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18세부터 20여년 간을 두고 어지간히 남의 입에 오르내렸다. 즉 우등 1등 졸업 사건, M과의 연애 사건, 그와 사별 후 발광 사건, 다시 K와 연애 사건, 결혼 사건, 외교관 부인으로서의 활약 사건, 황옥 사건(영화 ‘밀정’ 내용), 구미 만유 사건, 이혼 사건, 이혼 고백장 발표 사건, 고소 사건. 이렇게 별별 것을 다 겪었다.]

-나혜석의 이혼고백서 ‘삼천리’1934 중에서


1934년 일제 식민지 아래 오로지 남성의 권리와 욕망만이 허용되었던 시대에 여성의 권리와 욕망을 외치며 만 천하에 자신의 이혼장을 공개한 여성이 있었다.


진명 여고 수석 졸업, 조선 최초 동경 여자 미술학교 유학생, 최초의 여류 화가 나혜석, 그녀는 평생 동안 아버지, 남편, 아들 세 남성의 말에 복종 해야 한다는 ‘삼종지도(三從之道)’를 찢어버렸다.

그녀는 잡지 기고를 통해 여성도 가정 운영의 주체적 존재로, ‘현명한 어머니와 훌륭한 부인(婦人)’이 되어야 하며, 이를 위해 교육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을 펼쳤던 나이는 불과 18살로 일본 유학생 잡지 ‘학지광’ 논설에 ‘현모양처론’이란 여성의 역할을 가정 안에 묶어 두는 새로운 굴레라고 비판하는  기고문을 실었다.


“탐험하는 자가 없으면 그 길을 영원히 못 갈 것이오. 우리가 욕심을 내지 아니하면 우리 자손들을 무엇을 주어 살리 잔 말이오? 우리가 비난을 받지 아니하면 우리의 역사를 무엇으로 꾸미 잔 말이오?”(‘학지광’, 1917년 7월)


그녀는 아버지가 어서 빨리 한 살이라도 어린 나이에 시집을 가라는 명령을 내렸지만 유학을 마치자마자 고국에서 일어난 3·1 운동을 주도하다가 5개월 동안 감옥살이를 한다.

동경 유학 시절 시인이었던 최승구와 불같은 사랑을 하며 그가 폐병으로 죽은 후에도 나혜석은 첫 사랑이였던 시인 최승구를 잊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감옥에서 출소 후 6년 동안 자신에게 구애 했던  오빠의 친구 김우영과 결혼식을 올린다.


그녀는 결혼 전 김우영에게 조건으로 첫사랑 최승구 시인의 묘비를 세워 달라고 했고 김우영은 나혜석의 조건을 받아들여 신혼여행 중 최승구 시인의 묘에 들러 묘비를 세워 주었다. 그리고 거의 1년 동안 신혼 여행 차 떠난 유럽 여행에서 나혜석은 민족 대표 33인 중 한 명이였던 최린을 만나 사랑에 빠진다.


“나에게 정조(貞操)는 도덕도 법률도 아무 것도 아니요 오직 취미다”


1934년 조선 사회 전체는 그녀의 이런 주장에 발칵 뒤집혔고 부인을 여러 명 거느리고 살았던 남성들, 혼외정사를 즐기고 있던 남성들은 힘을 모아 사회에서 인간 <나혜석>을 매장 시켜 버렸다.


“여자도 사람이며 여자도 인권이 있다.”


아니다, 인간 <나혜석>은 1930년대 한 사회의 인간도 아니 였고 인권 조차 없었다. 

그 시대 모든 여성은 이를 자신들의 성별이 여성으로 태어났기 때문이기에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1928년 10월 영국 캠브리지의 뉴넘 대학 강연장에 선 작가 버지니아 울프 는 시대가 얼마나 여성들을 차별 하고 있는지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가상의 누이를 중심 인물로 삼은 풍자적인 에세이를 발표한다.

