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나 소설을 읽지 않아도 살아가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
판타지물을 읽지 않아도 주변에 이보다 더 재밌는 것들이 널려 있다.
고전을 읽어야 사고가 깊어지고 통찰력이 생기는 건 아니다. 사회가 제시하는 기준을 통과 한후 그저 여러 기계들에 사용 설명서 정도 이해 할 수 있는 독해력만으로도 세상을 살아가는데 아무런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
그렇다 .어떤 이들은 살면서 단 한 권의 책도 읽지 않는다.
반면 어떤 이들은 책을 통해 일상의 기쁨, 행복, 위안을 얻기도 한다.
읽는다는 건 누군가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는 것이다.
읽는 순간 만큼은 다른 누군가와 정신적으로 교감 하며 말을 읽어나가면서 함께 공감하고 공유하는 것이다.
타인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게 된다면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세상, 나와 너 그리고 당신의 세상이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하게 될 것이다
모든 문화는 이야기를 통해 어떤 사람이 될지 어떤 공동체를 구성할지 어떤 미래로 나아갈지 가르치고 있다.
그렇다. 우리 모두 삶을 구성하는 모든 방식을 이야기 하고 꿈꾸고 있다.
꿈을 꾸지 못한다면, 아니 더 나은 내일을 상상하지 못한다면 절대로 우리 앞에 미래가 기다리고 있지 않을 것이다.
말을 공유 하고 말을 읽고 그리고 상상하는 것
책을 읽는 다는 것 그 중 문학이야말로 마음껏 미래를 상상하고 꿈꿀 수 있는 자유, 허구적 결말을 나만의 언어로 재정의 해나가면서 무엇을 기억하고 두려워해야 할지 판단 할수 있게 될것이다.
SF 거장 어슐러 K 르 귄 작가는 모든 종류에 이야기를 픽션, 즉 소설 처럼 읽고 있다고 한다.
읽고 쓰는 능력이 있는 인간은 결국에는 '지어낸 이야기'로 세상을 바라보기 때문에 르귄 작가는 판타지 영역은 리얼리즘 소설 세계가 다루는 사회보다 더 구체적이고 보편적인 스토리, 불변하는 인간의 실체에 관해 통용되는 언어로 무한히 연결된 사회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고 한다.
마르케스가 '마술적 리얼리즘'으로 이야기 했고 보르헤스는 불멸의 존재에 관해 허구적 상상력을 창조 했고 메리만은 '현대의 프로메테우스 프랑켄슈타인'이라는 유령 판타지를 썼듯이 경험해보지 못한 세상에 대해 실제로 존재 하지 않는 것들의 정신적 재현을 창조해서 우리가 어떤 세상에 살고 있는지, 어디로 갈 수 있을지, 우리에게 남겨져 있는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오직 허구의 세상을 통해 인간은 읽고 들을 수 있다.
[세상에는 나쁜 책들이 있지요. 나쁜 장르는 없어요. 물론 어떤 독자에게 매력이 없는 장르는 있지요. 모든 유형을 똑같이 좋아하거나 가치 있게 여기는 독자라면 무차별하다 못해 무능해질걸요.-어슐러 르귄]
['언어 발명'의 본능은 그러니까 개념을 구술 기호에 맞추고 그 새로운 관계 설정을 생각하며 느끼는 즐거움은 이상한 게 아니라 합리적이다. 그 즐거움의 주된 원천은 분명 소리와 개념 사이의 관계를 숙고 하는데 있다. 우리는 그 즐거움의 다소 약한 형태를 기쁨에 겨운 학자들이 아직 통달 하지 않은 외국어로 시나 훌륭한 산문을 볼때 발휘 하는 독특한 열정에서 볼수 있다.-톨킨]
[영원과는 아무 관계도 없어. 삶 전체를 보려면 삶을 필멸의 것으로 보기만 하면 돼. 난 죽을 거고, 당신도 죽을 거야. 그렇지 않고서 우리가 어떻게 서로를 사랑할 수 있겠어?- 빼앗긴 자들]
그렇다 ,이 작품을 남기고 떠난 작가 어슐러 르귄은 창작을 위해 인생을 허비하거나 희생하지도 않았다. 우리에게 읽는 인간으로 살아가라고 여러 장르의 작품을 남겼다.
르귄 작가가 이 책을 통해 읽고 싶은 책이 있다는 것 그만큼 남아있는 인생을 어제보다 더 풍요롭게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걸 알려준다.
싫은 책을 다룰 때만 아니면 서평 쓰기를 좋아한다는 작가 르귄
이 책에는 허구의 이야기 속에 나오는 동물들, 만들어낸 언어 ,잠,내가 성장한 집, 아나키즘, 시를 읽는 방법 그리고 어느 받침대에 대한 시 까지 들어있다.
특히 문학계에 존재 하는 성차별 문제 여성들이 쓴 책은 계속 차별 당하거나 소외 당하며 중요한 문학 상에서 제외 되거나 작가가 죽게 되면 사후에 부주의하게 다뤄졌던 문제들까지 다룬다.
누가 남성의 글, 여성의 글로 나눠 놨을까?
