노래 하고 대화하며 관중들을 향해 질문을 던진다.
무대에서 무용수들이 광란의 몸짓을 하는 동안 관중들은 무대 디자인이나 음악 따위는 눈과 귀에 들어 오지 않는다.
무용수들의 몸짓을 통해 덧없는 사랑과 행복의 쓴 맛을 느끼며 산산 조각 나버린 청춘 그리고 망상의 현실을 마주 하게 된다.
무용수들은 서로에게 달려 들고 멸시하고 괴롭히며 밀치다가 무대 위를 두 다리와 두 손으로 기어 다닌다.
허공 속에서 광란의 몸부림을 치던 이들은 울고 웃고 노래하다가 무대 뒤로 사라져 버린다.
관중들은 도대체 이런 춤을 통해 무엇을 느끼고 보았을까?
<그가 그녀의 손을 잡아 성 안으로 이끌고, 다른 사람들이 뒤따른다>라는 작품을 초연 할 당시 이 무대를 본 관객들 모두 폭발해 버렸다.

셰익스피어의 <맥베스>의 한 대사를 인용한 이 무대에서 무용수들은 아무 움직임 없이 바닥에 누운 채, 마치 악몽을 꾸기라도 한 듯, 움찔 거리기 만 한다.
야유를 내지르는 관객들을 향해 피나 바우쉬는 이렇게 외쳤다.
'보고 싶지 않거든 집에나 가시고 우리가 작업 할 수 있게 내버려 두세요.'
안무의 틀을 벗어 던진 이 무대는 시간이 서서히 흐르면서 무대 전체에 물을 퍼붓고 꽃가루를 뿌리고 와인 잔을 부딪치며 담배 연기가 피어 오른다.

도대체 춤은 무엇을 보여줘야 하고, 관객은 어떤 시선과 태도로 바라 봐야 할까?
'최상의 표현 방식은 노래일 수도 있고, 문장이나 장면일 수도 있습니다. 아무 상관 없어요. 모든 게 가능하답니다.'-피나 바우쉬
피나 바우쉬는 끈질길 정도로 자신이 창작한 춤의 언어를 밀고 나가며 관객들이 스스로 무언가 발견하기를 원했다.
이는 관객들에게만 해당 되는 것이 아니라 피나 바우쉬가 이끄는 탄츠테아터에 소속된 무용수들에게도 적용 되었다.
'그녀의 안무에는 확실함이란 없습니다. 제가 무언가 시작하면 그것이 우리를 어디로 데려 갈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무대에서 춤을 추다 보면 두려움이 밀려 들다가 환희로 가득 차 오르다가 돌연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춤을 추고 있다는 건 내 안의 그 무언가를 찾고 있다는 희망이 있기 때문이겠죠.'
피나 바우쉬는 무용수들을 선발 할 때 나이, 국적, 소속되었던 학교, 무용 단체에 대해 묻지 않았고 키와 몸무게도 상관이 없었다.
대신 굉장히 정확한, 폐부를 찌르는 질문을 하는데, 그 질문에 대한 답을 하기 위해서는 가능한 많은 시간 동안 무대 위에서 춤을 추며 자신 안에 있는 그 무언가를 찾아내야 한다.
이런 질문들은 한 작품을 공연 하고 나면 약 백 오십 개 정도 쌓이는데 어제 공연 했던 동작이 오늘 공연에서 취소 되고 전혀 다른 동작으로 뻗어 나가면서 세세한 걸 발견하고 조합하고 그러다 폐기 하면서 미세한 물의 파동처럼 비로소 하나의 작품이 완성된다.
[나는 절대로 앞에서 부터 시작하지 않습니다. 앞에서 뒤로 작업하는 것이 아니라 작은 부분들을 가지고 작업했어요. 그것들은 서서히 커지고 조합되고 밖으로 자라나죠. 저는 절대로 백 퍼센트 만족 했던 적이 없을 정도로 끔찍하게 철저하게 모든 걸 뒤집고 또 뒤집어버립니다.]
1975년부터 1980년 까지 피나 바우쉬가 안무 한 모든 무대를 직접 구상하고 디자인한 롤프 보르칙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창조적인 무대로 피나 바우쉬의 무용 언어를 확립 시키며 춤의 이미지를 입체적으로 펼쳐 보였다.
피나 바우쉬의 작품에는 리듬과 타이밍, 대조의 삼 박자가 정교한 콜라주 처럼 맞물리는데 앙상블 장면에서 독무가 뒤이어 나오다가 분주한 몸 놀림의 무용수들의 춤 사위 뒤로 대화가 오고 간다.
무용수들이 무대 위를 종횡무진 하며 뛰어다니는 동안 관객들은 자신의 유년기, 청년기, 노년기로 이어지는 삶의 환희와 고통을 골고루 맛보게 된다.
귀에 익숙하지 않은 낯선 음악과 함께 곳곳에서 터져 나오는 아우성 소리가 몸짓의 언어와 부딪치는 순간, 무대 위의 세상은 섬뜻할 정도로 두려우면서 위협적이다.
이런 춤, 이런 공연을 보고 나면 한 동안 몸 속 전체에서 끌어 오르는 감정의 소용돌이로 인해 이따금씩 악몽을 꾸게 된다.
불편한 장면, 불길한 미소, 우스꽝스러운 몸짓을 보여주는 피나 바우쉬는 관객들에게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일까?
'생존자들에게는 한순간이 있다. 붕괴 직전인 건물들 사이, 외줄 위에서 그들은 축제를 즐긴다. 안무는 죽음의 무도의 전통 안에 있다.'-미셸 푸코
몽환적인 아름다움, 꿈 속 같은 편안함, 동화 속의 행복한 결말을 폐기 처분 해 버린 피나 바우쉬는 차갑게 고통 받고 있는 인간의 심장 속을 파헤쳐 보이며 끔찍한 인간의 숙명과 원초적인 욕망의 불기운을 관객들에게 보여 주었다.
'나는 사람들이 어떻게 움직이느냐가 아니라, 무엇이 그들을 움직이게 만드는가에 더 관심이 있다.'
인간은 무엇에 기뻐하며 웃고 울며 살아갈까?

