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이
  • 6월 17일 오후 10:51 공개
Mari Ruti
‘작은 살인’을 저지르는 사람들. 언어 폭력만을 당하고 있을 뿐, 실질적인 폭력을 당한 적은 한 번도 없다는 말을 자랑스럽게 하는 걸 들으면서 든 생각은 일단_ 너는 지금 영혼이 죽어가고 있는 건 아닐까 였다. 네 육체에 멍이 들지 않았다고 해서 지금 네가 만족한다는 건 너무 기이하게 보였다. 너는 네 영혼을 죽이는 그 말들이 아무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고 여기지만 과연?

하나 더, 완전히 질려버려서 학을 떼게 만든 바탕이 뭔지도 알았다. 자신이 어마무시한 폭력을 휘두르고 있다는 걸 자각하지 못하고 공공연하게 자기 포장을 하는 것도 나르시스트들의 공통점. 숨이 막힐 정도로 말로 내뱉는 주먹질과 발길질. 폭력을 행사하고 있지만 이건 너무 자연스럽잖아, 혐오하는 이들에게 혐오 발언을 하는 걸 지극히 자연스럽게 여기는. 곁에서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공포와 혐오가 느껴져 멀리 떨어지고 싶다 여겼다. 폭력을 당한 이들이 왜곡된 변형으로 또다른 폭력을 휘두른다는 건 역시 트라우마의 연속 선상이라고 봐야 할까? 트라우마를 치유하고 내일로 나아가려는 행동들은 그렇다면 어디에서?

제일 견디지 못하는 건 언제나 말들이다. 아울러 죽어가는 목숨에 숨을 불어넣는 것 또한 그저 말들이고. 스스로를 우습게 만드는 건 언제나 그 자신이 뱉어내는 말들이다. 그 말들 사이로 악취가 난다면 그런 우스운 말을 뱉어내는 거고 그 말들 사이로 향기가 난다면 그 말들의 무게가 공허하지는 않을 것이다. 숨 한뼘, 말소리들 그 사이로 드러나는 자신의 무게. 오늘 한강 소설로 독서모임하면서도 느낀 것들.

내일 계속.