윌리엄 셰익스피어에게 그에 못지 않은 재능을 타고난 누이가 있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이름은 주디스라고 정할까요. 그녀는 셰익스피어 만큼 모험심이 강하고 상상력이 풍부하고 세상을 보고 싶어 했습니다. 하지만 부모가 학교에 보내지 않았지요. 주디스는 가끔 책을, 아마 셰익스피어의 책을 들고 몇 페이지 읽었을 겁니다. 하지만 그러면 부모가 들어와 책과 신문을 들고 빈둥대지 말고 양말을 깁거나 스튜를 살피라고 말합니다. 어쩌면 그녀는 사과 창고에서 몰래 몇 페이지 끄적 였다가 조심스럽게 감추거나 불태웠겠지요. ]

                                                                   -버지니아 울프 <자기만의 방>중에서 


주디스 셰익스피어는 글쓰기와 운율에 타고난 감수성, 세련된 연극 취향을 지닌 호기심 많은 소녀다. 오빠 윌리엄 셰익스피어가 로마의 위대한 작가 베르길리우스 오비디우스 ,호라티우스를 밤낮으로 탐독 하는 동안 여동생 주디스는 학교를 다니지 못한 채 제대로된 교육을 받지 못한다.하지만 기회를 박탈 당해도 주디스는 뛰어난 호기심으로 오빠의 책을 몰래 몰래 읽으면서 홀로 거리를 활보 할 수 있는 자유를 꿈꾸며 극장에서 연기를 하거나 연극을 연출하며 작곡을 할 수 있는 세상을 꿈꿨다.

부모는 다른 집 여자 아이들과 다른 딸 주디스에게 쓸데없이 책을 그만 읽고 양말을 꿰매거나 스튜가 끓는 것을 지켜보라며 윽박 지른다.

이웃집 양모업자의 아들과 약혼 시키려는 부모로부터 도망쳐서 배우가 되겠다는 꿈을 이루기 위해 런던으로 나간 주디스, 그곳에서 극작가, 소설가,배우,제작에 종사하는 수많은 남성 예술가를 만나게 된다.

하지만 주디스는 모든 남성들에게 꿈과 희망까지 조롱 당한다.

연극 배우 출신 매니저에 보살핌을 받으며 극작가의 꿈에 한 발자국씩 나아가던 주디스 , 어느 날 임신 사실을 알게 된다. 런던 빈민가에 홀로 남겨진 주디스,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린다. 

런던의 음울한 십자로에 묻혀버린 주디스 셰익스피어

 누가 그녀의 꿈을 삶을 짓밟았는가?

예술을 하고 싶어 붓을 들거나 작품을 쓰고 싶어 펜을 들었던 여성은 창부 소리를 들었고 ,마녀, 귀신 들린 여자라며 사회에서 매장 당했다.


[펜은 음경의 은유 일까? 제러드 맨리 홉킨스는 그렇다고 생각 했던 것 같다. 1886년 친구 R.W. 딕슨에게 보낸 편지에서 홉킨스는 자기 시론의 중요한 특징을 고백했다. 예술가가 지녀야 할 '가장 기본적인 자질은 대가 다운 기술이다. 이 기술은 남자에게 타고난 재능이랄 수 있어서 이 특징이 특히 남자와 여자를 구분해준다. 운문으로 든 다른 어떤 형식으로든 종이 위에 생각을 낳는 것은 남자다.' ]

-샌드라 길버트, 수전 구바 <다락방의 미친여자> 중에서 


창조적 재능은 오로지 남자에게만 있다고 주장했던 시대에 붓과 펜은 어떤 의미에서 음경이였다.

영국 역사 속에서 여성이 예술가로 살아가려면 죽거나 미쳐 버릴 수밖에 없었다. 

자기만의 방이 없었고, 부유한 귀부인들에 대한 적대감을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다. 

버지니아 울프는 여성이 작가로 살아가기 위해서 ‘500파운드와 자기만의 방’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가 여러분들에게 돈을 벌고 자기만의 방을 가지기를 권할 때, 나는 여러분이 리얼리티에 직면하여 활기 넘치는 삶을 영위하라고 조언하는 겁니다.”


