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화가의 시선이 거친 손처럼 얼굴 위에 놓인다... 우리 모두에게는 타인의 마음과 배후에 숨어 있는 무언가를 찾아내고자 하는 바람으로 타인의 시선을 구기는 이 같은 손동작이 있다.]
-1977년 밀란 쿤데라
1984년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프랑스어로 출간 되자 마자 프랑스 내에서 사회주의를 신봉 했던 좌파 지식인들은 밀란 쿤데라의 이름이 찍힌 작품들에 대해 무서운 속도로 평론을 쏟아내기 시작한다.
유럽 문학 계를 뒤흔들어 놓은 작품<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예술이 뿜어내는 모든 빛을 흡수 시켜 버리며 이 작품을 쓴 작가 밀란 쿤데라를 취재 하기 위해 열띤경쟁을 벌인다.
작가 밀란 쿤데라 집 앞에는 세계에서 몰려온 기자들,열성 팬들, 예찬자들로 북새통을 일으켰고 이제 밀란 쿤데라는 집 앞 가게를 갈 때도 사람들에 둘러 쌓인 채 사진 기자들이 들이내는 카메라 빛에 눈을 제대로 뜨기 힘들게 된다.
1984년 밀란 쿤데라는 딱 한 번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낸 후 은둔의 삶을 살아간다.

'더는 나 자신을 감당 할 수 없다.'
1985년 6월, 밀란 쿤데라는 두 번 다시 공개 인터뷰를 하지 않겠다고 기자들에게 못을 박아 버리며 자신의 저작권이 명기 되지 않은 모든 사진과 말은 전부 가짜라고 말한 후 거주 하는 아파트의 명패의 이름까지 바꿔버린다.
그를 취재 하기 위해서는 아내 베라 쿤데라를 거쳐야 했고 그와 직접 통화 하기 위해서는 아내 베라가 발급해주는 특정 코드를 인터폰에 눌러야 했다.
'인간의 시간은 원형으로 돌지 않고 직선으로 나아간다. 행복은 반복의 욕구이기에, 인간이 행복할 수 없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중에서
1980년대 초반에 프랑스 좌파 지식인들에게 불어 닥쳤던 마르크스주의의 피로감은 곧장 동구권에서 망명한 작가 쿤데라의 작품으로 불이 붙어서 정치적 해방이 아닌 공산 정권의 문학적 해방에서 불어 닥치게 될 자유의 물결, 문학의 평등에 관해 논하기 시작 했다.

'밀란 쿤데라는 프랑스의 좌파 지식인들에게 새로운 샤르트르가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반 이데올로기적인 샤르트르 말입니다.'
1980년대 유럽 문학의 상징적인 인물로 우뚝 섰던 밀란 쿤데라는 불과 4-5년 전 만해도 무국적자 신세 였다.
작품을 발표 할 때 마다 서구권에서 열풍을 불러 일으켰던 밀란 쿤데라는 체코슬로바키아 공산 정권에서는 눈에 가시로 당국은 그의 일거수 일투족을 밀착 감시 하면서 언제라도 추방 할 구실을 찾고 있었다.

-1973년 12월 17일 '엘리트 II(밀란 쿤데라의 아내 베라의 코드명)가 여배우 VF와 함께 사는 배우 ZK를 만나러 민속 박물관 카페를 방문함. 미리 약속된 만남임. 그들이 차례로 약속 장소에 도착함. 30분 가량 대화를 나눈 뒤 엘리트 II가 카페 종업원에게 A4용지를 달라고 해서 거기에 뭔가를 적는 것을 우리 정보원이 보았음

-1974년 6월 1일 작가 밀란 쿤데라, 일명 '엘리트I'(밀란 쿤데라 코드명)이 모자를 쓰지 않고 검은 구두에 어두운 옷차림으로 집을 나섬 부인을 동반함. 자택 앞에 잠시 기다림, 10시 5분, 차량 번호 ABJ 6797 자동차가 엘리트 I 의 집 앞에 멈춤. 그와 아내가 차에 탑승하자, 차가 역이 있는 리체나 가 방향으로 출발함

