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본 백석 시집 - 개정판
백석 지음, 고형진 엮음 / 문학동네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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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본명 백기행 白夔行)은 1912년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나 오산고보와 일본의 아오야마靑山학원을 졸업하고 조선일보 출판부에서 근무했다. 

1930년 조선일보 현상문예에 소설 '그 모母와 아들'이 당선됐고, 1935년 조선일보에 시 '정주성定州城'을 발표하며 시단에 나왔으며, 1936년 시집 '사슴'을 간행했다. 광복 후 고향에 머물다(만주를 유랑하다 고향 정주로 돌아감) 1996년(85세)에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남북이 분단되고, 북에 머물러 있던 백석에 대한 이후 행보는 알려진 바가 없었다.


1962년 북한의 문단에서 사라진 이후 1996년 작고할 때까지 농사꾼으로 살다간 백석

 

‘나는 북간에 혼자 앓아 누워서

어느 아침 의원을 뵈이었다.

의원은… 묵묵하니 한참 맥을 짚더니

문득 물어 고향이 어데냐고 한다.'('고향')


백석이 이 시를 썼던 1930년대는 가난과 징병으로 가족의 해체와 이산이 발발했던 시기였다.

백석에 시어에는 자신이 태어난 마을의 자연과 사람들이 들어 있다.

그의 시 한 편 한 편은 기억에 한조각 처럼 또렷하게 떠오른다.

평안북도 정주 관서지방 그곳을 가보지 않은 독자라도 백석의 시를 읽다 보면 어느새 북방의 어느 움막이나 골짜기에 서성거리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여우가 나오는 골짜기에 사는 가족이란 뜻의 ‘여우난골족’에서는 유년기의 경험을 토속적인 분위기로 그려낸다. 


여우난골족


명절날 나는 엄매 아배 따라 우리집 개는 나를 따라 진할머니 진할아버지가 있는 큰 집으로 가면
얼굴에 별자국이 솜솜 난 말수와 같이 눈도 껌벅거리는 하루에 베 한 필을 짠다는 벌 하나 건너 집엔 복숭아 나무가 많은 신리 ( 新理 ) 고무 고무의 딸 이녀 ( 李女) 작은 이녀


열 여섯에 사십 ( 四十) 이 넘은 홀아비의 후처가 된 포족족하니 성이 잘 나는 살빛이 매감탕 같은 입수과 젖꼭지는 더 까만 예수쟁이마을 가까이 사는 토산 ( 土山) 고무 고무의 딸 승녀 ( 承女 ) 아들 승( 承) 동이 육십리( 六十里) 라고 해서 파랗게 뵈이는 산을 넘어 있다는 해변에서 과부가 된 코끝이 빨간 언제나 흰옷이 정하든 말 끝에 설게 눈물을 짤때가 많은 큰골 고무 고무의 딸 홍녀 ( 洪女) 아들 홍(洪) 동이 작은 홍 ( 洪) 동이


배나무접을 잘하는 주정을 하면 토방돌을 뽑는 오리치를 잘 놓는 먼섬에 반디젓 담그려 가기를 좋아하는 삼촌
삼촌 엄매 사춘누이 사춘동생들이 그득히들 할머니 할아버지가 있는 안간에들 모여서 방안에서는 새옷의 내음새가 나고 또 인절미 송구떡 콩가루차떡의 내음새도 나고 끼때의 두부와 콩나물과 볶운 잔디와 고사리와 도야지비계는 모두 선득선득하니 찬것들이다


저녁술을 놓은 아이들은 외양간섶 밭마당에 달린 배나무동산에서 쥐잡이를 하고 숨굴막질을 하고 꼬리잡이를 하고 가마 타고 시집가는 놀음 말 타고 장가가는 놀음을 하고 이렇게 밤이 어둡도옥 북적하니 논다


밤이 깊어가는 집안에 엄매들끼리 아르간에서들 웃고 이야기하고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웃간 한 방을 잡고 조아질하고 쌈방이 굴리고 바리깨돌림하고 호박떼기하고 제비손이구손이하고 이렇게 화디의 사기방등에 심지를 몇 번이나 돋구고 홍게닭이 몇 번이나 울어서 졸음이 오면 아릇목싸움 자리싸움을 하며 히드득거리다 잠이 든다


그래서는 문창에 텅납새의 그림자가 치는 아침 시누이 동세들이 욱적하니 흥성거리는 부엌으론 샛 문틈으로 장지문틈으로 무이징게국을 끓이는 맜있는 내음새가 올라오도록 잔다


유년 시절 기억속에 머물러 있는 동화적이고 서정적인 분위기를 후각, 시각, 미각 등의 이미지를 다양하게 구사해서  평북지방의 방언과 토속적 소재들을 통해 얼굴이 약간 얽은 신리 고모, 열여섯 살에 마흔이 넘는 홀아비의 후처로 들어간 토산 고모, 술에 취하면 토방 돌을 뽑겠다고 주정하는 삼촌 등 무언가 부족해 보이는 소박한 고향 사람들의 삶의 애환을 노랫 가락처럼 써내려갔다.



