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셰프는 근처에서 자고 있는 사람의 얼굴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만족을 느끼는 사람의 말 없는 행복감이 그 얼굴 위에 나타나 있는지 궁금했던 것이다. 그러나 잠든 사람은 죽은 듯이 누워 있었고, 그의 눈은 슬픈 듯 깊이 감춰져 있었다. 그들에겐 생의 잉여라 곤 티끌 만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잠을 잘 때는 심장만이 살아 그들 각자의 목숨을 지탱해줄 뿐이었다.'
[신문에 실린 사진을 보고 안드레이 플라토노프의 드로잉을 그린 적이 있다. 아마도 그 드로잉은 그의 글에서 영향을 받기도 했을 것이다. 그가 러시아어로 글을 썼기 때문에 나는 번역된 글을 읽을 수 밖에 없었다. 한 밤 중의 중얼거림 같은 러시아어. 그는 1899년 보로네슈에서 태어나 1951년 모스크바에서 사망했다. 그 드로잉 아래쪽에 나는 기차표를 붙이고, 거기에 그의 이야기에 나오는 문장을 적었다. '그는 아주 오랫동안, 멀리 떠나 있었다. 아마도 영원히...']

사진을 찍는 사람이 아닌 존 버거는 이론적으로 사진을 공부한 사람도 아니지만 그의 문장 속에는 수 많은 사람들과 풍경의 이미지가 투영 되어 있다.

두 눈에 보이지 않는 이면 바깥의 시선으로 세상의 이미지를 분석하고 포착 한다.
그의 눈에 비친 소설가의 초상화, 혁명가의 마지막 모습, 조각가의 작품 사진들은 이런 문장으로 탄생한다.

[1945년 이후로 자코메티의 인물상은(고양이와 개 조각상도) 점점 더 가늘어졌고, 그 결과 거의 사라지기 직전의 상태에 이르렀다. 트리비에는 그런 식으로 보지 않았다. 그가 보기에 그 인물상들은 이제 막 도착하기 직전의 상태, 말하자면 이제 막 생겨난 상태였다. <아네트>는 그가 관심을 가지는 바로 그 순간에 도착한다. <아네트>는 곧 그 작품에 주어지는 관심이다. 이는 욕망과 관련이 있는 현상이지만 그 이야기를 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미술가들이 그리는 초상화들 대부분은 먼저 모델의 성별과 계급, 그리고 모델들의 익숙한 환경을 최우선적으로 고려해서 모델의 고유한 신체적 특징을 분석해서 그린다.
존 버거의 시선에 사로 잡힌 자코메티의 조각상은 다른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개개인들의 자아, 환원 불가능한 해부학적인 상태로 완성되었다.
자코메티의 조각상들은 빛과 바람에 의해 날아가고 증발해버리고 사라져 버린 살점들이 앙상하게 뼈에 붙어 있다. 인간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우아한 몸짓이나 품위를 갖춘 자세 따위는 없다.

[제 삼자의 눈에, 욕망은 짧은 괄호로 보인다. 괄호 안에서 경험 되는 욕망은 즉각적인 것이며 충족감으로 들어가는 일이다. 충족감이란 보통은 뭔가를 쌓아 가는 것으로 여겨진다. 욕망은 충족감이 무언가를 벗겨내는 것임을 드러낸다. 침묵이 주는 어둠이 주는 충족감.]
존 버거는 작품의 대상이 품고 있는 이미지를 응시하며 보이는 데로 읽고 있다.
그가 쓴 사진에 관한 문장은 세상에 대한 탐구 이자 질문을 통해 사진에서 보여지는 고통,비극,굶주림, 참혹함을 인간이라면 영원히 벗어나기 힘든 삶의 힘겨움과 굴레라는 것을 보여준다.
한 세기가 넘도록 사진가들은 사진이 순수 예술이여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21세기 스마트 폰에 장착된 고화질 카메라를 손에 쥔 사람들은 사진을 찍고, 즐기고 ,찍어 놓은 사진 이미지를 편집하고 분류하며 수 많은 이들과 공유 하고 있다.
일상의 예술로 자리 잡게 된 사진은 회화나 조각 같은 예술 장르 보다 일반인들이 쉽게 접근 할 수 있다. 그래서 인지 사진이란 장르는 대단한 유물이나 보물 같은 고귀함 보다 일종의 개개인의 삶의 방식이 담긴 일상의 문화가 되었다.
오늘도 언제인지 기억하지 못하는 순간에 찍은 사진을 보며 그 순간의 기억을 떠올리고 저장된 이미지를 다른 이미지들과 연결 시키며 슬픈 생각,기뻤던 순간 그리고 누군가를 떠올린다.
사진이란 기록된 순간의 이미지 그 자체로 받아 들여 질 때 예술의 보편적인 가치와 원칙에 부합 되는 것이다.
사진 그 자체로 이미지는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현장의 생생한 모습을 담고 있는 사진, 포착하고 기록하고 기억하는 이미지는 세상을 향한 메시지 이자 질문이다.
하나의 증거 처럼 사진은 현실에 대한 총체적인 상황을 보여 주며 앞으로 나아갈 미래의 방향을 제시 하기도 한다.
[아니, 우리는 누군가를 따라잡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항상 앞으로 나아가는 것, 밤이나 낮이나 동료 인간들과 함께, 모든 인간들과 함께 나아가는 것이다. 그 행렬이 앞뒤로 너무 길어지면 안 된다. 그렇게 되면 뒤에 선 사람들이 앞에 있는 사람들을 볼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즉 인간이 더 이상 서로를 알아보지 못하고 점점 더 드물게 만나고 점점 더 드물게 이야기를 나누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프란츠 파농 <검은 피부, 하얀 가면>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