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호, 이기호, 이기호
그래 빚쯤이야. 그거쯤이야. 살아 있는 동안은 어찌저찌해서 잘 해결되지 않겠어. 이제는 이런 마음이 든다. 한동안은 빚이라는(이왕이면 같은 발음인 빛이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했지만) 그 한 음절의 말이 나의 내부와 외부를 잠식했다. 대체 이게 뭔가. 도대체 어쩌자고 이런 일이 생겨버린 건가. 절대로 무슨 일이 있어도(이제는 이런 말도 함부로 쓰면 안 된다는 걸 안다) 빚은 지지 말자 다짐하면서 살았는데.
이기호의 신작 단편 소설집 『예술원에 드리는 보고』는 말 그대로 소설집인데 자꾸 소설가 이기호는 소설 속 인물인 이기호로 침투해서 나를 헷갈리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나는 『예술원에 드리는 보고』를 작가가 지면으로 들려주는 근황 보고로 읽어 버렸다. 자주 한동안 침울하고 함께 억울해 했다. 그래요. 작가 님. 사는 게 내 맘대로 내 뜻대로 되지 않더라구여.(귀여운 척 하는 거 아니고 종결 어미를 여라고 쓰면 제 자신이 조금 유머러스하게 느껴져서 그래여. 그러면 작금의 상황이 가볍게 느껴져여)
대놓고 소설 곳곳에 주인공의 이름을 이기호라고 하면 어쩌자는 겁니까. 그러니 오해든 이해든 오독이든 제 마음대로 『예술원에 드리는 보고』를 읽어 나갔습니다.
첫 번째로 실린 소설 「마음은 언제 휘어지는가-반감기」에서 나는 이미 실신했다. 옛 제자에게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 전화 폭탄 테러를 당하는 교수 이기호. 연로하신 아버지가 그의 명의로 땅을 샀다가 사기를 당해서 사억이 넘는 빚을(사억이 넘는 빛이라고 쓰면 얼마나 좋았을까) 갚아 나가는 생활인 이기호. 그런 이기호 때문에 내 빚은 귀엽게 느껴졌다.(작가 님. 죄송해여. 남의 불행을 보면서 나의 불행을 별거 아닌 걸로 여기는 이기적인 현대인 여기 한 명 추가여. 정신승리든 행복 회로를 돌리든 제 마음대로 할 거예여. 일단 망해버린 제 생활을 복구해야 되잖아여)
제목 그대로 나와 당신들의 마음은 언제 휘어지는가. 별 뜻 없이 던졌던 말 한마디 의미 없이 보냈던 문자 하나에도 그렇게 이상하게 마음이 휘어진다. 이기호의 제자 성우정은 문학이 소설이 어떤 감정으로 쓰이고 대해야 하는지 질문하는 자다. 그런 애에게 선생 이기호는 자신만 재미 있는 농담을 한다. 아니 너 잘 되라고 위로로 가장한 농담을. 휘어진다, 우정의 마음은. 이기호의 전화번호를 노출해 놓고 너의 마음도 휘어지길 바란다는 마음.
두 번째에 실린 소설 「젊은 유령은 어떻게 말하는가」는 더 가관이다. K군에 위치한 서점에서 북토크를 하게 된 소설가 겸 교수 이기호. 한 시간 넘게 간 곳에서 마주한 독자는 다섯 명. 나중에야 알지만 그중에 한 명은 유령이다. 또 나중에야 밝혀지지만 그 유령의 정체는. 여기까지. 궁금하면 꼭 책 읽어보기. 지방에서 교수를 하며 소설을 쓰는 일. 생계를 유지하고(빚도 갚아야 하고) 인성이 쓰레기 되지 않기 위해 다독이면서 살아가는 일. 젊은 유령은 그런 이기호에게 조언 내지는 충고를 해줄 수 있을까.
코로나라는 역병, 을 기억하는가. 많이 이상하고 기이하던 시절. 사람들 간의 접촉을 최대한 피하고 얇은 마스크 한 장이 나를 지켜주리라 믿어야 했던 시절. 「중족골은 어디인가」는 코로나 시절을 지나는 교수 이기호의 병원 생활기를 그린다. 뜬금없이 롱보드라는 덕통사고를 당한 뒤 진짜 사고를 당한 교수 이기호. 롱보드 영상에 몰입하다가 쿠팡에서 롱보드를 구매해서 롱보드 위에 타자마자 우리 몸에 그런 곳이 있었어 존재도 몰랐던 중족골을 다친다.