가즈랑집

승냥이가 새끼를 치는 전에는 쇠메 들 도적이 났다는 가즈랑고개

가즈랑집은 고개 밑의
山너머 마을서 도야지를 잃는 밤 증생을 쫓는 깽제미 소리가 무서웁게 들려오는 집
닭 개 즘생을 못 놓는
멧도야지와 이웃사촌을 지나는 집

예순인 넘은 아들 없는 가즈랑집 할머니는 중같이 정해서 할머니가 마을을 가면 긴 담뱃대에 독하다는 막써레기를 몇대라도 붙이라고 하며

간 밤엔 섬돌 아래 승냥기가 왔었다는 이야기
어느메 山골에선간 곰이 아이를 본다는 이야기

나는 돌나물김치에 백설기를 먹으며
옛말의 구신집에 있는 듯이
가즈랑집 할머니
내가 날 때 죽은 누이도 날 때
무명필에 이름을 써서 백지 달어서 구신간시렁의 당즈깨에 넣어 대감님께 수영을 들였다는 가즈랑집 할머니
언제나 병을 앓을 때면
신장님 단련이라고 하는 가즈랑집 할머니
구신의 딸이라고 생각하면 슬퍼졌다

토끼도 살이 오른다는 때 아르대즘퍼리에서 제비꼬리 마타리 쇠조지 가지취 고비 고사리 두릅순 회순 山나물을하는 가즈랑집 할머니를 따르며
나는 벌써 달디단 물구지우림 둥글레우림을 생각하고
아직 멀은 도토리묵 도토리범벅까지도 그리워한다

뒤울안 살구나무 아래서 광살구를 찾다가
살구벼락을 맞고 울다가 웃는 나를 보고
밑구멍에 털이 몇자나 났나 보자고 한 것은 가즈랑집 할머니다
찰 복숭아를 먹다가 씨를 삼키고는 죽는 것만 같어 하로종일 놀지도 못하고 밥도 안 먹은 것도
가즈랑집에 마을을 가서
당세 먹은 강아지같이 좋아라고 집오래를 설레다가였다



백석 시에 나타난 동식물명도 매우 구체적이어서 ‘족제비’와 ‘복족제비’를 구별하고 조개도 ‘가무락조개’, ‘곱조개’, ‘콩조개’ 등으로 세분화해 사용한다. 

‘여우난골’만 보더라도 백석은 ‘어치’라는 새와 벌레 먹은 배인 ‘벌배’와 야생 돌배나무의 열매인 ‘돌배’와 산사열매인 ‘띨배’를 나열하며, ‘배’로 끝나는 말놀이까지 연상시키고 있다. 

백석은 식민지 시대를 견디는 시인의 내면을 드러내기도 했다. 

시제목은 누군가를 향해 보내는 편지봉투에 씀직한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에 헤메이었다.
바로 날도 저물어서,
바람은 더욱 세게 불고, 추위는 점점 더해 오는데,
나는 어느 목수木手네 집 헌 삿을 깐,
한 방에 들어서 쥔을 붙이었다.
이리하여 나는 이 습내 나는 춥고, 누긋한 방에서,
낮이나 밤이나 나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 같이 생각하며,
딜옹배기에 북덕불이라도 담겨 오면,
이것을 안고 손을 쬐며 재 우에 뜻없이 글자를 쓰기도 하며,
또 문밖에 나가디두 않고 자리에 누워서,
머리에 손깍지벼개를 하고 굴기도 하면서,
나는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연하여 쌔김질하는 것이었다.
내 가슴이 꽉 메어 올 적이며
내 눈에 뜨거운 것이 핑 괴일 적이며,
또 내 스스로 화끈 낯이 붉도록 부끄러울 적이며,
나는 내 슬픔과 어리석음에 눌리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을 느끼는 것이었다.
그러나 잠시 뒤에 나는 고개를 들어,
허연 문창을 바라보든가 또 눈을 떠서 높은 턴정을 쳐다보는 것인데,
이 때 나는 내 뜻이며 힘으로, 나를 이끌어 가는 것이 힘든 일인 것을 생각하고,
이것들보다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 나를 마음대로 굴려 가는 것을 생각하는 것인데,
이렇게 하여 여러 날이 지나는 동안에,
내 어지러운 마음에는 슬픔이며, 한탄이며, 가라앉을 것은 차츰 앙금이 되어 가라앉고,
외로운 생각만이 드는 때쯤 해서는,
더러 나줏손에 쌀랑쌀랑 싸락눈이 와서 문창을 치기도 하는 때도 있는데,
나는 이런 저녁에는 화로를 더욱 다가 끼며, 무릎을 꿇어 보며,
어니 먼 산 뒷옆에 바우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어두어 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식민지 시대에서 백석은  슬프고 모진 운명을 숙명적으로 받아들이다가도 한겨울에 모진 바람과 싸락눈을 꿋꿋이 견뎌내는 갈매나무 지만 어느새 부모, 형제, 아내, 집마저 잃고 떠돌아 누가 편지를 보내도 받아볼 수 없는 처지에 있다.


