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어른으로 키운다는 건
“네 인생의 8할이 내 지분이야. 너는 내 프라이드고! 내 인생이고!”
드라마 <폭삭 속았수다>의 금명은 첫사랑 영범과 결혼을 준비하면서 영범의 엄마에게 상처받는다. 영범과 만나는 내내 자기를 탐탁지 않게 여기는 영범 엄마의 마음을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영범과의 미래를 꿈꾸었던가 보다. 그러다가 영범과 헤어지기로 결심한 순간이 왔다. 영범 엄마의 저 말에, 자기 부모님이 더는 상처받지 않게 하려고 이별을 결심했다. 아들을 지극정성으로 키운 영범 엄마는 아들의 미래까지 정해주려고 한다. 마치 자신의 계획만이 정답인 것처럼, 자기의 노력을 당연하게 보상받아야만 했으므로. 물론 드라마니까, 영범 엄마의 노년은 나쁜 계산을 해왔던 인생에 대해 당연한 대가를 치르는 것 같았지만, 사실 우리가 아는 많은 부모가 영범 엄마와 비슷한 마음으로 자식을 키우고 있는 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더라. 안다. 내 아이가 잘못되기를 바라지 않기에, 아직 어려서 잘 모르니까 부모가 잘 인도해 주어야 틀리지 않은 길로 갈 거로 믿으니까. 하지만 우리는 이것도 이미 알고 있다. 부모가 안내하는 길이 모두 옳다고 장담할 수 없다는 것도.
“부모들은 자기 자식이 성공을 거두길 원해요. 본인들이 믿는 성공이요. 최고의 대학에 가고, 최고의 직업을 얻기를 바라죠. 그렇기 때문에 만약 자기 아이가 실패한다면-백업 선수로만 머물거나 감독에게 혼나는 것-그 책임이 학교에도 있다고 생각해요.” (17페이지)
부모의 옳은 양육방식이라는 기준은 과거나 지금에나 비슷했던 것 같다. 내 자식을 부족한 거 없이 키우고 싶고, 최고의 것만 주고 싶은 마음. 뭐, 처음부터 모든 것을 다 가진 환경이라면 가난이라는 험난한 환경을 맛보여 주는 것보다 낫겠다 싶지만, 환경이 풍요롭다고 그게 옳기만 한 걸까. 마이클 루이스의 10대가 무기력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 나이에 흔히 겪는 사춘기 정도로 여겼다. 그 시절 또한 금방 지나갈 테니까, 다른 아이들도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경험을 하고 있을 테니까 말이다. 그럭저럭 그 시간을 잘 지나면 또 다른 인생이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마이클은 그때 한 사람을 만나면서 지금까지 자기가 살아왔던 방식이 옳지 않았음을 깨닫는다. 경제적 여유로움과 그냥 시간을 흘려보내듯 살아지는 날들이 의미 없었음을 알게 되면서, 전혀 다른 방식의 삶을 배운다.
어느 날 야구부 감독 피츠가 등장하면서 일상의 많은 것이 바뀌었다. 딱히 노력할 필요도 없고 굳이 열정도 필요 없는 시간을 보내던 마이클에게 피츠의 등장은 전혀 다른 일상을 그리게 한다. 야구부 훈련에 소리치는 사람, 경기에 최선을 다하게 하는 사람, 끈기와 열정을 끓어오르게 하는 사람. 운동에 소질이 없던 마이클은 경기의 긴박한 상황에서 피츠의 부름을 받고 공을 던진다. 누가 봐도 질 것이 뻔해 보이던 경기였다. 9회 말 1아웃, 주자는 1루와 3루에 있는 상황. 피츠는 무엇을 보고 마이클을 마운드에 오르게 했을까. 너 말고는 내보낼 사람이 없다고 말하는 듯한 피츠의 눈빛에서 마이클은 무엇을 읽었는지, 이기고 말았다. 그때 알았다. 죽을힘을 다해서 최선을 다하는 일, 피를 토하듯 치열하게 싸우는 게 무엇인지를. 그럭저럭 살아지는 인생에서, 목표한 것을 이뤄내려고 힘껏 달리는 일이 얼마나 가치 있는 삶인지를. 피츠는 감독으로서 당연히 팀의 우승을 이뤄내야 했을 테고, 선수들 역시 팀의 우승의 자신의 실력을 보여주는 게 목표였을 텐데, 피츠가 등장하기 전까지 이 팀의 선수들에게 상대팀들과의 경기는 그냥 놀이, 운동이었다. 경쟁도 싸움도 아니었다.