병원에서 진짜 감금 생활을 하는(코로나 시절이니까. 코호트 격리를 당해버린다) 불쌍한 주인공 이기호는 그곳에서 매일 새벽에 외출을 하는 환자 홍성곤 씨를 만난다. 그의 정체 역시 소설 말미에 드러난다. 『예술원에 드리는 보고』에 실린 소설들은 정의란 무엇인가를 비틀어 묻는다. 당신은 당신 안에 정의라는 이제는 사어가 되어버린 단어를 가지고 있는가. 무엇이 옳고 그른지 당신 만의 언어로 말할 수 있는가.
대망의 이 소설집의 표제작이기도 한 소설 「예술원에 드리는 보고」가 나온다. 이게 리뷰야 자기 연민 가득한 넋두리야 생각하면서 읽느라 지루했죠? 궁금한 건 『예술원에 드리는 보고』의 해설일 텐데. 근데 그건 많이 배우신 평론가들이 써 주실 거라니까여.
소설 한 편이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예술원에 드리는 보고」는 세상을 바꿀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얄팍한 기대를 가지고 썼다기 보다 더럽고 억울해서 그럴듯한 보고서 형식을 가져와 소설로 써 재꼈다고 보는 게 좋겠다. 얼마나 억울했으면. 예술원이라는 단체의 횡포와 만행을 세상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은데 어쩌면 좋냐 골몰의 끝에 나능 소설가니까 소설로 쓴다의 기세로 쓰였다, 「예술원에 드리는 보고」는.
기준이 뭐냐. 대체. 예술원에 회원으로 뽑히는. 임기는 종신. 한 번 뽑히면 개꿀 빨 수 있는 그곳 예술원은. 회원에게는 죽을 때까지 정액 수당 180만 원이 나온다고. 우리나라가 돈이 없는 게 아니라 나라 안에 도둑들이 너무 많다는 대선 때마다 허무맹랑한 공약을 걸고 나오는 그분의 말씀이 들어맞는 순간이 자주 찾아온다. 소설이지만 소설로 읽히지 않길 바라는 마음이 그득그득한 소설집, 『예술원에 드리는 보고』.
'아주 가끔 정직하고, 대부분은 끔찍'한 작가는 유령을 보고 중족골이 부러지고 경찰서에 고소장을 제출하러 가기도 한다. 생활이 그렇다. 치사하고 억울하고 슬프다. 매달 상환일을 겸허히 받아들이면서 살아간다. 세상이 나를 억까하면 억까하는 대로 내버려두고 차 안에서 소설을 쓰고 상대가 한심하기 짝이 없지만 차마 면전에서 티를 내지 않는 사회인의 얼굴을 하면서 모멸을 참는다.
문학을 하겠다고 까불다가 생활에 매몰된 채 시간을 갖다 버리면서 살았다. 휘어진 마음을 펴지는 못하고 그 마음은 꼬여갔다. 이제는 좋은 것에 좋다고 먼저 말하지 않게 되었다. 약점을 찾고 조롱하는 나 자신을 쿨하다고 여긴다. 어쩌다 이렇게 되어 버렸을까는 생각하지 않는다. 나를 탓하고 나를 혼내지 않는다. 실패하고 슬퍼하고 한동안 누워 있어도 괜찮다고 응원한다.
엉망이 되어 가지만 그건 내 마음이 그런 거고. 세상은 엉망이 되는 걸 지연해야 한다. 『예술원에 드리는 보고』는 그런 마음으로 쓰였다. 너무 거창한 거 아니냐고? 그러면 안 돼? 소설로 뭘 할 수 있는데라는 무식한 질문에 소설가 이기호는 이렇게 답한 거라니까. 오랫동안 열혈 숨은 독자로 살아온 내가 그렇다면 그런겁니다요. 『예술원에 드리는 보고』를 보고 말씀하셔요들.