이것만이 ‘여성 작가’가 아닌 ‘작가’로 살아갈 수 있는 힘이라고 믿었던 버지니아 울프가 살았던 시대에 영국은 1918년에서 야 30세 이상의 여성에게 참정권을 부여했지만 중간 계층에 한정 되었던 반쪽 짜리 권한이 였다.


1920년 나혜석은 잡지 "신여자'에 한 장의 판화를 실었다.

나혜석, ‘저것이 무엇인고’(1920). 

판화 속 여성은 파마 머리에 롱코트를 걸친 채 한 손에 바이올린을 들고 길을 걷고 있다.

그녀 뒤에 선 두루마기를 걸친 두 노인이 그녀를 향해 손가락질을 하며 ‘저것이 무엇인고’ 외치고 그녀 앞을 지나가는 멋쟁이 남성은 저기서 '저것'이라고 손가락질을 당하고 있는 그녀의 얼굴을 확인하듯 응시하고 있다.

저 판화 속 두루마기를 걸친 남성들이 '저것'이라고 손가락질을 한 여성이 수원에서 부와 명예를 거머쥔 ‘나 참판댁’으로 불리며 수원 지역 대대로 군수를 역임한 가문의 2남 3녀 중 둘째 딸로, 집안 하인들에게 ‘아기(兒只)’씨로 불리고 있었다는 걸 알았다면 혀 끝을 차며 손가락질을 했을까?

가문의 명예를 위해  세상에 순응하며 살았다면 인간 <나혜석>은 평생 아기씨로 불리며 부유한 변호사의 아내로 집안에서 남편의 전 처가 낳은 아이들과 자신의 아이들을 양육하며 시모를 부양하는 조선 시대 '참되고 올바른 '여성으로 역사에 기록되었을 것이다.


결혼한 이듬해 나혜석은 만삭의 몸으로 경성 일보사 내청각에서 대규모 유화 개인전을 열며 단 한 순간도 편안하게 앉아 본 적 없이 작품 활동과 글쓰기 그리고 육아와 살림을 해냈다.


1921년 남편 김우영이 일본 외무성 관리가 되어 만주 안동현 일본 주재 총영사 부영사로 발령 받자 나혜석은 부임지를 따라 가서 자녀들을 양육하는 엄마로 매년 조선 미술 전람회에 작품을 출품하는 화가로 만주 안동현에서 여자 야학을 운영하는 교육자로 그리고 시대의 억압에서 여성들을 해방 시키기 위해 소설과 시를 꾸준히 발표했다.

1923년 의열단의 ‘황옥 사건’이 터지자 그녀는 무기를 감추어주고 의열 단원을 자신의 집에 숨겨 주었던 독립 운동 조력자이기도 했다.

집 밖으로 그리고 사회 전체에서 여성의 목소리를 내지 못하게 했던 시대에 나혜석은 전통적인 가부장적 질서, 남성의 욕망만이 인정되는 시대에 여성의 욕망을 몸으로 실천하고 글을 통해 세상을 향해 발언했지만 사회에서 고발 당하고 정조를 유린한 댓가를 보상하라는 소송을 당한 인간 <나혜석>은 세상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 받으며 가족으로부터 버림받는다.

1933년경 나혜석은 손을 떨기 시작 하더니 불안증과 우울 증세를 보이며 서서히 언어 장애까지 겪게 된다

1948년 12월 10일 몹시 추운 겨울, 길 위에서 지켜보는 이 한 명 없는 어둠 속에서 숨을 거둔다. 이듬해 3월 서울 용산구 관보에 그녀의 이름이 실렸다.

 이름: 나혜석 

나이:51세 

본적과 주소는 불명

 옷은 남루하고 소지품은 무(無)

 사인은 병사


1913년 4월 15일 일본 도쿄 혼고 기쿠사카초에 있는 사립 여자 미술학교 서양화 보통과 1학년 생 나혜석 눈에 세상은 모든 이들에게 무한한 가능성이 열려 있는 곳으로 여자도 예술을 배워서 작품 활동을 하며 자신의 정체성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1918년 스물 두 살의 나혜석은 소설 ‘경희’에서 마지막 이렇게 외친다.


