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북은 스스로 ‘호생관‘이라 이름지어 불렀고 결국 호생관으로 일생을 살았다. 거기에는 두 개의 얼굴이 있었다. 그가 자신의 서정과 기개를 남김없이 발현하면서 그림으로 영상과 얘기할 때는 명작을 낳았다. 그러나 그저
‘호생관‘이라 말하며 먹고살기 위해 그림을 그릴 때는 호생관이라는 것이 한낱 노동을 의미할 뿐이었다.
호생관 최북, 그는 화가로서 성공할 수 있는 기량 있는 인물이었다. <풍설야귀인>과 <공산무인도>가 그것을 말해준다. 그 기걸 찬 성품이 화면 속에 녹아들었을 때는 심사정이나 이인상 못지 않은 높은 경지의 예술을 보여주었다. 이른바 ‘기절한 작품을 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세월은 결코 그의 편이 아니었다. 비천한 신분이라는 이유 때문에 자기를 충분히 실현할 수 없었다. 칠칠이로서는 천분(天分)을 다하지 못하는 그 분풀이를 세상에 퍼부으며 살았다.
한 인간의 굽힐 줄 모르는 기개는 어느 분야에서 일하든 창조적 원동력이될 수 있다. 예술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풍설야귀인>과 <공산무인도>는 그런 기개의 소산이다. 그러나 최북의 기개라는 것이 세상도, 대중도, 역사적평가도 의식하는 일없이 자포자기의 폭력에 빠질 때면 그것은 대책 없는 오만이었고 그는 한낱 기인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사실 그것은 일종의 자기기만인 것이었다.
호생관 최북과 거의 동시대를 살며 진경산수나 속화가 아니라 문인화풍으로 일관한 현재 심사정, 능호관 이인상과 비교해보면 이들 3인은 모두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사람들이었다. 현재는 몰락한 양반이었고, 능호관은 서출이었고, 호생관은 중인 출신이었다. 그러면서도 이들은 모두 문인화풍을지향한 문사 기질의 화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