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 이전에는 여성이든 남성이든 집단적 정치 행동을 통해 사회 병폐를 바로잡는 일이 실현 가능하다고 보는 이가 거의 없었다. 우리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비행기 설계도가 부정확하다고 그를 나무라지 않으며, 오히려 인간이 하늘을 난다는 그의 비전이 라이트 형제에게 영감의 출발점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당시 젠더 상황에 도전 했던 초기 작가들 덕분에 사람들은 이 문제에 대해 생각하고 이야기 하게 되었다. 그들이 다른 작가들에게 영감을 주며 개념적 토대를 마련하지 그것이 정치 운동으로 이어지며 변화를 가져왔다.]
-메리 D. 개러드<여기, 아르테미시아> 중에서
초기 근대 유럽의 역사적 변혁 시기에 페미니스트들이 펜으로 맞선 반면에 남성 중심의 예술세계에서 여성은 혐오스러운 이미지, 유혹 적 매력으로 꾸준하게 왜곡 시켜 왔다.
회화 적 이미지에서 여성은 악마적인 본성을 일깨워서 죽음으로 향하는 치명적인 매력을 지닌 악녀, 마녀들로 지속적으로 확장 되었고 순종적이고 온화하고 온순한 모성을 자아내는 이미지 틀 안에 가둬버렸다.
1638년 이탈리아 로마에서 단 한 장의 그림으로 자신이 누구인지 알린 예술가가 있었다.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회화의 알레고리로서의 자화상>
17세기 종교 개혁과 반 종교 개혁의 대결이 극한으로 치달아 오르던 시기에 여성 화가들 대부분은 유명 남성 작가들의 조수로 참여 해서 초상화나 정물화 정도만 붓 질이 허용 되었던 시대 였다.
이들 중 일부는 화가라는 직업을 둔 아버지 밑에서 어린 시절 부터 꾸준하게 도제 생활을 시작 해서 대성당이나 지역 교회에서 의뢰 받은 종교 화 채색을 담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공개된 장소에서 여성이 종교 화에 붓 질을 한다는 건 신성 모독 죄에 해당 되었기에 철저하게 남장을 해야 했다.
재능을 타고 났어도 예술가의 길을 걷는다는 건 목숨을 걸고 해야 했던 시대에, 여성 최초로 아카데미아 델 디세뇨의 회원으로 활동 했던 화가가 있었다.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Artemisia Gentileschi, 1593 ~ 1652,1656)
그림 속의 여인은 때로는 남자를 무자비한 도구로 죽이고, 때로는 자신을 죽인다.
화폭 곳곳에 공포에 짓눌린 남성, 그를 향한 분노가 거침없이 폭발하는 여성이 있다.
1593년 7월 8일 토스카나 태생의 화가인 아버지 오라치오 젠틸레스키 (Orazio Gentileschi, 1563-1639)의 유일한 자녀 였던 아르테미시아, 열 두 살 무렵 어머니가 출산 중에 사망 한 후 화가 아버지와 단 둘이 대낮에 폭력과 혈투가 벌어지는 거친 로마의 뒷골목에서 살았다.
16세기 말 로마는 유럽의 중심 도시이자 교황의 도시로 순례자, 협잡꾼,사기꾼,여행객,외국인 노동자 그리고 전세계에서 밀려 들어온 예술가들로 붐볐던 곳이 였다.
로마의 도시 공간은 힘이 센 거친 남성의 영역으로 강도, 납치, 살인이 빈번하게 일어 났던 무법 지대였다.
당시 화가들은 노동 계급에 들어갔던 하층민 부류로 거주 지역이 술집과 포주들이 바글 거리는 빈민가와 인접 한 곳에 모여 살았다.
일부 예술가들 중 뛰어난 재능과 상술로 부유층을 단골로 끌어 들여 인생을 역전 시키기도 했고 종교인들의 비위를 잘 맞춘 예술가들은 세속화와 종교화를 전문으로 성당과 교회로 부터 받는 임금으로 먹고 살았다.
아르테미시아 아버지 역시 신분 상승을 꿈꿨던 화가로 악착같이 귀족들의 초상화를 그려서 딸을 양육하고 보호 할 수 있는 안전한 지역으로 이사했다.
어린 시절 부터 아버지에게 회화를 배웠던 아르테미시아는 1607년 열 네 살 때부터 도제 생활을 시작 했다.
또래들 보다 월등한 실력을 갖추었던 아르테미시아는 1610년 <수산나와 장로들>이라는 작품을 완성 한다.