1969년 부터 1979년 까지 약 10년 동안 작가 밀란 쿤데라의 삶은 이렇게 낱낱이 추적 당하고 도청 당하며 2천 374페이지 분량에 기록되고 타자 되고 분류 되었다.
그의 삶은 '일급 기밀'이라는 검인을 찍힌 채 비밀 경찰 총책에게 철저하게 감시 당했다.
당국은 쿤데라 부부의 주변 인물들을 밀착 감시 하며 이들 부부와 나눈 대화 녹취는 물론 긴밀한 순간까지 촬영 하고 우편물 까지 가로채게 만들었고 험담을 꾸며 내게 했다.
밀란 쿤데라가 가장 두려워 했던 건 자신도 모르는 이들이 자신에 관해 말하는 것, 즉, 밀고자들의 거짓 된 증언들로 비밀 경찰국 요원들의 협박과 가족을 볼모로 삼아버린 공포심에 사로 잡힌 이들이 살아 남기 위해 쿤데라 부부에 대해 어떤 험담을 내뱉을지 모른다는 사실였다.
[1948년 2월, 공산당 당수 클레멘트 고트발트는 프라하의 옛 도심 광장에 모여든 수십만 군중에게 연설을 하기 위해 바로크 양식 궁전 발코니에 섰다. 보헤미아 역사의 거대한 전환점이었다. 숙명적인 순간이었다.
고트발트는 동지들을 거느리고 있었는데 바로 곁에는 클레멘티스가 서 있었다. 눈이 내리고 추웠는데 고트발트는 모자도 쓰지 않았다. 클레멘티스가 잔뜩 걱정하는 얼굴로 털모자를 벗어 고트발트의 머리 위에 얹어 주었다.
선전부는 털모자를 쓰고 동지들에 둘러싸인 채 군중에게 말을 하는 고트발트의 사진을 수십만 장 찍어 냈다. 바로 이 발코니에서 보헤미아 공산당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사 년 뒤, 클레멘티스는 반역죄로 단죄받고 교수형에 처해졌다.
선전부는 그를 즉각 역사에서 지웠으며 물론 사진에서도 그를 모조리 지워 버렸다. 그 후로 고트발트는 그 발코니에 혼자 서 있었다. 클레멘티스가 있었던 자리에는 궁전의 빈 벽 뿐이었다. 클레멘티스로 부터 남은 것은 고트발트 머리 위에 얹힌 털모자 뿐이었다.]
-'웃음과 망각의 책'에서

1953년 밀란 쿤데라는 프라하의 명문 영화 학교 FAMU에서 '세계 문학사'를 강의 하기 시작한다.
당시 그의 강의를 들었던 학생들은 수 년 뒤 체코 영화의 누벨 바그 시대를 이끈 이쥐 멘젤, 밀로시 포르만이 수강 하고 있었다.
1959년 12월 체코슬로바키아의 비밀 경찰국은 FAMU영화 학교에서 명 강의로 이름을 날리고 있던 작곡가 쿤데라의 아들 밀란 쿤데라를 감시하기 위해 비밀 코드명을 할당한다.
1963년에 발표한 단편집 <우스운 사랑들>이 출간 되자 마자 프랑스 문단의 중심 인물이였던 샤르트르의 극찬이 쏟아지면서 처음으로 프랑스어로 번역 된다.
2년전에 완성한 작품 <농담>이 프랑스 공산당 중앙 위원장 루이 아라공에 손에 넘어가 1967년 4월 출간 하게 되자 그해 6월 체코 슬로바키아 공산 문화 예술 총책의 붉은 휘장 아래서 밀란 쿤데라는 앞으로 출간 되는 자신의 모든 작품을 '검열' 해도 좋다는 사인을 한다.
1968년 프라하 혁명이 움트기 직전 1월 9일 밀란 쿤데라의 <농담>은 체코 전역에서 무려 12만부 가량 팔려 나갔고 프랑스 전역 서점 매대까지 온통 작품<농담>으로 뒤덮혀 버린다.
곧장 비밀 경찰국은 밀란 쿤데라를 밀착 감시 하기 위한 신상 파일' 바스니크'(일명 시인)가 개설 된다.