어떤 특권도 향유 하지 않고 편견 없는 시선으로 작품을 이야기하는 르귄 작가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어쩌면 그림이 그의 답일 것이다. ‘당신‘과 ‘나‘ 그리고 ‘그녀‘가 지나가고 사라진다는 것, 그 무엇도 지속되지 않는다는 것, 모든 것이 변한다는 것, 그러나 단어들이나 그림은 그렇지 않다는 것. 이 그림은 다락방에 걸리겠지만.삶은 여기에 정지해 있다.-등대로]
정교하고 효과적인 서술 기법이 빼어난 버지니아 울프의 '등대로'
20세기 소설의 중심이 였던 제임스 조이스 보다 앞선 의식의 흐름 기법으로 인간 내면의 모습을 묘사했다.
평범한 일상을 통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각기 다른 시점으로 그들의 대화와 생각을 명확하게 구분 짓지 않는 화법을 구사한다.
마치 피카소가 인물의 여러 모습을 담은 큐비즘 스타일처럼 복잡한 인간의 내면 심리를 묘사한 '등대로'는 같은 사건이라도 누가 어떻게 인식 하느냐에 따라 상황이 제각기 달라진다.
인간이 의식하는 과거와 현재는 모두 동일 하지 않다는 사실을 '등대로'라는 작품을 통해 펼쳐보인다.
등대로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삶에 대해 죽음에 대해 끊임없이 걱정하고 고민하고 있지만 누구에게 든 어떤 말도 내뱉지 못한다. 그저 작은 섬을 바라보며 대륙이 아닌 섬, 언젠가 파도에 휩쓸려버리는 그곳이 사라져 버린다면 인간의 삶은 어디에 정착할 수 있을까?
르귄 작가가 올랜도를 읽었을때 열일곱살이였다고 한다.
혼돈의 성장통을 앓던 그 시절에 만난 버지니아 울프의 '올랜도'
[그 사내는(당대의 의상이 성별을 숨기는 면이 있기는 했어도 그가 남자라는 점은 의심할 바 없었으므로) 서까래에 매달려 흔들거리고 있는 한 무어인의 머리통을 잘라 내려고 칼을 휘두르고 있었다.....의상은 세계에 대한 우리의 관점과 우리에 대한 세계의 관점을 변화 시킨다. 가령 바르톨루스 선장은 올랜도의 스커트를 보았을 때 당장 그녀를 위해 차양을 쳐주었고, 그녀에게 쇠고기 한 조각을 더 먹으라고 권했으며, 자기와 함께 대형 보트를 타고 뭍에 오르자고 요청했다. 그녀의 스커트가 흘러내리지 않고 반바지 모양으로 다리에 달라붙게 재단 되었다면 그녀는 이런 대접을 받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대접을 받을 때 보답을 해야 할 필요가 있다. 올랜도는 무릎을 굽혀 절했고, 그의 뜻에 순응했고, 그 선량한 남자의 비위를 맞춰 주었다. 그의 말쑥한 바지가 여자의 스커트였더라면, 그리고 그의 편직 코트가 여성의 공단 보디스였더 라면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옷이 우리를 입는 것이지, 우리가 옷을 입는 게 아니라는 견해를 많은 사실이 뒷받침한다. 우리는 팔이나 가슴의 모양새에 맞게 옷을 만들지만, 옷은 우리의 마음과 두뇌, 혀를 그것에 맞게 만들어 낸다.]
올랜도를 읽으면서 엘리자베스 시대를 떠올렸고 템스 강이 얼어붙었던 겨울을 떠올린다. 단한번도 가본적 없는 그곳에는 얼음 속에 타오르는 모닥불을 바라보며 500년전 세상에 살았던 인물들과 만난다.
평생 개와 가깝게 지내면서 개의 습성을 연구 했던 버지니아 울프 '플러쉬'라는 작품을 통해 개의 마음속으로 들어간다.
자신이 키우는 개는 다른 개들과 다른 사람처럼 행동하는 개라는것을 발견하고 개의 시선으로 사회를 바라본다.
울프의 이런 글쓰기는 열일곱살 르귄에게 엄청난 충격과 감동을 주며 일종의 계시처럼 작가의 삶을 꿈꾸게 만들었다.
무슨 꿈을 꾸고 있을까? 생각하고 귀기울이는 자세로 글을 써나간다면 존재 하지 않았던, 아니 살아본 적 없던 세상과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르귄 작가는 2008년 내셔널 퍼블릭 라디오에 이런 글을 기고 한다.
[러시아의 작가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에게서 소설 쓰는 방법을 많이 배웠다. 시간과 공간을 건너 뛰어 올바른 곳에 착륙하는 방법, 감정을 구현 하는 상세하고 정확한 기술 , 더 많이 생략해서 더 많은 이야기를 할수 있는 방법을 파스테르나크로부터 배웠다.]
'닥터 지바고'의 첫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걷고 걸으며 '영원한 기억'을 부르고 있었고, 잠시 노랫소리가 멎자 회장자(會葬者)들의 발소리, 말발굽소리, 간간이 부는 바람소리가 그것을 이어받아 부르는 것처럼 느껴졌다.]