“하나님! 내게 무한한 광명과 힘을 내려 주십시오. 내게 있는 힘을 다하여 일 하오리다. 상을 주시든지 벌을 내리시든지 마음대로 부리 시옵소서.”


인간 나혜석은 남성과 여성이 언어로 맺어지는 관계가 평등하지 않다면 세상의 모든 남성과 소통을 시도 하는 일은 날카로운 칼에 베일 수 밖에 없다는 걸 알고 있었고 지배 받는 인간이 아닌 스스로의 권리를 외칠 수 있는 인간으로 살기를 원했다.

'남성은 칼자루를 여성은 칼날을 쥐고 있습니다. 칼날을 쥐고 있는 여성은 움직일 때 마다 피를 흘릴 수 밖에 없습니다'

                                                                            -나혜석(1896-1948)


한 사회에서 인간에게 언어란, 글쓰기란 무엇인가? 아니 한 여성에게 자신의 목소리로 글을 쓰는 것 무엇을 의미 하는가?


'고모는 하인들이나 방문객들 또 가족의 범위를 벗어난 사람들이 자신의 직업을 눈치 채지 못하게 하려고 조심했다. 그래서 언제든지 치울 수 있고 압지로 덮어 감출 수 있는 작은 종이에 글을 썼다. 현관과 집필 실 사이에는 조금이라도 열리면 삐걱거리는 소리가 나는 회전 문이 있었다 그러나 고모는 그 귀에 거슬리는 소리가 누군가 왔다는 걸 알려주는 신호라고 생각하여 그 작은 불편을 고치는 걸 반대 했다.'

1809년 부터 세상을 떠날 때까지 제인 오스틴은 5권의 장편 소설을 발표하며 홀로 글을 쓸 수 있는 방 조차 없이 친척 집을 전전하면서 얻은 병환 속에서도 어느 누구도 원망하거나 미워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아버지 사망 후 오빠들만 상속 받은 재산에 대한 권리조차 주장 하지 못했다.

여성이 글을 쓰기 위한 환경, 공간을 갖추려면 경제력의 뒷 받침 못지 않게 사회 제도와 관습에서 모든 인간의 기본적 권리, 즉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조건 속에서만 가능 하다.

역사적으로 여성에게는 칼도 무기도 없었고 의식주를 해결 할 수 있는 경제적 활동조차 할 수 있는 자유가 없었다.

버지니아 울프는 아버지 서재에 꽂혀 있는 남성이 쓴 글을 통해 비로소 여성의 정체성을 찾아 나갔고 동시대인 빅토리아 시대 여성들은 자신들의 죽은 할머니로 부터 물려 받은 족쇄 같은 관습, 남성이 설계한 문화와 제도에 복종 해야 한다는 지시를 받으며 지식의 성차별, 계급적 우위에 대한 복종을 숙명처럼 여겼다.

이혼 소송을 당하고 사회로 부터 버림받은 나혜석에게 전 남편 김우영과 시어머니는 그녀의 아이들에게 접근 금지를 명했다. 


“중2 때 2교시를 마치고 쉬는 시간에 복도 끝에 어머니가 나타났다. 내가 ‘아주머니는 누구세요?’ 하고 묻자 ‘내가 네 어미다’라고 했다. 어머니는 화장기 없이 주름진 얼굴에 흘러내린 머리카락, 구겨진 회색빛 블라우스 차림이었다.”

나혜석의 둘째 아들 김진은 중학생 시절 초췌한 모습의 어머니 모습에 충격을 받고 하교 길을 함께 갔던 그녀의 조카 나영균은 “하굣길에 동네 아이들이 떼지어 남루한 할머니를 따라가는 것이었다”라고 회고했다.


