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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 ‘죄인‘에서 봤던 위버멘쉬가 좀 더 대중적으로 해석된 버전이다.
지은이가 니체라는데 니체가 썼다고 하기엔 좀 각색이 되었나…? 도저히 시대상 나올 수 없는 스마트폰이 등장하는 거로 봐서는 니체를 공부한 작자가 지어낸 자기개발서 정도로 보는 게 적절하다.
진정 강한 사람은 위로를 기다리지 않는다. 자기 자신이 스스로의 위로가 될 수 있는 사람이다.
그제야 문득 차라리 여기서 벗어나 다른 곳으로 가겠다는 생각이 스친다.
그런데 그 여기‘가 어디인지 아는가? 바로 당신이 한때 사랑하고 의지했던 모든 것이다. 안전하다고 믿었던 것 들이 어느새 벽이 되어버린다. 익숙함이 주면 안도감이 두려움과 반감으로 바뀌면서 해방이 시작된다.
그러니 행복만을 위해 살지 마라. 행복은 당신이 가는 길에서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것이지, 목적지 자체가 아니다.
진짜 깨달음은 때로는 불편하고, 원치 않는 답과 마주하는 순간에 찾아온다.
그 불편함이야말로 우리를 성장시키고, 세상을 더 넓게 볼 수 있게 한다. 삶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길을 잃지 않 는 것이다. 어디로 가고 있는지,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지, 그 과정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일이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세상은 원래 좋은 곳이며 결국 다 잘될 거라고 믿는 사람과, 세 상이 힘들고 불공평하다고 여기는 사람.
어떤 이들은 이 세상이 그나마 잘 돌아간다고 믿고, 또 다른 이들은 엉망진창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둘 다 뭔가 부족하다. 결국 세상은 그저 세상일 뿐이니까.
세상 자체가 특별히 선한 것도, 악한 것도 아니다. 우리가 그렇게 규정하고 싶어 할 뿐, 자연과 세상의 본질에는 그런 이분법적 가치가 없다.
그러니 굳이 세상을 좋게만 혹은 나쁘게만 보려 애쓰지 마라. 더 중요한 건, 그 속에서 내가 어떤 삶을 살 것인 가이다.
세상이 보여주는 온갖 모습에 휘둘리지 말고, 당신이 진정 원하는 삶의 의미를 찾아라. 어떤 길을 걸을지, 어떤 사람이 될지 결정하는 것은 결국 당신이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몰두하기 보다는, 그 안에서 내가 걸어갈 길이 무엇인지 고민하라. 남들이 만든 규 칙과 기준에 맞춰 살기보다는, 스스로의 방식으로 세상을 살아내는 법을 배워라.
문제는 사람들이 이 도덕을 절대적이라고 믿어버린다는 점이다. 도덕이 시대에 따라 변해왔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유일한 진리인 양 맹목적으로 따른다.
하지만 도덕은 언제든 바뀔 수 있다. 우리가 따르는 도덕이 과연 우리를 더 강하고 자유롭게 만드는지, 아니면 오히려 묶어두고 있는지 스스로 물어봐야 한다.
도덕은 강요가 아니라 선택의 문제다. 그 도덕이 우리를 성장하게 한다면 수용할 수 있지만, 반대로 가능성을 가로막는다면 우리는 그 너머로 넘어설 준비도 해야 한다.
위선이라는 단어가 주는 부정적 느낌과 달리, 모든 것은 흉내에서 시작된다. 배우가 무대에서 대사를 연습하듯, 우리는 처음엔 의도적으로 어떤 태도를 취한다. 하지만 그 연기가 점차 익숙해지면서, 결국 진짜가 되어간다.
예를 들어, 친절한 사람이 되고 싶다면 처음엔 일부러 웃고 따뜻한 말을 건네야 한다. 가면을 쓰는 것처럼 어색 할 수도 있지만, 반복하다 보면 그 친절함이 어느 순간 진짜 내 모습이 된다.
그러니 당신이 되고 싶은 모습이 있다면, 먼저 그 모습을 연기해보라. 처음에는 조금 어색해도, 그 노력이 결국 당신을 원하는 모습으로 바꿀 것이다.
그러나 감정은 변한다. 어제의 분노도, 오늘의 눈물도, 시간이 흐르면 희미해진다. 그렇다면 그 강렬했던 감정 은 정말 ‘진짜‘였을까, 아니면 그 순간에만 그렇게 보였던 걸까?