1917년 피의 혁명 시대에 평범한 러시아 인들은 어떤 삶을 살고 있었을까?
모든 것이 바뀌고 난폭한 폭력으로 새로운 질서가 세워지더니 어느 날 갑자기 무너져버리고 파괴되고 부서지는 신념 거대한 혼돈의 그곳을 평범한 사람들은 어떻게 헤쳐나갔을까?
[아무 걱정 마세요. 죽음은 없습니다. 죽음은 우리의 문제가 아니거든요.
세상의 모든 움직임은 따로따로 보면 전부가 계산된 것으로 보이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그 움직임들은 그것들을 한데 모으는 삶이라는 일반적 흐름에 불분명하게 뒤섞여 마치 술에 취한 것처럼 보였다
기나긴 중단 후에 일어난 최초의 진정한 사건은 현기증이 날 것 같은 열차를 타고 집으로 가고 있다는 것, 온전히 살아남아 돌멩이 하나까지 그리운 집을 향해 간다는 것이었다. 그것이 바로 인생이고, 그것이 바로 경험이며, 그것이 바로 모험하는 자들이 좇고 있었던 것이고, 그것이 바로 예술이 추구하는 것이었다?혈육에게 돌아가는 것, 자기 자신으로의 복귀, 존재의 회복.
거대한 사건에 극적인 증명 같은 것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거대한 사건의 원인을 증명하려는 건 무의미한 일입니다. 그런 건 존재하지 않으니까요.
진정으로 위대한 일은 우주처럼 시작이 없는 법입니다. 그런 일은 마치 언제나 있었던 것처럼, 혹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갑자기 눈앞에 나타나는 겁니다.
대체 왜 내가 모든 것을 알아야 하고 모든 것에 대해 십자가를 져야 하죠? 시대는 나를 존중하지 않고, 바라는 것을 오히려 나에게 강요하는데.
나는 무엇으로 살고, 누구의 말을 들어야 합니까? 나는 살아야 합니다, 나에게는 가족이 있습니다.]
이 작품에는 끝이 보이지 않는 시베리아의 눈밭 속 선로 위에 시커먼 석탄을 뒤집어 쓴 채로 서있는 텅 빈 기차가 등장한다.
유리 지바고가 우랄에서 모스크바까지 먼 길을 홀로 걸어서 집으로 가는 동안 떼죽음을 당한 마을 주민들이 전부 사라진 곡물 밭, 곡식이 무르익은 곡물 밭에 우글거리는 쥐떼들,,,,, 조용하면서도 텅 빈 문장들 곳곳에 무시무시한 살육의 현장을 무질서하게 떠도는 영혼들이 남긴 발자국 처럼 묘사했다.
르귄 작가가 스물 여덞살이 되던 해 생일 선물로 받은 파스테르나크의 '닥터 지바고', 르귄에게 파스테르나크는 신비하면서 몽환적인 리얼리즘을 창조한 작가였다.
500페이지 분량에 40년의 피의 역사를 담은 '닥터지바고'
한 인간의 영혼처럼 방대한 작품, 위대한 러시아 소설의 마지막 작품이라고 극찬한다.
어떤 이들은 소설을 읽는 시간에 보다 더 생산적이고 발전적인 곳에 에너지와 시간을 쏟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 무엇보다 열등한 아니 그 무엇보다 하찮게 여기는 소설, 허구의 이야기는 한번 읽고 나면 팔아 치워 버리거나 처분 해버리는 것일까?
읽는 인간은 보는 인간이 아니다. 읽는 행위는 주의를 기울여야 하고 내내 눈을 뜨고 있어야 한다.
책을 읽는 건 일종의 도전적인 행위다.
책은 영상처럼 움직여주지 않는다. 책은 눈과 머리를 통해 이야기에 집중해야 한다.
마음을 두고 읽지 않는 한 머릿속에 남지 않는다.
한편의 이야기를 읽으려면 활자를 따라 함께 걷고 느끼고 생각하며 이야기 속에 빠져버려야 한다. 책은 깜찍한 물건이다 선을 꼽거나 충전하거나 성능을 향상 시키려고 업데이트 할 필요도 없다. 오로지 손가락만 움직이면 된다.
어떤 책은 책장에 꼽아두기만 해도 그 자체로 주변 분위기를 환하게 만들어준다.
오로지 빛과 사람의 눈 그리고 머리만 있으면 된다.
책은 오래도록 그 자리에 있다. 아니 세대를 뛰어넘는 명작은 영원 불멸이다.
열 살에 어떤 책을 가슴속에 품었다면 열다섯 살 아니 스무살에는 또 다른 책이 가슴속으로 들어 올지 모른다,
어쩌면 평생 동안 단 한 권의 책만 읽게 될지 모른다.
책은 영원히 곁에 있어주지만 인간의 수명은 유한하다.

르귄 작가가 책을 통해 세상을 읽었듯이 이 책에 언급된 모든 작품들을 2021년 한해동안 모두 찾아 읽어버릴것이다. 종이, epub 가리지 않고 모조리 찾아 어떻게든 읽을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