1984년에 초연된 작품 <산에서 통곡 소리 들리나니>는 마태 복음 2장 18절의 구절로 흙바닥을 누비는 무용수들은 안개에 휩싸인 채 앞을 보지 못해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다.
무대 곳곳에서 풍선들이 터지고 수영모에 수영복을 입고 고무장갑을 낀 이들의 흉칙한 모습이 보인다.
남자는 여자를 때리고 여자는 다른 여자의 머리 채를 잡아 당긴다. 서로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동안 무용수들 몸 곳곳은 멍 투성이가 되면서 어느 덧 이들의 머리카락은 회색빛으로 변하며 노인의 모습이 된다.
마지막 무대 하늘 위에 둥그렇게 뜬 종이 달을 향해 한 노인이 숨 가픈 목소리로 이렇게 외친다.
'여보세요'

그녀가 단독 안무 한 마지막 작품 <....돌에 낀 이끼처럼, 아, 그렇게, 그렇게, 그렇게....> 무대는 어떤 이미지도 없고 최소한의 소도구들만 등장한다.
끝없이 펼쳐진 소금 풍경들은 소름 끼칠 정도로 관객들 시선에 차가운 빛으로 일렁 거린다.
'아름다운 것들은 뭔가 움직임과 연관되어 있다니, 희한하죠.'
그녀의 춤의 언어에는 엄마가 아이에게 스프를 떠 먹이고, 두 연인은 다정하게 서로의 생일을 축하하며 케이크에 꽂혀 있는 촛불을 끄고 노년의 부부는 다정하게 서로의 손을 맞 잡고 침대에 누워 있다.
그녀는 자신의 작품에 어떤 제목도 달고 싶어 하지 않은 채 매년 새로운 작품을 작업 하며 서로 다른 언어를 구사하는 나라와 협업을 하며 연습-공연- 투어에 자신의 모든 걸 쏟아 부었다.
그녀는 세상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상을 수상하며 전 세계 곳곳을 누비며 자신이 창작한 무용 언어를 전파 했고 찬사와 비판을 한 몸에 받으며 때로는 부드러우면서 고집스러웠고 과격할 정도로 엄격할 정도로 어떤 부담감이나 요구도 견뎌냈다.

'나는 지칠 겨를이 없습니다. 경험하고 배우고 싶은 것이 너무 많아요. 어제 보다 더 많은 곳을 보며 더 많이 배우고 싶습니다. 인생은 너무 빨리 지나가 버린답니다
.-피나 바우쉬(1940-20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