시를 썼던 손으로 가축을 길렀던 시인 백석 1962년 5월, 삼수군 협동조합에서 일하던 백석은 '아동문학'에 '나루터'라는 동시를 발표한다. 1956년부터 다시 시를 쓰기 시작한 백석이  쓴 찬양시이자, 살아생전 발표한 마지막 시였다.


그후 북한 당국에 의해 백두산이 있는 양강도의 삼수읍, 그중에서도 가장 오지인 독골에 보내진다. 거기서 그가 무엇을 했는지는 알 수 없다. 머릿속에 끊임없이 시어를 지어냈을까? 아니면 모던 보이로 경성을 활보했던 시절을 그리워했을까?


희수무레하고 부드럽고 수수하고 슴슴한 것, 그지없이 고담하고 소박한 것들이 하나둘 북한에서 사라져 갈 때 백석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다채롭고 영롱한 빛을 잃어가는 현실을 목도하며 백석은 어떤 생각을 지우고 어떤 생각의 옷을 입었을까.

자신의 문학적 재능이 까맣게 불타는 것을 스스로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시인


흰 바람벽이 있어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 간다
이 흰 바람벽에
희미한 십오 촉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던지고
때글은 다 낡은 무명 샤쯔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언 일인가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러퍼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물에 손은 담그고 무이며 배추를 씻고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늬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즈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조 앉어 대구국을 끓여 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그런데 또 이즈막하야 어늬 사이엔가
이 흰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굴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어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 찬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하는 듯이 나를 울력하는 듯이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 하눌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쓰 잼' 과 도연명과 '라이넬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



시인으로 기억되지도 못했고, 사랑하는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지도 못했으며, 시골 학교의 선생이 되지도 못했다. 

하지만 나는 오늘도 그에 시를 읽고 있다.

아니, 어디선가 그가 한때는 시인이였는지 몰랐던 이들도 그에 시를 읽고 있을 것이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燒酒)를 마신다

소주(燒酒)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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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0-12-23 14:5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래 전에 먼 길을 떠나면서
백석 시인의 시집을 들고
갔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그 오랜 시간 동안
끝내 버티고 읽지는 않았더라는.

왜 그 두터운 시집을 들고 갔는지
모르겠네요.

scott 2020-12-25 22:12   좋아요 4 | URL
아!
저는 도서관에서 빌렸던 백석 시집을 제친구가 가져갔는데 (자신이 대신 반납해주겠다고 했음) 친구가 반납하리라 굳게 믿고 유학을 갔어요 ㅋㅋㅋ
문제는 3개월뒤에 부모님이 도서관책 연체비를 냈다고 해서 (친구에 친구가 백석에 시집을 가져가고 군대에 가버림 ㅋㅋ)
친구가 미안하다고 제가 있는나라로 백석에 새시집과 다른책들도 여러권보내줬는데
방학때 제가 다른곳으로 연수를 떠나는동안 제가 묵고 있는 숙소를 지인(한국인)에게 렌트했는데 그분이 슬쩍 백석 시집만 가져갔어요 ㅋㅋㅋ

이제야 새롭게 구입했는데 (그동안 읽으면서 필사한것만 같고 있었음)

돌고 돌아도 새롭게 시를 읽어도 언제나 손에 쥐고 읽고 싶은시는 ‘백석‘입니다.
^@^

페넬로페 2021-01-09 17:0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추운 겨울밤을 백석의 시로 감상에 젖게 하시는 scott 님의 글은 당연히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려요.
페이퍼와 리뷰의 글, 둘다 너무 좋아요^^

scott 2021-01-09 20:41   좋아요 0 | URL
머루밤

[불을 끈 방안에 횃대의 하이얀 옷이 멀리 추울것 같이
개방위로 말방울 소리가 들려온다.
문을 연다 머루빛 밤한울에 송이 버슷의 내음새가 났다.]

제글들 이렇게 읽어주시고 좋은 말씀해주시는
페넬로페님
주말 따스하고 행복하게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