1968년 8월 20일 자정 무렵 소련군 전차들이 수도 프라하로 진격 한다.
다음날 이른 새벽 프랑스 공산당 중앙 위원장 아라공은 라디오를 통해 프라하로 진격한 소련군의 소식을 듣고 이날 오후 <농담>서문에 소련 전차에 무참하게 짓밟히게 된 체코슬로바키아의 자유를 향한 투쟁을 독려하는 글'스탈린 시대 체코슬로바키아에 대한 증언'이라는 글을 싣는다.
[때는 1971년, 미레크는 말한다. 인간의 권력 투쟁은 망각에 맞서는 기억의 투쟁이라고...그는 일기를 꼼꼼히 쓰고, 서한을 간직하고, 친구들과 상황을 어떻게 이어 나갈지 의논하는 모든 회의를 낱낱이 기록함으로써 친구들이 경솔하다고 말하는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려고 애쓴다. 자신들이 하는 일이 헌법에 위배될 건 전혀 없다고 그는 친구들에게 설명한다. 숨고 죄책감을 느끼는 것이 패배의 시작일 거라고 말한다.]
-'웃음과 망각의 책'에서

1973년 쿤데라의 작품을 읽고 그의 팬이 된 미국 소설가 필립 로스가 프라하를 방문해서 직접 만난 후 쿤데라 부부를 미국으로 초청한다.
필립 로스는 동구권에서 작품 출간을 금지 당한 소설가를 돕기 위해 영미권 번역 출간 총서를 기획 한다. 1975년 필립 로스는 밀란 쿤데라의 단편집 <우스운 사랑들>의 서문을 직접 쓴다.
프랑스의 진보 지식인들 공산 당원들은 적극적으로 밀란 쿤데라의 작품을 널리 번역 시키며 홍보를 하는데 열을 올리고 쿤데라의 모든 삶은 비밀 경찰국의 도청기기와 망원경 속에 더 밀착 되어 버린다.
[1968년 프라하의 봄이 찾아 왔을 때 국경이 열렸으며 바흐의 위대한 악보로부터 음들이 달아나 제각기 제 방식대로 노래를 불러 댔다. 온 지구를 위해 위대한 푸가를 쓰던 러시아는 음들이 흩어지는 것을 참아내지 못했다. 1968년 8월 21일 러시아는 보헤미아에 50만 군대를 보냈다. 얼마 후 2만 체코인이 나라를 떠났으며 남은 사람들 가운데 50만쯤이 일자리를 포기하고 오지의 갱속 작업장으로, 먼 공장으로 트럭 운전대를 잡으로 다시 말해 아무도 그들의 목소리를 듣지 못할 장소로 떠나야만 했다.]
1974년 봄,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국은 밀란 쿤데라 부부에게 약 보름 동안 머물 수 있는 프랑스 방문 비자를 발급해준다.
쿤데라 부부는 프랑스 스트라스부르-랭스-아미앵-오를레앙-트루아를 거치면서 도망치듯 조국을 떠나고 싶지 않다며 보름 후 다시 프라하로 돌아온다.
1978년 1월 프랑스 렌 대학은 밀란 쿤데라에게 방문 교수 자격 방문증을 발급 한다.