이 작품은 단순히 성경 속 인물들의 이야기가 아닌 성적 위협과 성폭력에 노출된 여성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의뢰 받은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장기간 출장을 떠나야 했던 아르테미시아 아버지는 자신의 딸을 세입자 투티아 부인에게 맡겼지만 그녀는 호시탐탐 아르테미시아를 자신이 빚을 지고 있는 고리대금업자들에게 성적인 접근을 하라고 유인했다.
1611년 아르테미시아의 아버지는 대형 프레스코화 주문을 받자 딸과 협업 하기 위해 자신의 동료 화가 아고스티노 타시에게 수업을 맡긴다.
파렴치한 타시는 아르테미시아를 강간했 고 칼을 들고 강하게 저항하는 그녀를 진정 시키려는 목적으로 결혼을 약속하고 지속적인 관계를 요구 했다.
순진했던 아르테미시아는 결혼할 사람이라 믿고 원치 않는 관계를 이어가다가 타시가 이미 아내가 있었던 남자라는 걸 알게 되자 결국 법정 소송을 하게 된다.
로마의 판결이 티시에게 관대한 처벌로 넘어가 버리자 교활한 타시는 곧장 아르테미시아를 행실이 나쁜 꽃뱀으로 몰고 가며 자신이 오히려 피해자였다고 떠들고 다녔다.
아르테미시아는 정신적 충격과 고통에 사로 잡혀서 스스로 손톱 발톱을 물어 뜯어 버렸고 처녀성을 증명하기 위해 수치스러운 검사까지 받으며 법정에서 남성들에게 가혹할 정도로 2차 가해를 받았다.
기나긴 소송 전에서 결국 아르테미시아가 승소 했지만 타시는 로마 사회에서 쉽게 용서 받으며 동정 여론 몰이로 그림 주문이 밀려 들어 왔다.
종교 개혁 세력과 반 종교 개혁 세력이 극심하게 충돌했던 17세기 초반 반 종교개혁 세력의 주축인 이탈리아에서는 여성으로 의인화 된 구 교회의 정통성을 옹호하는 의미에서 강인한 여성이 그림에 등장하기 시작한다.
이미 수 년 동안 법정에서 자신을 강간 한 남자를 상대로 소송을 벌였던 아르테미시아에게 강인한 여성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그림 주문이 쏟아지기 시작한다.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디트>
앗시리아의 장수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쳐서 민족을 구한 유대의 여자 영웅 유디트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이 작품은 골리앗의 목을 친 다윗 처럼 새로운 시대, 여성이 특정한 남성의 소유물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고전적 예술 작품의 아름다움에는 숨겨진 서열이 있다.
인간의 가장 아름다웠던 모습은 신의 영역에서 살고 있는 것 처럼 시간의 지배를 전혀 받지 않은 젊고 싱싱했던 시절의 모습이다.
신의 영역에서 벗어난 인간은 시간의 흐름을 피하지 못해서 볼품 없이 일그러지거나 죽음의 순간에 가까이 다가선 공포스러운 모습으로 그려 졌다.
대단한 지위에 서 있는 남성은 젊은 시절 처럼 노년의 나이에도 품위와 기품이 넘치는 모습의 자화상으로 남지만 여성의 노년의 모습은 초라하게 병든 모습, 사악한 마녀, 남자를 집어 삼키는 모습으로 그려졌다.

아르테미시아가 그린 작품 속의 여성들은 온 힘을 다해 남성의 목을 베고 얼굴에 못을 박아 버린다.
거친 남성의 힘에 제압 당하지 않고 단호하게 살해해 버리는 그녀들,
잔뜩 겁에 질린 남자, 담담한 표정의 여자로 아르테미시아는 자신에게 폭력을 저지른 남자를 향해 복수를 해버렸다.
아르테미시아가 활동 했던 17세기 로마, 그리고 21세기 2022년의 세상은 크게 달라 졌을까?
[세상은 젊은 여자들에게 자신이 살해될 가능성을 늘 그려 보게 끔 만든다. 여자는 어릴 때 부터 줄곧 이런저런 일을 하지 말라는 훈계를 듣는다. 여기에 가지 마라, 거기서 일하지 마라, 이런 시각에 밖에 나가거니 그런 사람들과 말하거나 이 원피스를 입거나 이 술을 마시거나 모험과 독립과 고독에 참가하지 마라. 죽임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안전 조치는 여자가 스스로 삼가는 것 뿐이다.]
-레베카 솔닛 <세상에 없는 나의 기억들> 중에서
여성들은 수 세기 전 부터 그림에서, 소설에서, 노래에서, 영화에서,음악에서 그리고 세상에서 살해 되었다.
만일 아르테미시아가 가해자에게 고개 숙여 사과 했거나 스스로 삶을 포기 했다면 여전히 세상은 영원히 비열한 가해자들이 지배했을지 모른다.

아르테미시아가 그린 클레오파트라, 로마로 압송 당하기 전 스스로 독사에게 물려 목숨을 끊어 버렸다.
아르테미시아는 평생 동안 루크레치아를 여러 번 그렸다.

전쟁 당시 적군에게 유린 당한 후 스스로 목숨을 끊어 버린 루크레치아, 여성을 전장 터의 전리품 처럼 간주하고 유린했던 야만인들은 어떤 처벌도 받지 않은 채 전쟁 영웅으로 칭송 받았다.
여성에게만 강요 되었던 정조, 남자의 소유물이라는 사회적 억압에 스스로 죽음을 선택해야 했던 여인들, 루크레치아는 사회적 억압과 편견에 의해 살해 되었고 그리고 아르테미시아는 삶을 포기 하지 않고 자신의 붓질로 끔찍한 순간을 남겼다.
그녀는 그림을 그리며 견뎠고 버텨냈다. 아르테미시아의 그림은 자신이 구축한 예술의 세계를 넘어 남성만이 예술 세계의 최정점에 오를 수 있다는 세상의 편견에 도전했다.

[성희롱은 대단히 남성적인 수행 행동이다. 남자는 그 행동을 통해서 대상에게 힘을 가진 쪽은 자신이라고 알리고 싶어하고 -이것은 사실이다.- 나아가 그의 힘과 섹슈얼리티는 하나 이자 같은 것이라고 알리고 싶어한다.]
-재클린 로즈 (2018년 가디언紙 인터뷰 중에서)
가부장 사회의 멍에와 남성 중심 세상에 맞서 싸운 아르테미시아

그녀의 묘비에는 '여기, 아르테미시아 (Haec Artemisia)라고 만 적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