마이클이 학교를 졸업하고 수십 년에 지난 후에 들은 소식은, 피츠의 열정이 부모들의 과보호와 충돌하면서 피츠의 자리를 위협한다는 거였다. 사립학교의 부모들은 많은 금액을 학비로 내고 있었고, 학교의 야구부에 속한 아이들의 부모는 생각한다. 돈을 많이 내니까 내 아이가 경기에 나갈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게 맞는 건가? 경기를 나가는 자격 조건이 왜 돈이어야 하는가. 실력으로 보여주고, 그 자리에 있어야 할 자격을 증명해야 하는 건데 말이다. 부모들은 자기 아이가 왜 경기에 출전하지 못하고 벤치 신세인지, 왜 러닝을 많이 시켜서 힘들게 하는지 따지는 지경에 이른다. 부모들과 선수들은 피츠의 훈련에 불만을 표하면서 그의 과도한(?) 열정을 비웃는다. 피츠가 바라는 거, 피츠의 역할은 자기가 맡은 팀을 잘 꾸려서 경기에서 이기게 하는 거였다. 그러려면 선수들은 경기에 임하기 위한 자세를 갖춰야 한다. 최선을 다해 훈련하고, 팀을 최고로 만들기 위해 열심히 싸워야만 한다. 경기에 나갈 자격을 스스로 갖춰야 하는데도, 부모의 지나친 사랑은 자기 아이를 영원히 ‘돌봄이 필요한 어린아이’의 시간에만 머물게 하고 있었다.
사랑하는 내 아이에게 해줄 수 있는 모든 것을 해주고 싶은 게 흔한 부모의 마음이다. 우리가 보통 사랑이라고 부르는 그것. 하지만 또 그대로 다 해주면 안 되는 게 부모의 자세라는 것을 간과해서 아이가 어른이 되는 것을 막기도 한다. ‘다 자라서 자기 일에 책임을 질 수 있는 사람’으로 완성되게 하는 과정에서 부모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저자 자신이 직접 경험한 마음을 들려주는 이 책이 꽤 무거웠다. 그냥 살아지는 대로 시간이 흘러가게 놔두는, 그렇게 흐르다 보면 저절로 커 갈 텐데 무슨 노력이 딱히 필요하지도 않은 배경을 가진 이들이 어떤 어른이 될지 상상이 안 된다면 그게 이상한 일이지. 저자는 그냥 되는 대로 살던 아이에서 목표를 가지고 그걸 이루기 위해 피땀 흘리는 어른이 되는 과정을 경험했다. 그게 얼마나 귀하고 값진 일인지 겪어본 사람만이 안다. 그 때문에 열심히 노력해서 이뤄낸 어떤 것은 너무 귀하고 소중하다.
경기는 더욱 팽팽해졌고 전투는 더욱 치열해졌다. 우리는 모든 것을 걸고 싸우는 게 어떤 느낌인지를 배우는 중이었다. 이제 피츠의 말들은 공허하지 않았다. 뼈에 새겨질 정도로 깊은 감정이었다. (91~92페이지)
부모가 무조건 제공하는 사랑의 방식이 틀렸다고 할 수는 없다. 피츠가 선수들을 훈련하는 방식이 옳다고만 할 수도 없다. 하지만 누구라도 그 자신의 삶에 열정과 노력을 가지고 살아가야 한다는 건 맞지 않을까. 때로는 부모의 울타리 안에서 잠시 쉬며 안도할 수도 있지만, 세상이라는 전쟁터에서 매 순간 경쟁하며 살아가는 우리에게 필요한 건 잘 싸울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부모의 적당한 관심과 지원, 조력자의 엄격함, 스스로 찾은 방식의 노력이 잘 어우러졌을 때, 우리는 진짜 어른이 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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