렌 대학의 강의실에 선 쿤데라, 그리고 1년 후 부교수 지위를 얻게 된 그는 더 이상 망명자가 아닌 이민자 신분이 된다.
프랑스 문학계에서 쿤데라의 작품이 발표 될 때 마다 프랑스 문학계는 찬사를 보냈던 반면에 그의 조국 체코슬로바키아 서점과 도서관에서는 쿤데라라는 이름이 찍힌 책들이 전부 사라져 버렸다.
[역사가 아직은 느리게 나아가던 시절에는 그다지 많지 않은 사건들이 쉽게 기억속에 새겨졌고 누구나 아는 배경을 이루었으며 그 배경 앞에는 개인사가 모험들로 가득한 매혹적인 공연을 펼쳤다. 오늘날, 시간은 성큼 성큼 나아간다. 역사적 사건은 하룻밤이면 잊히고 말아 다음 날이면 이미 새로운 날의 이슬로 반짝인다.]
체코 공산 당국 소속 비밀 경찰들은 여전히 쿤데라 부부를 밀착 감시했고 그의 주변 프랑스 친구들은 이미 쿤데라 부부에 관한 모든 것을 알려준다는 확인서에 서명을 해버렸다.
'체코 비밀 경찰은 이들에게 쿤데라가 제국주의자 요원들과 함께 첩보 활동을 벌였다고 말하며 그들을 윽박 질렀습니다. 어떤 일이 발생할 경우에 당국의 재판을 피하기 힘들 거라고 협박했죠.'

쿤데라 부부는 자신들이 영원히 고향 프라하로 돌아 가지 못하게 될 것이라는 걸 알게 된다.
쿤데라는 대학 강의실에서 서서히 목소리 톤이 낮아지고 작아지며 모든 이들과 대화 할 때 조차 자신의 모든 것을 숨기게 된다.
그는 세미나에 참석한 학생들의 이름 조차 묻지 않았고 어느 순간 부터 학생들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 보지 않게 되자 그를 찾는 학생들이 서서히 사라져 버렸다.
그는 마지막 강의에서 학생들에게 이런 말을 남겼다.
'이 세상에는 어떤 책을 좋아하는지를 통해서 만 이해할 수 있는 사람도 있다는 걸 깨달았으면 좋겠습니다.'
쿤데라가 세상에서 사라져 버리자 쿤데라라는 이름은 문학 세계에서 하나의 아이콘이 되었다.

그의 조국 체코의 수도 프라하는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자 마자 중부 유럽의 문화의 수도가 되어 그의 책을 읽은 이들은 프라하의 거리를 걸으며 참을 수 없는 존재 속에서 살아 숨 쉬었던 토마시의 흔적을 찾아 다녔다.
1990년 프랑스 대통령 미테랑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토마시를 자신의 페르소나라고 생각했고 <불멸>은 자신의 삶의 단면이 담긴 작품이라고 말했다.
그는 밀란 쿤데라에게 프랑스 시민권을 수여 하면서 이런 말을 했다.

'죽음과 불멸은 헤어질 수 없는 연인 관계라고 생각 합니다. 죽은 사람의 얼굴과 혼동되는 사람의 얼굴을 현실 속에서 발견 하는 순간, 지난날의 사랑들은 불멸이 되지 않을 까요.'
[아마 우리는 왜, 그리고 어떤 점에서 우리가 타인들의 신경에 거슬리는지, 우리의 어떤 점이 그들에게 호감을 주며, 어떤 점이 우스꽝스러워 보이는지 영원히 알지 못할 것이다. 우리 자신의 이미지야말로 우리에게 가장 큰 미스터리인 것이다.]
-<불멸> 중에서
미테랑 대통령에게 직접 시민권을 받은 밀란 쿤데라, 이제 붉은 깃발을 휘날렸던 공산 정권도 사라져 버렸고 비밀 경찰에게 미행 당하지 않는다.