트라우마는 복잡하다. 나에게 트라우마를 안기는 사람들이 항상그것을 의도하는 것은 아니다. 가끔은 나의 출현으로 삶이 파탄 나서 그 충격으로 그랬을 수도 있다. 그것까지 신경 쓸 수 없을 만큼우울해서, 또 가끔은 본인들이 겪은 심한 트라우마 때문일 수도 있다. 극심한 가난이나 가정의 비극, 신체적인 학대 외에도 이브 세지윅Eve Sedgwick이 ‘충격적인 말zinger‘이라고 부른 환경이 트라우마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나의 경우도 그랬다. 부모님이 아무 생각 없이 내뱉는 하지만 그걸 듣는 입장에선 고통으로 휘청거리게 되는 감정적 모욕과 무시? 예상 밖의 말은 갑작스러워서 충격을 주고, 예측 가능한 말이라도 덜 속상한 것은 아니다.
정신분석가인 마거릿 크래스트노폴Margaret Crastnopol은 이런 미세트라우마가 관계의 구조를 찢는다고 설명하고, 이 충격들을 가리켜 "작은 살인"이라 부른다. 그것은 시기심과 증오, 조롱과 무관심, 포기를 전달함으로써 삶의 질을 부식시킨다. 몇몇 작은 살인들은 의도적이지만, 고의가 아닌 것들도 있다. 그것들은 켜켜이 쌓이는 다락방의 먼지처럼 고요히 축적되어 있다가, 실수로 떨어뜨린 성냥개비 하나로 발화되어 건물 전체를 불태워 버린다. 그것들은 얼마든지 알아차릴 수 있지만 사소해 보인다는 것이 문제이다. 쉽게 무시해도될 가벼운 골칫거리 정도? 그러나 계속 반복됐을 때, 그것들은 자존감과 선량함에 대한 우리의 기본적인 감각마저 썩게 하고 마음에 짙
은 멍을 남긴다.
나의 부모님도 그런 말들에 에워싸여 살았기 때문에 충격적인 말을 하는 데 익숙했다. ‘충격적인 말‘은 농담을 포함한 유순한 표현에곧잘 묻힌다. 크래스트노폴은 "조심해, 이 녀석아. 어떤 여자가 너같이 바보 같은 놈이랑 결혼하고 싶어하겠냐?" 같은 농담 같지 않은농담을 일삼은 한 남성의 아버지를 예로 든다. 나의 아빠도 그랬다.
대학원 시절, 고향에 갈 때마다 아빠는 나한테 절대로 남자친구가생길 리 없다고 끊임없이 확인시켰다. 언젠가는 사실 있다고 고백하자, 무시조로 "응, 그래." 하셨다. 아빠의 반응은 일곱 살 무렵부터 이미 사랑받기 어려운 아이, 남자친구 따윈 있을 수 없는 아이로 여겨져 온 나에 대한 자연스러운 무시였다. 그래, 그렇게 말하고 싶겠지.
모든 미세 트라우마가 꼭 강자만의 전유물도 아니다. 크래스트폴은 부모와 자식 관계에서 아이들이 여러 방법으로 부모의 신경을 긁을 수 있는데, 특히 부모와 아이의 성향이 정반대인 경우, 활달한아이는 내성적인 부모를 탈진 상태로 몰아간다고 지적한다. 내가 그러지 않았을까. 항상 녹초가 되어 있는 아빠를 내가 몰아붙인 것은아닐까, 완전히 지친 아빠에게는 감당하기 어려운 자신감과 열의가아니었을까, 그래서 그렇게 냉담한 말로 후려갈긴 것 아닐까.
트라우마의 발생 구조도 언제나 급작스럽고 충격적인 것만 있는것은 아니다. 예상 외로 점진적이고 이해 가능한 구조에서 많은 트라우마가 생겨난다. 영구적인 흔적을 남기는 성차별이나 인종차별같은 집단적인 불평등에서 생기기도 하고, 한부모가정이나 조손가정처럼 장기간의 왜곡된 대인 관계에서 초래되기도 한다. 그리고 이
렇게 생긴 미세 트라우마도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가 세상을 경험하고 반응하는 기본적인 방식, 즉 우리의 ‘인격‘을 만든다. 이런 의미에서, 내가 ‘어떤 사람인가‘는 내가 ‘누구에게 어떤 상처를 받았는가‘와 깊은 관련이 있다.
신자유주의와 생명관리정치 쪽 비평가들이 공통되게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것은, 높은 성과와 생산성 및 지속적인 자기계발, 끊임없는 쾌활함을 강조하는 사회 이데올로기가 이 사실을 무시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어떤 삶을 살든지 간에 반드시 "즐기라"고 권한다.
어떻게든 삶을 최대한 꽉 채우고, 모든 기회를 활용하고, 매 순간 꿀을 짜내라! 이 시류는 무엇 하나 제대로 즐길 수 없을 만큼 빠르게이 장소에서 저 장소로 즐거움의 원천을 옮겨 가고, 냉혹하게 즐거움만을 좇는 역설적인 상황으로 우리를 몰아간다. 우리는 결국 우리에게서 영원히 멀어지기만 하는 만족감을 움켜쥐려는 헛된 시도에 에너지를 허비한다. 마찬가지로 결국엔 트라우마를 안겨 줄 게 뻔한 시나리오(가령 좌절감만 줄 진로 계획)에 나의 행복이 달렸다는 잔혹한 낙관주의에 빠져 그 과정에서 입는 트라우마와 피해를 억누른다.
그리하여 많은 이들이 이런저런 이유로 계속 실망만 반복되는 삶의 조건 아래서 생존 가능한 삶을 구축하기 위해 갖가지 양면적이고일관성 없는 시도를 벌인다. 우리는 어떻게든 찢어져 버린 삶을 보수하고 재건한다. 그래서 삶을 견딜 만하게 해 주는 작은 즐거움들에 몰입한다. 음식, 약물, 술, 텔레비전, 멍 때리기, 더 나은 삶에 대한몽상 등등. 벌랜트는 흔한 전략인 과식을 예로 든다. 그녀가 "더딘 죽음"이라고 부르는 과식은 많은 미국 노동자들이 누릴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좋은 삶이다." 더딘 죽음을 부르는 과식은 다른 자가치료 방법과 마찬가지로 스트레스가 많은 근로 환경과 다른 형태의 궁핍에 대한 반응일 수 있다. 과식은 또한 속도, 효율, 끊임없는 경계를 요구하는 일의 압도적인 리듬이나 반복적인 업무와 단조로운 기분으로 이루어진 일상의 리듬을 거역하는 무의식적인 시도일 수 있다. 따분한 일상에 만족감을 덩어리째 들여오는 손쉬운 방법.