프랑스 귀족 작가 라 로슈푸코는 ‘사람들이 미덕이라 부르는 것은 종종 자기 욕망을 포장한 것‘이라고 말했다.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다. 이해하기 힘든 행동을 하는 사람을 볼 때, 그가 단순히 ‘이상한 사람‘이 아니라 아직 배워가는 중인 사람이라고 생각해보면 어떨까? 우리도 성장했듯이, 그들도 언젠가 달라질 수 있다.
하지만 확신이 강하다고 해서 진실은 아니다
그러나 진심이 곧 진실이라는 법은 없다. 때로는 진심이 가장 강력함 착각이 될 수 있다.
진심으로 말한다고 해서 항상 진실을 말하는 건 아니다. 우리는 종종 진솔함과 진실을 혼동한다.
영원히 사랑한다는 말은 절대 변치 않는 감정을 약속한다기보다 그 관계를 행동으로 지키겠다는 다짐이다.
부끄러움은 내가 품은 생각 자체보다, 그것이 타인의 시선에 어떻게 비칠지에 대한 불안에서 비롯된다. 마치 누 군가 내 마음을 훔쳐볼 것만 같은 기분 말이다.
흥미로운 건, 부끄러움이 실제 우리의 생각이 아니라 타인의 상상력에 달려 있다는 사실이다. 무슨 생각을 했는 지보다, 타인은 나를 어떻게 불지에 대한 두려움이 더 크게 작용한다. 결국 우리가 두려워하는 건 우리의 진짜 모습이 아니라, 타인이 만들어낼 우리의 이미지일 수도 있다.
도덕은 유행과 비슷하다. 한때 절대적이라 여겨지던 것이시간이 지나면 낡고, 시대에 맞지 않는 것으로 보이기 도 한다.
과거에는 법과 규칙이 도덕의 기준이 되었다. 하지만 지금은 자유와 복지를 더 중시하기도 한다. 시대가 변하면 도덕도 같이 변한다.
옛 철학자, 특히 스토아 학파는 자신의 목숨을 스스로 거두는 것을 절망이 아니라 이성의 승리라고 여겼다. 그 들은 죽음을 두려워하기 보다는 삶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였고, 삶의 의미가 퇴색되었다 느낄 때스스로 끝을 맺 는 결단을 내리기도 했다. 그것은 도망이 아니라, 마지막까지 자기 삶을 주도했다는 점에서 일종의 존경을 받았 다.
폭포를 보면 물이 자유롭게 흘러내리는 것처럼 보인다. 소용돌이치고, 물보라를 일으키고, 마치 즉흥적으로 춤 추는 듯하다. 하지만 사실 그 모든 움직임은 물리 법칙에 따라 정교하게 움직일 뿐이다. 자유로워 보이는 폭포 도 결국 자연의 규칙에 묶여 있다.
인간의 행동도 크게 다르지 않을 수 있다. 우리는 자유롭게 선택한다고 믿지만, 깊이 파고들면 아닐 수도 있다.
만약 세상의 모든 정보를 아는 전지전능한 존재가 있다면, 우리의 모든 결정, 심지어 다음 주 우리가 무슨 생각 을 할지까지 미리 알 수 있다는 가정도 가능하다.
이 말을 들으면 불편해질 수도 있다. 나는 내 삶의 주인인데, 왜 모든 것이 마치 계산된 것처럼 말하는 걸까. 하 지만 자유의지란 인간이 가진 가장 위대한 착각 중 하나다. 그럼에도 이 착각이 우리를 행동하게 하고 삶을 살 아가는 추진력이 된다. 스스로 결정한다고 믿을 때, 우리는 비로소 인생을 내 손 안에 쥔 기분을 느낀다.
우리가 ‘선‘과 ‘악‘이라 부르는 개념도 결국 시대와 환경의 산물이다. 오늘날 누군가를 돕는 게 선이라 여겨지지 만, 옛날엔 복수가 선이었다. 복수를 통해 정의를 세운다고 믿었으니까. 이처럼 옳고 그름도 시대에 따라 달라 지는 유동적 개념임을 알 수 있다.
자신을 다스리며 절제하는 삶을 택하는 사람들도 결국 더 편한 길을 찾을 때가 있다. 욕망과 의지를 내려놓고, 정해진 규칙과 원칙에 복종하는 삶 말이다.
복종하는 순간, 사람은 더 이상 무엇을 해야 할지 끊임없이 고민할 필요가 없어진다. 정해진 틀 안에서 살아가 니 삶의 공허함이나 불안을 느낄 틈이 줄어들고, 자신의 행동에 대한 책임감을 덜 느끼게 된다. 욕망도 비슷하 다. 적절히 조절하기보다 아예 포기해버리는 게 훨씬 편하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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