그는 앞서 출간 한 자신의 작품들의 오역을 찾아 내서 직접 프랑스어로 번역하기 시작한다.
밀란 쿤데라가 체코어로 글을 발표 할 때 프랑스 문학계는 프랑스어로 번역 출간 되는 그의 모든 작품을 숭배 했고 찬향 하는 말을 늘어 놓았다.
하지만 1990년 쿤데라가 자신이 직접 프랑스어로 처음 쓴 <정체성>작품이 발표 되자 마자 그를 향해 비아냥을 퍼 붇기 시작한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전 프랑스에서 쿤데라는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존경하는 작가 였지만 장벽이 사라지고 난 후 그가 내뱉는 모든 프랑스어는 참을 수 없는 존재가 되어 버렸다.
'밀란의 실패작... 십자말 풀이의 바둑 무늬 판 같은 건조한 문체...'
10년 후 밀란 쿤데라는 프랑스어로 쓴 작품 <향수>를 스페인에서 먼저 출간해버리고 이후에 출간 되는 모든 작품들은 각기 다른 유럽권에 출판권을 줘버린다.
2010년 쿤데라 부부는 프라하를 방문 한 날 거리에서 농담 처럼 시민들에게 이런 말을 듣게 된다.
'바츨라프 하벨은 감옥에 들어갔기에 대통령이 되었다. 밀란 쿤데라는 프랑스로 떠났기에 작가가 되었다.'
1990년 이후 출생한 체코 국민들 중 대다수는 밀란 쿤데라가 프랑스 작가로 알고 있었고 이들 중 상당수는 그의 작품을 단 한 번도 읽지 않았다.

체코 밀레니얼 세대들에게 밀란 쿤데라는 1968년 소련에 점령 당한 프라하를 위해 싸웠던 지식인이 아니라 자신의 삶의 자유를 찾아 떠난 이방인이라고 생각한다.
조국에서 밀란 쿤데라는 투옥을 당하고 고문과 감시를 당하면서도 전체주의 시대에 자유의 억압과 검열에 맞서 싸운 지식인이 아닌 오로지 자신의 명성을 쌓는데 급급한 인물로 각인 되어 버렸다.
2008년 가을 <리스펙트>에 이런 기사가 실린다.
[1950년 3월 14일 당시 20세 였던 밀란 쿤데라는 드보라체크를 경찰에 고발했다.
그 청년은 당국에 의해 22년의 징역을 선고 받았다.]
어느 고발자의 편지에 새겨진 밀고자의 이름 밀란 쿤데라
쿤데라는 지난 37년간의 긴 침묵을 깨고 마침내 미디어 앞에 섰다.

'나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이 일에 깜짝 놀랐습니다. 어제 까지도 나는 이 일을 전혀 모르고 있었으며 그런 일 자체가 없었습니다.'
12년 후 2020년 6월 얀 노박이 밀란 쿤데라의 과거 행적이 담긴 책< 체코 시절의 그의 삶>을 발간 한다.
[소문의 제국에서 침묵은 무례로 여겨진다. 베일을 벗지 않으려 하는 자. 작품 외에 내야 하는 이 공적 기여를 내지 않으려 하는 자는 불편한 인물이 되고 최고의 표적이 된다.]
100세를 앞 둔 밀란 쿤데라, 이전의 삶 무고한 청년을 밀고 하지 않았던 모습으로 회귀 할 수 있을까?
'우리는 청춘이 뭔지 모른 채 유년기에서 벗어나고 결혼이 뭔지 모른 채 결혼하고, 노년기에 들어서서도 인생이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그런 점에서 인간의 대지는 무경험의 세계다.'
2019년 11월 28일 체코 공화국은 밀란 쿤데라에게 시민권을 수여 하고 국적을 회복 시킨다.

쿤데라 씨, 당신은 공산주의자입니까?
-아뇨, 나는 소설가 입니다.
당신은 반 체제파인가요?
-아니오, 나는 소설가입니다.
당신은 좌파입니까?우파입니까?
-어느 쪽도 아닙니다. 나는 소설가입니다.

'프랑스는 내 책들의 조국이 되었고, 나는 내 책들의 길을 따라 왔다.'
-2019년 9월 프랑스 파리, '밀란 쿤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