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츠 파농의 <검은 피부, 하얀 가면>은 프랑스 식민 지배 하의 알제리 원주민들이 자신의 실제 모습을 부정하고 지배자들과 동일시하는 행태를 고발하고 있다. 자신이 검다는 것을 애써 부인하면서 백인의 정체성을 취하는 것이다. 자신이 배치되어 있는 사회적 위치를 받아들이기 괴로운 상황에서 생겨나는 일종의 허위의식이다. 그러한 환상은 피차별 집단에게서 종종 나타난다. 그 결과 자신들이 당하는 억압의 구조를 보지 못하고 엉뚱한 방향으로 화살을 쏜다. 그의 다른 책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에 이런 구절이 있다. "이주민이나 경찰은 언제나 원주민에게 매질을 하고 모욕을 가할 권리를 가지고 있지만, 원주민이 품속의 칼을 빼는 것은 다른 원주민이 그에게 조금이라도 적대적인 행동을 하거나 공격적인 눈길을 보냈을 경우다. 원주민에게 최후의 수단은 형제를 상대로 자신의 인격을 방어하는 것이다..."
그런 행위를 통해서 자기가 당면한 현실이나 일상의 경험에 눈을 닫고 마음의 위안을 얻을 수는 있으리라. 그러나 문제는 그러는 동안 부조리한 구조와 억압은 더욱 공고해진다는 것이다. 또 한가지 심각한 결과는 동일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서로를 외면한다는 것이다. 타인을 통해서 자기의 객관적인 모습이 확인되기 때문이다. 콤플렉스의 핵심 작용 가운데 하나가 바로 그러한 개별화다. 저마다 골방에 갇혀 지내면서 마음을 열지 않는다. 힘을 모아서 세상의 잘못된 점들을 바꿔갈 수 있는 가능성은 점점 요원해진다. 삶의 힘을 키워내는 문화도 박약해진다. 예를 들어 어느 전문계 고등학교 학생들은 학교 축제를 하지 않는데, 그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원래 공고는 그런 거 안 해요. 그 짓도 소속감이 있어야 하죠. 학교 축제 안 한지도 2년 됐거든요."
앞서 인용한 글에서 로버트 풀러가 말한 노바디nobody(사회적으로 별 볼 일 없게 여겨지는 사람)의 특성을 짚어내고 있다. 수치심 때문에 자아를 숨기고 더 나아가서 상대방을 학대하기까지 한다. 남에게서 받은 경멸을, 남을 학대함으로써 보상받으려 한다. 유명인에 대한 험담과 악플이 극심해지는 것은 사회 전반에 열패감이 만연해 있다는 반등일 수 있다. 누군가의 약점을 들춰냄으로써 자신이 괜찮은 사람이 된 듯한 기분에 젖어든다. 그러나 그것은 명백한 착각이며, 그럴수록 점점 무력해지고 모멸감에 더욱 취약해진다.
부당한 일을 지속적으로 겪는 사람들이 손을 잡아야 한다. 그러면 상황을 직면할 용기가 생겨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