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대 노년의 굽힌 무릎으로 다시 걸은 산티아고 순례길
한국외국어대학교 영어교육과 명예교수로 정년퇴직한 이윤 작가는 평생을 강단에서 제자들을 가르치며 헌신한 꼿꼿한 학자다. 퇴직 후 발간한 푸른향기 신간 <까칠한 할매는 왜 다시 산티아고에 갔을까>는 출간 직후 다수의 대형 서점 도서 정보와 독자 리뷰에서 호평을 받으며 에세이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거침없고 솔직한 문체, 삶을 관조하는 예리한 통찰력을 지닌 작가는 최근 인터뷰를 통해 칠십 대의 노구에도 불구하고 십 년 만에 배낭을 멘 이유가 늙음과 상실에 대한 저항이자 긍정이었음을 밝혔다. 이 책은 신체적 한계를 겪는 시니어 세대뿐만 아니라 삶의 전환점에서 방황하는 청년층, 상실의 아픔을 치유하고자 새로운 도전을 망설이는 모든 도보 여행자에게 진한 위로와 긴 울림을 선사하는 지침서로 적극 추천된다.
무모한 도전의 유일한 이유
마흔 중반 어머니를 황망하게 떠나보낸 상실감을 안고 60대 중반에 첫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었고, 십 년이 흐른 뒤 포르투갈 길로 두 번째 배낭을 멨다. 십 년 전 첫 순례 이후 저자의 몸은 성한 곳이 없었다. 3년 전 왼쪽 발목 골절, 5년 전 무릎 십자인대 파열을 비롯해 아킬레스 건염, 족저근막염, 골다공증 티스코어 마이너스 3.0, 위궤양까지 겹쳐 담당 의사조차 혀를 내두르며 만류하는 상태였다. 이토록 부실한 체력을 이끌고 다시 길을 나선 이유는 단 하나.. 어머니를 향한 사무치는 그리움 때문이었다. 세월이 흐르며 점차 흐려지는 어머니의 기억을 붙잡고, 십 년 전처럼 꿈에서라도 다시 만나고 싶은 간절함이 그를 다시 까미노로 이끌었다.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지금 이번 기회를 놓치면 다시는 걷지 못할 것이라는 절박함도 작용했다. 지상에서의 마지막 순례일지도 모른다는 서글픈 예감은 발걸음마다 비장함을 부여한다.
포르투갈 길의 여정과 무게
저자가 선택한 코스는 포르투갈 포르투 인근의 빌라 두 피녜이루를 시작으로 스페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를 거쳐 무시아에 이르는 길이다. 해안과 내륙을 오가는 까미노 포르투갈 길은 프랑스 길에 비해 비교적 거리가 짧고 고저 차가 적다고 알려져 있으나, 질퍽한 흙길과 발바닥을 괴롭히는 거친 돌길, 뜨거운 아스팔트가 쉼 없이 교차하여 결코 만만하게 볼 수 없는 트래킹 난이도를 지닌다. 총 21일간 이어지는 이 여정은 아름다운 풍광 이면에 가혹한 환경을 숨기고 있다. 첫날부터 6킬로그램으로 맞췄던 배낭은 어느새 8킬로그램으로 늘어나 어깨를 짓누르고, 몸살기에 타이레놀을 삼키며 걷는 고행이 시작된다. 돌길 위에서 아픈 다리를 끌고 걷는 고통은 상상을 초월한다. 기진맥진하며 걷기를 열흘 남짓, 삼십 일 넘게 걸었던 십 년 전 첫 순례와 달리 체력은 턱없이 부족하지만 포르투갈의 고풍스러운 소도시 바르셀루스, 발렌사를 지나 스페인 국경을 넘는 과정은 그 자체로 경이롭다. 길 안내 표식을 놓쳐 헤매거나 시멘트 벤치에 주저앉아 오렌지주스를 들이켜는 순간들조차 포르투갈 길 특유의 거친 묘미로 작용한다.
길 위의 낭패, 비워내는 시간
순례길은 거창한 깨달음만 주어지는 곳이 아니라 예측 불가능한 육체의 반란과 실수가 연발하는 현장이기도 하다. 15일 차 여정에서 저자는 극심한 배앓이와 궂은 비라는 이중고를 겪는다. 캄캄한 새벽 화장실을 오가며 잠을 설치고, 정로환을 삼키며 뱃속 사정을 다스려야 하는 곤혹스러운 상황은 노년의 순례자가 감내해야 하는 신체적 한계를 여과 없이 보여준다. 다음 날인 16일 차 포르텔라에서 칼다스 데 레이스로 향하는 아침에는 더욱 난감한 소동이 벌어진다. 숙소 본채에 필수품인 등산 스틱을 깜빡 두고 길을 나선 것이다. 스틱 없이는 한 걸음도 떼기 힘든 처지에 머릿속이 하얘진 저자와 달리, 일행인 엘피는 무심히 먼저 가겠다고 선언한다. 이 당황스럽고 이색적인 에피소드들은 헛웃음을 유발하면서도, 집착하던 물건이나 인간관계의 거리를 하나씩 놓아버리고 예기치 못한 상황에 순응하는 법을 배우는 순례의 묘미를 드러낸다.
낯선 인연이 건네는 위로
<까칠한 할매는 왜 다시 산티아고에 갔을까>에 등장하는 다채로운 에피소드는 순례길이 지닌 진정한 가치를 증명한다.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은 저마다의 사연을 품고 묵묵히 걷는다. 바르셀루스 리조 아란테스 카페에서 만난 상냥한 여주인은 잊지 못할 인연 중 하나다. 막힌 세면대를 불평 없이 뚫어준 저자에게 닭 열쇠고리를 선물하며 미소 짓는 주인의 모습은 지친 순례자에게 뭉클한 위안이 된다. 덴마크에서 온 간호사 리나, 길 위에서 만난 씩씩한 스위스 할머니들, 온몸을 던져 조난자를 구하는 용감한 자매, 미국 이민자인 인도 여인 니루파까지.. 나이와 국적을 불문하고 길 위에서 맺어지는 연대는 따스하다. 육체의 고통이 극에 달해 쓰러지기 일보 직전의 상태에서 비로소 잡동사니로 빽빽하게 들어차 있던 마음의 공간이 비워지고, 웅크렸던 자아가 숨통을 틔우는 과정은 이 에세이의 단연 돋보이는 대목이다.
삶이라는 거대한 순례
<까칠한 할매는 왜 다시 산티아고에 갔을까>는 단순한 기행문이나 정보 전달을 위한 여행서가 아니다. 육체의 쇠락을 온몸으로 겪어내는 노년의 자화상이자 먼저 떠난 이들을 향한 절절한 진혼곡이다. 이윤 저자는 자신의 감정과 상황을 미화하거나 과장하지 않는다. 매 순간 포기하고 싶었던 심정, 지독한 육체의 고통, 길 위에서 느낀 짜증과 환희를 날 것 그대로 쏟아낸다. 그 서늘한 솔직함이 오히려 강한 호소력을 지닌다.
상처 입고 닳아버린 관절로 끝내 무시아 언덕에 당도한 저자의 뒷모습은 우리에게 삶이라는 고단한 순례를 끝까지 걸어낼 용기를 쥐여준다. 길을 잃고 방황하는 모든 이들의 서재에 꽂아두고 곁을 내어주고 싶은 소중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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