그녀의 둘째 아들 김진은 법학을 전공 하고 교수가 된 후 미국으로 이민을 가버리고 그곳에서 태어난 그의 아들은 아버지의 반대를 무릎 쓰고 미술을 전공해서 미술 치료사가 된다.

2012년 미술 치료사가 된 나혜석의 손자 스탠 김은 미국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뮤지엄(LACMA)에서 열렸던 한국 근대 미술 주제 전, ‘사이의 공간: 한국미술의 근대’에 출품 된 작품 화가이자 자신의 할머니 나혜석의 <자화상>을 처음으로 마주하게 된다.


1928년경에 그린 작품 <자화상>은 후에 한국은행 총재가 된 그녀의 막내 아들이 수원 시에 기증했다.


‘일생을 두고 지금과 같이 사랑해주시오. 그림 그리는 것을 방해하지 마시오.'


어떤 작품도 피와 땀방울의 노력 없이 완성 되지 않는다. 세상을 향한 고민, 자신의 삶에 봉착한 고통과 고난 없이 예술은 완성 되지 않는다.

자신의 이름을 걸고 성별의 차등을 두지 않고 백인과 흑인, 아시아인으로 분류 하지 않고 오로지 '나' 자신 한 '인간'으로 세상을 사유하고 시대를 향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세상

우리 모두 각자 자신만의 <방>을 갖고 있을까?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는 근대적 규범, 인권 사상에도 불구하고 왜 인간 나혜석은 길에서 생을 마쳐 버렸는가? 왜 마리 퀴리는 제자와 불륜을 저질렀다는 손가락질을 받아서 연구 지위까기 박탈 당해버렸는가?

16세기 셰익스피어 시대에 일어 났던 일이 1920년대 조선 땅에서도 일어났고 바다 건너 프랑스 파리에서도 일어 났다.

1896년생의 나혜석의 인생은 2022년의 시대에도 이어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시대는 달라졌고 성차별에는 여전히 근본적인 차별의 뿌리는 흔들리지 않고 있지만 경제적 차이로 벌어지는 부의 계급 시대, 물질 만능주의 시대에 불어 닥치는 만성 실업 문제에서 '여성'은 가장 큰 피해자 위치에 서 있다.


[내 안으로 흘러 들어오는 생의 모든 물결을 느끼면서도, 나의 생각을 형식으로 주조 하려고 할 때면 나는 입이 딱 붙고 무력해진다. 옛날 것은 어떤 것도 나에게 맞지 않는다. 내가 새로운 것을 만들어낼 수 있다면, 나는 창조의 즐거움을 만끽하며 무언가를 쓸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여자인 게 정말 좋다. 그러나 지금은 여성이라는 사실이 직접적으로 '나'의 영역을 제한한다. 어떤 때는 진정으로 여자로서 살지만, 또 어떤 때는 숨이 막힌다. 내가 예술가 역할을 할 때 마비되는 것처럼.]

-마리아 포포바의 진리의 발견에서 '마거릿 풀러' 일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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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2-11-17 03:0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조선시대에는 여성이 살기 더 힘들었지요 조선시대가 끝나갈 때도 다르지 않았네요 예전에 나혜석을 어떻게 알았는지 잘 생각나지 않네요 글을 썼다고 알았는지... 그런 것 같기도 하고, 그림 그렸다는 거 안 지는 오래 되지 않은 듯합니다 몇 해 전에야 나혜석을 조금 안 것 같기도 합니다 책이 아닌 다른 사람이 쓴 글로... 그때와 지금 달라졌다고 하지만, 여전히 달라지지 않은 것도 있겠습니다 앞으로 더 바뀌어야겠지요


희선

scott 2022-11-17 11:09   좋아요 0 | URL
여성이 지켜야 할 도리 법도가 거의 법전 급이였고 선택 할 수 있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냥 집안의 일꾼 ㅜ.ㅜ 으로 살다 가야 하는

