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한다는 것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다> 자크 데리다, 이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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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한다는 것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다> 자크 데리다, 이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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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덮고 나서 변한 것이 있다면 그건 바로 ‘아니오’라는 말에 대한 인상이 아닐까 한다. 무언가를 부정하거나 거절을 하는 상황을 떠올려 보면, 우리는 상대의 의견에 맞서는 단호한 저항이나 비판의 제스처를 먼저 생각한다. 그러나 자크 데리다가 말하는 ‘아니오’는 그저 어떤 입장을 단순히 거부하는 태도라고 보기는 어렵다. 데리다의 '아니오'는 완벽해 보이는 내 생각에 작은 틈을 내어, 생각이 한곳에 굳어버리지 않고 계속 움직이도록 만드는 힘의 원천과도 같은 것이었다. 즉, 이 책에서 '아니오'라는 말은 생각의 마침표를 넘어 사유를 멈추지 않고 계속 밀고 나가게 하는 계기라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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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서 아주 인상적이었던 대목 중 하나는, 데리다가 다른 철학자들의 텍스트를 대하는 방식이었다. 그는 베르그손의 논의를 손쉽게 반박하거나 자신의 독창성을 뽐내기 위한 징검다리처럼 이용하지 않는다. 먼저 상대가 구사하는 사유의 언어와 리듬 속으로 걸어 들어가 충분히 체감한 후에 바로 그 내부에서부터 새로운 질문을 끌어올리는 방식을 택한다. 책에서 다루는 ‘반복’ 역시 과거의 말을 앵무새처럼 되풀이하는 것이 아닌 그 생각이 본래 품고 있던 잠재력을 끝까지 밀어붙임으로써 처음과는 전혀 다른 지점에 도달하는 일을 의미한다. 타인의 생각을 진정으로 존중한다는 것은 그 사유의 결을 함부로 납작하게 요약하거나 단순화하지 않는 성실함에서 출발한다는 점을 이 책은 여실히 보여준다. 이러한 태도를 통해 철학자 알랭의 유명한 명제, “사유한다는 것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다”라는 문장 역시 단순한 비판의 구호를 넘어선다. 무언가를 부정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것이 무엇을 말하는지 온전히 듣고 받아들이는 ‘예’의 과정이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반대로 어떤 생각을 ‘맞다’고 인정하는 순간에도, 그 생각 안에는 이미 그것을 뒤집어볼 수 있는 또 다른 질문이 숨어 있다. ‘예’와 ‘아니오’는 무 자르듯 깔끔하게 분리할 수 있는 두 개의 선택지라기 보다는, 서로가 서로를 전제로 하며 얽혀 있다. 이 책에서 데리다는 명쾌한 결론을 건네는 대신, 명제가 발을 딛고 서 있는 바닥 그 자체를 흔들어보는 방식을 택한다. 이 점이 책을 어렵게 만들면서도 또 흥미롭게 만드는 대목이란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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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이 술술 읽히는 책은 결코 아니다. 한 문단을 읽고도 "무슨 말이지?" 싶어 앞 문장으로 되돌아가기 일쑤였다. 그러나 묘하게도 그 답답함 자체가 이 책이 던지는 화두와 아주 많이 닮아 있었다. 빨리 이해했다고 착각하는 순간 정작 중요한 본질을 놓칠 수 있기 때문이다. 79쪽 까지의 여정을 지나며 나만의 지적 경계를 넓힐 수 있었다. '생각을 그저 많이 하는 사람'과 '자신의 생각마저 의심할 줄 아는 사람'은 완전히 다른 차원에 서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뒷부분도 열심히 읽어볼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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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반부에서 후설과 사르트르를 거쳐 ‘무(無)’와 ‘부정’의 문제로 나아가는 대목은 결코 읽기에 녹록지 않았다. 그러나 인간 의식의 구조를 짚어가는 과정에서 한 가지 사실만큼은 뚜렷하게 알게 되었다. 인간은 눈앞에 주어진 현실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기만 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지금 존재하는 상태와 일정한 거리를 두고 그것이 아닌 상태나 아직 오지 않은 가능성을 상상할 수 있기에 우리는 현실을 불변의 법칙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다다는 것이다. 이때의 ‘아니오’는 현실을 지워버리는 허무주의가 아니라, 지금의 형태가 결코 유일한 세계는 아니다라고 일깨워주는 작은 숨구멍이자 틈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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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나는 내 자신이 생각을 꽤 깊다고 여기며 살아왔다. 하지만 실상은 고민 끝에 그럴듯한 결론을 내리고 그 자리에 멈춰 서는 경우가 더 많았던 것 같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나니 결론을 내린 바로 그 자리에서부터 진짜 사유가 시작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내가 옳다고 확신한 판단의 전제는 무엇인지, 그 전제 바깥으로 한 걸음 나가면 무엇이 보이는지 다시 묻는 일을 앞으로는 해봐야겠단 생각을 했다. 사유는 한 번 내린 판단이 다시 질문받을 수 있도록 여백을 열어두고 내 생각과 타인의 생각 모두를 너무 성급하게 끝맺지 않는 일이란 결론을 내리며 책장을 덮었다.
* 우주 @woojoos_story 진행으로 우주클럽_철학방에서 함께 읽었습니다.
출판사 : @ehaksa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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