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문학'이라고 부르는 것, 그 개념 자체에 대해 비 러시아인들은 19세기 중반 부터 20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대여섯 명의 위대한 작가들이 배출되었다는 사실을 우선 떠올린다. 산문 뿐 아니라 번역 불가 한 시인들까지 포함 시키는 러시아 독자들에게는 그 범주가 더 확장되지만, 이들 역시 러시아 문학이라고 하면 눈부신 대작들이 탄생한 19세기에 초첨을 맞춘다. 다시 말하면, '러시아 문학'은 최근의 사건이다. 게다가 특정 시기에 국한되어 있기 때문에 외국인들은 러시아 문학을 이미 완성되고 종결된 것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이는 지난 40년 간 소비에트 체제 아래에서 보잘것없는 주변 문학들 만 만들어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1917년 2월 혁명이 발발 한지 몇 일 만에 나보코프의 아버지는 페테르부르크 임시 정부의 수장이 되지만 10월 피의 혁명으로 숙청의 칼날이 다가 오는 순간 가족을 데리고 크리미아 반도로 이주 한다.

1918년 혁명군이 나보코프의 아버지에게 현상금을 걸고 추격하자 가족들은 우크라이나 르비우 지역으로 넘어가 지인 소유의 영지에 숨어 살게 된다.
혁명은 곧 끝이 날 것 이라 믿었던 나보코프의 아버지는 크리미아 반도의 법무부 장관 자리에 앉지만 1919년 황제가 이끄는 백군이 혁명군에 대패 하면서 나보코프 가족은 영원히 러시아 땅을 밟지 못한 채 유럽 전역을 떠도는 망명자가 된다.

1920년 시린이라는 필명으로 시인으로 활동 했던 나보코프는 1923년 부유한 유대계 러시아 출신의 베라를 만나 2년 후 결혼한다.
나보코프는 나치의 압박과 추적을 피해 다니며 번역과 작품 활동을 하며 생계를 이어 나가 던 중 1937년 독일에서 프랑스로 건너가 <마법사>라는 책을 출간 하며 작품 활동을 펼친다.
1940년 독일 나치가 프랑스 땅을 점령 하자 나보코프는 아내 베라와 아들 드미트리와 함께 미국행 난민선에 겨우 탑승해서 탈출에 성공한다.

1940년 미국 맨해튼에 정착한 나보코프는 자연사 박물관 나비 보존실 자원봉사로 활동하면서 지난 시절에 틈틈히 쓰고 번역했던 원고 뭉치를 정리해 나가기 시작한다.
[다행히도 러시아 문학에 대한 총 2천 페이지에 달하는 1백 개의 강의록을 가지고 있었다. 그 덕분에 웰즐리 대학과 코넬 대학에서 강의하며 보낸 20년 세월은 행복했다.]
1940년 5월 나보코프는 미국에 도착한 이후 부터 1941년 스탠퍼드 대학 여름 학기 첫 강의에서 이전 미국 대학 러시아 문학 부에서 어느 누구도 시도 한 적 없는 강의를 펼치기 시작한다.
1941년 웰즐리 대학 러시아어학과 가을 학기 부터 전임 교수로 부임한 나보코프는 러시아 언어와 문법을 가르치며 '번역으로 읽는 러시아 문학 고찰'이라는 과목을 개설 했다.

1948년 부터 코넬 대학 슬라브학과 부교수로 재직 하면서 '유럽 산문의 거장들', '번역으로 읽는 러시아 문학' 과목을 가르치며 1950년대 미국 대학에 러시아 문학 열풍을 일으킨다.
[나는 19세기 초 이후 배출된 러시아 산문과 운문 작품들 중 가장 뛰어난 것들을 뽑아서 그 분량을 세어 본 적이 있는데, 일반 식자로 2만 3천 페이지였다. 프랑스 문학도 영국 문학도 이런 식으로 압축하기는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이들 문학은 몇 세기에 걸쳐서 발전해 왔고, 대작들의 수만 해도 어마어마하기 때문이다. 한 편의 중세 시대 걸작을 제외하면 러시아 산문은 19세기의 암포라(손잡이 달린 항아리)안에 다 들어가고 지금까지 쌓인 나머지 산문들은 크림 용 작은 사기 그릇 안에 들어갈 정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나보코프가 직접 손으로 쓴 <러시아 문학 >강의록은 나보코프의 아내 베라의 타이핑으로 묶여져서 그가 세상을 떠난 후에 출간 되었다.

나보코프가 손잡이 달린 항아리 '암포라' 속에 19세기 러시아 문학에는 총 여섯 명의 작가들,고골,투르게네프,톨스토이,도스토옙스키,체호프, 고리키의 열 네편의 작품들이 담겨 있다.
<러시아 문학>강의록에 담긴 19세기 러시아 문학은 '사실적인 인간'의 모습과 '사실적인 범죄'의 유형 그리고 관료주의로 인해 고통 받는 농노와 선량한 시민들의 모습이 나보코프의 냉철한 시각과 비평으로 재탄생 한다.

나비 채집을 사랑했던 나보코프는 돌아 갈 수 없는 고국의 언어를 낯선 미국 땅에서 채집 하듯 기억 저편 속에 잠재 되어 있는 회상을 통해 작품 속 인물들의 삶을 세상 밖으로 끄집어 냈다.
[강의를 할 때 나는 학생들에게 디테일, 그리고 감각의 불꽃을 타오르게 하는 그 디테일 간의 조화에 대해 정확한 정보를 주기 위해 노력했다. 그것이 없는 책은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 이기 때문이다.]
1953년 9월, 코넬 대학 러시아 문학 첫 번째 수업에서 나보코프는 학생들에게 자신의 수업을 수강 하는 이유를 적어서 제출 하라고 했다.
학생들은 이런 답변을 제출했다.
'이야기를 좋아 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차차 다락방이 있는 집을 잊어 갔다. 그러나 아주 가끔 그림을 그리고 있을 때나 책을 읽고 있을 때면 문득 그 창문에 비친 녹색의 등불이라든지 사랑하던 내가 집으로 돌아가면서 추워서 손을 비비던 그날 밤들의 일이 떠오르곤 했다.]
-안톤 체호프 <다락방이 있는 집에서>

4월, 나보코프의 강의록을 꺼내 펼치며 1940년, 50년대 그의 강의를 직접 들었던 학생들 모습을 떠올려 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