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점별점별점별점별점
  • 읽고싶어요
  • 읽고있어요
  • 읽었어요
<슈타지랜드 - 어느 감시국가의 기억> 애나 펀더, 생각의힘
-
<슈타지랜드 - 어느 감시국가의 기억> 애나 펀더, 생각의힘




👁️
AI를 연구하다보면 입에 달고 사는 말이 있다. 바로 "데이터가 더 있으면 좋겠다"라는 말이다. 모델의 성능을 올리기 위해서는 정말 많은 데이터가 필요하다. 그것도 양질의 데이터가. 하지만 이 책, 『슈타지랜드』를 읽는 동안에는 그 '데이터를 수집한다'라는 행위가 인간의 삶을 어디까지 침범하고 파괴할 수 있는지 다소 섬뜩하게 복기하게 되었다. 이 책에 따르면 인터넷도 스마트폰도 없던 시절, 동독의 비밀경찰 슈타지는 이미 인간을 완벽하게 데이터화했다. 누구를 만나 무슨 말을 했는지, 부부 침실의 대화는 어땠는지 낱낱이 기록했고, 심지어 개인의 체취를 묻힌 천 조각까지 유리병에 수집해 보관했다고 한다.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엄청나게 무섭고 야만적인 시대가 아니었나 싶다.


🕵️
이 촘촘한 감시의 그물망을 굴러가도록 만든 건 고성능 컴퓨터가 아니었다. 이웃과 직장 동료, 때로는 친구와 가족의 눈이었다. 내 곁의 누군가 내 말을 보고서로 작성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의심은 사람들을 침묵하게 만들었다. 단순히 입 조심을 하는 데서 끝나지 않았다. 어느 순간부터는 생각하는 방식 자체를 스스로 검열하고 단속하게 되는 것이다. 슈타지가 진짜 빼앗은 것은 타인을 신뢰하는 인간 본연의 감각이었을지도 모르겠다.


👁️
이 책의 저자 애나 펀더는 이 비극을 딱딱한 통계나 제도로만 설명하지는 않는다. 감시망에 걸려 고통받았던 구체적인 얼굴들을 하나씩 소환해낸다는 게 이 책의 큰 미덕이다. 장벽을 넘으려다 남편을 잃은 미리암, 이탈리아인 애인을 두었다는 이유로 묶인 율리아. 특히 서베를린 병원에 있는 아픈 아들을 보게 해줄 테니 탈출 조력자를 밀고하라는 제안을 거절했던 파울 부인의 대목에서는 마음을 덜컥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심지어 훗날 만난 아들은 어머니를 알아보지 못했다. 올바른 선택을 했다고 해서 그 고통까지 보상받는 것은 아니기에, 냉혹한 현실은 마음을 더 아프게 한다.


🕵️
더 기괴하고 불편했던 건 전직 슈타지 요원들의 태도였다. 그들은 "국가를 위해 맡은 일을 했을 뿐"이라며 서방의 역사 왜곡을 탓하거나, 베를린 장벽을 두고 "체제 유지에 유용한 건축물"이었다고 강변한다. 이들의 당당한 변명을 읽다 보면 자연스럽게 한나 아렌트가 말한 ‘악의 평범성’이 떠올랐다. 홀로코스트에 동조했으면서도 자신은 그저 상부의 명령에 충실한 관료였을 뿐이라던 아이히만처럼, 이들 역시 스스로 사유하기를 멈춘 채 시스템 뒤로 숨어버린 인간들이었던 것이다. 저자는 이들을 성급히 심판하려 들지 않고 그저 충분히 말하게 둔다. 그러자 스스로를 정당화하려던 충성과 신념의 언어 뒤에서, 지독한 사유의 무능과 비겁함이 도리어 선명한 민낯을 드러낸다. 자신의 행동을 끝내 잘못이라 부르지 않는 이 평범한 얼굴들을 지켜보는 일은, 노골적인 악행을 마주하는 것보다 훨씬 섬뜩하다.


👁️
무거운 소재를 다루지만 책은 의외로 술술 읽힌다. 인터뷰와 여행기, 통일 이후 베를린의 풍경이 자연스럽게 이어지고 암울한 사건들 사이로 냉소적이면서도 기묘한 유머가 흐른다. 저자가 감정을 과장하지 않기에 인물들의 목소리는 도리어 더 긴 여운을 남긴다. 오늘날의 민주 사회를 동독의 독재 체제와 동일선상에 놓는 건 큰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안전과 편리라는 달콤한 명분 아래 개인정보를 내어주고 그 데이터가 어디로 흘러가는지 묻지 않는 우리의 무감각, 무신경한 태도를 생각해보면 마냥 연결짓지 않을 수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 감시는 어느 날 갑자기 계엄령처럼 선포되는 게 아니라, "이 정도는 괜찮겠지"라는 사소한 용인들이 쌓여 일상이 될 뿐일지도 모르니 말이다.




* 이 책은 생각의힘(@tp.book)으로부터 제공받았습니다. 이 글은 보내주신 책을 탐독 후 주관적으로 작성된 서평입니다.


#슈타지랜드 #애나펀더 #생각의힘 #북스타그램 #서평단

비밀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