현대 사회가 부과하는 속도는 우리를 지치게 하고 삶의 질을 갉아 먹는다.
이념은 우리 문화의 지배적인 행복 시나리오를 만들어 낸다. 그리고 은밀하게 대안을 차단시켜 우리로 하여금 어떤 것을 특정한 방식으로 하게 할 뿐만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는 할 수 없게 만들어 버린다. 대학원 세미나 중 자신이 선택한 젠더로 통할 수 있도록 성전환자ranssexual들을 지도하는 전문 공연예술가를 초빙한 적이 있다. 그는 남자처럼 행동해 볼 사람으로 나를 선택했다. 아마도 하이힐과미니스커트, 화장 등 겉으로 드러난 나의 규범적인 여성성 때문이었을 것이다. 난 우선 남자처럼 걸어 봐야 했다. 여성스러운 둥근 엉덩이도 아닌데 이성애 남자처럼 못 걸을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난처절하게 실패했다. 내 몸이 내가 원하는 동작을 취하게 할 수 없었다.
남자처럼 물리적 공간을 차지하는 데에도 모두 실패했다. 남자처럼 자신감 있게 앉는 방법을 난 몰랐다. 옆 좌석에 앉은 사람의 공간까지 침범하여 6시간 동안 비뚤어진 자세로 앉는 바람에 비행기를내릴 때쯤이면 등이 쑤시게 만드는 그 자신감 말이다. 일부 남자들은 본인의 넓은 어깨 탓이라고 변명하지만, 그것은 흔히 그들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남성 자격‘에서 기인한 것임을 나는 안다. 옆자리 승객이 여자일 때에는 그쪽이 아무리 덩치가 크더라도 그런 일을당한 적이 없다. 장거리 여행 때 부디 여자 옆에 앉게 하소서. 그럼남자 둘이 사이좋게 앉는 경우는? 팔을 내리는 쪽이 "계집"인 건가?
결국 그 대학원 세미나 실험에선 내가 너무 웃는 바람에 남자처럼 행동하는 데에 실패했다. "얼굴에서 미소를 지우지 않으면 아무도 당신이 남자라고 믿지 않는다." 그 공연예술가는 내게 충고했다.
내가 받은 성중립적 양육 방식은 스칸디나비아 소녀에겐 일반적이었기 때문에 미국의 젠더 관념은 큰 문화적 충격이었다. 이 충격•은 여전히 극복되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럴 것 같다. 인종· 민족.
종교에 기초하여 사람을 가정하지 않듯, 젠더에 근거해 사람을 판단하는 일은 결단코 하고 싶지 않다.
아빠에게 자동차 타이어를 교체하는 법을 배운 지 20년 후, 당시의 남자친구와 메인주 북부 도로를 달리던 중 바퀴에 펑크가 났다.
남자친구는 옆에서 내가 바퀴를 갈아 끼우는 걸 지켜보았다. 그런데이 장면을 목격한 경찰관들이 차에서 내리더니 남자친구에게 "숙녀가 남자 일을 하도록 내버려 둔다"며 남자의 수치에 관한 장광설을늘어놓았다. 그들이 총을 가지고 있어서 아무 말을 하지 않았지만, 나는 속으로 씩씩댔다. 그들은 남자친구뿐 아니라 소위 "숙녀"인 나까지 모욕했기 때문이다.
성차 이념의 자연화는 미국 문화를 포함해 대부분의 문화에서생명관리정치적 조건화의 중요한 부분으로, 이성애적 결혼을 특권화시킨 토대이기도 하다. 젠더화된 행동 규칙들은 일찍부터 그리고 대부분 무의식적으로 내면화되기 때문에 나중에 배운 것일지라도마치 타고난 경향처럼 보인다. 자연 대 양육 논쟁이 부른 일반적인오해는 양육의 결과가 자연의 결과보다 변경하기 쉽다는 것이다. 이는 꼭 그렇지 않다. 사회적으로 형성된 행동 방식은, 젠더화된 행동
방식을 포함해서 우리의 정체성과 거의 완벽하게 통합되어 버리기때문에 그것을 변경한다는 것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는 것과 비슷하다.
하지만 푸코는 생명관리정치적 조건화가 전적으로 완벽하지는 않으며, 지배적인 사회 이념들은 오작동을 유발하는 틈새와 분열, 취약점들을 포함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무엇보다도, 스스로 저항 세력을 만들어 내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성적 행위를 통제하려는 시도는 일련의 새로운 성행위를 생산할 수 있고, 특정한 성적 표현 경로가 차단되면 사람들은 새로운 경로를 만들어 내고 그에 따라 다수의 전혀 다른 성적 가능성이 만들어진다. 이런 점에서 모든 사회적 제한은 일련의 대항 세력을 만들어 낸다.
이것은 우리가 왜 지배적인 사회적 가치나 신념, 이상에 의문을제기할 수 있는지, 사회가 왜 변할 수 있는지를 설명해 준다. 변화가너무 더딘 것 같아도, 사실상 페미니즘 덕분에 성에 관한 규범들이불과 몇 십 년 만에 급격하게 변화하여 20세기 중반으로만 돌아가도여기저기서 절규가 터져 나올 것이다. 이제는 성전환자와 트랜스젠더의 정체성을 포함해 대안적인 성적 표현들이 눈에 띄게 확산되어 여전히 지배적인 젠더 이분법과 이성애가부장제에 빠르게 침투하고있다. 언제나 지배적인 이상에 용감하게 맞서 반항하는 사람들 덕분에 젠더 유동성과 젠더 변이가 점점 더 보편화되고 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우리 사회의 전통적인 젠더 관념은 무너지고 있다. 물론순순히 물러나지는 않겠지만, 현재 상식으로 통하는 성(젠더) 규범은 플로피 디스크나 카세트 플레이어, VCR처럼 낡고 못 쓰는 것이 되리라 난 예상한다.

비밀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