나혜석의 오빠가 깨어 있는 지식인이여서
아버지를 설득해서 끝까지 공부 시켰는데
이혼 이후 여러 소송(최린과도 소송을)에 휘말리자
끝내 여동생을 두번 다시 보지 않았습니다
가족에게 버림 받고 사회에 버림 받고
그 충격으로 파킨스 병까지 얻어서
결국 거리에서,,,,

시대를 잘 못 태어난 불행으로 치부 하기에도
아까운 재능을 가졌습니다

새파랑 2022-11-17 09:5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나혜석은 당시 기준으로는 완전 파격이네요. 지금으로봐도 신여성이 맞는거 같아요 ^^ 게다가 1년의 유럽 신혼여행이라니~! 말년이 쓸쓸해서 안타깝긴 합니다 ㅜㅜ

scott 2022-11-17 11:10   좋아요 1 | URL
지금도 유럽 1년 여행은

쉽지 않죠 ^^

거리의화가 2022-11-17 10:0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나혜석 말년을 생각하면 씁쓸함을 감출 수가 없습니다. 나혜석 관련 전시를 몇 번 본적이 있었는데 그녀의 그림을 보며 이리 재능과 열정이 많았던 여성을 한 사회에서 매장하는 것은 순식간이구나싶더군요. 여성이 펜을 들고 예술활동을 한다는 이유만으로 손가락질당해야했던 세상! 분노가 입니다.

2022-11-17 11: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그레이스 2022-11-17 10:0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남편 최우영과는 살 수 없는 여성이라는 생각을 했어요! 의열단을 돕는 부인과 외무성 관리라니, 말도 안되는 동행 아닌가요?^^

scott 2022-11-17 11:16   좋아요 2 | URL
최우영,,,
나혜석에 비교 할수 없었을 정도로
배경도 능력도 별로 였는데

온갖 아부 아첨 그리고 조선인 희생을 딛고 올라 섰죠

죽을 때까지 잘 먹고 잘살았습니다
나혜석 아들 셋 모두 은행 총재, 법학 교수로 사회적으로도 ,,,

바람돌이 2022-11-17 16: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당시 신여성의 위치가 딱 저 만평에 드러나지요. 시건방져서 누가 데려갈지 걱정되는 여자, 아니면 적당히 아무나 희롱할 수 있는 여자!
정말 시대를 앞서간 훌륭한 여성이었던 나혜석이 딱 하나 모자랐던것. 남자를 보는 눈인것 같아요. 남편은 말할 것도 없고 연애의 대상이었던 저 최린도 뭐.... ㅠ.ㅠ 어쩌면 그 시대에 나혜석의 지성에 견줄 수 있는 남성이 없었다고 보는게 맞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고요.

scott 2022-11-18 00:17   좋아요 0 | URL
저희 외할머니는 대학 입학도 겨우하셨지만 머리 파마 했다고
집안에서 삭발을 당했습니다 ㅠ.ㅠ

나혜석의 유화 작품들 전쟁 중에 아주 많이 소실 되어서 안타까울 뿐입니다

황소그림만 줄창 자랑스러워 하지 말고
나희석의 유화 작품 시대를 뛰어 넘는 불굴의 정신이 남긴 유산이죠

최린 나쁜 놈!
이념과 민족 보다
한때 불꽃 같은 사랑에 재를 뿌렸습니다

파이버 2022-11-17 23: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글을 읽으면서 더 답답한 마음이 커집니다. 나혜석의 집안도 대단했을텐데도 규정바깥으로 넘어가는 순간 매장 당하는군요. 여자이자 어머니에게 요구하는 도덕적 잣대가 훨씬 엄격한 것 같습니다.

scott 2022-11-18 00:18   좋아요 1 | URL
고관대작 집안으로
수원에서 대대로 명문 가문이였다고 합니다
수원에 나혜석 길이 있고 비석도 있는데
넘 무성하게 꾸며 놨어요,,,

나혜석이 쓴 수필을 읽다보면
지금 한국 가정과 별반 다를 바 없고
사회도 그다지 크게 변한게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