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어이 살아가게 하는 힘과 빛에 관한 사유
김유나의 소설 내일의 엔딩 독서 시작점은 작년에 읽었던 새파란 돌봄이다. 루이제 린저의 삶의 한가운데,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이 뒤를 이었다. 14년 전에 아버지가, 13년 전에는 어머니가 같은 요양병원에서 돌아가실 무렵에 나는 40대 초반으로 세 아이 양육과 직장 생활로 분주했다. 추모와 애도 시간은 짧았고 제사상 앞에서 축문을 읽으며 목이 메이는 횟수도 해가 지날수록 줄어들었다. 작년에 장인어른이 병석에 누우셨다. 이즈음에 읽은 책이 새파란 돌봄이었다. 돌봄을 받아야 할 10대에 돌봄의 짐을 진 여러 청소년의 삶을 접하면서 과거의 내 돌봄 역할은 사소한 일로 여겨졌다. 사회적 돌봄에 관심이 갈 무렵 장인어른은 암진단을 받고 자택에서 통원 치료를 하셨다. 장모님과 아내의 돌봄 노동을 나는 지켜보기만 했다.
연말연시에 삶의 한가운데를 읽으면서 나이 차이 많은 사이에서 전개되는 사랑의 열정을 훑고 음미하다가 죽음을 흥미로워하는 작중 인물에 마음이 쓰였다. 이 책을 덮으면서 이반 일리치의 죽음과 내일의 엔딩을 독서 목록에 넣었다. 장인어른은 올해 1월을 넘기지 못하셨다. 방학 중이라 20여 일 동안 주간 간병을 맡았다. 말기 암 증상으로 섬망과 혼돈, 혼수 상태를 지켜보았고, 식사와 배변 처치, 면도와 양치 등의 돌봄을, 새파란 돌봄에 나오는 이야기를 실제로 조금 행한 뒤였다. 얼마 후에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읽었다. 이 소설은 육체적 고통만큼이나 죽음을 부정하는 데 따른 고통을 보여준다. 자경의 아버지 죽음 전후와 자경의 삶을 담은 내일의 엔딩은 지금, 현재, 실재하는 나의 삶을 생생하게 그리고 있다. 톨스토이는 이반이 죽기 직전에 빛을 봄으로써 빛이 시작되고 존재한다고 상상한다. 죽음을 앞둔 이의 삶과 죽음을 ‘빛’으로 수렴하는 것과 비슷하게 내일의 엔딩은 멀고 희미한 곳에 있는 빛에 주목한다.
주인공 자경의 엄마는 자경을 낳은 직후 과다 출혈로 죽었다. 아빠는 재혼하지 않고 딸을 혼자서 키웠다. 자경은 고교 졸업 후에 서울에 있는 대학에 다녔고 광고 기획회사에서 경력을 쌓으며 미혼으로 혼자 살고 있다. 고향 전주에서 고교 교사로 정년퇴직한 아빠가 뇌폐색으로 쓰러지자 자경은 회사를 그만두고 24시간 간병하다가 아빠를 서울과 전주 가운데에 있는 대전의 요양병원에 모신다. 병원비 마련과 생계를 위해 다시 취업한다. 3년이 흘러 어느날 아빠는 죽는다. 장례를 치르는 중에 전주의 옛집이 팔리고 유품을 정리한다. 여기까지가 제1부 ‘희망도 절망도 아닌’의 줄거리다. 제2부 ‘다시 멀리서 보면’은 자경이 아빠의 유품을 정리하면서 읽은 아빠가 쓴 일기의 한 대목, “삶의 소중한 빛은 언제나 멀고 희미한 곳에 있다!”를 좇아 이십 대의 자경이 단편영화를 제작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전주시 인후동’이라는 익숙한 지명, 자경의 아버지가 퇴직 교사라는 점, 자경이 갑작스럽게 쓰러져 죽음을 준비하지 못한(삶을 정리할 겨를이 없었던) 아빠의 유품들을 정리하면서 확인하는 일기장들, 넉넉하지 못한 현금 때문에 발생하는 여러 문제 덕분에 나는 이야기에 확 달라붙었다. 제1부 ‘희망도 절망도 아닌’을 읽으면서 정지아의 아버지의 해방일지가 틈틈이 끼어들었다. 해방과 전쟁을 거친 한국 사회주의자의 삶을 산 정지아 소설 속 아버지와 특별한 역사적 사건과 연루되지 않은 채 홀로 딸아이를 키운 김유나 소설의 아빠를 비교하였다. 앞의 아버지 삶을 이념과 실천의 문제로 거칠게 단순화할 수 있다면, 김유나의 소설 속 아빠와 자경의 삶은 돌봄, 죽음, 정년퇴직, 노후의 삶, 빚, 취업, 결혼 등 우열과 중심·주변을 가리기 힘든 여러 문제가 중첩되어 있다는 점에서 단순화가 무척 힘들다. 소설보다 더 무거운 무게로 함께 펼쳐지는 나의 현재진행형 일이기 때문일 수 있다.
