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8일 다리우스 미요 '봄' 작품번호 18
darius milhaud le printemps, op. 18
각기 다른 소리 음역의 멜로디가 동시에 울리면서 하나의 소리로 들리게 하는 화음에 중점을 두고 중심 조성의 위치를 바꾸며 온음계적( 5개의 온음과 2개의 반음으로 이뤄진 7음 음계도레미파솔라시)인 멜로디로 마무리 했다.

에릭 사티(1866~1925)를 음악적, 정신적 스승으로 모셨던 6명의 음악가들 루이 뒤레(1888~1979), 조르주 오리크(1899~1983), 아르튀르 오네게르(1892~1955), 제르맹 테유페르(1892~), 프랑시스 풀랑크(1899~1963), 다리우스 미요(1892~1974) 이들 6명은 20세기초 프랑스 음악계에서 진보적인 음악을 추구하는 작곡가들이였다.
장 콕토가 1918년에 <수탉과 아를르캥>이라는 제목의 칼럼을 통해 이들 6명의 음악가들을 소개했다.

'프랑스 6인조' 음악가들이 추구 했던 음악적 이상은 독일 스타일의 ‘바그너풍 음악'과 선을 그어버리고 동시에 인상주의 음악을 대표하는 드뷔시의 모호한 리듬에도 반대 한다는 공동 목표를 추구하는 음악가들이였다.
모호한 리듬, 암시적으로 툭 던지는 선율에서 벗어나 간결한 선율의 구조를 갖춘 대위법을 토대로 정확한 음악 규칙과 구성을 추구 했다.

6인조는 1920년부터 각 1악장씩 작곡해서 함께 묶은 6악장의 조곡을 잇따라 발표한다.

6인조는 르 파리지엥 신문의 문화 예술면 첫 장 맨 아래 섹션에 스승 에릭 사티를 맨 앞에 두고 뒤따라가는 사진이 실릴 정도로 화제를 몰고 다녔다.

다리우스 미요(Darius Milhaud, 1892년 9월 4일 ~ 1974년 6월 22일)
6인조 음악가 중 한 명인 다리우스 미요는 음악에 관한 거의 모든 장르를 넘나들었던 작곡가로 6인조 음악가들이 추구하는 음악에만 머물렀던 작곡가가 아니 였다.
다리우스가 추구 했던 멜로디는 다조성(polytonality-동시에 여러 멜로디가 울림) 작곡 기법을 통해 자신만의 개성을 드러냈다.
프랑스의 액상-프로방스 유대계 프랑스 인으로 스스로를 ‘프로방스 출신의 유대교를 믿는 프랑스 인’ 이라고 칭하며 남부 지방의 기질, 활달하고 명랑하고 호탕한 리듬을 추구 했다.
파리 음악원에서 공부 하면서 당시 브라질 대사이면서 개관 시인이였던 파울 클로델의 비서로도 일하며 음악만 파고들지 않았다.
1918년 다리우스 미요는 브라질로 연주회 공연을 떠난다.
하지만 치명적인 스페인 독감 대유행으로 프랑스로 돌아가지 못한 채 브라질에 발이 묶여 버린다.
그해 10월, 음악 잡지 ‘뮤지컬 쿠리어Musical Courier’ 에 이런 기사가 실린다.

“ 프랑스에서 연주 예정이였던 시카고 오페라단의 순회공연이 취소되고 스페인 독감 감염으로 프랑스 주요 도시 콘서트 홀이 폐쇄됐다.”
이어서 작곡가 다리우스 미요가 브라질에 끔찍한 현재 상황을 생생하게 전한다.
“매일 매일 사람들이 죽어나갔고 시신을 실은 짐 수레가 던진 시체가 묘지처럼 쌓여갔다.”

2020년 부터 전세계를 감염 시킨 코로나 팬더믹 처럼 1918년 전 유럽과 미국을 공포의 죽음으로 몰아 넣었던 스페인 독감 ,불과 3년 만에 전 세계 인구의 3분의 1인 5억 명을 감염 시키고 5000만 명을 사망에 이르게 했던 인플루엔자였다.

스페인 유행 독감 감염 공포로 연주회를 즐기지 못하는 시민들에게 미국과 유럽은 전염병에 걸릴 위험 없이 집에서도 오페라를 감상할 수 있는 에디슨 축음기를 판매 하는데 적극 열을 올렸다고 한다.(2020년대는 유튭이 ㅎㅎ)
다리우스 미요는 브라질에서 살아 돌아 온 후 ‘목관 앙상블과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를 작곡한다.(목관악기군은 가장조, 금관악기군은 내림라장조, 현악기군은 바장조 로 이어지면서 동시에 피아노가 이들 음계의 음역에 맞춰나감)

다리우스 미요는 1922년 미국 여행 당시 뉴욕 할렘에서 흘러 나왔던 음악 재즈에 매료되어 자신이 작곡하는 모든 악장에 재즈 선율을 삽입 시키며 재즈 선율을 입힌 발레곡 '천지 창조'를 완성해서 프랑스 음악계를 깜짝 놀라게 한다.
1939년 어수선한 프랑스를 떠나 1940년 미국으로 이민 온 다리우스는 자신의 고향 프로방스 처럼 햇살이 가득 찬 캘리포니아에 정착하며 다양한 음악을 스펀지처럼 흡수 해나간다.
캘리포니아 오클랜드의 밀즈 칼리지에서 음악을 가르치면서(1971년까지 재직함/ 1947년 부터 동시에 파리음악원을 오고 가며 학생들을 가르침)색소폰과 오케스트라를 협연 시키거나 브라질 삼바 리듬에 재즈 선율을 뒤섞어 버려서 복잡한 화성 대신 단순한 화성으로 구성한 소규모 관혁악을 잇따라 작곡하며 현대 음악에 기웃 거렸던 학생들이 우르르 다리우스 수업으로 몰려든다.
다리우스의 수업을 듣는 학생들 중 스티브 라이히, 윌리엄 볼컴, 필립 글래스, 팝의 전설 버트 배커랙도 있었다.

혁명, 전쟁, 질병, 죽음의 그림자를 넘어섰던 다리우스 미요는 항상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휘파람이 저절로 불고 싶은 곡을 만들어봐, 연주회 장을 떠나도 사람들이 흥얼 거릴 수 있는 곡 , 어떤 멜로디도 두려워 하지 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