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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월 20일 오후 5:58 공개
한자어 문해력 80
"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손바닥에 쏙 들어오는 작은 판형입니다. 가방 한쪽에 넣어도 무게가 거의 느껴지지 않을 만큼 가벼워서, 처음 받아 들었을 때는 이 작은 한 권에 무얼 얼마나 담을 수 있을까 싶었습니다. 표지는 연한 분홍 바탕에 초록 별빛이 점점이 박혀 있어 시험서라기보다 차분한 학습 노트에 가까운 인상이었고요. 그런데 페이지를 넘기다 보니 생각이 바뀌더군요. 작은 몸피 안에 단어 하나하나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에 대한 태도가 꽤 단단하게 들어 있었습니다.


<한자어 문해력 80>은 김진형 작가가 10대를 위해 쓴 문해력 안내서입니다. 북유럽 카페 서평단을 통해 받아 읽게 되었는데, 표지 띠지에 적힌 "헷갈리는 단어 하나가 정답과 오답을 가른다"는 카피가 책 전체를 관통하는 문장이라는 걸 다 읽고 나서야 알았습니다. 단어를 많이 외우게 하는 책이 아니라, 단어 하나가 놓인 자리를 읽게 하는 책이거든요.

구성이 단정합니다. 한 단어를 풀어낼 때 먼저 한자의 생김새에서 출발하는 어원 이미지를 보여주고, 그 단어가 실제 지문에서 어떤 논리로 쓰이는지 짚은 다음, 칼럼 끝에 '이 단어가 시험지에 나올 때'를 두어 출제자가 파놓은 함정을 일러줍니다. 사고의 기초부터 문학, 사회, 과학, 인문, 심화까지 여섯 장으로 나뉘어 있어서, 국어 한 과목이 아니라 비문학 전 영역을 고르게 훑는다는 점도 미더웠습니다.


저는 1장이 특히 좋았습니다. 전제, 추론, 타당이 차례로 이어지는데, 마치 글 한 편이 어떻게 세워지고 검증되는지를 보여주는 작은 설계도 같았어요. 전제를 설명하는 대목이 특히 또렷하게 다가왔습니다. "눈이 내리니 축구 시합은 취소다"라는 한 문장에 '눈이 내리면 축구를 할 수 없다'는 약속이 숨어 있다는 거죠. 책은 이걸 두고 작가가 직접 언급하지 않고 당연하게 깔아둔 '생략된 전제'를 찾아내는 것이 독해의 핵심이라고 짚습니다. 그러면서 한 발 더 나아가, 내가 세상을 대하는 태도나 스스로를 바라보는 시선이 어떠한 바탕 위에 놓여 있는지 가만히 살펴보라고 권하더군요. 시험 이야기로 시작해 어느새 사람의 마음까지 데려가는 흐름이 좋았습니다.


추론으로 넘어가면 결이 또 달라집니다. 추(推)라는 글자가 손으로 물체를 앞으로 밀어내는 동작에서 왔다는 설명이 머릿속에 그림처럼 남았어요. 이미 아는 지점을 발판 삼아 아직 보이지 않는 곳으로 나아가는 힘이라는 거죠. 책은 필자가 입 밖으로 내지 않은 결론의 빈칸을 논리적으로 채워 넣는 것이 독해의 완성이라고 적어 두었습니다. 답이 눈앞에 없을 때 섣불리 단정하지 말고 숨겨진 방향을 읽어내려는 질문을 멈추지 말라는 당부도 함께였고요. 일을 오래 한 사람일수록, 자료에 다 적혀 있지 않은 결론을 끌어내야 하는 순간을 자주 만납니다. 그런 자리에서 떠올릴 만한 문장이었습니다.

오래 마음에 걸린 건 3장의 매몰 칼럼입니다. 이미 손을 떠난 과거의 자원에 집착하다가 더 나은 기회를 놓치는 상황을 매몰의 늪이라 부르는데, 되돌릴 수 없는 것에 마음을 빼앗기는 순간 판단력이 서서히 마비된다는 문장이 그랬습니다. 책은 학생에게 자신에게 맞지 않는 공부법을 단지 지금까지 해온 게 아까워서 붙들고 있지 않은지 돌아보라고 하지만, 이 조언이 어디 공부에만 해당될까 싶었어요. 들인 시간과 비용이 아까워 잘못된 선택을 끌고 가는 일은 어른의 일상에도 흔하니까요. 이어지는 합리 칼럼에서, 모든 내용을 똑같은 힘으로 외우기보다 무엇이 중요한지 그 이치를 먼저 파악하고 거기에 맞춰 시간과 노력을 배분하라는 말과 나란히 읽으니 한층 또렷해졌습니다.

곁에 두고 싶었던 건 6장의 맥락입니다. 단어의 사전적 정의만 그대로 옮겨놓은 선택지로 흐름을 놓친 학생을 유혹하는 게 출제자의 흔한 함정이라는 설명인데, 결국 단어 하나도 앞뒤 문장의 기운 속에서 읽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서도 책은 시험 너머로 한 걸음 더 갑니다. 오늘의 실패가 당장은 아픈 점 하나일지라도 훗날 돌아보면 성장을 위해 반드시 필요했던 소중한 연결고리였음을 알게 될 거라고요. 학습서의 한 칼럼 끝에서 이런 문장을 만나니 책장을 넘기던 손이 잠깐 느려지더군요.


아쉬운 점이 없지는 않습니다. 단어마다 시험에 어떻게 나오는지 짚어주는 구성이 일관돼서 든든한데, 그만큼 칼럼의 틀이 반복되다 보니 뒤로 갈수록 형식이 익숙해지는 면은 있었습니다. 다만 이건 휴대하며 필요할 때 펼쳐 보는 책이라는 성격을 생각하면 오히려 장점일 수도 있겠다 싶었어요. 처음부터 끝까지 정독하기보다, 막히는 단어가 나올 때마다 해당 칼럼을 펼쳐 보는 식으로 쓰면 이 작은 판형이 제값을 합니다.

다 읽고 나니 누구에게 어울릴 책인지 자연스럽게 그려졌습니다. 시험을 앞두고 어휘에서 자꾸 막히는 중고등학생이라면 당장 손에 쥘 만한 도구가 되겠지요. 아이가 문제를 읽고도 확신을 못 하는 모습에 답답했던 부모에게도,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가늠하는 실마리가 되어 줄 겁니다. 그런데 정작 제 마음에 남은 건, 글을 다루는 일을 하면서도 단어를 그냥 흘려보내던 어른에게 이 책이 건네는 환기였습니다. 익숙한 단어 하나의 무게를 다시 재게 만드니까요.


빗소리가 창을 두드리는 주말입니다. 이런 날 두꺼운 책은 어쩐지 손이 무거워지는데, 그럴 때 이렇게 가벼운 한 권을 쥐고 단어 몇 개를 천천히 곱씹는 것도 꽤 괜찮은 독서가 됩니다. 서평단으로 받아 든 책이었지만, 읽는 내내 단어를 대하는 제 태도를 점검하게 했다는 점에서 기대 이상이었습니다.


한 줄로 줄이면, 단어를 외우는 책이 아니라 단어를 읽는 눈을 길러주는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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