현직 교사인 나는 정년을 몇 년 앞두고 있다. 졸업한 고교가 있는 사립학교 재단 소속 학교에 있다 보니 고교 시절 선생님의 부고를 접한 적이 꽤 있었다. 수업을 하셨던 몇 분 선생님의 빈소를 찾아 조문을 하면서, 내 장례식장에는 내 수업을 받았던 졸업생 중에서 몇 명이나 올까 가늠을 해보았다. 가끔 안부 인사를 주고받는 두어 명 정도일 것 같다. 누구도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동창 모임에서 선생님들의 안부와 근황을 전하면 친구들은 시큰둥한 반응을 보인다. 크게 상처받은 기억을 안고 있는 친구의 얼굴은 굳어진다. 졸업 후 특별한 인연이 없는 한 학창 시절에 만난 선생님의 부고를 접하기 쉽지 않다. 퇴직 전에 죽게 되면 재학생의 조문을 받을 수는 있다. 운구차가 교정을 돌면 학생들이 명복을 빌어주기도 한다. 퇴직 후 한참 지나면 그럴 일이 없다. 수십 년 동안 나를 접했을 수많은 사람이 나의 죽음을 무심히 여기는 상상은 안도, 편안함과 함께 서운함도 인다. 참 시답잖고 어쭙잖은 감상이다.
죽기 전에 내 빚은 청산해야 하는데 걱정이다. 나는 아버지가 남긴 빚을 떠안지 않으려고 ‘상속 포기’ 절차를 밟았다. 셋째 형 혼자 발품과 비용을 들여 진행한 일이라 고생하지는 않았다. 내 자식들에게 남길 재산 하나 없는 형편에 빚을 남기는 일은 피해야 한다. 그리고 간병비 또한 걱정이다. 새파란 돌봄,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고결한 삶과 죽음은 어떠해야 할지를 아프게 고민하게 하였다. 이들 저작에 비해 내일의 엔딩에 담은 삶과 죽음은 다소 가벼워 보여도 자경이 겪은 일 대부분을 이미 겪었거나 겪는 중인 나와 같은 이에게는 현실감이 더해져 그 무게가 꽤 나간다. 이틀 만에 금세 읽은 이유다.
자경의 아빠는 자경이 이십 대에 찍은 단편영화를 보고 삶의 소중한 빛은 멀고 희미한 곳에 있다고 일기장에 적었다. ‘인간을 기어이 살아가게 하는 힘’이란 그런 빛이라고. 자경의 아빠에게 그 빛은 자경의 엄마일까, 자경일까. 자경에게 그 빛은 그 단편영화일까? 함께 영화를 찍었던 표다르를 비롯한 스탭들? 현재의 나에게 그 빛은 무엇일까? 내 나이 스무 살부터 스물일곱 살까지 사회 밖에 있었던 삶이 내가 잊지 않고 봐야 할, 떠올려야 할 빛일까? 내년 6월이 되면 5년 3개월을 감옥에서 보내고 나온 지 꼭 30년이 된다. 이런 생각을 한 이유는 아마 한강의 소설 소년이 온다를 막 정독했기 때문일 것 같다. 자꾸 그 멀고 희미한 곳의 빛이 떠오른다. 고단한 삶에서 자경이 남자 친구 응현을 찾듯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