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림은 설명되지 않는다 」 화면의 이면을 보게 하는 책
출판사 협찬 도서를 읽고 쓴 주관적인 리뷰
『 그림은 설명되지 않는다 」 화면의 이면을 보게 하는 책
이윤서 | 더블엔
책의 표지부터 아름다웠다. 손에 쥐었을 때부터 조금 천천히 읽어야 할 것 같은 책이었다. 그리고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자꾸만 오래 머물게 하는 힘이 있었다. 그림을 보고, 글을 읽고, 다시 그림을 바라보았다. 한 장의 그림을 오래놓고 보게된다. 제목처럼 그림은 설명될 수 없다, 오히려 설명이 그림을 감상하는데 방해가 될 때도 있다... 그림은 말로 완전히 설명되는 대상이 아니었다. 작가가 무엇을 그렸고, 어떤 기법을 사용했으며, 어떤 시대를 살았는지를 아는 것과 그 그림 앞에서 내가 느끼는 것은 또 다른 일이었다. 오히려 설명이 끝난 자리에서 그림은 다시 말을 걸어오는 것 같았다.
처음에는 화가와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읽으려고 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림보다 내 마음을 더 오래 들여다보고 있었다. 같은 그림을 보아도 그날의 나에 따라 전혀 다른 감정이 일어날 것 같았다. ‘이 그림을 다른 독자들은 어떻게 읽었을까.’ 책을 읽는 동안 자꾸 그런 생각이 들었다.
책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지나게 되는 감정, 희 로 애 락을 따라 화가와 작품을 만난다.
그래서 더 좋았다.
먼저 ‘희’ 챕터에서는 다시 믿어보기로 한 사람들을 만난다. 늦은 나이에 그림을 시작한 그랜마 모지스의 이야기는 무언가를 시작하기에 너무 늦은 때란 없다고 다시 한 번 증명해 주는 것 같았다. 노먼 록웰의 익숙한 일상에서는 평범해서 지나쳤던 하루가 새롭게 보이고, 샤갈의 그림에서는 사랑하는 것을 잃은 뒤에도 끝내 사랑을 놓지 않는 마음을 만난다. 칼 라르손이 그린 평범한 집과 가족의 풍경에서는 거창한 행복이 아니라 햇빛이 들어오는 하루의 소중함이 느껴진다.
물론 행복을 이야기하면서도 마냥 밝은 그림만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이 책이 말하는 ‘희’는 아무런 슬픔도 없는 상태가 아니라, 슬픔을 지나온 사람이 다시 믿어보기로 하는 마음이 아닐까 싶다.
‘노’에 들어서면 그림의 온도가 달라지는 기분이다. 바스키아의 거칠고 강렬한 화면, 코코슈카의 사랑과 광기, 에바 헤세의 불안정한 형태, 프랜시스 베이컨의 폭력적인 이미지 앞에서는 그림이 아름답기만 한 대상이 아니라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된다.
그리고 ‘애’에 이르면 책은 조용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모란디의 사물들, 호퍼의 고독, 루이스 웨인이 만들어낸 고양이의 세계, 벡신스키의 악몽 같은 이미지, 리처드 롱의 느린 걸음, 폰타나가 캔버스에 낸 상처까지. 이 장에서는 무엇인가를 잃고 난 뒤에도 그 곁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시간이 느껴진다.
우리는 누군가의 현재만 보고 그 사람을 판단하지만, 그 사람의 화면에는 보이지 않는 시간이 쌓여 있을 것이다. 어떤 상실을 지나왔는지, 무엇을 견디고 있는지, 무엇을 끝내 놓지 못했는지.
호퍼의 고독한 그림을 보고 있으면 ‘외롭다’고 단정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 고독 안에도 사람이 살아가는 시간이 있고, 말하지 않는 마음이 있다. 그래서 그림은 설명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설명하려는 순간 오히려 우리가 보지 못하는 무언가를 놓치게 되니까.
책의 제목에 공감하면서 한 편으로는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라는 비트겐슈타인이 떠오른다. 결국 그림은 철학으로 철학은 다시 예술로 연결된다는 생각도 해본다. 그림으로 따뜻한 위로를 받고 싶은 독자들께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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